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2번에 가시면 한경직 목사님의 약력과 위로예배 및 장례예배 순서가 있습니다. 위로예배는 하루 2회씩(오전, 오후) 드리고 장례예배는 4월 24일(월) 오전 9시에, 하관예배는 4월 24일(월) 오전 12시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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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직 목사와 그의 생애>
1902. 12. 29 ∼2000 . 4 .19
한국 교회와 세계 교계의 지도자였으며 영락교회의 원로목사였던 한경직목사가 2000년 4월 19일 오후 1시 15분 노환으로 98세의 일기를 마감하였다.
그는 세계적으로 종교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템플턴상을 1992년에 수상하였는데 템플턴상 심사위원회는 한경직 목사의 공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경직 목사는 서울에게 가장 큰 장로교회인 영락교회의 설립자이며, 피난민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그의 사역을 통하여 세계의 이목을 한국의 기독교 성장에로 집중하게 한 지도자이다. 한목사는 아마도 20세기가 낳은 한국의 가장 뛰어난 목사일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전례가 없는 많은 수의 장로교회를 성장시켰을 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그리고 미주 지역에 이르는 해외선교사역을 펼쳐나간 선교의 한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한경직 목사는 선교를 통해 수많은 기독교인을 양육하였을 뿐 아니라 여러 교육기관과 사회봉사기관을 설립하여 교육자로서 또 사회봉사자로서 사회복지에 기여하였으며, 국가의 위기시에는 우리 사회의 갈 길을 제시함으로써 사회 현실에 큰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는 1902년 12월 29일(음력)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그 지역에서 그는 어려서부터 기독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당시 이미 그곳에 세워진 자작교회와 초대 선교사의 한 분인 마포삼열 목사가 설립한 진광학교가 어린 한경직에게 기독교와 선진지식을 배우게 한 터전이 되었다. 진광학교를 졸업한 후 한경직 목사는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한다. 집에서 가까운 평양숭실학교가 있었으나 애국자가 세운 학교에 가야 한다는 부친의 뜻에 따라 오산학교를 선택한 것이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하였고 당시에는 고당 조만식 선생이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오산학교는 청년 한경직에게 기독교 신앙과 민족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 민족이 힘없이 외세에 억눌려 있었던 것은 과학적 지식이 뒤떨어진 ??문이라고 판단한 그는 평양의 숭실대학에서 이과를 공부하였다. 숭실대학 시절에 그는 그 자신의 일생을 성직에 바칠 결심을 하게 되었으며 또 그러한 길을 가는데 큰 도움을 받을 스승들을 만났다. 이승훈, 조만식, 마포삼열과 방위량선교사가 그들이었다.
청년 한경직의 학구열은 숭실대학에서의 면학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았으며 또 그를 아끼던 스승들도 온 힘을 기울여 그에게 유학의 길을 열어 주었다.
유학생 한경직은 미국 켄사스주의 장로교계인 엠포리아 대학에서 인문계 공부를 시작하였다. 특히 역사, 철학, 심리학에 관심을 가졌다. 이 학교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후 계획대로 프린스톤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그가 평생동안 설교한 성서중심의 복음주의적 신학을 확립하였다. 프린스톤 신학을 마친 후 그는 뜻하지 않은 병을 앓는다. 예일대학으로 가서 박사학위를 위한 공부를 계속하려던 그의 꿈은 그 당시에는 쉽사리 고칠 수 없었던 폐결핵으로 좌절되어 버린다. 뉴멕시코의 한 요양원에서 요양하는 동안 그는 개인적인 야망을 벗어 던지고 목회와 봉사의 길을 택할 것을 서약한다. 이에 따라 그
는 병이 치유되자 곧 귀국하여 민족에 대한 봉사를 시작한다.
선진 지식을 쌓은 한경직 목사는 교육을 통해 민족에 봉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그의 사상을 의심하여 그가 숭실대학의 교단에 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목회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으며 첫 목회지는 신의주 제2교회 였다.
이 교회에서 그는 교회가 하여야 할 전도사업, 교육사업, 봉사사업 등 세 가지 사업을 목표로 정하고 교회의 사명을 충실히 이루어 갔다. 교회는 날로 부흥되어 갔으며 그의 목회철학은 열매를 거둬 갔다. 특히 이 교회에서 설립한 고아와 노약자를 위한 보린원은 교회가 사회에 해야할 사명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역사적 표본이 되었다. 일제가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한경직 목사는 그 교회의 강단에 조차 설 수 없게 되었다. 전쟁 상대국인 미국에서 공부한 때문이었다. 그는 그가 설립한 보린원에서 광복 될 때까지 농사일을 하며 고아들과 함께 새 날을 기도하고 있었다.
광복은 한경직 목사로 하여금 현실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게 하였다. 일제의 철수에 따른 치안 공백을 메우기 위해 그는 일본인 지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평안북도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기도 했고, 또 민주사회의 건설을 위해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 야심에 서가 아니었고 단지 건국의 틀이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소박한 일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 소련군의 진주와 더불어 내려진 그에 대한 체포령은 그를 월남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한경직 목사가 무사히 서울에 내려와 처음 시작한 일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월남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를 세우는 일이였다. 그리하여 1945년 12월 영락교회가 탄생하였으며 이 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하였고, 또 피난민들의 재회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1973년 영락교회의 원로목사로 추대되기까지 그는 이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일생의 사역을 이루어 간 것이다. 그의 일생의 사역은 역시 목회자의 사명인 양육과 선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영락교회의 강단을 통해 수많은 성도들을 영적으로 양육하였으며 또 온갖 경로를 통해 한국인과 세계인에게 선교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학원, 군, 농촌, 도시공장지대, 그 외의 모든 그늘진 곳 그리고 해외 등 그의 선교의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어림잡아 그는 이 지구상에 약 500여 교회를 세웠다.
민족과 국가를 사랑했던 그는 조국의 미래를 위해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일에 온 정성을 쏟아 왔다. 광복 이후 교회 설립과 더불어 대광중고교, 보성여중고교, 영락중고교, 숭실대학, 서울여자대학 등의 설립 또는 재건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교회의 사명이 사회의 그늘진 곳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것임을 몸소 실천하여 많은 고아와 과부와 노약자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 해외의 기독교인들과 힘을 합쳐 선명회를 조직하여 전쟁 고아를 보살피는 일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는 사회현실의 문제도 등한히 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난길 곳곳에서 시국강연을 하기도 하였고 대구에서는 3천명의 청년을 모아 기독교 구국회를 조직하여 나라를 지키는 일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교계에 대한 그의 봉사는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했고, 한국기독교 연합회회장, 장로회신학대학 이사장, 숭실대학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고희를 맞아 공식적으로 영락교회에서 은퇴한 한경직 목사는 은퇴 후 그의 활동 영역을 더욱 넓혀 갔다. 여러 선교 단체를 통해 보다 폭넓은 선교를 시행해 갔다. 군복음화, 외항선교, 사랑의 쌀나누기 등 활동을 주도하였고 특히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갔다. 1970년대 부터는 군복음화에 앞장서 군복음화 후원회 총재로써 나라를 지키는 육, 해, 공 뿐만 아니라 경찰복음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 노년에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것은 북에 두고 온 교인과 교회였다. 그러기에 그는 템플턴상 상금 100만불을 모두 북한선교를 위해 헌금하고 끊임없이 북한선교의 길이 열리도록 기도하고 있었다.
한경직 목사의 공적이 이토록 빛나게 보이는 것은 그의 근검한 개인생활에도 크게 기인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영락교회와 교계 그리고 사회에 크게 기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은퇴 후 영락교회가 미련한 남한산성의 조그만 외딴 집에 우거해 왔으며 6평 남짓한 그의 방에서 기도로 그의 여생을 보내왔다. 그가 남긴 것은 오직 그의 양육과 선교의 열매요 그의 기도를 통해 드러난 우리 교계와 민족의 소망 뿐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