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화진의 문화 읽기·4
<내 이름은 김삼순>과 한국 드라마의 여주인공들
사랑과 가족, 그 바깥은 없다?!
글 | 사진·이화진 (mysleepwalk@naver.com))
떴다, 김삼순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 하나는 함께 사는 노처녀 이모 이야기를 종종 했다. 그 이모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모의 이름과 맞선에 얽힌 에피소드였다. 시골에서 농사 꽤나 짓는 한씨 집 셋째 딸로 태어난 이모는, 일순이 이순이 다음으로 나왔으니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삼순이로 하자는 심드렁한 부친 덕분에 참 촌스럽고 무성의한 “삼순”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한삼순”이라는 이름의 오묘한 조합 때문에 아이들의 놀림도 많이 받았지만, 내가 뭘 어쩌겠나 하면서 으레 그러려니 했단다. 그런데 이 이모가 뒤늦게 이름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할 일이 생겼다. 바로 ‘맞선’이었다. 집에서는 크게 귀여움 받지 못해도 밖에 나가면 빼어난 미모 덕에 “셋째 딸은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더니, 역시 그 말이 꼭 맞아”하는 말을 들었던 삼순 이모는 착한 남자, 좋은 남자 만나겠다는 신념으로 오는 남자마다 재보고 뒤집어보고 털어보다가 덜컥 결혼 적령기를 넘겨버렸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맞선을 보겠다고 선 시장에 자기를 내놨는데, 선보고 돌아오는 날이면 항상 이름 타령을 한단다. “한삼순”이 본명이 맞느냐고 되묻는 무뢰한부터 자기 마음에 안 들어서 이상한 이름을 대나 보다 하고 불쾌해 하는 소심남까지 노처녀 이모 속을 박박 긁어놓는다는 것이다. 그때 삼순 이모 나이를 꼭 반으로 접어놓은 나이였던 우리들은 이모의 사정이 퍽 안타깝다고 생각하면서도 까르르까르르 신나게 웃었다.
요즘 장안의 화제가 된 드라마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그때 그 삼순 이모를 떠올린다. ‘한’씨보다 더 흔한 ‘김’씨 처녀 이야기인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은 첫 회부터 시청률 호조를 보이며 경쾌하게 출발했다. 4회에서는 시청률 30%를 넘기더니 어디를 가나 삼순이 삼식이 이야기로 난리다. 비결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뽀샵질”, “지랄”, “쪽팔려”, “개자식”, “말탱구리” 같이 거칠지만 현실감 있는 대사들과 솔직하고 엽기적이지만 지나칠 정도로 과장되지 않은 인물 설정, 예쁜 척 멋진 척 하지 않는 주연 배우들의 호연 등등 인기 있는 드라마의 미덕을 꼽아보자면 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삼순 VS 브리짓 존스
사실 <내 이름은 김삼순>은 드라마에서 보기 힘든 여주인공이 등장했을 뿐이지 기존 인기 드라마의 공식을 성실하게 학습한 모범생형 드라마다. (그리고 이것도 미덕이라면 미덕이다.) 지난 해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파리의 연인>이나 <풀 하우스>가 가지고 있던 안정적인 공식에 이 드라마 역시 크게 빚지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남성들은 집안 좋고, 돈 많고, 학벌 좋고, 능력이 출중하며, 게다가 잘 생겼고, 장기도 많다. (특히 그들은 피아노를 잘 친다!) 그들이 못하는 것은 “사랑”뿐이다. 출생의 비밀이라든가 불우한 어린 시절이라든가 실연에 대한 상처가 그들이 사랑에 서툴도록 만든다. 반면 주인공 여성은 집안은 평범하고, 돈은 없고, 자랑할 만한 학벌도 아니다. 하지만 생활력이 강하고, 낙천적이며 쾌활해서 같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 유쾌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사랑”을 할 줄 안다. 물론 그들의 사랑에 장애가 되는 여러 방해자들에게는 그녀의 감화력도 무력하지만.
<내 이름은 김삼순> 역시 “캔디 형 여주인공의 좌충우돌 신데렐라 되기”의 설정을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 <풀 하우스>의 “부부인 척하는” 계약 결혼을 “연인인 척하는” 계약 연애로 바꾸었다. 김삼순도 평범하고, 돈 없고, 학벌 없지만, 생활력 강하고, 낙천적이고, 쾌활한 여주인공들 중의 하나이며, 김삼순(김선아)의 파트너 현진헌(현빈)도 다른 로맨틱 코미디의 남성 주인공들처럼 모든 것을 다 갖추었으나 ‘상처 입은 영혼’이 치유되기를 기다리는 남성이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의 인기는 기존 로맨틱 코미디의 안정적인 구조와 신데렐라 이야기에 대한 선호 때문일까. 지금까지 유행했던 로맨틱 코미디의 틀을 충실히 연구한 잘 기획된 드라마임에는 분명하지만, 주인공 김삼순을 캔디형 신데렐라로만 보기에는 무언가가 부족하다.
김삼순은 올해 나이 서른, 예쁘지도 날씬하지도 어리지도 않다. 스물아홉 살 크리스마스에 애인과 헤어졌다. 다른 여자와 호텔로 들어간 애인을 미행하다 들켜서 넘어지고, 마지막까지 감미로운 대사를 읊어대는 그에게 무참히 차였다. 나이 서른에 원룸도 없고, 차도 없고, 애인도 없다. 한때는 세상의 주인공이 자기였던 때도 있었는데, 그렇게 주인공을 만들어 주던 사랑이 참 허망하고 부질없고 가벼운 것임을 하필이면 이십대의 마지막 크리스마스에 깨달았다. “여자가 서른 넘어 남자를 만날 확률은 길을 가다가 원자폭탄을 맞을 확률보다 낮다”는데, 이제 이 험한 태평양을 어떻게 홀로 건너간단 말인가. 드라마 초반부는 사랑이 모두 달콤한 초콜렛 같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혼자인 것이 싫어서 결혼하고 싶어하는 삼순의 심경을 설명하는 데 상당히 공을 들였다. 단지 노처녀라는 이유만으로 집안의 우환 취급을 받는 게 싫기 때문에 주말마다 선을 보러 다니는 게 아니라, 삼순 스스로가 누군가와의 평범하고 소박한 행복을 시작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기대가 번번이 배신당하더라도 말이다. 삼순이 뭐 대단한 남자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냥 탄탄한 직장 다니면서 월급 꼬박꼬박 갖다 주는 남자”, “부모님이랑 언니들한테 자랑스럽게 ‘내 남자예요’라고 소개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자기 부모님하고 친구들한테 자랑스럽게 ‘내 여자예요’ 이렇게 소개시켜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면 된다. 하지만 쉬워 보이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애써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중반까지 소위 “노처녀”들의 환대와 지지 속에서 떠들썩하게 출발했던 것은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기존의 ‘변종 신데렐라’들보다는 훨씬 그들과의 거리가 가까운 캐릭터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서른이 되면 일과 사랑을 안정적으로 구비할 줄 알았던, 스물 몇 살 때의 소박했던 기대마저도 여지 없이 허물어지는 좌절을 맛본 이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특히 삼순의 습관이기도 한 궁시렁대는 혼잣말들과 엉뚱한 상상은 그녀의 욕망을 솔직하고 거침없이 드러내주면서, 드라마를 지켜보는 모든 TV 밖 “삼순이들”을 그 안으로 바짝 끌어당긴다. 드라마의 애초 기획대로, 우당탕탕 화장실 안에 들어가 코르셋 벗고 주저앉아 마스카라가 얼굴 가득 번지도록 울어도, 그 화장실이 실은 남자화장실이었다고 하더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녀는 모든 노처녀들의 친구이자 꿈이자 희망인 한국판 “브리짓 존스”다.
이쯤에서 원조격인 영국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Bridget Jones's Diary)>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다. 뚱뚱한 브리짓 존스를 연기하기 위해 엄청난 체중 불리기를 시도했던 르네 젤위거는 영국 영화에 출연하기에는 부적격으로 보이는 출신지(미국 텍사스)의 억양을 확 뒤엎고, 누가 뭐래도 오늘의 영국에 살고 있는 30대 노처녀 역할을 몸에 잘 맞는 옷처럼 소화해냈다. 다이어트나, 금주나 금연 같이 절제가 필요한 일에는 누가 보아도 의지박약형인 것도, 혼자서 고독에 몸부림치며 <All By Myself>를 따라 부르는 장면도 르네 젤위거가 노력한 “새로운 몸매” 덕분에 효과가 배가했다. 젊고 늘씬하고 예쁘장한 여주인공들에게 압도되어 온 30대 여성들이 환호하는 것은 당연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30대 초반의 독신녀 브리짓이 담배와 술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나 새해가 되면 다이어트를 다짐하고, 멋진 데이트를 기대하는 것도 그렇게 특별할 것은 없다. 조금 변덕스러운 면은 있지만 그래도 통통하고 평범한 외모에 귀여운 구석도 있고 아주 밉상은 아니다. 이런 브리짓이 유머러스한 바람둥이 편집장 다니엘과 사려 깊고 신사적인 변호사 마크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쪽이 아니면 저쪽이고, 저쪽이 아니면 이쪽이다. 이런 식의 삼각 관계는 여느 로맨틱 코미디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특별했던 것은 여주인공이 과연 어느 남자를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도 결혼과 성 윤리에 저당 잡혀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당하는 위치에 놓인 30대 여성의 심리를 잘 묘사했다는 데 있다. 영화 속에서 브리짓의 신경질은 그녀 자체의 성격적 결함이라기보다는 오롯이 홀로인 독신녀를 결핍 혹은 과잉의 상태로 몰아넣는 사회적 편견에 대한 반응이다. 짝짓기는 왜 꼭 그렇게 소란스러워야 하는가, 아니 그녀들은 꼭 짝짓기에 몰두해야 하는 것인가. 사랑, 남자, 결혼은 동일시되어야 하는 것인가. 여자는 남자와 결혼하지 않으면 불행한 것인가.
또한 인생에 감칠맛을 내는 양념 같은, 혹은 특별한 향신료 같은 친구들을 여럿 그녀 곁에 두었다는 것도 이 영화를 여느 로맨틱 코미디와 다르게 만든다. 좋은 일, 나쁜 일, 신경 쓰이는 일, 심지어 일상의 무료함에 대해서까지도 그들 식대로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든든한 일이다. 이 점에서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사랑스러운 영화다.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주눅들 필요도, 일이 힘들고 지겹다고 도망칠 필요도 없다. 같이 투정 부릴 수다 친구만 있다면 인생이 그리 퍽퍽하지는 않을 것이다. <파니 핑크(원제,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는다”)>(1994)에서 폐쇄적인 성격의 파니는 독일로 이주한 가난한 흑인 동성애자라는 소수자의 위치에 있는 오르페오와 교류하는데, 브리짓은 오르페오보다 현실적인, 오르페오의 분신들 속에 있다. 그리고 그 분신들은 때로는 거울처럼 때로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처럼 브리짓의 매일매일의 삶 속에 있다. 그녀를 홀로 두지 않고 공감자들 속에 두는 것, 그럼으로써 소통과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 바로 그 점이 <파니 핑크>나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영화 바깥에서 그녀들의 공감자들을 얻어낸 비결일 것이다.
삼순아, 친구들은 어디 있니?
다시 <내 이름은 김삼순>으로 돌아와보자. 드라마 속에서 삼순은 누구와 교류하고, 누구와 공감하며, 누구와 연대하는가. 독신녀의 실연에서부터 출발한 이 드라마는 다른 드라마와는 다른 귀결점을 갖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불러왔다. 그런데 우려되는 바는 삼순 역시 일이나 우정 혹은 그 외의 다른 어떤 가치보다도 가족과 연인이라는 두 축에 단단히 묶여져 있다는 것이다. 한국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은 가족과 연인 바깥으로 벗어나지 못한다면, <파리의 연인> 속 태영(김정은)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캐릭터가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가족을 사랑하고 언제나 사랑 앞에 진지한 그녀가 최고의 파티셰가 되겠다는 꿈을 실현하는 것은 “나는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요”라는 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집안 좋고, 돈 많고, 학벌 좋고, 능력이 출중하며, 게다가 잘 생겼고, 피아노도 잘 치며, 이제 사랑도 할 줄 아는 남자’와 결혼하면 행복할 것인가. 물론 정답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이제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에게는 남자보다 사랑보다 결혼보다 더 든든한 어떤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이든 혹은 다른 것이든 연인이나 가족의 외부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그 자체가 여주인공의 존재 가치를 환기시키는 드라마를 보고 싶다. <섹스 앤 더 시티>나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서 여자친구들끼리의 어울림과 그들의 인간 관계에 대한 여러 고민들은 험난한 태평양을 건너기가 무섭다고 해서 동반자가 꼭 남성이거나 사랑일 필요는 없다고 말해 준다. 그 흔한 로맨틱 코미디의 여주인공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삼순이에게도 손잡아 줄 친구가 필요하다. ●
이화진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전공은 식민지 시기 대중문화로, <식민지 영화의 내셔널리티와 ‘향토색’>, <소리의 복제와 구연공간의 재편성> 등을 썼다. 현재, 연세대에 출강하고 있다.
윗 글은 월간 사진예술의 협조로 게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