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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이강백
● 줄거리
청계산 자락 후미진 산골마을에 늙은 홀아비와 일곱 명의 아들이 밭을 갈며 살아가고 있다. 인색한 절대 권력자 아버지, 어머니처럼 자상한 장남, 천식을 앓는 병약한 막내,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혹사당함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다섯 자식들이 불편한 관계 속에서 어렵사리 생을 영위하고 있다.
아지랑이 가물거리는 나른한 봄날이다. 막이 열리면 형제들은 구렁이를 때려잡자는 둥, 닭이나 한 마리 잡아먹자는 둥 옥신각신 소란을 피운다. 멀리 백운사가 있는 청계산에서는 산불이 나 며칠째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다.
칠형제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항아리에 돈을 담아 구들장 속에 감춰버리는 인색한 아버지를 원망한다. 장남은 불평불만이 끊이질 않는 동생들을 위로하며 어머니처럼 보살핀다. 더불어 천식으로 건강이 약한 막내를 극진히 간호한다.
겨울동안 눈이 안 녹아 식량이 떨어진데다, 설상가상 산불까지 덮치자, 백운사 스님들은 칠형제의 집으로 찾아와 시주를 요구한다. 아버지로부터 혼날 것을 염려하여 시주도 못하는 형제들에게, 오고 갈 곳 없는 동녀를 맡기고 떠나버린다. 이리하여 스님들이 거둬 길렀던 동녀는 형제들과 함께 살게 된다.
장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힘없이 축축 쳐지는 것은 뱃속에 회충이 있기 때문이라며, 배고파하는 아들들에게 회충약만 먹여 일을 내보낸다. 아들들은 허기 때문에 세상이 다 노랗게 보인다며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자식들의 불평과 반기가 곧 폭발할 기세지만 그때마다 장남이 동생들을 잘 다독거린다.
아버지는 무당에게 엿들은 풍월로 젊은 여인을 안고 자면 몸이 젊어진다는 말을 믿고 동녀를 방으로 들인다. 늙은 홀아비는 젊어지기 위하여 이 동녀를 품고 자는 것이다. 동녀를 사모하는 막내는 피를 토하며 애통해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아버지는 무당에게 젊어지는 비결을 알아오겠다며 장남을 데리고 길을 떠난다. 아들들은 자기들의 집에 사는 구렁이를 때려잡자고 하지만 번번이 말로만 그친다. 아버지가 외출한 사이 동녀를 방에서 끌어내어 심하게 놀린다. 막내는 동녀를 위로해주고 두 사람은 연정을 느낀다. 장남은 무당에게 다녀오는 길에 아버지를 설득해서 동생들에게 땅을 나눠줄 것을 약속받는다.
한편 아버지와 장남이 없는 집에서는 참다못한 동생들의 역모(?)가 꾸며진다. 회춘에 좋다는 구렁이 삶은 물과 주름살을 펴는데 쓰는 송진을 준비한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에게 아들들은 아버지를 속인다. 구렁이 삶은 물을 마시게 하고 주름살을 펴는데 효과적이라며 송진을 눈두덩까지 바른다. 아버지가 송진을 바르고 눈을 못 뜨는 사이에 아들들은 구들장을 뜯어내고 항아리 속의 돈을 훔쳐 나누어 도망쳐 버린다.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집에 남겨진 동녀는 막내의 아내가 되어 아기를 가졌다. 막내는 입덧하는 동녀를 위해 ‘신 것’을 구하기 위해 들에 나갔다. 장남은 변함없이 아버지를 모시고 산다. 아버지는 떠나간 자식들을 그리워하며 허망한 탐욕에 사로잡혔던 지난날을 탄식한다. 집나간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잘 지내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온다. 차남부터 차례차례 편지를 낭독하며 막이 내린다.
● 핵심정리
▶주제 : 인간의 삶의 과정에서 빚어지는 화해와 갈등
▶특징 :
① 이중 구조로 되어 있음
② 장면 사이에 봄에 대한 다른 장르의 작품을 삽입하는 구조의 결합
③ 인생의 흐름을 (자연사)의 흐름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음
▶‘봄날’의 상징적 의미 : 늙음과 죽음, 죽음과 생명, 겨울과 봄이 빚어나갈 갈등과 화해
● 등장 인물
▶아버지 : 젊음에의 동경과 토지에 대한 집착으로 자식들을 혹사시키는 절대 권력자
▶장남 : 사랑하는 여인마저 저버린 채 아버지의 시중과 여섯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보람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어머니 같은 아들.
▶형제들 : 시장기와 고된 농사일을 감당하기 어려워 숨겨둔 아버지의 돈 항아리를 탈취하여 각자 제 살길을 찾아 떠나는 혈기왕성한 다섯 형제,
▶막내 : 동녀(童女)를 그리워하며 가슴앓이로 피를 토하는 순진한 막내. 결말에 동녀와 부부가 된다.
▶동녀(童女) : 스님들의 지고(至高)한 가르침을 받아 어떠한 고난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모든 중생을 사랑하는 가녀린 동녀(童女).
● 이해와 감상
이 희곡의 형식은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극동아시아, 시베리아, 우랄산맥 너머까지 퍼져있는 ‘동녀풍속(童女風俗)’을 중심으로 엮어가는 줄거리이고, 다른 하나는 줄거리의 장면과 장면 사이에 봄에 대한 노래, 그림, 영화, 연주, 시조, 신문, 약전, 편지 등을 삽입시킨 서사구조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구조적으로 결합되어 희극과 비극의 드라마트루기(드라마의 구성)를 수축 이완하며 넘나든다. 이러한 이중구조는 ‘동녀풍속’의 설화적인 세계를 현재의 시공간 속으로 들어오게 하는 현재성을 갖게 한다. 또한 시나 노래, 연주 등을 각 장면들 속에서 유기적으로 연결함으로써 봄날의 이미지를 분명하게 떠올리고 나아가 봄날의 이미지를 현재진행형으로 바로 느낄 수 있게 하고 있다.
「봄날」의 등장 인물들은 인간이 거쳐야하는 과정들, 유년기와 청년기와 노년기를 원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절대 권력자로서의 아버지, 어머니처럼 자상한 장남, 천식을 앓는 병약한 막내,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혹사당함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다섯 명의 자식들이 불평한 관계 속에서 어렵사리 생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을 간신히 견뎌낸 늙은 아비는 어린 동녀(童女)를 품에 안고 잔다. 동녀로부터 더운 기운을 옮겨 받아 회춘하고자 하는 인간 욕망이다. 혈기왕성한 젊은 자식들은 훨훨 타오르는 산불을 바라보며 봄밤을 지새운다. 쫓겨난 어미 대신 자식들을 길러낸 장남은 헌신적인 모성애로써 아비와 자식의 갈등을 감싼다. 꽃가루 날리는 봄철이면 천식을 앓는 병약한 막내는 피를 토하며 동녀를 그리워한다.
이렇듯 「봄날」은 늙음과 젊음, 죽음과 생명, 겨울과 봄이 빚어나갈 갈등과 화해를 전10장의 장면에 그려놓은 작품이다. 등장 인물과 계절의 흐름(봄날의 상징성)을 절묘하게 결합하여 세대간의 갈등과 대립을 표현하고 있는데, 다른 계절에 비해 대립과 조화가 두드러진 봄날의 이미지를 배경으로 따뜻한 삶을 조명한다. 부성(父性)과 모성(母性), 아비와 자식, 노년과 젊음, 소유와 박탈 사이의 갈등과 화해를 설화적 요소를 가미해 이강백 작가 특유의 상징과 은유로 풀어내고 있다.
● 더 알아보기
작가의 말 : 「봄날」과 삶의 과정들
「봄날」은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거쳐 가는 과정들, 즉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무대 위에 표현해 보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등장인물들 역시 노년기의 아버지, 장년기의 장남, 청년기의 자식들, 소년기의 막내와 동녀(童女)로 구성하였다. 그러한 인간의 삶의 과정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갈등과 대립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노년기와 소년기의 갈등은 마치 겨울과 봄 같다고 할 수 있다. 겨울이 모든 소유물을 상실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인색한 모습이라면 봄은 그 정반대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차지하고 싶어 안달하는 조급한 모습이다.
「봄날」을 쓰면서 고심했던 것은 가급적 갈등과 대립을 눈에 띄지 않게 눌러 두는 일이었다. 아지랑이처럼, 엷은 봄 안개처럼, 꽃가루 때문에 천식을 앓는 것처럼, 그렇게 속으로만 감춰지도록 하고 싶었다. 그리고 밖으로 드러나는 한 막내 어린 동녀를 통해서, 오히려 그 갈등은 모성애적(母性愛的)인 장남이라든가 병약 대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전 과정을 아름답고 따뜻하게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긍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장남이 늙은 아버지를 등에 업고 꽃이 활짝 핀 갈마재 고개에서 훌쩍훌쩍 뛰는 장면이라든가, 막내와 동녀가 마당에서 주고받는 대사들은 그러한 인간에 대한 긍정을 아름답게 묘사해 보고자 애쓴 흔적들이다.
인간의 삶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계절의 특징을 빌렸던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같다. 선사시대의 동굴 벽화에서, 혹은 옛날의 신화(神話)에서 계절의 특징이나 상징이 풍부하게 나타나 있는 것을 흔히 본다. 또 최근의 시(詩)라든가 노래에도 그러한 예가 흔히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봄’은 가장 많이 쓰여지고 있는데, 그것은 봄이 갖고 있는 대립과 조화의 기능이 다른 계절에 비하여 월등히 두드러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봄날」은 시, 소설, 음악, 영화, 그림 등 온갖 예술 분야가 표현한 봄의 이미지들을 대폭적으로 도입해 보았다. 만약 그러한 시도가 연극형식의 폭을 넓히는데 작은 도움이 되고, 관객들에게도 새롭게 받아들여진다면 나에게는 다시없는 기쁨이 될 것이다.
「봄날」은 권오일 선생님의 격려가 없었던들 쓰지 못했던 작품이다. 작품의 구상 때부터 탈고까지, 그리고 고쳐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봄날」의 공연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성좌’의 배우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그 어느 해 여름보다 무더웠던 금년 여름에 「봄날」을 연습하면서 땀을 흘린 그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공연 포스터 한 장을 붙이기에도 어려운 연극 환경에서, 희곡을 쓰는 사람의 노고가 가장 적은 것 같아 언제나 부끄러움을 느낀다.
[작품 읽기]
차남 : 아, 그럼 됐어요! (자식들에게) 아버지 눈이 안 떠진단다! 곡괭이를 들고 가서, 아버지 방 밑 항아리들을 파내라!
자식들 : (준비해 두었던 곡괭이를 들고 아버지 방으로 몰려가 파묻힌 항아리들을 파낸다.)
아버지 : (허공을 더듬으며 고함을 지른다.) 이놈들이 나를 속였구나! 내 눈이 안 보여!
자식들 : (항아리를 파내 마당으로 나와서 자루에 돈을 담으며) 돈을 봐! 이 돈을 봐!
아버지 : 이놈들아, 내 돈이다! 내 돈 내놔라!
자식들 : (돈자루를 들고서 문밖으로 나간다.)
차남 : (장남에게) 형님에겐 미안해.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조금씩만 나눠줬어도 이런 일은 안 당할 텐데…… 우린 이 돈을 갖고 각자 갈 길을 가기로 했어.
아버지 : (허공에 두 손을 내저으며) 내 돈, 내 돈, 내 돈 내놔라! 내 눈, 내 눈이 안 보여!
차남 : 아버지 눈은 더운 물로 씻어 드려. 그럼 송진이 녹아서 눈을 뜰 수 있으니깐. 형님 잘 있어. (툇마루에 망연히 앉아 있는 막내에게) 막내야, 너도 몸 조심하고 잘 있어. 아참, 아버지 방에 들어가 보렴. 너 좋아하는 그 계집애, 무서워 떨고 있더라.
▶자식들이 아버지를 속이고 돈을 가져감
(무대 전면. 자식들이 봄날의 신문을 각자 펴들고 있다.)
차남 : (관객들에게 말한다.) 봄날에 신문을 읽노라면, 가출한 사람들을 찾는 광고 기사가 부쩍 늘어난다는 걸 알게 되지요. 모든 신문마다 이렇게, 사람 찾는 기사로 가득 차 있거든요. (기사를 읽는다.) 김찬식. 강원도 홍천에서 살다가 가출한 뒤 소식이 없음.
삼남 : 박범구. 충청도 예산에서 살다가 올 봄에 가출하였음.
사남 : 이만기. 특징, 얼굴에 사마귀가 있음. 경기도 여주에서 살다가 가출한 뒤 소식을 모름.
오남 : 조국진. 전라도 남원에서 가출한 뒤 행방을 모름.
육남 : 최용남. 경상도 김해에서 살다가 올 봄에 가출한 뒤 돌아오지 않음.
차남 : 모든 일을 용서하겠음.
자식들 : 모든 일을 용서하겠음.
차남 : 속히 돌아오기를 요망(要望)함.
자식들 : 속히 돌아오기를 요망함.
차남 : 아버지.
자식들 : 아버지.
차남 : (신문을 내려놓으며) 아버지가 가출한 자식들을 찾고 있군.
자식들 : (신문을 내려놓으며) 아버지가 가출한 자식들을 찾고 있군.
<중략> ▶자식들이 봄날에 신문을 읽음
(무대 전면. 자식들이 편지를 읽는다.)
차남 : 아버님 전상서.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렀습니다. 아버님 옥체(玉體) 금안하시고, 어머니 같던 큰 형님, 언제나 몸이 약했던 막내 동생도 잘 있는지요? 봄도 몇 번이나 바뀌어서 이젠 고향에서 보낸 그 봄날이 아스라이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 봄날에, 저희 자식들은 왜 그렇게 조급했었는지, 아버지는 왜 그렇게 인색하셨는지, `꼭 꿈을 꾸고 난 것만 같습니다. 그동안 저는 아버님의 항아리 돈으로 기반을 닦아 이젠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결혼도 해서 슬하(膝下)에 자식을 다섯이나 두었습니다. 언젠가 꽃피는 봄이 오면 자식들과 더불어 아버님을 뵈러 가겠습니다.
삼남 : 이하 동문 / 사남 : 이하 동문
오남 : 이하 동문 / 육남 : 이하 동문
차남 : 고향집을 떠난 사람이면 그 누구나 이런 편지를 써서 보내고 싶어하지요. 하지만 마음 속의 생각일 뿐, 한번도 보내지는 못했습니다. 지금 읽어 드린 편지는, 내가 보내지 못했던 편지, 그 편지의 내용이었습니다. ▶ 부치지 못한 자식들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