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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북부,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서반부를 차지하는 나라이다. 14세기 후반부터 덴마크의 영향 아래 있었고 1814년 이후부터 스웨덴의 지배를 받다가 1905년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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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정식명칭은 노르웨이 왕국(Kingdom of Norway)이다. 내륙부에서는 반도의 분수계를 경계로 스웨덴과 핀란드·러시아와 접경하고, 해안부는 북해·노르웨이해·북극해 및 스카게라크 해협에 면한다. 본국 외에 북극해의 스발바르 제도·얀마옌섬, 남대서양의 부베섬 등을 영유한다. 국토의 70%가 호소(湖沼)와 빙하·암석산으로 이루어져 인구의 70%가 도시에 몰려 산다. 1945년 국제연합, 19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1959년 유럽자유무역연합(EFTA)에 가입하였다. 노르웨이 국회가 선출한 5인위원회에서 매년 노벨평화상을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행정구역은 19개 주(fylke)로 이루어져 있다.
노르웨이의 자연
노르웨이는 국토의 대부분이 스칸디나비아 산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남부 여러 하천 연안에 나타나는 폭이 좁은 평지 이외에는 평야가 거의 없다. 스칸디나비아 산지는 실루리아기(紀) 말의 칼레도니아 조산운동에 의해 심한 습곡을 받은 뒤 침식에 의해 준평원화(準平原化)된 다음, 다시 중생대 말에서 제3기에 걸쳐 일어난 알프스 조산운동의 여파를 받아서 융기하게 되었다. 그 결과 현재의 스칸디나비아 산지는 1,000∼2,000m의 고원으로서 곳곳에 잔구가 나타나는 지형을 이룬다.
그 중 가장 높은 산지는 남부의 요툰헤이멘 산군(山群)으로 최고점은 갈회피겐산(2,468m)이다. 제4기의 빙기(氷期)에 나타난 북부 유럽의 넓은 빙상(氷床)이 스칸디나비아 융기 준평원을 침식하여 수많은 와지(窪地)와 깊은 U자곡(字谷)이 형성되었다. 와지는 호수를 이루었다. 그 후 빙상의 후퇴와 U자곡의 일부에 깊이 파고든 바닷물의 침입으로 피오르[峽灣]가 형성됨으로써 해안선이 매우 복잡한 피오르 해안이 만들어졌다.
피오르 중 가장 긴 송네 협만은 연장 185km에 달하고, 그와 같은 피오르가 노르웨이의 전 해안에 걸쳐 발달했기 때문에 노르웨이의 해안선 총연장은 지구 둘레의 약 반에 해당하는 2만km에 달한다. 피오르는 항만으로 이용되는 외에, 높이 수백 미터에 달하는 양안의 절벽이나 강물이 폭포가 되어 낙하하는 현곡(縣谷)의 웅대한 경관 등에 의해 관광지를 이룬다.
산지에는 빙하(氷河)가 남아 있는데, 요툰헤이멘 산지 서쪽에 있는 요스테달스브레 빙하는 유럽대륙에 잔존하는 최대의 빙하로, 면적은 1,000㎢를 넘는다. 스카게라크 해협으로 흘러드는 글로마강(江)·로겐강(江) 외에는 장대한 강이 없으나, 모든 강이 계단상의 지형을 급류를 이루어 흐르기 때문에 수력개발에 적합하여 노르웨이는 세계적인 수력발전국이다.
국토가 고위도 지역에 있으나 연안을 북상하여 북극해까지 미치는 북대서양해류(멕시코만류의 연장)의 영향으로 기후는 비교적 온화하다. 그러나 해안에서 산지에 걸친 기온변화가 현저하여, 서쪽 해안부는 여름에 서늘하고 겨울에 온화한 데 반하여 동부 산지로 들어갈수록 기온의 계절차가 격심하며, 강수량도 남서 해안부에 가장 많고, 북쪽 및 내륙으로 갈수록 적다.
서해안에 있는 베르겐의 기온은 2월 평균기온 1.3℃, 7월 평균기온 15℃이고, 연강수량은 베르겐에서 1,958mm, 동부의 오슬로에서 832mm를 나타낸다. 적설기간은 남서 연안에서는 30일 정도, 북부의 핀마르크 지방에서는 6개월 이상이다. 여름과 겨울의 낮과 밤의 길이차가 크며, 특히 북부 노르웨이에서는 여름에 백야(白夜) 현상이 나타난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인데도 고산지대에서는 툰드라를 이루는 곳이 많기 때문에 삼림 면적은 전 국토의 27% 정도이며, 중부·남부에는 침엽수림이, 북부에는 한대낙엽수림이 분포한다. 경지는 전국토의 3%에 불과하다.
노르웨이의 주민
노르웨이인의 대부분은 장신(長身)·장두(長頭)·금발·벽안(碧眼)의 게르만계 북유럽인종이다. 최북부 지방의 핀마르크주(州)에는 유사 이전부터 살아온 약 2만명의 라프(Lapp)인과 이들과의 혼혈족인 단두에 얼굴이 넓은 주민들을 볼 수 있다. 남서부에는 단두형(短頭型)에 다갈색 모발과 눈을 가진 알프스계 사람들이 비교적 많이 살고 있다. 노르웨이 인구의 3/4은 해안에서 15km 정도 떨어진 이른바 해안부에 살고 있고, 나머지 내륙부에서는 곡지(谷地)에 거주지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인구 분포는 선상(線狀)의 패턴을 보인다. 인구분포의 지역적 편재가 현저하여 국토 면적의 5%에 불과한 오슬로 주변지역에 인구의 1/3이 거주한다. 또한 총 인구의 약 50%가 도시 인구인데, 도시화가 가장 진행된 오슬로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해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점차적으로 도시인구율이 낮아진다.
헌법에 의하여 신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으나, 국교는 복음(福音) 루터교로 국민의 86%가 믿는다. 그리스도교는 10세기경 주로 해외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왕족들에 의하여 전래·포교되었으며, 따라서 노르웨이는 유럽 국가들 중에서 가장 늦게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나라에 속한다. 종교개혁 이후 다른 북유럽 국가와 같이 루터파 신교국(新敎國)이 되었고, 오늘날 다른 그리스도교국과 마찬가지로 크리스마스(율:Jul)와 부활절(포스케:Paaske)이 국민의 가장 큰 명절 또는 연중행사가 되고 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연중행사인 상크트한스(Sankt hans)제는 전통신앙시대의 하지제(夏至祭)에서 유래된 것으로 짧은 여름의 태양을 동경하는 북유럽인의 심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노르웨이어는 덴마크어·스웨덴어와 더불어 게르만어의 한 파(派)인 북(北)게르만어(또는 노르드어)에 속한다. 현재 노르웨이에는 2개의 공용어가 있다. 하나는 보크몰(Bokmal)이라 불리는 언어로, 오슬로를 중심으로 한 대도시 및 상류계층의 사람들의 일상어이며, 과거 노르웨이가 덴마크의 지배에 있을 때 노르웨이어화(化)한 덴마크어이다. 다른 하나는 니노르스크(Nynorsk)라 불리는 언어로, 19세기 중엽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고(古)노르웨이어와 각 지방의 방언을 정리하여 만든 언어인데, 1885년 의회의 승인으로 공용어가 되었다.
험준한 지형, 냉혹한 기후, 빈약한 천연자원 등 국토가 지니는 자연조건은 풍부한 상상력, 끈질긴 인내심과 모험심 등으로 표현되는 노르웨이인의 기질을 길러내었다. 풍부한 상상력은 각 지방에 전래되는 전설·민화(民話)·민요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여러 문호를 배출하였다. 또 강인한 인내심과 모험심은 옛날의 바이킹 기질로 나타나서 오늘날 세계적인 해운국을 이룩하는 바탕이 되었으며, 유명한 탐험가들을 배출하였다. 노르웨이 바이킹은 서기 800년경에 등장하여 맨섬(Isle of Man), 헤브리디스제도(Hebrides Is.), 북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을 정복하였고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에도 정착하였다. 그리스어로 작성된 한 기록은 노르웨이 바이킹들을 숲에 사는 유쾌한 민족으로 춤과 노래를 즐겼고 장수하는 민족이라고 묘사하였다.
노르웨이의 정치
노르웨이는 입헌군주제이며, 현행 헌법은 1814년 5월 17일에 제정된 것으로 그 후 약간의 수정이 가해졌다. 국가원수는 국왕으로, 1957년 부왕(父王) 호콘 7세의 뒤를 이어 올라브 5세가 즉위하였고, 1991년 1월 17일 올라브 국왕이 사망하자 하랄드 5세가 새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황태자 하콘 매그너스가 후계자 이다. 의회는 1973년 이래 집권하여 온 온건 사회주의 노선의 노동당이 계속 제1당이었으나, 1981년 9월의 총선거에서 제2당이 된 보수당이 그리스도교민주당·중앙당의 협력으로 조각(組閣)에 성공하였다. 1990년 11월 제3차 브룬틀란트 내각이 출범하였다. 1997년 9월 총선에서 노동당은 총 165석 중 65석을 얻었지만 총리 장랜드가 1993년 선거시 얻었던 36.9%보다 낮은 득표율을 보일 경우 사임하겠다는 선거공약에 따라 사임하고 기독민주당 당수인 K.본데빅(K.Bondevik)이 자유당·중앙당과 함께 소수중도연립정부를 수립하였다.
2000년에 정부는 가스발전소 건설 문제를 둘러싸고 건설을 주장하는 노동당 등 국회 다수파와 대립하였고 본데빅 내각이 총사퇴하였다. 2000년 3월 17일 총리 스트르텐베르크를 수반으로 하는 노동당 단독 소수정권이 성립했으며, 2001년 9월 10일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여당인 노동당이 패배한 후 스트르텐베르그 내각은 총사직하였다. 이어 10월에 전총리 K.본데빅이 총리에 재취임하여 연립내각을 발족하였다. 2005년 9월 12일 선거 결과 노동당 61석, 진보당(Progress Party) 38석, 보수당(Conservative Party) 23석, 사회당(Socialist Left Party) 15석, 기독교민주당(Christian People's Party) 11석, 중앙당(Center Party) 11석, 자유당(Liberal Party) 10석의 분포를 보인다.
국회의 부속기관으로는 노벨평화상위원회가 있고, 수상자 선정 및 시상을 담당한다. 내각은 총리 1인과 최소 7인의 각료로 구성되며, 국왕이 국회 다수당 중에서 선출한다. 2005년 10월 17일 젠스 스톨텐버그가 수상으로 취임한 이후 오늘에 이른다. 사법조직은 오슬로의 최고법원 및 고등법원·지방법원으로 구성된다. 1905년 6월 7일 스웨덴으로부터 독립선언을 한 이후 지방행정 구역은 19개 주와 북극해의 스발바르제도(Svalbard) 부베섬( Bouvet Island) 등의 부속도서로 이루어져 있다.노르웨이는 바렌츠해 내의 해양주권과 스발바르제도의 영해 어업조업권에 대하여 러시아와 해양 분쟁 중이다.
(1) 노르웨이의 외교
역사적으로 북유럽 국가의 분쟁에 시달려온 노르웨이는 중립 유지에 힘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5년 간 독일군의 점령에 놓이게 되자, 정부는 런던에 망명하였고 국내에서는 레지스탕스가 활약하였다. 전후(戰後) 국권을 회복한 후 소련의 동향을 주시하면서도 서방진영의 입장을 명확히 하여 1949년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였고, EFTA(European Free Trade Association:유럽자유무역연합)을 창설, 그의 일원이 되었다.
또한 북유럽 국가와의 제휴에도 힘을 기울여, 1953년 스웨덴·덴마크·아이슬란드 및 노르웨이가 참가하고 1956년 핀란드가 참가한 북유럽이사회를 만들어 정치·경제·문화적인 협력관계를 확립하였다. 또 OECD(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경제협력개발기구)의 회원국이다.
EU(European Union:유럽연합) 가입은 정부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어민(漁民)의 반대 등으로 인해 1972년, 1994년의 국민투표(반대 52%, 찬성 48%)에서 부결되었다. 노르웨이 정부는 세계 평화와 협력을 적극 추진하고 있으며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아이슬란드 등과 경제·사회·문화적 협력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기본 외교 정책은 친서방 정책을 유지하고 있으나 EU 가입 문제는 신중한 입장에 서 있고 소수민족 독립, 인종 차별 반대, 개발도상국 원조 등의 면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외교 방향은 북방 지역의 자원 개발 및 환경 보호, 북유럽 여러 나라와의 연대 및 협력 강화, 유럽 여러 나라와의 협력관계 강화, NATO를 통한 국가 안보 유지, 유엔 등 국제기구에 적극 참여, 러시아와 선린 관계 추구, 세계인권 옹호, 환경보호를 위한 국제 협력 등이다.
(2) 노르웨이의 군사
노르웨이는 발트해, 보트니아만 등에서 북해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독일, 구소련 등의 주변국들로부터 침략을 받아 왔고 이 때문에 중립유지가 곤란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독자적 국토방위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병역제도는 지원제 및 징병제를 병용하고 있으며 18세부터 44세까지의 남성이 12개월간 의무 복무한다(2004년). 전시에는 16세에 징집한다. 지원병은 남성은 17세, 여성은 18세에 지원할 수 있다. 덴마크와 더불어 NATO 북부군을 형성하며, 사령부가 오슬로에 있다. 오슬로 주변에는 나이키허큘리스(Nike-Hercules, 지대공 미사일의 일종) 기지가 있다. 2000년 현재 군사는 육군 1만 9000명, 해군 8,200명, 공군 8,500명, 향토군 500명이며, 노르웨이 육군, 왕립 노르웨이 해군, 왕립 노르웨이 공군 등의 부대가 있다. 2003년 국방비는 GDP의 1.9%를 차지한다.
노르웨이의 경제
(1) 노르웨이의 농림수산업
노르웨이의 농경지는 주로 오슬로·트론헤임 주변, 기타 남부와 서부의 협만 안쪽이나 호수 연안에 분포한다. 농가의 94%가 농지 50ha 이하의 자작농으로, 낙농제품·육류 및 감자·보리·귀리와 목초를 생산하고, 특히 낙농에 주력하는 외에 밍크·여우 등 모피수(毛皮獸)의 사육이 활발하다. 밀·사료·채소·과일 등은 자급이 어려워 수입에 의존한다. 농업은 국내총생산의 2.3%를 차지한다. 2003년 농가인구는 21만명이다.
산림의 80% 이상이 침엽수림으로 목재 및 제지 원료가 되며, 임산물과 관련된 것의 수출이 총 수출액의 14%를 차지한다. 국공유림(國公有林)이 대부분이며 어업과 더불어 임업을 겸업으로 하는 농가도 많다. 세계 유수의 어업국으로 로포텐제도 부근에서 바렌츠해(海)에 이르는 북대서양의 대어장을 끼고 대구·청어·정어리·새우 등의 어획이 많다. 노르웨이는 근대 포경업(捕鯨業)을 이끈 나라였으나, 근래 국제적인 포경의 제한으로 인해 쇠퇴했다. 노르웨이는 1977년 1월 본토 연안에 200해리 경제수역을, 같은 해 6월 스발바르제도 해역에 200해리 어업수역을 설정하였다. 2001년 수산물 어획량은 219.9만톤으로 유럽 제1의 수산국이다.
(2) 노르웨이의 광공업
노르웨이 북부에서 산출되는 철광석은 노르웨이의 수요를 거의 충족시키고, 그 밖에 보크사이트·구리·니켈 등이 산출된다. 또한 스발바르제도에서는 노르웨이인(人) 및 러시아 업자에 의해 석탄이 채굴되고 있다. 1960년대 경제인구 부족과 천연자원 개발 미흡 등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다가, 1968년 이후 북해에서 석유 시추 결과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어 1975년부터 석유수출국이 되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석유산업에 의존하는 경제체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노르웨이는 풍부한 수력에 의한 수력발전 의존국으로, 연간 발전량 1089억 kWh의 99%(2004)가 수력발전에 의한다. 전력의 수급 및 기후조건 등으로 발전소는 남부에 많고, 특히 남부산지의 동사면이 주요 전원지대이다. 전력의 일부인 44억kWh는 스웨덴·덴마크로 수출된다.
공업은 산업의 부문별 생산액에서 수위를 차지하며, 공업내용은 식품·금속·펄프·제지·석유화학 등 공업이 주가 되고, 조선·기계·의류·섬유 등의 공업이 뒤를 잇는다. 금속공업 중 풍부한 전력을 이용한 알루미늄 제련은 북서유럽 제1위이고, 조선은 전통을 자랑하는 공업이다. 주요 공업지역은 오슬로를 중심으로 한 오슬로 협만 연안지역 및 베르겐·스타방에르 등 남부 서해안 지역 등이다.
(3) 노르웨이의 무역,운수,교통
노르웨이의 주요 수출품목은 총 수출액의 25%를 차지하는 석유 외에 선박·기계류·알루미늄·어개류(魚介類)·철강 등이고, 주요 수입품목은 기계류·화학제품·식료품·의류 등이다. 주요 무역 상대국은 수출에서 스웨덴·독일·영국·네덜란드·덴마크·미국, 수입에서 독일·스웨덴·덴마크·영국·중국·프랑스 등이다. 2006년 수출은 1226억 달러, 수입은 599억 달러이다. 무역의존도는 수출이 34.5%, 수입이 18.5%이다.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해운업은 무역 외 수지면에서 큰 몫을 하고 있다.
스웨덴·덴마크와의 공동출자에 의한 스칸디나비아항공(SAS)은 세계 각지의 국제항공로에 취항하고 있으며, 공항 99개(2006)가 있다. 철도 총 연장은 4,077km, 철도수송량은 2477 백만명/km, 3019 백만톤/km(2002년)이며, 도로 총연장은 92,513km이며, 석유수송파이프가 53km이다(2003).
(4) EU와의 관계
노르웨이는 EC(European Communiyty:유럽공동체) 가입안 및 EU(European Union:유럽연합을 말하며 1994년 1월1일부터 바뀐 EC의 새로운 명칭) 가입안이 각각 1972년 및 1994년 국민투표에서 부결되기는 하였으나, 이는 EU와의 협력강화 방법론에 대한 국민들간의 상반된 견해에서 나온 결과이다. 특히 국가 주권의 국제기구에의 이양 반대라는 정치적 이유와 어업자원 등 부존자원에 대한 주권 포기에 대한 국민적 우려에서 기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노르웨이에서는 EU 가입 필요성에 대한 토론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2007년 2월 기준)로서는 EU와의 EEA(European Economic Area:유럽경제지역) 협정(1992년10월)을 통해 EU와의 협력증진을 모색하고 있다. 향후 EU 가입시 충격을 완화하기 위하여 EU국가들의 기준에 맞추어 경제를 운영하고 있다. EU 가입에 대해서는 노동당이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반면, 농어민을 기반으로 하는 중앙당과 극좌계열인 사회주의좌파당이 반대하고 있다. 나머지 정당은 대체로 가입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노르웨이와 EU간의 경제분야 상호의존 관계는 밀접하며, 특히 원유, 천연가스, 해운분야에서의 의존도가 증대되고 있다. EU는 노르웨이 수출입의 약 2/3를 점하는 최대 교역상대로서 유럽협력의 일환으로 유럽원자력연구센타(CERN), 유럽분자생물실험실(EMBL), 유럽과학기술연구협력(COST), 유럽우주국(ESA), 유럽공동기술개발기구(EUREKA) 등에 가입한 상태이다.
2004년 헝가리, 체코 등의 동유럽 국가들이 대거 EU에 가입하여 이에 대한 관심이 커졌으나 EU 가입을 반대하는 세력도 확고하여 정치쟁점으로 삼는 것에 대해서는 모든 정당이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현재의 연립정부는 참여 정당간 EU 가입에 대해 입장이 현격히 다른 만큼 이 문제로 인해 정책공조가 어려워질 것을 우려하고 있어, 향후 수년 내에 현안문제로 삼지않을 것으로 본다.
노르웨이의 사회
(1) 사회보장
세계 최고급의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는 노르웨이는 스웨덴 등과 더불어 사회보장제도가 잘 갖추어진 나라로 유명하다. 사회보장제도는 장기간에 걸쳐서 정비되어, 질병·신체장애·업무상 상해·실업보험 및 아동교부금·양로연금·아동복지 등 여러 종류가 있다. 2003년 기준 사회복지지출(Social Expenditure)은 GDP의 25%에 달하며, '개인의 성공여부와 관계없는 생활안정'을 슬로건으로 하고, 지출액의 50% 가까이는 연금(年金)이다. 연금을 받을 수 있는 나이는 67세부터이며, 평균수입을 갖고 있는 사람이 규정기간 동안 연금보험 계약을 마치고 나면 수입이 가장 높았던 기간에 벌었던 액수의 3분의 2 정도를 연금으로 받는다. 최근 연금 개혁은 노령기의 보편적인 소득보장과 노동친화적인 요소를 도입하였다. 노르웨이의 아동이나 노인, 병자에 대한 공적인 사회서비스 강조는 노동친화적이며 가족친화적이다.
(2) 노르웨이의 교육
노르웨이의 의무교육은 6~15세까지의 10년간으로 초등학교 7년, 중학교 3년으로 나뉘어 있다. 초등교육 후 학생들은 직업훈련과 대학예비교육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다. 1811년 창립된 오슬로대학교, 1948년 창립된 베르겐대학교 등 여러 개의 대학이 있다. 대학교육은 무료이며, 최근 노르웨이는 고등교육시설, 특히 직업적인 고등교육시설이 부족하여 중등교육 후 교육을 위해 입학허가를 받는 학생의 수를 제한하고 있다. 민족학 연구가 활발하여 오슬로대학 부속의 민족학연구소가 유명하고, 그 밖에 해양학·극지(極地) 연구도 앞서 있다. 문자 해독률은 거의 100%에 가깝고, 대부분의 시민 누구나가 원하면 간단히 교육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교육 선진국이다.
(3) 노르웨이의 스포츠
스키는 노르웨이의 국기(國技)로 기원전부터 전해져온 스포츠라는 사실이 고대문학에 나타나 있으며, 오늘날에도 오슬로 교외 홀멘콜렌의 세계스키점프대회는 국민적 행사의 하나가 되고 있다. 1860년 노르웨이 왕실이 스키대회 승자에게 상을 주고 나서부터 기존의 이동방법으로서의 스키가 스포츠로서 시작되었고, 이후 국가적 스포츠가 되어 노르웨이를 중심으로 발전해 나갔다. 1888∼1889년에 노르웨이 극지 탐험가로 유명한 프르쵸프 난센이 스키로 그린란드 횡단에 성공하여 사람들이 스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때문에 난센은 근대 스키의 정신적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한다. 가장 오래된 스키 경기는 1892년 노르웨이 오슬로 부근에서 열렸던 홀멘콜렌(Holmenkollen)대회이다. 또한 노르웨이는 1994년 릴레함메르(Lillehammer)에서 동계올림픽경기대회를 유치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스케이트·축구 및 여름철의 요트·모터보트·캠프여행·수영 등이 성하다. 특히, 노르웨이 여자축구는 세계최고의 수준을 보유하고 있다. 또 탐험을 좋아하는 국민성으로 F.난센, R.아문센 등 탐험가가 배출되었고, T.헤위에르달은 발사(balsa)로 만든 배 콘티키호(Kon-Tiki 號), 갈대로 만든 배 라호(Ra 號)로 남태평양과 대서양을 횡단하는 등 이색적인 탐험을 하였다.
노르웨이의 문화
북유럽 신화를 담은 고시집(古詩集) 《에다 Edda》가 아이슬란드에서 발견되었는데, 내용의 절반 가량이 9~11세기에 걸쳐 노르웨이에서 씌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13세기 전반 아이슬란드의 학자 스노리 스투를루손이 노르웨이 왕조사(王朝史)로서 주목되는 《헤임스크링글라 Heimskringla》와 《신(新) 에다 Younger Edda》를 집필하였는데, 이 두 책에는 노르웨이의 신화적 전승(傳承)이나 당시의 시인들의 시가 많이 실려 있다. 노르웨이가 스웨덴 덴마크의 지배에 있었을 때는 노르웨이의 문화·문학의 공백시대였으나, 노르웨이 극작가 홀베르(Ludvig Holberg)는 매우 유명하였으며 그의 희곡은 아직도 노르웨이와 덴마크에서 공연된다.
노르웨이 문학이 독자적인 발전을 본 것은 덴마크 통치로부터 해방된 1814년 이후부터이다. 19세기 전반에는 H.베르겔란, J.벨하벤의 양대 시인이, 후반인 북유럽 문학의 황금시대에는 B.뵈른슨, H.입센 등이 배출되었다. 19세기 말부터 신(新)낭만주의 사조가 일어나 K.함순, S.운세트 등이 나왔다. 노르웨이 문학은 입센 등에 의해 대표되는 강력한 사실주의의 특색이 있으며, H.킹, O.둔 등이 대작을 발표하고, 시 분야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저항시를 쓴 A.외베를란, 독일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N.그리그 등이 활약하였다. 전후(戰後)에는 덴마크에서 귀화한 A.산데모제와 T.베소스 등의 활약이 눈에 띈다.
노르웨이는 산이 많고 국토가 남북으로 길어 각지가 고립되기 쉬운 지형이기 때문에 지역주의의 전통이 뿌리깊게 박혀 있으며, 문화·스포츠·사회 등 여러 가지 활동이 지역 내 민간의 여러 조직을 통해서 실시된다. 제헌절인 5월 17일을 전국적으로 경축하는데, 보통 전통 민속의상을 입고 시가를 행진하거나 다른 축제행사들을 벌인다. 노르웨이는 많은 문화적 전통을 고수하고 있어서 결혼식이나 다른 축제행사에서 섬세한 민속의상을 자주 볼 수 있다. 축제로는 고전, 현대, 재즈음악을 망라한 민속 음악, 연극, 무용 등의 다양한 장르가 공연되는 베르겐 국제 페스티벌 축제 및 트론헤임의 성 울라프 문화축제가 유명하다.
노벨의 숨진 날을 기려 매년 12월 10일 노벨평화상이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 건물에서 수여된다. 노벨평화상 수여자는 오슬로에 있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서 뽑는데 이 노벨위원회는 노르웨이 국회에서 선출된 사람들로 구성된다. 최초의 수상자는 적십자를 창설한 스위스의 앙리 뒤낭이었으며, 그동안 마틴 루터 킹 목사, 고르바쵸프, 넬슨 만델라, 우리나라의 김대중 대통령이 등이 수상하였다.
(2) 노르웨이의 미술
그리스도교 전래 이전의 노르웨이 미술은 그로테스크한 괴수(怪獸)의 무늬, 추상적인 무늬 등으로 장식된 생활용구·제기(祭器) 등으로 대표되는 바이킹 미술이었다. 13세기 이후 유럽 그리스도교 문화권의 영향으로 로마네스크·고딕·앵글로노르만·르네상스·바로크·로코코 양식 등이 도입되었다.
19세기 전반에는 회화 분야에서 풍경화가 J.달이 나와 노르웨이 근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고, 인상파시대에는 세기의 화가 E.뭉크 및 E.베렌숄 등이 나왔다. 20세기에 들어서자 P.크로그 등이 신풍(新風)을 일으켰다. 조각에서는 G.비겔란의 활약이 현저하여 오슬로의 프로그네르 공원에는 그의 작품 150점 이상이 전시되어 있으며, 유명한 건축가로서는 원시적 소재와 근대공예를 결합하여 바이킹 양식을 탄생시킨 H.문테가 있다.
또한 노르웨이의 공예미술은 재료를 기반으로 하여 디자인이 발전되었다. 노르웨이의 도예는 특출한 아이디어와 기교적인 면을 잘 표출시키고 있다. 크기는 부분적으로 거대하며 재료 면에서도 아주 다양하다. 기나긴 도예 역사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노르웨이의 미래 지향적인 도예작품들은 새로움과 많은 아이디어를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 도자기는 용도에 따라서 숙련된 기술로 생산되었지만 지금은 더욱더 발전되어서 자유스러운 조형물로 그 영역이 넓어졌다.
노르웨이의 과학기술
노르웨이의 과학기술은 노르웨이 기술위원회, 노르웨이 생명공학자문위원회, 국가과학기술윤리연구위원회 등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노르웨이는 1989년 대학법이 통과되면서 과학기술에 대한 정보를 대중에게 공개적으로 제공하는 것을 의무로 하였다. 1899년 노르웨이 전기통신부(NTA)가 설립되었고, 1987년 노르웨이 전기통신통제국(NTRA)이 설립되었다. 노르웨이의 통신사업은 1998년 1월부터 완전히 개방되었다. 통신사업자로는 정부 소유의 공중 통신사업자인 텔레노르(Telenor)가 있으며, 오슬로 및 주변지역에 집중된 통신망을 보유하고 있는 엘텔레가 있다. 이동통신 가입자수는 2005년 현재 약 475만 5천명이며, 셀룰러 사업자는 텔레노르 모빌과 넷콤(NetCom) GSM 등이 있다. 1993년 1월부터 데이터 통신시장은 텔레노르의 독점이 해제되고 여러 사업자가 생겨났다. 2005년 현재 70여 개의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자가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고, 인터넷 사용인구는 약 300만 명이다.
노르웨이와 대한민국 관계
노르웨이는 1959년 3월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북한과도 수교하고 있다. 6·25전쟁 중에는 한국에 병원선(病院船)을 파견하여 의료지원을 하였으며, 수교 이전인 1956년 3월 양국간 협정에 의해 노르웨이는 서울에 메디컬센터(현재 중앙의료원)를 건립·운영하다가 한국에 시설 전체를 이양하였고, 1969년 10월 사증면제협정(査證免除協定) 등 4개의 주요협정을 체결하였다. 1976년 6월에는 한국경제사절단이 노르웨이를 방문하여 조선(造船) 부문의 양국간 합작투자에 합의하였고, 1978년 10월에는 노르웨이 공업성(工業省) 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50명의 산업사절단의 방한(訪韓)을 계기로 한국·노르웨이 간 경제협력위원회를 발족시켰다.
1993년 11월 한국과 노르웨이는 섬유협정을 1995년까지 연장하기로 합의하였다. 1999년에는 경제·기술·산업협력협정 개정의정서에 서명하였다. 2005년 현재 대한수입 6억 4000만 달러, 대한수출 4억 7000만 달러이다. 우리나라의 대노르웨이 주요수출품은 선박(통상 전체수출의 70% 이상 차지), 자동차, 고무제품, 영상기기, 섬유류 등이며, 대노르웨이 주요 수입품은 선박해양구조물 및 부품, 기계류, 수산물 등이다.2006년 6월 현재 교민은 216명(오슬로 113, 기타 지역 103)이고, 154명이 체류(오슬로 87, 기타 지역 67)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역사
(1) 노르웨이의 왕국성립
노르웨이는 유럽 북방문화권 중에서도 국가통일이 가장 늦었던 나라로서, 노르웨이인의 조상인 노르드인은 8세기 말까지 소국분열(小國分裂)의 상태에 있었다. 9세기에 들어서자 노르드인의 해외진출이 급격히 활발해져서 아일랜드를 약 반세기 동안 지배하기도 하였다. 그 무렵 노르웨이 본토에서도 뒤늦게 통일국가 형성이 진척되어, 860년에 즉위한 하랄 미발왕(美髮王:harald Fairhair)이 노르웨이의 여러 지역을 정복하고 872년에 통일 왕국을 세웠는데, 그것이 노르게 왕국, 즉 노르웨이 왕국의 기원이다. 하랄왕에 패한 왕족·귀족들은 부하를 이끌고 아이슬란드를 비롯하여 셰틀랜드·오크니·헤브리디스 제도 등지에 정착지를 구하였고, 그린란드·북아메리카 등지로 이주한 자도 있었다.
9세기 이래 노르드인은 바이킹으로서 에스파냐 남부로 진출하고, 다시 11세기 초에는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섬에 노르만국(國)을 건설하여 비잔틴제국을 자주 습격하였다.10세기 이후 노르웨이왕국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지속되어 다시 덴마크의 지배를 받았으나, 망누스 1세(재위 1035∼1047) 때는 한때 덴마크왕을 겸하는 세력이 되기도 하였다.
1130년부터 50년간 왕권을 둘러싼 귀족들 간의 내란이 지속되었고 마침내 1184년 스베레 구르드손(Sverre Sigurdsson)이 강력한 통일 국가를 완성하였다. 1184년에서 1319년에 이르는 기간은 스베레 왕가의 시대로, 아이슬랜드· 헤브리디스제도 ·오크니제도 ·셰틀랜드제도· 그린랜드 등으로 노르웨이의 영토를 확장하고 왕위를 장자가 상속하게 하는 등 국력이 크게 신장되고 제도가 정비되었다. 노르웨이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것도 그 무렵이며, 처음에는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구에 속했다가 1152년에는 니다로스 대주교좌가 설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적으로 대립항쟁이 그치지 않아 왕권(王權)이 쇠퇴하여, 1282∼1285년의 한자동맹의 경제봉쇄로 인해 경제적으로는 한자동맹에 굴복하였다.
(2) 노르웨이의 덴마크와 스웨덴 지배
14세기 후반, 노르웨이왕 호콘 6세는 덴마크 발데마르 4세의 딸인 마가레테(Margarethe)와 결혼을 하였는데, 그의 사후 마가레테 여왕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함께 통치하게 되었다. 그는 스웨덴 마저도 통치하여 3국 간 연합을 이루어내었다. 그 후 연합왕국의 왕은 노르웨이·스웨덴·덴마크의 원로원 간 합의를 통하여 선출하였는데, 덴마크 에릭왕(King Erik)이 연합 1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스칸디나비아 3국이 왕실 간 친인척 관계로 복잡하게 연결되었으며, 이러한 연합왕국은 3국이 문화적으로 유사하고 독일 세력에 공동으로 대처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성립이 가능하였다.
덴마크왕이 다른 두 나라 왕을 겸하는 국가연합인 칼마르 동맹은 그 후 120여년 간 지속되다가 1523년 크리스티안 2세의 폭정에 항거해 스웨덴의 구스타프 바사(Gustav Vasa)가 봉기, 크리스티안 2세를 축출하고 스웨덴은 독자적인 국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스웨덴이 독립함으로써 3국 연합은 와해되었으나 덴마크 왕에 의한 노르웨이 지배는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 덴마크 지배 아래 있던 노르웨이는 덴마크와 함께 나폴레옹 진영에 속하게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종료되는 해인 1814년 스웨덴은 덴마크를 침공, 킬(Kiel)에서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서 덴마크는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양도하였다. 킬 강화 조약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는 에이츠볼(Eidsvold)에서 독립을 선포하고 1814년 5월 17일 당시 유럽에서 가장 진보적인 헌법을 채택하였다. 이에 스웨덴의 왕 칼 14세는 노르웨이를 전격 침공하였고 노르웨이는 스웨덴과 연합 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는 당시의 헌법을 유지하였으며 노르웨이인이 제정한 헌법을 바탕으로 19세기에는 민주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3) 노르웨이의 독립왕국 형성
노르웨이는 1814년 이후 지속적으로 연합 내 평등권을 주장하였으며, 민주주의의 발전과 이에 따른 민족주의의 앙양으로 노르웨이에서 스웨덴 왕의 군주권(君主權)은 명목화되어 갔다. 1890년대에 들어와 노르웨이가 독자적인 영사권을 주장하면서 양국관계는 악화되었다. 1905년 9월 독자적인 영사권을 둘러싼 양국의 갈등은 개전(開戰)의 징조를 보일 정도로 심화되었으나, 전쟁의 양국 대표들이 칼스타드(Karlstad)에서 가진 회합에서 스웨덴은 노르웨이의 완전한 독립과 연합의 분리를 승인하였다. 1905년에 노르웨이는 국민투표에 의해 일방적으로 동군연맹을 해체하고 완전 독립하여 덴마크 왕통(王統)의 호콘 7세를 국왕으로 받아들였다.
그 후 노르웨이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유지에 성공했으며 1935년 새로운 경제정책을 도입, 복지국가 건설을 목표로 세금 징수를 늘리고 공공사업을 확대하였다. 1940년 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노르웨이의 복지국가 건설 과정은 일시 중단되고, 독일군이 덴마크에 이어 노르웨이의 일부를 점령하였고, 자체 군사력이 약했던 노르웨이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철수하자 전 국토를 독일군에게 점령당하게 된다.이에 노르웨이 정부와 왕실은 영국으로 탈출, 망명 정부를 세우고 노르웨이 상선단 대부분은 연합국의 관리하에 편입되면서 독일 점령군에 대한 저항운동이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약 3만 5천여명의 노르웨이인들이 집단수용소나 감옥에 수용되었다.
2차 대전이 종료된 후, 노르웨이는 국제연합(UN)의 창설 회원국으로 참여하게 되고 1949년에는 전통적인 중립정책에서 친서방 정책으로 전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여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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