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즐거운 순간은 가장 빨리 지나간다고, 제가 꼭 그랬어요. 정말 시간이 미친듯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졌죠. 마크를 사귀기 전까지만 해도 지겨워서 어쩔 줄 모르곤 했었는데 말이에요. 기숙사의
삶이라는 게, 정말로 할게 없거든요.
마크와 저는 서로 즐거운 이야기만 하려고 노력했어요. 어짜피 다가오는 이별이라면, 즐겁게 맞이
하는 게 좋다는 걸, 서로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식이었어요. 밤마다 저는
울 수 밖에 없었어요. 졸업식이 다가오면 다가올 수록, 저는 불안감과 견딜 수 없는 공황으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래도 마크앞에서는 웃으려고 노력했어요. 마크도 똑같이 힘들다는 걸 아니까.
그 아이가 지어내는 웃음이, 억지라는 걸 아니까.
저는 신을 믿지 않아요.
어렸을 때,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깨달았을 때, 신에게 매일 밤 기도했어요.
제발, 자고 일어나면, 남들처럼 그런 평범한 사랑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어떨 땐 너무 무섭고 견딜 수 없어서, 밤을 새며 기도를 한적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그 끝없는 기도의 답변은, 그저 공허한 침묵뿐이었어요.
그리고 어느새부턴가, 저는 신을 믿지 않게 되었죠.
그런데, 신에게 다시 기도를 하고 싶어지네요. 그때는 제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으니, 당신의
직무유기의 대가인 저와 마크의 사랑을, 지켜달라고. 조금 유치하고 낯간지럽지만, 그래도
그에 대한 저의 감정은 어쩔 수가 없으니, 제발 마크를 제 곁에서 떠나지 말게 해달라고.
그렇지만, 제 기도에 대한 답변은 또 없을 걸 이미 알고 있어요.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저는
마크를 떠나보내야 겠죠.
"기다릴게."
졸업식을 일주일 압둔 어느 날 마크가 저에게 뜬금없이 꺼낸 말이었어요. 그의 입술엔 피곤한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고, 왠지 그 모습이 안쓰러웠어요.
"기다릴꺼야. 나 대학가서도, 다른 사람 사귀지 않고, 너 기다리고 있을 게. 우리, 같은 대학교
다니자."
마크의 그 말이 너무나도 고마웠지만, 저는 그냥 마크를 꼭 안아줄 수 밖에 없었어요. 그 말에
대한 저의 대답은, 확고 했으니까. 대학에 가도 얼마 안가 또 이별을 해야겠죠. 그 이후는요?
그 이후는? 마크와 저의 관계는 불안정했고, 아직도 서로의 관계를 인정하고 있지 못하잖아요.
마크도 제 대답을 알고 있는지 아무말 안하고 제 머리를 쓰다듬었어요. 이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이제는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요.
졸업식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몸을 일으켜 참여 했어요. 마크의 마지막 순간을 모두
담아두고 싶어서요. 조금도 놓치지 않고, 평생 기억할 수 있도록. 졸업하는 사람들만 앉아 있는
좌석에 앉아 있던 마크는 자꾸 뒤를 돌아보더라구요. 저는 마크를 보고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죠. 마크도 미소를 지어보였어요. 원래, 졸업식에서 우는 거 정말 꼴불견이라고 생각
했고, 졸업식이라는 게 정말 지겨워서 언제나 빨리 끝나기만을 바래왔는데, 이번만큼은
도저히 그러지 못하겠더군요.
졸업식이 끝났을 때에,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어요. 이제 정말 끝이구나. 헤어져야만 하는
순간이구나. 내일이면, 저는 방학이라 한국에 돌아가야 하고, 마크는 자신의 집으로 가겠죠.
그리고 마크는 이곳에서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대학교를 다니고, 우리는 서로 만나지 못할 거에요.
이 모든 일들이, 이제서야 실감이 되더군요. 모든 사람들이 빠져나간 대 강당에 저 혼자 그렇게
앉아 있었어요.
"나 축하 안해줄꺼야?"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는데, 어느샌가 제 앞으로 와서 선 마크가 환하게 웃고 있더군요. 저도
마크에게 미소를 지어보였어요. 당장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지만, 마지막 순간의 제 얼굴을
우는 모습으로 기억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졸업 축하해."
"아. 정말 지겨웠다구. 중학교때부터 이 학교를 다녔으니, 6년째인가.. 너를 만나지 못했다면,
난 정말 지겨워서 미쳐버렸을 지도 몰라. 어.. 뭐랄까. 깊은 터널속에서 빛을 만난 기분이었
달까. 나 당시에 이 학교가 정말 싫었었거든. 언제나 바쁜 부모님도 싫었고. 항상 모두에게
착한 척 하고, 친절하게 대하려고 했지만, 그건 어릴때부터 몸에 뱄기 때문이었달까."
"헤.. 의외네? 네가 학교를 싫어했었다니."
"나 너 처음봤을때부터 좋아했던 거 알아? 이 학교에서 너를 처음 봤을 때, 저렇게 생긴 사람도
있을 수 있구나.. 싶었어. 니가 테니스를 한다는 걸 알고는 어찌나 기뻐했던지. 아. 테니스를
너무 잘쳐서 당황하긴 했지만 말이야."
눈에서 눈물이 나려고 하는데, 억지로 참았어요. 그리고 마크에게 미소를 지었죠. 아마 굉장히
이상한 표정이었을 꺼에요. 젠장.
"시간이란 게.. 정말 빠르네. 그 짧은 시간동안 정말 별일 다 있었다, 그지? 내가 이제 성인이
된다는 게, 안믿겨 지려고 해. 이렇게 내 어린시절이 정신없이 지나갈 줄 알았다면, 조금만 더
열심히 살껄. 그래도, 너를 만난 건, 내 고등학교 생활중에 최고의 사건이었어.
너랑 같이 테니스 했던 거, 너랑 같이 콘서트 같던 거, 너랑 같이 댄스 같던 거. 전부 못잊을 꺼야.
니가 어떻게 웃었는지, 니가 어떻게 말했는지, 니가 어떻게 걸었는지. 전부. 전부 다 기억할게.
고마워. 좋은 추억 만들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미안해. 좋은 남자친구가 아니라서. 그래도, 너는
나한테 첫 남자였다구. 처음치고 이정도면 잘한 거 아냐?"
"그래. 너는 최고는 아니지만 괜찮은 남자 친구였어. 인정할게."
"깐깐하기는.. 아, 이제와서야 하는 얘기지만, 너는 최고의 남자 친구였어. 특히, 침대에서는 정말이지.."
"바보."
마크가 피식 웃더라구요. 웃는 모습이 참 예쁘네요.
저는 그렇게 말하고 잠깐 뜸을 들였어요. 아직 마크에게 한번도 해주지 못한 말을, 해줘야 했으니까.
"사랑해."
떨리는 음성으로, 간신히 말할 수 있었어요. 마크는 제 말에 그냥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어요.
그거면 충분했죠. 언제나와 같은 미소. 언제나 저에게 위안을 주었던 미소.
"안녕이란 말은 안할게. 다시 만나자."
마크는 저를 더이상 껴안아주거나,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하지 않았어요. 그는 저에게 대신
손을 내밀었죠. 저는 그 손을 잡았어요. 테니스를 해서 굳은살 때문에 까칠하지만, 그래도 따뜻하고
기분 좋은 손.
그렇게 악수를 마지막으로 마크는 돌아서서 대강당의 출구쪽을 향해서 걸어가기 시작했어요.
마크가 점점 멀어지자,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더군요. 마크의 작아져가는
뒷모습을, 그가 사라져 없어질때까지 지켜보았죠.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젠장. 사랑이란 거, 정말 싫어요. 이별이 무섭고,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게
정말 견딜 수가 없어요. 사람들은 사랑을 할때, 이별의 자리도 함께 만들어 놓는데요. 이건,
저의 잘못이에요. 제 사랑을 스스로 돌보지 못했으니, 이렇게 아파해야 하는 거겠죠.
마크가 준 반지가 아직도 제 손에 끼워져 있고, 그의 손의 체온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미 떠나
버렸네요. 오늘 하루만은, 오늘 하루만은 울어도 되겠죠? 그렇게 울고나면, 내일쯤에는
괜찮아져 있을까요?
저의 어릴시적 첫사랑이, 저의 어린시절을 가지고 그렇게 사라져 버렸어요.
불완전하고, 불안했지만, 미치도록 아름다웠던..
다시는 가질 수도, 다시는 되돌릴 수도 없는..
그런 어린 시절.
7.
졸업식이 끝나고, 저는 방학을 맞이해서 한국으로 갔어요. 차라리, 한국에 있는 편이 훨씬 좋았어요.
한국에서는 할게 너무 많아서, 적어도 마크를 그리워 하느라고 바보 같이 시간을 낭비하진 않았거든요.
일부러 이것저것 많은 일을 했어요. 아르바이트도 하고, 공부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운동도 하고.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언젠가 잊혀지겠지. 기억이란 건, 쉽게 쉽게 변하는 거니까요.
그래도, 마크가 손에 끼워준 반지만큼은 버릴 수가 없더라구요. 바보같다는 거 알지만, 그래도
그것만큼은 버려버릴 수가 없었어요. 미국에 가야할 날짜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왠지 무서워
지더라구요. 그 학교에, 마크와의 추억으로 가득찬 그 학교에, 돌아가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을
하라는건, 정말 힘든 일이었으니까요. 어쨌거나 세달간의 방학은 정말로 빨리 지나갔고, 저는 다시
학교로 와야 했죠. 너무나도 오기 싫었지만, 그래도 막상 와보니 기분이 좋더라구요. 집에 왔다..
는 느낌.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죠.
학교에 가보니, 얼굴을 처음보는 사람들이 꽤 많더라구요. 기숙사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처음보는 친구 한명이 제 방으로 들어오더라구요. 바로, 제 새 룸메이트 였었죠. 그 친구는 이미
저보다 먼저 와서 방정리가 다 끝나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이제서야 온 것 같더라구요.
"니가 내 새 룸메이트? 만나서 반가워. 난 빈센트라고 해."
빈센트라는 이름의 그 아이가 밝게 웃으며 손을 내밀더군요. 왠지 느낌이 좋은 아이였어요.
갈색의 머리에, 꽤나 남자답게 생긴 친구였죠. 그래도, 왠지 신입생이라 그런지 '어리다' 는 느낌이
팍팍 풍기는 친구였어요.
"어. 안녕, 반가워. 신입생이야?"
"응. 정확히 말하면 이 학교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이번년도에 처음으로 고등학교에 올라온
거지만 말이야. 잘 부탁해."
왠지 쾌활한 친구였어요. 말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어딘지 부족함없이 밝게 자란 아이한테서
나올 수 있는 그 천연의 밝음. 마치, 노래를 하는 것처럼 경쾌한 엑센트를 가지고 말을 하더라구요.
그 아이의 성격 탓인지 빈센트는 이야기 하기 아주 좋은 상대였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죠.
"너, 브랜디의 동생이라구?"
"응. 우리 누나 알아? 하긴, 작년까지 여기 다녔으니까. 알겠구나."
빈센트가 브랜디의 동생이었어요. 사실... 자세히 보면 생긴것도 비슷하더라구요. 어떻게 지금까지
그걸 모를 수 있었는지. 심지어 성도 같았는데 말이에요. 뭔가 마음이 복잡하더라구요. 브랜디는
지금쯤 마크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을 것이고.. 하는 생각을 하니 애증의 감정이 마구 솟아오르는
것이..
뭐, 브랜디와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그걸 동생에게 까지 이어갈 필요 있나요. 저는 빈센트와 최대한
친하게 지내려고 했어요. 룸메이트와 사이가 안좋으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것도 없거든요.
어쨌거나, 빈센트도 저를 꽤나 마음에 들어했고, 덕분에 저희 둘은 금방 친하게 지내게 되었어요.
빈센트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어요. 빈센트는 위로 누나만 둘이 있었죠. 둘 다 이 학교를
나왔고, 모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었나봐요. 빈센트 이 친구는 꽤나 훌륭한 축구 선수였고,
스타워즈를 정말로 좋아했어요. 스타워즈와 관련된 각종 물건들이 그의 책상 이곳저곳에 놓여
있는 걸로 봐선... 아, 근데 별로 중요하지 않은가요? 어쨌거나..
저는 당시 11학년에 막 올라간 상태였고, 미국 고등학교 생활에 있어서 11학년은 가장 중요한 때로
여겨지고 있어요. 실제로 대학에서도 가장 많이 비중을 두는 게 11학년때의 성적이구요. 덕분에
저는 정말로 시작하자 마자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어요. 항상 홈워크와 페이퍼에 치여 살았죠.
사실 제가 일부러 어려운 과목들만 골라서 들은 것도 있긴 해요. 저는 공부를 하는때가 제일 마음이
편했어요. 공부를 하면 집중을 해야하기 때문에, 잡생각들이 전혀 나지 않았거든요. 이 학교에서
마크의 빈자리를 버텨낼 수 있는 나름의 제 방법이었죠.
빈센트는.. 으음. 공부를 못하는 건 아니고, 오히려 성적이 매우 높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그런 저를
항상 못마땅해 했어요. 어떻게는 저를 데리고 나가서 놀고 싶어했죠.
"심각하게. 너 공부좀 그만하고 오늘 나랑 브랜든네 집에 가자."
.. 안타깝게도 저는 브랜든이 누군지도 몰랐어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을 제가 알게 뭔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센트는 막무가내였죠. 뭐, 토요일이었고, 그렇게 할일도 많지 않았기에
기분 전환하기에 나쁘지 않다.. 싶었어요. 브랜든은, 빈센트의 중학교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 였다고
하더군요. 브랜든의 집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외곽에 자리잡고 있었어요. 브랜든은 덕분에
기숙사에서 살지 않고, 집에서 학교를 다닌다고 하더군요.
집은, 아주 크진 않았지만, 아주 아기자기하고 예뻤어요. 아주 봄에 어울리는 집이었죠. 깔끔하고
아담한, 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집이었어요. 그 집의 정원에서 한 소년이 한 세살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축구를 하며 놀고 있더군요.
"브랜든!"
빈센트가 그 소년을 향해 크게 소리지르니, 그 소년이 이쪽을 바라보더군요. 어? 근데 어쩐지 낯이
익더라구요.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옛날에 스포츠 시상식을 할때 한번 본적이 있는 친구더라구요.
고등학교 축구팀에서 중학생 신분으로 플레이하던 그 친구. 그때, 웃는 모습이 참 예뻐서 인상 깊었
었는데, 이번에 고등학교로 올라왔나 봐요. 우리를 보자 브랜든이 반갑게 손을 흔들더군요.
"오늘 귀한 손님을 모시고 왔다고."
"귀한 손님?"
빈센트가 능청스럽게 말하자 브랜든이 의아한 듯 되묻더군요. 빈센트가 저와 브랜든을 번갈아 보며
말했어요.
"응. 내 새로운 룸메이트. 인사해. 이쪽이 브랜든. 저스틴 팀버레이크 닮았지?"
"다 좋은데, 그놈의 저스틴 팀버레이크는 좀 빼줘라. 제발 부탁이다."
빈센트가 장난조로 말하긴 했지만, 실제로 브랜든은 저스틴 팀버레이크와 판박이었어요. 머리도
짧게 짤랐던 지라, 더욱 더 닮아보였어요. 하늘색의 눈색깔하며, 금발인거 하며. 웃을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도 비슷했죠. 아주 잘생긴 친구였어요.
"어쨌거나, 만나서 반가워. 빈센트 녀석이랑 방짝 하려면 고생 좀 하겠지만."
"스읍, 쓸데없는 소리."
"나 중학교때 얘랑 같이 방쓴 적 있었는데, 어찌나 방을 안치우던지. 이 자식이 어질러 놓은거
내가 다 치웠다니까. 또 어찌나 게으른지, 밥먹으러 가는 것 조차 귀찮아서 해서 주말 내내 피자만
시켜 먹던 놈이야, 이게."
"내가 언제! 내가 얼마나 방을 열심히 청소했는데.."
이 둘, 왠지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귀엽더라구요. 둘다 저보다 학년상으로는 두 학년이 어렸지만,
제가 미국에 유학갔을때 한학년을 높여서 간지라, 나이상으로는 한살이 어렸어요. 한살 차이밖에
안나는 데도 불구하고 왜 '아이들을 돌보는 형'같은 느낌이 드는건지요.
"너 작년에 고등학교 축구 팀에서 축구 했지? 스포츠 시상식에서 웬 저스틴 팀버레이크 닮은 아이가
있길래 신기해서 기억해 뒀는데. 그게 너였나보네."
"으하하하. 봤지? 얘도 너보고 저스틴 닮았대잖아."
제가 안다고 하니까 좋아하다가 저스틴 닮았다는 말을 꺼내니까 브랜든의 표정이 뾰루퉁해지더군요.
....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이 아이의 컴플렉스였나 봅니다. 근데, 그게 왜 컴플렉스인지
아직도 도통 이해가.. 그 잘생긴 청년을 닮았다고 하는게 싫은가봐요.
왠지 같이 있기만 해도 유쾌해 지는 아이들이었어요. 누군가가 떠나면, 누군가가 항상 다가오는 법
인가봐요. 당시 졸업한 사람들을 그리워 하던 저에게, 제 인생에 새롭게 들어온 이 친구들은
커다란 위안이 되었어요.
8.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브랜든을 꽤나 마음에 들어했어요. 그는, 빈센트와는 조금 달랐어요.
누구에게나 말을 잘 걸고, 활달한 빈센트에 비해서, 브랜든은 제한된 사람에게만 마음을 여는
그런 친구였어요. 오히려 과묵한 편이었고, 친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만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하는 그런 타입. 그러니까, 처음에 브랜든과 친해지는 건 쉽지 않았어요. 저도 사람들에게 막
먼저 말을 걸고 하는 타입은 아니거든요. 저희 둘이 만날 때면 빈센트가 항상 함께 있었고,
덕분에 어색하지 않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정도였으니까요. 빈센트가 없을 때 만나기라도
하면 왠지 굉장히 뻘쭘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던 와중에, 축구부 매니저를 하라는 제의가 들어왔어요. 테니스는 내년 봄에나 시작할
것이고 이번 가을에는 할 운동이 없으니 자기와 브랜드이랑 같이 축구를 하자며 빈센트가 조르
더군요. 저는 매니저가 얼마나 귀찮은 건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거절하려고 했죠.
"글쎄, 내가 직접 플레이 하는 거면 몰라도 매니저는 싫다니깐."
"그럼 축구를 우리랑 같이 하던가!"
"글쎄, 내가 손으로 하는 운동이면 몰라도 발로 하는 운동은 젬병이라니까 그러네! 나 심지어
팀 선발전도 통과 못할꺼라구!"
"그러니까, 매니저 해. 매니저는 선발전 같은 거 필요 없잖아. 우리는 매니저가 필요하다고."
.. 거 끈질기네요 참. 매니저 할 애들은 널리고 널렸을텐데 왜 이러는 건지.
"이쁜 여자나 골라서 매니져 시키라고! 칙칙하게 남자들만 있는 축구팀에 매니저까지 남자면.."
"여자가 하기엔 너무 벅차다니까. 물 나르고, 수건 나르고, 보호도구 나르고, 구급상자 나르고.."
"그러니까 그걸 다 날라줄 머슴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군?"
제가 말하자 빈센트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더군요. 바보녀석. 뭐.. 빈센트도 있고 브랜든도 있으면
꽤나 재미있을 것 같다.. 고 생각했어요. 빈센트가 이렇게까지 해달라고 하는데 안해 줄 이유도
없을 것 같고.
"그래.. 알겠어. 할께. 그럼 됐지?"
"으하하. 고마워!"
그러더니 빈센트가 저를 꼭 껴안더군요. 제 얼굴에 닿는 빈센트의 머리결의 느낌이 참 좋았어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백인들의 머리결이 참 좋아요. 동양인들의 머리는 뻑뻑하고 거친데 반해서,
백인들의 머리는 아주 부드럽고 가늘었거든요. 별다른 손질 없이, 커트만 해도 아주 이뻐서
부러워 하곤 했었죠.
귀여운 동생 같은 녀석이었어요 빈센트는. 그래도 브랜디와 흡사하게 생긴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마크도 같이 떠올라서 가슴한구석이 욱신욱신 아파오곤 했어요.
축구팀의 매니저를 하기로 하긴 했지만, 저는 시합이 있을때만 도와주러 가면 되었어요. 연습때는
매니저가 할 일이 딱히 없었거든요. 그런데, 시합이 참 자주 있더군요. 많아봐야 일주일에 한번내지
두번정도인 테니스 팀과는 다르게 축구팀은 일주일에 세번 이상 있는 경우가 많았어요. 타학교로
원정을 갈때도 많았어요. 오고가는 버스안에서, 브랜든과 빈센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죠.
하루는 시합이 있었는데, 빈센트가 디텐션에 걸렸더라구요. 숙제를 안해가거나, 선생님이 말하는 걸
안할 경우에 디텐션을 주었는데, 디텐션이 걸린 날은 도서관에 가서 강제로 공부를 해야해요.
시합이나 연습은 가지 못했죠. 빈센트에게 디텐션이 걸린 이유를 물어보니까,
"아, 글쎄. 내가 어제 헤일로를 좀 하다가 밤에 늦게 자서, 수업시간에 조금 졸았다고 쳐. 자라나는
청소년은 모름지기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 하는데, 그 중요하지도 않은 스페인어 시간에 좀 잠좀
잤다고 디텐션을 주는 게 선생으로서 과연 옳은일일까? 나는 근본적으로 헤일로 같이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어서 학생들을 잠못자게 만드는 이 나라의 상업주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그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안하고 학생 개개인에게 잘못을 떠넘기는 것은.."
빈센트는 저렇게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제멋대로 만들어서 이어나가는 게 주특기였죠. 다 헛소리고,
각설하면 스페인어 시간에 졸았다는 거죠. 그나저나, 코치는 정말 화가났어요. 빈센트는 중요한
공격수였고, 그가 없으면 전력에 이상이 생기니까요. 하필이면 시합날 디텐션을 받은 걸까요.
어쨌거나 빈센트 없이 버스는 출발했고, 저는 브랜든과 앉게 되었어요. 왠지 브랜든은 말이 많은
편이 아니라서, 둘만 있으니 어색하더군요.
저는 왠지 불편해서 귀에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듣기 시작했어요. 잠시 그렇게 음악을 듣고 앉아
있는데, 브랜든이 은근슬쩍 제 귀에서 한쪽의 이어폰을 뽑아가더니, 자신의 귀에 가져가서 듣기
시작하더라구요.
"어? 나 이 노래 무지 좋아하는데."
심드렁하던 브랜든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더라구요.. 귀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노래는,
Red Hot Chili Peppers 의 「Californication」이란 노래였어요. 이 곡은, 마크가 특히 좋아하던
노래 였어요. 마크의 방에서 계속 듣다보니 저도 덩달아 좋아하게 되어버렸지만.
"이 노래 좋아해?"
"응! 나 이 씨디 가지고 있어. 옛날에 정말 여러번 들었었는데. 근데 의외네. 락음악 좋아해?"
브랜든이 활짝 웃으며 물어보았어요. 그 천진난만한 미소가 어찌나 귀여워 보이던지.
"아.. 그게. 원래는 전혀 안좋아했었는데, 내가 좋아하던 사람이 그런쪽의 음악을 좋아했거든.
같이 있는 시간이 많이 있다보니까, 나도 자연스레 좋아하게 되 버렸어."
"헤에.. 좋아하는 사람을 닮아버렸다니, 왠지 낭만적이네. 지금 그 사람 어디갔어? 우리
학교 사람이야?"
"아.. 응. 우리학교 다녔었는데, 작년에 졸업했어."
별로 꺼내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서 대강 얼버무렸어요. 아직까지 마크 이야기는 제 마음을
아프게 했거든요. 가끔씩은 너무 보고 싶어서 다 포기하고 마크가 있는 대학으로 찾아가고
싶었던 적도 많으니까요. 지금 다시 마크 이야기를 하니 왠지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제 표정이 어두운게 마음에 걸렸나봐요. 브랜든이 조심스레 묻더군요.
"많이.. 좋아했었어?"
저는 아무말 앉고 고개를 끄덕였어요.
"지금은 못 만나는 거야? 헤어졌어?"
손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며 그냥 묵묵히 있었어요. 무슨 말을 했다간 그대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어요. 그런 저를 보더니 브랜든이 미안했는지, 아니면 안쓰러웠는지 별안간 제 머리를
쓰다듬더라구요. 순간 흠칫 했어요. 그 손길이 주는 느낌이, 마크가 제 머리를 쓰다듬을 때와의
느낌과 너무 비슷했거든요.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어요. 그 손길이 주는 느낌이 오랫동안 감춰두었던 감정을 다시 기억나게
해 버렸나봐요. 헤어질때의 그 슬펐던 기억이, 그대로 다 다시 살아나서 계속해서 울어버렸어요.
브랜든은 아무말 안한채로 그렇게 제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어요.
9.
그날 어떻게 경기를 하고 어떻게 기숙사까지 돌아왔는지는 잘 기억이 않나요. 단지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도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자괴감이 들 뿐이었어요. 오늘은 무슨수로
브랜든의 얼굴을 보나.. 싶었죠. 여튼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고 있으려니까 빈센트가 의아한
얼굴로 물어보더군요.
"괜찮아?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오자마자 정신없이 자더니만."
"아, 응. 아니. 괜찮아. 그냥 좀... 디텐션은 어땠어?"
"끔찍했지 뭐. 도서관에서 계속 있어야 했는데, 숙제를 다 끝내니 할 게 없더라구. 그래서 이주
뒤까지 내야 하는 페이퍼도 써버렸지. 맨날 이렇게 공부하면 나 하버드 갈지도 모르겠어."
짜식. 그거 한번 했다고 오버는. 어쨌거나, 식당에서 저는 아침을 대강 해결하고는 클래스로
향했어요. 클래스로 향하는 길에, 차에서 내리는 브랜든이 보이더군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저는 엄청나게 고민했어요. 말을 걸자니 민망하고, 말을 안걸자니 그것도 이상하고. 그런데 고민은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게 저를 바라보며 미소짓는 브랜든에 의해 가볍게 해결 되었어요.
"잘 잤어? 어제 경기 굉장했지?"
브랜든의 목소리는 기분 좋아요. 그렇게 높지 않은, 어딘지 소년스러움이 묻어있는 그런 목소리.
"그렇네. 빈센트 없이도 정말 잘했어."
"하하, 그렇게. 어제 빈센트 녀석 많이 약올랐겠다? 디텐션 걸린데다가, 시합도 못나가고."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에 투덜 투덜 대던데."
"바보 녀석."
그렇게 브랜든과 함께 빈센트를 놀려대며 같이 교실로 향했어요. 어제 일에 대해서 전혀 어색하게
대해주지 않는 브랜든이 참 고마웠어요. 그것에 대해선 묻지도, 그렇다고 티나게 위로하지도 않았죠.
그냥 저를 조용히 지켜봐줄 뿐이었어요. 그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되었는지. 그 당시 그는 알고
있었을까요?
그들과 함께 하는 축구 가을 시즌은 재미있었어요. 가끔씩은 지기도 하고, 이기기도 하면서, 결국에는
우리 학교는 결승까지 올라갔죠. 축구라는 게 그렇게 재미있다는 걸 처음 알기도 했어요. 빈센트가, 혹은
브랜든이 골을 넣을 때마다 우리는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고, 그런 날은 우리들만의 파티를 열기도 했어요.
항상 장소는 브랜든의 집이었고, 갈때마다 하도 난리를 쳐서 그의 부모님께는 조금 죄송하기도 했지만요.
물론 즐거운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정말 끔찍한 사건도 있었죠. 아마 원정 경기때였을 꺼에요.
그 날따라 날씨가 습기가 차 있었고, 많은 선수들이 거칠게 플레이를 하고 있었어요. 아마도, 다들
짜증이 났겠죠. 양쪽 다 부상이 속출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어요. 덕분에 매니져였던 저는 구급상자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어요.
그런데, 정말 놀랐던 건 빈센트가 상대편과 충돌을 했을 때였어요. 저는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둘다 충돌을 하고 난 이후에 도저히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하더라구요. 저는 놀라서 달려갔고,
빈센트의 상태는.. 정말로 심각해 보였어요. 항상 웃고 있었던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그의 다리는 마구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어요. 재빨리 신발을 벗겨보니 심하게 부어오르고 있더군요.
그 부어오른 정도가 너무 심해서 저는 어쩔 줄 몰라했어요.
"괜찮아? 괜찮아?"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빈센트의 얼굴을 보고, 그의 심하게 부어오른 다리를 보니 엄청나게 무서운
생각들만 들더군요. 이거 정말 잘못되는 거 아닌지.. 저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였었나봐요.
그런데 그런 저를 보더니 빈센트가 억지로 웃어보이더라구요. 바보. 자기가 더 아프고 두려웠을 텐데
저를 안심시키려였는 건지. 그렇게 제가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사이에 어느샌가 코치님과
감독님이 달려와서 그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더라구요.
시합이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게, 저는 기숙사에 와서 초조하게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요.
그런데, 결국 그 날밤은 오지 않더라구요. 엄청나게 무서운 생각이 드는 것이. 혹시 뭔가 잘못되었
으면 어떻하지? 빈센트의 표정이 정말 안 좋던데. 하면서 온갖 무서운 생각이 들더라구요.
너무 초조해서 그 다음날 클래스가 시작하기도 전에 감독님에게 달려가서 빈센트의 상황을
물었죠. 감독님이 말씀하신건 무서울 정도였어요. 그의 뼈가 부러져 있었고,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
그가 학교로 돌아왔던 건 일주일 뒤였어요. 다리에는 붕대를 하고, 목발을 집고 방에 나타났더
군요.
"여어. 나 왔어."
너무나도 평온하게 저에게 말하길래 저는 잠시 멍하게 그를 바라봐야 했어요. 제가 그렇게 아무말
없이 바라보고 있으니 빈센트가 많이 민망했나봐요. 머리를 글쩍이더라구요.
"에... 내가 전혀 반갑지 않은거야?"
그럴리가요. 저는 당장에 달려가서 빈센트를 확 껴안아 버렸죠. 수술받느라고 잘 먹지도 못했는지
많이 여위었더라구요.
"헤헤. 나 많이 그리워 했나보네. 어떻게 문병도 한번 안오냐?"
"바보야. 누군 가기 싫어서 안갔냐. 자동차도 없는 데 거기까지 무슨 수로 가냐?"
빈센트는 여전하더라구요. 다쳐서 많이 아팠을텐데도, 언제나 밝게 웃을 수 있는, 참 부러운 성격.
그나저나 저는 툭하면 울려는 그 버릇좀 고쳐야 할텐데 말이에요. 이건 마크와 사귀면서 생긴
버릇 같기도 해요.
"근데, 어떻게 이렇게 일찍 나온거야? 수술하고 뭐하고 하려면 오래 있어야 한다고 들었는데?"
"내 말이. 거기에서 할게 너무 없는거야. 수술을 하고 일주일간 어찌나 지겹던지. 최소한 이주정도는
병원에 있어야 한다길래 끔찍해서 그냥 학교에 돌아가는 게 낫겠다고 했지 뭐. 엄마한테 마구 조르니까
허락해주시더라. 우리 엄마 나한테 약하거든."
"그래도 다 나을 때까지 거기에 있는 게 낳지 않아? 더 빨리 나을 꺼 아냐."
"아냐 아냐. 지겨워서 내 상태가 더 악화되었을꺼야. 빨리 나오길 잘 했어."
물론, 본인에겐 빨리 나온게 잘 된 일일지 모르겠으나, 룸메이트 였던 저에게는 그다지 잘된 일은
아니었어요. 물론, 빈센트를 빨리 볼 수 있게 된건 좋았지만, 에.... 무진장 귀찮았던 거죠.
그의 음식을 항상 식당에서 따로 챙겨워서 같다 먹여야 했고, 클래스 갈때 책가방도 날라다
주어야 했으며, 어디 나가려고 할때마다 항상 부축을 해주어야 했고, 심지어 씻는 것도 도와
주어야 했으니까요. 뭐, 그래도 그렇게 싫진 않았어요. 빈센트는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친구였으니까. 언제나 제가 도와줄때면 빈센트는 미안한 미소를 지어보이곤 했어요.
상당한 기간동안 룸메이트를 해온지라, 저는 빈센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어요.
겉으로는 좀 철없는 아이처럼 굴었지만, 속은 매우 깊은 친구였어요. 항상 뭐가 다른 사람에게
좋은지 생각을 하고 행동을 했죠. 어떤 의미에선 저보다 더 어른 스러웠으니까요.
아마 그 미소속엔 "미안해, 고마워"와 같은 말들을 감추고 있었을 꺼에요. 그리고 그게 제가
빈센트를 미워할 수 없었던 이유였었죠. 귀여운 녀석이었어요.
10.
뭐랄까, 저는 마크의 빈자리를, 브랜든을 통해 채우고 있었어요. 항상 마크 때문이 힘이 들때면,
어느순간부턴가 브랜든의 미소를 보고 싶어졌어요. 그의 미소를 보고 있을 때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어요. 항상 조용히 절 바라봐주는 그 눈이 좋았어요.
참 아이러니 한거 같아요. 모두들 영원한 사랑을 꿈꾸지만, 한 사람만을 영원히 사랑할 수는 없단거.
눈에서 보이지 않으면 기억에서도 잊혀 지나봐요. 결국 사랑이랑건, 단순한 욕망이었던 것 뿐일까요?
그래도 그렇게나 아팠는데, 그게 다 거짓이었다구요? 그렇게 믿고싶진 않아요. 단지 제 마음이
내일로 가기 위해서 스스로를 치유한 거라고 믿고 싶어요. 그렇게 제 상처는 서서히 아물어 갔어요.
다른 사랑을 위한 자리를 조금은 남겨둔채.
물론 그 당시에 브랜든을 사랑했다라거나 하는 거창한 감정을 품었던 건 아니에요. 오히려 그에게서
마크를 찾으려고 했었어요. 그 손길에서, 그 미소에서 아득히 그리워했던 마크를 발견할 수 있었나봐요.
그런데 한가지 이상했던 점은 브랜든은 마크를 전혀, 조금도 닮지 않았다는 거에요. 마크의 짙은
갈색의 머리색과는 달리 브랜든의 머리는 찬란한 금발이었고, 마크의 갈색눈동자와 대비되는 파란색
눈을 가진, 전형적인 금발의 소년이었거든요. 둘이 닮은 점이 있다면 아마도 그 어딘지 수줍은 듯한
미소와 조용하지만 착실한 성품같은 것이있었겠죠.
아마도 이때 쯔음에, 브랜든에게 그냥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조용하지만,
그래도 밝고 천진한 이 친구에게, 저는 서서히 끌리기 시작했죠. 뭐, 그의 외모가 굉장히 아름다웠다는
사실도 있었던 걸 부인은 안할게요. 이제 한창 클 나이인 브랜든의 외모는, 그러니까, 하루가 다르게
달라졌어요. 저보다 약간 작았던 키도 어느샌가 저보다 커져 있었고, 이목구비도 뚜렷해졌어요.
그냥 예쁘장한 소년처럼만 보였던 그가, 어느샌가 매우 남자다워져 있더라구요.
빈센트가 다친 터라, 한동안 축구부에는 저와 브랜든만이 남게되었어요. 저는 그를 더욱더 알아갈
시간이 많아졌고,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매력적인 친구였어요.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처음에는 그렇게 말이 많지 않던 브랜든도, 친해지면서 점점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더라구요.
그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나지막히 읊조리면, 마치 기분좋은 음악에 잠겨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가 살아온 과정은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았어요. 저번에 학교에서 이혼에 관련된 조사를 할때
거의 클래스에 있는 아이들 중 삼분의 일이 아이들이 부모가 이혼했다고 손을 드는 것을 보고
놀란적이 있었는데, 브랜든도 그런 경우더라구요. 그가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그의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고, 그는 그 이후로 쭉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모양이더라구요. 아버지께서
알콜 중독자였었나봐요. 브랜든은 두명의 동생이 있었대요. 그러면서 사진을 보여주는데,
브랜든이 자신의 동생들을 너무 귀여워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게 눈에 보이더라구요.
"여기 얘는 막내. 세살이고, 얘는 둘째야. 다섯살. 귀엽지?"
"우와. 귀엽네. 잠깐 근데 세살이고 다섯살이면 부모님께서 이혼하고 나서 생긴 아이들 아니야?"
이 질문을 하고나선 아차 싶더라구요. 어쩌면 아픈데를 건드린 걸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브랜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대답하더라구요.
"아아. 지금 우리 엄마랑 남자친구가 만든 애들이야. 나랑 아빠는 다르지. 뭐 그렇더라도 얘들이
내 동생들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잖아?"
"그렇.. 구나.."
그 이상은 왠지 물어보기가 무서워 지더라구요. 왜 재혼을 안하시고 아이들만 더 나으시는 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 이상은 묻지 않기로 했어요. 누구나가 하나쯤은 건들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상처가 있게 마련이잖아요?
"나중에 우리 집에 같이 갈래? 얘네들 엄청 예뻐. 저번에는 말야, 내가 축구하고 나서 집에서
가자마자 침대에 누워서 쉬고 있으려니까, 얘네들 둘이 쪼르르 달려와가지고는 묻더라고.
'형아? 어디 아퍼?' 그래서 괜찮다고 그러니까 갑자기 청진기를 들고 오더니 진찰해주겠다고
막 성화인거야. 그리고 저번에는 또..."
동생들 자랑에 여념이 없는 브랜든을 지켜보는 건 너무 재미있었어요. 평소에는 과묵하던 그가
동생들 이야기만 나오면 말이 많아지는 게. 어딘지 굉장히 사랑스러웠어요. 그를 알아가면 알아
갈수록, 더 많은 게 알고 싶어졌죠. 그렇게 브랜든에게 조금씩 빠져가고 있던 저는, 저를 바라
보던 다른 시선을 놓치고 있었어요. 이때 부터 무언가 좀 꼬이기 시작했었죠.
저의 브랜든에 대한 복잡한 감정도 감정이었지만, 빈센트의 짜증도 늘어만 갔어요. 원래 굉장히
밝고 활발한 아이인데, 다리가 생각처럼 빨리 낫지 않자 초조해 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축구 시즌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마음 껏 나가서 뛰어놀 수 없다는 불편함도 그의
짜증을 더 했겠죠. 백번 이해가 갔어요. 그런데, 저한테 이유없이 신경질을 낼 때는 이해해야지
하면서도 폭발할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식이죠.
"내가 올리브 넣지 말랬잖아! 핫페퍼도 들어가 있네? 나 매운 거 못먹는 거 알면서!"
그것이 말입니다. 하루는 주말이었는데 식당밥이 먹기가 싫어서 제가 서브웨이에 가서 샌드위치를
사오기로 했었죠. 근데 빈센트 이 인간이 뭘 좋아하는지 제가 알게 뭡니까. 그래도 참을인자 세번이
면 살인도 막는다는 정신으로 참으려 했죠.
"아, 미안해. 내가 그거 빼줄게. 나한테 줘."
"됐어! 으앗! 이건 또 뭐야. 허니 머스타드를 넣어야지 스윗 어니언 소스를 넣으면 어떻게 해!"
뭔가가 머리속에서 뿌직하고 터졌지만 참으로 했어요. 암, 내쪽이 훨씬 성숙하니까.
"내꺼랑 바꿀래? 이건 허니 머스터드 인데."
"됐어! 이 빵은 또 이탈리안이야? 치즈는 아메리칸으로 했어야지!"
이 인간이. 이쯤 되자 저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어요.
"그럼 먹지 말던가! 나 줘, 그럼! 내가 다 먹을게!"
결국 제가 폭발하자 빈센트가 미안해졌는지 아무 말 않고 먹기 시작하더라구요. 먹을 것 가지고
투정부리는 녀석이 아니었는데. 매사에 짜증으로 일관하니 화난다기 보다는 안쓰러웠어요.
옆에 있는 저도 불편한게 많았는데, 본인은 얼마나 불편했겠어요.
그래도 이건 약과에 불과했어요. 하루는 정말 심각하게 그가 폭발했던 적이 있었어요.
축구 시합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왔었는데, 불이 꺼져 있더라구요. 저는 그가 자는 줄 알고
최대한 조심해서 들어가려고 했었죠. 근데 방에 들어가보니까 방이 엉망이 되어 있는 거에요.
빈센트는 배게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꼼작도 않고 있더라구요. 저는 걱정이 되서 물어봤죠.
"빈센트, 자는 거야? 무슨 일 있었어?"
"나 자니까 좀 내버려 둬."
... 안자는 구만.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방은 또 왜 이렇고? 니가 그런 거야? .... 우는 거야?"
얼굴을 배게에 파묻고 있어서 볼수는 없었지만, 그의 등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어요.
"빈센트, 괜찮은 거야?"
"괜찮아! 괜찮다구! 다리가 병신이 되서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는 걸 빼면, 아주 괜찮으니까
좀 혼자 내버려 둘래?!"
그가 소리를 질렀어요. 그는 울고 있었고, 불안했나봐요. 제가 좀 소홀하긴 했죠. 브랜든과
시간을 보내느라고, 혼자 방에 계속 빈센트를 남겨두었으니까. 저는 그냥 아무말 없이 빈센트의
등을 토닥여 주었어요. 저는 솔직히 많이 놀랐어요. 빈센트가 이렇게 화난 모습은 처음 보니까.
"나... 이대로 다리가 안 나으면 어떻하지? 왜 한참이 지났는데 조금도 나아지질 않는거야?"
그는 초조해 하고 있었어요. 축구 시즌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자신만 플레이 할 수 없어서
매우 씁쓸해 했겠죠. 가끔씩 축구 연습에 나와서 연습하는 친구들을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그의 모습이 안타까웠 었는데. 혼자서 많이 고민하고 있었나봐요.
"괜찮아 질거야. 사람마다 회복속도가 차이가 있는 거고, 니 다리가 무슨 로보캅이냐? 부서진게
순식간에 다시 붙게. 곧 예전처럼 다시 뛸 수 있을 거야."
이런 위로 밖에는 해줄 수 없었어요. 서투른 위로가 그를 더 초조하게 할것 같아서 말이에요.
그리고는, 누군가가 제가 힘들때 저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저도 차분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어요. 그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만 있었어요. 그래도 제 손길에 조금씩 빈센트가
진정되어 가는 게 느껴졌어요. 다행이에요.
뭐랄까, 여러가지 사건들과, 복잡한 감정들이 그렇게 마구 오고가는 채로, 어느샌가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어요.
저는 지금도 가끔씩 바라곤 해요. 그 당시에, 제가 조금만 더 어른스러웠 었다면, 보다 성숙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모두에게 조금 더 나은 미래가 주었졌을까? 하고요. 쓸데 없는
후회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아쉬움이 드는건 어쩔수가 없네요.
첫댓글 갠적으로 주인공이 참 마음에 드네요ㅎㅎ
주인공에 대한 묘사가 실감되요. 글을 잘쓰시는 것같아요.
겁나서 다음글을 못 읽겠는 ,, 아햐
소설이라고 읽으면서도 현실처럼 느껴지는 스토리 전개,,,,다음편 기대합니다~
빈센트가 좋아하는것같은데요
어디선가 있을법한 일들인 것 같아요.
혹시 빈센트도 좋아하는거 아닌가요~?/
혹시 빈센트도 좋아하는거 아닌가요~?/
저도 빈센트가 좋아하는 것 같아요
새로운 사람과의만남,,새로운 일들이 전개되고..마크이야기는 없지만 브랜든이나 빈센트가 나오는데 둘다 괜찮은거같아요..아마도 서로 어긋난 만남이 시작될까요?궁금하네요..
재밌어요... 담편보러 가야겠군요....
역시 담 편 겁나요.... 제발 슬프지 말기를...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