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사 제1대 강택규 예로니모 신부님(1984.1.18-1988.5.6)
1. 본당 설립과 사목활동의 힘찬 출발
대해본당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으면서 그 기념사업을 다양하게 추진한 가운데 대구대교구에서 설정한 가장 핵심적인 사업, 즉‘200주년 기념 본당 설립 및 성전건립 사업’이 포항지구 사업으로 결정됨에 따라 대구대교구로부터 설립인가를 받고,1984년 1월18일 대구 두류본당에 봉직하던 강 택규(예로니모) 신부가 초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함으로써 설립 인가되었다. 이때 죽도본당으로부터 분가한 신자의 총수는 2,630명이었다.
강 택규 초대 주임신부는 부임 당시 새 성전이 내부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죽도성당 사제관에서 곁방살이를 하면서 공사 감독 및 독려를 하고, 신설 본당의 제반 살림 준비를 박 원출(토마) 죽도 주임신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진행시켰다.
1988년 2월26일 공사 중인 미완성이 성당에서 초대 주임신부의 주례로 첫 미사가 감격스럽게 봉헌 되었다. 연이어 그해 3월4일부터는 정상적인 미사가 봉헌되기 시작했고,“가톨릭 대해”라는 이름으로 자체 주보를 발간하기 시작하였다.3월6일부터는 교리실의 미완으로 상도주택 신자 가정에서 25명의 예비자 교리반을 개설하고,4월1일은 레지오 아치에스 행사,4월5일은 레지오 간부 피정,4월8일은 사순절 특별 강론 등 본당의 여러 활동이 빠른 속도로 정상화 되어갔다.
1984년 4월8일 본당 평신도 사도직협의회 위원과 사목위원을 위촉, 발족 시켰으며,4월22일 본당의 첫 부활절을 맞이하여 윷놀이를 실시 본당 공동체의 한마당 축제를 열었다.
2.200주년 기념행사 참여와 성전의 축성, 하자 및 보수
1984년 5월5일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대구 대교구는 한국 순교자 103위의 시성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모시고 대구 공설운동장에서 청소년 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이 대회에 신설 본당인 대해본당은 95명이 참가하였다.
그 이튿날인 1984년 5월6일, 역사적인 이 날에는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집전으로 한국순교자 103위의 시성식이 장엄 하게 엄수 되었고,이 날 대해본당에서는 200명의 교우가 참가하였다.
1984년 5월은 한국 천주교회가 축복 받은 달인 것처럼, 신설 대해본당도 축복받은 달이었다.21명의 유아 세례자 탄생과 연령회, 안나회의 조직 출범,5개 쁘레시디움 창단 되었다.
그해 6월에는 주일학교가 개설(6.3)되었고, 성모회도 결성(6.10) 되었으며, 또 7월 5일에는 “예수 성심 시녀회” 소속의 전교 수녀2명(주임 이 세베리노 수녀, 윤 마리아 수녀)이 부임함으로써 명실 공히 본당의 면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드디어,1984년 7월8일 뜻 깊은 “200주년 기념성전 축성미사”가 1500명의 교우들과 많은 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이문희(바오로)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되었고, 아름다운 한국 여인상으로 제작된 성모상의 제막식과 주교님의 기념식수도 아울러 거행되었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대해본당의 설립 및 성전 건립”이 완료되면서 평협, 주일학교,교반조직, 레지오 등 본당조직의 제 기능들은 본당 신부의 지도와 수녀들의 후원으로 빠른 속도로 정상궤도를 진입하였다.
1984년 여름 본당 소속 오천, 구룡포 공소 학생들과 본당 학생들이 함께 참가한 주일학교 신간학교를 시작으로 신자 일일 피정, 예비자 봉헌식을 통한 예비자들의 참여의식 제고, 견진교리, 성서공부 40주간, 주일학교 교사 연수회, 남성 합창단 창단, 구역 활성화를 위한 구역 미사. 전신자의 연락처와 필수 일상기도문을 게재한 신자수첩의 발간, 부활절 및 성탄절의 축제, 아치에스, 성모의 밤, 성지순례 등 제반 활동을 통하여 신앙과 신심의 함양은 물론 공동체의 일치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혹한에 실시된 공사로 인하여 새 성전은 제대 뒷벽과 종곽부인 사제관 천정 등에서
1984년 첫해부터 약간의 비가 새기 시작하였다. 그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 여름 (1985년) 약간의 비가와도 빗물이 새고, 장마철에는 성가대, 종곽, 사제관은 물론 제대 주위에도 양동이를 대어놓을 지경이 되었다. 비오는 밤이면 신부님을 비롯하여 수녀님, 식관 자매, 사무장은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고, 심한 날은 간부들이 밤늦도록 물을 받고 퍼낼 경우도 있었다.
루핑, 시멘트, 몰타르 등으로 응급처치를 해도 별반 효과가 없었다. 따라서, 주임신부와 평협은 의논 끝에 “성당 보수 기금”을 모금, 성당 지붕의 전반적인 보수를 실시키로 하고,1985년 6월23일 보수기금 신립서를 배부함과 동시에 곧 본당 발전을 위한 기도를 실시, 모금에 들어갔다.
장마기가 끝나자 곧 공사에 들어가 방수, 부실 부분의 시멘트 바르기, 천정 단열, 성당 내부2중벽 축조 및 이중창 설치, 화장실과 수녀원 등의 보수공사를 대구 두류본당의 김 바오로씨에게 맡겨 2개월 동안 실시하였다. 보수 총 비용은 1,953만원이었고, 모금 총액은 1,038만 1천원이었다.
3.전교 및 쉬는 교우 찾기 운동의 강화와 구룡포 본당의 승격, 분가
본당의 시급한 현안이던 성전의 보수가 완료되자 1986년부터 전교와 쉬는 교우(냉담자)찾기 운동의 강화 및 실시해 오던 신자 재교육은 꾸준히 계속되었다.1월14일 예비자 교리개강을 시작으로 전교활동을 레지오 단원을 중심으로 실시하고, 동시에 선교분과가 주관이 되어 쉬는 교우 찾기 운동을 레지오 단원을 통해 실시하였다.1986년의 경우 1,109명의 쉬는 교우 명단을 작성하고, 기도문을 만들어 기도하며 레지오 단원들이 가정 방문 활동을 하고 사순절과 대림절 2차례에 결쳐 피방문자 810명, 회두24명의 성과를 올렸다.
또한, 신자 재교육 프로그램들도 사목계획에 따라 차질 없이 진행되고, 꾸르실료, 레지오 기사 교육,ME부부 주말 피정 등 외부교육 참가자들도 많이 늘어났으며 따라서, 신심 및 활동단체들의 활동도 활력을 더해갔다.
대해본당은 1984년 1월18일 죽도본당으로부터 분가할 때 포항시의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구룡포 공소와 오천 공소를 본당 관할 공소로 인계 받았다.
또한, 초대 주임 강택규 (예로니모)신부는 신설 본당 사목으로 바쁜 중에도 1984년 봄부터 구룡포와 오천공소에 주일미사를 봉헌하였다. 구룡포의 본당 설립 준비를 진행시켜 부지 매입, 옹벽공사, 사제관 공사, 곤세트 건물의 임시 성당 공사 등을 마무리 짓고,1986년 5월13일 구룡포 공소와 오천공소를 구룡포 본당으로 승격케 하였다. 초대 본당주임에 김원조(라우렌시오)신부가 부임하였다.
첫댓글 천리향님, 때이른 삼복더위 속에 원고 작성하시느라 고생 왕창 했습니다. 고마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