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아끼는 진주 목걸이가 하나 있다. 어머니가 막내딸인 내게 물려주신 것이다. 비록 상등품은 아니더라도 어느 고가품에 비할 수 없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목걸이다. 그 진주 목걸이에는 평생 진주 양식을 집념의 길로 걸어오신 아버지의 땀방울과, 아버지 그늘에서 헌신적인 내조로 몸 바쳐 오신 어머니의 한숨과 눈물도 스며있다. 그래서일까. 어머니나 아버지가 그리울 때면, 예의 그 목걸이를 꺼내 만져보곤 한다.
내가 어렸을 적, 우연한 기회에 아버지는 학교 동창인 한 일본인으로부터 진주 양식에 관한 얘기를 듣고, 통영 욕지도에서 처음으로 진주 양식을 시작하셨다. 그 당시 아고야 진주라 불리는 일본 진주의 독점 생산에 도전하신 것이었다. 진주를 ꡐ조가비 속에서 탄생의 아픔을 견디며 자라나는 숨쉬는 보석ꡑ이라 한다던가. 우리가 흔히 진주라고 일컫는 양식 진주의 생성은, 민물조개 껍질로 만든 원형의 핵을 진주 모패(母貝)의 생식소에 삽입하는 시술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고통스런 자극으로 진주조개는 삽입된 핵 주변에 이물질을 분비하게 된다. 그리하여 핵 표면에 얇은 진주층이 형성되는데, 이 진주층이 여려 겹으로 코팅될수록 아름다운 진주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주가 생성되는 ꡐ아픔’이요, ꡐ숨막히는 기다림’인 것이다. 아버지의 7년여의 첫 도전은 남해 바다의 때 아닌 냉수대 형성으로 진주조개들이 전멸하여 실패로 끝났다. 그 파장으로 우리 집도 도심에서 변두리 동네로 밀려나야 했으며,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도 가난의 아픔을 피부로 느껴야만했다. 버스로 이십여 분인 통학거리를 차비를 아끼기 위해 종종 걸어 다녔고, 때로는 어린 마음에 신발이 닳을까 봐 운동화 바닥에 마분지를 대고 고무줄로 묶고 다니기도 했다. 또한 수학 여행비를 낼 수 없어, 그 당시 경주로 떠났던 초등학교 수학여행 사진도 내게는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여중 재학 시 공납금을 제때 내지 못해 조회시간마다 칠판 앞으로 불려나갔을 때이다. 불려나간 인원이 열 명 남짓한 처음엔 그나마 덜했지만, 숫자가 점점 줄어 갈 때마다 그 초조함과 초라함은 어린 내가 감당하기에는 참으로 버거웠다. 그래서 나는 잃어버린 자존심을 찾기 위해 공부에 매달렸고, 결국 학급에서 일등을 함으로써 그 상처를 보상받는 듯 했으나, 그날의 초라한 모습은 오랫동안 나를 아프게 했다. 하지만 그런 아픈 기억들이 훗날 내가 교사가 되었을 때, 그 또래 여학생들에게 예민한 납부금 부분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룰 수 있었으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치렀던 그 몇 년간의 아픔이 나에게는 값진 경험이 된 셈이다.
쓰라린 실패, 그 이후 아버지는 한 동안 진주 양식에서 손을 떼기도 하셨으나, 미련을 버리지 못해 한산도로 양식장을 옮겨 재기를 노리셨다. 또한 일본 현지 기술자도 힘들게 영입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셨다. 결국 아버지의 집념은 82년 겨울, 마침내 한국에서 처음으로 진주알을 캐내는데 성공하셨고, 이것은 일본의 아고야 진주가 해외에서 처음으로 양식되는 사건이기도 했다고 한다. 방학이 되면 우리는 양식장이 있는 한산도에서 거의 보내다시피 했다. 그럴 때 아버지는 집에서 보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셨다. 평소 부지런한 성품으로 오직 한 가지 집념만으로 그 길을 가시는 외로운 뒷모습은, 어린 나에게도 ꡐ우리 아버지는 참으로 힘든 길을 가시는구나.ꡑ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했다. 바다 건너로 충무공의 제승당이 보이고 하얀 거북등대가 한가로이 떠있는 한려수도의 끝자락, 그 바닷가에서 나는 산그늘이 드리워진 짙은 쪽빛 바다를 보며 남다른 감성을 키우기도 했다. 때로는 시술실에서 핵이식 작업을 구경하기도 했다. 봄에 시술을 거친 진주조개는 본 양성에 들어가기 전, 바구니에 담아 맑고 고요한 바다에서 2,3주간 회복기를 가지게 된다. 그런 후 선별작업을 하여 핵 주변이 일정한 두께를 형성할 때까지, 진주조개 양성용 채롱에서 1,2년 간 바다 깊은 곳에서 아픔을 안고 성장하게 된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은은하고 신비스러운 빛으로 감싸여진 진주가 탄생되는 것이다. 제 가진 깊이만큼 짙푸른 빛을 내는 바다처럼, 진주 또한 제 가진 아픔만큼 영롱한 빛을 내는 것은 아닐는지. 진주가 이토록 오랜 세월 만인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오로지 탄생의 아픔을 견디어 낸 결과이리라.
수년 전 부모님의 금혼식을 맞이하여, 우리 오남매는 두 분을 모시고 월악산 자락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날 저녁, 약주를 한 잔 하신 아버지는 나름대로 제 몫을 하는 장성한 자식들을 보며 감회에 젖으셨는지 그 좋은 자리에서 결국 눈물을 보이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그때 우리들은 흐르는 눈물을 굳이 외면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보았다. 아버지의 눈물 한 방울 한 방울 속에 어렸던 그리 녹록치 않았던 세월, 그것은 진주(眞珠)의 눈물이었다. 얼마 후 아버지는 희수의 연세로 먼 길을 떠나셨고, 다음해 어머니가 조용히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그렇게 두 분이 떠나신 후, 나는 어머니의 진주 목걸이를 물려받게 되었다. 아버지가 살아오신 그 땀방울의 흔적이, 어머니의 유품이 되어 내게로 되돌아온 것이다. 자식들 중 유일하게 진주목걸이가 없는 내가 마음에 걸리신 걸까. 그리고 편편치 않던 이제와는 달리 나도 목걸이 하나쯤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드는 건, 부모님의 숨결을 가까이 느끼고 싶기 때문이었을까. 삼우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날 저녁,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목걸이를 한번 만져보고 싶어졌다. 조심스럽게 만져 보았다. 동그란 진주 구슬에 어머니의 고왔던 얼굴이 얼비쳤다. 언뜻 보면 진주알이 크고 매끈한 것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한두 군데 흠집이 있는 목걸이였다. 왜일까. 그 많은 상등품 중에서, 하필이면 흠집이 있는 이 목걸이를 고르셨을까. 바로 어머니의 깊은 마음이었다. 아버지의 사업과 자식들을 위해 하나라도 더 양보하려는 그 깊은 마음이었다. 순간, 목걸이를 만지던 손등에 눈물이 떨어졌다. 옆자리의 오빠도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서일까. 상처가 있는 이 목걸이야말로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부모님의 삶이 함께 일군 역사이기에, 난 이 목걸이가 더 더욱 정이 간다. 그리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언젠가 먼 훗날 딸아이에게도, 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그 깊은 뜻과 함께 물려주리라.
어머니 떠나신 지 어언 3년, 얼마 있으면 어머니의 기일이다. 그날엔 예의 그 진주목걸이를 목에 걸고 어머니를 뵈러 가야겠다. 딸아이의 손을 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