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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檀園 金 弘道의 미술 세계 > updat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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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기 壺山外記》와 홍백화(洪白華)의 발문(김응환이 김홍도에게 그려준〈금강전도〉의 시화첩에 쓴 글)에 의하면, 그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또한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했다고 한다. 그는 술을 매우 좋아하였으며, 성격이 부드러운 가운데 소탈하여 사람들은 그를 신선 같은 인물이라 불렀다. 《하산외사》란 책에 전하는 김홍도의 사람됨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단원은 살림이 늘 가난해서 아침저녁으로 끼니 걱정을 하는 때가 많았지만, 어느 날 좋은 매화 한 그루를 보고 이것을 사고 싶어하는 마음이 간절하던 차에 때마침 그의 그림을 찾는 사람에게 그림 값으로 3천금을 받게 되었다. 그중 2천금으로 매화를 사고 8백금으로 술을 받아서 친구들과 시를 읊으며 마시고 남은 돈 2백금으로 양식을 샀다고 한다"
김홍도가 어느 해인가, 정조의 분부를 받아 궁궐 안에 있는 큰 벽에 <해상 군선도>를 그린 일이 있었다. 그는 시중에 드는 내시에게 먹물 몇 되를 만들어서 큰 그릇에 받들게 하고, 자신은 웃옷을 벗어서 몸을 홀가분히 한 뒤 몇시간 안에 그 큰 벽화를 완성시켰다. 그림 속에는 출렁대는 파도가 집을 무너뜨릴 것 같았고, 신선들은 살아 움직여 구름 위에 오르는 듯해서 그 그림을 본 모든 사람들은 입을 벌린 채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산수·도석인물(道釋人物)·풍속·화조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부터 이름을 크게 떨쳤다. 정조는 “회사(繪事)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만큼 그를 총애했으며, 강세황으로부터는 ‘근대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 ·단구(丹丘) ·서호(西湖) ·고면거사(高眠居士) ·취화사(醉畵士) ·첩취옹(輒醉翁)이다. 만호를 지낸 진창(震昌)의 종손이자 석무(錫武)의 아들이다.
김홍도는 김응환의 제자로서, 신라 때의 솔거 이후 우리 나라 그림의 전통을 확립한 천재 화가이다. 당대의 감식자이며 문인화가인 호조참판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화원(圖畵署畵員)이 된 그는 강세황의 지도 아래 화격(畵格)을 높이는 동시에, 그의 훈도 아래 詩文書畵를 익혔기 때문에 성리학적 소양을 어느 정도 몸에 지닐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성리학을 사상을기반으로 하고 있던 진경시대 문화를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듯 하다.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자(뒤의 정조)의 초상을 그리고, 이듬해 감목관(監牧官)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司圃署)에서 근무하였다. 1781년(정조 5)에는 정조의 어진 익선관본(翼善冠本)을 그릴 때,한종유(韓宗裕) ·신한평(申漢枰) 등과 함께 동참화사(同參畵師)로 활약하였으며, 찰방(察訪)을 제수받았다. 이 무렵부터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따라 ‘단원(檀園) ’이라 자호하였다.
1781년 정조의 초상화가로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1788년에는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왕명으로 금강산 등 영동일대를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바쳤다. 이듬해 역시 왕의 명령으로 김응환과 함께 일본으로 가던 도중, 김응환이 죽자, 혼자서 쓰시마 섬에 가서 섬 지도를 그려 바쳤다. 그리고 1791년 정조의 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릴 때도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에 임명되어 1795년까지 봉직하였다. 한때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왕의 명령으로 용주사의 벽화와 판화를, 1795년에는 5륜 행실도의 삽화와 판화를 그렸고, 그밖에도 여러 선비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의 정교하고 호탕한 작품으로서 현재 남아 있는 그림은 그가 20세 안팎에 그린 그림들이다. 현감 퇴임 후 만년에는 병고와 가난이 겹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여생을 마쳤다.
김홍도가 활동한 영조, 정조 시대에는 베이징으로부터 크리스트교가 전래되어 서양 과학이 들어와 실학과 한글 문학이 찬란하게 꽃필 때로서, 도화서의 화원만도 60여 명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서양문화에 일찍 눈을 뜬 김홍도는 중국북화를 모방하고 있던 다른 화가들로부터 대담하게 벗어나 중국 남화를 자기 나름대로 발전시켰다. 자연을 즐기는 선비가 산책을 나갔다가 꾀꼬리 한 마리의 울음소리에 문득 얼굴을 드는 순간을 그린 <마상청앵도>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정서적인 한 면을 볼 수 있음은 물론, 보는 사람마다 꾀꼬리의 울음소리를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를 회화사적으로 보다 돋보이게 한 것은 그가 후기에 많이 그렸던 풍속화이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점경이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구도 위에 풍부한 해학적 감정과 더불어 표현되고 있다.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이 이룩한 진경산수화의 전통과 더불어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그가 이룩한 한국적 감각의 이러한 화풍과 경향들은 그의 아들인 양기(良驥)를 비롯하여 신윤복(申潤福) ·김득신(金得臣) ·김석신(金碩臣) ·이명기(李命基) ·이재관(李在寬) ·이수민(李壽民) ·유운홍(劉運弘) ·엄치욱(嚴致郁) ·이한철(李漢喆) ·유숙(劉淑) 등 조선 후기와 말기의 여러 화가들에게많은 영향을 미치는 등 한국화 발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앞서 설명한 작품 외에 그의 대표작으로는 〈단원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소장, 보물 제527호)을 비롯해서 〈금강사군첩 金剛四君帖〉(개인 소장)·무이귀도도 武夷歸棹圖〉(간송미술관 소장) ·선인기려도 仙人騎驢圖〉·단원도 檀園圖〉(개인 소장)와 〈섭우도涉牛圖〉·〈단원화첩〉(호암미술관 소장) ·〈마상청앵도 馬上聽鶯圖〉 등이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에서는 신윤복의 그림처럼 우아한 매력이나 사랑스러운 감정같은 것은 느껴볼 수 없다. 그의 풍속화의 주인공들은 예쁜 기생이나 멋있는 한량이 아니라 얼굴이 둥글넓적하고 흰 바지와 저고리를 입은 평범한 서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윤복의 그림보다 더 한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다.
그의 그림 속에는 어디까지나 한국적인 풍취가 깊이 드러나고 서민적인 체취와 독창적인 신선한 조형미가 담겨 있다. 김홍도는 투박하고 경직된 선묘를 사용하여 농민이나 수공업자들의 일상 생활을 담담하고 열린 마음으로 그렸던 화가이다. 그가 남겨 놓은 풍속화를 그냥 지나쳐 볼 수 없는 이유는 그의 그림이 한국 회화사에서 차지하는 비중 때문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심성 밑바닥에 흐르고있는 해학과 중용의 정신이 여실히 드러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단원은 그림 재주를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이었기에 모든 화과(畵科)의 그림에 능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산수,인물,화조,사군자,누각 등을 다 잘하는데 특히 당시 생활상을 그려내는 풍속인물화에 뛰어난 솜씨를 보이었고 신선과 고승을 그리는 도석(道釋)화는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경지였다 한다. 그의 그림들을 자세히 보면 어느 화과의 그림이거나 간에 모든 그림에 조선 고유의 색을 짙게 드러난다는 공통성이 있다. 산수화는 왕명을 받들어 금강산과 동해안 명승지를 그렸다는 해산첩<海山帖>에서 볼 수 있듯이 겸재의 사생기법으로부터 연유한 서릿발 준법으로 바위산을 표현하되,현재나 표암 강세황이 명대 남종화 기법을 수용해 들이면서 그 영향으로 변형시킨 부드러운 붓만을 가미하여 굳세고 씩씩하던 겸재의 붓질과는 다른 느낌이 든다. 이런 온건한 필법은 아마 말기 문화가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세련미라고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진경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단원이 지목되었을 수도 있다.
그의 작품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인데, 대체로 50세를 중심으로 전후2기로 나누어지는 화풍상의 변화를 보인다. 산수화의 경우 50세 이전인 1778년작인 〈서원아집육곡병 西園雅集六曲屛〉(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말해주듯이, 주로 화보(畵譜)에 의존한 중국적인 정형산수(定型山水)에 세필로 다루어지는 북종원체화적 경향(北宗院體畵的傾向)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연풍현감에서 해임된 50세 이후로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실경을소재로 하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리면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보다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물론 석법(石法)·수파묘(水波描) 등에서 정선(鄭)·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김응환의 영향이 다소 감지되지만, 변형된 하엽준(荷葉)이라든지 녹각 모습의 수지법(樹枝法), 탁월한 공간구성, 그리고 수묵의 능숙한 처리, 강한 묵선(墨線)의 강조와 부드럽고도 조용한 담채(淡彩)의 밝고 투명한 화면효과는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김홍도 특유의 화풍이다. 또한, 만년에 이르러 명승의 실경에서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로 관심이 바뀌었으며, 이러한 사경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영모등을 가미하여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밴 일상사의 점경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개척하였다.
전기에는 도석인물 중 주로 신선도를 많이 다루었는데,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의문(衣紋),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없이 천진한 얼굴 모습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기의 신선묘사법은 1776년에 그린 〈군선도병 群仙圖屛〉(호암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에서 그 전형을찾아볼 수있다.
후기가 되면 화폭의 규모도 작아지고, 단아하면서도 분방하며 생략된 필치로바뀌게 된다.
[金剛四郡帖]中 1
청심대(靑心臺) 44歲.1788年
30.4*43.7cm 개인소장
보통 금강사군첩 60폭으로 알려져 있는 진경산수 화첩이다.1첩당 12폭씩 묶어 5첩으로 나뉘어 있는데 오동나무판을 겉표지에[금강전도]라는 표제가 묵서되어 있을 뿐 서문이나 발문 제화시 등은 일체 없다.각 폭마다 해당 진경의 명칭이 역시 묵서되어 있는데 단원 글씨는 아니다.
이 명칭 끝에 '檀園' '弘道'라는 두 방의 방형백문 인장이 폭마다 찍혀 있으나 이 조악한 인장은 후낙관으로 이그림을 손상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본래 이화첩은 단원이 정조의 어명을 받들어 관도지방의 해산승경을 사생해 온 '봉명도사첩'이라는 꼬리를 달고 다녔다
[金剛四郡帖]中 4.
총석정(叢石亭) 44歲. 1788年(정조12)
각 30.4*43.7cm 개인소장
보통 금강사군첩 60 폭으로 알려져 있는 진경산수 화첩이다.1첩당 12폭씩 묶어 5첩으로 나뉘어 있는데 오동나무판을 겉표지에[금강전도]라는 표제가 묵서되어 있을 뿐 서문이나 발문 제화시 등은 일체 없다.
각 폭마다 해당 진경의 명칭이 역시 묵서되어 있는데 단원 글씨는 아니다.이 명칭 끝에 '檀園' '弘道'라는 두 방의 방형백문 인장이 폭마다 찍혀 있으나 이 조악한 인장은 후낙관으로 이그림을 손상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본래 이화첩은 단원이 정조의 어명을 받들어 관도지방의 해산승경을 사생해 온 '봉명도사첩'이라는 꼬리를 달고 다녔다
기려원유도[騎驢遠游圖]
46歲.1790년.28.0*78.0cm
간송미술관 소장
단원은 많은 분야에 다재다능함을 보여주었다.그러나 부채 그림은 매우 드문 편이다.정조대의 기록으로 보아 단원의 부채그림에 대한 언급이 있으나,정확한 단원의 작품인지는 의문이 많이 간다. 이 그림은 드물게 볼 수 있는 단원의 그림이다.
1790년 단원이 46세작임을 알 수 있는 관서가 있고 그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의 같은 해 제발이 있어 더욱 주목되는 작품이다.강변을 따라 난 한적한 들길에 나귀탄 노인이 등짐도 없이 동자 하나 딸려 단촐한 여행길을 나선다. 화면 좌변에는 육방옹의 행려시'검문 가는 길에 이슬비 만나(劍門道中遇微雨)'가 단원의 필치로 쓰여져 이 그림의 화상과 화의를 안내해 준다.
풍속화첩[風俗畵帖]
씨름(Wrestling)보물527호
27.0*22.7cm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단원의 풍속도하면 바로 이 화첩속의 <씨름>,<무용>,<서당>이 연상되는 만큼 이분야에서는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카드에 의하면 이 화첩은 1918년 조한준에게 구입했고 모두 27점이었으나 1957년 원 화첩의 수미(首尾)에 위치한 군선도 2점은 별도의 족자로 ,풍속도25점만으로 새롭게 화첩을 꾸몄다.1970년 군선도를 제외한 이 화첩은 단원풍속도첩 이란 명칭으로 보물 527호로 지정되었다.
이 화첩의 게재순은 1.서당 2.논갈이 3.활쏘기 4.씨름 5.행상 6.무동 7.기와이기 8.대장간 9.노상과안 10.점괘 11.나룻배 12.주막 13.고누놀이 14.빨래터 15.우물가 16.담배썰기 17.자리짜기 18.벼타작 19.그림감상 20.길쌈 21.편자박이 22.고기잡이 23.산행 24.점심 25.장터길 이다.이들 작품명을 보아 알 수 있듯이 각계층의 생업장면과 놀이 등 생활의 이모저모가 잘 나타나 있다
예외도 없지 않으나 대체로 배경을 생략하고 등장인물들이 취하는 자세와 동작만으로 적절한 화면구성을 이루고 있다.
평범한 일상 사이나 화가의 따뜻한 시선과 예리한 시각에 의한 포착은 이를 볼거리로 부각시켜 그림이 그려진 사회분위기를 잘 전한다
풍속화첩[風俗畵帖]
서당(Scene from a Village School)보물527호
27.0*2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단원의 풍속도하면 바로 이 화첩속의 <씨름>,<무용>,<서당>이 연상되는 만큼 이분야에서는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카드에 의하면 이 화첩은 1918년 조한준에게 구입했고 모두 27점이었으나 1957년 원 화첩의 수미(首尾)에 위치한 군선도 2점은 별도의 족자로 ,풍속도25점만으로 새롭게 화첩을 꾸몄다.1970년 군선도를 제외한 이 화첩은 단원풍속도첩 이란 명칭으로 보 물 527호로 지정되었다.
이 화첩의 게재순은 1.서당 2. 논 갈이 3.활쏘기 4.씨름 5.행상 6.무동 7.기와이기 8. 대 장 간 9.노상과안 10.점괘 11.나룻배 12.주막 13. 고 누 놀이 14.빨래터 15.우물가 16.담배썰기 17. 자 리 짜 기 18.벼타작 19.그림감상 20.길쌈 21.편자박이 22.고기잡이 23.산행 24.점심 25.장터길 이다.
이들 작품명을 보아 알 수 있듯이 각계층의 생업장면과 놀이 등 생활의 이모저모가 잘 나타나 있다.예외도 없지 않으나 대체로 배 경을 생략하고 등장인물들이 취하는 자세와 동작만으로 적절한 화면구성을 이루고 있다. 평범한 일상 사이나 화가의 따뜻한 시선과 예리한 시각에 의 한 포착은 이를 볼거리로 부각시켜 그림이 그려진 사회분위기를 잘 전한다.
풍속화첩[風俗畵帖]
빨래터(A Wash Place) 보물527호
27.0*2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단원의 풍속도하면 바로 이 화첩속의 <씨름>,<무용>,<서당>이 연상되는 만큼 이분야에서는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카드에 의하면 이 화첩은 1918년 조한준에게 구입했고 모두 27점이었으나 1957년 원 화첩의 수미(首尾)에 위치한 군선도 2점은 별도의 족자로 ,풍속도25점만으로 새롭게 화첩을 꾸몄다.
1970년 군선도를 제외한 이 화첩은 단원풍속도첩 이란 명칭으로 보물 527호로 지정되었다. 이 화첩의 게재순은 1.서당 2.논갈이 3.활쏘기 4.씨름 5.행상 6.무동 7.기와이기 8.대장간 9.노상과안 10.점괘 11.나룻배 12.주막 13.고누놀이 14.빨래터 15.우물가 16.담배썰기 17.자리짜기 18.벼타작 19.그림감상 20.길쌈 21.편자박이 22.고기잡이 23.산행 24.점심 25.장터길 이다.이들 작품명을 보아 알 수 있듯이 각계층의 생업장면과 놀이 등 생활의 이모저모가 잘 나타나 있다.예외도 없지 않으나 대체로 배경을 생략하고 등장인물들이 취하는 자세와 동작만으로 적절한 화면구성을 이루고 있다.
평범한 일상 사이나 화가의 따뜻한 시선과 예리한 시각에 의한 포착은 이를 볼거리로 부각시켜 그림이 그려진 사회분위기를 잘 전한다.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
무이귀도(武夷歸悼) 111.9*52.6cm
간송미술관 소장
무이산계곡을 노 저어 돌아온다는 유람의 화제를 그린 작품이다.무이산은 중국의 복건성 건녕부 승안현 남쪽에 있는 산이다.
36봉과 37암의 기암절벽이 빼어나게 솟고 굽이쳐 흐르는 아홉 구비의 계곡이 특히 유명하여 <무이구곡>의 칭이 있는 복건 제일의 명승이다.
오류귀장[五柳歸庄]
111.9*52.6cm
간송미술관소장
오류선생[五柳先生]이 시골집으로 돌아온다는 은거의 이야기를 화제로 삼았다.오류선생은 [귀거래사]의 명문으로 유명한 도연명(陶淵明)의 호이다.
물가에 강조된 버드나무 두 그루가 오류선생의 향장(鄕莊)임을 알려준다.버드나무 앞으로 하인의 영접을 받으며 배를 탄 도연명이 막 돌아오고 있는데 ,배 위에 책과 술병이 보이는 것은 그가 가장 좋아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물가의 준수한 바위 뒤로 도연명의 조촐한 초가집이 보인다.사립문에는 그의 부인과 아이들이 줄지어 선 채로 주인을 맞고 있다. 유난히 고절하게 솟아오른 바위와 소나무는 도연명의 절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화면 왼쪽을 보면 '五柳歸庄'과 '丹邱'라 쓰여있다. 제관과 그림이 안정된 조화와 평온함을 연출하여 은거의 주제와 잘 어울린다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
27.9*37.0cm개인 소장
화제 머리의 두인은 주문호로인으로 인문은 '종심'이며 관서 말미의 주문방인은 '김홍도'이다. 화제는 "종이창에 흙벽 바르고 이 몸 다 할 때까지 벼슬 없는 선비로서 시가나 읊조리며 살리라. 단원이라고 되어 있다.
" 글 중에 보이는 내용은 무언가 작가의 내심을 토로한 것처럼 여겨져서 ,혹 자전적인 요소를 담은 작품이 아닌가,곧 작중인물이 김홍도 자신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게 한다.
그림의 주인공은 당비파를 연주하고 있다.이 악기는 향비파와 달리 목이 심하게 꺽이고 줄이 넷이다. 지금은 그 연주법이 단절되었으나 김홍도 당시에는 거문고 만큼이나 아악 연주를 대표하는 점잖은 악기였다.
아무런 배경없이 주변에 늘어놓은 집기들은 지/필/묵/연 문방사우와 서책,골동 등이며,파초잎 옆에 붓을 놓은 것은 선비가 그 위에 시를 썼다가 그대로 버렸다는 맑은 고사를 연상케 한다. 모두 세상에 뜻을 두지 않겠다는 것을 상징한다. 또한 보검은 무예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맡에 두어 삿된 것을 멀리한다는 벽사의 뜻을 가진다. 이 작품은 모두 거리낌없이 단 한 번의 붓질로 망설임없이 그었다.작품에서 암시하고자 하는 경계가 필법에 그대로 내비취어 보인다.
삼선도(三仙圖)
絹本彩色 141.6*58.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동화자(東華子). 종리권(鍾離權). 여동빈(呂洞賓)의 서로 사승관계를 맺고 있는 삼선(三仙)을 그린 예는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두 작품은 같은 범본을 바탕으로 그린 듯 구도가 똑같다. 그러나 이 작품의 색깔감각, 농도조절, 필선의 힘, 세부묘사의 수준 등이 앞의 것보다 떨어진다.
강세황은 이 그림의 화평을 쓰면서 '豹翁'이라 자호(自號)하였는데, 그의 유존기념작 중에서 '표옹'을 쓴 최초의 예는 1782년작으로 김홍도 나이 38세때이다. 앞서 본 삼선도보다 공을 덜였는데 그보다 후대에 그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송하취생도[松下吹笙圖]
109.0*55.0cm
고려대학교박물관소장
김홍도의 도속인물 중에는 신선만을 크게 부각시켜 배경을 등한시하거나 전혀 그리지 않기도 하며 이 그림과 같이 배경 내에 신선을 나타내기도 한다.배경이라고 해도 신비경이 아니며 평범한 소재로 노송만을 대담하게 수직을 포치시켜 소탈하면서 조용하고 그윽한 장면을 보여준다. 노송을 한 중앙에 수직으로 내리 긋는 구도는 김홍도에 앞서 18C 대표적 문인화가 이인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화면의 중앙부분은 노송줄기로 좌우로 여백이 많으며 조금 넓은 우측에 장식적인 효과마저 드는 이행의 제발이 있다. 소나무는 좌하단 모서리에서 시작하여 그 상부는 화면 밖으로 이어진다. 솔잎이 성근 늙은 줄기가 부각되어 신선과 함께 상징성을 부여한 듯하다. 편한 자세로 앉아 생황을 부는 신선의 의습선은 고른 필선으로 동적인 형태가 아니어서 소나무와 대조되어 더욱 걸 맞는다.
사녀도(仕女圖)
37歲, 1781年 紙本淡彩
121.8*55cm簇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배경없이 9분면(分面)의 사녀를 입상(立像)으로 오른쪽 상단 '신축사월사능위연파과주인작(辛丑四月士能爲煙波觀主人作)'의 간기(干紀)와 관지가 있는데 같은 해 김홍도는 정조어진(正祖御眞)을 모사(模寫)하기도 하는 등 한창 성가를 드날릴 때였다. 이미 신선이나 초상(肖像) 등 인물화에 있어서는 틀잡힌 격조를 이루었고 무르익은 상태였다.
머리에 꽃을 꽂은 잠화사녀(簪花仕女)로서 정두서미법(釘頭鼠尾法)으로 그렸으며 조용하고 차분항 여인의 표현을 의식함인지 필선(筆線)이 비교적 고르며 묵색도 옅은 편이다. 세련된 용필은 주춤하거나 망설인 기색을 보이지 않는 유려한 백묘(白描) 기법을 바탕으로 해서 화면에서 튀지않는 담청(淡靑)과 담갈색(淡褐色)의 가채(加彩)가 도드라지며 단원이 추구했던 미인의 정형(定型)을 알려준다.
화본풍(畵本風)이 역력한 여인의 얼굴은 의습의 빠르고 속도감있는 필선과는 구별된다. 이그림에서 가장 정성을 기울인 부분으로 이목구비를 그렸다. 머리올의 표현과 안면의 처리에 있어 부분적으로 보이는 홍조는 시선을 모은다.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金弘道 畵虎 李寅文 畵松 絹本彩色
90.4*43.8cm. 호암미술관 소장
좌하에 '士能'이라는 김홍도의 묵서가 있고 그 아래 주문방인 '金弘道印'과 백문방인 '士能'이있다. 좌상에는 '豹菴畵松'이라는 묵서와 백문방인 '姜世晃印'이 있는데 두 관서의 필치는 동일하다.
호랑이는 슬금슬금 걷다가 무언가가 의식된 듯 갑자기 정면을 향해 머리를 돌린 순간을 포착하여 그려졌다.
이러한 자세는 조선시대 맹호도에 전형적인 것으로서, 호랑이의 백수지왕(百獸之王)다운 위엄이 정면을 향한 머리와 화폭을 가득 채운 포치에 의해 강조된 것이다. 호랑이는 극사실에 가까운 묘사로 육중한 괴량감이 느껴지는 동시에 민첩유연한 그 생태도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잔붓으로 세밀하게 그려진 터럭과 한호의 특징인 얼룩무늬의 자연스러움은 놀랍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묵죽도(墨竹圖)
紙本水墨 23.0*27.4cm
간송미술관 소장
이 그림은 단원이 만년에 그린 대나무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매우 귀한 작품으로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가볍게 특징만을 잡아채서 익을대로 익은 필치로 단원의 만년 특징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줄기의 필치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 친 것이 분명하나 통상의 경우와 반대로 농담은 위로 가면서 진해졌다. 단원은 거의 대부분을 왼쪽으로 순식간에 쳐내려 놀라운 기교를 과시하고 있다. 얼마나 단숨에 쳤는지 줄기에 겹쳐진 '분'자법 잎사귀를 치면서는 심지어 미처 호흡도 조절되지 않아 붓이 꼬이고 뒤섞인 흔적이 나타나 있다.
황묘농접도(黃猫弄蝶圖)
絹本彩色 30.1*4601cm
간송미술관 소장
고양이 그림은 초상에도 능한 변상벽(1730~?)이 크게 명성을 얻었으나 이암(1499~1545)과 정선(1676~1759)으로부터 김정희(1786~1856)에 이르기까지 문인화가들도 즐겨 그린 동물소재의 하나였다. 고양이와 나비를 함께 그리는 것은 장수를 기원하는 것으로 중국에서 고양이의 묘(猫)와 70노인을 칭하는 모(모)와 나비의 접(蝶)과 80노인의 질(질)이 발음이 같기에 이 소재의 그림을 모질도라 지칭한다.
고양이의 터럭이나 나비의 얼룩무늬 등 매우 섬세하게 사실적인 표현의 사생기법이 돋보이며, 좌측의 패랭이꽃과 제비꽃 등의 묘사는 청(淸) 궁정화가의 기법과도 상통되는 면이 감지된다. 화면 좌우에 적당한 비중 등 구성 및 구도에 있어서도 뛰어남을 읽을 수 있다. 나비를 향한 고양이의 시선, 전체적으로 화사하면서도 따사로운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다.
왕탁간독(王鐸簡牘)
紙本 各 29.0*19.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작품 내용은 중국인 왕탁의 편지를 임모해 본 것이라 생각된다. 관지 중에 보이는 '을축년(1805) 단구가 회갑이 되는 해' 라는 구절은 김홍도의 생년을 1745년으로 확인케 해 준 유명한 것이다.
담락재(湛樂齋)
懸板 35.0*90.0cm
개인 소장
김홍도가 안기 찰방을 마치면서 인근의 풍산읍 상리도에 소재한 선성이씨(宣城李氏) 집안의 체화정(체華亭) 사랑방에 써준 자필 현판이다.
관지가 "丙午夏檀園書(1786년 여름에 단원이 썼다)" 고 되어 있어 이임 직전인 4월 아니면 5월에 쓴 것을 알 수 있다. '湛樂'이란 말은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녹명(鹿鳴) 편에 나오는 구절 '和樂而湛'의 준말이다. 글의 내용이나 高眠居士의 뜻이 모두 당시 유유자적했던 생활상을 연상케 한다.
송하담소도(松下談笑圖)
紙本淡彩 109.3*57.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805년 61세 이인문이 제작한 만년 작품의 하나로 그의 구도상 특징과 활달한 운필법이 잘 드러난 대표작이다.
이인문의 작품을 여기에 소개한 것은 작품의 제시(題詩)와 관지(款識)가 김홍도 글씨로 되어 있고 이인문이 김홍도의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제시는 당(唐)의 시인 왕유(王維)의 종남별업(終南別業)이라는 오언고시이다.
죽 하 맹 호 도 (竹下猛虎圖)
호랑이는 감상용 그림 뿐 아니라 피사의 목적으로 조선시대 각종 공예품에 문양으로도 등장된다. 조선 초부터 왕궁에서 화원을 시켜 제작한 세화뿐 아니라 고운(1495~?)과 같은 어엿한 사대부들에 의해 일찍부터 그려지기도 했다.
이 죽하맹호도는 1978년 일본에서 고향을 찾은 그림으로 당시 사군자의 심사의원인 임희지가 무르 녹는 필치로 녹죽을 쳤고 그 아래 김홍도가 호랑이를 그렸으며 서예의 심사의원인 황기천이 화면 오른쪽 상단에 가는 글씨로 제발을 쓴 것으로 3인의 독특한 운치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대나무와 호랑이가 동가를 이루며 각기 조선후기 영모화와 사군자의 높은 수준을 대변하는 걸작으로 김홍도가 강세황(1713~1791)과 합작한 송하맹호와 상하를 구별하기 힘든 수작이다.
이 작품의 바위 중의 대는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굳굳히 일어설 수 있는 의지를 표현하며, 특히 대나무는 굳은 절개를 뜻하고 호랑이의 사방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눈은 살아있는 조선의 정신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여 굳은 의지속에 살아있는 조선의 민족혼을 예표한 작품으로 옛부터 호랑이는 집안의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꼬리가 서 있는 것은 자신감을 표하며 작품 속의 호랑이는 먹이를 발견하고 곧 뛰어나갈 것 같은 형상으로 약 200년 전에 소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섬세한 털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 그려진 것은 단원 작품 중의 걸작이라 볼 수 있다.
황 기 천(1760~1821)합작
옥순봉도 (玉筍峯圖)
金弘道(1745∼1806?) , 朝鮮 1796年, 종이.水墨淡彩, 26.7×31.6, 寶物 782號
Oksun Peaks / Kim Hong-do(1745∼1806?) /
Choson dynasty, dated 1796 / Ink and light color on paper / 26.7×31.6 / Treasure No. 782
김홍도 만년의 대표작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 중의 한 폭으로, 단양팔경(丹陽八景) 중 하나인 옥순봉(玉筍峯)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린 병진년(1796)은 김홍도가 정조(正 祖)의 초상화을 잘 그린 공로로 충청도 연풍의 현감(縣監)에 임명받아 1795년까지 재직한 직후이다. 이 시기에 김홍도는 사생(寫生)을 바탕으로 한 진경산수화에서 한차원 더 나아가 서정성이 두드러진 이상화된 현실세계를 표현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조어산수 (釣魚山水)
金弘道(1745∼1806?) , 朝鮮 1796年, 종이. 水墨淡彩, 26.7×31.6, 寶物 782號
Landscape with Fishermen / Kim Hong-do(1745∼1806?) / Choson dynasty,
dated 1796 Ink and light color on paper / 26.7×31.6 / Treasure No. 782
김홍도는 40대 후반에 이르러 일상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풍속이나, 인물, 화조의 소재를 산수배경 속에 그려내는 '사경산수(寫景山水)'의 경지를 보여주게 된다. 이 작품은 그러한 '사경산수'의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는데, 옆에 전시된 <옥순봉>과 함께 {병 진년화첩(丙辰年畵帖)}에 들어 있다. 한 사람이 삿갓 쓴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무엇인 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들 사이에 오가는 친밀한 감정이 화면 전체에서 느껴진다.
부상도 (負商圖)
金弘道(1745∼1806?), 朝鮮 18世紀 末∼19世紀 初, 종이.水墨淡彩, 27.0×38.5
Peddlers by the Castle Wall / Kim Hong-do(1745∼1806?) / Choson dynasty,
late 18th∼early 19th century / 27.0×38.5 / Ink and light color on paper
김홍도의 풍속화는 일상적인 서민 생활의 단면을 흥미롭고 실감나게 표현하여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런 풍속화를 당대에는 보통 '속화(俗畵)'라고 불렀다. 무거운 봇짐을 지고 성벽 밑을 지나가는 두 사람을 묘사한 이 작품은 단원이 만년에 이룩한 시정 넘치는 풍속화 의 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화면 왼쪽 위에 쓰여진 "단구(丹邱)"는 김홍도가 만년에 단원 (檀園)과 함께 즐겨 사용한 별호(別號)이다.
첫댓글 자료 정리 하주 잘되어 있네요. 고맙습니다. 찬찬히 읽어볼께요. 이런 거 많이 올려주세요. ㅎㅎㅎ 후다닥 도망나갈 거 말고..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