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구간 : 중산리 - 천왕봉 - 제석봉 - 장터목산장 - 촛대봉 - 세석 산장 - 벽소령 - 토끼봉 - 삼도봉 - 노고단 - 종석대 - 성삼재(천왕봉-1.6-장터목 산장-0.8-연하봉-1.86-촛대봉-0.6-세석산장-2.0-칠선봉-1.5-선비샘-2.55-벽소령-1.3-형제봉-2.05-연하천-2.94-토끼봉-1.25-화개재-0.75-삼도봉-2.15-임걸령-1.05-돼지평전-2.23-노고단-3.5-성삼재=28.13)
접속구간=중산리-천왕봉=5.23+28.13=33.36km
2. 산행일정 : 6월 2일 18시 30분 경주 황성공원 도서관 앞에서 발대식을 성황리에 거행한 후 19시 40분 출발, 6월 3일 1시 07분 중산리 도착, 1시 15분 천왕봉 향해 출발
3. 종주자 명단 : 최현찬(산행부대장, 경주교도소), 권종훈(산행부대장, 경주월성중학교), 이종률(전임회장, 유진건설), 김권곤(경주월성중학교), 손승락(경주월성중학교), 김정훈(경주월성중학교), 서영배(현곡농협 금장지소), 김진수(경주교도소), 이운석(경주경찰서), 김근석(삼진택시)
4. 운전자 : 최선웅, 손정락, 황이순
5. 차량 제공 : 최선웅, 김일환
6. 도움 주신 분들 : 백상승 고문, 김일환, 김형구, 김영출, 이장우, 최해도, 박진태, 우성열, 김칠원, 권오훈, 최선웅, 방진홍, 정해전, 고성안, 조영복, 박일환, 최병석, 남호복, 이만준, 이교훈, 손정락, 김혜실, 권종훈, 최현찬, 이덕상, 전영근, 정진구, 최병윤, 김근석, 서영배, 김경식, 이해동, 김정옥, 이종률, 이옥순, 정달교, 손운락, 이상명
아! 백두대간이여...
사랑하는 님의 따뜻한 가슴에 안기고 싶듯이, 푸근한 백두대간에 안기고 싶으며, 불러보고 싶고, 외쳐보고 싶은, 말만 들어도 가슴 벅차고 감격스러운 우리 국토의 등뼈인 백두대간...
산은 물을 건너지 않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는 대원칙 아래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서 민중의 한이 서린 지리산까지 거침없이 뻗어 내린 우리의 산줄기 백두대간...
경주정보고등학교 등산부를 지도 하면서부터 꼭 한번은 종주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왔지만 항상 마음뿐이던 백두대간 종주가 나에게도 실제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경주일요산악회에 가입하면서 이제는 생각만이 아니라 한번쯤 도전해 보고, 실천에 옮기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마침 지난 2월 민주지산 정기산행 사전답사를 가서 논의되기 시작한 후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을 먹고, 일부 회원들에게 의사를 타진해 보니, 모두 동의를 하면서 힘껏 도와 주겠다는 약속과 다짐 속에서 서서히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그래서 3월 이사회 때 백두대간 종주계획안을 건의하니 여러 이사들이 적극 협조하겠다 하여 종주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해 나가니, 이때부터는 사랑하는 님을 학수고대 하면서 기다리듯이, 그리움과 설렘을 간직한 채 하루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처음 계획은 5월 첫째 주를 종주 시작 일로 잡았지만 결국 지리산이 산불방지 관계로 입산금지 기간이라서 하는 수 없이 한달 뒤로 미루어 6월 2일 황성공원에서 발대식을 거행한 후 6월 3일 첫 구간인 지리산을 당일 종주하기로 하고, 하루에 6km∼8km에 이르는 거리를 뛰기도 했으며, 교내 체육대회 때는 학생들과 함께 1,500m 경기에 동참해서 열심히 뛰어보기도 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회원들이 적극 도움을 주셔서 무사히 준비를 끝내게 되었으며, 앞으로도 회원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동참이 필요할 것 같다.
그 동안 물심양면으로 관심을 가져 주신 여러 이사들과 회원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백두대간 완주 성공률은 30%정도라지만 기필코 성공해서 여러 회원들의 성원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그럼 끝나는 그 날까지 많은 격려를 부탁드리며...
그리고 경주월성중학교 김해규 교장선생님, 주형석 교감선생님, 이복형 친목회장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의 격려와 성원에 감사드리며, 특히 3학년 학생들이 간절히 바라는 백두대간 완주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학생들이여!
"보라! 사나이 권종훈의 투지를,
불타는 투지 필승의 권종훈"
드디어 손꼽아 기다리던 그날이 다가왔다.
6월 2일 18시 30분 황성공원 도서관 앞에서 70여명의 회원 및 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백두대간 발대식을 거행하였으며, 곡차와 음복을 간단히 한 후 19시 40분 종주대는 지리산을 향해 출발하였지만 언양을 지나면서 고속도로가 막혀 차량통행이 생각보다 많이 지체되었다.
진영휴게소에는 계획보다 많이 지연된 22시 05분에 도착하여 미리 준비한 저녁을 먹고, 22시 30분에 출발하여 진주를 거쳐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에 도착하니 6월 3일 1시 7분이다.
지리산은 백두산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정기와 맥을 그 너른 품에 한아름 가득히 갈무리하여 남녘땅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우리 민족의 영산이다.
지리산은 둘레만도 장장 팔백 리가 넘으며, 주봉인 천왕봉을 위시하여 반야봉, 노고단 등 해발 1,500m 이상의 봉우리만도 16개를 가진 참으로 거대하고 장엄한 산으로써 마치 한 마리 소가 동서로 길게 누운 듯한 모습을 취한 110여 리의 지리산 주능선은 산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산맥이라 해야 어울리는 지리산...
옛날 지리산은 두류산, 방장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두류"란 높다란 뜻과 머리란 뜻의 고어에서 변형된 말이니 두류산은 "가장 높은 뫼"란 의미를 지닌 이름이다.
방장산이란 이름은 중국 진시황에 얽힌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진시황이 불로초와 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어린 소년, 소녀 3천여 명을 동해바다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다는 삼신산에 보냈는데, 옛 사람들은 삼신산이 영주, 방장, 봉래산이며, 지리산을 삼신산 중 하나인 방장산이라 생각했다.
간단히 장비를 점검하고 1시 15분에 중산리를 출발하여 백두대간 시발점인 천왕봉을 향해 힘찬 전진을 시작하니, 다행히 매표소에는 불만 켜져 있고 관리인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아서 무사히 통과를 할 수 있었다.
어둠 속을 뚫고 울퉁불퉁한 바윗길을 지나 2시 50분에 로타리 산장에 도착하니 천왕봉 일출을 보기 위한 많은 산악인들이 잠에서 깨여 아침밥을 준비하는 팀과 짐을 꾸리는 팀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으며, 샘터에서 가슴속까지 시원한 물을 한잔 마시고 우리 일행은 계속해서 올랐다.
법계사를 거쳐 중봉과 천왕봉 사이의 안부에 도착하여 잠시 쉰 후 마지막 바윗길을 통과하여 지리산 정상(천왕봉)에 도착하니 4시 03분, 가장 먼저 지른 소리는 "정상이다"는 외침이었다.
주위는 온통 어둠과 침묵 속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발아래 멀리 민초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졸고 있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다.
정상에 올라서니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사람이라고는 내 바로 뒤를 따르고 있는 최현찬 회원 외에는 아무도 없다.
사방을 빙 둘러보아도 거칠 것 하나 없는 장쾌한 전망을 가진 천왕봉은 하늘에 닿을 듯 웅대한 기상으로 우뚝 솟아 있는데 행정구역상으로 보면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 208번지와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 100번지에 해당된다.
정상에는 몇 차례 푯말이 바뀌면서 지금은 “지리산 천왕봉 1,915m", “韓國人의 氣象 여기서 發源되다”라고 각각 양면에 음각된 높이 1m정도의 타원형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지리산의 제왕은 천왕봉으로 이곳에는 신비스럽고 사연도 많은 성모라는 여신상이 있었는데 우리 고장 경주의 옥석으로 다듬어진 이 여신상은 높이가 1.2m, 너비가 50cm 정도 된다.
천여년을 지리산 수호신으로 지내온 이 여신상이 지금은 중산리 천왕사라는 조그마한 암자에 머물고 있는데, 여신상이 상처를 입고 중생들이 사는 세계로 내려선 내력이 기구한데,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380년 이성계의 황산대첩에서 패한 일본인들이 지리산을 넘어 도망칠 때 분풀이로 여신상을 두 동강 내면서 여신상은 최초로 상처를 입었다.
그래도 여신상은 계속 천왕봉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일제시대 때 사당을 철거하고 여신상을 아래로 굴려 버렸는데 이후 산청에 사는 한 처녀가 여신상을 다시 천왕봉으로 올렸지만 1945년 11월에 누군가에게 보쌈당했다가 얼마 후 다시 올라왔다.
이후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사당안에 모셔져 기도객들의 염원을 듣고 있었는데, 1972년 봄 천왕봉에서 철야기도를 마친 모 종교인들이 이 여신상을 훼손시켜 버렸다.
이렇게 행방불명 되었던 것을 1986년 1월 천왕사의 혜범 스님이 몸통과 머리 부분을 발견해 정성스럽게 봉합한 후 천왕봉 남쪽 산자락에 있는 천왕사에 모셔 놓았다.
하지만 천왕사측과 주민들은 그간 이민족과 이교도, 그리고 철없는 사람들에 의해 수난당한 여신상이 또다시 훼손당할까봐 두려워 다시 천왕봉에 올려 놓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로 여신상이 천왕봉에 떳떳히 오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평소 종주대에 신경을 많이 써 주신 사무국장은 새벽1시경 전화를 해서 어디쯤 가고 있느냐고 물으면서 도착하는 즉시 전화를 해 달라기에 도착과 동시에 무전을 뛰웠지만 새벽 4시 03분이라는 시간 때문에 휴대폰이 꺼져 있어 결국 메시지를 남기고 있는데, 우리 종주대 일행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다.
잠시 후 일행 가운데 김권곤 회원이 올라와 추위로 인해 얼굴이 굳어지기 전에 사진을 찍자고 한다.
우리는 돌아가면서 독사진 한 장씩을 찍고 난 후 출정식 현수막을 펼쳐 보고 있는데, 한쪽에선 추위로 각자 가지고 온 두터운 옷으로 갈아입느라 모두가 바쁜 손놀림을 하고 있다.
주위가 다소 밝아진 4시 42분에 산행대장의 지시에 따라 출정식을 거행하고 4시 45분에 성삼재를 향해 출발하였다.
워낙 먼 거리를 가야하기 때문에 지리산 제1경인 천왕봉 일출을 보고 떠나려던 계획은 산행대장의 독촉에 산산이 무너지고, 일출을 볼 기회는 어쩔 수 없이 다음 기회로 미루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지리산 제1경인 천왕일출 구경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1,890m 지점에 있는 통천문을 4시 49분에 통과한다.
통천문은 예로부터 부정한 사람은 오르지 못했다고 하는 하늘에 오르는 길목이며, 마침 제석봉을 지나는데 사방이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하였다. 제석봉은 고사목과 황량한 초원지대로 이 처참한 몰골의 사연을 들어보면 말문이 막힐 뿐이다.
사연을 들어보면 6.25후까지만 하더라도 아름드리 전나무, 구상나무들이 울창하였던 제석봉은 자유당 말기 당시 농림부 장관의 삼촌되는 자가 권력을 등에 업고서 제석단에 제재소를 차려놓고 거목들을 베어 내면서부터 수난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후에 여론화되고 말썽이 생기자 증거를 인멸할 양으로 제석봉에 불을 질러 나머지 나무들마저 지금과 같이 횡사시켜버렸다고 하니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모두 관심을 가지고 백두대간을 더욱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본다.
일행들을 먼저 보낸 후 김권곤, 김정훈 회원과 함께 등산로를 벗어나 제석봉으로 올라가자 주위가 붉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나니, 5시 20분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고귀한 생명이 탄생하듯, 주위의 어둠을 밀어내는 불덩어리 하나가 서서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꿈에도 잊지 못할 천지개벽을 알리는 찰라의 순간이었다.
설악산에서는 몇 번 일출을 볼 기회를 가졌지만 지리산에서는 1982년 2월 지리산 종주를 하면서 토끼봉에서 본 일출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다행히 날씨가 맑아서 제석봉에서 바라본 천왕봉과 중봉 사이에 솟아 올라온 붉은 색의 불덩어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가히 절경이었다.
몇 장의 사진을 더 찍고 장터목산장을 향해 내려오니 벌써 선두는 지나가고 없었다.
장터목산장에 도착하니 5시 37분, 산장은 수용인원이 250명 정도로 최근에 신축된 산장이며 1982년 겨울 종주 때 하루 밤을 지낼 때 밤새도록 눈이 내려 허벅지까지 빠지는 길을 어렵게 뚫고 천왕봉에 올랐던 기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 당시의 산장은 폐쇄되고 없었다.
선두를 따라가기 위해 뛰다시피 하여 연하봉에 올라가니 마침 일행이 쉬고 있었다. 벌써 선두는 식사를 장터목에서 했다고 한다.
연하봉의 기암과 고사목이 어울린 능선안부를 지나 제8경 연하선경으로 유명한 연하봉에 올라 아침식사를 한 후 먼저 간 선두를 따라 붙기 위해 두 회원을 뒤로 한 채 혼자서 열심히 걸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맞은편 쪽에서도 많은 등산객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벌써 일행이 지나갔는데 왜 혼자 처졌느냐며 지나가는 많은 산꾼들이 걱정과 염려를 해 준 덕분에 1,730m의 촛대봉(1,730m)에는 6시 36분에 올라선다.
주위를 바라보니 세석산장이 내려다보이고 앞에 가는 일행이 산장을 지나 영신봉을 향해 오르막을 올라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산장 주위의 세석고원은 지난 1972년부터 매년 철쭉이 만발하는 시기에 진주산악회 주최로 “철쭉제”가 열리곤 하였는데 세석철쭉의 고운 분홍색 자태는 지상낙원을 이루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 대혼잡을 이루고 오히려 철쭉이 훼손당하는 부작용이 따르자 폐지되었으며, 세석철쭉은 지리산 제6경에 속한다. 그리고 세석산장은 지리산의 산장 중 가장 크고 운치가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산장으로 수용인원 300명을 자랑하는 대규모의 최신식 시설로 신축되어 있다.
그리고 앞에 보이는 영신봉(1,651.9m)은 낙남정맥의 분기점이 되는 봉우리이다.
이 영신봉에서 시작해 김해 낙동강까지 뻗어내린 낙남정맥은 남녘의 내륙지방과 해안지방을 갈라 기후와 문화 등을 구분해 놓은 산줄기이다.
영신봉 조금 지나서 먼저 간 일행들과 합류할 수 있었지만 뒤에 처진 두 회원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칠선봉(1,576m)을 지나 선비샘에 7시 50분에 도착한다.
하지만 아직 준비한 물이 많이 남아 있는 관계로 그대로 지나쳤지만, 옛날 선비샘 아래 상덕평마을에는 평생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살아온 한 노인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이 노인의 유언이 죽어서라도 사람 대접 한번 받아보는 것이었는데 결국 아들들이 이 샘터 위에 무덤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샘에서 물을 뜰 때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므로 결과적으로 이 노인의 무덤에 절하는 격이 되게끔 하였다고 한다.
생전에 갖은 고생과 천대 속에서 화전민으로 살아온 한 노인의 애틋한 소망이 실제로 몇 년 전까지 실현되고 있었는데 지금은 무덤도 보이지 않고 샘도 파이프로 연결되어 이 씁쓸한 전설은 잊혀진 얘기로 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가 덕평봉(1,521.9m)을 지나 벽소령에 도착한다.
구벽소령부터는 길이 넓게 닦여져 있었지만 도로에 잡목들이 우거져 있었고 1km정도 더 가니 신벽소령의 벽소령대피소가 나왔다.
이때 시간이 8시 23분이었다.
집에 있으면 이제야 일어날 시간에 벌써 지리산의 반을 넘어섰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해지면서 자신감이 생겨났다. 이제는 지리산 종주는 걱정했던 것보다는 쉽게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곳 벽소령은 예부터 화개에서 마천으로 넘나드는 고개로 이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는 밝은 달은 동양화처럼 아름답다하여 벽소명월의 제5경에 해당된다.
벽소령대피소는 많은 종주자들이 1박을 하고 종주를 하는 중간 지점이 되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는 벽소령대피소 또한 그냥 지나쳐 형제봉(1,433m)에 8시 58분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고 또 다시 쉼없는 나그네가 되어 길을 재촉한다.
삼각고지를 지나 연하천 산장에 도착하니 9시 45분, 3∼4명의 등산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산장에는 샘터의 시원한 물에 캔맥주를 팔기 위해 담가 놓은 것이 보인다.
모두들 마시고는 싶지만 아직도 먼거리를 걸어야 하는 부담 때문에 섣불리 사 마시기를 꺼리고 있다.
그러다보니 나의 배낭에는 언제 어디서나 내 인생의 동반자나 다름없는 참소주 한 병을 고이 간직하고 있지만, 평소 같으면 벌써 바닥이 나고 없을 참소주가 아직까지 아무도 먹으려 하지 않아서, 아마 종주가 끝나는 성삼재까지 그대로 둘러메고 다녀야 할 것 같다.
그 만큼 첫 구간인 지리산 종주는 모두가 너무 무리가 따른다고 할 정도로 멀고 힘든 구간이 아니었나 생각을 하니 문득 1994년 경주정보고등학교 등산부 학생 18명이 함께 유평리 대원사에서 출발하여 치밭목산장, 중봉을 거쳐 천왕봉을 올라갔던 추억을 회상해 본다.
지금도 전국에 걸쳐 심한 가뭄으로 기상관측이래 최고의 가뭄이라 하지만 그 당시도 가뭄이 심한 상태에서 치밭목산장에서 마지막 식수를 구해 정상을 향해 올라갔는데 날씨가 더워 치밭목산장을 떠난 지 30여분만에 물이 바닥이 났다.
남은 물이라고는 플라스틱 작은 콜라병 1통 밖에 없는 상황인데 학생 한 명이 탈진을 한 상태에서 갈수록 갈증은 심하고 탈진 현상으로 지쳐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타는 목마름을 참고 견디면서 정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어렵게 나아간 결과 힘들게 정상에 도착하여 남겨 놓은 물을 병 뚜껑으로 한 두 잔씩 나누어 마신 후 칠선계곡으로 하산 한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시원한 맥주를 한잔 마시면서 목을 축이고 싶지만 무더운 날씨 때문에 그냥 물만 한잔씩 마시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연하천 산장 뒤로는 계단길이 이어져 있었으며 한참 계속된 오르막길을 오르니 명선봉(1,586.3m)이다.
또 다시 길은 내리막이었다가 다시 긴 오르막을 오르니 토끼봉(1,533m)정상이다.
토끼봉 정상은 20년 전 겨울에 뱀사골산장에서 1박을 하고 아침 일찍 올라 일출을 본 바로 그 봉우리였기에 감회가 새로움을 느낀다.
토끼봉을 뒤로하고 내리막을 내려가니 화개재가 나왔다. 재 넘어가는 바람에게 안부를 전하고 내려왔던 고도만큼의 높이를 채우기 위해 설치해 놓은 사다리를 줄기차게 올라갔지만 엄청난 수의 계단이 놓여 있어서, 지금까지 걸어온 가운데 가장 힘드는 곳이다.
백두대간 상에는 3개의 삼도봉이 있지만 국립공원지역으로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삼도(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계가 함께 만나는 봉우리인 삼도봉은 옛날에 왔을때는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지리산의 많은 봉우리 이름 중에서 가장 천박한 느낌을 주는 명칭인 날라리봉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명칭이 바뀌어 삼도봉이라...
우리는 11시50분에 삼도봉에 도착하여 사진을 찍고 잠시 조망을 즐긴 후 임걸령을 향하여 출발한다.
중간에 반야봉(1,733.5m)이 있지만, 우회하여 바로 임걸령을 향해 가다 점심을 먹고 가자는 일행을 뒤로 한 채 최현찬 회원과 나는 먼저 내려가 성삼재에서 기다리고 있는 일행을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기 위해 계속 걸었다.
12시 30분에 임걸령에 도착하여 임걸령 샘에서 나오는 가슴까지 시리게 하는 시원한 냉수 한 컵을 마시고 휴식을 취하면서 간단히 간식을 먹었다.
이곳 임걸령은 조선 명종 때의 초적 두목 임걸년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아늑하면서도 맑은 물이 솟아 야영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임걸년에 관한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지만 이곳에 진을 치고 군사와 말을 길렀다고 하는데, 실제로 임걸령 부근에서는 마구와 활촉 등이 발견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임걸령 샘터에서 피아골 쪽 암벽 밑에는 황호랑이 막터라는 곳이 있다. 옛날 약초꾼 황장사가 겨울에 이곳에서 자다가 기발한 지용을 발휘하여 큰 호랑이를 잡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주능선 등반구간 중에서 임걸령에서 노고단까지 4km가 가장 편한 코스에 속하는데 노고단에 도착하니 13시 36분이다.
천왕봉에서 4시 45분에 출발하여 노고단에 13시 36분에 도착하였으니 주능선 산행에 소요된 시간은 8시간 51분이 걸린 셈이다.
현재 노고단 정상 일대에는 청학동 도인들이 3일간 공들여 쌓은 거대한 돌탑(케룬)이 서 있으며, 노고단(1,507m)은 일명 길상봉으로도 불리는데 이곳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 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 가을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이런 연유로 해서 선도성모의 높임말인 노고와 제사를 올리던 신단이 있던 곳이라는 뜻으로 "노고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지리산 제3경인 산허리를 휘두른 구름인 노고 운해는 지리산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경관으로 꼽힌다.
<삼국사기>에 보면 "삼산과 오악 이하의 명산 대천에 대사 중사 소사의 제사를 나누어 지냈는데... 중사를 지내는 오악은 동쪽 토함산, 남쪽 지리산, 서쪽 계룡산, 북쪽 태백산, 중앙 부악(지금의 팔공산)이었다"라고 적혀 있어 신라 때부터 지리산을 남악으로 지정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제사를 올리던 명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제시대 때에는 미국·호주 등 외국인 선교사들의 피서용 별장 52동이 있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며, 1948년 10월 여순 반란 사건이 발발한 이후, 근 한달 간 이상 김지회의 반란군들이 이곳 별장촌을 근거지로 삼았으며, 그후 국군 토벌대가 다시 들어와 점령하면서 빨치산에 의해 거점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불태워 버려, 지금은 그 옛 건물 흔적만 공허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하여 종석대 가는 길을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 보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종석대는 바로 앞에 보이지만 길을 몰라 헤매다가 코재 가는 방향으로 내려가 보지만 마침 그 길은 성삼재 가는 길로 계곡에는 다리가 놓여 있었기 때문에 백두대간은 물과 계곡을 건너지 않는다는 원칙에 너무 집착해 있다보니 우리는 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다시 노고단 대피소로 되돌아 올라오는데 다른 일행이 내려오고 있다.
일행과 함께 다시 올라가 지리산 대피소 관리인에게 물어보아도 명확한 답변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다 관리사무소 직원은 너무나 무성의 하게 답변을 함으로써 짜증이 났으며 그러는 동안에 시간은 40여분이 흘러갔다.
성삼재에 와서 기다리고 있을 출정식에 참가한 회원들을 생각하며 종석대를 향하여 정신 없이 걸어갔다.
그러나 종석대는 백두대간 주능선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다니지 않아서 표지기도 하나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
종석대(1,356m)정상을 14시 33분에 올랐다.
차일봉은 그 모양이 마치 차일을 쳐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우번대, 종석대, 관음대 등 여러 이름을 갖고 있는데 정상에 암봉이 솟아 있어 자연 전망대로서 구실도 톡톡히 하고 있다.
차일봉 남쪽 천은사 계곡 상류 깊은 곳에 상선암이란 이름난 선원이 있었다.
신라의 고승 우번조사가 젊은 시절 조용한 상선암을 찾아 10년 수도를 결심하고 혼자 수도정진 하기를 9년째 되던 어느 봄날, 절세 미인 한 사람이 암자에 나타나 요염한 자태로 우번을 유혹하였다.
여인에게 흘린 우번은 수도승이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여인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 여인은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아름다운 수림 속을 지나쳐 자꾸만 자꾸만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우번은 여인을 놓칠까 봐 산 속을 헤치며 정신없이 올라가다 보니 어느덧 차일봉 정상까지 오르게 됐다.
그런데 우번을 유혹하던 여인은 간데 없고 난데없이 관음보살이 나타나 우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우번이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해 보니 이는 필시 관음보살이 자기를 시험한 것이라 깨닫고 그 자리에 엎드려 자기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참회하니 관음보살은 간데 없고 대신 큰 바위만 우뚝 서 있었다.
자신의 수도가 크게 부족함을 깨달은 우번은 그 바위 밑에 토굴을 파고 토굴 속에서 수도하여 후일 도승이 되었다 한다.
우번 조사가 도통한 그 토굴자리를 우번대라 부르게 됐으며, 또 우번조사가 도통하던 그 순간에 신비롭고 아름다운 석종소리가 들려왔다 하여 이곳을 종석대라 부르며, 관음보살이 현신하여 서있던 자리를 관음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 후 이 곳에서는 진응도사를 비롯 요화스님, 호음선사 등 많은 도승들이 배출되어 불도의 영지로 손꼽히며 이 곳에서 수도하여 도통성불하게 될 때는 신비롭고 은은한 석종소리가 들린다고 하는 전설 때문에 많은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다.
계속해서 경사진 숲속 내리막길을 조금이라도 빨리 내려와, 성삼재에서 기다리고 있는 회원들을 만날 생각으로 뛰다시피 하여 내려서니 14시 55분이다.
길가에서 회원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1982년 겨울과 1991년 여름 두 번에 걸쳐 종주를 해 보았지만 이번처럼 강행군을 한 적은 처음이었다.
6월 3일 1시 15분 중산리 매표소를 출발하여 성삼재에 14시 55분에 도착하였으니 총 소요된 시간은 13시간 40분이었다.
성삼재에 도착하니, 출정식에 참가한 산행 대장님을 비롯하여 여러 회원들이 열렬한 환영을 하였고, 미리 준비한 맥주를 한잔 마시고 나니 일행들이 계속 도착하였다.
다음 구간 출발점을 확인 한 후 후미가 도착하자 성삼재를 출발하여 계곡에 내려와 준비한 음식을 먹으면서 이틀 간의 쌓였던 피로와 회포를 풀고 18시경 지리산을 출발하여 21시경 경주에 도착, 회장님 가게에 가서 소주 한잔 더 하고 모두 헤어졌다.
가장 힘든 구간을 무사히 마친데 대해 우성열 회장님, 정해전 산행 대장님, 손운락 사무국장님, 박일환 총무님, 고성안 사업이사님, 운전을 하시느라 수고하신 최선웅 부회장님, 손정락 회원님, 황이순 회원님, 그리고 경주일요산악회 여러 회원들의 노고에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종주자 및 출정식에 참여한 여러분들도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백두대간 종주 열기가 날로 더해 가는 가운데 많은 산악회와 산악인들이 종주에 참가하고 있지만, 우리 산악회도 "경주일요산악회 백두대간 종주대"로서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지고 종주에 임함으로써 이번 1구간 종주는 많은 산꾼들에게 우리 산악회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다른 지역 산악인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고 자부합니다.
발대식과 출정식 및 함께 산행을 해 주신 모든 경주일요산악회 회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