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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가장(家長)으로 모신 공동체(1)
예수가정은 중국 공산당 치하에서도 복음을 중국 전역에 널리 전했던 기독교 공동체이다. 예수가정을 알려면 1950년 이전 공산당 치하에서 일어났던 예수가정의 놀라운 이야기를 먼저 알아야 한다. 중국의 예수가정(耶蘇家廷, Jesus Family)은 1921년 중국 샨뚱썽(山東省) 타이안 셴(泰安縣) 마쭈앙(馬莊)이란 시골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한 가정의 변화로 시작된 공동체 교회
초창기 지도자였던 찡 띠엔잉(敬奠瀛, 1890~1949) 형제는 전통적 유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감리교 계통의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는 예수를 만나 진심으로 회심한 후 그 증거로 사랑하지 않아 이혼했던 아내를 다시 데려와 살았으며, 이때 그들은 성령의 충만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들 부부는 성경에 나오는 대로 전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가 주님께 바쳤던 대지 위에 예배당과 농장을 세웠는데 이 교회가 예수가정 운동의 중심부 역할을 하는 교회가 되었다. 찡 띠엔잉과 함께 쩌우 씬민(周新民) 형제, 뚱(董) 행신 형제, 천 삐시(陳碧璽) 자매, 짜우(趙) 헬렌 자매 등 10여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예수가정 공동체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쫏으라”(마
뚱 행신 형제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형제로서 한때 군악대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그 후 카이펙에 있는 침례교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하던 중 찡(敬) 형제를 만나 예수가정에 헌신하게 되었으며 중국복음화 일생을 바쳤다. 그는 성령충만을 체험하고 난 뒤 삶이 변화되었으며 예수가정의 고유한 찬송가를 약 천여 곡이나 작곡하여 예수가정을 천국의 찬양이 넘치는 공동체로 이끄는 데 기여하였다.
두 명의 여성 지도자를 보내주시다
예수가정에는 천 삐시, 짜우 헬렌이라는 두 명의 훌륭한 여성 지도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을 때 둘 다 북경조산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천 삐시 자매는 산부인과 박사였고 짜우 헬렌 자매는 그 학교의 강사였다. 그녀는 부유한 한코우 가문 출신으로 2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 영어로 수업하는 홍콩 의대를 졸업하고 영국에서 산부인과 대학원으로 유학하려 했으나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예수가정을 통한 복음전파에 헌신했다. 그녀의 의학 경력은 짜우 헬렌 자매와 중국 각지에서 행했던 여성복음화의 기반이 되었다.
만주제국의 관료집안 출신의 짜우 헬렌 자매는 북경의 장로교 계통의 여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기독교에 접하게 되었다. 어느 날 북경의 작은 선교회 모임에 천 삐시 자매와 참가하던 가운데 모두 회심의 경험을 하였으며 성령세례를 받았다.
이러한 성령체험으로 인해 조산학교에 부흥의 불길이 번져 나갔으며 나아가 중국의 젊은 여성들은 몽골에서 병을 고치며 복음을 전하기 위한 단체를 조직하였다. 두 자매가 예수가정의 지도자 찡 형제와 뚱 형제를 만난 것은 몽고에서였다. 그때 찡 형제 일행은 복음전파를 위해 서북부지방을 여행하던 중이었다. 이들을 만난 후 젊은 자매들은 둘로 나뉘어 반은 찡 형제와 함께 여행하였고, 반은 남아서 내몽고에서 사역을 계속하였다. 천 삐시 자매는 그녀의 의술로 예수가정 식구들을 돌보았으며 탁월한 영어 실력으로 많은 경건서적과 찬송가들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짜우 헬렌 자매는 그녀의 경영 능력과 열정으로 예수가정 모든 부문에 영향을 끼쳤다.
유무상통을 실현화 한 공동체 마을
예수가정의 찡 형제는 증조부의 땅 3,600여 평을 예수가정 공동체의 부지로 내놓았다. 그 땅이 대를 이어 오면서 56,000평으로 늘어나 거기서 예수가정 가족들 500여 명이 공동체로 살고 있었다. 공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위 마을에 살면서 예수가정 교회에 다니는 일반 교인들도 500여 명이 있었다. 마쭈앙은 숲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는 깊은 시골 마을인데 거기에 공동체가 자리잡고 있었다. 약 1,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은 공동 식당 및 공동 작업실로도 쓰였다.
찡 띠엔잉 형제의 헌신된 삶과 그의 전도를 통하여 뚱 행신, 쩌우 씬민, 천 삐시, 짜우 헬렌 자매 등은 마쭈앙에서 함께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 후 이들의 신실한 삶에 이끌린 많은 사람들이 마쭈앙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예수가정은 약 5만평의 대지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사도행전 2장과 4장의 삶을 실천하고자 모든 재산을 공동 소유하여 한 가족으로 살았다. 예수님을 가장(家長)으로 하여 예수님의 명령을 이루기 위해 예수 새가족으로 함께 사는 것이 예수가정의 목적이었다.
농업은 그들의 모든 생활의 근본이었다. 그들은 뛰어난 근면성으로 식량과 경제문제를 자급자족하였으며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또한 노동을 하나님이 맡기신 신성한 위탁으로 여겨 모든 공동체 식구들이 각종 노동에 참여했다. 예수가정의 노동은 논농사, 밭농사와 함께 가축부, 목공부, 제화부, 제과부, 대장간, 기계공작부, 전기류, 석공부, 유치부, 학교, 섭외부, 재정부, 인쇄부 및 제본소 등의 작업 분야로 구성되어 있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노동은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였다. “기도는 노동이요, 노동은 기도다”라는 6세기 성 베네딕트의 말이 그대로 실천되는 곳이었다.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 공동체 중앙에 위치해 있는 예수가정의 예배당(천여 명 수용도 가능)은 모든 일의 중심지였다. 그들의 일과는
예수가정의 일상생활과 작업은 찬송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들은 일하면서 늘 찬양을 하였다. 이러한 찬양은 작업을 매우 유쾌하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작업 자체가 예배의 시간이 되게 해주었다. 예수가정에서는 방대한 찬양과 기도가 계속 흘러 넘쳐 나왔으며, 대개는 자신들이 직접 작곡한 매우 아름다운 곡들이 실린 자체 찬송가를 가지고 있었다. 필자도 현재의 예수가정을 방문했을 때 그 당시 만들었던 찬송가책(600여 곡 수록)을 보았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음악은 천상의 언어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항상 마음 깊은 곳에서 찬송이 흘러 나지요. 그런데 어떻게 찬송을 안할 수 있겠습니까?”
식사시간은 아주 즐거운 시간이다. 식사시간은 교제의 시간이며 타지의 예수가정에서 소식과 그들의 겪고 있는 시련과 핍박에 대해 듣는 자리였다. 식사시간은 또한 지역발전을 평가하는 자리였다. 식사 후 저녁시간은 때때로 간증의 밤으로 열렸다. 성령의 인도로 여러 명이 계속 이어지면 어떤 경우에는
자녀양육은 성경에 충실한 가정교육으로
이 공동체의 어린이들은 공산당에게 간증 그 자체였다. 가장 포악한 공산당원이라도 아이들의 생활을 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마음이 풀어졌다고 한다. 공산당원은 예수가정의 아이들 옷은 늘 깨끗하고 예쁜 데 놀랐다고 한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의 옷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예수가정에 처음 방문하는 공산당원들은 어린이들을 보고자 요청했는데, 그들은 옛 가정의 주거시설, 지능, 부모들의 지혜, 식탁 위에 놓인 음식, 예의범절, 식기도, 아이들의 예쁜 옷 등을 보고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아이들 교육에 있어 그들을 위한 장난감과 게임, 오락은 거의 없었으나, 오히려 아이들은 마당을 청소하거나 옥수수 껍질을 벗긴다든지 양모에 빗질을 하는 등 소소한 노동을 하면서 놀았다. 아이들에겐 일이 곧 놀이였고 오락이었다. 아이들은 전혀 구김살 없이 밝았으며 규율이 잡혀있었다. 또한 예수가정의 아이들은 늘 찬양을 흥얼거렸고 흥이 넘치면 타작마당에서 즉흥적인 춤을 추기도 하면서 기쁨에 넘쳐 있었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바쳐졌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교육의 첫번째 가는 목표였다.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어 보면 “예수님이 머무실 가정을 이루어서 그 가정의 가장(家長)이 될래요” “복음 전도자가 되어 예수님을 전파할 거예요” 등 세계 곳곳에서 예수님을 전하는 일을 생의 목적으로 삼았다. 이렇듯 예수가정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바라보고 사는 곳이었다.
영적인 공동 지도력을 세워가는 곳
공산화 이전의 예수가정에는 다섯 명의 영적 지도자들이 있었다. 찡 띠엔잉, 퉁 행신, 쩌우 씬민, 천 삐시, 쵸 헬렌 등이었다. 예수가정의 가장(家長)은 찡 띠엔잉이었으나 제반사는 공동 지도력으로 운영되었다. 예수가정에서 즐겨 부르는 한 찬송가는 예수가정의 지도력이 어떻게 행사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랑은 예수가정을 다스리는 원리, 사랑은 천상의 개념,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한 가족, 성령 안에서 한 형제 되었네, 지도력은 미약하나 그리스도 몸의 생명력은 강대하다네….”
회원은 농민, 교육자, 의사, 기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었다. 대학 졸업자도 많았다. 유명한 한 변호사는 예수가정의 회원이 되어 거름통을 들고 일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은 큰 문제가 생기면 여러 날을 금식하면서 물도 마시지 않고 금식하곤 했다. 예수가정은 초대교회 공동체가 지녔던 능력을 동일하게 소유하기 위하여 기꺼이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자 하였다. 매주 금요일 저녁은 지도자 모임으로 열렸는데 늘 회개와 자백의 영이 역사하였다. 지도자들은 서로 자신의 과실을 고백하였다. 피차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으로 자백하는 것이었다.
지역마을과 공산당도 감동한 공동체
예수가정 공동체는 인근 지역마을 주민을 향상시키는 빛과 소금이었으며 강력하게 선을 행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단체였다. 예수가정은 인근 주민들을 섬기는 다양한 복지사업과 의료사업 및 소비조합을 운영하였다. 예수가정의 훌륭한 삶을 배우고자 먼 지방에서 예수가정을 방문한 사람들이 많았다. 예수가정은 이들에게 조산학, 공중보건, 건축술, 양봉, 원예, 설탕 제조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마을에 야학을 개설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소매상 협회를 조직하여 일반 대중과의 매매관계를 원활하게 해주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식당을 운영하였다. 공산당 치하에서도 부패가 만연되었지만, 예수가정의 정착지 주변에는 언제나 도로시설의 확충 및 교량보수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축산, 영농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져 농축산 생산이 향상되었으며 향학열과 기업정신도 왕성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예수가정의 성실한 대민 봉사로 인해 공산당 당국자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이것은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실례였다. 공산당 간부들도 이곳에 배우러 찾아왔다.
1940년대 쟝 제스(將介石)의 국민 정부군과 마오 쩌뚱(毛澤東)의 공산당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였다. 한 국부군 병사가 예수가정 사람들에게 자신을 하루 재워 달라고 애원해서 예수가정에서 재워 준 것이 드러나 그 가정의 가장은 사형을 받게 되었고, 요식적인 재판 절차를 위해 판사가 왔다.
재판 한 시간 전에 국부군을 재워 주었던 가장 집에 주인 모르는 닭이 들어와서 알을 낳았다. 그 가장은 닭을 붙잡아 다리에 계란 값을 지불한다는 메모와 함께 돈을 넣어 다리에 싸매어 밭에 놓아 보냈다. 한 시간 후 닭 주인과 판사가 찾아왔다. 그 가장이 계란 값을 지불한 것을 알게 된 그 판사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정직할 수가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 가장은 “예수를 믿으면 그렇게 된다”고 증거하였다. 그 판사는 “나는 이전에 이렇게 정직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에 감동을 받은 나머지 다음날 사형재판을 취소해 버렸다고 한다. 예수가정은 공산당에게도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예수가정은 정직과 진실이 생명이었으며 그것이 통하는 사회였다. 산상수훈이 그대로 지켜지는 공동체였다.
예수가정은 의료사업으로 유명하였다. 천 삐시, 쪼 헬렌 같은 여의사들의 헌신으로 예수가정의 의료사업은 인근지역에서 유명하였다. 예수가정의 전문적인 의료사역과 성령의 능력은 수많은 환자들을 고쳐주었다. 1949년 여름에 마쭈앙 전역에 유행성 홍역이 창궐하여 사망률이 80퍼센트에 달했다. 그러나 예수가정의 유아 사망률은 단지 3퍼센트였다. 3퍼센트의 낮은 사망률은 공산당에게는 놀랄 만한 일이었다. 이 일에 감명 받아 공산당원 수백 명이 몰려와 수많은 질문을 퍼부었다. 예수가정의 간호원은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한다. “만일 아이들이 주 예수님을 그들 마음에 모신다면 그렇게 됩니다.”
찡 형제는 “예수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공산주의자들에게 기독교가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 같습니다.” 공산주의 이론은 강압과 압제에 의해 실행되었으나 이보다 더 월등한 예수가정의 사랑을 통해 실천되었다. 예수가정은 공산당에게 충성된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광활한 중국땅을 헤집는 전도여행
예수가정의 중요사역은 전도였다. 예수가정 운동의 태동기는 1920년대였지만 1930년대에 이르러 대외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1930년대 초, 찡 형제와 그의 동료들은 중국 북부 전역에 걸쳐 전도여행 사역을 펼쳐 나갔다. 예수가정 전도대들은 주로 농촌에서 전도하였으며 3~4명이 한 팀을 이루어 전도여행을 떠났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삶의 변화를 주어 가는 곳마다 새로운 예수가정 공동체를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여행을 떠날 때는 언제나 돈이나 의류 등을 일체 소유하지 않았다. 성경에서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막
1949년 봄에 중국 선교사였던 로믹(T. F. Romig) 목사는 남경의 남쪽 어느 시골 마을을 방문했는데, 그 마을은 수십 년 동안 한번도 기독교의 발이 닿지 않았던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 사는 여덟 가정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들 가정으로 구성된 작은 공동체는 바로 예수가정 전도대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알고 매우 놀랐다고 하였다. 그들은 새벽에 일어나 1시간 정도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면서 하루를 시작하였다. 예수가정 식구들은 로믹 선교사를 외국인 선교사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영접해 주었다고 보고하였다.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의 중국 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현재의 OMF)는 예수가정의 선교사역에 큰 영향을 준 모체였다. 1950년 당시 예수가정의 수는 전국에 약 123개의 작은 공동체들이 있었고 회원 수는 약 15,000명 정도로 발전하였다. 예수가정은 중국 서쪽 변방인 신강 위루르 지역, 서장 지역, 그리고 북쪽으로는 몽골과 센양 쪽에 50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복음을 모르는 중국 땅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피와 땀과 눈물의 대가를 치렀던 것이다.
1949년 중국 공산화 직후, 중화 인민공화국 정부는 중국 전역에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던 예수가정을 그냥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판단하여, 일차적으로 예수가정 해체 작업에 손을 대었다. 먼저 지도자인 찡 띠엔잉 형제를 구속하여 가장 악랄한 죄목을 만들었다. 인민의 노동력 착취, 토지 수탈 등 여러 죄목이었다. 그래도 예수가정이 와해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부책임자 뚱 행신 형제를 고문하여 그의 사상을 개조시키려 했는데 그 와중에 뚱 형제도 죽었다. 그 후 예수가정 본부 마쭈앙은 폐쇄되고 예수가정은 박해를 받아 강제로 해체되는 위기를 겪게 되었다.
예수님을 가장(家長)으로 모신 공동체(2)
예수가정 이야기는 영국인 의료 선교사였던 보언 리즈(D. Vaughan Lees)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중국의 예수가정」 도서출판 무실: 1992). 예수가정은 1950년대 초 공산당의 심한 박해를 받고 해체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강력한 영향을 끼친 예수가정은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현재에도 예수가정이 건재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필자는 어렵사리 예수가정 식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현재의 예수가정 본부는 원래 위치해 있던 마쭈앙에서 이주하여 산동성 내의 한 시골지역에서 계속 사역을 펼치고 있다. 예수가정이 해체된 후 그들은 개인적으로 생활하면서 은밀한 모임을 계속 해갔다. 해체 후 비록 그 외형적인 모습은 바뀌었으나 일단의 예수가정 멤버들에 의해 지금도 계속 그 사역이 계속 활발히 유지되고 있다.
애덕의원 사역 공동체로 이어지다
현재의 예수가정 사역은 짜우 삥창(
애덕의원 입구에는 큰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다. “구사부상 영신익인”(救死扶傷榮神益人)” 즉 “죽은 자를 구해 내고 상한 자는 일으켜주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람을 이롭게 한다.” 이것은 병원이 기독교 정신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병원은 환자에게 치료하기 전에 의사들이 치유를 위한 기도를 하는데, 치료받기보다는 기도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고자 오는 환자가 더 많다고 한다. 실제로 병 고침의 역사도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러한 소문으로 더 많은 환자가 병원에 몰리고 있다. 가난한 시골지역인지라 보통 때는 치료비의 절반 값을 받다가 돈이 없는 환자의 경우에는 아주 무료로 치료해 준다. 이럴 경우, 의사들은 자신의 월급(약 500웬 수준)으로 치료비와 약값을 충당하게 되어 보통 200웬 대의 노동자 수준으로 살고 있다.
이 병원에는 8명의 전문의 외에도 수련의들이 25명이나 일하고 있다. 예수가정 사역에 감동 받은 젊은 인재들이 형편없는 시골 병원에 와서 동역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를 안내했던 정부 관리들도 열악한 시설에도 귀한 일 하는 병원을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의료기계에 도움 주실 분은 전화 2611-8177로 문의). 병원은 현 전체에서 환자가 많이 몰리는 데 비해 의료시설이 매우 부족하다. 특히 필요한 것은 안과 현미경과 위 내시경이다. 그 동안 공산주의 통치 아래서 받은 압박으로 인구의 80퍼센트가 위장병 환자라고 한다. 이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위 내시경(內視鏡) 기계가 매우 필요한 실정이지만 현재로서는 엄두도 못 낼 형편이다.
이러한 헌신적인 진료로 애덕의원은 공산당 간부들에게도 칭찬을 받는 병원이 되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병원에 십자가를 달 수 없지만 유일하게 십자가를 단 기독교 병원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짜우 원장은 이 병원사역의 목적은 치료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며, 예수가정 사역을 보존해 나가기 위한 방편이라고도 했다. 현재 예수가정은 공산당이 공동생활 형태를 법으로 금지하기 때문에 공동체로 살지는 않는다. 그래서 짜우 원장은 가족 전체가 의사 공동체를 이루어 병원을 통해 예수가정 공동체를 유지하며 복음전파 사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짜우 원장은 예수가정을 이끌기 위해 의사로서 일해 왔는데 교회가 커지면서 공식적인 지위에서 보다 원활한 사역을 위해 산동신학교를 졸업하고 지난 ’95년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의사들로 구성된 대가족 공동체
필자가 예수가정 본부격인 짜우 원장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8시경이었다. 애덕의원 원장 겸 예수가정교회 목사인 그의 집은 매우 초라했다. 하루종일 여행한 터라 저녁식사로 나온 산동성 만두와 나물국을 맛있게 먹었다. 현재 공동체를 어떻게 이루고 있느냐는 질문에, 어느 집사님은 “만두는 목사님 댁에서 나온 것이고 나물국은 우리 집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이것이 공동체가 아닙니까?”라고 말하면서, 30~50년대의 공동생활 형태로 살지는 못하지만 이 마을에 함께 모여 살면서 자연스럽게 자발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짜우 원장은 어머니와 동생들 자녀들로 구성된 대가족으로 살고 있다. 그 어머니는 초대 예수가정의 회원이었다. 짜우 원장은 그의 동생과 제수, 여동생과 매제, 아들과 며느리, 손자 손녀들 3대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현대 중국에서 이렇게 3대로 대가족 공동체를 이룬 의사 가족은 짜우 원장 가족밖에 없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도무지 의사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매우 검소하고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고 실력 있는 의사 집안 사람들이 누추한 곳에서 불편하게 사는 이유는, 비록 한 가족 공동체에 지나지 않지만, 심한 박해로 해체되어 버렸던 초대 예수가정의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데 있었다.
신앙과 삶이 예수 마을로 전염되다
현재 예수가정 본부는 애덕의원이 있는 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은 100여 호가 사는 작은 농촌마을이며, 그중 80여 호가 예수가정교회 교인들이다. 이 마을 중심부 낮은 언덕 위에 2년 전 신축한 예수가정교회가 세워져 있다. 예배당 신축 이전에는 짜우 원장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조그마한 마을에 있는 예배당을 방문했을 때 필자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금빛 찬란한 현관 입구가 있는 훌륭한 대예배당(약 500명 수용)이 있었고 거기에 400여 명이나 모여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다. 다른 마을에서도 교인들이 오기 때문이다.
대개 중국 사람의 대문에는 입춘대길(立春大吉) 같은 복을 비는 문구을 붙이는데, 이 동네의 교인들 집에는 ‘팔복전임문’(八福專臨門, 팔복이 전적으로 우리 집 문에 임한다). ‘영신익인’(榮神益人,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을 이롭게 한다) ‘주애무한’(主愛無限, 주님의 사랑은 한이 없으시다) ‘찬미음시천신수(贊美吟詩遷新壽, 시와 찬미를 드리면 더욱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와 같은 문구들이 대문에 줄줄이 붙어 있다. 동네 전체가 예수가정의 영향력 아래 있는 예수 마을이었다. 교인들의 이름에도 신은(神恩, 하나님의 은혜), 복음(福音) 같은 믿음의 이름을 지어 부른다.
지난 ’85년 애덕의원을 통한 예수가정 사역이 재개된 후 예수가정의 영향력은 계속 퍼져나가 현재 중국 북부에 42개의 지부 예수가정 교회가 있다. 매년 1월에는 한 달 동안 성경학습반을 운영하여 100여 명 지도자를 공동생활 가운데 집중 훈련시키고 있다. 이미 1만여 명의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훈련을 받았고 신청자가 넘친다고 한다. 이 현에는 기독교인들이 1만여 명이 되는데 현재 예수가정의 지도자인 짜우 원장이 총책임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한 가정교회 지도자는 “예수가정은 현의 일반인들에게도 영적 지도자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예수가정은 현 전체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다. 비록 예전처럼 공동체로 함께 모여 살지는 못하지만 애덕의원을 통한 헌신적인 치료사역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고결한 신앙은 박해 이후에도 병원사역과 교회사역을 통해 면면이 이어지고 있었다.
날마다 예수께 밀착된 영성과 헌신이 있다
주일 예배는 오전 8시 30분에 시작하여 3시간 동안 진행된다. 예배당 전면에 ‘기독예수 강세위요 극구죄인’(基督耶蘇 降世爲要 極救罪人, 그리스도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죄인을 구하셨다)이라는 큰 글씨와 ‘임마누엘’(以馬內利)이란 글씨도 보였다. 교인들은 시골인데도 남녀 각각 200여 명씩 동등한 비율로 참석하였다. 10여 분씩 되는 긴 찬송을 거의 암송하여 부르는 데 놀랐다. 비록 느릿느릿 진행되는 전통적 중국식 토착 찬양이었으나 진실된 믿음으로 부르는 찬송이 가득한 예배였다. 이들은 3시간 이상 진지하게 예배를 드린다.
예수가정교회는 매일 새벽기도회(오전 4:30~6:00)를 드린다. 새벽기도회는 이 마을에 있는 교인들 약 50여 명이 참석하는데 남자 청년, 처녀, 중년, 노인 등 골고루 참석한다. 한 시간 정도 이들은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한다. 이들의 찬송은 장중하며 비장한 게 특징인데,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주님 가신 길을 그대로 가겠다는 결사적인 심정이 표현되어 있다. 이들의 기도는 단순히 능력을 구하거나 무엇을 달라는 기복적인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깊은 흐느낌과 감격이 계속 터져 나오는 간절한 기도였다. 더욱 주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영성의 기도였다.
새벽기도회를 마칠 때에는 모두 일어서서 마지막 찬송을 불렀다. 이 때 부르는 찬송은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왕노릇하리라’는 내용이 실린, 비장한 신앙각오가 엿보이는 장중한 찬송이었다. 오랫동안 박해를 받으면서 지켜 온 신앙인지라 주님과 밀착된 삶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고난은 우리를 더욱 주께로 가까이 이끈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을 체험한 감격과 주님을 위해 기꺼이 고난의 길을 가겠다는 각오가 서려 있는 비장한 찬송, 생명력이 넘치는 심령의 기도는, 마치 초대교회의 예배 가운데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 예수가정은 매일 저녁에도(7:30~8:30) 기도회를 가진다. 그만큼 예수가정 사람들은 매일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 이들은 예수께 가까운 사람들이다.
예수가정은 진정 ‘예수님이 가장(家長)인 공동체’이다. 1920년대 시작된 이후 1950년까지 공산당 치하에서 참혹한 박해를 받았지만 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 조용한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오로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죽고자 하는 헌신된 삶에서 오는 것이다. 초창기에 공동체를 통한 복음의 철저한 실천이 오늘날까지 그 후예들이 본받고 따를 수 있도록 깊은 영향력을 주고 있다. 예수가정 공동체 사람들은 모두 눈동자가 맑은 사람들이었다. 핍박과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찌든 사람들 같지 않게 해맑은 표정과 건강한 모습이었다. 천상(天上)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누가 이들을 보고 공산당 치하에서 지독한 핍박과 수모를 거친 사람들이라고 하겠는가? 이 모든 것은 헌신된 몸 가운데 계시는 주님의 임재로부터 온 것이다.
1920년대에 예수가정이 시작될 때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는 말씀은 예수가정의 정신을 나타내 주는 중심 말씀이었다. 예수가정은 이러한 말씀을 붙잡고 지금까지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 살아왔다고 한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버리고, 자기에 대해 죽고, 고난을 달게 받으라”는 예수가정의 가장 중요한 정신이라고 한다. 이 정신 있기에 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들도 예수가정의 낮은 자리에서 계속 헌신하고 있다.
토착화 선교와 공동체 선교의 성공적인 모델
예수가정 공동체는 중국 전체에 가정교회가 확산되도록 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공산화 이전에 일어났던 많은 기독교 단체들과 운동들이 사라졌지만 예수가정 공동체는 아직도 건재하며 계속 그 영향력이 지속되고 있다. 그것은 주를 위해 고난을 달게 받기까지 주님을 사랑하며 지체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오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미약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의 능력은 지대합니다.” 중국에서 일어난 수많은 기독교 운동과는 달리 예수가정 운동의 특징은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의 틀을 확고히 가지고 있다. 예수가정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30여 가정이 한 단위가 되어, 집의 구조나 생활형태는 바꾸지 않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그들의 신실한 삶을 통해 증거사역을 해나간다.
예수가정은 소위 ‘공동체 선교’(community mission)의 귀중한 모델이다. 60여 년 전 1940년대에 예수가정은 신장 위구르, 서장, 몽골, 심양 등 변방지역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는데, 각 팀은 6~7가정이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가 되어 선교하였다. 이 팀들은 아직도 그곳에서 뿌리를 내려 평생 헌신하면서 교회를 세워 훌륭하게 사역하고 있다. 대부분의 현대선교가 개인 단위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는 원심력적 선교 차원에만 치중하는 경향이다. 21세기 선교는 선교사가 공동체 삶의 훈련을 받고 작은 소그룹 단위의 공동체로 파송되어 현지에서 신실한 공동체 삶을 통하여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끌어들이는 ‘구심력적 선교’(centripetal mission)가 되어야 한다. 예수가정은 동양에서도 이러한 구심력적 선교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소중한 모델이다.
예수가정은 중국에서 생겨난 자생적이고 토착적인 초교파 공동체이다. 중국 공산화 당시 중국 교회들은 외국 선교회와 절교하는 일이 많았지만, 예수가정의 경우 외국 선교회와 아무 관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적, 인종을 초월하여 외국 선교사들을 돕고 그리스도의 형제애를 실천해 나갔다. 예수가정은 성경에 기반을 둔 자신들의 생활양식이 순수 중국식임을 자부했으며, 그것이 중국적 기독교라고 여겼다. 그들은 생활 속에서 기독교 정신을 강화하는 사역에 강조점을 두었다.
쪼 목사라는 분은 장로교 목사로서 예수가정 회원이 되었다. 감리교 선교사로 중국에 왔던 딜렌벡(Miss. N. Dillenbeck) 선교사는 1936년 예수가정의 삶에 감동을 받고 예수가정 공동체의 회원이 되었다. 그녀는 미국에 있는 자신의 파송교회와 교인들에게 예수가정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기독교 공동체라고 알렸다. 그녀의 무덤은 아직도 예수가정의 이전 본부 마쭈앙에 있다.
필자와 함께 예수가정을 방문했던 한국의 예수원 설립자 대천덕(R. A. Torrey III) 신부는 “중국의 예수가정은 예수원의 중요한 모델”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미국의 베다니 공동체(Bethany Fellowship)와 함께 자신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 공동체가 예수가정 공동체였다고 하였다. 중국의 예수가정 본부는 대천덕 신부의 고향 성 지난(濟南)에서 약 3시간 거리에 있다. 대 신부는 중국 선교사의 아들로 그곳에서 태어나 생활하였고 한국에 최초로 예수가정을 책으로 소개하였으나, 한번도 예수가정에 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지난 10월, 80세가 넘은 나이로 금세기 마지막에 필자의 안내로 아내 제인(Jane Torrey)과 예수가정을 방문한 대 신부는, “내 평생 가장 감격스러운 공동체 방문이었다”고 기뻐하였다. 그는 “예수가정은 기독교 토착화와 공동체 삶에 대한 실제적인 모형을 제공해 줍니다. 예수가정은 오늘날 존재하는 공동체 중 가장 성공한 기독교 공동체일 뿐 아니라 세계 기독교 토착화 운동의 가장 훌륭한 모형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초대교회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된다
중국 기독교인들은 ‘만약 기독교가 땅 끝까지 전파된다면 그 일은 중국 땅에서 재출발하게 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또한 모슬렘 선교는 중국을 통하여 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라고 한다. 그것은 중국이 거대한 인구와 온갖 다양한 민족과 언어, 종교,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산당 치하의 모진 박해 속에서도 국내외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끼친 예수가정은, 중국에 선교하고자 하는 선교사들과 단체들이 연구해야 할 좋은 대상이다. 공산당 박해 속에서도 성령충만한 삶, 많은 병자들을 고친 기적, 유무상통하는 공동체생활, 중국 전역을 누빈 활발한 전도, 지역사회를 위한 사회봉사, 성령 안에서 토착적이고 자생적인 기독교회의 설립. 이 모든 것은 바로 초대교회의 증거가 아닌가?
이들은 성경 말씀을 순수하게 믿고 그대로 실천한다. 그리고 그 역사가 나타난다. 최근 중국 선교사 한 분은 “선교지에서 예수가정 운동이 중국 전역에 확산되어 있음을 보았다”라고 하였다. 필자는 칭따오(靑島)에서도 1940년대에 예수가정 본부에서 살았던 가족들이 아직도 사역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1940년대 당시 중국 전역에 퍼져 있었던 127개의 예수가정 지부 공동체들은 1949년 공산당 집권 후 핍박을 받으면서 점차 흩어졌고, 1966년에서 1976년 사이 일어났던 문화혁명시 거의 폐쇄되었다. 그러나 1976년 이후에도 소수의 헌신된 예수가정 회원들은 모임을 계속해 나갔으며 전성기 때에 127개에 달했던 지부 공동체들은 현재 약 2배로 불어나 중국전역에서 활발히 사역하고 있다. 작지만 큰 파장을 일으킨 예수가정 공동체의 여진(餘震)은 아직도 중국 전역 조용히 흔들고 있다.
참된 생활공동체에서 선교와 헌신이 태동된다
예수가정의 초기 지도자였던 찡 띠엔잉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필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더 깊은 죽음입니다. 오 하나님! 우리 안에 갈보리의 거룩한 뜻이 나타나게 하소서. 내가 택할 것은 능력이 아니라 더 심오한 죽음입니다. 갈보리의 능력이 내 속에서 역사하기를 더욱 바랄 뿐입니다.” 예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죽고자 하는 순종과 헌신의 영성. 이것이 예수가정의 영성이며,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비결이었다.
필자가 떠날 때 짜우 원장은 자신의 집에서 자장면을 대접해 주었다. 샨뚱썽(山東省)은 한국인들이 즐겨 먹는 자장면의 원조이다. 덕분에 원조 자장면을 맛보면서 의사들의 대가족 공동체와 함께 원초적인 복음을 맛보는 감동적 교제를 누릴 수 있었다. 그것은 초대 예수가정 공동체 생활의 전형이었다. 짜우 원장은 “앞으로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면 원래의 공동체 형태를 복원할 것입니다”라고 다짐하였다. 예수가정 공동체와 같은 운동과 초대교회의 성령의 역사가 중국 전역과 한국교회에도 더욱 불일듯 일어나도록 기도하자!
계명대학교 영문과와 총신대 신학대학원(M. Div., Th. M.)을 졸업하고 화란 우트레흐트대학(Utrecht Univer- sity Ph. D. cand.)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공동체 코이노니아 하우스 대표이며 광명 사귐의교회를 섬기고 있다.
- 실린 곳: 목회와 신학 1999년 11월 / 목회와 신학 1999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