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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원광대 조용헌 교수가 전국의 명문가를 직접 돌며
그들의 육성을 채록한 명문가 이야기.
그들 명문가의 역사와 자녀 교육법, 치부법과 더불어
명문가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풍수 비기까지
우리나라 명문가 15곳 중에 남평 문씨 세거지를
발취한 것입니다.
2만 권 고서 수장한 한국 최고의 민간 아카데미
운명을 바꾸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적선(積善)을 많이 하거나 선(禪)을 하거나, 명당에 묘를 쓰거나, 독서를 맣이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독서를 많이 하는 방법이다.
독서를 많이 하면 나쁜 팔자를 좋은 팔자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우리 선조들의 믿음이었다. 불가나 도가보다도 상대적으로 유가에서 독서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유교 선비는 책을 좋아한다. 아울러 독서인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한국의 지적 전통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가장 많은 책을 갖도 있는 집안으로 어디를 꼽을 수 있을까. 경북 대구에 고서를 많이 갖고 있다고 알려진 집안이 하나 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인흥리에 있는 남평 문씨 집안이다. 인흥리에 세거하는 남평 문씨들은 ‘인수문고(仁壽文庫)’라고 하는 특별한 문고를 가지고 있다. 인수문고는 문씨 집안 공동의 문고를 일컫는데, 이러한 형태의 문고를 통상 문중(門中)문고라고 한다.
현대적 의미의 도서관이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 나라에는 전통적으로 네 가지 유형의 도서관이 있었다. 첫째는 정조 때 세워진 규장각과 같은 왕립 도서관이고, 둘째는 성균관․향교․서원 등의 교육기관에 설치된 학교 도서관이고, 셋째는 문중의 자녀 교육을 위한 문중문고이며, 네 번째는 개인문고이다. 이 가운데 인수문고는 문중문고에 속한다.
역사서 많이 소장한 문중문고 ‘인수문고’
문중문고는 그 성격이 특이하다. 특정 성씨의 구성원들만을 위한 문고라는 점에서는 사적인 용도이지만, 개인이 아닌 문중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공적이 성격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보면 문중문고는 공․사 합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구라파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러한 성격의 문중문고는 유교적인 토양에서만 성립이 가능한 도서관이라 하겠다. 유교는 집안을 중시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불특정 다수를 고려하는 묵자(墨子)와 오로지 개인만을 생각하는 양주(洋酒)의 입장을 모두 극좌와 극우로 간주하고, 그 사이에서 맹자가 중도 통합적인 방안으로 제시한 것이 문중[家]이라는 노선이었다. 그래서 유교문화권에서는 문화 활동이 ‘문중’이라는 단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문중문고는 한국의 유교적 전통을 계승한 문고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현재 인수문고가 소장한 장서는 대략 8천500여 책에 달한다. 1975년 인수문고가 성립될 때 인수문고의 전신인 만권당(萬卷堂)과 수봉정사(壽峯精舍)에 소장되어 있던 6천948책과 1975년 이후 추가로 수집한 1천500여 책을 합한 수치다. 보통 고서의 겨우 1책이 보통 책 두세 권 분량이므로, 8천500여 책을 권 단위로 환산하면 2만 권에 해당한다. 한국의 국․공립 도서관이나 대학 도서관을 제외하고는 민간에서 보유하고 있는 가장 방대한 양의 고서라고 한다. 우리 나라 서워너 가운데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안동 도산서원이 장서가 약 4천400책으로 알려져 있으니, 그 양만 가지고 따져보다면 영남학파의 본산인 도산서원의 서원문고보다 문씨들의 인수문고가 장서량이 많은 것이다.
인수문고의 8천500책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책들인가 궁금하다. 고서의 내용을 분류할 때 중국에서 사용한 기준은 ‘광내(壙內)’와 승명(承明)‘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광내는 주로 각종 경전들을 말하고, 승명은 고금의 역사에 관한 책들이다. 광내는 가로이고 승명은 세로이다. 광내가 인식의 횡적인 확대에 소용되는 책이라면, 승명은 인식의 종적인 확대에 소용되는 책들이다. 씨줄과 날줄이 광내와 승명인 것이다.
황제가 거주하는 궁궐 좌측으로는 광내전(廣內殿)이라는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고, 우측으로는 승명전(承明殿)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표현이 ‘좌통광내 우달승명(左通廣內 右達承明)’이라는 말이다. 좌우통달이 여기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이 말의 원래 의미는 횡으로는 제가의 경전과 종으로는 고금의 역사에 밝다는 뜻이다.
이 기준보다 더 확대하여 통용되던 분류 기준이 경(經)․사(史)․자(子)․집(集)의 사부(四部)이다. 경은 교과서 격에 해당하는 경전을 가리킨다. 사는 역사에 관한 책이다. 자는 무엇인가. 유(儒)․병(兵)․법(法)․도(道)․석(釋)의 각 가(家)와 기예, 술수(術數), 소설 등 다양한 분야의 흥미로운 책들이 여기에 속한다. 집은 학자들의 개인문집을 말한다. 인수문고의 기반이 된 만권당에 소장되어 있던 6천948책 가운데 경부는 536책이고, 사부가 1천813책, 자부가 588책, 집부가 4천11책이다.
인수문고의 전체적인 특징에 대하여 전문가들은 이렇게 평한다. “기호(畿湖)본위로 모은 규장각 도서관, 이왕직 도서관, 한림서림 등의 서적목록에서 보지 못하던 것을 상당수 볼 수 있다”, “장서의 양뿐만 아니라 어느 책도 낙질(落帙)이 없는 것이 특징”, “우리 나라 도서관사상 그 유례가 드문 문중문고”. 이러한 평가 외에 덧붙이고 싶은 인수문고의 특징은 역사서를 유달리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부만 1천813책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2책), 《고려사(高麗史)》(70책), 《여사제강(麗史提綱)》(13책), 《편찬려사(編纂麗史)》(25책), 《국조보감(國鳥寶鑑)》(28책), 《해동역사(海東繹史)》(6책), 《한력대사략(韓歷代史略)》(3책), 《소화외사(小華外史)》(6책)를 비롯해서 중국 역사서인 《사기(史記)》(2함16책), 《한서(漢書)》(30책), 《후한서(後漢書)》(2함16책), 《진서(晋書)》(3함20책), 《송서(宋書)》(2함16책), 《남제서(南齊書)》(1함6책), 《요사(遼史)》(2함12책), 《금사(金史)》(4함20책), 《원사(元史)》(8함40책), 《명사(明史)》(8함80책) 등을 망라하고 있다.
왜 이렇게 역사책을 많이 모아놓았을까? 역사서라고 하는 것은 인간사의 다양한 판례집과 같다. 판례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많이 알아야만 복잡한 상황에서 시비를 제대로 가릴 수 있다. 시비를 제대로 판단해야만 애매한 상황에서 자기 처신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양한 역사책을 섭렵하는 것은 시시비비를 제대로 가릴 수 있는 힘을 배양하고, 위기 상황에서 욕먹지 않는 처신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역사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대체로 깐깐해서 불의를 보고 어물쩍 넘어거지 않는 경향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인수문고에 이처럼 유달리 역사책이 많이 수집되어 있는 것은 당대의 시대적인 상황이 투철한 역사의식을 요청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경기가 불황일 때 TV 사극을 많이 본다는 속설처럼, 시대가 혼돈될 때 남다른 역사의식이 필요한 법이다.
경술국치에 만권당 세운 까닭
인수문고의 기반이 된 만권당의 성립 시기는 경술국치를 당한 1910년 무렵이다. 나라가 망하던 시기에 세운 문고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라고 하였던가. 나라가 망했어도 산하는 그대로 있고, 백성들은 그 산하에서 어찌되었든 살아가야 한다. 경술국치를 당했을 때 역사의식이 강했던 사람은 가산을 정리하야 만주 벌판에 가서 독립운동을 했다. 그 결과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반면 역사의식이 결여된 사람은 일제에 굴복하고 협력해서 그저 잘 먹고 잘 살았다. 총 들고 만주에는 가지 못하고, 그렇다고 일제에 비굴하게 협력하기도 싫은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제3의 길은 무엇이었을까?
인흥리에 남평 문씨들은 그 방도로써 만권당을 세우지 않았나 싶다. 만권당의 일차적인 목적은 남평 문씨들의 자녁 교육이었다. 한일합방이 되면서 일제가 신식 교육기관을 대거 설립하는 상황이었다. 문씨 집안에서는 일제가 세운 신식 학교에 자녀들을 보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일본 사람이 세운 학교에 자식들을 보내면 결국 자식들은 전부 일본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집안에서 직접 가르치자! 이러한 목표 아래 독자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가지고 설립한 사립학교이자 도서관이 만권당인 셈이다.
그런데 학문을 제대로 하려면 책이 많아야 된다. 책을 널리 수집하자! 문씨들이 서울, 대구 등지에서 수집한 만권당의 책 가운데 상당수는 당시 중국에서 수입한 고가의 책들로 낱권이 아닌 전집으로 된 책들이 많았다.
이 책들은 누가 선별했을까. 어떤 책을 구입하는가 하는 문제는 구입하는 사람의 학문적 수준과 관심 분야에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 서가에 꽂힌 책들의 종류와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의 관심 분야와 깊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법이다. 만권당의 장서 중에서 중국에서 수입한 책들을 선별해준 인물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이다. 김택영은 구한말의 유명한 유학자요 문장가이다.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한국소사(韓國小史)》, 《한사계(韓史綮)》같은 저서를 남겼다.
김택영은 을사보호조약 이후 통분을 금치 못하고 중국에 건너가서 살았는데, 남평 문씨 집안과는 평소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 그랬기에 김택영이 중국 상해에 머무를 때 만권당 주인의 부탁을 받고 책들을 추천해준 것이다. 중국에 망명해 있던 김택영이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역사 분야였던 것 같다. 인수문고에 역사책이 특히 많은 이유도 김택영의 문제의식이 반영된 탓이다. 나라를 다시 회복하고 주체성을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김택영이 추천해서 구입한 책들을 그때마다 상해 배편에 선적하여 목포로 보냈다고 한다. 당시 상해에서 목포까지 와래하는 선편이 있었던 모양이다. 배가 도착했다는 기별을 받으면 문씨 집안에서는 사람을 목포로 보내 책을 가져와야만 했다.
변변한 도로가 없던 시절에 수백 권의 책을 운반하는 일은 큰일이었다. 더군다나 전라도 한쪽 끝인 목포에서 경상도 대구까지 서에서 동으로 횡단 운반하는 일은, 서울에서 대구로 운반하는 코스보다 몇 곱절 더 힘이 들었다고 한다. 한반도의 지형적 조건상 영․호남 간에는 첩첩 산들이 가로막고 있어서 88고속도로가 뚫리기 전까지는 제대로 된 도로가 있을 수 없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책을 운반하는 수단은 다름 아닌 소 달구지였다. 수백 권의 책을 실은 소달구지는 목포에서 출발하여 털털거리며 인단 지리산 남원으로 왔고, 남원에서 다시 함양, 거창의 산길을 넘어 대구 인흥리 남평 문씨 만권당에 도착했다. 당시 열악한 도로 사정을 감안할 때 소 달구지로 책을 옮겼다면 아무리 빠라도 보름은 너끈히 걸렸을 것이다. 만권당의 책들은 이렇게 모아진 것이다. 엄청난 돈과 시간과 정력을 투자한 결과이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절터
이러한 엄청난 작업을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었던 남평 문씨 집안은 어떤 집안인가? 만권당은 돈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학문에 대한 열정과 자기 주체성을 지키겠다는 자존심과 기백, 그리고 당대 명사들과의 다양한 인맥이 없으면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뜻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다. 재력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탁상공론에서 그치고 만다. 인간 세상에서 복(福)과 혜(慧)를 모두 갖추기가 어려운 법인데, 남평 문씨들은 모두 갖추었던 것 같다.
인흥리에 사는 남평 문씨들의 시조는 문다성(文多省)이다. 문다성은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면 장자못가에 솟은 천 길 높이의 바위에서 태어났다는 탄생 서로하가 있다. 지금도 남평면 풍촌리 장자못가에는 문다성이 태어났다고 하는 ‘문암(文巖)’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본관인 남평은 문씨가 나주의 남평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남평 문씨의 중시조는 고려 말에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1329~1398)이다. 남평 문씨가 대구에 살기 시작한 것은 문익점의 9세손인 문세근(文世根) 때부터이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500년 전 경기도 파주에서 대구로 옮긴 것이다. 대구에서 다시 달성군 화원읍 인흥리, 현재의 남평 문씨 세거지에 들어와 터를 잡은 것은 문익점의 18세 손이자 문세근의 9세손인 인산재(仁山齋) 문경호(文敬鎬, 1812~1874)때이다. 따라서 인흥에 새롭게 터를 잡은 개기조(開基祖)는 문경호가 된다.
여기서 입향(入鄕)이라고 하지 않고 개기(開基)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1840년대 당시 인흥 세거지에는 사람이 사는 동네가 없었고, 문경호가 들어오면서 처음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흥은 조선 후기 당시 폐사지(廢寺趾)였다. 원래 고려시대에 인흥사(仁興寺)라는 절이 있던 자리인데 폐사가 된 상태였던 것이다.
인흥사는 고려시대 일연(一然, 1206~1289) 스님이 11년 간이나 머문 사찰이다. 일연 스니이 《삼국유사》의 뼈대에 해당하는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여기서 작성했다고 하며, 《삼국유사》의 상당 부분과 불경까지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절 이름을 따서 인흥이 되었다. 현재 남평 문씨 종손인 문정기(文定基)씨가 살고 있는 집터는 인흥사의 대웅전 자리였다고 전한다. 종가의 문간채 앞에 있는 우물 이름이 고려정(高麗井)인데, 고려시대 인흥사 시절부터 사용한 우물이다. 세거지 앞의 밭 가운데 석탑도 인흥사의 유물로 전한다.
절터를 집터로 잡은 이유
그러니까 문경호는 평소 사람이 살지 않는 인흥사 터에 관심을 갖고 있다가 적당한 시기가 되자 가솔들을 이끌고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절터를 집터로 바꾼 동네가 인흥인 것이다. 문경호는 풍수에 조예가 깊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터를 잡은 배경에는 당연히 풍수적인 원리가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자손 대대로 수백 년 동안 거주하 세거지를 잡을 때 풍수를 보지 않고 무턱 대고 잡았을 리 없다.
문경호는 왜 이곳에 터를 잡았을까. 그는 어떤 부분에 끌렸던 것일까. 먼저 인흥사 터를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절터는 거의 명당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말은 어느 정도는 맞다. 그러나 100퍼센트 맞는 말은 아니다. 비보(裨補) 용도로 세운 사찰 자리는 명당이라고 할 수 없다. 지세가 너무 허한 곳이나 너무 강한 곳을 보강하거나 누르기 위해서 사찰을 세우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런 곳은 보편적인 명당은 아니다.
그리고 절터는 종교적인 수행을 하는 데 유리한 곳이어야 하기 때문에 바위가 많은 지형을 선호한다. 바위가 많은 곳은 지기가 강해서 소위 말하는 ‘기도발’이 잘 받는 곳이다. 예를 들면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이나 도갑사가 있는 월출산이 그러하다. 이런 곳에는 일반인들이 주택을 짓고 살기 어렵다. 절터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일반 가정집을 짓기에는 살기(殺氣)가 많아서 부적절한 곳임을 깨달아야 한다.
반대로 절터를 명당이라고 간주하고 묘나 주택을 쓴 경우도 상당히 있다. 이런 절터는 주변 사격(寺格)에 살기가 별로 없는 온화한 곳이다. 주변에 바위산이 별로 없는 절터는 일반 주택이 들어서도 무방하다. 문경호가 주목한 인흥사터는 내가 보기에 절터치고는 바위산이나 살기가 보이지 않는 온화한 장소이다. 이렇게 온화한 폐사지는 조선 중기 이후부터 거의 묘 자리나 집터로 바뀌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왜군에게 많은 사찰들이 폐사되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산세가 강한 경상도 지역보다 산세가 부드러운 충청도나 전라도 지역의 폐사지가 집터 등으로 많이 바뀌었다.
경상도의 산세는 흔히 태산준령(泰山峻嶺)으로 일컬어진다. 대체적으로 산이 높고 기세가 강해서 사람들의 성품도 그 산세를 닮아 선이 굵고 뚝심이 있다. 경상도 전체의 산세를 놓고 볼 때 태산준령에 부합되는 곳은 북쪽의 안동이나 상주 쪽보다는 대구 쪽이 아닐까 싶다. 안동이나 상주는 산세가 높지 않고 비교적 부드러운 편이다. 산이 높아서 주는 위압감을 주는 곳은 대구 근방의 산세라고 보아야 한다.
대구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양대 산은 팔공산과 비슬산이다. 팔공산과 비슬산 모두 1천 미터가 넘는 고산준령이고, 곳곳에 바위 절벽이 돌출해 있는 호방한 국세를 지니고 있어서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어지간한 역경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돌파하는 장군과 같은 기상을 머금고 있다.
비슬산은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산이다. 비슬은 고대 인도의 힌두신인 비슈누(Visnu)를 한자로 음역한 표현이다. 비슬산은 신라시대까지는 줄곧 포산(苞山)이라 불렸다. 《삼국유사》에 보면 ‘포산이성조(苞山二聖條)’ 라고 해서 도성선사와 관기선사가 도통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 무대가 바로 비슬산이다. 일연 스님이 반평생을 보내면서 수도한 보당암, 무주암, 묘문암이 모두 비슬산에 있는 암자들이다. 일연 스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산이 비슬산인 것이다.
인흥마을은 비슬산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이 뭉친 곳이다. 비슬산이 대구 쪽으로 흘러가다가 그 주맥의 중간쯤에 장단산이 솟았다. 그 장단산 옆에는 소조산(小祖山, 집터로 내려오는 산맥 가운데 중심 되는 산)인 까치봉이 서 있고, 그 까치봉에서 북서쪽으로 소맥이 하나 내려와서 금체(金體) 형태의 천수봉으로 뭉쳤다. 천수봉 바로 밑에 인흥사가 있었고, 현재는 문씨들의 세거지가 자리잡고 있다. 좌향(坐向)은 서남향의 간좌(艮坐)가 성립한다. 간좌는 부자 터가 많다.
까치봉에서 천수봉까지의 거리는 약 2킬로미터 정도인데 비교적 부드러운 산세로만 내려온 점이 눈에 띈다. 안산을 비롯한 주변 사격도 살기가 보이지 않는다. 태조산(太祖山)인 비슬산이 강기(剛氣)를 품은 장군과 같은 기세인 반면, 인흥 쪽으로 내려온 지맥들은 부드럽게 내려와서 강강한 기운이 거의 보이지 않는 지점에 터를 형성했다. 외강내유(外剛內柔)라고나 할까. 외곽은 강한데 안은 부드럽다. 그 부드러움이 좋게 보인다. 그래서 선인들이 이곳 절터와 지명에 어질 인(仁)자를 넣었는지도 모르겠다.
14대조 묘까지 남아 있는 선산
이곳을 답사한 지관들의 지적에 의하면, 소조산인 까치봉에서 주산(主山)인 천수봉에 이르기까지의 봉우리들이 오행의 상생(相生) 방향으로 이어져 있다고 한다. 상생이라 하면 까치봉이 삼각형처럼 끝이 뾰쪽한 목체(木體) 형태이고, 목체의 봉우리 다음에 불꽃같은 화체(火體)의 봉우리가 연결되고, 화체의 봉우리 다음에는 평평한 토체(土體), 토체 다음에는 바가지처럼 둥그런 금체가 이어지는 형국을 말한다. 까치봉에서 천수봉까지 이러한 모양의 작은 봉우리들이 연달아 이어졌다는 것이다.
오행의 상생으로 이어진 형국은 아주 귀하게 본다. 이와 비슷한 형국이 전주에서도 발견된다. 전주의 주산인 기린봉에서 태조 이성계의 선산이 있는 조경단까지 이어지는 봉우리의 형태가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의 순서로 되어 있다. 기린봉이 화체이고, 조경단이 수체(水體)이며, 그 중간에서 토체와 금체 봉우리가 중계를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안대(眼帶)를 보자. 안산은 260미터 높이의 함박산이다. 화원읍의 주산인 함박산은 말 안장 형태이다. 흔히 마체(馬體)라고 부른다. 안산이 마체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그 터에서는 벼슬하는 귀인이 나온다고 한다. 옛날에는 벼슬을 해야 말 안장에 올라탄다고 여긴 탓이다. 욕심을 내자면 안산 쪽에 문필봉(文筆峯)이 하나 추가되어 있었으면 더 좋을 성싶다. 문사(文士)가 살기에는 아무래도 문필봉이 더 끌린다. 만약 문필봉까지 있었다면 이 터가 1840년대까지 빈터로 남아 있었을 리 없다. 그 전에 이미 다른 성씨들이 먼저 자리를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양택(陽宅)에 문필봉이 없으면 음택(陰宅)에서 문필보을 보강하면 된다. 한국의 풍수가에서는 전통적으로 양택보다 음택의 비중을 높게 본다. 양택은 그 터에 거주하는 사람만 영향을 받는다고 보지만, 음택은 핏줄을 이어받은 자손이면 누구나 다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음택이 미치는 영향력의 범위가 더 넓은 것이다. 그러므로 음택에서 문필봉을 찾으면 된다.
우선 이 집안의 선산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14대조의 묘부터 시작해서 바로 윗대의 묘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산실되지 않고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14대조라면 대략 500년전의 조상인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집안의 묘가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흔치 않는 일이다. 왕족이 아닌 민간 집안에서 500년에 걸친 조상의 묘를 보존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다. 이는 집안의 가통이 그만큼 확실하게 정립되어 있음을 나탄낸다. 아울러 조상에 대한 존경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물을 보자. 동네 앞을 흐르는 천내천은 둥글게 돌아서 서북쪽으로 흘러 나간다. 천내천이 흘러서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추었다. 수구(水口)를 보자. 물은 서북 방향으로 흘러 나간다. 수구 너머 멀리 서북쪽[乾亥方]으로 낙동강이 보인다. 동네 어른들이 들려준 구전에 의하면 ‘멀리 보이는 낙동강 물이 보이지 않아야 동네에 좋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서북 방향에 소나무를 많이 심어놓았다고 한다.
지금은 몇 그루 남아 있지 않지만 풍수적인 안목에서 볼 때 이 소나무들은 수구막이 용도로 심어 놓은 것이므로 반드시 보강할 필요가 있다.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겨울에 서북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춥기 때문에 이를 차단 할 필요도 있다. 더군다나 낙동강 쪽에서 불어오는 서북방 바람은 강바람이라서 더욱 차갑다. 소나무 숲은 차가운 강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 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정(井)자 구도의 가옥 배치
인흥에 새롭게 터를 잡은 문경호는 이미 1천 석 가까운 재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는 이 재력을 바탕으로 인흥을 문씨들이 대대로 살 수 있는 세거지로 만드는 장기적인 마스터플랜을 세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흥은 처음부터 계획된 마을이란 점에서 다른 마을과 구별된다. 그 계획이란 우물 정(井)자 형태로 가옥을 배치하는 것이지 않았나 싶다.
현대 인흥마을의 가옥 배치 형태는 흥미롭게도 정 자 형태로 되어 있다. 사람이 거주하는 주택은 전부 합해서 아홉 채인데, 이 아홉 채가 우물 정 자처럼 가로․세로로 줄을 맞춰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가옥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된 사례는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인흥의 문씨 세거지는 아홉 채의 개인 주택 외에 문씨들의 공공 건물이라 할 수 있는 세 채의 건물, 즉 광거당, 수봉정사, 인수문고가 있다. 인흥에는 개인주택 아홉 채, 공공 건물 세 채해서 도합 12채의 건물만이 존재한다. 앞으로 더는 건물이 들어설 수 없다고 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선 동네 터가 전체 2만평 정도라서 이 정도의 건물이 적당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2만 평 가운데 1만 평은 건물이 차지하는 대지로, 나머지 1만 평은 동네 마당으로 쓰고 있다. 아홉 채의 주택이 각각 차지하는 평균 면적은 400~500평이라고 한다. 여기에다 광거당, 수봉정사, 인수문고의 면적을 합하면 1만 평을 거의 다 차지한다. 만약 이외의 건물을 더 지으면 동네 마당에다 지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동네가 건물로 빽빽해져 여유 공간이 없어지고 품격이 떨어진다. 그러므로 더는 건물을 짓지 못하게 문중에서 합의를 보았다.
주택을 아홉 채만 유지하자는 것은 문씨 문중의 규약이기도 하다. 현재 아홉채의 주택에는 장남 부부들만이 살고 있다. 차남과 딸들은 어떻게 하는가. 차남과 딸들은 다른 곳에서 살아야 한다. 장남 상속의 원칙이 현재에도 굳건하게 지켜지고 있는 곳이 이곳이다. 문씨 세거지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방법이라고 한다.
재산 중에서 인흥의 아홉 채 주택만큼은 현행 법률에 상관없이 반드시 장남에게 상속하지만, 주택이 아닌 다른 부동산이나 재산은 차남이나 딸들에게도 공평하게 상속된다. 물론 장남은 집을 물려받았으므로 다른 재산 분배에서는 그만큼 제외된다. 만약 장남이 대구 밖 외지의 직장을 다니면 어떻게 하는가 하고 질문을 던졌다. 직장 다닐 때에는 밖에 나가서 살 수 있지만, 정년이 되거나 퇴직을 하면 반드시 인흥에 돌아와 사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문중 내규에는 외부인에게 집을 파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독특한 분위기를 지닌 마을이다. 함부로 뜨내기가 들어와서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동네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휴지나 빈 병 쓰레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 흙담으로 둘러싼 아홉 채의 전통 가옥에 전부 문씨들이 거주하고 있어서 수시로 청소하고 관리하는 까닭이다. 종갓집인 문정기 씨 가옥이 대표적인 예이다. 반듯한 흙담, 잘 깎인 마당 잔디, 윤이 나는 현관 마루, 정감 있는 사랑채 온돌, 청결한 수세식 화장실, 안채 옆 채마밭 모두 사람의 손길로 다듬어져 있다.
사극 영화의 단골 촬영지
전통 가옥에서 흔히 연상되는 생활의 불편함은 느껴지지 않고, 한옥이 지닌 고풍스러움과 낯익은 편안함, 그리고 양반 집에 와 있다는 품격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이러한 한옥만 있으면 누가 아파트에 살겠는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법도를 지미는 명문가 후손들이 사는 동네답다.
1935년 《동아일보》에서 전국의 책이 많은 집을 소개하는 답사기를 연재한 적이 있는데, 그 연재를 담당한 김태준(金台俊, 《조선소설사(朝鮮小說史)》의 저자로 당시 문명을 날림)은 인흥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다.
조선에 장서가 이야기가 나면 수년 전 연희전문학교에 만여 권 도서를 기증한 전남 곡성 정씨(丁氏)를 첫째를 꼽고는 아마 그 손가락으로 대구 문장지(文章之, 壽峯 文永樸)씨 장서를 세어야 할 것이다. 하도 많은 소눔을 들은 터라 일부러 대구역에서 내려서 화원행 버스를 잡아탔다. (중략) 화원에서 동으로 한 마장쯤 골짜기로 들어가면 소송독류(疎松禿柳)와 인산지수(仁山智水)가 말하지 않아도 처사의 잡같이 엄숙한 느낌을 주는 것이라. 상투를 짠 선비님들이 얼른 5,6명 모여 왔다. 장서가 문장지 씨는 벌써 고인이 되고 그 자손 시채, 진채 제씨가 인계해서 유지한다고 한다. 따로이 재실을 깨끗이 짓고 석병토전(石塀土塼)과 무림수죽(茂林修竹)이 모두 고아한 흥취가 있었다.
몇 년 전에 타계한 한학자 임창순(任昌淳, 지곡서당의 창시자)이 1970년대 초반에 인흥을 다녀가면서 남긴 기록은 이렇다.
이곳은 본시 고려시대에 《삼국유사》의 저자인 명승 보각국존 일연이 거주하던 인흥사의 유지(乳脂)다. 사찰이 어느 때에 없어졌는지 미처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아직도 당시 패초(牌招)와 파와(破瓦)가 집터와 논밭 사이에서 산견되어 유심인(有心人)으로 하여금 왕석(往昔)의 고승의 유탁(遺躅)에 조문케한다. 그러나 다행이 만 권의 전적을 간수한 광거당을 위시하여 주인 수봉 선생의 웅걸한 유택이 자리잡고 있음을 볼 때 유석의 별은 있으나 문풍(文風)이 다시 이 자리에서 떨쳤던 것은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닌 듯하여 적이 허전한 마음을 위로해준다.
명사들의 이같은 평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인흥의 문씨 집안은 조선의 문풍을 지키고 장서를 많이 소장한 집으로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 있었던 것 같다. 문씨 집안의 문풍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1910년에 광거당이 설립되면서이다.
광거당은 본래 재실(齋室), 곧 제사를 지내려고 지은 집이지만, 광거당 내에 1만 권의 책을 비치한 만권당이 설치된 뒤로 전국의 문인과 학자들이 방문하여 책을 보고 학문과 예술 그리고 조선의 앞일을 걱정하고 토론하는 문화공간으로 사용됐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살롱이면서 도서관이고, 거기에다 아카데미 기능을 가진 복합 문화공간이라고 보면 적당할 것 같다.
전국의 저명한 문인, 달사들이 소문을 듣고 방문하여 광거당 내에 비치된 1만권의 책을 열람하기 위해 몇 달씩 머물다 갔다. 그러한 자취가 광거당 누마루 바깥에 있는 ‘수석노태지관(壽石老苔池館)’이란 추사 현판 글씨에 아직까지 남아 있다.
‘수석과 묵은 이끼와 연못으로 된 집’이라는 뜻의 이 현판은 당시 광거당을 다녀간 문사들의 고풍스런 정취와 격조가 묻어 있는 현판이다. 지금은 아쉽게도 묵은 이끼와 연못은 없지만, 뜰 안 대숲과 담장 밖에 선 수백 년 된 소나무들은 남아 광거당의 문향(聞香)을 전하고 있다.
광거당은 그 고풍스런 분위기로 인해 80년대 장미희 주연한 영화 <황진이>의 촬영 무대가 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강수연이 주연한 <씨받이>에서는 수봉정사와 문씨 종가인 문정기 씨 집이 촬영 무대로 등장했다고 한다. 사극을 찍는 영화감독들은 다 알고 있는 집이다.
광거당을 세우고 또 그 내부에 만권당을 설치해서 수많은 책을 중국에서까지 수집하고, 당대의 문인과 달사들을 초청해서 대접하려면 그만한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 재력은 어디서 나왔는가.
아버지 후원으로 만권당 설치한 수봉 선생
개기조 문경호의 손자인 후은(厚恩) 문봉성(文鳳成, 1854~1923) 대에 이르러 재산이 크게 불어났다. 문봉성은 경제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여 큰 부를 이루었다. 일찍이 한 역술인이 그의 관상을 보고 “나라의 큰 재목이 큰 부자에 그치고 마는구나” 하고 탄식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봉성은 이 부를 바탕으로 지금의 인흥마을 전역을 하나로 만들었으며, 거금을 들여 1만 권의 서적을 구입하는 한편, 광거당 내에서 일곱 종의 문헌을 간행하는 데 아낌없는 재정적 후원을 하였다. 고려시대 일연 스님이 불서를 간행한 터에서 700년 후 봉성은 유서(儒書)를 간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아버지 밑에서 진두지휘한 인물은 수봉(收捧) 문영박(文永樸, 1880~1930)이다. 그는 문봉성의 둘째아들이다. 큰아들인 문영근(文永根)은 일찍 요절하였고, 셋째아들 문영환(文永桓)은 나이가 너무 어려 둘째아들이 일을 맡은 것이다. 문봉성은 둘째아들인 문영박이 하자고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 후원했다고 한다. 돈은 아버지가 대고 실제 일은 아들이 다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자지간에 아주 호흡이 잘 맞았던 모양이다.
만권당을 성치하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아들인 문영박이 처음 기안하고,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이룬 일이다. 그러니까 문영박이 오늘날 남평 문씨 세거지의 모습을 완성했다고 이해하면 된다. 문경호가 처음 터를 잡고 흉중에 품은 생각을 손자인 문봉이 대들보를 셍우고, 그 증손자인 문영박 대에 이르러 서가래와 기왓장을 다듬고 마당에 나무를 심은 셈이다.
앞에서 인용한 글 속의 ‘문장지’와 ‘수봉 선생’ 이라는 표현이 모두 문영박을 지칭하는 표현임을 볼 때, 수봉 문영박은 광거당을 중심으로 한 남평 문씨 세거지의 이름을 전국적으로 떨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남평 문씨 세거지 맨 앞에 서 있는 건물은 수봉정사로, 이 건물은 문영박을 기념하기 위해 수봉 사후인 1936년에 세운 기념 건물이다. 수봉정사는 제2의 광거당이기도 하다.
‘남아가 세상에 태어나서 천하의 좋은 사람을 다 사귀고 싶고, 천하의 좋은 책을 다 보고 싶다’는 선현들의 말처럼, 수봉은 학자와 문화인들을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여 가산을 털어 1만 권의 책을 모았다. 조선 유학계의 군성(群星)들이 구름처럼 찾아와 수봉의 집은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수십 명의 선비가 항상 광거당에 묵으며 수봉과 더불어 학문과 고금을 논하고 시와 글을 짓고, 술잔을 나누며 고담준론을 나누었다.
그 무대가 광거당이었다. 광거당은 일반 사랑채가 아닌 재실이라서 동네 한 쪽에 별도로 떨어져 있다. 비록 사랑채처럼 사용하기는 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사랑채는 아니다. 이렇게 복합적인 성격의 건물은 현재 호남 지역에는 별로 남아 있지 않다.
한편 광거당에 잠을 잘 수 있는 시설은 있지만, 따로 식당이 있는 것은 아니다. 광거당에 있는 문간채는 손님들 시중 드는 하인들이 사는 공간이라서 외부에서 온 귀빈 식사는 이곳에서 제공할 수 없다. 그렇다면 손님들 식사는 어떻게 해결했을까.
보통 사랑채 같으면 바로 옆 안채에서 바로 식사를 나르면 된다. 하지만 광거당은 살림채와 100미터 이상 떨어진 독립 건물이어서 손님들이 오면 그때마다 밥과 반찬을 일일이 날라야 했다. 보통은 하인들이 밥상에 밥과 반찬, 국을 차려 내갔는데, 혹시 비라도 오면 상보를 덮어서 날랐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 손님 대접도 보통 일이 아니었던 듯 싶다.
상해 임시정부가 보낸 조문
수봉과 깊이 교류한 인물 가운데 눈에 띄는 인물들이 있다. 심재(心材) 조긍섭(曺兢燮),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난곡(難曲) 이건방(李建芳), 이정(彛庭) 변정상(卞鼎相) 등이 그들이다. 종횡으로 얽힌 이들의 교유 관계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심재는 영남 지방의 산림유학을 대표하는 학자이다. 한때 광거당에 머물면서 수봉의 자식들과 조카들을 가르칠 정도로 수봉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심재는 또한 수봉과 함께 매천 황현, 창강 김택영과도 친해서 이 네 사람 사이에는 서로 편지 왕래가 잦았다고 한다. 김택영은 다시 난곡 이건방과 이정 변정상과 친했다. 수봉이 이건방, 변정상과 친해지게 된 것은 중간에서 창강이 연결해주었기 때문이다.
김택영은 강화학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당의통량》의 저자이자 강화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이건창(李建昌, 1852~1898)과는 무려 30년지기였다. 김택영은 이건창을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았다. 근세 개화기 무렵, 강화학파는 행동하는 양심이라 일컬을 만큼 실천적인 학파였다.
이건창은 부패한 벼슬길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강화도에 은거했고, 강화학파로서 이건창과 한집안 간이던 이건승(李建昇) 역시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고독하게 죽는다. 이건승을 비롯한 강호학파 멤버드은 일제 강점기를 수용할 수 없었다. 그들은 죽을 줄 알고 만주로 갔다.
연세대 민영규 교수가 강화학파의 궤적에 대해 쓴 《강화학 최후의 광경》(1994)이란 책을 보면, 이 시기 강화학파는 대부분 눈보라 치는 만주로 가서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하다가 비장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나온다. 자결한 매천 황현 또한 이건창을 비롯한 강화학파와 심교(心交)를 맺은 사이였다. 매천은 자결하기 1년 전 구례에서 서울까지 천 리 길을 걸어가 이건창의 무덤을 참배하고 대성통곡했다고 전한다.
난곡 이건방 역시 강화학파의 핵심 멤버로서 만주에서 죽은 이건승과는 집안의 형님․동생 관계였다. 강화학파 중 이건방이 유일하게 만주에 가지 않고 국내에 남아 목숨을 유지했는데, 민영규 교수에 의하면 이는 누군가 한 사람은 조선에 남아서 강화학파의 맥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으며, 그 마지막 맥이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후일 수봉이 죽고난 후 정인보가 수봉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어준 것도 생전에 스승이었던 이건방과 수봉의 관계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수봉은 조긍섭과 김택영를 매개로 강화학파와 사상적으로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광거당의 주인 수봉이 영남의 남인 학통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경술국치라는 난세를 당하여 당시 가장 양심적이고 실천적이었던 강화학파와 학파를 초월하여 의기(義氣)를 공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한다면 마나권당도 강화학파의 실천적 양심에 동조하여 나온 산물이라고 추측해볼 수도 있다.
수봉이 사망한 후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발행으로 비단천에다 ‘대한국춘추주옹(大韓國春秋主翁)’이라는 제목의 추조문과 특발문(特發文)을 수봉의 자제들에게 비밀리에 보낸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공식적인 조문을 보냈다는 것은 수봉이 임시정부와 직․간접의 관련을 맺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1931년에 보낸 이 조문은 고인이 임시정부에 상당한 독립자금을 지원한 데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기도 했다. 가로 15, 세로 22센티미터의 분홍색 비단 천에 활자판 한자로 인쇄한 이 임시정부의 조문은 현재 문씨 집안에서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인수문고의 지킴이 문태갑 씨
인수문고는 현재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가? 인수문고는 1981년 정부 보조를 받아 수봉정사 옆 공터에 별도의 건물을 지어 보관하고 있다. 1993년에는 인수문고 옆에 또 하나의 문고가 추가되었다. 바로 ‘중곡문고(中谷文庫)’이다. 중곡문고는 수봉의 손자인 문태갑(文胎甲, 72)씨가 설차한 문고이다.
문태갑 씨는 관료와 정치인을 거쳐 서울신문사 사장을 지냈다. 인수문고의 정신을 잇기 위해 지난 수십 년 동안 학술회의나 인사동 헌 책방에서 자료를 수집했고, 해외 출장 때에도 책방을 뒤져가면서 수집한 책 5천 권을 모아 중곡문고를 설립했다. 인수문고가 고서 위주인 반면 중곡문고는 요즘 책들로 되어 있다.
문태갑 씨는 공직에서 물러난 후인 1995년부터 인흥으로 내려와 인수문고의 청지기 역할을 하고 있다. 70세가 넘었지만 눈빛과 목소리가 여전히 카랑카랑하다. 그는 청지기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 인수문고 옆에 거경서사(居敬書舍)라는 자그마한 두 칸짜리 독서실을 지어놓고 여기서 주로 생활한다. ‘경건한 마음으로 책을 읽는 방’ 이라는 뜻이다.
우선 화려했던 공직생활을 그만두고 시골로 돌아와 생활하는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다.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니 관료나 정치인보다는 학자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친께서도 일찍이 제가 학문을 하기를 원하셨는데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 후회됩니다. 제가 만약 학자의 삶을 살았다면 젊었을 때부터 조상들이 남긴 만권당의 책들을 보면서 살았을 겁니다. 관료나 정치인으로 부산하게 사는 인생보다는 책을 보면서 사는 삶이 의미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집안에서 전통 서당 교육을 고수하고 신학문을 못하게 했다는데 어떻게 대학을 다닐 수 있었습니까?
“조부님이 1930년에 돌아가시면서 그것이 해제되었다고나 할까요. 제 윗대 형님들만 해도 조부님의 방침에 따라 신학문은 할 수 없었지요. 조부님이 오래 생존해 계셨더라면 아마 저희 연배들도 신식 학교를 가지 못했을 겁니다. 신학교에 간 것은 저희 연배들이 집안에서 처음입니다.”
-요즘도 인수문고의 고서를 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은가요?
“동양사상과 고전을 연구하는 대학교수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광거당도 개방하고 있습니다. 학술세미나 장소로 광거당을 요청하면 언제라도 저희 집안에서는 협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수문고를 장기간 열람하고 싶은 사람을 위해서 거경서사도 개방해놓고 있습니다.”
인수문고의 마당에는 녹색의 잔디가 소담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그 녹색 잔디 위에 원목으로 된 의자에 앉아 고서를 뒤적이고 있는 문태갑 씨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과연 인생의 말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인지 생각해보았다.
인흥 토박이 문희갑 대구시장
당나라 때 중국 관료들은 관청에서 퇴근하면 부인, 자식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눈 후에는 곧바로 서재로 들어갔다고 한다. 가장이 한번 서재로 들어가면 누구도 그 독서를 방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정년퇴직을 하면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이제사 마음대로 실컷 읽을 수 있겠구나”하면서 더욱 독서에 몰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말년에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보다 뜰 앞에 의자를 내다 놓고 책 읽을면서 사는 삶이 고준하게 보인다.
수봉의 손자 가운데 또 한 사람, 우리가 알 만한 이가 현 대구시장으로 있는 문희갑(文喜甲)씨다. 문태갑 씨의 사촌동생인 문희갑 씨는 인흥에서 나고, 청소년 시기를 보낸 만큼 인흥에 대한 추억이 많다.
-명문가의 후손으로서 대구시장을 하고 있는데, 명문가의 후손이라는 점이 혹시 부담이 될 때는 없습니까?
“부담이 될 때도 있습니다. 내가 혹시 잘못해서 욕을 먹으면 문씨 짐안 전체에 누가 될까봐 걱정입니다. 특히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대 화가 납니다. 화가 나고 울화가 치밀 때마다 저는 사무실에 걸려 있는 인흥 광거당 사진을 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고향 모습과 선조들의 가르침은 저에게 큰 위로와 힘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문 시장은 경제 관료 출신이면서도 문화와 환경 분야에 대해 나름대로 철학이 있었다. 문 시장과 얘기를 나누는 도중에 귀가 솔깃한 이야기를 들었다.
“제가 경제 관료 출신이라서 사람들이 저를 보면 으레 경제 문제만 물어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게 불만입니다. 경제문제보다는 문화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사는 것이 경제가 목적이 아닙니다. 더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서 경제가 방법상 필요한 것이지 경제가 어떻게 최종 목적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다운 삶을 살려면 문화가 중요합니다. 문화를 생각하다 보니 환경도 중요하더군요. 환경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문화가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흥마을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대구 섬유사업을 진흥하기 위한 밀라노프로젝트 때문에 이태리 사람들을 인흥에 데리고 간 적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것이 환경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세거지 주변에 널려 있는 비닐하우스가 전통 가옥의 미관을 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닐 하우스를 철거하라고 하더군요.
그 말 듣고 보니 그렇더군요. 주변에 비닐하우스가 없었으면 훨씬 품위 있는 마을이 될 겁니다. 그러나 비닐하우스는 마을 사람들의 생업이 걸려 있어서 쉽게 철거시킬 수 없습니다. 앞으로 문화재를 지정하려면 그 집만 달랑 지정할 일이 아니고, 주변 환경 전체를 포함해서 지정해야 합니다. 이걸 보더라도 환경을 보호하지 않으면 문화도 보존하지 못한다는 이치가 드러납니다.“
문 시장의 이러한 철학은 유년 시절부터 전통적인 가풍이 보존된 집안에서 성장한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을 성싶다.
우리 사회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의 혼란, 다시 6․25의 페허를 거쳐야만 했고, 70․80년대 산업화를 겪으면서 모든 전통이 급격하게 사라지고 퇴색하는 아픔을 겪었다. 어딜 가나 옛것이 제대로 남아 있는 곳이 없다. 그런 혼란을 똑같이 겪었으면서도 책 좋아하는 조선 선비의 가풍을 지금까지 우직하게 보존하고 있는 남평 문씨들의 고집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문씨들의 그 우직함과 고집은 정녕 태산준령인 비슬산의 정기에서 유래한 것이리라.
秋 江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