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한 현대미술의 출발점을 이룬 인상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문화적인 전후 상황을 함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당시는 산업혁명에 따른 기술의 발달과 철강산업의 발달로 신흥 부르주아가 부상하는 동시에 도시 빈민 계급이 급속하게 확산되어 프랑스 사회는 온통 모순으로 비틀려있었다. 이렇듯 격동하는 19세기 실용주의 사회에서 기존의 정형화된 도식에의 거부는 하나의 유행 같은 것이었다. 이 경향에 따라 마르크스, 말라르메, 프로이드는 각각 자기 분야에서 당대의 흐름을 대표하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인상주의는 회화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20세기에 진입하기 위해 몸부림치던 19세기 후반의 문명사적 움직임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같이 시시각각 격변하는 이미지 사냥을 위해서 인상주의 화가들은 우선 전통과 규범에 억눌려 있던 그들의 아틀리에로부터 탈출을 기도한다. 철도의 발명과 함께 때마침 발명된 튜브에 넣어 휴대가 가능하게 된 물감은 이들의 시도를 더욱 용이하게 만들어 주었다. 제2제정 후반 1863년 낙선전 무렵 오스만 남작의 도시계획으로 인해 파리는 신작로와 화려한 상가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이러한 구경거리들은 당시까지 루브르 박물관에서 과거의 걸작품들을 모사하던 모네나 르느와르 같은 젊은 미술학도들에게는 경이로운 소재였다. 그들은 내면적 자아의 공간을 벗어나 밤늦게까지 쏘다녔고 거리에서 만난 창녀나 댄서와 함께 호흡하며 동시대의 현재를 공유했다. 우선 이들을 바깥으로 끌어낸 문명의 이기로 철도를 들 수 있는데 기차를 타고 바라보는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풍경의 변화는 화가들로 하여금 공간과 시간의 인위적인 만남을 허용한다. 게다가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린 곳이 나다르의 스튜디오였다는 것이 시사해주듯 사진의 발명과 확산이 인상주의에 끼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은 신고전주의의 평범한 사실묘사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미술에 있어서도 자연의 단순한 묘사를 넘어선 자신만의 근대적인 감각이 절실하다는 신호탄으로 화면구성이나 회화적 형식에 실험적 의식을 북돋워주었다. 예를 들면, 높은 건물에서 내려다보는 구도나 스냅 사진의 힐끔 쳐다본 장면처리 또는 분산초점, 화면의 인물이 그림 밖으로 잘려 나가는 화면 구성들이 그러하다. 또한 이제 막 시작된 일본과의 교역으로 서구세계는 당시까지는 미지의 세계였던 일본의 목판화와 만나게 되었고 일본판화의 명암을 무시한 상징적인 표현, 다중 시점의 사용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세기말의 혼란 속에서 들라크루아, 콘스터블, 터너, 부댕, 용킨드의 영향을 받은 일련의 젊은 화가들이 아틀리에를 벗어나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기존의 화풍에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모든 사물이 시간과 빛의 양에 따라 단 한 순간도 같은 모습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빛의 양이었다. 이러던 중 모네는 1872년 창가에서 그린 안개 속의 아브르 항구 그림을 그로부터 2년 후 나다르 스튜디오에서 “인상, 일출”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한다. 이를 당시의 신문기자가 조롱조로 받아 쓴 것을 계기로 인상주의라는 용어가 탄생하였고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들의 주장은 빛이 사물의 윤곽선을 흐리게 만든다는 것으로, 형태는 색조가 단계적으로 변하여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색의 병치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인상주의자들은 팔레트에서 색을 섞어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캔버스 위에 색을 나열함으로써 가까이에서 보면 단순한 색상들의 나열에 불과하지만 멀리서 보면 형태를 이루는, 보는 이의 시각적 효과를 계산한 그림을 그렸다. 이들은 또한 그림자를 또 다른 색채로 이해를 하여 검정색을 쓰지 않고 보색을 사용하였다. 태양빛이라고 불리는 삼원색과 그 혼합으로 이루어진 보색만을 사용함으로써 화면은 보다 밝아진다. 게다가 시시각각 변하는 빛에 따라 그림이 변화하므로 시각적 인상을 표현하기 위해 원근법을 사용하기보다는 직관적 표현에 따라 재빠르게 그렸다.
드가를 시작으로 예술가의 시점이 이동하기 시작한다. 그는 시각 영역의 축을 바꾸고 조각 낸다. 바야흐로 화가는 그를 둘러싼 자연을 독창적인 각도에서 고찰하거나 전망을 과장하거나 중심으로부터 이탈시킴으로써 회화적인 탐색을 해나간다. 모네로부터 대상과 풍경이 섞이는 탈물질화가 시작된다. 이제 현실의 각 구성 요소들은 빛 속에서 융합이 되어 그 밀도를 잃어버려 더 이상은 견고한 고체 상태가 아닌 보다 커다란 질서 속에서 요동치는 빛이 된다. 마네와 고갱, 고호와 더불어 색상은 그 자체의 자율성을 획득한다. 사물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기존의 색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사물은 보는 이가 받는 인상과 화가가 상징하고자 하는 이념에 따라 수만 가지의 자의적인 색을 갖는다. 세잔과 고갱을 통해 원근법은 사라지고 공간은 이차원으로 회귀한다. 바야흐로 예술가는 작품을 구축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캔버스 위에서 균형을 이루는 형태들의 총체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보다 캔버스의 틀을 넘어서 존재하는 자연의 한 부분이 되기를 원한다.
이렇듯 보는 이의 시각적 효과를 계산한 그림을 그린 인상주의는 그림과 관객 사이의 고전적 관계를 타파하는 계기가 된다. 즉 당시까지의 그림은 하나의 객체였지만 인상주의시기를 지나면서 그림과 관객은 서로 교통하는 상호주관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또한 색상도 당시까지의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기술하는 기능에서 벗어나 비로서 그림의 주인공이 된다.
법무관 관료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반대를 극복하고 화가의 길에 들어서는 마네는 고전주의 화가 특히 고야와 벨라스케스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1859년 살롱전에서 낙선한 후 낙선전에 « 풀밭위의 식사»를 출품하여 엄청난 물의를 일으켰지만 그에게 선동적이거나 반전통적인 면모는 없었다. 당시 마네는 인상파 그룹의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위치에 있었고 당시 많은 신문들이 인상파의 거두로 그를 표현하긴 했지만 기법상으로 보면 피사로, 모네와 같은 인상파에 비해 좀 더 고전적이었고 한 번도 인상파전에 출품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당시의 신고전주의 화가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열쇠는 그의 화면 처리 방식에 있었다. 그는 3차원적인 원근법을 거부하고 2차원적 평면성으로 화면을 처리하며 음영 없는 평탄함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이할 만한 사실은 전통적인 원근법을 배제하고 단지 인물의 밝은 색감으로 배경과 분리하여 강조함으로써 그림에 입체감을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느껴지는 불안감과 2차원과 3차원의 공존은 그의 작품이 현대회화를 알리는 서곡임을 의심치 않게 한다. 말년에는 몸에 마비가 와서 꽃만 겨우 그리다가 손 절단 수술을 받은 후 51세에 사망한다.
1963년 낙선전 출품작. 옷을 벗고 뻔뻔스럽게 정면을 쳐다보는 나부의 모델은 두 명으로 얼굴은 마네의 모델 빅토린이고 몸은 그의 아내 수잔이다. 나부를 무시한 채 이야기를 나누는 두 남성은 수잔의 오빠와 동생이다. 배경의 여인은 마치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지나치게 크게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마네가 원근법을 무시하고 명암법을 일부러 적용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1869년의 살롱에 출품작. 고야의 발코니의 마야가 모델, 마네의 동생의 부인이 되는 제자 베르트 모리조, 바이올리티스트 파니 클라우스, 화가 앙투안 기의메 세 사람은 서로 아무 관계가 없는 듯하고 대담한 초록색의 사용은 논란을 일으켰다. 마네의 등장인물은 괴이하게 고정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마네는 « 자기가 본대로 그렸기 때문이라고 설명 » 하지만 이는 관객에게는 다가갈 수 없는 내면적인 꿈을 시사한다. 낭만주의 여주인공이며 다가갈 수 없는 아름다움을 한 모리조와 나머지 두 모델은 모두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듯한 느낌으로 발코니로 대변되는 사회에 갇힌 채 멍한 상태에 빠져 있는 듯하다.
파리에서 피사로와 사귀면서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제하기 시작했고 보불 전쟁 때 런던으로 피신한 후 영국 풍경화에 접하게 되었다. 그는 외광을 받은 자연의 표정에 따라 원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팔레트에서 물감을 섞지 않는 대신 원색을 병치하는 색조 분할에 따라 직접 캔버스에서 붓의 터치로 받은 인상을 그린다.
모네에게 주제는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빛이다. 이는 곧 « 순간성에 대한 끊임 없는 추구 »였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의도의 배경에는 일본 목판화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는데 모네의 « 루앙 성당 » 연작은 시간계열에 따른 동일한 장소의 변화하는 이미지를 보여준 당대 일본 민화의 대표적인 작가 호쿠사이의 « 후지산 36 장면 »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다. 격동의 시기에 작품성을 인정 받지 못하고 절망과 고통 속에서 단명한 대부분의 동료 인상주의 화가들에 비해 모네는 꾸준하게 노력하며 한 길을 걸어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우뚝 섰을 뿐 아니라 장수하여 예술성을 인정 받는다.
새롭게 등장한 철도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시대를 크게 변모시켰다. 여섯 개의 기차역이 파리에 있었지만 그 중 인상주의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은 그들이 모이기 시작했던 바티뇰 지역에 있는 생 라자르 역 이었다. 라자르 역을 통해 부지발, 마를리, 아르장퇴유,퐁 투아즈,오베르 등 인상주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센 강변을 따라서 있는 많은 교외에 갈 수 있었다.
이 그림은 빛의 인상을 그리기 위한 모네 연작의 최초의 형태를 보여 주는 작품이며 인상파의 대표적 작품이다. 지붕 창을 통해 떨어지는 햇살이 번져 있는 실내의 철로, 기관차와 객차, 피어 오르는 증기 등이 제 각각의 색을 모네로부터 받아 빛과 색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그림은 유리와 철골로 이루어진 차양 아래로 기차가 들어오는 모습을 담고 있다. 배경의 건물이 미색으로 밝게 빛나는 것으로 보아 도시에는 지금 햇빛이 밝게 내리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차의 김이 파란색을 띤 것은 기차가 방금 차양 밑으로 들어와 그림자가 졌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형태는 그리 정밀해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사실 화가가 의도한 것이다. 이렇듯 거친 붓놀림과 불확실한 표현을 통해 화가는 빛의 찰나성과 번잡한 도시와 기차의 움직임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고호는 16세때 삼촌이 운영하는 대형 화구상의 점원이 되면서 그림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젊은 시절 한때 전도사의 길을 걷기도 했으나 가난한 신도들에게 재산을 다 나누어주는 등 지나치게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고 물의를 일으켜 해고 당한 후 화가의 길에 접어든다. 그가 화가로서 활동한 14년 중에서 초기 4년간은 습작 시기로 가난한 농민을 주제로 한 데생과 풍경을 주로 그리다가 파리에 와서 피사로, 로트렉 등 인상주의 화가들과 접촉하고 일본의 목판화를 발견하면서 화풍을 넓힌다. 이후 새로운 환경에 접하기 위해 아를르에 온 고호는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예술가들끼리 생각을 나누며 작업하는 공동체를 꿈꾸었으며 아를르의 노란 집을 빌려 장식하고 고갱을 초대한다. 그러나 개성이 강한 두 사람의 두 달간의 공동체 생활은 격렬한 말다툼 끝에 고호가 귀를 자르고 병원에 입원하는 비극을 끝으로 막이 내린다. 이후 정신병과 싸우면서 죽을 때까지 그린 수많은 그림들은 상상력이 넘쳐 역동적인 형태와 힘찬 선에 바탕을 둔 대담하고 환상적인 걸작들이었다.
그림에 대한 그의 관점은 표현주의적인 동시에 상징주의적이었지만 그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도 본능적인 것이었다. 그는 어떤 효과나 분위기가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동안 그것을 포착하기 위하여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격렬하게 일했다. 또한 고호는 인상주의를 넘어선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분류되는데 그에게 인상주의는 너무 대상을 과학적으로 파악해 그리다 보니 그림에 감정의 표현이 부족하다고 보았다. 감동의 표현을 중시했던 고호는 마음의 느낌에 따라 형태나 색채를 과장하고 변형하여 이후 표현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고갱과의 공동체를 꿈꾸었던 아를르의 하숙집에 있는 이 방에 고호는 상당히 애정을 갖고 있었고 같은 그림을 세 점이나 남겼다. 처음 방을 그린 시기는 1888년으로 암스테르담 반 고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1889년 생레미에서 다시 두 점을 더 그렸고 그 중 하나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 나머지 하나는 오르세에 있다. 과학적 기반에 따른 보색을 사용하여 밝은 색으로 표현된 방에는 명암이 없어 휴식을 준다. 붓의 이용도 후기 작품에 주로 나타나는 길다란 점묘성 불연속적인 붓의 터치가 아니라 연속적인 터치와 굵은 질감을 사용하여 안정을 나타낸다. 또한 침대 외에 모든 사물은 쌍으로 되어 있어 다가오는 공동생활에 대한 기대를 나타낸다.
마지막 자화상, 강박적이며 불안한 배경과 비정한 표정에 곤두선 눈초리는 작가의 내면적인 혼란을 보여준다. 병적인 마음과 정상적인 마음사이의 경계선에 선 모습으로 그의 모든 자화상은 같은 시선과 자세로 그려져 있는데 이는 자신과 자신에 대립하는 또 다른 자아와의 대결구도를 그리고 있다. 또한 선과 색마저 왜곡하여 회화를 감정전달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폴 고갱-
증권 중개인에 주말 화가였던 고갱은 다섯 아이와 아내를 버리고 37세의 나이에 화가의 길로 접어든다. 도시 생활을 버리고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한 후부터는 초기의 인상주의 기법을 버리고 고갱 특유의 장식적인 화법을 지향하여 훗날 세뤼지에, 보나르로 대표되는 나비파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해 11월 파리로 돌아와 고흐, 로트레크 등을 알게 되었으며, 특히 고흐와는 깊이 사귀어 남프랑스의 아를르에서 함께 살다가 두 달 만에 성격차이로 작별한다. 그 후 다시 퐁타방으로 가서 « 황색의 그리스도 »를 그리고 조각, 판화, 도기에도 손을 댄다. 그러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만 더하여 마침내 1891년 남태평양의 타이티섬으로 떠난다. 타이티에서도 빈곤과 고독에 시달리고 병마에 시달려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지만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로 예술을 완성시킨다. 그의 기법은 원색의 면에 검은 테두리를 쌓는 구획주의로 대담한 변형과 왜곡, 강렬한 원색을 사용하여 장식적인 효과를 가져왔고 이로서 화면의 평면화를 시도한다. 이는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하나의 형태를 단면의 색채들의 집합으로 종합해내는 것으로 고갱의 후기 작품은 « 종합주의적 »인 작품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또한 타히티에 옮아가면서부터 기독교와 원시적 토속신앙의 결합이라는 특이한 예술세계를 구축한다. 세잔이 자연을 기본적인 조형질서로 재창조하면서 나름대로 자연에 충실했다면 고갱은 그 자연을 철저히 외면하고자 했다. 그가 모색한 것은 근원적인 상징성, 원초적 감수성의 근원을 통한 꿈과 사상 그리고 상상력의 표현이었다. 또한 이를 위해 색과 형태를 단순화시키고 이를 통해 주제의 내적인 의미를 강조하여 캔버스로 승화시키고자 하였다.
« 언제까지나 이어지는 침묵, 저들이 몇 시간 씩, 며칠 씩 앉은 채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나른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을 알겠다. 나도 그 모든 것들이 내 안으로 스며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 1991년 7월 고갱은 덴마크의 친정에 있던 아내에게 이렇게 쓴 편지를 보낸다. 당대의 미술은 형식성으로 가득 차 있어 인간의 감성을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한 고갱은 마치 원시인의 시각으로 새롭게 보고 표현하였다. 타이티의 나른한 여인, 우수에 찬 시선. 화면 앞으로 끌어당긴 대담한 구도, 팔레오의 꽃무늬와 대담한 색조가 돋보인다.
1893년 타이티로부터 잠시 파리로 귀국하여 그린 그림. 당시의 화가들은 맘에 드는 작품 앞에서 자화상을 그렸는데 이 그림은 발표 당시 그리스도를 농부처럼 그렸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도기 항아리는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예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스스로의 모습을 예수에 빗댔고 질그릇은 자신의 거친 모습을 보여준다. 훗날 상징주의에 영향을 준 작품이다.
서정이 넘치고 목가적인 작품, 평범한 면은 환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푸른 나부, 하얀 꽃, 빨간 말, 침묵에 잠긴 신비, 빨강, 노랑, 연두, 초록으로 목가적인 풍경을 그리고 있다. 1897년 아끼던 딸 알린의 죽음에 상심하여 자살 시도 후에 그린 그림으로 늪의 수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스며있다. 충실한 자연묘사를 떠나 자연을 앞에 두고 꿈을 꾸고 자연으로부터 추상을 끌어내어 결과보다 창조행위에 집중하여 마치 조물주처럼 창조로 신의 경지에 오르고자 한 고갱의 예술관이 녹아있는 작품.
« 자연은 구형, 원통형, 원추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나는 인상주의를 미술관의 미술처럼 견고하고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기로 했다.... »
- 폴 세잔-
세잔느는 인상파 화가들과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1870년부터 피사로나 그의 그룹의 화가들과 가깝게 지냈고 인상파의 초기 전람 회에도 참가하였다. 그러나 세잔느의 예술은 인상주의보다는 후기 인상주의에 속한다. 후기 인상주의라는 명칭은 1880년대 이후의 중요한 화가들 모두에게 해당되기는 하나, 보다 더 특별한 의미에서는 인상주의의 단계를 거치면서도 그 양식의 한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갖가지 방향으로 인상주의를 넘어선 일군의 화가들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변하기 쉬운 빛에 따른 자연의 표정은 세잔에게는 관심 밖의 것이었으며 그보다는 더욱 깊은 곳을 통하고 있는 부동의 실재감의 파악에 그의 창작의 보람이 있었다. 그는 형태를 갖는 견고한 양감이나 뚜렷한 구도를 색채의 희생 없이 회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연구에 몰두한다. 그리하여 산과 집을 그린다 해도 화면의 구조로서 가장 중요한 형체의 부분만을 집약하고 필요 없는 형상은 버렸다. 이와 같은 단순화의 방향은 추상화에 기울게 되어 훗날 야수파와 입체파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계기가 된다.
쿠션으로 된 천 의자에 긴 천을 놓고 그 위에 과일을 놓아 금방 쏟아 내릴 듯한 과일을 연출하였다. 엷은 물감을 사용하였으며 자유로운 터치로 과일의 먹음직함을 그려냈다. 그는 모조과일에 색을 칠하고 탐구한 후 재구성하여 사물의 본질적 영원성을 재구성하고자 했다. 위와 정면의 이중 구도를 사용하고 있다. 모리스 텐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과 세 개가 있는데 그것은 이브의 사과, 뉴턴의 사과, 세잔의 사과이며 평범한 사과는 먹고 싶은데 세잔의 사과를 보면 말을 건네고 싶어진다고 말했다.
모델은 오르탕스 피케로 하녀였다가 13년 동안 세잔의 숨은 여인으로 살고 세잔의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정식 부인이 된다. 팔은 원통, 원피스는 원뿔, 몸통은 원통형으로 인간은 무감동한 물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허리끈은 마치 작품을 묶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며 중간에서 화면을 자르고 있다. 이같이 모델의 개성을 무시하고 인물에 사물의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훗날 입체파의 시초가 된다.
시골 술집에서 카드놀이 하는 두 남자, 포도주병을 축으로 공간이 좌우로 나뉘어 있고 이상한 긴장감과 대결의식이 느껴진다. 카드를 든 손과 우측 모자는 구형이고 왼쪽 모자와 팔은 원통형, 오른쪽 모자는 반원 모양이다. 그것은 형태와 입체성을 한 화면에 동시에 표현하고 색체를 이용해 형태를 만들어내는 고독한 탐구의 결과이다. 왼편의 남자의 명암은 상단에서 하단으로 왼쪽은 밝게 처리하고 오른쪽은 어둡게 처리되는 반면 모자의 빛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처리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가 명암을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을 의미한다. 인상파 특유의 색채로 사물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내부의 논리에 따라 사물을 재구성하는 개념이 태어나는데 이 때부터 예술을 위한 예술의 개념이 정립된다.
« 나는 캔버스에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을 담는다. 우리가 굳이 부각시키려 하지 않아도 세상은 이미 충분히 비참하니까...... » - 오귀스트 르느와르-
13세부터 도자기 공장에 들어가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일을 하며 색채를 배웠고 바토나 부셰의 그림에 매료되었다. 이후 피사로, 세잔, 모네와 사귀게 되면서 인상파 운동에 참여한다. 1881년 이탈리아를 여행하여 라파엘과 폼페이 벽화에서 감동을 얻은 후부터 인상파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풍부한 색채표현을 되찾아 원색대비에 의한 작풍을 확립한다. 그는 주로 빛이 주는 순간적인 인상에 관심을 둔 인상파와는 달리 인간과 동물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렸으며 구도를 잡을 때 대상을 앞으로 끌어당겨 클로즈업 시켜 풍경일 경우에는 당장에라도 산책하고 싶은 기분이 들도록 하고 인물이라면 당장이라도 만지고 싶은 기분이 드는 친숙한 구도를 만들어낸다. 또한 그의 인물에서 나타나는 도자기와 같은 미묘한 광채는 젊은 시절 도자기공 시대에 습득한 기법이다. 그의 색채는 검정색을 배제한 무지개 팔레트 법을 사용하여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자아낸다. 인상파와 단절한 후 초기에는 명확한 윤곽선을 살려 대상에 실체를 부여하는 전통양식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배경과 분리된 차가운 느낌을 가져올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10년 동안의 습작을 통해 색채를 이용하여 대상에 살을 붙여 형태를 만들어 배경과 조화시키는 자신만의 화법을 터득한다.
1870년대 당시만 해도 파리의 교외이던 평화로운 시골 언덕 몽마르뜨의 야외무도장에서의 즐거운 한 장면을 그리고 있다. 움직이는 사람들 위에 떨어지는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드는 햇살이 미치는 회화적 효과는 인상주의에 회의적이던 당시 이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 르느와르는 빛의 순간적인 인상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맑으나 궂으나 매일 그림을 들고 직접 그 장소에 나가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무도회의 순간적인 모습을 영원히 고정시킨 이 그림은 나선모양을 이룬다. 즉 화면의 오른쪽에서 시작해서 왼쪽 뒤쪽을 향해서 사선으로 시작해서 왼쪽 뒤쪽을 향해서 사선으로 소용돌이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는 그가 오른 편 위 쪽에서 그림을 그렸음을 시사한다. 반사된 빛과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오렌지색으로 표현하였고 음영은 검은색대신 모두 푸른색으로 처리하여 부드러움을 더하고 있다. 또한 구도상 양 옆을 잘라 스냅사진의 효과를 내고 있다. 거의 모든 등장 인물들은 르느와르의 친구이거나 지인이었으며 행복한 모습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하거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연결이 되어 있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드가는 고전파 거장인 앵그르에게 시사받고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탈리아 여행 때 르네상스작품에 심취하여 고전연구에 힘을 기울이는 등 스스로를 인상주의자라기 보다는 사실주의자로 불러주기를 바란 화가였다. 또한 야외에서 변화하는 빛을 그리려는 인상주의의 양식에는 동의하지 않고 실내의 인공광선을 추구하여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는 고전주의 화가들이 다루지 않는 현실적인 주제, 이를테면 서커스나 경마, 발레 등의 새로운 주제와 욕조에 들어가거나 나가는 여인이나 머리를 빗는 여인의 순간적인 포즈를 새로운 각도에서 부분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회화의 자유라는 명분에서 인상주의 화가들과 뜻을 같이 하여 74년부터 약 10년간 인상파전에 7차례나 협력한다. 이후로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는데 드가의 천재성은 숙련된 기예와 부단한 연구를 통해 즉각적이며 덧없는 순간적인 움직임을 해석하는 것에 있다. 또한 뫼브리지의 신체동작을 재현한 시간계열 사진들 또한 드가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마지막으로 드가나 모네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눈높이 위에서 잡는 구도(부감앵글)는 무대 위의 무희들이나 언덕 위의 여인들과 같은, 그림의 모티프가 보는 이의 시선을 지배하는 보기 드문 사례이다.
드가는 관능적인 젊은 여인의 누드를 그리기보다는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여인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누드 모델보다 무엇인가에 열중한 여인은 정직하고 소박하며 마치 자기의 털을 핥고 있는 고양이처럼 자신의 신체적 상황만을 생각한다. 이것을 보는 것은 마치 열쇠 구멍으로 그 장면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쁨을 준다고 드가는 한 지인에게 고백하고 있다. 핑크빛 옷을 입고 다림질하는 여인과 그 옆에서 하품하는 여인의 소박하고 자연스런 자세, 하나는 고개를 숙인채 다림질에 열중하고 있고 하나는 몸을 펴는 대조적인 자세와, 테이블에 놓인 정물의 대비가 돋보인다. 이 작품은 귀족 출신인 드가가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을 읽고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삶의 깊이가 드러나 있다.
그는 어떠한 유파나 미술 사조에도 귀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인간의 삶을 예술로 승화시킨 휴머니즘의 화가이면서도 냉철하고 이성적인 방관자의 눈을 가진 관찰력의 대가였다. 난쟁이를 연상시키는 결정적인 신체불구에도 불구하고 주눅들지 않고 짧은 인생을 굵게 살다 간 화가였으며 현대 광고 전단지와 다양한 디자인의 포스터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그림을 배운 뒤 스물 두 살이 되던 해 독립하여 고호, 고갱과 사귀고 드가의 예술에 매료된다. 이후 파리의 환락가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차리고 13년 동안 술집, 유곽, 뮤직 홀 등을 소재로 앉은 채로 주위의 타락과 퇴폐를 담아 쉴 새 없이 작품제작을 하였다. 초기에는 풍자적인 화풍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유화와 더불어 석판화도 곧 이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 89년부터는 독립 작품전에 출품하였고 최초의 개인전은 93년에 파리에서 열었다. 그의 데생은 날카롭고 박력 있는 표현으로 근대 데생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대상이 지닌 본래의 선을 과감하게 과장하거나 생략함으로써 독특한 개성을 부여하고 움직이는 대상을 신속하게 화면 안에 고정시키는 천재성을 발휘한다. 그러한 데생을 바탕으로 한 유화 또한 어두우면서도 신선하고 아름다운 색조와 독자적인 작풍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인생에 대한 그의 통찰과 깊은 우수에 공감하게 한다. 그는 현실을 소화해 내기 위해 내면적인 갈등과 방황을 일삼았던 작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세상에 내던지고 있는 그대로의 비극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예술 세계로 정화시킨 화가였다. 그는 37세에 알코올 중독과 매독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캉캉 춤을 유행시킨 물랭 루즈의 댄서 라 굴뤼와 상대 남자 댄서 발렌틴이 춤을 추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라 굴뤼는 대식가라는 뜻이며 말 그대로 탐식으로 살이 쪄 싸구려 무대를 방황하다가 매음굴에서 비참한 인생을 맞는다. 그녀의 본명은 루이즈 베베르였다. 상대 댄서인 발렌틴은 법무사의 아들이었으며 춤을 매우 좋아하여 당시 댄스계의 황제였다고 한다. 윤이 나는 중산모를 쓰고 뾰족한 턱을 하고 마치 뼈 없는 사람처럼 유연한 모습으로 춤을 추는 모습은 그림의 재미를 돋군다. 이 그림은 라 굴뤼가 물랭 루즈에서 해고된 후 차린 오리엔탈 댄스홀의 간판 그림을 로트렉에게 부탁하여 그려진 그림으로 오리엔탈 댄스를 추는 라 굴뤼를 그린 다른 그림의 옆 벽에 그려진 그림이다. 이 두 그림은 댄스홀이 문을 닫은 후 여러 조각으로 잘려 팔려나갔다가 라 글뤼의 죽음 이후 다시 모아져 미술관에 전시되었는데 비바람과 세월의 흔적으로 색이 많이 손상되었고 잘렸던 부분이 두드러져 보인다. 주변의 인물들은 모두 로트렉과 친숙한 인물들로 로트렉의 단골 모델인 깃털 모자를 쓴 제인 아브릴의 모습이 보인다. 색채는 절제되어 있고 춤추는 라 굴뤼의 치마의 녹색 줄무늬와 얼굴, 목주위의 녹색 음영이 구분된다. 당시 물랭 루즈의 명물이었던 전구 불빛 만이 흰 얼룩으로 처리되어 있을 뿐 배경은 지극히 생략되어 있어 로트렉은 관객의 상상력으로 빈 공간을 채우기를 원한 듯하다. 스냅사진의 영향으로 화면 구도상 양 옆 부분이 잘려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같은 주제를 다룬 로트렉의 포스터는 인상적인 색채와 날카로운 실루엣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서 예술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 Emergence: l’impressionnisme et son époque
일반적으로 인상파가 등장하게 된 계기를 1863년에 열렸던 낙선전람회로 꼽는다. 낙선전람회란 글자 그대로 낙선된 작품전이란 뜻인데, 심사의 불평이 계기가 되어 파리에서 열리게 되었다. 그 해 심사가 공정하지 못했다는 불평의 소리로 나폴레옹 3세는 재심사를 요청했지만 아카데미에서는 심사위원들의 권위를 생각해서 도저히 수락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황제는 떨어진 작품들을 모아 전시를 열어주었다. 이것이 바로 인상주의 출현의 계기가 된 낙선전이다. 낙선 작 중에 당대의 일반적인 관습을 대담하게 개혁하려는 젊은 미술가들의 작품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과 ‘올랑피아’가 대표적이며 가장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이 시대는 1789년 봉건왕조를 무너뜨린 프랑스 대혁명이래 1870년대(인상주의 운동이 일어남)까지 정치적으로 격변기였다. 복고 왕정의 시기를 거치기는 했으나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한 진보세력은 귀족과 교회를 정치 세계에서 몰아 냈으며 부르주아 계급이 정치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또한 이론으로써의 사회주의가 나타난 것이 이 무렵이고 보수적 부르주아와 진보적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이 가시화 된 시기이다. 특히 1850년대 이후에는 새로운 기술적 발명과 철도 수로의 건설, 상품거래의 신속화, 금융 조직의 확장 등이 증대되어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자본주의 사회가 되었다. 자본주의가 확대되어 감에 따라 봉건의 잔재들은 사라져 갔으며 엄청나게 늘어난 부르주아는 그들의 예술적인 빈곤함을 채우고자 화려하고 정신적으로 나태한 것들을 찾게 된다. 결국 미술을 포함한 예술 일반에 있어 타락 현상이 초래되었다. 곧이어 1860년대 인상주의자들이 새로운 변혁을 이루는데 이것은 취미나 주제에 있어 혁명을 예고하는 그림이었다. 그래서 인상주의는 미술상 또는 사상에 있어서 근대적 감성의 해방운동이자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로 옮겨진, 서유럽 사실주의미술의 마지막 단계인 동시에 20세기 예술을 향한 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Origine et Methode
인상주의란19세기 후반 주로 1860-9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 유파의 하나이며 빛의 변화에 따른 순간적인 형태의 변화와 색의 변화를 포착하려는 미술양식을 말한다. 본대로 그린다는 인상주의 정신은 빛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사물의 인상을 그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상주의미술가들의 주요 관심사는 ‘인상’ 즉, 짧은 순간에 화가가 시각적으로 처음 지각한 사물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빛의 미묘한 조화를 나타내기 위해 이들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튜브형 물감과 접히는 이젤의 발명은 그들의 야외작업을 가능케 해주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은 빠른 필치와 붓 놀림을 요구하고 팔레뜨에서 색을 섞기 보다는 직접 화폭에서 시각적인 착시효과를 노리며 물체의 고유색을 부정하고 순색을 이용한 색채분할법을 사용하였다. 그 효과는 자칫 어수선해 보이나 자연스럽고 우연한 느낌을 주고 무엇보다도 회화의 평면성을 추구하고 있다. 또한 직관에 의한 표현은 곧 추상회화에 이르게 하였다. 이와 같이 빛과 색채는 변하기 쉬운 자연의 순간적 현상의 파악을 위하여 여러 가지 표현상의 새로운 기법을 발견하고 그 제작 태도에 있어서는 대상의 객관적 표현에서 벗어나 주관적인 감각이나 직관을 중시하고 그것의 반영에 전념하게 되었다.
Sa place dans l’histoire d’art
유럽 미술의 중심지가 15 세기의 피렌체, 17 세기의 로마를 거쳐19세기에 파리로 이동을 하면서19 세기의 미술사는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창조해 낸 역사라 할 수 있다. 들라크루아에 의한 첫 번째 혁명의 물결과 쿠르베에 의한 두 번째 파동을 거쳐 마네와 그의 친구들에 의한 세 번째 혁명에서 인상주의가 시작되었고 이것이 과거에 대한 반항을 시도한 최초의 미술운동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비록 이들의 그림이 프랑스의 살롱이라는 국전에서 전통에 반한다, 미완성의 그림이다, 주제가 없다, 역사를 보여주지 않는다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모두 낙선을 했지만 이들은 기존의 회화를 탈피하고 새로운 미술 즉 현대미술의 시작을 이루어냈다. 따라서 현대미술의 근거를 이루는 것은 1910년의 입체주의 혁명이 아니라 1870년대의 인상주의 혁명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입체주의 혁명은 주제가 다를 뿐 새로운 기법을 가져오지 못했고 인상주의 덕분에 낭만주의로부터 벗어나 우리 시대의 새로운 미술, 곧 모던 아트의 길을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과거의 그림에 비해 인상주의자들이 이룩한 것은 르네상스 이래 서구 회화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주제의 의미(고상한 인물이나 교훈적인 장면이나 위대한 역사적 사건 등)를 상대적으로 감소시켰고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반사하는 빛의 색을 나타내고자 하면서 전통적으로 중시되던 드로잉(선)이 의미를 상실했다. 그러면서 구성은 자유로워 지고 화면은 평면적으로 구성되어 갔다. 바로 이 점에서 풍경화가 특수한 예술 목적을 구현하기에 적합한 형태로 자각되면서 하나의 중요한 장르로 확립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인상주의 회화는 입체감을 결핍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적인 내용이 없었다. 화면의 공간적 깊이를 감각적 표면으로 대신하게 되었고 그림이 지니는 정신적 깊이 대신 감각적 표면이 주는 즐거움을 추구한 예술이라는 비판을 받았었다. 이 점 때문에 인상주의 회화는 현대미술의 출발이 아니라 낭만주의의 한 형태인 유미주의로의 회귀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회화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인상주의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인상주의는 이런 점에서 볼 때20세기 현대미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Edouard Manet
인상주의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인상파의 대표화가로 마네는 회화의 변화라는 점에서, 그리고 많은 화가들의 정신적인 면에서 인상파 탄생의 계기를 마련한 화가이다. 특히 순간적인 빛의 변화와 색감을 포착했다는 점에서 마네가 미친 인상파에 대한 영향은 매우 크다. 법관의 아들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한때 선원 견습생이 되었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파리의 사교계인사들이 모이는 카페에 거의 매일 드나들며 복잡한 도시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여기에서 그는 사회 모든 계층의 모습을 담아내려 하였다. 모사작업과 여행을 통해 고전적인 기법을 익히고 옛 명화들 속에서 영감을 받았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수정한 ‘올랭피아’나 티치아노의 ‘전원의 연주’의 ‘풀밭에서의 점심’이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과거의 예술을 패러디화해 작위성을 강조하여 권위에 도전한 것이다. 나체의 여인을 그릴 때는 현실이 아니라 신화의 여신으로 표현하고 시공간을 뒤섞음으로 사실성을 강조하였던 오래된 미적 규범을 타파하여 자유로우면서 거의 생략에 가까운 기법을 썼다. 그리고 기존의 명암법을 무시한 채 회화의 평면성을 추구하며 사물을 보고 그리는 새로운 화법 즉 실제의 인간 모델을 통해 그림을 배워나갔다. 당시 그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배척당하며 거만하다고 비판도 받았지만 후엔 인정받는 자가 되었다. 하지만1878년부터 그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에 시달렸고 51세의 나이로 아깝게 생애를 마쳤다.
낙선전에 출품되어 많은 비난을 받았던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 의 원제는 ‘목욕’이라고 한다. 여성의 나체를 그려낸 주제의 대담성과 명확한 명암의 대비, 그리고 원근법의 무시는 당시 프랑스 화단에서는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마네의 친구에 의하면 풀밭에서의 점심은 루브르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전원의 연주’(당시에는 조르죠네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현재는 티치아노 작품으로 되어 있다)의 현대판을 그리고 싶다는 마네의 바람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2명의 남성 중 중앙의 인물은 마네의 아내인 수잔느의 오빠이고, 벨벳 코트를 입고 있는 오른쪽 인물은 마네의 동생이라고 한다. 옷을 벗고 있는 여인은 빅토린 모항이란 러시아 모델로 길거리에서 마네와 만난 후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우유빛처럼 하얀 여인의 살결과 진한 색깔의 남성 상의가 명확한 색깔의 대조를 이루고 있다. 또 한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오른쪽 남자의 오른손이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우선 검지 손가락을 따라 왼쪽 하단으로 내려가다 보면 개구리 한 마리를 찾을 수 있다. 육지와 물 속을 왔다 갔다 살아가는 개구리는 속세에서의 물질적인 것을 뜻한다. 한편 엄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왼쪽 상단 부로 올라가다 보면 한 마리의 새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는 속세를 벗어나있는 성스러운 그 무엇을 의미한다. 즉, 마네는 그림 속에 이런 작은 생명체들을 그려 넣음으로써 당시 사회의 모습과 바라는 바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Claude Monet
인상주의는 모네의 작품 ‘인상 해돋이' 본 후 느꼈던 시각적 인상을 전달하기 위해 어느 신문기자가 사용한 용어라고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 보면 인상주의는 모네로부터 출발했다고도 할 수 있다. 르아브르 출신의 가난하지만 고집 센 모네는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회화는 반드시 그 현장에서 시작되고 마무리 되어야 한다며 친구들 모두를 스튜디오에서 나오게 하여 실제 소재가 아니고서는 붓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처럼 모네는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였다. 자연이야말로 빛과 색채의 변화를 표현하는 최상의 소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수시로 변화하는 일순간의 빛들을 담기 위해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고 1868년부터는 세느 강을 주제로 하여 강을 통해 들어오는 형태와 색조, 리듬과 빛에 의해 투영되는 물살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여기서 그는 순간적인 이미지를 포착하고 자연의 떨림에 어울리는 붓 터치를 터득해 나갔다. 그래서 그는 화면 전체의 효과를 살리기 위한 세부묘사는 신경을 덜 쓰면서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물감을 칠해나갔다. 자연을 감싼 미묘한 대기나 빛을 받고 변화하는 풍경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려는 그의 그림의 의도는 ‘루앵 대성당’과 ‘수련’에서 동일주제를 아침·낮·저녁으로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그린 태도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모네의 그림은 얼핏 보면 완성되지 않은 것처럼 혹은 되는 대로 그린 것처럼 밑그림이 꼼꼼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며 비난도 많이 받았었다고 한다.
살롱전에서 낙선한 모네의 ‘정원의 여인들’을 보면 아내 카미유를 향한 모네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높이가 256cm나 되는 대작이다. 이 시대에 다른 작가들이 야외에서 제작한 풍경화란 고작 크기가 작은 캔버스에 그린 것이 다였지만 모네는 야외의 빛을 나타내기 위해 땅에 웅덩이를 팠고 그 속에 캔버스를 고정하여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 정도로 모네의 빛을 표현하고자 하는 열정은 대단했다. 작품 속 네 인물 모두 자신의 아내 카미유을 모델로 하였다. 화면의 앞에 앉아있는 여인의 흰옷의 그림자는 검정색이나 고동색이 아닌 빛에 의해 보여지는 색으로 그려졌다. 그림자 마저 빛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마네처럼 그는 중간색이 아닌 순수한 색을 사용하였고 순간적 인상 표현을 위해 붓 자국을 화면에 남겼다. 이런 색 점들은 완성 작들로만 전시되던 이 시대에 에스키스로 분류되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그림을 그린 것이지 끝낸 건 아니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연의 풍경화에 전념한 것은 인물화나 회화는 현대 사회를 반영한다고 인식하는 마네와 보들레르에 대한 저항이었고 혼란과 혁명(산업화, 도시화)을 반대하는 예술의 순수성을 추구한 것이였다.
Vincent Van Gogh
1853년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흐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할 때까지 화상점원, 목사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였다. 1881년 그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오늘날엔 렘브란트 이후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주로 노동자, 농민 등 하층민 모습과 주변생활과 풍경을 담았으며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그의 유명한 귀가 잘린 모습의 자화상에는 왜 귀를 잘랐는지에 관한 여러 근거 없는 소문들도 많다. '자화상의 귀의 모습이 실제와 다르다는 다른 사람의 말에 직접 확인하려 귀를 잘랐다 라던지 창녀(고흐의 부인 역시 창녀임)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잘랐다, 또는 고갱 과의 싸움 뒤에 발작을 일으키며 잘랐다' 라고 하는 등의 소문들로 말이다. 사실 너무 유명한 만큼 반 고흐는 항상 외롭고 고독했으며 평생을 가난과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렸었다. 고흐의 시대는 자본주의와 과학 문명의 급속한 발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었다. 본질적인 정신세계를 직시했던 고흐에게는 외부 세계의 물질적인 변화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회화 세계는 인간의 내면으로 향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끊임없는 갈등과 절망을 느껴야 했던 것이다. 또한 동시대의 인상파 화가들과 달리 고흐는 그들의 빛에 많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빛에 의해 반사되는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태양 그 자체를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 태양은 그의 내적 세계를 신과 연결시켜 주는 절대적인 길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많은 태양의 그림이 등장한다. 회오리치는 듯한 그의 태양들은 정신적인 혼돈의 세계를 대변하는 동시에 그 갈등의 폭만큼이나 거대한 희망을 상징한다. 색조를 분할하고, 빛을 표현해 내기 위해 어지럽게 진동하는 붓의 터치는 바로 이 시기에 나타난 결과물이었다. 이렇듯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색채, 거친 붓 놀림, 뚜렷한 윤곽을 지닌 형태를 표현하였고 이런 기법들을 통해 마치 그의 그림 속에 표현된 것들은 살아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후 표현주의와 야수파에 영향을 주었다. 파리 생활의 싫증으로 아를로 이주한 후 고흐는 죽을 때까지 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정신발작과 쇠약해진 건강 끝에 권총자살을 하였다.
Paul Gaugin
고갱은 인상주의로 출발한 화가임에도 불구하고 기법 면에서는 지극히 반인상주의적이다. 상징주의적 색채를 짙게 띤 인간의 생과 사, 영적인 것 등의 표현을 통하여 인상주의를 탈피하였다. 종합주의로 불리는 그의 회화 기법은 1886년을 기점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종합주의란 색 면을 평면적으로 채색함과 동시에 선으로 형태를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즉 평면적으로 색채를 칠한 후 짙은 윤곽선으로 형태를 나타냄으로써 형태는 더욱 뚜렷해지고 단순화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은 간결하고 뚜렷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 같은 표현방법은 중세 교회를 장식하고 있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색과 형태의 단순화를 꾀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고갱은 이 단순화를 통해 주제의 내적인 의미를 더욱 강조하였다. 또한 처음에 고갱은 프랑스 서부 브리타뉴 지방의 농민들과 같이 생활하며 농민의 삶의 모습을 연구하였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고갱의 예술은 시민 생활에서 도피해서 원시적이고 사실적인 새로운 세계의 탐구가 특징이다. 그는 시민들과 결별하고 가족, 자식, 일들을 포기하고 영광도 부도 거절한 채 문명에 때묻지 않은 생활을 찾아 또한 순수한 인간과 자연을 융합하고자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으로 간다. 그 기간 동안 원시적인 미술을 하게 되고 야성적인 색채와 이국적인 표현기법으로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게 된다. 피카소가 입체파로 나아가게 된 것도 고갱의 원시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후까지 붓을 놓지 않으면서 고독과 우울 속에서 만년을 보내다가55세로 생을 마감했다.
Paul Cezanne
사과(친구 졸라가 고마움의 표시로 줌)하나로 현대미술의 창시가 된 세잔은 인상파 화가들과 같은 시기에 활동했으나 세잔의 작품은 인상주의보다 후기 인상주의 경향으로 분류된다. 세잔은 마네가 추구했던 명암법의 규칙을 단호하게 거부하였고, 순간적인 감각에만 몰두한 나머지 회화에는 기본요소인 형태와 구성을 상실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그는 모든 자연 속의 대상을 원통, 원추구조로 환원시켜 구도와 형상을 단순화한 거친 터치로 독자적인 화풍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세잔은 사물이 갖는 실제적인 명암이나 색채를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화폭 위에 나타나는 이 소재들은 실재감과 완벽한 형태감을 준다. 이렇듯 세잔은 현대미술의 선구자로 평가 받고 있으며 그 뒤 피카소, 브라크 등 20세기 입체파 화가들의 탄생을 불러 왔다. 하지만 그는 오랫동안 당뇨병에 시달려 병이 악화되고 1901년 엑상 프로방스 교외에 아틀리에를 세우고 여기서 그림을 그리다가 뇌우로 졸도했으며 1주일 뒤 사망했다.
세잔은 비사교적이고 종잡기 힘든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열정에 휩싸였다가 금세 의기소침해 지기도하였으며 작업 방식도 독특했다. 예를 들어 세잔은 누드를 그릴 때 실제 모델을 쓰지 않았다. 여성의 벗은 신체를 직접 본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세잔의 수욕도(水浴圖)는 사실 상상의 결과다. 초상화를 그리는 방식은 더욱 괴벽스럽다고 한다. 꾸미지 말고 움직이지도 말고 “사과처럼 앉아 있으라”는 엄명을 내리니, 세잔의 모델이 된다는 건 고문 그 자체였다. 115번이나 포즈를 취했는데 결국 미완성으로 끝난 경우도 있었다. 말기로 갈수록 아내의 초상화와 자화상이 많은 것도 이유가 있다. 그의 ‘사과’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잔은 오렌지색을 즐겨 썼다. 그의 고향인 엑상 프로방스에 가보면 그 오렌지의 근원을 알게 된다. 바로 그곳의 토양 색이며 그 흙으로 만든 지붕의 색깔이다. 화가에게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간과 생활세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다.
August Renoir
르노와르는 프랑스 리모주 출생으로 4세 때 파리로 이사한 후 집안이 가난하여 13세부터 도자기 공장에 들어가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일을 하였다. 이곳에서 색채를 익힌 것이 뒤에 큰 도움이 되었다. 르노와르는 대상의 세부까지 자세히 그리진 않았지만 그의 그림은 마치 인상적인 사진처럼 생동감이 느껴진다. 르누아르라고 하면 흔히 관능내지는 삶의 기쁨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그 이유는 그림이란 즐겁고 유쾌하며 예쁜 것 이어야 된다는 그의 생각의 반영으로 그는 비극적인 주제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르누아르는 초기부터 화병에 꽂힌 꽃 같은 예쁜 대상이나 예쁜 여인들을 즐겨 그렸다. 풍경보다는 인물화를 중심으로 빛의 효과를 탐닉하던 르느와르의 그림들은 다른 화가들과 분명 차별화되어 있어 그의 그림은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소녀를 모델로 하여 따뜻하고 부드럽게 그리고 빛의 아름답고 밝은 면을 강조해서 그리는 것이다. 이런 그림을 가리켜서 르느와르 풍의 그림이라 한다. 또한 르노아르는 점이나 면을 이용하기보다 확산되는 터치로 밝고 온화한 분위기를 표현했기 때문에 일상생활을 표현한 그림에서는 평온함이 강하게 느껴진다. 만년의 작품을 보면 색채가 미묘하게 융합하고 있어서 선묘적인 요소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나 대상의 파악은 정확하여 마치 생명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색채에 대한 그의 감정은 항상 열렬하였고 해를 거듭함에 따라 더 대담하고 자유스러운 붓질로 밝은 색채의 즐거운 혼합물을 보여주며 즐겨 채용한 색깔은 선명한 녹색 및 순수한 청색에 의해 돋보이는 적색, 귤색, 황색 등이었다. 1903년 그는 심한 관절염을 앓고 리비에라로 휴양을 갔는데 손목의 마비에도 불구하고 그는 붓을 손목에 묶어 그림을 그리면서 평소와 같이 행복하고 즐겁게 그림을 그렸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