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적도의 주민 입주
-삼국시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당나라의 소정방이 덕적도를 겨쳐갔다는 기록이 있다.
덕적도는 신라가 중국과의 교류시 해상교통로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이때 사람이 살았다는 기록은 없으나 소정방의 군대가 장기간 머물었다는 사실을 보아
사람이 살고 있었으리라 추정하고 있으며 소야도에는 소정방과 관련된 유적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
-통일 신라, 고려말까지-
문헌에서는 이시대 덕적도에 관한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어 고증이 어렵다.
대체로 이 시대에는 왜구의 침입이 잦아 주민들이 살기 어려워 오히려 육지로 옮겨 살게 되었고
섬에는 해적들이 살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진2리(이개)가 倭浦 (왜개-왜포)로 불리어왔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 해준다.
-조선시대, 이후-
고려말에서 조선초기까지 왜구로 인해 도서 지방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고 군마를 키우는 목장만 있었다고 하는데 덕적은 산세가 험하여 목장은 없고 주변 이작, 승봉 ,영흥 등에 있었다.
그 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피하여 많은사람들이 섬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이에 따라 나라에서도 주민을 다스리고 국방을 튼튼히 하고자 덕적도에 진을 두고
첨사를 배치하게 되었으며 덕적도는 서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진리 라는 마을 이름은 이때 유래한 것이다
덕적도 주민들의 조상들은 대부분 경기도와 충청도, 해안을 따라 입도한 전라도인들이다.
한국전쟁 이후 이북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란을 와서 인구가 많이 늘었다가 근래에 줄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김광현저 덕적도사(1985.9.15.발행)
출처: 큰물섬 초등학교 총동문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임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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