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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27편 묵상) 두려움을 몰아내는 기도(세상을 살아갈 용기가 없을 때) (다윗의 시)
<가톨릭교회는 예배 때마다 수 많은 시편 구절들을 인용하지만, 진작 그 의미도 모르며, 또한 마음에 와 닺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갑갑하고 어색하였다.
수도원에서 성무일도에 참여할 때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근엄한 분위기와는 달리 한심하기 조차하였다!
뜻도 모르면서, 이해도 되지 않으면서, 가르침도 없이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시편 구절의 인용과 반복!
그것이 바로 율법이며 종교이다!
(물론 예외는 있을 것이다!)
나는 도전하기로 결심하였다! 오래 전부터!
그리고 수 많은 고난을 통과하면서 세월은 흘렀고…,
이 아름다운 시들을 읽고 또 읽고 묵상하면서, 뛰어난 선진들의 주석들을 참고하고, 그간의 노트와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과 나누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위임에 따라, 이 글들을 기쁘고 기쁜 마음으로 지금 쓰고 있는 것이다!
이 위임을 주신 주님!
쓸 수 있게 환경을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아멘!>
1. 많은 이들은 시편 27편을 읽고 제왕시라고 부른다.
그러나 제왕시가 되기 위한 조건 중의 하나인 이 시를 읊고 있는 사람이 왕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주장할 만한 증거를 찾아 설득력 있게 이 시가 제왕시라는 점을 증명하기란 용이하지 않아 보인다.
이는 이 시의 장르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아니면 전통적인 방식대로 다윗과 연관 지어 읽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찾는 문제도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의 삶의 정황과 연대를 정확하게 규정지을 수 없다는 사실과 이 시의 표제가 ‘다윗의 시’임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이상, 이 시를 다윗이 겪었던 일생을 상상해보며, 나아가 우리의 지난 고된 삶들과 연관시켜 묵상해 보는 것은 흥미있어 보인다!
2. 배경.
시 27편의 주제와 다윗의 일생의 한 부분, 곧 사울 왕과 다윗의 만남이 있는 사무엘기 상권 24장이 일맥상통한다는 점이 정말 놀랍다!
사무엘기 상권 24장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엔 게디’인데 흔히 ‘피난처’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유대 광야에 위치해 있다.
산 정상에는 작은 폭포가 있는데 사막에서는 제법 규모가 있는 샘이 흐르고, 이곳을 일컬어 아르곳 와디라고 부른다. 이곳 아르곳은 베들레헴 동쪽 광야와 십과 마온의 동쪽 광야를 나누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곳의 물 근원은 다윗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다윗 샘’이라고 부르는 곳에서부터 흐르기 시작된다.
이곳이 바로 다윗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모여 있었던 곳이며, 바로 사무엘기 상권 23-24장의 배경이 되는 장소이다!
사무엘기 상권 23장하에서 다윗은 사울 왕의 포위를 우연찮게 피한 후, 수 많은 동굴이 있는 천연의 요새인 ‘엔 게디’ 산성으로 올라가 머물렀음을 본다(23,26-24,1). 사울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온 이스라엘에서 가려 뽑은 삼천 명을 이끌고 다윗과 그 부하들을 찾아 ‘들염소 바위’ 쪽으로 갔다. 아마도 사울 왕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을 거쳐서 이곳 ‘엔 게디’까지 왔을 것이다.
‘엔 게디’는 다윗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영감을 주기에 충분한 장소였다!
높이 약 1200m에, 수 많은 크고 작은 동굴들이 있는 ‘엔 게디’에서 다윗은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하면서도 사울 왕과의 대화가 이루어졌던 곳이다.
계곡은 깊은 낭뜨러지이지만 양 절벽의 윗끝은 매우 가까워서 대화가 가능한 U자형 지형이었다. 즉 ‘엔 게디’ 산성의 양 절벽의 윗끝은 건널 수는 없지만 매우 가까워서 대화가 가능한 특별한 지형을 가진 곳이다.
24장에 의하면, 그곳 동굴 하나에 사울 왕이 들어가 뒤를 보았는데, 바로 그 곳에 다윗과 그의 무리들이 매복해 있었고, 사울 왕을 죽이기에 절대적인 기회를 다윗은 맞지만, 다만 가만히 다가가서 죽이지 않고 사울 왕의 옷자락을 몰래 잘랐다. 그런 후 U자형 절벽 위에서 사울 왕과 마주 서서 자기의 결백을 호소하며 옷자락을 증거로 제시한다.
다윗은 이러한 지형적 특성을 이용하여 사무엘 상권 24장에서 어떻게 자신을 체포하기 위하여 온 사울 왕을 살려 보낸 후, 그곳에서 사울 왕과 어떻게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의문의 실마리를 제공한다!(사무엘기 상권 24,10-12).
특히 이 시는 다윗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울 왕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먼저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기쁨 넘치는 확신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감정은 갑자기 일변한다. 곧 그는 주님께 그를 버리지 말고 그가 위급할 때에 도우시며 위로해 달라고 갈망하는 마음으로 기도한다. 주님께서 그의 도움과 위로와 근원이시므로 그는 여호와 하느님을 기다리기 위해 스스로 힘을 북돋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무엘기 상권 25장 1절에 있는 대로 다윗은 자신의 영적인 아버지였던 사무엘의 죽음을 들었던 장면을 상상해보라!
나는 이스라엘 여행 중 이곳에 머물면서 시편 27편을 묵상한 적이 있으며, 그 때 노트된 내용이 바로 <시편27편 묵상>의 내용이다!
먼저 사무엘기 상권 24장을 묵상한 후 시편 27편을 30회 이상을 읽고 읽어보라!
할렐루야!
3. 본문 주해
(1절).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다윗은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큰 신뢰와 확신을 표현한다. 여호와는 그의 빛이고 구원이며 능력(마오즈, 강하고 튼튼한 장소)이시므로 아무도 그를 해할 수 없다!
빛은 이해, 기쁨, 생명을 나타내고, 요새(strong hold)는 방어를 나타낸다. 사울 왕의 공격을 피하여 다윗과 그 일행이 숨어있던 ‘엔 게디’는 1200m 높이에 수천 개의 동굴이 있는 천연적인 요새였던 것이다.
“주님은 나의 구원” 주님께서 우리의 구주이심은 아주 실재적이다!
그분은 살아 계시며 나를 지키시는 주님이시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자 우리의 구원이시다!
여호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바로 주 예수 그분 자신이시다!
주님과의 이러한 올바른 관계의 정립과 삶 중에서의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불확실하고 위급하며 예고 없이 닥치는 고난의 환경들을 두려움 없이 맞고 이길 수 있는 용기와 위로가 된다.
주님께서 당신의 삶을 혼란케 하고자 하는 모든 공격으로부터 지키신다!
(2절). <악인이 내 몸을 집어삼키려 달려들지라도 내 적이요 원수인 그들은 비틀거리다 쓰러지리라.
(3절). 나를 거슬러 군대가 진을 친다 하여도 내 마음은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나를 거슬러 전쟁이 일어난다 하여도 그럴지라도 나는 안심하리라.>
우리는 이 시에서 다윗의 요지부동의 신앙을 만난다(로마8,31-32).
아마도 다윗은 자신을 추적하는 사울 왕과 또한 그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믿음이란 비록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환경과 맞닥뜨린다 할지라도 그 환경 가운데서 그분을 인정하며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선과 악의 기로에 서서 늘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 선택의 잣대가 이것은 하느님의 뜻인가? 아니면 나의 뜻인가?를 알기 위하여 선택 전에 기도드리는 습관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악한 자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교묘히 다가 왔다가 비틀거리며 넘어졌구나!
할렐루야! 나의 주님이시여!
(4절). <주님께 청하는 것이 하나 있어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 보고 그분 궁전을 눈여겨보는 것이라네.>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의 주님께 청했던 한 가지 일, 곧 갈망을 본다!
그의 갈망은 그의 평생동안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었다!
“주님의 집에 산다”는 말은 주님께 예배한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교회가 주님의 집이며(1티모3,15), 우리 사람의 영이 주님의 거처이다(에페2,22).
“내 한평생”의 원어적인 의미는 “내가 사는 한”이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특히 “청하는 것”은 완료 시제라하여 쉽게 말하면 과거형으로 되어 있으므로 “청하였던 것”으로 번역해야 하며, “그것을 얻고자 하니”는 히브리어에서 미완료 시제이며 미래형으로 해석되곤 한다. 시제에 대한 이러한 서술은 과거에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다윗의 일생을 통해 계속해서 나타나는 열렬한 기원을 나타내기 위함인 듯하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하느님의 집에 평생을 거하는 것, 그분과 영 안에서 친근한 교제를 계속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던 것이다!
이 일에 위해서 다윗이 일평생 동안 기도한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께 예배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예배하는 것이었다!
예배에 그는 삶의 기초를 두었다!
사울 왕과 삼천 명의 군대가 포위를 좁혀오고 있는 이 절대 절명의 순간에 다윗은 하느님께 예배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는 이미 전쟁을 초월하였다!
다윗의 신앙은 이미 하늘 위에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사를 초월한 경지였다!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는가?
아! 다윗이여! 슬프고도 기쁜 믿음의 사람이여!
그 절대 절명의 위기 가운데서도 그는 그의 구원이신 주님께 예배를 앙망하고 있다!
사랑하는 다윗 왕이시여!
만일 당신이 현재의 환란과 고난에서 승리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주님께 예배하라!
예배에서 승리하는 자는 당신의 인생에서 승리한다!
예배하기를 사모하라!
진정 승리의 전제 조건임을 당신은 곧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 안에서 진실함으로 예배해야 합니다.”(요한4,24). 무엇이 진실인가?
(“하느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는 원어적으로 위와 같이 번역되어야 옳다!)
여기서 진실이란 사람의 영이, 사람의 영 안에 계시는 성령을 접하는 것이다.
바로 영(사람의 영)이 하느님(영 안에 있는 성령)을 접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예배하는 것은 영 안에서 접촉하는 것을 의미하고 또한 경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과 관계되는 모든 것은 영 안에 있다!
진리의 영은 실재의 영이다!
그러므로 영적 실재는 성령 안에 있다!
오직 성령 안에 있는 것만이 참이며, 이는 모든 영적인 것들이 성령 안에서만 자라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노암”의 본래적 의미는 긍휼이라고 하는 의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했다”는 표현은 주님의 긍휼을 다윗은 소망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할렐루야!
(5절). <환난의 날에 그분께서 나를 당신 초막에 숨기시고 당신 천막 은밀한 곳에 감추시며 바위 위로 나를 들어 올리시리라.
(6절). 나를 둘러싼 원수들 위로 이제 내 머리를 치켜들어 나 그분의 천막에서 환호의 희생 제물을 봉헌하고 주님께 노래하며 찬미드리리라.>
“장막”이나 “초막”은 본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당에서 거주하기 이전, 이스라엘의 초기생활과 연관이 깊은 용어들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전과 같은 하느님이 거하시는 장소와 연관지어 사용되었다.
이 장소는 단순히 주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이곳은 안전한 장소이며 피난처를 상징한다.
아마도 다윗은 사울 왕에 좇기면서, 지금 그의 피난처로 사용하고 있는 천연의 요새인 ‘엔 게디’에 숨어 살면서, 하느님의 피난처에 대한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엔 게디’에서 그가 겪었던 하느님의 보호하심은 그 다음 구절인 “바위 위로 나를 들어 올리시리라”라고 하는 말에서도 충분히 느껴진다!
수 없이 많은 동굴(그곳에는 3,000개도 넘는 동굴이 있다고 한다)과 다윗 샘에서 흐르는 물을 통하여 다윗은 사울의 위협에서 안전하게 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위 위로 나를 들어 올리시리라.”는 수 많은 동굴들을 옮겨 다니며 피신했다가, 사울 왕의 무리들이 한쪽 절벽 위로 철수했을 때, 다윗은 맞은 편 절벽 위로 올라 사울 왕을 마주보면서 다음과 같이 외친다.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그런즉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사무엘기 상권 24,11-12)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사울 왕이므로,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는 다윗을 생각해보라!
오직 여호와께서 판결하시기를 바라는 다윗은(15절), 그 순간에도 예배드리고 있는 그의 심중에 주님은 주님의 영감을 내려 주셨을 것이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의지한다는 것은 연약한 자의 도피의 수단이 아니라, 이는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영적 전쟁 준비이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을 찾을 때에 그분 안에서 우리는 숨을 수가 있으며, 우리의 대적들은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를 넘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둘러싼 원수들 위로 이제 내 머리를 치켜들어”라는 말씀의 원어적 의미는 하느님의 임재와 보호하심의 결과로 인하여 다윗이 그의 대적들에게 승리한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환호의 희생 제물을 봉헌하고 주님께 노래하며 찬미드리리라.” 곧 즐거운 제사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역시 승리의 기쁨에 대한 묘사이다.
다윗은 “주님께 노래하며 찬미하겠다”고 결단한다!
수많은 전쟁에서 종종 승리를 경험했던 다윗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다. 마치 바로의 군대를 패배시킨 후 탈출기 15장에서 불렀던 모세의 노래와 같이 말이다.
(7절). <들으소서, 주님, 제가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자비를 베푸시어 제게 응답하소서.
(8절). “너희는 내 얼굴을 찾아라.”하신 당신을 제가 생각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습니다.>
(9절). 당신 얼굴을 제게서 감추지 마시고 분노하며 당신 종을 물리치지 마소서. 당신은 저의 도움이십니다. 제 구원의 하느님, 저를 내좇지 마소서, 저를 버리지 마소서.
(10절).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버릴지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받아 주시리라.
이 시는 이제 분위기가 급반전되었다.
다윗은 하느님께 향한 그의 탄원을 시작한다!
전반부의 당당한 어조는 사라지고, 안타까운 상황에서 드리는 시인의 애절한 외침이 시작된다.
“주님, 제가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로 번역된 용어 ‘카라’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하느님께 매달리는 간절한 기도를 의미한다.
“들으소서”는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수용하고 이에 적합한 행동을 취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본문은 명령형으로 쓰였는데, 이 표현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느님의 긍휼하심과 간구하는 다윗의 간절함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다윗의 탄원이 무엇 때문에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무엘서 상권 25장에 언급된 그의 영적인 아버지였던 사무엘의 죽음의 경우를 한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아라.”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느님의 음성의 대상은 많은 성도들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내가 주의 얼굴을”이라고 함으로써 개인적으로 하느님의 음성을 본인에게 적용하였다.
당신은 성경의 말씀이 개인적으로 당신에게 적용되고 있는가?
하느님 앞에서 많은 잘못이 있음을 알고 있는 다윗의 관심은 하느님께서 사울 왕을 버리셨던 것처럼 그의 후원자인 사무엘의 사망과 더불어 이제 그를 저버리지 않으실까 하는 염려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감추지 마시고”, “물리치지 마소서”, “내좇지 마소서”, “저를 버리지 마소서”와 같은 반복적인 표현을 통하여 다윗이 얼마나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당면한 위기 상황에서 얼마나 처절하게 부르짖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심지어 하느님의 사랑과 부모의 사랑을 비교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크고 변함없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다윗은 하느님이 자신의 길을 가르쳐 주실 것을 요청한다.
(11절). 주님, 당신의 길을 저에게 가르쳐 주소서. 저의 원수들 때문이니 바른 길로 저를 인도하소서.
(12절). 제 적들의 탐욕에 저를 넘기지 마소서. 거짓 증인들이 저를 거슬러 일어나 폭력을 내뿜습니다.
(13절). 그러나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보리라 믿습니다.
다윗은 그의 원수가 엎드려 그를 기다리고 있으니 어느 길로 가야 할지 가르쳐 달라고 하느님께 요청한다. 그는 그를 멸하기로 맹세한 위증자인 그의 대적들에게 그의 생명이 맡겨지지 않기를 간구한다.
사울 왕 주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윗에 대하여 적대자들이며 위증하고 있다!
“바른 길로 저를 인도하소서.”이 말씀은 아무 염려나 근심, 어려움이 없는 순탄한 길로 인도해 달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신에게서 고소할 거리를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적대자들에게, 고소의 빌미를 내주지 않도록, 의로운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 달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주님, 당신의 길을 저에게 가르쳐 주소서”라는 그의 기도는 자신의 무지함과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하느님에 대한 겸손의 모습이다. 주님의 인도를 받고자 하는 이의 모습이며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의 모습이다.
“바른 길로 저를 인도하소서.”의 다윗의 간구처럼,
당신은 당신의 삶에서 주님께서 당신의 주인되시고 당신을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하는가?
(14절). <주님께 바라라. 네 마음 굳세고 꿋꿋해져라. 주님께 바라라.>
이제 다윗은 마치 예언을 하듯이 이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
“바라라”의 히브리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기다리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신앙 형태 가운데 기다림은 이스라엘 백성의 또 다른 믿음의 표현이었다.
모세는 앞의 홍해와 뒤에 쫓아오는 바로의 군대를 보며 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하느님 앞에서 기다림의 모습을 명하였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당신이 분노하여 악을 갚겠다고 할 때에 잠언은 “여호와를 기다리라.”고 권고한다. 이는 그분이 당신을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려운 환경이 당신을 덮고 있을 때 성경의 교훈은 기다림의 신앙이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이렇게 하면 악인이 끊어지는 것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다림의 신앙의 그 놀라운 힘을 강조하려는 듯 다윗은 원어상 “기다리라”라고 하는 용어를 두 번이나 반복하여 사용하였다.
다윗에게 있어서 자신의 영적 아버지요 조언자였던 사무엘이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그로 하여금 하느님의 진정한 위로가 필요하였을 것이다.
특히 이 시를 결론짓는 이 말씀은 마치 선언적인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곧 “네 마음 굳세고 꿋꿋해져라.” 강하고 담대하라는 이 말씀은 여호수아 1장에서 모세가 이제 약속의 땅으로 건너가 정복을 목전에 둔 여호수아에게 주었던 바로 그 말씀이다!
당신은 주님을 위하여 당신이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이 무엇을 할 때 당신은 이스마엘이 된다!
먼저 그 분의 계획과 길을 알기 위해 기도하라!
그 분을 바라고 소망하며 그분을 갈망하라!
언제든지 당신이 무언가를 해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할 때마다 당신의 자아아 죄와 사망의 법이 임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무엇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인일뿐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주님을 영접한 믿는자들 안에 자연히 그렇게 행하는 하느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할 필요가 없다!
당신에게 삶의 진정한 위로가 필요할 때, 삶이 두려움으로 다가올 때, 마음을 다하여 진정으로 그 분에 나아가라!
그리고 당신의 영 안에 계신 그분의 인도에 온전히 맡겨보라!
당신이 무엇을 하려고 서둘지 말라!
당신의 조용한 기다림 중에, 감추이고 숨어서 환경을 움직이시고, 사람의 만남을 주선하시며, 당신의 위로가 되시며, 세밀하게 일하시는 그 분을 “깨어 있어 기도하므로” 체험해보라!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