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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남도여행 2편..고인돌공원-송광사-소쇄원-운주사-땅끝마을
이종원 글/사진
겨울에 남도로 가세요.
나. 둘째날( 고인돌공원-송광사-소쇄원-식영정-환백당- 광주-운주사-나주-해남 '땅끝마을')
1. 새벽여행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오늘 일정에 대해 공부하고 바로 짐을 쌌다. 물론 나 혼자서... 아내와 정수는 새벽잠이 많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자라 절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 혼자 새벽공기를 마시며 밖을 나왔다.
차 유리에 성에가 두껍게 앉아있다. 새벽부터 그걸 긁어내는데 힘을 쏟았다.. 동트는 화순의 농촌 풍경은 너무나 평온했다. 옅은 안개가 들녁을 덮어가는 모습은 가히 잊을수가 없다.
터널을 지나니 안개가 짙어 표지판마저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앞차 꽁무니만 쫒아간다. 방향을 잃고 다른 방향으로 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출근하는 사람에게 물었다.
"송광사가는 길이 어디예요?"
"돌아들어 왔소-. 이곳은 화순탄광이여." 걸쭉한 사투리가 남도 육자배기처럼 들린다.
지금은 폐광이 되었지만 예전엔 호남의 연탄은 전부 이곳에서 생산되었다고 한다. 소설 태백산맥을 보면 좌익의 본거지이고 노동쟁의가 벌어저서 무수한 양민이 학살당한 곳이 바로 여기구나....
한참을 달리다보니 희미한 안개 사이에 독립문이 보인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아니 서울에 있어야 할 독립문이 이곳에... 바로 '서재필 기념관'이란 표지판이 보인다.. 시간이 너무 일러 열지 않았고 멀리서 바라만 보았다. 다시 한참을 가보니 '고인돌공원'이 나왔다. 일정에도 없는 고인돌 공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2. 고인돌공원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고인돌이 많은 나라라고 한다. 특히 나주, 순천, 화순에 집중 되어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불과 며칠 전에 지정되었다. 세계문화유산은 비원, 창덕궁, 경주, 팔만대장경등이 지정되었다. 이는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는다.
고인돌공원은 주암댐건설(1984-1991)로 인해 수몰지역에 있던 선사 유적을 한곳으로 옮겨 복원해 놓은 것이다. 수몰지역으로는 섬진강 지류인 보성강 유역 승주, 보성, 화순 3개군내 인접 9개면 49개리로 광활한 지역이다.
선사시대 문화유적인 고인돌군을 비롯하여 구석기 집터, 신석기 및 청동기 움집 6동과 선돌 등을 주암호수변 17,000평 부지에 야외 전시장, 유물전시관, 묘제전시관 등에 전시하여 전국최초로 조성된 고인돌 공원이며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 154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인돌은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진 묘의 일종으로 전국 각지에 산재하나, 전남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어 선사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역사자료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8시 30분에 이곳에 도착했다. 원래 9시에 개관이지만 나 때문에 박물관을 일찍 열고 VTR도 돌린다. 혼자서 한적하게 둘러본다. 자기 땅을 둘러보는 지주처럼...
아이들이 고인돌을 옮기는 과정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장소도 눈길을 끈다.
등교하는 아이들이 있어 태워주겠다고 했더니 정색을 한다. 아마 부모에게서 아무차나 타지 말라고 교육을 철저히 받았나 보다.
3. 松廣寺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선사가 창건하고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중창한 이래 16국사와 수많은 고승이 배출된 유서깊은 승보 종찰이다. 지금도 국제선원과 승가대학이 열리고 수도 제일도량으로 선원의 기능이 큰 종찰이다.
이런 내력과 함께 불교의 삼보사찰(三寶寺刹)중 하나이다.
法寶사찰인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이 있고, 석가의 정골사리와 금란가사가 봉안되고 있는 佛寶사찰인 통도사, 그리고 16국사를 배출한 僧寶사찰이 바로 이 송광사이 인 것이다.
대한조계종이란 말이 바로 송광사를 두르고 있는 조계산을 의미하는 것임을 여기와서 알았다. 조계산과 절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절은 물론 경관마저 빛나고 있다.
주차장 입구에 주차비가 1천원이라 적혀 있는데 1천 5백원이란다. " 1천원 아니예요?"
"봉고차는 1천5백원입니다." 카렌스를 봉고차로 보는 것은 처음이며, 더구나 혼자 왔는데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절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었고, 절에 관계된 차량은 자동문이 열어준다. 너무 세상과 친해 버린 것이 아닌지.. 혹시 이런 '富'때문에 조계사에서 스님간에 피 터지게 싸웠는지도 모른다.
속세의 번뇌를 佛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어주는 청량각이 나를 맞이한다.
청량각을 지나 산길로 500미터 오르니 여느 사찰에도 볼 수 잇는 일주문이 앞에 닿는다. 다포로 형성된 일주문의 단청이 퇴색되어 더욱 그윽함을 느끼게 하며 일주문의 편액은 특이하게 쓰여져 있다. 중앙에 "大乘禪宗" 우측에 '曹溪宗' 좌측에 '松廣寺'라고 쓰여 있어 대승선을 찬양하는 조계종풍을 그 기치로 삼은 것이겠지.
사천왕상이 있는 천왕문이 거쳐 종고, 법고, 목어가 있는 '종고루에 올라가본다. 이곳에선 아침저녁 예불전을 울린다고 하는데...너무 늦게 왔구나. 절간에 들어서니 대웅보전이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고 왼쪽에 승보전, 오른쪽엔 지장전이 차지하고 있다.
대웅보전은 다포식으로 우리나라 목조건물이 가질 수 있었던 온갖 장점을 전부 결합하였고, 파생될 수 있는 결함마저 배제하여 만든 건물이라는데... 한눈에 봐도 튼튼하게 보인다.
수선사는 조계총림의 방장인 보조국사의 거실이었으며, 지금은 둥근 거울만 하나 있고 절내의 명실상부한 수도처이다. 약 25명의 선객이 상주하고 있으며, 외인출입이 일체 금지된 곳이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절간을 한바퀴 돌고 약수한 잔 마시고 서산대사의 선시도 음미하고, 유명한 그 유명하다는 해우소도 둘러보았다. 통풍이 잘 되고 시원한 느낌이 든다.
'성보박물관'이라고 쓰인 곳이 있어 신발을 벗고 들어가려는데 철로 된 문이 스스로 열린다. 아마도 자동센서가 부착 되었나보다. 하긴 소림사영화에도 문이 자동문이지......
들어가 보았더니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 찼다. 국보인 고려 '고종제서'등 귀한 보물이 가득 들어 있다. 국보인 '목조삼존불감'이 보이지 않아 스님에게 물었더니 지금 다른 곳에서 전시되어 있어 죄송하다는 말을 들었다...그거 없어 나 기분 나빠요.
스님은 속으로 '목조삼존불감을 찾으니 불교에 해박한 사람이구나' 마음속에 생각했엇으리라.
그러나 다음 질문에 나의 무식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스님 16國師가 배출된 큰 사찰이라면 지금 계시는 국사는 몇 번째 입니까?"
스님이 답하시길 "국사는 고려시대만 있습니다."
으--쪽팔림..
조용히 박물관을 나왔다.
절간을 나와 돌아갈려는데 아쉬움이 남아 절 돌담을 따라 걸었다. 머리선 본 절집이 너무나 아름답다. 절만 봐도 신심이 우러나올 것이다. 조금 벗어나니 소나무 숲과 향나무 숲이 가득 펼쳐져 있다. 이제서야 절 이름이 '松廣寺라 불리운 이유를 알겠다. 광릉 수목원말고 이렇게 울창한 소나무 숲은 처음 보았다.
산사의 기를 마시며 천천히 명상에 잠겨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아니 난데없이 핸드폰 벨소리가 이 울린다.
"자기야 나 정수하고 지금 일어났는데 빨리 와...심심해 죽겠어.."
이런 속세의 물결...억겁 속으로 사라져라..
콘도로 돌아가 마지막 있는 밥 다 먹고, 온천물로 한번 더 씻었다.
본전 뽑아야지..
5. 소쇄원
호남사림의 혼을 빛내고 풍류를 일으킨 첫 번째 정자가 바로 소쇄원이다. 쟁쟁했던 은둔지사가 제월당에서 교류했던 흔적이 여지껏 남아 있다. 소쇄원을 조영한 사람은 '양산보'란 사람이다.. 사화로 낙향한 그는 사랑채와 서재가 붙은 집을 '霽月堂,' 계곡 가까이 세운 누정을 '光風閣'이라 명명하고, 자손들에게 절대로 팔지 말 것과 돌 하나 계곡 한구석도 상함이 없게 할 것을 당부 했다고 한다.
우선 소쇄원을 처음 찾으면 그 어귀에 있는 대나무 숲에 감동 받게 된다. 하늘을 찌르는 청죽의 물결이 한낮이라고 어둠 속의 신선함을 체험하게 된다.
소쇄원 원림의 핵심은 계곡과 여울물의 청량한 소리에 있다. 사철 변화무쌍한 계류의 소리는 정적인 공간을 더 없이 넓고 동적인 공간으로 승화시켜주며 이를 통해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고자 했던 것이다. 산기슭의 경사를 계단으로 처리하여 정자를 배치하였고, 외부와의 공간은 흙돌담으로 차단하여 아늑하고 온화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축대나 다리 그리고 담장, 정자등이 한 몸이 되어 유기적으로 상호역할을 한다.
'우리 정원문화의 최고봉'. '원림 건축의 백미' 라는 찬사는 당연한 것이리라. 난 광풍각에 걸터 앉아 풍광를 보며 물소리를 들었다. 이곳에 사는 5살박이 여자아이가 찾아와 정수와 뛰어 논다. 나무다리를 건너고, 대숲을 활보하고, 개울가에서 물장난 치며 논다.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 다 포기하고 낙향할까.....
개집에 문패가 있어 읽어보니 '나진순'이라 쓰여 있어 신기해서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현상해보니
나:나는
진:진도개
순:순종이다. 라는 설명이 희미하게 보였다.
6. 식영정(息影亭)
'그림자도 쉬어간다.' 멋진 이름의 이 정자는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 임억령에게 쉬도록 지어 올린 집이다. 계단을 오르면 무등산 산자락과 넘실대는 광주호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옛 지명으로는 '별뫼(星山)'라 부르며, 송산 정철의 유명한 가사 '성산별곡'을 지은 곳이기도하다. 이곳에 역시 당시 내노라하는 호남의 인재들이 모여 시와 사상을 논했다고 한다.
원주인인 김성원, 임억령등 스승의 자취보다는 제자 송강의 터로 더 유명해졌다. 김성원의 가계가 몰락한 후 송강의 후손들이 정자를 사들여 관리한 탓에 정자 마당엔 '송강 문학비'가 들어섰고, 입구에 '송강가사의 터' 라는 기념탑이 서있다.
옆에는 커다란 건물 '가사기념관'이 자리잡고 있으나 규모에 놀라서인지 들어가기가 꺼려진다.
정자의 현판의 글씨가 너무나 멋이 있다. 이 곳에서 바라본 풍광과 더불어 운치를 느끼게 한다. 툇마루에 앉아 묵객인양 시를 외어 보았다. 아내의 '뽕'가는 얼굴. 원래 이 곳엔 멋진 소나무가 있었는데 천둥 맞고 죽었다고 한다. 그것도 보고 싶은데...
7. 환벽당
창계천 여울을 건너면 바로 '환벽당'이 나온다. 이곳엔 유난히 '결혼야외촬영'하는 사람들이 많다.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선남선녀들이 환벽당 언덕으로 오르는데 눈부신 하얀드레스가 확 눈에 들어온다. 고풍스런 정자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이곳에서 바라본 풍경은 일품이기에 신혼부부들이 많이 찾아든다.
나의 야외 촬영때는 후배가 사진에 취미가 있어 우릴 모델로 세우고 장장 3일간을 찍은 기억이 난다.(모델도 아닌데...) 그는 거기서 자신감을 갖고 직업으로 나선 것이다. 역시 창경궁 같은 고궁에서는 때깔 고운 한복이 훨씬 잘 어울린다.
정수가 웨딩드레스 사달라고 얼마나 조르던지... 그 조그만 눈에도 드레스가 예쁜 옷으로 보였나보다. 너무 어려서 웨딩드레스는 안된다고 했더니...막무가내다... 서울서 당장 식 올릴 준비해야겠다.
환벽당은 임진왜란때 이곳 출신 의병장이었던 김덕령장군의 넋을 기려 만든 정자이다. 확 트인 들녘을 바라 볼 수 있는 좋은 자리다. 정자라는 것은 정자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툇마루에 걸터 앉아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그 정자의 참맛인 것이다.
그 밖에 취가정, 독수정, 물염정등이 이 근교에 산재되어 있지만 정자가 워낙 많아 지겨움을 느낄까봐 그리고 시간이 허락치 않아 '운주사'로 향했다.
8. 광주시
광주호를 가로질러 무등산 자락을 넘는다. 산세가 우람하다. 서석대등 멋진 풍광이 자리잡고 있다는데... 높은 고개를 넘으니 광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생각보다 훨씬 커 보인다. 이곳에서 화순 쪽으로 빠져나가야 하는데 토요일 오후여서 교통체증이 심하다. 더우기 지하철공사까지 한다. 신호대기중 길게 늘어선 차량행렬에 난데없이 잡상인이 다가와 파인애플을 판다.
"드셔 보이소. 한 입 먹으면 안 사고는 못 배길 깁니더..." 먹었더니 너무나 달다.
하나 사면서 물었다. "먹은 것하고 산 것 틀린 것 아니예요?"
그 사람 왈
"지는예- 거제도에서 농장하는데요. 겡상도 사람이 전라도에서 사기치모 칼맞아 죽심더-"
화순행 이정표보다 더 반가운 것은 가스충전소다. 차에 가득 가스 충전하고 넓게 뚫린 4차선 도로를 달린다. 달려라..하니..
9. 운주사가는 길
운주사 가는 길은 매우 험했다. 굽이굽이 첩첩산중을 넘어 간다. 전라도에 이런 산골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깊이 숨어 있다. 솔직히 이번 여정에서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이 바로 운주사다.
이 절은 화려한 단청이나 육중한 현판도 없다. 가슴 철렁이는 사천왕의 험상궃음도 없다. 그러나 어느 절에도 찾아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가람배치가 신비로움을 더해 준다. 누구든지 자신의 길로 찾아 드나들 수 있는 넉넉함이 가득한 절이다.
몇 년 전 만해도 탑과 불상 골짜기에 논밭으로 경작되어 있어 봄이면 쟁기소리며, 가을이면 누런 벼이삭이 물결치는 경이로운 세상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역시 골짜기 길을 따라가면 탄성을 지르게 된다.
골짜기와 산등성이에 우뚝우뚝 탑이 솟아 있고 불상들은 바위절벽 아래에 가족처럼 무리 지어 있으니, 마치 신세계를 노래하는 심포니와 같은 느낌을 받는다. 불상은 못나고 투박하지만 우리네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형제의 정겨운 얼굴을 지니고 있다. 가장 민중적인 불상의 모습이랄까?
운주사는 10여년전까지는 거의 알려진 절이 아니다. 단지 황석영의 '장길산'에 소개되고 부터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문학의 힘이 이렇게 크다.
이곳 천불산 골짜기에 천불 천탑을 세우고 마지막으로 와불을 일으켜 세우면 민중해방의 용화세계가 열린다는 운주사 설화를 삽입하여 대미를 장식하였다. 운주사의 창건에 대한 여러 설이 있다.
10. 운주사의 창건신화
첫째가 이곳 운주사 땅이 여자의 음부형국으로 장차 임금이 나올 군왕지여서 그 혈을 끊어 놓기 위해 명당을 누르는 탑을 세우고 도술을 부려 근처 30리 안밖의 돌을 불러모아 하루밤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둘째가 우리나라 지형이 배 모양인데 동서가 편편하지 못하고 또 태백산맥이 있어 동쪽으로 기울어져 국토의 정기가 일본으로 새어 나가기 때문에, 나라가 망할 위험이 있어 국운이 빠져나감을 막기 위해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세째가 도선이 천불천탑을 하루밤 사이에 세울 때 맨 마지막으로 와불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는데 공사에 싫증이 난 동자승이 거짓으로 닭이 울었다고 하여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11. 북두칠성과 일곱 개의 바윗돌
운주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칠성신앙의 뿌리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토착화된 민중 신앙이며 인간의 기본적 욕망인 수명연장, 구복, 득남을 비는 신앙인 것이다.
와불이 누워있는 산마루에서 절 입구쪽으로 향하여 산길을 내려가면 듬성듬성한 소나무 숲에 일곱개의 바윗돌이 놓여 있는데 이를 '칠성바위'라한다. 칠성이란 북극성을 축으로 하여 그 주위를 하루에 한번씩 회전하는 북두칠성 별자리를 말하는데 우리 선조들은 자연 숭배사상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으며 운주사 칠성바위는 하늘의 별자리가 산허리에 반사되어 있는 형상으로 수놓아져있으며 별자리의 밝기에 따라 바윗돌의 크기까지 다르게 한 상상력에 탄성을 지르게 한다.
12. 가장 민중적인 탑과 불상들
운주사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집단적 미의식이다. 개체가 보여주는 뛰어난 아름다움보다는 똑같은 형상들이 동어 반복적으로 펼치는 세계는 강렬하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또한 파격적인 아름다움의 절정을 보여준다. 탑들은 그 형상이 특이하다. 자연석을 그대로 쌓아올린 모습, 호떡을 얹어놓은 모양, 용머리와 감실에 모셔진 부처님 탑, 7층.9층 형식에 억메이지 않는 파격적인 모습이 괴이하거나 부담감을 주지 않고 친근한 조형미를 전해준다. 불상의 모습도 자유롭고, 기발하게 처리되어 귀족의 채취를 느끼지 못하고 민중의 냄새를 맡게 한다.
공사바위에 오르면 운주사 골짜기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공사감독을 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실제 바위엔 홈이 움푹 파여 엉덩이를 집어 넣고 신비로운 경치를 볼 수 있다.
반대편 산길을 오르면 그 유명한 와불을 보게 된다. 밤하늘 북두칠성를 바라보며 돌부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13.부처할머니
절에 들어 갈 때 입구에서 행상할머니가 홍시감을 팔았다.. 너무나 싸다. 큼직한 것이 4개 2천원인데, 한 개는 먹고 나머지는 나올 때 주세요. 하고 일주문을 지나 신비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운주사에 워낙 진한 감동을 받았기에 시간을 지체하고 늦게 나왔더니 다른 행상할머니는 다 집에 가고 그 할머니만 혼자 지키고 있었다.
그 할머니가 "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감을 전해 주어야 했기에 집에도 못 가고..."
그러면서 정수에게 덤으로 하나 더 주고 광주리를 이고 집으로 향한다.
조금 전에 산에서 보았던 미륵불이 바로 저 할머니구나.
그런데 짐 정리 하다가 그만 홍시감을 운전석에 깔고 앉았다. 그게 어떤 감인데...
14. 나주
운주사를 벗어나 나주로 향했다.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 마을 촌로에게 물었다.
"나주가는 길이 어딥니까?"
"저-쪼그로 빤드시 가시쇼-"
여행을 하면서 터득한 일인데 모르는 지역에서 밥을 먹을 땐 절대 터미널이나 역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시청이나 군청근처에서 식당을 찾으면 푸짐한 음식을 기대할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식당주인이 감히 공무원을 사기 칠라고?'
나주시청 근처에 가서 삽겹살과 산채꽁보리 비빕밥을 시켜 먹었다. 두툼한 생삼겹에 보리밥을 접하니 천하일미다. 상추 대신에 배추를 주는 것이 특이하며 젓갈은 전라도 음식에 꼭 나온다.
나주에서 영암을 거쳤다. 저 멀리 월출산의 표지판이 보인다. 도갑사나 무위사가 있는 신비의 명산 너무 어두워서 볼 수 없어 너무나 아쉽다. 내일 봐야지...
15. 해남
나주에서 강진까지는 4차선 도로다. 고속도로처럼 확 트여 있어 100킬로 이상 달렸다. 정말 길이 잘 닦여 있었다. 해남에 도착하여 슈퍼에 들러 맥주 1병사고, 정수 간식 장만하고, 땅끝으로 향했다. 대만민국 최남단. 땅끝마을... 해남에서도 한 시간정도 걸린것 같다.
분명 해안 도로일텐데.... 너무나 깜깜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쉽다.
드디어 토말 땅끝 마을에 도착.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반도 최남다.....
16. 땅끝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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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보았던 '피카소'란 민박집이 맘에 들어 하루 밤 묵기로 했다. 하루에 3만원. 화장실과 샤워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TV도 있다. 바다라서 바람이 세차다. 하늘엔 별이 총총....
가게방에 들러 내일 '보길도'가는 첫 배 시간을 알아두었다. '아침 7시10분.'
대한민국 최남단 돌담집
이 추억 오래 간직하자..
오늘도 힘든 일정이었다. 눕자마자 쿨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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