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공업도시 후보지로 결정된 지역 명칭을 ‘반월’이라고 한 것은 특별한 유례가 있어서는 아니다. 이 지역의 행정구역은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과 수암면이 70.7%였고, 화성군 반월면은 불과 29.3%에 지나지 않았다. 또 신공업도시 중심에서 반월면사무소 소재지까지는 약 8km나 떨어져 있었다.
신도시의 이름을 ‘군자’ 혹은 ‘수암’이라 했을 때 서울과 너무 인접해 있다는 인상을 줄 것 같아 남쪽에 있는 ‘반월’로 부르게 된 것이다. 또한 이 지역은 1960년대의 1~2차 5개년개발계획 때 유망한 공업단지 후보지로 구상된 바 있었는데 그 당시 명칭이 반월 지구로 통해 왔다는 것 역시 하나의 이유라 할 수 있다. 당시 ‘반월’이라고 부른 것은 지명을 붙인 것이 아니라 사업 명칭이었다.
사진3-6 안산시의 개청.
1986년 1월 1일 안산시로 승격함과 아울러 1월 6일 안산시청 현판식을 가졌다.
1976년부터 ‘반월’이라 부르기 시작한 이 지역은 1986년 1월 1일 안산시로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까지 약 10년간 통용되어 왔다. 그리하여 반월신공업도시 개발 과정에서 1977년 1월에 경기도에서는 시흥군과 화성군의 일부가 개발지역에 포함되었으므로 여기서 파생되는 행정 처리를 위해 도출장소 격인 반월지원사무소를 설치하게 되었다(후에 경기도 반월지구출장소로 개칭됨).
일반적으로 지명을 명명하는 데는 여러 가지 원칙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것이 고지명을 참고하는 것이라 하겠다. 반월신공업도시 개발 지역에 편입된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과 군자면 일부, 그리고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의 고지명은 안산이었다.
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동쪽으로 과천현 경계까지 5리, 남쪽으로 남양부 경계까지 35리, 서쪽으로 인천부 경계까지 11리, 북쪽으로 금천현 경계까지 14리이며, 서울까지는 51리이다.” 라고 되어 있다(김의원, 1990). 한편 건치연혁(建置沿革)을 보면 “본래 고구려의 장항구현(獐項口縣)이다.
신라 경덕왕이 장구군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지금 이름 안산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충렬왕(忠烈王) 34년에 문종(文宗)이 탄생한 곳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시켰는데 조선에서 그대로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후 1914년 3월,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산군이 시흥·과천과 함께 시흥군에 편입될 때까지 이 지역은 ‘안산’이란 지명으로 일관해 왔다.그러던 중 유천형(柳天馨)·이승언(李承彦) 등의 ‘안산지명찾기’ 노력의 결과로 반월출장소에서 ‘안산시’로 결정되었다.
특히 유천형(현 안산문화원장)은 안산은 고려조 덕종·정종·문종 등 왕세자가 탄생한 고장으로, 일제가 안산의 정기와 맥을 끊기 위하여 1914년 안산 지명을 의도적으로 말살하였다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의식과 해석을 인정한 정부는 극일 측면에서 왜곡된 1천 년 역사의 안산 지명을 다시 되돌려 놓았다. 김형철(편찬위원)
반월 도시개발사업 기공식. 1977년 3월 31일 관계 기관장 및 지역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장항구(獐項口)·장구(獐口)·연성(蓮城)·안산(安山). 동쪽으로 과천현(果川縣) 경계까지 3리이고, 서쪽으로 인천(仁川) 앞바다까지 11리, 남쪽으로 남양부(南陽府) 경계까지 35리, 북쪽으로 시흥현(始興縣) 경계까지 10리이다. 북쪽으로 경도(京都)까지의 거리가 57리이고, 주진관(主鎭管)은 남양부(南陽府)에 있다. 본래 고구려의 장항구현(獐項口縣)이었으나,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장구군(獐口郡)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한 후 감무(監務)를 두었고, 충렬왕(忠烈王) 34년에 문종(文宗)이 탄생한 곳이라 하여 군(郡)으로 승격시켰으며 본조(本朝)에서도 이를 따랐다.
면명호총(面名戶摠)
6면(面)으로 동서의 길이가 30리이고, 남북의 길이가 20리이며, 호는 2403호이다. 군내면(郡內面):읍으로부터 남쪽으로 3리 거리이고, 호는 428호이다. 초산면(草山面):읍으로부터 서쪽으로 3리 거리이고, 호는 331호이다. 잉화면(仍火面):읍으로부터 서남쪽으로 10리 거리이고, 호는 241호이다. 마유면(馬遊面):읍으로부터 서쪽으로 20리 거리이고, 호는 422호이다. 대월면(大月面):읍으로부터 서쪽으로 25리 거리이고, 호는 175호이다. 와리면(瓦理面):읍으로부터 서쪽으로 30리 거리이고, 호는 381호이다.
군총(軍摠)
정초군(精抄軍):274명. 수원(水原) 행행(幸行)시 어가(御駕)를 수행한다. 별중사(別中司):250명. 수원(水原) 행행(幸行)시 척후복병(斥?伏兵)·전어군(傳語軍)으로 수행한다. 난후아병(?後牙兵):92명. 수원(水原) 행행(幸行)시 영주장(營主將)을 호위한다. 화서대양군(華西隊良軍):207명. 매 사람에게 포(布) 2냥(兩) 2전(Z)씩 거둔다. 노군(奴軍):248명. 매 사람에게 포 1냥 1전씩 거둔다. 훈국포보(訓局砲保):38명. 매 사람에게 포 2냥 7전씩 거둔다. 군향보(軍餉保):3명. 매 사람에게 포 2냥 7전씩 거둔다. 아사(衙舍):축좌(丑坐)에 미향(未向)이다. 창우(倉宇):15간(間)이고 외창(外倉)은 없다. 향교(鄕校):축좌(丑坐)에 미향(未向)이다. 사직단(社稷壇):읍으로부터 서쪽으로 2리 떨어진 군내면(郡內面) 장곡리(獐谷里)에 있다. 여단(?壇):읍으로부터 서쪽으로 2리 떨어진 곳에 있다.
명산(名山)
수리산(修理山):읍치(邑治)의 동쪽에 있다. 일맥(一脈)은 남쪽으로 내려와 군내면(郡內面) 노적봉(露積峰)이 되었고 성곶포(聲串浦)에 이르러 그쳤다. 다른 일맥(一脈)은 북쪽으로 뻗어 초산면(草山面) 응봉(鷹峰), 잉화면(仍火面) 마하산(麻霞山), 마유면(馬遊面) 군자봉(君子峰)이 되었고 방향을 바꾸어 와리면(瓦里面) 옛 소릉(昭陵)을 이루었으며, 성두안부원군 홍해봉(城頭安府院君 洪海峰)의 산소(山所)에 이르러 그쳤다.
대천(大川)
판천(板川):군내면(郡內面) 장곡(獐谷)에 있다. 근원은 수리산(修理山)에서 시작되어 읍치(邑治)를 싸고 흘러 성곶포(聲串浦) 앞에 이르러 그쳤다. 본천(本川):초산면(草山面) 조남리(鳥南里)에 있다. 근원은 응봉(鷹峰) 아래서부터 시작되어 관곡(官谷)에 이르러 그쳤다. 두 개의 하천은 모두 이 산 계곡 사이에서 흘러 내려온 것인데, 가물면 번번히 말라 붙어 관개(灌漑)에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 없다.
진도(津渡)
본 읍에는 원래 강이나 호수가 없지만 성곶포(聲串浦)와 원당포(元堂浦)의 두 포구가 있어서 조수(潮水)가 출입할 때 상선(商船)·어선(漁船)이 왕래한다. 거주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농사를 짓지 않고 오로지 고기잡는 것만을 일삼았다. 옥구도(玉龜島)는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백성들이 그물을 기워 고기잡는 것으로써 산업을 삼았다. 석도(石島)와 옥구도(玉龜島)에는 처음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 탄환(彈丸)만한 돌부리[石角]가 대해(大海)에 떠 있다.
영액험이(嶺?險夷)
읍치(邑治) 동쪽으로 과천현(果川縣)의 경계와 접하였고, 동남쪽으로는 광주부(廣州府)의 경계와 접하였다. 이 두 곳은 모두 계곡의 길이 좁고 꾸불꾸불하며, 위험스런 바윗돌이 험악하게 널려 있어 왕래하는 사람들이 넘어다니는 데 커다란 어려움이 있다.
제언성지(堤堰城池)
제언(堤堰) 한 곳은 대월면(大月面) 산대장(山垈場) 앞에 있는데 오취(烏嘴)라고 부른다. 한 바퀴를 도는 거리가 3리 가량 되는데, 물을 가두어 농사에 도움이 되는 것이 근 수십 석락(石落)이나 된다. 소지(小池) 한 곳은 초산면(草山面) 관곡(官谷)에 있는데, 연못 가운데에 전당연(錢塘蓮)이 있다. 이 연꽃 종자는 강희맹(姜希孟)이 사신(使臣)으로 남경(南京)에 갔을 때 전당연(錢塘蓮)을 가져와 여기에 심은 것인데, 이 때문에 읍(邑)의 이름을 연성(蓮城)이라 부르고 연못의 이름도 전당(錢塘)이라 하는 것이다. 을사(乙巳)년에 연지기(蓮直) 6명을 두고 신역(身役)1)과 연역(烟役)2)을 면제해 주었으며, 환호(還戶)3)도 역시 빼앗지 못하게 하였다.
승지고적(勝地古跡)
읍치(邑治) 서쪽 언덕에 망해정(望海亭) 옛 터가 있고, 관사(官舍) 뒤편에는 토체형(土?形)의 터가 있다. 이곳은 옛날 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이 살던 곳이다. 은행나무 세 그루 역시 김정경이 손수 심은 것이라고 부로(父老)들은 지금까지 말하고 있다. 와리면(瓦里面) 초지(草芝)에 만호(萬戶)4)가 있고, 마유면(馬遊面) 월곶(月串)에는 첨사(僉使)5)가 있었다. 이는 얼마 후 심도(沁都)로 옮겨졌다고 하는데, 그 터의 형태는 지금까지도 완연히 남아 있다. 와리면(瓦里面) 성두(城頭) 고봉(高峰) 위에 성보(城堡)의 유허(遺墟)와 옛 산성(山城) 터가 있는데, 그 연대는 상고할 수 없다.
누대정관(樓臺亭觀)
읍치(邑治) 밖에 3문루(三門樓)가 있어 평근루(平近樓)라고 부르는데, 별로 볼 만한 곳은 없다. 와리면(瓦里面) 적길리(赤吉里)의 해안에는 봉황대(鳳凰臺)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형체도 찾을 수 없다. 그 아래 사옹관사(司饔館舍)가 있는데 밴댕이(蘇魚)를 진공(進貢)하는 곳이다.
봉수(烽燧) 읍으로부터 서쪽으로 25리 떨어진 마유면(馬遊面) 정왕산(正往山)에 있다. 남쪽으로는 남양(南陽)의 해운산봉수(海雲山烽燧)와 서로 응하고, 서쪽으로는 인천(仁川)의 성산봉수(城山烽燧)와 서로 응한다.
사찰(寺刹)
정수암(淨秀菴)은 읍치(邑治) 뒤쪽으로 있지만 별로 볼 만한 것이 없다. 원당사(元堂寺)는 읍치(邑治) 동쪽 수리산(修理山) 밑에 있다. 절 뒤편에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우단(雩壇)이 있다. 절 정원에 있는 조그만 탑에는 ‘천희원년(天禧元年)’이라는 네 글자가 있어 이 절이 삼한(三韓)의 고사(古寺)임을 알 수 있다. 고봉(高峰)이 뒤쪽에 우뚝 서 있고 대해(大海)가 멀리 임(臨)해 있어 풍류시인[騷人]과 묵객(墨客)들이 족히 한때 유람할 만한 곳이다.
장시(場市)
초산면(草山面)에 광석장시(廣石場市)가 있었으며 읍으로부터 서쪽으로 10리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이 장시(場市)는 거래되는 물화(物貨)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저절로 없어졌다. 대월면(大月面)에 산대장시(山垈場市)가 있으며 읍으로부터 서남쪽으로 20리 거리에 있다. 이 시장은 장소가 구석진 곳에 있어 특별히 유통되는 물화(物貨)는 없고 다만 토산품만 교역(交易)되다가 한낮이 되면 곧 파(罷)하였으니, 가히 바닷가 구석진 곳의 순박한 풍속을 볼 수 있다.
점막(店幕)
초산면(草山面) 광석리(廣石里)에 점막(店幕)이 있으며 잉화면(仍火面) 월입피(月入陂)에도 역시 점막이 있는데, 모두 읍으로부터 10리 정도 떨어져 있다. 바닷가 구석진 좁은 길에는 지나는 사람이 드물고 봄과 가을 사이에 간혹 소금장수들이 왕래하기도 하지만, 장사만으로 족히 생활한다고 할 수는 없다.
진공(進貢)
약쑥[藥艾]·해전(蟹錢)·밴댕이[蘇魚]. 어부 75명이 선혜청(宣惠廳)6)으로부터 대가를 받고 결전(結箭)으로 고기를 잡는다. 사옹원(司饔院)7)에서는 오로지 진공(進貢)을 관장하는데 장빙미(藏氷米)8)는 인천(仁川)이 30석(石), 부평(富平)이 16석, 남양(南陽)이 24석, 시흥(始興)이 10석 10두(斗)씩이고, 결전미(結箭米)는 82석 10두이다.
윤엄(尹儼):관직은 좌랑(佐郞)이었고, 호는 송암(松巖)이다. 윤민헌(尹民獻):윤엄의 아들로 관직이 참의(參議)에 이르렀고, 호는 태비(苔扉)이다. 윤강(尹絳):윤민헌의 아들로 관직이 판서(判書)에 이르렀고, 호는 무곡(無谷)이다. 윤지선(尹趾善):윤강의 아들로 관직이 좌상(左相)에 이르렀고, 호는 두포(杜浦)이다. 윤지완(尹趾完):윤지선의 동생으로 관직이 우상(右相)에 이르렀고, 호는 동산(東山)이다.
묘소(墓所)
진안위(晉安尉) 유적(柳Z)의 묘:군(郡)의 남쪽 8리 떨어진 군내면(郡內面) 정자동(亭子洞)에 있다. 금양위(錦陽尉) 박미(朴?)의 묘:군(郡)의 서쪽 20리 떨어진 마유면(馬遊面) 산북리(山北里)에 있다.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 찬성(贊成) 박필주(朴弼株)의 묘:위의 묘소와 같은 곳에 있다.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묘:군(郡)의 북쪽 4리 떨어진 초산면(草山面) 제청리(祭廳里)에 있다.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묘:군(郡)의 서쪽 30리 떨어진 대월면(大月面) 거모포(去毛浦)에 있다.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의 묘:군(郡)의 서쪽 10리 떨어진 잉화면(仍火面) 전곡(前谷)에 있다. 찬성(贊成) 이계손(李繼孫)의 묘:군(郡)의 남쪽 10리 떨어진 군내면(郡內面) 점성(占星)에 있다. 판서(判書) 윤강(尹絳)의 묘:위의 묘소와 같은 곳에 있다. 판서(判書) 조관빈(趙觀彬)의 묘:군(郡)의 서쪽 4리 떨어진 초산면(草山面) 용당곡(龍堂谷)에 있다. 판서(判書) 이숭호(李崇祜)의 묘:군(郡)의 서쪽 4리 떨어진 초산면(草山面) 궤화곡(櫃火谷)에 있다. 우의정(右議政) 윤지완(尹趾完)의 묘:군(郡)의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와리면(瓦里面) 칠목동(漆木洞)에 있다. 증영의정(贈領議政) 안탄대(安坦大)의 묘:군(郡)의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와리면(瓦里面) 이목동(梨木洞)에 있다.
충효열(忠孝烈)
충신(忠臣) 권이길(權뚜):안동(安東) 권씨로 인조(仁廟)조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 평양판관(平壤判官)으로서 보통문(普通門)에서 순절(殉節)하였다. 통정대부병조참의(通政大夫兵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관(官)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고 숙종(肅廟)조 신유(辛酉)년에 명하여 정려(旌閭)하였다. 충신 김문기(金文起):김해(金海) 김씨로 호는 백촌(白村)이다. 관직이 이조판서(吏判)에 이르렀고,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순절(殉節)하였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의공(忠毅公)이다. 현손(玄孫)에 이르기까지 5명이 정려(旌閭)되었으며 잉화면(仍火面) 광곡(廣谷)에 있다. 신미(辛未)년에 명하여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다.
충신 김현석(金玄錫):김문기(金文起)의 아들로 호는 마암(馬巖)이다. 관직이 현감(縣監)에 이르렀으며, 그 아버지와 더불어 같은 날에 순절하였다. 효자(孝子) 김충주(金忠柱):김문기의 손자로 호는 탄옹(炭翁)이다. 동몽교관(童夢敎官)에 추증되었다. 안산(安山)의 마하산(麻霞山) 산중에 숨어 살았으며 망월암(望越巖) 고송정(枯松亭)에서 채미시(採薇詩)를 지었다. 효자 김경남(金景南):김문기의 증손(曾孫)으로 호는 한천(寒泉)이다. 버섯이 언덕에 나면 이를 그 아버지에게 공양하였다.
효자 김약전(金約前):김문기의 현손(玄孫)으로 호는 성지당(姓支堂)이다. 어버이의 등창[疽]을 입으로 빨아 114세의 수를 누리게 하였다. 임진란(壬辰亂) 때에는 늙은 어버이를 부축하여 보호하니 왜놈도 역시 그 효성에 감동하였고 문자로써 서로 말을 통하였다. 그가 살던 계곡이라 하여 성지곡(姓支谷)이라 이름하였다. 효자 이상기(李相?):완산(完山) 이씨(李氏)이다. 이조참의(吏曹?議)에 추증되었고 관직이 행남대지평(行南臺持平)에 이르렀다. 그 아버지가 병이 나자 똥을 맛보았고 하늘에 기도하였으며 종신토록 효성이 지극하였다. 숙종(肅廟)조 계해(癸亥)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을 하였다.
효자 김계창(金啓昌):언양(彦陽) 김씨이다. 그 아버지가 병이 나자 똥을 맛보았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하였다. 초상을 당해서는 그 묘소에 배례(拜禮)하기를 성(誠)과 예(禮)로 하였다. 순조(純祖)조 임오(壬午)년에 명하여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다. 효자 김정훈(金鼎勳):연성(蓮城) 김씨이다. 그 아버지가 병이 나자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구하였으며, 똥을 맛보아 그 수(壽)을 알아보았다. 저녁에는 아버지의 잠자리를 정하고 새벽에는 그 안부를 살펴보는 것을 폐하지 않았으며, 약을 드리는 데에 정성을 다하였다. 복호(復戶)하여 50부(負)를 지급하였는데 연조(年條)는 자세하지 않다.
효자 김달명(金達命):의성(義城) 김씨로서 사재문목공(思齋文穆公) 김정국(金正國)의 9세손인 헌납(獻納) 김한로(金漢老)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을 타고나 어머니 강씨(姜氏)가 병이 나자 똥을 맛보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었다. 강씨가 물고기를 먹고 싶어하자 추운 때를 당하여 그 처인 조씨(趙氏)와 함께 울부짖으며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러자 담비와 개가 물고기를 물어 오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상복을 벗지 않고 죽만 먹었으며 날마다 묘를 살피면서 애통하게 우니, 그 무릎을 꿇었던 자리에는 잔디가 모두 말라 죽었다. 정조(正廟)가 승하하던 날, 나이가 70세인 데도 그 처와 더불어 3년을 소식(素食)하였다. 철종조(哲宗朝) 임자(壬子)년에 선비들의 논의가 일제히 일어나 그 충성스런 행동을 포상하기를 청하였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었다.
효자 김동려(金東礪)·동은(東殷) 형제 행적:나라에 효자를 표창하는 법이 있는 것은 단지 효자만을 홀로 위한 것이 아니라 불효자를 권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어째서 그러한가. 효라고 하는 것은 비록 순(舜)임금이나 증자(曾子)라 하더라도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니, 진실로 명백하게 드러내는 것을 일삼음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효도를 능히 한 사람은 적고 능히 하지 못한 사람은 많으니,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도를 얻으면 그 퇴폐한 풍속에서 조금이라도 해이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마땅히 남이 모르고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부터 먼저 표창해야 할 것이다. 안산(安山) 서쪽에 효자 김동려(金東礪)·동은(東殷) 형제가 있으니 대개 궁벽한 시골 사람이다. 어찌 더욱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려(東礪)는 어려서부터 이미 황향(黃香) 9)의 효행(孝行)이 있었다. 장성하 여서는 힘써 농사를 지어 어버이를 봉양하였으므로 몸에 편하고 입에 맞는 것을 갖추지 않음이 없었다. 병이 나니 북극성[北辰]에 기도하고 손가락의 피를 드리니 목숨이 열흘간 연장되었다. 돌아가신즉 시신을 목욕시키면서 시수(尸水)를 핥고 삼켰다. 염장(殮葬)을 함에 있어서는 가력(家力)을 다 기울였고, 동생 동은(東殷)과 더불어 상제(喪制)를 지키기를 매우 엄격히 하였다. 술과 고기를 일체 입에 대지 않았으며 묘 앞에 여막(廬幕)을 짓고 비와 눈을 피하지 않으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울부짖으니, 끝내는 몸이 쇠척해져 어머니 상기(喪期)를 1년도 채 못 마치고 죽었다. 이에 비통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동은(東殷)은 반드시 매일 저녁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새벽에는 안부를 살폈다[定省]. 어머니에게 종기가 나면 입으로 고름을 빨아 드렸고 눈에 병이 생기면 눈꼽을 핥았다. 어머니가 죽은 뒤에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여 그 예를 행하는 데 있어서 하나같이 형이 하는 것과 똑같이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하늘로부터 난 성품이며 진실로 이른바 난형난제(難兄難弟)라 할 것이다.
또 흉년이 들면 형제가 미곡을 내어 족척(族戚)과 이웃[隣保]을 구제하였으니 이것도 역시 효성을 미루어 나타낸 것이다. 석류(錫類)10)의 이치가 과연 어긋나지 않아서 동은의 아들 광의(光儀)도 역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고 똥을 맛보았으며 하늘에 기도하고 여묘(廬墓)살이를 하여 부모에게 욕됨이 없게 하였으니, 한 가문에 3명의 효자가 나온 것이 어찌 기울어 가는 세속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동려(東礪)가 살아 있을 때부터 사람들의 공의(公議)가 일제히 일어나고 유자(儒者)들과 향당(鄕黨)의 장첩(狀牒)이 쌓여 책을 이루어 정문(旌門)을 세우고 표창할 것을 기대하였는데, 다만 이를 위에 올려서 알릴 방도가 없는 까닭에 장차 묻혀서 없어지려 한즉, 이에 사람들이 마을에다 여(礪)를 지어 표창할 원대한 계책을 세웠으니, 여기서 우리 군(郡) 인사들의 효를 넓히고자 하는 뜻이 지극하다 하겠다.
이 여를 지나는 사람들이 반드시 공경하여 말하기를 “동려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탁행(卓行)이 능히 사람을 감동시키는가. 이름이 장차 이 여와 더불어 계속될 것이다. 우리 무리들도 또한 사람인지라 어찌 문득 우리도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하고서 다투어 서로 본받을 것을 사모하고 각자 스스로 면려(勉勵)하여 모든 사람들이 순(舜)임금과 증자(曾子)가 되면 이 여가 풍속을 교화시키는 것이 어찌 적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을 주장한 것이 누군가 하면 사인(士人) 김정진(金定鎭)과 김달영(金達永)이다. 내가 한 지방의 풍속을 교화할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강제로 이 일을 기록하라고 시키니 감히 문장이 짧은 것으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신해(辛亥)년 10월 일 수원(水原) 이등(李等) 친제(親製) 열녀(烈女) 증통정대부병조참의(贈通政大夫兵曹參議) 권이길(權뚜)의 처 숙부인(淑夫人) 예천(醴泉) 임씨(林氏):인조(仁廟)조에 정묘호란을 당하여 그 지아비가 임소(任所)로 부임할 때, 붉은 비단으로 옷깃에 선을 두르고 흰 말갈기를 망건을 장식하는 것으로 표식을 삼아 떠나 보냈다. 지아비가 순절(殉節)한 후 남복(男服)을 하고는 몸종 두 명을 데리고 평양(平壤)에 이르러 어지럽게 널려 있는 시체를 뒤적여 비단과 말갈기의 표식으로 지아비의 시신을 찾아내 돌아온 다음 선영(先瑩)에 장사를 지냈다.
학생(學生) 조제로(趙濟老)의 처 전주(全州) 이씨(李氏):지아비의 상(喪)을 당하여 철침(鐵針)을 세 번 삼키고 재차 독약을 마셔 순절하였다. 순종조(純宗朝) 정축년(丁丑年)에 명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고 표창하였다. 양인(良人) 김병집(金秉集)의 처 남양(南陽) 홍씨(洪氏):지아비의 3년상을 마친 후 곡식을 끊고 스스로 굶어 죽었다. 헌종조(憲宗朝) 신축년(辛丑年)에 명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고 표창하였다.
효부(孝婦) 양주(楊州) 조씨(趙氏):고(故) 승지(承旨) 명겸(鳴謙)의 손(孫)이며 효자 김달명(金達命)의 처이다. 여훈(女訓)과 소학(小學) 같은 책에 능통하였고 효로써 시부모를 섬겼다. 시어머니가 병이 나자 지아비와 더불어 하늘에 기도하여 능히 물고기를 얻었다. 상을 당함에 있어서는 3년간 고기를 먹지 않았고 국상(國哀)을 당했을 때에도 또한 소식(素食)을 행하였으니 더욱이 이는 부인의 효행으로는 드문 것이다. 그 지아비 김달명(金達命)과 더불어 일시에 진청(陳請)하여 정문을 세우고 표창하는 바가 되었다.
정사(丁巳) 행행시사(幸行試士) 어제(御題)
부제(賦題):“살아서 거주하는 곳으로는 안산이 가장 좋다고들 말하는데 더구나 다시 크게 풍년이 들었음에랴.” 해석은 안산아헌(安山衙軒)에 나타나 있다. 시제(詩題):“남경(南京)에 사신으로 가서 전당홍(錢塘紅)을 가져와 그것을 심었으니 이르기를 연성(蓮城)이라 하였다.” 연(蓮)자로 압운(押韻)하였다. 강희맹(姜希孟)이 남경(南京)에 사신으로 가서 전당연(錢塘蓮)의 종자를 가져왔으니 이르기를 전당홍(錢塘紅)이라 하였다. 그것을 본 군(郡)에 심었더니 그 후 연꽃 종자가 넓게 퍼져 읍(邑)을 연성(蓮城)이라 하였다.
명제(銘題):‘평근루(平近樓)’`해석이`읍치(邑治)`문루(門樓)에`나타나 있다. 행행시(幸行試)에서 25인을 선발하였다. 부장원(賦壯元)으로는 유학(幼學) 김집(金鏶)이 뽑혔고, 시장원(詩壯元)으로는 유학 권중술(權中述)이 뽑혀 감시(監試) 11)"와 회시(會試) 12)보는 것을 허락하였다. 명(銘) 부문의 장원에는 진사(進士) 최홍진(崔鴻晋)이 선발되어 직부회시(直赴會試)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나머지 22인에게는 각각 규장전운(奎章全韻)을 사급(賜給)하였다.
살펴보건대 본 읍은 지형(地形)이 부채를 반쯤 펼친 것과 같아 한 쪽 면은 산에 의탁하고 다른 세 모퉁이는 바다로 둘러싸였다. 읍치(邑治)는 동쪽 높은 산 아래에 있고, 면(面)과 이(里)는 서쪽 연해변(沿海邊)에 있다. 동쪽의 면(面)에는 밭이 많고 논이 적으며, 서쪽의 면에는 논이 많고 밭이 적어 기장과 피·벼 등이 각기 그 알맞은 곳이 있다.
또한 산에서 나물을 캐고 물에서 고기를 잡는 즐거움과, 물고기·소금·땔나무·물이 좋음이 있기 때문에 정사년(丁巳年) 행행(幸行)시에 어제(御題)가 있어 말하기를 “지세(地勢)는 반반하여 만송이[萬朶]의 연꽃과 같고, 대개 물고기와 게[魚蟹]는 돈으로 논하지 않으니 살아서 거주하는 것으로는 안산(安山)이 가장 좋다고들 말하는데 더구나 다시 크게 풍년이 들었음에랴.” 하였으니 지금에 이르도록 군(郡)의 부로(父老)들이 성조(聖朝)의 아름다움을 칭한 시라고 말한다.
유문형(편찬위원)
신대광의 안산역사이야기
약 600여 년 전 조선시대 안산의 시청, 즉 관아는 어떠했을까 ?
오늘날 시청(市廳)은 행정의 중심이다. 많은 민원인들이 시청을 찾아 아쉬움을 토로하고, 자신의 재산과 관련된 업무를 처리하기도 한다. 또한 시의 정책을 시민들에게 알리기도 하고, 시에서 적극적으로 대민 서비스를 위해 노력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청은 시민들이 부대끼는 삶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지금부터 약 600여 년 전 조선시대 안산의 시청, 즉 관아는 어떠했을까?
처음에 안산 관아는 목내동 성안마을 소릉(素陵)지 부근에 있었다. 이를 추정하는 근거가 『안산김씨족보』에 있는데 그 기록을 살펴보면 “...... 이 고을 관아는 본래 산 서쪽 바다 가까이에 있었는데 본조 정통 정유년(1441년)에 옛 소릉의 화소(火巢)로 편입되어 관부를 우리 선조의 유허로 옮긴 것이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처음에 있던 위치에서 다시 현재의 상록구 수암동으로 이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에 새로이 정비를 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
여러 자료들로 미루어 보아 조선이 개국한 직후에는 오늘날 반월공단이 있는 목내동 일대에 있다가 1441년에 수암동으로 옮겼다. 그리고 1669년까지 현재의 관아가 있는 곳에서 서북쪽으로 약 50미터 지점에 관아가 있었다. 그리고 현재 위치의 안산군 관아로 옮긴것은 현종 10년(1669년)부터 이었는데 이는 우암 송시열의 『송자대전』에 <안산현관사중건기(安山縣官舍重建記)>에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조선시대에 안산 관아는 두 번 위치를 옮겼다.
현재 위치한 안산관아는 『세종실록지리지』 권148 <안산군조>조에 “안산군의 진산은 취암이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안산군의 관아가 취암 아래쪽 지금의 안산읍성터 부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곳은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축성한 안산읍성이 있던 곳이다. 그래서 읍성 안에 관아를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현재 그곳에는 조선초기에 심었다는 수령 약 600여 년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처음 심은 세 그루 중 한 그루만 남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안산관아는 일제침략기인 1914년에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산군이 시흥군에 통폐합이 되어 1922년 경 일부 건물을 신축하여 1965년까지 수암면사무소로 사용하였다. 그 후에 세월이 흘러 건물이 붕괴되자 1972년경 헐리고 말았다.
관아에 들어서는 기본 건축물로는 고을 수령이 집무하는 정청인 동헌, 가족을 동반한 수령일 경우 그의 식솔이 거주하는 내아, 국왕의 위패를 모셔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참배하는 공간이며 공적 여행자의 숙소이기도 한 객사, 해당 고을의 징세와 관련한 업무를 보던 향청, 아전들이 일을 하던 질청, 죄인을 취조하는 옥사, 창고 등이 있었다. 우리 안산도 이와 비슷한 수준의 건물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관아는 중앙의 권력이 지방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며 징세와 노역, 신분적 차별에 시달린 서민들의 고달픈 삶이 그대로 드러난 공간이기도 하였다. 관아에는 해당 고을을 책임진 수령이 왕의 명을 받들어 행정을 총괄하였다. 그런데 고을을 책임진 수령중에는 선정을 베푼 수령이 있는가 하면 비리와 악정을 펴서 백성들의 원성을 듣는 수령도 있었다. 오늘날 지방자치 시대에 민선 자치단체 장(長)들을 보며 조선시대 선정을 베푼 수령과 악정을 베푼 수령들을 새삼 비교해 보면, 시간은 흘러가도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선정(善政)과 탐욕에는 큰 변화가 없는 듯하다.
신공업도시 후보지로 결정된 지역 명칭을 ‘반월’이라고 한 것은 특별한 유례가 있어서는 아니다. 이 지역의 행정구역은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과 수암면이 70.7%였고, 화성군 반월면은 불과 29.3%에 지나지 않았다. 또 신공업도시 중심에서 반월면사무소 소재지까지는 약 8km나 떨어져 있었다.
신도시의 이름을 ‘군자’ 혹은 ‘수암’이라 했을 때 서울과 너무 인접해 있다는 인상을 줄 것 같아 남쪽에 있는 ‘반월’로 부르게 된 것이다. 또한 이 지역은 1960년대의 1~2차 5개년개발계획 때 유망한 공업단지 후보지로 구상된 바 있었는데 그 당시 명칭이 반월 지구로 통해 왔다는 것 역시 하나의 이유라 할 수 있다. 당시 ‘반월’이라고 부른 것은 지명을 붙인 것이 아니라 사업 명칭이었다.
사진3-6 안산시의 개청.
1986년 1월 1일 안산시로 승격함과 아울러 1월 6일 안산시청 현판식을 가졌다.
1976년부터 ‘반월’이라 부르기 시작한 이 지역은 1986년 1월 1일 안산시로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까지 약 10년간 통용되어 왔다. 그리하여 반월신공업도시 개발 과정에서 1977년 1월에 경기도에서는 시흥군과 화성군의 일부가 개발지역에 포함되었으므로 여기서 파생되는 행정 처리를 위해 도출장소 격인 반월지원사무소를 설치하게 되었다(후에 경기도 반월지구출장소로 개칭됨).
일반적으로 지명을 명명하는 데는 여러 가지 원칙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것이 고지명을 참고하는 것이라 하겠다. 반월신공업도시 개발 지역에 편입된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과 군자면 일부, 그리고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의 고지명은 안산이었다.
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동쪽으로 과천현 경계까지 5리, 남쪽으로 남양부 경계까지 35리, 서쪽으로 인천부 경계까지 11리, 북쪽으로 금천현 경계까지 14리이며, 서울까지는 51리이다.” 라고 되어 있다(김의원, 1990). 한편 건치연혁(建置沿革)을 보면 “본래 고구려의 장항구현(獐項口縣)이다.
신라 경덕왕이 장구군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지금 이름 안산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충렬왕(忠烈王) 34년에 문종(文宗)이 탄생한 곳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시켰는데 조선에서 그대로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후 1914년 3월,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산군이 시흥·과천과 함께 시흥군에 편입될 때까지 이 지역은 ‘안산’이란 지명으로 일관해 왔다.그러던 중 유천형(柳天馨)·이승언(李承彦) 등의 ‘안산지명찾기’ 노력의 결과로 반월출장소에서 ‘안산시’로 결정되었다.
특히 유천형(현 안산문화원장)은 안산은 고려조 덕종·정종·문종 등 왕세자가 탄생한 고장으로, 일제가 안산의 정기와 맥을 끊기 위하여 1914년 안산 지명을 의도적으로 말살하였다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의식과 해석을 인정한 정부는 극일 측면에서 왜곡된 1천 년 역사의 안산 지명을 다시 되돌려 놓았다. 김형철(편찬위원)
반월 도시개발사업 기공식. 1977년 3월 31일 관계 기관장 및 지역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장항구(獐項口)·장구(獐口)·연성(蓮城)·안산(安山). 동쪽으로 과천현(果川縣) 경계까지 3리이고, 서쪽으로 인천(仁川) 앞바다까지 11리, 남쪽으로 남양부(南陽府) 경계까지 35리, 북쪽으로 시흥현(始興縣) 경계까지 10리이다. 북쪽으로 경도(京都)까지의 거리가 57리이고, 주진관(主鎭管)은 남양부(南陽府)에 있다. 본래 고구려의 장항구현(獐項口縣)이었으나,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장구군(獐口郡)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한 후 감무(監務)를 두었고, 충렬왕(忠烈王) 34년에 문종(文宗)이 탄생한 곳이라 하여 군(郡)으로 승격시켰으며 본조(本朝)에서도 이를 따랐다.
면명호총(面名戶摠)
6면(面)으로 동서의 길이가 30리이고, 남북의 길이가 20리이며, 호는 2403호이다. 군내면(郡內面):읍으로부터 남쪽으로 3리 거리이고, 호는 428호이다. 초산면(草山面):읍으로부터 서쪽으로 3리 거리이고, 호는 331호이다. 잉화면(仍火面):읍으로부터 서남쪽으로 10리 거리이고, 호는 241호이다. 마유면(馬遊面):읍으로부터 서쪽으로 20리 거리이고, 호는 422호이다. 대월면(大月面):읍으로부터 서쪽으로 25리 거리이고, 호는 175호이다. 와리면(瓦理面):읍으로부터 서쪽으로 30리 거리이고, 호는 381호이다.
군총(軍摠)
정초군(精抄軍):274명. 수원(水原) 행행(幸行)시 어가(御駕)를 수행한다. 별중사(別中司):250명. 수원(水原) 행행(幸行)시 척후복병(斥?伏兵)·전어군(傳語軍)으로 수행한다. 난후아병(?後牙兵):92명. 수원(水原) 행행(幸行)시 영주장(營主將)을 호위한다. 화서대양군(華西隊良軍):207명. 매 사람에게 포(布) 2냥(兩) 2전(Z)씩 거둔다. 노군(奴軍):248명. 매 사람에게 포 1냥 1전씩 거둔다. 훈국포보(訓局砲保):38명. 매 사람에게 포 2냥 7전씩 거둔다. 군향보(軍餉保):3명. 매 사람에게 포 2냥 7전씩 거둔다. 아사(衙舍):축좌(丑坐)에 미향(未向)이다. 창우(倉宇):15간(間)이고 외창(外倉)은 없다. 향교(鄕校):축좌(丑坐)에 미향(未向)이다. 사직단(社稷壇):읍으로부터 서쪽으로 2리 떨어진 군내면(郡內面) 장곡리(獐谷里)에 있다. 여단(?壇):읍으로부터 서쪽으로 2리 떨어진 곳에 있다.
명산(名山)
수리산(修理山):읍치(邑治)의 동쪽에 있다. 일맥(一脈)은 남쪽으로 내려와 군내면(郡內面) 노적봉(露積峰)이 되었고 성곶포(聲串浦)에 이르러 그쳤다. 다른 일맥(一脈)은 북쪽으로 뻗어 초산면(草山面) 응봉(鷹峰), 잉화면(仍火面) 마하산(麻霞山), 마유면(馬遊面) 군자봉(君子峰)이 되었고 방향을 바꾸어 와리면(瓦里面) 옛 소릉(昭陵)을 이루었으며, 성두안부원군 홍해봉(城頭安府院君 洪海峰)의 산소(山所)에 이르러 그쳤다.
대천(大川)
판천(板川):군내면(郡內面) 장곡(獐谷)에 있다. 근원은 수리산(修理山)에서 시작되어 읍치(邑治)를 싸고 흘러 성곶포(聲串浦) 앞에 이르러 그쳤다. 본천(本川):초산면(草山面) 조남리(鳥南里)에 있다. 근원은 응봉(鷹峰) 아래서부터 시작되어 관곡(官谷)에 이르러 그쳤다. 두 개의 하천은 모두 이 산 계곡 사이에서 흘러 내려온 것인데, 가물면 번번히 말라 붙어 관개(灌漑)에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 없다.
진도(津渡)
본 읍에는 원래 강이나 호수가 없지만 성곶포(聲串浦)와 원당포(元堂浦)의 두 포구가 있어서 조수(潮水)가 출입할 때 상선(商船)·어선(漁船)이 왕래한다. 거주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농사를 짓지 않고 오로지 고기잡는 것만을 일삼았다. 옥구도(玉龜島)는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백성들이 그물을 기워 고기잡는 것으로써 산업을 삼았다. 석도(石島)와 옥구도(玉龜島)에는 처음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 탄환(彈丸)만한 돌부리[石角]가 대해(大海)에 떠 있다.
영액험이(嶺?險夷)
읍치(邑治) 동쪽으로 과천현(果川縣)의 경계와 접하였고, 동남쪽으로는 광주부(廣州府)의 경계와 접하였다. 이 두 곳은 모두 계곡의 길이 좁고 꾸불꾸불하며, 위험스런 바윗돌이 험악하게 널려 있어 왕래하는 사람들이 넘어다니는 데 커다란 어려움이 있다.
제언성지(堤堰城池)
제언(堤堰) 한 곳은 대월면(大月面) 산대장(山垈場) 앞에 있는데 오취(烏嘴)라고 부른다. 한 바퀴를 도는 거리가 3리 가량 되는데, 물을 가두어 농사에 도움이 되는 것이 근 수십 석락(石落)이나 된다. 소지(小池) 한 곳은 초산면(草山面) 관곡(官谷)에 있는데, 연못 가운데에 전당연(錢塘蓮)이 있다. 이 연꽃 종자는 강희맹(姜希孟)이 사신(使臣)으로 남경(南京)에 갔을 때 전당연(錢塘蓮)을 가져와 여기에 심은 것인데, 이 때문에 읍(邑)의 이름을 연성(蓮城)이라 부르고 연못의 이름도 전당(錢塘)이라 하는 것이다. 을사(乙巳)년에 연지기(蓮直) 6명을 두고 신역(身役)1)과 연역(烟役)2)을 면제해 주었으며, 환호(還戶)3)도 역시 빼앗지 못하게 하였다.
승지고적(勝地古跡)
읍치(邑治) 서쪽 언덕에 망해정(望海亭) 옛 터가 있고, 관사(官舍) 뒤편에는 토체형(土?形)의 터가 있다. 이곳은 옛날 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이 살던 곳이다. 은행나무 세 그루 역시 김정경이 손수 심은 것이라고 부로(父老)들은 지금까지 말하고 있다. 와리면(瓦里面) 초지(草芝)에 만호(萬戶)4)가 있고, 마유면(馬遊面) 월곶(月串)에는 첨사(僉使)5)가 있었다. 이는 얼마 후 심도(沁都)로 옮겨졌다고 하는데, 그 터의 형태는 지금까지도 완연히 남아 있다. 와리면(瓦里面) 성두(城頭) 고봉(高峰) 위에 성보(城堡)의 유허(遺墟)와 옛 산성(山城) 터가 있는데, 그 연대는 상고할 수 없다.
누대정관(樓臺亭觀)
읍치(邑治) 밖에 3문루(三門樓)가 있어 평근루(平近樓)라고 부르는데, 별로 볼 만한 곳은 없다. 와리면(瓦里面) 적길리(赤吉里)의 해안에는 봉황대(鳳凰臺)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형체도 찾을 수 없다. 그 아래 사옹관사(司饔館舍)가 있는데 밴댕이(蘇魚)를 진공(進貢)하는 곳이다.
봉수(烽燧) 읍으로부터 서쪽으로 25리 떨어진 마유면(馬遊面) 정왕산(正往山)에 있다. 남쪽으로는 남양(南陽)의 해운산봉수(海雲山烽燧)와 서로 응하고, 서쪽으로는 인천(仁川)의 성산봉수(城山烽燧)와 서로 응한다.
사찰(寺刹)
정수암(淨秀菴)은 읍치(邑治) 뒤쪽으로 있지만 별로 볼 만한 것이 없다. 원당사(元堂寺)는 읍치(邑治) 동쪽 수리산(修理山) 밑에 있다. 절 뒤편에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우단(雩壇)이 있다. 절 정원에 있는 조그만 탑에는 ‘천희원년(天禧元年)’이라는 네 글자가 있어 이 절이 삼한(三韓)의 고사(古寺)임을 알 수 있다. 고봉(高峰)이 뒤쪽에 우뚝 서 있고 대해(大海)가 멀리 임(臨)해 있어 풍류시인[騷人]과 묵객(墨客)들이 족히 한때 유람할 만한 곳이다.
장시(場市)
초산면(草山面)에 광석장시(廣石場市)가 있었으며 읍으로부터 서쪽으로 10리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이 장시(場市)는 거래되는 물화(物貨)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저절로 없어졌다. 대월면(大月面)에 산대장시(山垈場市)가 있으며 읍으로부터 서남쪽으로 20리 거리에 있다. 이 시장은 장소가 구석진 곳에 있어 특별히 유통되는 물화(物貨)는 없고 다만 토산품만 교역(交易)되다가 한낮이 되면 곧 파(罷)하였으니, 가히 바닷가 구석진 곳의 순박한 풍속을 볼 수 있다.
점막(店幕)
초산면(草山面) 광석리(廣石里)에 점막(店幕)이 있으며 잉화면(仍火面) 월입피(月入陂)에도 역시 점막이 있는데, 모두 읍으로부터 10리 정도 떨어져 있다. 바닷가 구석진 좁은 길에는 지나는 사람이 드물고 봄과 가을 사이에 간혹 소금장수들이 왕래하기도 하지만, 장사만으로 족히 생활한다고 할 수는 없다.
진공(進貢)
약쑥[藥艾]·해전(蟹錢)·밴댕이[蘇魚]. 어부 75명이 선혜청(宣惠廳)6)으로부터 대가를 받고 결전(結箭)으로 고기를 잡는다. 사옹원(司饔院)7)에서는 오로지 진공(進貢)을 관장하는데 장빙미(藏氷米)8)는 인천(仁川)이 30석(石), 부평(富平)이 16석, 남양(南陽)이 24석, 시흥(始興)이 10석 10두(斗)씩이고, 결전미(結箭米)는 82석 10두이다.
윤엄(尹儼):관직은 좌랑(佐郞)이었고, 호는 송암(松巖)이다. 윤민헌(尹民獻):윤엄의 아들로 관직이 참의(參議)에 이르렀고, 호는 태비(苔扉)이다. 윤강(尹絳):윤민헌의 아들로 관직이 판서(判書)에 이르렀고, 호는 무곡(無谷)이다. 윤지선(尹趾善):윤강의 아들로 관직이 좌상(左相)에 이르렀고, 호는 두포(杜浦)이다. 윤지완(尹趾完):윤지선의 동생으로 관직이 우상(右相)에 이르렀고, 호는 동산(東山)이다.
묘소(墓所)
진안위(晉安尉) 유적(柳Z)의 묘:군(郡)의 남쪽 8리 떨어진 군내면(郡內面) 정자동(亭子洞)에 있다. 금양위(錦陽尉) 박미(朴?)의 묘:군(郡)의 서쪽 20리 떨어진 마유면(馬遊面) 산북리(山北里)에 있다.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 찬성(贊成) 박필주(朴弼株)의 묘:위의 묘소와 같은 곳에 있다.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묘:군(郡)의 북쪽 4리 떨어진 초산면(草山面) 제청리(祭廳里)에 있다.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묘:군(郡)의 서쪽 30리 떨어진 대월면(大月面) 거모포(去毛浦)에 있다.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의 묘:군(郡)의 서쪽 10리 떨어진 잉화면(仍火面) 전곡(前谷)에 있다. 찬성(贊成) 이계손(李繼孫)의 묘:군(郡)의 남쪽 10리 떨어진 군내면(郡內面) 점성(占星)에 있다. 판서(判書) 윤강(尹絳)의 묘:위의 묘소와 같은 곳에 있다. 판서(判書) 조관빈(趙觀彬)의 묘:군(郡)의 서쪽 4리 떨어진 초산면(草山面) 용당곡(龍堂谷)에 있다. 판서(判書) 이숭호(李崇祜)의 묘:군(郡)의 서쪽 4리 떨어진 초산면(草山面) 궤화곡(櫃火谷)에 있다. 우의정(右議政) 윤지완(尹趾完)의 묘:군(郡)의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와리면(瓦里面) 칠목동(漆木洞)에 있다. 증영의정(贈領議政) 안탄대(安坦大)의 묘:군(郡)의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와리면(瓦里面) 이목동(梨木洞)에 있다.
충효열(忠孝烈)
충신(忠臣) 권이길(權뚜):안동(安東) 권씨로 인조(仁廟)조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 평양판관(平壤判官)으로서 보통문(普通門)에서 순절(殉節)하였다. 통정대부병조참의(通政大夫兵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관(官)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고 숙종(肅廟)조 신유(辛酉)년에 명하여 정려(旌閭)하였다. 충신 김문기(金文起):김해(金海) 김씨로 호는 백촌(白村)이다. 관직이 이조판서(吏判)에 이르렀고,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순절(殉節)하였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의공(忠毅公)이다. 현손(玄孫)에 이르기까지 5명이 정려(旌閭)되었으며 잉화면(仍火面) 광곡(廣谷)에 있다. 신미(辛未)년에 명하여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다.
충신 김현석(金玄錫):김문기(金文起)의 아들로 호는 마암(馬巖)이다. 관직이 현감(縣監)에 이르렀으며, 그 아버지와 더불어 같은 날에 순절하였다. 효자(孝子) 김충주(金忠柱):김문기의 손자로 호는 탄옹(炭翁)이다. 동몽교관(童夢敎官)에 추증되었다. 안산(安山)의 마하산(麻霞山) 산중에 숨어 살았으며 망월암(望越巖) 고송정(枯松亭)에서 채미시(採薇詩)를 지었다. 효자 김경남(金景南):김문기의 증손(曾孫)으로 호는 한천(寒泉)이다. 버섯이 언덕에 나면 이를 그 아버지에게 공양하였다.
효자 김약전(金約前):김문기의 현손(玄孫)으로 호는 성지당(姓支堂)이다. 어버이의 등창[疽]을 입으로 빨아 114세의 수를 누리게 하였다. 임진란(壬辰亂) 때에는 늙은 어버이를 부축하여 보호하니 왜놈도 역시 그 효성에 감동하였고 문자로써 서로 말을 통하였다. 그가 살던 계곡이라 하여 성지곡(姓支谷)이라 이름하였다. 효자 이상기(李相?):완산(完山) 이씨(李氏)이다. 이조참의(吏曹?議)에 추증되었고 관직이 행남대지평(行南臺持平)에 이르렀다. 그 아버지가 병이 나자 똥을 맛보았고 하늘에 기도하였으며 종신토록 효성이 지극하였다. 숙종(肅廟)조 계해(癸亥)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을 하였다.
효자 김계창(金啓昌):언양(彦陽) 김씨이다. 그 아버지가 병이 나자 똥을 맛보았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하였다. 초상을 당해서는 그 묘소에 배례(拜禮)하기를 성(誠)과 예(禮)로 하였다. 순조(純祖)조 임오(壬午)년에 명하여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다. 효자 김정훈(金鼎勳):연성(蓮城) 김씨이다. 그 아버지가 병이 나자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구하였으며, 똥을 맛보아 그 수(壽)을 알아보았다. 저녁에는 아버지의 잠자리를 정하고 새벽에는 그 안부를 살펴보는 것을 폐하지 않았으며, 약을 드리는 데에 정성을 다하였다. 복호(復戶)하여 50부(負)를 지급하였는데 연조(年條)는 자세하지 않다.
효자 김달명(金達命):의성(義城) 김씨로서 사재문목공(思齋文穆公) 김정국(金正國)의 9세손인 헌납(獻納) 김한로(金漢老)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을 타고나 어머니 강씨(姜氏)가 병이 나자 똥을 맛보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었다. 강씨가 물고기를 먹고 싶어하자 추운 때를 당하여 그 처인 조씨(趙氏)와 함께 울부짖으며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러자 담비와 개가 물고기를 물어 오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상복을 벗지 않고 죽만 먹었으며 날마다 묘를 살피면서 애통하게 우니, 그 무릎을 꿇었던 자리에는 잔디가 모두 말라 죽었다. 정조(正廟)가 승하하던 날, 나이가 70세인 데도 그 처와 더불어 3년을 소식(素食)하였다. 철종조(哲宗朝) 임자(壬子)년에 선비들의 논의가 일제히 일어나 그 충성스런 행동을 포상하기를 청하였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었다.
효자 김동려(金東礪)·동은(東殷) 형제 행적:나라에 효자를 표창하는 법이 있는 것은 단지 효자만을 홀로 위한 것이 아니라 불효자를 권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어째서 그러한가. 효라고 하는 것은 비록 순(舜)임금이나 증자(曾子)라 하더라도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니, 진실로 명백하게 드러내는 것을 일삼음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효도를 능히 한 사람은 적고 능히 하지 못한 사람은 많으니,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도를 얻으면 그 퇴폐한 풍속에서 조금이라도 해이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마땅히 남이 모르고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부터 먼저 표창해야 할 것이다. 안산(安山) 서쪽에 효자 김동려(金東礪)·동은(東殷) 형제가 있으니 대개 궁벽한 시골 사람이다. 어찌 더욱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려(東礪)는 어려서부터 이미 황향(黃香) 9)의 효행(孝行)이 있었다. 장성하 여서는 힘써 농사를 지어 어버이를 봉양하였으므로 몸에 편하고 입에 맞는 것을 갖추지 않음이 없었다. 병이 나니 북극성[北辰]에 기도하고 손가락의 피를 드리니 목숨이 열흘간 연장되었다. 돌아가신즉 시신을 목욕시키면서 시수(尸水)를 핥고 삼켰다. 염장(殮葬)을 함에 있어서는 가력(家力)을 다 기울였고, 동생 동은(東殷)과 더불어 상제(喪制)를 지키기를 매우 엄격히 하였다. 술과 고기를 일체 입에 대지 않았으며 묘 앞에 여막(廬幕)을 짓고 비와 눈을 피하지 않으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울부짖으니, 끝내는 몸이 쇠척해져 어머니 상기(喪期)를 1년도 채 못 마치고 죽었다. 이에 비통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동은(東殷)은 반드시 매일 저녁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새벽에는 안부를 살폈다[定省]. 어머니에게 종기가 나면 입으로 고름을 빨아 드렸고 눈에 병이 생기면 눈꼽을 핥았다. 어머니가 죽은 뒤에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여 그 예를 행하는 데 있어서 하나같이 형이 하는 것과 똑같이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하늘로부터 난 성품이며 진실로 이른바 난형난제(難兄難弟)라 할 것이다.
또 흉년이 들면 형제가 미곡을 내어 족척(族戚)과 이웃[隣保]을 구제하였으니 이것도 역시 효성을 미루어 나타낸 것이다. 석류(錫類)10)의 이치가 과연 어긋나지 않아서 동은의 아들 광의(光儀)도 역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고 똥을 맛보았으며 하늘에 기도하고 여묘(廬墓)살이를 하여 부모에게 욕됨이 없게 하였으니, 한 가문에 3명의 효자가 나온 것이 어찌 기울어 가는 세속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동려(東礪)가 살아 있을 때부터 사람들의 공의(公議)가 일제히 일어나고 유자(儒者)들과 향당(鄕黨)의 장첩(狀牒)이 쌓여 책을 이루어 정문(旌門)을 세우고 표창할 것을 기대하였는데, 다만 이를 위에 올려서 알릴 방도가 없는 까닭에 장차 묻혀서 없어지려 한즉, 이에 사람들이 마을에다 여(礪)를 지어 표창할 원대한 계책을 세웠으니, 여기서 우리 군(郡) 인사들의 효를 넓히고자 하는 뜻이 지극하다 하겠다.
이 여를 지나는 사람들이 반드시 공경하여 말하기를 “동려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탁행(卓行)이 능히 사람을 감동시키는가. 이름이 장차 이 여와 더불어 계속될 것이다. 우리 무리들도 또한 사람인지라 어찌 문득 우리도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하고서 다투어 서로 본받을 것을 사모하고 각자 스스로 면려(勉勵)하여 모든 사람들이 순(舜)임금과 증자(曾子)가 되면 이 여가 풍속을 교화시키는 것이 어찌 적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을 주장한 것이 누군가 하면 사인(士人) 김정진(金定鎭)과 김달영(金達永)이다. 내가 한 지방의 풍속을 교화할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강제로 이 일을 기록하라고 시키니 감히 문장이 짧은 것으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신해(辛亥)년 10월 일 수원(水原) 이등(李等) 친제(親製) 열녀(烈女) 증통정대부병조참의(贈通政大夫兵曹參議) 권이길(權뚜)의 처 숙부인(淑夫人) 예천(醴泉) 임씨(林氏):인조(仁廟)조에 정묘호란을 당하여 그 지아비가 임소(任所)로 부임할 때, 붉은 비단으로 옷깃에 선을 두르고 흰 말갈기를 망건을 장식하는 것으로 표식을 삼아 떠나 보냈다. 지아비가 순절(殉節)한 후 남복(男服)을 하고는 몸종 두 명을 데리고 평양(平壤)에 이르러 어지럽게 널려 있는 시체를 뒤적여 비단과 말갈기의 표식으로 지아비의 시신을 찾아내 돌아온 다음 선영(先瑩)에 장사를 지냈다.
학생(學生) 조제로(趙濟老)의 처 전주(全州) 이씨(李氏):지아비의 상(喪)을 당하여 철침(鐵針)을 세 번 삼키고 재차 독약을 마셔 순절하였다. 순종조(純宗朝) 정축년(丁丑年)에 명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고 표창하였다. 양인(良人) 김병집(金秉集)의 처 남양(南陽) 홍씨(洪氏):지아비의 3년상을 마친 후 곡식을 끊고 스스로 굶어 죽었다. 헌종조(憲宗朝) 신축년(辛丑年)에 명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고 표창하였다.
효부(孝婦) 양주(楊州) 조씨(趙氏):고(故) 승지(承旨) 명겸(鳴謙)의 손(孫)이며 효자 김달명(金達命)의 처이다. 여훈(女訓)과 소학(小學) 같은 책에 능통하였고 효로써 시부모를 섬겼다. 시어머니가 병이 나자 지아비와 더불어 하늘에 기도하여 능히 물고기를 얻었다. 상을 당함에 있어서는 3년간 고기를 먹지 않았고 국상(國哀)을 당했을 때에도 또한 소식(素食)을 행하였으니 더욱이 이는 부인의 효행으로는 드문 것이다. 그 지아비 김달명(金達命)과 더불어 일시에 진청(陳請)하여 정문을 세우고 표창하는 바가 되었다.
정사(丁巳) 행행시사(幸行試士) 어제(御題)
부제(賦題):“살아서 거주하는 곳으로는 안산이 가장 좋다고들 말하는데 더구나 다시 크게 풍년이 들었음에랴.” 해석은 안산아헌(安山衙軒)에 나타나 있다. 시제(詩題):“남경(南京)에 사신으로 가서 전당홍(錢塘紅)을 가져와 그것을 심었으니 이르기를 연성(蓮城)이라 하였다.” 연(蓮)자로 압운(押韻)하였다. 강희맹(姜希孟)이 남경(南京)에 사신으로 가서 전당연(錢塘蓮)의 종자를 가져왔으니 이르기를 전당홍(錢塘紅)이라 하였다. 그것을 본 군(郡)에 심었더니 그 후 연꽃 종자가 넓게 퍼져 읍(邑)을 연성(蓮城)이라 하였다.
명제(銘題):‘평근루(平近樓)’`해석이`읍치(邑治)`문루(門樓)에`나타나 있다. 행행시(幸行試)에서 25인을 선발하였다. 부장원(賦壯元)으로는 유학(幼學) 김집(金鏶)이 뽑혔고, 시장원(詩壯元)으로는 유학 권중술(權中述)이 뽑혀 감시(監試) 11)"와 회시(會試) 12)보는 것을 허락하였다. 명(銘) 부문의 장원에는 진사(進士) 최홍진(崔鴻晋)이 선발되어 직부회시(直赴會試)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나머지 22인에게는 각각 규장전운(奎章全韻)을 사급(賜給)하였다.
살펴보건대 본 읍은 지형(地形)이 부채를 반쯤 펼친 것과 같아 한 쪽 면은 산에 의탁하고 다른 세 모퉁이는 바다로 둘러싸였다. 읍치(邑治)는 동쪽 높은 산 아래에 있고, 면(面)과 이(里)는 서쪽 연해변(沿海邊)에 있다. 동쪽의 면(面)에는 밭이 많고 논이 적으며, 서쪽의 면에는 논이 많고 밭이 적어 기장과 피·벼 등이 각기 그 알맞은 곳이 있다.
또한 산에서 나물을 캐고 물에서 고기를 잡는 즐거움과, 물고기·소금·땔나무·물이 좋음이 있기 때문에 정사년(丁巳年) 행행(幸行)시에 어제(御題)가 있어 말하기를 “지세(地勢)는 반반하여 만송이[萬朶]의 연꽃과 같고, 대개 물고기와 게[魚蟹]는 돈으로 논하지 않으니 살아서 거주하는 것으로는 안산(安山)이 가장 좋다고들 말하는데 더구나 다시 크게 풍년이 들었음에랴.” 하였으니 지금에 이르도록 군(郡)의 부로(父老)들이 성조(聖朝)의 아름다움을 칭한 시라고 말한다.
유문형(편찬위원)
신대광의 안산역사이야기
약 600여 년 전 조선시대 안산의 시청, 즉 관아는 어떠했을까 ?
오늘날 시청(市廳)은 행정의 중심이다. 많은 민원인들이 시청을 찾아 아쉬움을 토로하고, 자신의 재산과 관련된 업무를 처리하기도 한다. 또한 시의 정책을 시민들에게 알리기도 하고, 시에서 적극적으로 대민 서비스를 위해 노력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청은 시민들이 부대끼는 삶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지금부터 약 600여 년 전 조선시대 안산의 시청, 즉 관아는 어떠했을까?
처음에 안산 관아는 목내동 성안마을 소릉(素陵)지 부근에 있었다. 이를 추정하는 근거가 『안산김씨족보』에 있는데 그 기록을 살펴보면 “...... 이 고을 관아는 본래 산 서쪽 바다 가까이에 있었는데 본조 정통 정유년(1441년)에 옛 소릉의 화소(火巢)로 편입되어 관부를 우리 선조의 유허로 옮긴 것이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처음에 있던 위치에서 다시 현재의 상록구 수암동으로 이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에 새로이 정비를 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
여러 자료들로 미루어 보아 조선이 개국한 직후에는 오늘날 반월공단이 있는 목내동 일대에 있다가 1441년에 수암동으로 옮겼다. 그리고 1669년까지 현재의 관아가 있는 곳에서 서북쪽으로 약 50미터 지점에 관아가 있었다. 그리고 현재 위치의 안산군 관아로 옮긴것은 현종 10년(1669년)부터 이었는데 이는 우암 송시열의 『송자대전』에 <안산현관사중건기(安山縣官舍重建記)>에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조선시대에 안산 관아는 두 번 위치를 옮겼다.
현재 위치한 안산관아는 『세종실록지리지』 권148 <안산군조>조에 “안산군의 진산은 취암이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안산군의 관아가 취암 아래쪽 지금의 안산읍성터 부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곳은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축성한 안산읍성이 있던 곳이다. 그래서 읍성 안에 관아를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현재 그곳에는 조선초기에 심었다는 수령 약 600여 년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처음 심은 세 그루 중 한 그루만 남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안산관아는 일제침략기인 1914년에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산군이 시흥군에 통폐합이 되어 1922년 경 일부 건물을 신축하여 1965년까지 수암면사무소로 사용하였다. 그 후에 세월이 흘러 건물이 붕괴되자 1972년경 헐리고 말았다.
관아에 들어서는 기본 건축물로는 고을 수령이 집무하는 정청인 동헌, 가족을 동반한 수령일 경우 그의 식솔이 거주하는 내아, 국왕의 위패를 모셔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참배하는 공간이며 공적 여행자의 숙소이기도 한 객사, 해당 고을의 징세와 관련한 업무를 보던 향청, 아전들이 일을 하던 질청, 죄인을 취조하는 옥사, 창고 등이 있었다. 우리 안산도 이와 비슷한 수준의 건물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관아는 중앙의 권력이 지방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며 징세와 노역, 신분적 차별에 시달린 서민들의 고달픈 삶이 그대로 드러난 공간이기도 하였다. 관아에는 해당 고을을 책임진 수령이 왕의 명을 받들어 행정을 총괄하였다. 그런데 고을을 책임진 수령중에는 선정을 베푼 수령이 있는가 하면 비리와 악정을 펴서 백성들의 원성을 듣는 수령도 있었다. 오늘날 지방자치 시대에 민선 자치단체 장(長)들을 보며 조선시대 선정을 베푼 수령과 악정을 베푼 수령들을 새삼 비교해 보면, 시간은 흘러가도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선정(善政)과 탐욕에는 큰 변화가 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