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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핵심인 모심사상
‘영남사상(嶺南思想)’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여러 가지로 애기됐고,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영남은 전통적으로 추로지향, 공맹의 땅이라고까지 불리던 데입니다. 이 땅에 벌써 신라 때부터 사상의 새로운 전기가 시작됐는데 영남사상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리고 영남학(嶺南學)이 성립되려면 영남의 사상적 전통 가운데 어떤 부문이 현대화에 가장 접근한 지점에서 현대적 학문으로, 지역학으로, 지역문화로, 지역사상으로 성립할 수 있겠는가? 지금 지역이라는 것은 꼭 지역만이 아닙니다. 세계화 속에서의 지역이고 세계화와 함께 진행되는 지역화입니다. 그래서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을 로컬라이제이션(localization)과 합쳐서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이라고 하죠. 지역으로 더 촘촘하게 나가면서 들어가면서 세계로 더 넓게 나아가는 것이 지금의 대세입니다.
영남학이 성립한다면 영남학의 핵심적인 패러다임은 무엇일까요? 이건 제 생각이니까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여튼 제가 애기하고 싶은 것은 ‘모심(侍)’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오늘의 주제를 ‘모심’이라고 했습니다.
수운 최제우 선생의 사상 가운데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모심’이 어떻게 해서 신라 이후에 영남의 사상적 전개과정에 있어서 윤리와 철학의 핵심으로 연결되는 것이냐, 이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현대적 의미는 무엇이냐에 대해 한번 검토해봅시다.
한마디로 말씀드려서 모심, 즉 ‘모실 시(侍)’ 자죠. 이것은 동학사상(東學思想)의 핵심입니다. 동학사상의 핵심은 21자 혹은 13자 주문(呪文)에 있고, 주문의 핵심은 맨 앞에 나오는 侍, 한 글자에 있습니다. 즉 ‘모시는 태도’이고, 또한 사상적으로는 ‘모심’입니다.
‘시(侍)’라는 한 글자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동학이 이렇게도 보이고 저렇게도 보입니다. 또 동학을 공부한 저 같은 사람으로서는 모심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삶의 태도가 이렇게 저렇게 변경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확인하기로는 모심이라는 패러다임은 일체 존재와 생명과 관계의 비밀입니다.
먼저 관계를 말씀 드리면 내가 저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내가 저 사람에 대해서 저 사람이 나에 대해서 모시는 태도를 갖느냐 안 갖느냐에 따라서 두 사람 태도가 결정날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은 인간과 인간관계가 완전히 금융관계올시다. 담보 없이도 돈 빌려주는 사람은 없죠. 이것이 소위 근대화 이후 우리나라 인간의 생명관계가 전부 이상하게 된 증거올시다. 인간과 토지의 관계는 소유관계로, 인간과 인간관계는 금융관계로, 인간과 노동의 관계는 소위 생계 노동의 관계로 전락했습니다. 이것이 근대화이후 우리의 문제올시다.
이것에 비해서 본다면 모심이란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상대방을 높이 대접하는 태도이기 때문에 상대방과 나의 관계를 윤리적∙생태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바로 모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개인의 존재, 생명의 핵심은 왜 또 모심이냐?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내가 산다는 것, 내가 이 땅에 있다는 것, 지금 여기에 앉아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철학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무언가를 모시는 겁니다. 내가 있다는 것,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모신 겁니다. 무엇을 모셨을까요? 마음을 모실 수도 있고, 생명을 모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불교에서는 아시다시피 허공(虛空)을 모십니다. 공(空)을 모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겁니다. 무(無), 없음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자유롭습니다. 선불교와 전혀 같지 않습니다만 퇴계의 거경(居敬), 공경(恭敬) 내부에도 성(性)과 이(理)라는 소위 지적인 논리의 전개로는 잡을 수 없는, 즉 조리(條理)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 근원적인 것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선불교, 선학(禪學)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허공입니다. 그러나 유학의 입장에서 보면 허공이 아니올시다. 그 차이는 있으나 무엇을 모시는 것에서는 같습니다.
존재한다는 것, 산다는 것, 사람과 사람이 관계한다는 것, 사람과 다른 생명체가 관계한다는 것, 심지어 컴퓨터와 같은 인공 기계물과 인간의 관계도 모심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15년, 20년 전 일본의 동경대학에 이마미찌 도모노부 선생은『에코에티카』라는 저술을 발표했습니다. 그것은 기계 인공물에 대한 인간의 윤리적 관계올시다. 제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 젊은 세대들은 인공 기계, 컴퓨터나 기타 핸드폰이라든가 노트북에 노출되어 있고 이것과 관계가 깊습니다. 심지어 하루 11시간, 12시간씩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젊은이도 흔합니다.
서양보다 앞선 동양의 생명사상
따라서 사람과 사람 관계 못지않게 인간과 기계 사이의 윤리적 관계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에코 에티카, 생태윤리라고 불렀습니다. 생태윤리란 것은 지금 그렇게 말을 했으니까 신기한 것 같지만 사실은 경물(敬物), 수운 선생과 해월 최시형 선생께서 물건까지도 공경을 해야 도덕의 극치에 도달한다는 말씀을 한 바 있고, 경물이란 농경사회에서 연장이라든가 공구를 모시는 하나의 태도로서 이를 정중하게 대하는 것은 이미 습속입니다. 철학 이전에 농민들의 한 습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호미씻이’라는 것이 있고, 또 농경이 시작되기 이전에 연장을 깨끗이 닦아서 바람 통하는 헛간에 놓아두곤 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물건에 대한 관계에서까지도 모심이라는 것은 중요하다, 이런 정도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모심이 이렇게 중요하고 사실 모심의 ‘시’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동학의 핵심 문제인데 사실은 오늘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현대에 와서 가장 중요한 학문, 가장 중요한 과학으로, 혹은 윤리적 태도로 등장하고 있는 생태학, 에콜로지의 기본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서양 생태학이 아직은 해결 못한 문제올시다. 서양의 사상사적 배경에 의해서는 적어도 물건까지 모시는 태도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오직 동양만이 사람과 사람, 사람과 뭇 생명, 사람과 자기 안에 있는 신령한 마음, 그리고 물건에까지도 모시는 윤리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같습니다.
물론 서양에도 범신론(汎神論)의 전통이 있고 스피노자와 같은 위대한 생명윤리학의 전통이 있습니다. 그것이 요즘 서양학의 새로운 부문으로 나타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 스피노자 등의 범신론 같은 반플라톤적인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서구에서는 여론의 뭇매를 맞습니다. 그렇게 서양 사상사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서양사상사의 배경에서는 전 인류와 지구의 문제, 우리의 생명의 문제, 환경의 문제, 여성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다는 절망의 소리들이 유럽 지식인 자신들로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그럼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방안이 어디에서 나올까요? 동북아시아에 기대해 보자는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인도에 기대했었는데 인도는 그저 그런 것 같다. 동북아시아라면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정도입니다. 그럼 이쪽에 뭐가 있길래 전세계적 위기, 전인간적 위기, 전지구적 생태계적 위기에 대한 대답을 이쪽에서 얻고자 하는가? 그것은 꼭 동학만은 아니올시다. 저는 동학 중심주의자는 아닙니다. 동학을 공부할 뿐이지 동학과 관련해서 유불선, 기독교, 다 존중하고 좋아합니다. 과학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봐서 뭇 생명, 인간, 인간 자신 내부, 무기물, 인공물까지도 존중의 태도를 가질 수 있는 철학이 동서양에 다 요구됩니다. 서양에 생태학이 발전했습니다만, 원래 생태학이란 지금과 같은 환경위기에 대처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원래 무기계, 암석층이나 지질층과 식생계, 식물과 동물 사이의 유기적 관계와 전이와 군락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이것이 환경 문제가 급속하게 대두하기 시작하니까 여기에 대처하기 위해서 서양인들이 학문적으로 과학적으로 근거를 찾다 보니까 생태학이 선택된 것뿐입니다. 사실 생태학적 사고는 오래 됐어요. 생태학이란 과학은 지금도 진행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가 지금 애기하는 것처럼 태도로까지 연결되는 측면은 서양에서는 아직도 약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가 단순히 지역학이나 민족학을 넘어서서 세계학, 세계사에 대해서, 전인류사에 대해서 공헌을 할 수 있는 길이 생태학적 사고 가운데에 깊은 윤리적 기초를 마련하는 측면과 관계된다는 점을 눈치채셨을 것입니다.
이 문제는 너무도 심각해서 사실은 우리 생활을 전부 결정하고 있는데도 우리가 깊이 있게 못 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먹는 농산물, 숨쉬는 공기, 마시는 물, 밟고 다니는 흙,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자동차 매연, 소음, 온갖 것이 다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건 애기를 안 해도 잘 아실 겁니다. 환경이라는 말을 빼놓으면 현대가 이해될 수 없겠죠.
그런데 여기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모심이고, 모심은 철학적으로 상당히 오래된 뿌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동학의 핵심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동학을 한번 중요하게 생각함으로써 모셔 보자는 애기올시다.
그러니까 1894년에 폭력무장투쟁이 일어나서 양반들을 처단하였던 동학 농민반란, 혁명으로만 자꾸 한켠에 몰아넣는 기억을 하지 마시고 그 시초의 사상적 배경부터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수운 선생이 삼남민란(三南民亂)이 일어났을 때 ‘탄도유심급(嘆道儒心急)’, 도를 닦는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 성급한 것을 경계하여 탄식한다는 글이 있습니다. 거기에 ‘현기불로(玄機不露)’, 현묘한 기틀, 주객관적 결정적 시기의 조건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으니 마음을 너무 급히 먹지 말라는 경고문입니다.
이 경고문은 동학혁명 때 최시형 선생이 전봉준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도 들어 있습니다. 현묘한 기틀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의 주관적 정세, 사회의 객관적 정세, 또 우주의 현묘한 움직임이 아직 개벽이나 혁명을 할 단계가 아니니 조심하라는 애기입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사회∙역사적 책임을 벗으라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런 정도로 신중한 태도를 취해온 분들이 수운과 해월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동학사상사를 좀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서 수운 최제우하면 일방적으로 반란군 두목으로 취급해 버리면∙∙∙∙∙. 반란군 두목은 틀림없는 두목이죠.
그러나 너무 가볍게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더구나 대구가 소위 동학 인식의 장소라고 나는 봅니다. 인식이란 항상 실존적 인식, 중요한 삶에 연결되는 중요한 인식의 장소는 오류와 하자와 아픔이 동반됩니다. 오류와 하자와 아픔이 동반되지 않는 인식은 쉽게 잊혀지고 깊이 각인되지 않습니다.
대구는 수운을 처단한 장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구가 전 민족 앞에서, 또는 전 세계 인류 앞에서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수운의 사상쯤은 한번 읽어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실제에 있어서 심층적 역사에 있어서 영남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영남의 역사는 분명히 19세기 중엽에 수운을 처단한 역사입니다. 그것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수운의 13자 본주문의 뜻
모심,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라는 13자 본주문(本呪文) 앞의 맨앞에 있는 모심(侍)이라는 개념을 수운 최제우 선생은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 그 뜻을 한번 살펴봅시다.
모심이라는 것은 “내유신령(內有神靈)하고 즉, 안으로 신령이 있고, 외유기화(外有氣化) 즉, 밖으로 기운의 변화 발전 또는 결합이 있으며, 일세지인(一世之人), 한 세상 사람이 각지불이자야(各知不移者也), 각기 떨어져 살 수 없는 전체라는 것을 각자 각자 나름대로 깨달아 실천한다.” 이것이 바로 모심의 뜻입니다.
여기에 부연해서 주(主), 즉 님에 대한 설명이 또 있습니다. 칭기존(稱其尊), 님이라고 불러서 여부모(與父母), 부모와 같이 동사자야(同事者也), 부모와 함께 친구로서 섬긴다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 ‘동사’는 친구의 뜻입니다. 동무, 동지, 그 이전에 동사라는 말을 썼습니다. 김구 선생의『백범어록』을 보면 ‘동사’ 라는 말이 여러번 나옵니다. “나와 동사한 그 이가”, “나의 동사인데” 등 여러 군데가 나옵니다. 즉, 나와 뜻을 같이 하는, 같이 일하는 친구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수운은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님이라고 높여서 부모와 같이 친구한다는 뜻입니다. 그게 가능할까요? 드높은 하느님과 존경하는 친구가 되는 것이 가능합니까?
가능, 불가능을 넘어서 유럽인들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수없이 여러 철학에서 파트너십으로 규정했습니다. 동역자(同役者), 같이 일하는 자, 진화를 같이 도모하는 자로 신을 봤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는 너무 근본주의적입니다. 그러나 유럽 기독교 신학자들중에 파트너십을 강조한 사람이 많습니다. 동역자, 동무, 비슷한 뜻입니다. 동사가 그런 뜻이올시다. 그러니까 모순되죠? 하나는 님으로 수직적으로 높이고, 또 하나는 친구로서 수평적으로 교제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얼른 무엇을 발견해야 합니다. 동학의 모심, 동학의 하느님관(觀)이라는 것이 친구로되, ‘높이는 친구’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매사에 하느님을 모방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이라고 우리가 생각하는 원초적 태도를 자꾸만 모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서로 친구이면서 높이는 자(者)라고 할 때는 우리는 모든 귀중한 사람에 대해서, 마누라에 대해서, 부모님에 대해서, 자식에 대해서 당연히 신을 대하는 태도로 임하는 것이 윤리의 척도입니다. 이랬을 때 어떻게 될까요? 자기 자식에게도 친구이면서도 자식을 하느님으로 높여주는,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고∙∙∙∙∙.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아내도 남편에 대해서 어떨까요? 이것이 오늘날 윤리적으로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요?
오늘날 우리나라는 엉망입니다. 전세계적으로도 엉망입니다만, 윤리∙기강∙질서∙공공성, 이런 것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회가 됐습니다. 신문을 보면 “이 새끼들 개판이로구나” 하는 소리밖에 안 나와요. 정치를 봐도 그렇고 뭘 봐도 똑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자부심이 강한 여러분이 영남인으로서 할 일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아까도 영남은 두뇌부라고 했습니다. 고려 때도 그 이후에도 영남출신이 대개 정부에서도 중요한 직책에 있었고 많은 경우에 재야에서도 오피니언 메이커였습니다. 이런 점이 영남 자부심의 근거입니다. 그런데 자부심의 근거에 돌아가는 일을 안 하고 영남이 가장 최고다라는 주장만 거듭한다면 어거지고 공허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그렇다면 이런 모심의 중요성을 한번 인정해서 이것을 다시 현대와 접목시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모심이라는 것이, 또는 님이라고 높이되 친구로서 사귄다. 이 반대되는 두 개의 태도가 일치하는 이 점을 잘 주목해야합니다.
유럽 철학에서는 한때 '가로지르기'라는 어휘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직적이면서 수평적인 것을, 가로지르면 이렇게 되죠? 이것이 뭡니까? 대각선입니까? 그런 삶의 태도를 중요시한 적이 있습니다. 이건 일단은 그것과 비슷합니다. 친구로서 수평적으로 사귀면서도 높이 존중하는 것. 그러나 이것은 사실 사랑이 아닙니다. 들러붙어서 "너 좋다, 나 좋다." 하는 사랑이 아니올시다. 일정한 거리를 둔, 거리를 둔다는 것은 그만큼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그 대신 서로 친하게 사귀는 거죠.
감옥에서 깨달은 수운 사사의 위대성
이게 모순입니다만, 우리 인간이 생태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참새보다도 못한 점이 있습니다. 제가 8년간 감옥에 있었습니다만 사형선고를 받으니까 합방을 시킵디다. 독방에 있던 사람을 전부 도둑님들과 같이 있게 합니다.
왜냐면 자살할까봐서죠. 한여름인데 1.75평 안에 8명을 집어넣어 놨어요. 그러니까 서로 달라붙어요. 피부와 피부가 닿습니다. 그러면 땀이 흐르고 그래서 굉장히 신경질이 나요. 도둑님들의 성질이 거칠죠. 서로 눈만 마주쳐도 욕하고 두들겨패고 난리가 납니다. 제가 소위 감방장이었습니다만, 그것을 해결한 것이 담배입니다.(웃음) 감옥에서는 '강아지'라고 하죠. 강아지로 해결했습니다. 왜? 한 대씩 피고 나면 싹 미소지어요. 서로 사이가 좋아. 그리고 두세 시간이 지난 후에 한 모금씩 또 돌리면∙∙∙∙∙. 물론 이건 범법입니다만 평화를 유지하려면 할 수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 감옥이란 곳이 생태학적으로 봐서 적정 공간을 무시한 겁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일정한 공간, 거리가 필요합니다. 안 그러면 냄새도 나고 이상해요. 전깃줄에 앉아 있는 참새보다도 못해요. 그것이 서대문감옥입니다. 버스, 지하철, 똑같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 못하고 이 나라가 큰소리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겁니다. 인간의 생명 조건을 무시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높인다는 것은 거리를 두되 그 대신 가까이 사귄다는 겁니다. 이것이 가능할까요?
윤리학은 원래부터가 모순에 기초한 학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이라든가 여러 가지의 야수적 본능을 인정하되 그것을 승화시키는 태도가 윤리입니다. 윤리학이 덮어놓고 공경만 강조하고 인간의 욕망이라든가 인간의 신체적인 삶을 무시해 버리면 윤리학으로 성립을 못합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 동학의 한 중요성, 위대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恃)의 해설에서 내유신령하고 외유기화하며, 한세상 사람이 각지불이자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전체적 존재임을 나름 나름으로 각각이 깨달아서 실천한다. 이것이 어떤 태도인가 생각해 보세요. 각각이 저 살 궁리를 하되 각자 안에 있는 어떤 전체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또는 우주적 무의식이랄까 성령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 안에 있는 전체상을 자기 나름 나름대로 실천해 가야 한다는 거죠.
우리가 대학 다닐 때는 민족∙국가, 그런 말밖에 없었어요. 개인의 존엄성, 개인의 사생활, 이런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 때도 그랬는데 그 이전 양반들은 더 말할 것도 없죠. 그만큼 소위 집체적이고 거대담론이 횡행했습니다. 저는 거대담론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작은 담론 안에서 작은 생활, 개인이 다 중요한데 그것을 존중하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그 안에 있는 거대담론, 민족∙국가∙세계∙인류∙생태계, 이걸 생각해야 하는 것이 현대올시다. 이런 현대의 요구에 맞게 동학이 그 시절에 이미 어떤 원리를 갖고 있었다, 이것을 말씀 드리고 싶은 겁니다.
저는 감옥에 있을 때 동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떄 공부한 것은 이미 20대에 공부한 것을 좀더 공부하자고 해서 공부한 것입니다. 4∙19이후 동학이 한때 유행이었습니다. 그런데 감옥 안에서 제가 떼야르 드 샤르댕에 심취했습니다. 그는 예수회 신부인데 고생물학자입니다. 저명한 진화론자이고 생태학자이며 생물학자입니다.
이 사람이 여러분이 잘 아는 베이징 서남방 주구점이라는 데서 출토된 북경원인(北京原人), 그 북경원인 발굴에도 참가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생물학자올시다. 이 뗴야르라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 저술을 했는데 그 중에서『 인간현상』이라는 책이 주저입니다.
내가 감옥에서 이『 인간현상』이라는 주저(主著)와 전집을 동학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생명, 생태학에 대해서 공부할 때니까요. 감옥 안에서는 시간이 많으니까 몇 년이고 했습니다만 그때 제가 등에 소름이 끼치도록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떼야르의 『 인간현상』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부문이 진화의 3법칙입니다. 진화의 3법칙에 대한 그의 해설을 보니 동학의 모심에 대한 설명과 똑같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떼야르는 우주 진화, 인류 진화까지 포함한 우주 전체의 진화사의 '진화 3대 법칙'을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첫째 인간의 내면에 의식의 증대가 있고, 둘째 외면에는 물질 또는 복잡화가 있으며, 셋째 결합과 군집은 개별화, 특수화한다. 이걸 한번 비교해 보십시다.
떼야르는 내면에는 의식이 있고 외면에는 복잡화가 있고 군집 또는 전체는 반드시 개별화하고 특수화한다, 분해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동학의 최제우 선생은 내유신령하고, 안으로 신령이 있고, 외유기화하고(동양에서 기화라는 것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생생화화(生生化化), 낳고 낳고 변화하고 변화하는 것도 기화이고, 서로 사랑하는 것도 기화입니다. 우정도 기화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술을 기화차라고도 부르죠. 서로 친하는 차, 술을 그렇게 부릅니다. 하여튼 기화는 서로 결합하면서 더 전체화하고 사회화하는 것을 기화라고 부릅니다. 이게 복잡화죠, 생명현상입니다. 이것이 다 기화입니다.) 즉, 바깥으로 기화가 있으며, 한 세상 사람이 각지불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을 각각 깨달아서 실천한다. 자, 어떻게 느끼십니까?
빠른 사람은 반드시 순간적으로 등에 소름이 옵니다. 떼야르 신부는 신부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바티칸에서 공식 인정을 못 받고 있는 대단한 사상적 반역자입니다. 그런데 어저께 내가 한 신부님을 만났더니 토마스 베리이라는 소위 생명의 영성을 주장하는 신학자가 나와서 떼야르를 계승한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지금 매우 활발하게 활동한다는데 나는 아직은 떼야르 신부밖에는 모릅니다.
그런데 떼야르라는 사람이 50여 년에 걸쳐서 지구생명의 발굴, 고고학적 발굴과 탐구에 전부 참여하고, 엄청난 공부를 통해서 도달한 '진화의 3법칙'인데 이것을 수운 선생이 1860년에 어느 한 순간에 깨달았다면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수운 선생의 주문(呪文)은 바로 계시의 내용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들은 소리입니다. 동양에는 순환론이지, 진화론이 없어요. 그러므로 동양의 최초의 진화사상가가 수운입니다. '불연기연(不然其然-아니다․그렇다)' 이라는 조그만 논문을 보면, 이 사람이 대단한 진화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떼야르 시대는 진화론에 있어서 다윈주의가 아직도 힘을 가지고 있었을 때인데 그때의 진화론이 아니고 요즘의 진화론, 최근의 자기조직화의 진화론, 자유의 진화론, 자기선택의 진화론은 다윈주의와 많이 다릅니다. 30-40년 전에 다윈은 이미 끝이 났습니다. 구라파 학계에서는 이미 자취가 없어요. 다윈을 따르는 사회생물학이란 것이 있지만 파시스트들과 똑같습니다. 재미없어요.
그런데 지금은 뭐냐? 자유라는 게 근본에 있어서, 생명의 근본인 그 자유의 추진력에 따라서 진화한다. 다양성이 근본에 있다. 돌연변이가 근본에 있다. 그래서 진화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진화법칙을 떼야르가 50여 년에 걸쳐서 탐구한 것을 수운 선생은 한마디로 1860년 4월 5일 11시 용담 골짜기의 자기 초가집에서 계시를 들었습니다.
이 내용이 안으로 신령하고 밖으로 기화하고 한세상 사람이 서로 전체임을 각자각자 알아서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진화론은 떼야르 시대나 다윈 시대처럼 종∙군집∙전체가 먼저 발생하고, 그 다음에 개체로 분화되는 것을 주장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건 이미 끝났어요. 지금의 생명발생사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생명의 근거인 자유의 기능, 다양성, 돌연변이의 기능에 의해서 개체가 먼저 나오고 개체 개체마다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전체를 실현하기 위해서 개체가 자기 주변을 끌어들이면서 자기조직화하는 겁니다. 즉 라이프 폼(life-form), 그 생명형식을 만들어가는 과정, 조직화 과정이 진화라고 봅니다. 그래서 개체가 먼저 나오고 전체가 나중에 나오는 겁니다. 이것이 수운의 '일세지인 각지불이자' 아닌가요? 떼야르의 낡은 발생사관보다 훨씬 더 진화되었지요? 1860년에 말입니다.
수운의 모심사상과 떼야르의 진화론의 놀라운 일치
애기가 좀 어렵습니까? 조금 골치 아프죠? 그래서 영남이 위대하다는 애기인데. 나는 전라도 놈이에요. 전라도 가서 영남 칭찬했다가는 맞아 죽어요. 나는 김대중 씨 고향, 목포입니다. 반란군 왕초쯤 되죠. 그러니까 전라도 사람이 이렇게 애기할 때는 무슨 이유가 있는 겁니다. 영남을 칭찬할 때는 영남에 무슨 주문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니겠어요? 잘 들어 주십시오.
공직사회에 있는 분들이 사명감을 갖지 않으면 일반 대중에 대해서 리더십을 못 갖습니다. 특히 지난 2002년 유월의 범어동 사거리를 생각해 보세요. 전국적으로 7백만 명이 거리로 튀어나왔습니다. 무엇을 주장했죠? 3박 플러스 2박, 엇박입니다. 소위 혼돈의 질서올시다. 또 무엇을 주장했습니까? 치우(蚩尤), 4천5백년 전 배달국 제14대 자오지천황, 중국의 황제(皇帝)와 74회에 걸쳐 투쟁한 전쟁의 신입니다. 치우의 붉은 깃발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또 무엇을 했죠? 모두들 태극기를 흔들고 태극기를 엉덩이에도 그리고 이마빡에도 그리고 나왔어요.
여러분은 이 사람들이 제기한 엇박, 혼돈박, 그러니까 3박 플러스 2박으로 바로, '카오스모스' 혼돈의 질서, 치우, 그리고 하나 태극기를 들고나온 것이 무슨 뜻인지를 여러분이 확실히 알고 그들에게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또 이것은 민족적이면서 세계적인 방향이니까 공직사회에 있는 분들이 이 방향이 너희들의 희망하는 방향이니 이리로 가자 하면서 리더십을 보여주어야 7백만 명이 실질적으로 에너지화합니다. 실질 에너지란 실질 창조력을 가진 실질적 역량을 말합니다.
텔레비전 망을 통해서 들어온 7백만 명은 아직은 공허한 에너지입니다. 자각적 에너지가 되려면 반드시 리더십의 중개가 필요합니다. 리더십을 꼭 대통령에게만 기대할 것입니까? 지식인과 공직사회가 바로 리더십입니다. 제가 이 애기를 하는 이유를 아시겠죠?
지금은 그렇게 진화론까지도 변했습니다. 그러면 제3법칙, 불이(不移), 불이는 원래 주자(侏子)의 개념입니다. 주자가 우주와 인간 사이에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이치적 관계를 설명할 때 불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수운은 이 말을 소위 전 우주적 에너지의 시스템 지기(至氣)의 전체성에 갖다 옮겼습니다. 그래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 총체적 우주유출(cosmic flux), 그 전체상을 불이라고 합니다. 각자 각자가 자기 안에 있는 우주적 전체 움직임을 깨달아서 자기 나름대로 사회를 조직한다는 애기입니다. 이것이 요즘 젊은 사람들과 아주 흡사하다고 하겠습니다.
또 우리나라의 유명한 기(氣)철학자인 해강 최한기의 '교접운화론(交接運化論)'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퇴계학이나 남명학, 원효학 안에도 이런 비슷한 언급들은 도처에 잇습니다.
하여튼 이렇게 해서 떼야르의 진화론과 수운의 '모심관'이 일치한다는 것을 알고는 크게 놀랐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 겁니다. 마르크스주의의 객관적 사회구성체론이라든가 구조론이 쇠퇴한 후에 유럽학계에서도 다시 생명체론, 생태학, 생명의 내면에 있는 정신적 지향과 외면의 물질이나 생명의 생태학의 관계를, 모순 대신 질병으로 생물학적인 이해를 시도합니다. 소위 상부구조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위로부터의 기제와 소위 하부구조라고 불렀던 토대, 경제적 사회적인 삶의 기초조건인 아래로부터의 기제, 상부와 토대, 이 말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안과 밖으로 설명하는 것이 좋습니다. 위가 어디 있고 아래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직도 천원지방(天圓地方)입니까? 중력은 무엇입니까? 안이 있고 밖이 있는 것은 납득이 가죠. 이렇게 해서 내가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구조모순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예전처럼 질병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래서 혁명이나 개혁보다는 치료, 치유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물론 보편화된 것은 아닙니다만 첨단적인 쪽이 그렇다는 애기입니다.
그래서 제 결론은 절대 수운 동학이 사이비(似而非) 종교나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민간의 조그마한 사상형태로 줄어들 수 있는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제가 애써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서양과 비슷한 것은 다 대단한 거냐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 서양과 비교를 안해도 위대한 것은 위대한거죠. 그러나 지금은 서양이 판치는 때니까 일반인들이 서양의 과학과 비슷하거나 같다고 해야 인정을 해줍니다. 그리고 쓰임새가 있습니다. 무슨 쓰임새입니까? 지금 대구라는 데는 여러 가지 표현이 활발한 데올시다만, 근본문제를 짚는다면 생태학∙농업 하나로만 세계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또 그것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다른 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농업∙농산물, 그것과 연관된 환경∙생태학∙생명에 대한 관심이 지금은 지배적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밖의 조건입니다. 외면이지요. 마찬가지로 영적인 조건, 마음의 문제,『마음의 생태학』이라는 책도 있습니다만 마음의 문제, 정신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세계 문제는 또한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미 뇌수학, 두뇌학과 뇌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결과로 나온 것이 컴퓨터입니다. 그리고 디지털 수학입니다. 또 사이버네틱스라는 학문 자체가 가상공간이나 인간 지능, 즉 뇌기능의 모방행위올시다. 그러니까 PC방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누군가 뭔가 멀리 있는 사람, 가까운데 있는 친구들과 영적으로 통신한다는 뜻입니다. 소통이므로 영적 소통, 텔레파시를 최고치로 하는 텔레커뮤니케이션의 기능입니다.
따라서 젊은이들의 인터넷 인구가 증폭되는 것은 인간 내부의 영성, 아까 내유신령이라고 했습니다만, 안에 있는 의식 또는 영, 또는 영의 핵심주체인 신, 이것에 관한 경험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이 세계는 지금 두 가지 중요한 요구 앞에 부딪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요구, 또 명상 인구가 급증하죠? 명상 인구가 많은데 한 켠에서 젊은이들을 보면 판타지, 환상소설, 환상예술을 좋아합니다. 또 신화를 좋아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영적 욕구입니다.
반면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환경, 생태학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안으로 '디지털'이나 사이버가 있고 밖으로 '에코', 즉 에콜로지, 생태학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됩니다. 현대의 두 가지 주제입니다. 이것이 합쳐지면서 전체를 개체가 실현하는 관계가 됩니다.
그래서 제 결론은 모심이 그렇게 구닥다리 애기가 아니라 바로 요즘의 생태학, 요즘의 진화론, 요즘의 두뇌학, 요즘의 가상공간이나 인공두뇌학과 바로 연결된 그런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제 주장의 핵심이올시다. 떼야르의『인간현상』이나 또 다른 저술 전체와 비교해 읽으면 더욱 그것을 확인, 확신하게 됩니다.
동학은 원래 오도박이약(吾道搏而約), 우리 도는 넓으나 간략하다는 뜻입니다. 원래 예전부터 동양에서는 가장 우월한 진리는 간략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역도 세 번쨰 법칙이 가장 중요합니다. 변역(變易), 이 세상의 만물은 변한다. 불역(不易),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해석이 구구합니다만, 만물이 변한다는 법칙은 안 변한다. 이것이 제일 맞습니다.
그 다음에 이간(易簡), 괘(卦)나 효(爻)로 쉽게 그려서 쉽게 익히면 다 통한다. 이간이 바로 약(約)입니다.
동학은 이런 점에서 위대합니다. 오히려 우습게 봐야 할 것이 아니라 높이 봐야 합니다. 넓은 내용을 간략히 표현한 것이 뛰어난거죠. 주역을 보세요. 그 오묘한 얘기를 효 6개로 다 정리합니다. 그것이 한 괘죠.
이런 말들이 다름아닌 영남이 대단한 사상가를 낳았다는 애기인데 주어진 시간은 다 됐습니다. 조금만 더 얘기하죠.
그러면 수운은 반란군 두목이니 처단되어서 당연한가∙∙∙∙∙. 어제 대구에 오다 보니까 지금의 동아쇼핑 자리가 수운을 처단한 장대라고 그러데요. 제 가슴이 찌르르했습니다. 여러분이 그 장소를 안 가본다 하더라도 수운을 다시 복권시킨다는 것, 현대세계 안에, 젊은이들의 세계 속에, 철학계 안에, 사상계 안에 복권시킨다는 이 명제만 확실히 인식하신다면 대구 영남은 분명 영남학을 성립시킬 수 있습니다. 제 예감이 그렇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수운을 우습게 보는 대신 굉장히 높이 평가하는 원효, 퇴계, 그다음에 남명, 우선 세 분을 들겠습니다. 이 분들 안에는 모심이 없냐? 있습니다. 원효의 경우에는 귀명(歸命)입니다. 원효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맨 앞마디에 귀명삼보(歸命三寶)라고 말했습니다. 돌아갈 귀 목숨 명, 삼보는 불법승(佛法僧) 삼보입니다. 부처님, 경전, 그리고 스님, 극동의 불교는 대승불교입니다. 그리고 수행방법은 선(禪)입니다.
그래서 대승론(大乘論)이 동방불교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대승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삼보를 제기한 것은∙∙∙∙∙. 여러분 아시죠? 원효의 또다른 이름이 서당화상(誓幢和尙)입니다. 서당은 군지휘관입니다. 군지휘관 스님이죠. 원효는 화랑도였고 전쟁에도 출전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분이 묘하게 불교 밑에다가 선도(仙道) 풍류학을,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천부사상,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사상을 밑에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맨 첫마디에 삼보를 거론한 것은 천지인 삼재와의 유비, 아날로지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때 생명의 진리인 삼보에 목숨을 걸고 돌아간다. 귀명, 귀명은 목숨을 들어서 목숨의 진리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의 남무입니다. 이 귀명이 무엇일까요? 목숨을 들어서 목숨의 진리에 돌아간다가 무엇일까요?
아까 제가 모심은 존재와 생명의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 우리의 목숨이 붙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모셨다는 겁니다. 기독교인들은 금방 알아 듣습니다. 신을 모셨죠. 오히려 우리 민족 전통이 이런 쪽으로 강한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도리어 모릅니다. 우리가 아주 이상해져 버렸어요. 대한민국, 한민족은 굉장히 신령한 민족입니다.
나는 6월에 붉은 악마가 저렇게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집단적 무병이라고 내림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자는 히스테리라고 하는데 히스테리가 결코 아닙니다. 히스테리라면 분명 파시즘으로 가죠. 그렇게 가지 않습니다. 두고 보세요. '내림'이란 일종의 계시입니다. 히스테리는 그림자의 폭발이지 전혀 다릅니다. 지금 촛불, SOFA 개정요구의 추모 물결도 이 흐름을 다시 재현하고 있어요. 이 흐름은 내일 다시 뭐가 될지 몰라요. 이 흐름의 물꼬를 터주고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 지식인과 공직사회의 임무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떠드는 겁니다.
원효와 퇴계와 수운 사상의 유사성
지금 바짝 다가왔어요. 동북아시아 물류 중심으로서의 특구 설정 문제가 바쁜 문제입니다. 남북한이 다 이 특구 문제에 있어서 공동의 비전을 갖게 됐습니다. 신의주, 개성, 원산이 열립니다. 여러분 이것을 우습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광양, 부산, 인천이 열리는데 반도 전체가 '랜드 브릿지'올시다. 전체가 해양과 대륙을 연결시키는 부두올시다.
우리나라는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 방면밖에는 뚫고 갈 방향이 없습니다. 대구가 주로 대표하는 제조업 분야는 이미 기울었어요. 노임과 자재비용과 노하우에 대한 거래비용이 너무 비쌉니다. 우리나라가 너무 비싸다는 겁니다. 중국과 한국의 노임 비율이 11대 1입니다. 그러니까 한국 제조기업들이 전부 중국으로 건너가죠. 그러나 재미 못 보고 다들 돌아옵니다. 그러면 어디로 뚫고 나가야 할까요? 서비스, 문화컨텐츠 사업, 간접 물류, 즉 그야말로 물류입니다.
교통, 수송, 그리고 벤처, 그리고 아주 질이 높은 반도체 사업 정도로 봅니다. 그리고 제조업이 유지된다 하더라도 고도의 기술집약적인 특수한 제조업으로 선별 집중해야 합니다.
중국은 앞으로 15년 이내에 일본을 따라잡고 20년 내에 미국을 추월한다고 합니다. 무엇에서? 제조업 경제에서. 그때를 바로보고 5년 동안 중국이 지금 상당히 내부적으로 진통이 많습니다. 5년밖에는 우리 한민족에게 기회의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이미 미국, 일본의 동북아시아 전문가들 견해입니다.
5년 이후에 중국이 로케팅합니다. 그들은 동양적, 중국적 문예부흥을 5년 뒤부터 시도할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은 우리가 준비하고 물류 중심으로서 서비스 산업으로의 전환, 문화컨텐츠 산업으로의 전환, 벤처 쪽으로의 전환, 그리고 물류 산업으로의 전환, 그리고 아주 고품질의 반도체라든가 전자부문, 이 부문으로 전환한 뒤에는 제조업 부문으로 성장하는 중국을 빙빙 돌면서 타고 가야한다. 되겠죠? 그쪽으로 지금 국가발전전략, 즉 비전이 대개 낙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북쪽도 마찬가지 구상을 하고 있어요. 남북통일까지 못 간다 하더라도 공동의 비전 밑에서 같이 해양을 움직이고 대륙을 움직이게 되면 같이 협의할 사항도 많고 교류도 잘 될 겁니다. 그러니까 북이 어떻게 대응하는가가 큰 문제이겠습니다만, 나는 정치는 잘 모르겠고∙∙∙∙∙.
하여튼 애기가 그렇게까지 갔습니다. 귀명이 무슨 뜻이냐? 목숨을 들고 목숨의 비밀에 돌아간다. 이것이 모심입니다. 산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모심이다. 무엇을 모심이냐? 목숨을 모심입니다. 목숨을 모시는 것이 사는 겁니다. 목숨이 뭘까요? 안 보여요. 그래서 마음이라고도 하죠.
그러니까 자기가 모신 목숨을 전부 바쳐서 목숨의 진리에 다시 돌아가는 겁니다. 내어놓고 들어가는 겁니다. 자기가 밖으로 바쳐서 다시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삼보는 심중지사(心中之事)입니다. 마음 안에 있는 겁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모든 것을 마음에만 두는 것, 자기 마음, 생명의 안쪽인 신령에게로 돌아가는 겁니다. 모심입니다.
퇴계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체계입니다. 궁리, 이기(理氣), 성심(誠心), 이것에 대한 판별, 즉 공부 이전에 공경, 즉 거경(居敬). 그러나 수운과 같이 친구로서 사귀면서 높이는 것이 아니라, 퇴계의 경우 친구라기보다는 그저 높임이죠. 이게 중세적 형이상학의 한계입니다.
경(敬)을 우선으로 봤다는 것이 지금 퇴계 연구자들의 일반적 견해입니다. 그래서 퇴계를 연구하려면 궁리 부문에 나오는 사단칠정(事端七情)이라든가 성리의 일반적인 원리를 중세처럼 따지고 드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공경하는 태도를 가지고 수양을 하느냐, 어떻느냐의 문제, 또 동적 수양이냐 정적 수양이냐 하는 문제, 퇴계의 경우에는 동적 방면과 정적 방면이 다 있습니다.
이것이 마치 원효에 의해서 아뢰아식(識), 즉 제8식(識)으로 1식에서 7식까지를 다 포함하는데 현실의식과 무의식, 초의식을 일심(一心)으로 인식하지요. 그러나 이 '한마음'도 각(覺)과 불각(不覺)으로 둘로 나누어 보고 있죠. 어리석음과 깨달음으로 봅니다. 왜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일까요? 근원적인 마음도 이중적이라는 겁니다. 수운에게서 안으로 신령이 있고 밖으로 기화가 있다는 것, 신령(神靈)과 기화(氣化)가 이중화하는 과정을 잘 보셔야 합니다. 각(各)과 불이(不移)가 이중화하는 관계를 잘 보셔야 합니다.
동학은 주문도 두 개입니다. 강령주문(綱領呪文)과 본주문(本呪文)입니다. 또 경전도 둘입니다. 한글『용담가사(龍潭歌辭)』와 한문『동경대전(東經大全)』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이중적입니다. 이 이중성은 무엇일까요? 생명의 기본원리입니다.
그레고리 베이트슨이라는 출중한 생물학자는『정신과 자연』,『마음의 생태학』에서 더블바인드(double bind), 이중성을 생명의 기본원리로 봤습니다. 생명을 모방하는 컴퓨터나 엘리베이터가 온오프-오프온,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올라가면 내려가고 내려가면 올라가는 이분법적 구조인 것은 생명을 모방해서 그렇습니다.
마음은 어떤가요? 마음도 이중적입니다. 음양입니다. 나는 참선을 감옥에서 백일 해봤습니다. 캄캄한 어둠이 나오다가 하얀 광명이 나오고 한 사흘 나흘 왔다갔다합니다. 지독한 육욕이 왔다가 지독한 혐오감으로 바뀝니다.
선이라는 것은 왔다갔다하는 것을 통해서 어느날 그것을 문득 넘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저도 소각(小覺)은 몇 번 경험했습니다만, 아마도 대각(大覺)이 바로 깨달음이겠죠. 그러니까 두 개의 이중성, 이것이 중요합니다.
동학의 후천개벽은 선천 이전 시대의 모든 사상 문화, 지배적인 논리를 싸그리 두들겨 부순 자리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고 후천을 핵으로 중요시하되 선천을 다시 해체․재구성해서 높이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영남학을 세울 때 퇴계, 남명, 원효를 같이 존중하면서 연구하되 도리어 현실적 중심으로서 수운을 공부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수운 자신이 경전에서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선성지소교(先聖之所敎)라고 했습니다. 인의예지는 성(性)과 리(理)올시다. 퇴계학의 핵심이 인의예지, 성과 리의 핵심으로 보는 겁니다. 주자도 그렇습니다. 인의예지는 선성(先聖), 공자의 가르침이니 다 존중하고∙∙∙∙∙. 그 다음에 수심정기(守心正氣)는 유아지갱정(唯我之更定), 마음수련과 기 닦는 것, 이것은 유아지갱정, 내가 바꾸어 정하는 바라고 했습니다.
개벽, 후천개벽이 수심정기라는 것은 원래 고대의 선도풍류의 수련법입니다. 저도 단학을 꽤 오래 했습니다. 그 수련법이 바로 수심정기예요. 그걸 되살리는 겁니다. 그래서 무왕불복(无往不復), 한번 간 것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 없다는 이것이 후천개벽의 기본 논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역의 기본 원리입니다. 복괘(復卦), 고대의 회복입니다. 르네상스와 관계가 없을까요?
조그만 더 합시다. 남명은 뭐라고 했습니까? 간단히 애기할께요. 남명 선생은 아주 간단히 애기했습니다. 내명자경(內明者敬)이요. 외단자의(外斷者義)라. 이것도 핵심입니다. 안을 밝게 하는 자는 경, 공경이고, 밖으로 결단하는 자는 의다, 의리다. 재미있죠? 또 안팎이 나왔죠.
퇴계의 경우에는 밖으로 궁리입니다. 안으로는 거경입니다. 그러나 또 이상한 것은 윤리적인 척도∙∙∙∙∙. 척도라고 하니까 말이 좀 이상한데 하여튼 퇴계의 경우에 경행지(敬行知), 공경하고 행하고 깨달음으로 나가야 한다는 삼조목을 제기한 데 비해서, 수운 동학에서는 시천주(侍天主) 즉, 하느님을 모시고, 조화정(造花定) 즉, 하염없는 변화에 일치하고 만사지(萬事知) 즉, 역수(易數)의 여러 가지 형태를 다 공부하고 계시로서 깨달아 안다, 이렇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선 오늘은 이 애기만 합니다. 영남학이 성립하려면 자주적 근대화를 제기했던 수운 선생의 동학을 통해서 그 핵심 윤리요 삶의 기본 철학인 모심, 시의 뜻을 양방향으로, 쌍방향으로 연결시켜야 합니다.
하나는 유럽의 선진적인 과학과의 관계, 생태학, 생물학, 진화론과의 관계, 또 하나는 우리의 전통적 사상, 그 중에서도 영남의 큰 붕새와 같은 존재인 네 분, 원효, 일연, 퇴계, 남명과의 학술적 연관관계를 짚어야 합니다. 고려 때의 일연을 애기 안 했습니다만『삼국유사』를 통해서 '원시반본(原時返本)'을 결행한 민족사상가로서 이미 여러분이 다 알고 계십니다.
이렇게 이중으로 연결시켜야 수운을 제대로 살리는 것이 되고 수운을 통해서 영남의 원효, 일연, 퇴계, 남명과 서구의 떼야르 드 샤르댕이나 아까 애기한 그레고리 베이트슨, 이 사람들이 들뢰즈나 가타리, 그리고 데이빗 보옴이나 미셀 셰르의 현대철학으로까지 연결됩니다.
생명철학의 근원과 노마디즘의 출현
그들의 근원을 짚으면 베르그송이라는 거봉이 있습니다. 그 위로 올라가면 스피노자가 있습니다. 이 모두가 금욕주의, 희랍의 스토아학파 연결됩니다. 반플라톤적입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뭇매를 맞습니다. 그러나 묘하게 이것이 동양철학과는 아주 가까워요. 그래서 동서양을 퓨전,융합하는 방향이 현대사상의 갈 길이자, 현대문화의 미래라고 할 때, 소위 문화컨텐츠의 핵심부문이라고 할 때 역시 문화 컨텐츠의 핵심부문은 철학과 미학입니다.
이것을 집중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영남학이 성립하려면 이 핵심 부위를 먼저 설정하고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모심, 귀명과 경(敬)과 일연의 선불(仙佛)과 단군 풍류 등과 떼야르의 진화의 3대 법칙과 이렇게 연결해서 현대적 의미를 제기해야만 비로소 현대의 영남학이 성립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공직사회에 계신 분들과 수운이 어떤 관계인가? 아주 직접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수운 경전을 보면 알지만 역사에 의해서도 이조 후기사회, 영조․정조 연간의 대개혁이 이후 순조․철종 연간이 되면서 후퇴합니다.
안으로는 풍양 조씨나 안동 김씨의 척족 세도세력에 의해서 농간당하고 가렴주구하고 매관매직하고 그런 것이 많이 나옵니다. 다산을 들여다보면 전부 그 애기입니다. 또 근대사 하는 사람들의 논문을 보면 전 그 애기입니다. 엉망진창이었습니다. 6년 가뭄에 7년 콜레라에 바깥에는 서양의 이양선들이 출몰하고∙∙∙∙∙. 소위 한국을 이빨이라고 하면 중국이 입술인데 순망지탄(脣亡之嘆), 입술이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북경 이화원이 함락되고 아편전쟁이 일어나서 구라파 침략자들에게 지고 태평천국이 붕괴되고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남연군(대원군의 아버지) 묘지를 도굴하고, 천주학을 들어와서 돌아다니고∙∙∙∙∙. 전국에 궁궁촌(弓弓村), 비산비야(非山非野)의 10승지(十勝地)가 있다고 해서 부자나 가난뱅이나 모두다 궁궁촌을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다산에 의하면 어마어마한 숫자의 농민들이 농사에 실패하고 친척집에 얻어먹으러 가려고 길바닥에 늘어선 사건에 대해서 애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신라통일 이후 10세기 이상 중앙집권적인 관료제 국가입니다. 군현제 국가입니다. 봉건제 국가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습니다. 일본과 중국, 유럽의 봉건주의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군현제 국가는 봉건제와 관계가 있기는 있습니다만 오히려 다분히 관료 중심적인 통일국가입니다. 지역 분산적이 아닙니다. 그런데 순조∙철종 연간에 그런 국가체제가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해체 방향이 문벌과 가족과 개인 중심으로 해체됩니다. 그래서 귀신 사(私),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 이것이 판을 친다고 수운이 개탄하고 있습니다. 각자위심(各自爲心), 전부가 자기 중심입니다. 공공성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아요.
그때가 바로 근대적인 공공성이 성립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제기한 수운의 구호가 지공무사(至公無私 )올시다. 지극히 공변되되 사심(私心)이 없어야 한다. 다산 정약용의『목민심서』도 중요한 책입니다만『목민심서』를 전부 관통하는 것은 한마디로 지공무사올시다. 지극히 공공되되 사가 없다. 사가 없다면 개인도 없다는 애기일까요?
작년 봄에 제가 일본 교토에서 열린 일본 공공철학 세미나에 초청되어서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천지공심(天地公心)'에 대해서 발제했습니다. 그리고 우주적 공공성에 대해서 애기했는데 일본사람들은 '활사개공론(活私開公論)'을 애기했습니다. 사를 살려서 공을 열자, 그것이 일본의 새로운 공공철학입니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동경대 명예교수이자, 중국철학을 전공하는 미소구치라는 교수에게 '활사개공'이라는 것은 삿된, 안 좋은 개인을 살리려고 하는 것 같다고 했더니 바로 맞받아서 그 교수 왈 일본사람들은 너절한 개인주의를 주장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는 귀신 밑에 붙어 있는 세모난 글자가 사입니다. 귀신이란 뭐예요? 신명(神明)과 귀신(鬼神)은 다르죠. 신명은 공변된 신령이고 귀신은 사사로운 잡귀예요. 그래서 둘을 붙여서 귀신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사사로운 사는 없애라는 거예요. 그러면 개인도 무시한 건가요? 지금 현대 인류의 방향은 개인화 안에서 사회화를 실현하는 겁니다.
특히 젊은 친구들은 개인 중심의 사유와 판단 이외에는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붉은 악마도 다 똑같아요. 그런데 놀라운 건∙∙∙∙∙. 그렇죠. 전부가 빨간색인데 전부가 패션이 다르죠. 전부가 달라요. 그건 뭘까요? 전체를 지향하되 개인적이죠. 제 멋대로예요. 그러니까 이런 것은 수운과 관계가 없는 것인가? 아닙니다.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진화의 3대 법칙의 맨 뒤, 군집과 개체의 관계, 거기에 해당하는 수운의 각지불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한 세상 사람이, 각각이 서로 떨어져서 살 수 없는 전체적 존재라는 것을 각 각 나름나름으로 자기 스타일로 깨달아서 실천한다는 겁니다. 각(各)입니다. 각과 사는 다릅니다. 이기주의자가 사(私)이지, 개인주의자는 사가 아니고 각(各)이며 개(個)입니다.
그래서 수운은 명명기운각각명(明明氣運各各明)), 밝고 밝은 이 후천개벽의 운수는 각자 각자가 자기 스타일로 밝혀라. 명명덕(明明德)이죠. 명명덕을 동학에서는 이렇게 명명기운으로 표현합니다.
애기가 길었습니다만, 여기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러면 공직사회가 이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수운은 해체되어 가는 조선후기사회에서 새로운 공공적 질서를 주기 위해서 나타난 사회혁명가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주개벽가입니다. 둘이 있다고 했죠? 이중성입니다.
『노마디즘』이라는 책이 엊그제 나왔다고 합니다. 노마디즘은 유럽의 아주 유명한 철학자인 들뢰즈, 가타리의 저작을 해설한 책입니다.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걸 보면 지금 한국의 문화관계, 젊은이들에겐 들뢰즈 이외에 없어ㅛ. 들뢰즈가 모두 천하통일했습니다.
우리나라 젊은애들, 미국 젊은애들, 일본 다 똑같아요. 그런데 유럽에서는 안 통합니다. 유럽에서 들뢰즈가 뭇매를 맞은 겁니다. 아까 애기했듯이 반플라톤적이고 반실체론자입니다.
반실체론이란 무엇이냐? 생성론입니다. 생성론은 뭐냐? 생명론입니다. 생명론은 카오스론입니다.
그런데 들뢰즈가 뭐라고 하느냐? '모든 생성은 이중적이다' 그레고리 베이트슨도 '더블바인드'라고 했습니다. 이중적 구속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뭘까요? 또 이중적 논리는 뭐냐? 뗴야르나 베이트슨이나 들뢰즈나 모두가 '아니다, 그렇다',NO YES의 논리, 아까 애기한 이중적인 NO로 갔다가 YES로 가고, YES로 갔다가 NO로 가는 이구속, 마음의 움직임도 같습니다. 이 논리가 기본 생성, 기본 생명파악의 논리입니다. 이래서 이중적이라는 겁니다.
이 이중성이 공공성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공적 공공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수운은 사회혁명가로 나왔지만 동시에 우주개벽을 예언한 사람입니다. 하나는 개벽이고 하나는 혁명입니다. 이 혁명의 시기를 너무 빨리 잡은 것이 전봉준 지도부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급히 먹지 말라, 현기불로(玄機不露), 현묘한 기틀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민중의 주체적 성장도 아직 시기상조요, 객관적 정세, 정치 정세나 동북아의 정세도 아직 시기상조다라고 했습니다. 맞는 애기입니다.
그 이듬해에 무엇이 일어났습니까? 을미의병이 일어납니다. 을미의병 때는 양반이고 상놈이고 할 것 없이 몽땅 연합해서 의병이 됐습니다. 만약 동학이 한 해만 늦게 일어났어도, 양반들과 손잡고∙∙∙∙∙. 신돌석 같은 쌍놈 장군도 다 양반 의병장하고 손잡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회변혁가로서의 수운은 공공적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노력한 겁니다.
모심사상의 현대적 실천의 길
그 공공적 질서가 오늘날에는 어디에 심층적으로 모였을까요? 공직사회입니다. 왜 공공성이 필요할까요?
일본에 가면 골목길 같은 데 휴지 하나 없습니다. 우리나라 서울의 골목길은 어떤가요? 쓰레기통에 쓰레기가 넘쳐서 바닥으로 흐르고 난리입니다. 줄은 섭니까? 일본사람들은 고베 지진 때 쭉 줄서서 식량을 탔죠. 우리나라 같으면 난리가 날 거예요. 뭐 하나 터졌다 하면 저 살 궁리하느라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이게 좋은 점도 있어요. 일본의 경우에 지역 봉건제적인 할거 구조가 있었기 때문에 영주에 대한 충성이 지금의 지역중심주의를 만들기도 한답니다. 그건 긍정적 작용이겠죠.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영주가 지나가면 엎드려 있다가 십리 저쪽까지 갔는데도 불구하고 안 일어난다는 거예요. 복종이 내면화 되었다는 거죠. 하나 한국사람들은 그렇지 않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부 홍길동입니다. 종로에 '피맛골'이란 골목이 있습니다. 말탄 행렬, 임금 행렬을 피해서 달아나는 골목이죠. 그러니까 개인적 기량이 강하기 때문에 정보화에서 창조화 중심으로, 경제력 중심에서, 문화력 중심으로 패권이 이동하는 시기에 있어서는 우리나라 사람이 한몫할 겁니다.
그러나 공공질서가 없어요. 줄 안 서요. 누가 줄을 서라고 하면 "너는 누구야?"합니다. "줄 섭시다" 하면 "너나 서! 이 자식아. 나는 안 설란다." 이게 한국이에요. 그것이 좋은 일일까요? 공공질서는 지켜야죠.
그 공공성을 세우는데 사회혁명가로서 수운의 한 면이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활사개공이 아니라 지공무사. 그런데 그것이 뭐냐? 사실은 유럽적 표준으로 보면 공공영역, 공공성이라는 것이 서구 철학에서는 바로 사회적 공공성입니다. 물론 앤서니 기든스나 율리히 벡 같은 생태학적 수정주의자들도 있습니다만 아직 그 철학적 근본틀이 매우 약합니다. 그래서 사회적 공공성은 너와 나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 입각한 겁니다. 그래서 너와 내가 구상하는 하나의 사회, 시민사회의 특정한 철학적 원리에 따라서 공공성을 세우는 겁니다. 나만의 세계가 아니라 너와 나의 세계죠. 그런데 여기에 생태학적 전망이 따로 놀아요. 합친다고 하지만 약합니다.
우리 시대에는 사회적 공공성과 함께 우주적 공공성이 필요합니다. 다시 애기의 처음 주제로 돌아왔습니다. 생명, 생태가 중요하고 개인 내부의 영성이 중요합니다. 영성은 전체적이지만 그 서식하는 자리는 개인적입니다. 영이라는 것을 집단적으로 주장하는 자들은 혹세무민하거나 영성 파시즘으로 전락합니다. 그것이 소위 백백교, 이상한 인민사원, 이런 거죠. 집단적으로 영을 추구하는 자들∙∙∙∙∙, 영은 개인적으로 서식합니다. 그러나 안에 있는 영의 내용은 전체적이고 우주적입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그 개인의 창의력과 공공의 질서를 동시에 추구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제일 처음에 나타난 것은 뭘까요?
붉은악마와 여러분들입니다. 붉은악마는 아까 개인주의가 발전되어 있는 젊은 세대라고 했죠. 이것이 7백만명이나 난리를 부렸어요. 그런데 그것이 난리일까요? 그 열기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대형사고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민족적 편견을 드러내는 인종적 발언도 없었습니다. 터키가 이기니까 카드섹션이 "Pride of Asia", 아시아의 자존심이라고 추켜세웠습니다. 그래서 월드컵이 끝나고 사흘 뒤인가 라디오에서 뉴스를 들으니까 터키에서 자기들이 졌는데도 불구하고 터키를 응원한 한국민의 멋진 매너를 감사하게 생각해서 앞으로 2년 동안 터키를 여행하는 한국인들에게 숙식을 무료로 제공한다는 앙카라 발 뉴스가 흘러나왔습니다. 내가 껄걸 웃었는데 그렇게 멋있었어요. 그러나 그 멋있는 사람들이 자기를 설명할 줄 몰라요. 태극기의 원리도 모르고, 3박 플러스 2박도 모르고, 치우가 누구인지도 몰라요.
그러면 그들에게 방향을 주고 물꼬를 터줄 사람은 누구입니까? 다시 말합니다. 지식인과 공직사회입니다. 이쪽이 리더십입니다. 리더십을 하나로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가 무슨 큰 힘을 발휘하겠습니까? 대통령이 별것 아니에요. 문제는 공직사회입니다.
영남의 공직사회에서 영남의 지역학을 세워서 지역자치와 지역발전을 도모한다고 할 때 영남학의 핵심은 무엇이겠는가?
모심입니다. 모심의 기본 내용이 우주사회적 공공성입니다. 우주적이면서 사회적인∙∙∙∙∙. 아까 제가 수운을 가리켜 사회혁명가이면서 우주개벽가라고 했죠. 우주적이면서 사회적인 공공성, 우주사회적 공공성이 있을 떄 환경문제나 생명문제, 개인의 영성이나 개인주의, 또는 이런 것과 사회적인 문제∙∙∙∙∙. 시민운동가와는 환경운동가들이 맨날 저녁에 술은 같이 먹지만 공동행동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기본철학이 달라요. 이것이 해결되어야 합니다. 이랬을 때 붉은악마에 대해서 공직사회 여러분들이 좋은 지도력,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지 않겠는가.
수운의 두 번째 계시가 뭐냐면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입니다. 하느님 애기입니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
이것을 두 가지로 봅시다. 하나는 하느님 말씀이 아니고 사람의 말로 볼 때 내 마음이 네 마음란 무슨 뜻이냐? 즉 우리나라 시민운동 단체가 2만 개가 넘습니다만, 한국 시민운동의 정신적 지주, 배경이 한나 아렌트입니다. 또 일부는 하버마스이고, 한나 아렌트나 하버마스의 공공성의 성립 부분은 너와 나 사이의 소통입니다.
그러니까 그건 근본적으로 뭘까요?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 즉, 사회적 공공성의 근거입니다.
그런데 이건 하느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천심(天心)이 인심(人心)이라는 겁니다. 천심은 뭘까요? 요즘 식으로 애기하자면 하늘의 복판, 우주핵입니다. 유학에서는 무중벽(无中碧)이라고 하죠.
가운데가 텅 비어 있는 푸른색, 그런 데 대해서 여심, 네 마음은 수운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이죠. 그것이 뭘까요? 존재핵, 유학에서는 허심단(虛心丹)이라고 합니다.
텅빈 마음의 붉은 빛∙∙∙∙∙. 퇴계도 이 양자 사이에 관계가 있습니다. 잘 살펴보십시오. 남명에도 있고 원효에는 일식과 칠식, 팔식의 관계로 삼자 분할되어 있고 동시에 통합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모든 것, 즉 영남에서 시작한 사상들에는 수운에와서 근대적 모습으로 나타났고, 그것이 공직사회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천지공심, 그러니까 사회적 공공성이면서 우주 생태적, 지구적 공공성, 이것을 다 끌어안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모심을 어떻게 가져가야하는가. 무엇을 모셔야 하는가. 어떻게 모셔야 하는가? 모시는 것이 공직사회입니다. 이런 것들이 자연히 따라 나올 것 같습니다. 그것이 영남학의 가장 중심이 되는 문제가 아닐까요.
마칩니다.
수운부터 복권시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