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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비판에 대한 간략한 답변
[진보전략회의 5월 월례토론] ‘경제위기 대응으로서 기본소득 전략’ 토론에서 제기된
▫ 제갈현숙, “경제위기 대응으로서 기본소득 전략 - 토론문”
글보기 => http://cafe.daum.net/basicincome/3oja/22
▫ 사회주의노동자정당준비모임(사노준), “기본소득제도, 과연 경제위기 대응책이 될 수 있나”
글보기 => http://cafe.daum.net/basicincome/3oja/25
1.
제갈현숙님은 글의 도입부에서 다음 두 가지를 핵심적인 문제로 제기하고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 손을 대지 않고 ‘분배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근본적 변화를 위해서는 운동 주체가 설정되어야 하는데, 기본소득에는 과연 그러한 주체 형성 전략이 있는가 하고 의문을 표한다.
- ‘생산방식’에 손을 댄다는 것의 핵심은 무엇일까. 혹자가 말하듯 ‘사회화’와 ‘노동자 통제’를 뜻하는 것일까. 그것이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을지의 문제는 차치하고 기본소득은 적어도 그러한 방향으로의 전개를 가로막는 수단은 아니므로 여기서 그것이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다소 부당한 측면이 있다.
- ‘생산방식’보다는 ‘생산관계’가 좀 더 적절한 표현이었을텐데, 차라리 이렇게 지적했더라면 좀 더 나았을 것이다.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정책이다.’ 만일 이런 가정이 성립한다면, 기본소득 주창자들은 자본주의 자체를 문제로 삼을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변혁의 주창자들이므로 앞서의 문제제기가 빛을 바랜다.
- 주체 문제와 관련해서는 먼저 근본적 변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체 형성 전략은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추상적인 수준에서의 노동자계급 형성 전략 말고 더 구체적인 무엇을 내놓은 적이 있냐는 것이다. 기본소득이야말로 구체적인 수준에서의 연대 전략이자 계급 형성 전략이 될 수 있다.
- 기본소득은 비정규직 노동자, 실업자, 장애인, 여성 등 모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 전면에 함께 나설 수 있는 훌륭한 매개고리가 될 수 있다. 보편적 의제를 받아들이고 폭넓은 연대의 의지가 있는 모든 대중운동이 함께 할 수 있는 유력한 매개이기도 하다. 물론 가능성과 현실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이를 메우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전개되어야 한다.
2.
“일의 유무, 일할 의사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든 이들에게 일정한 사회적 부를 나눠 갖자는 주장은 실현가능성을 떠나, 노동을 바탕으로 하는 소득이라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대한 공격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처럼 노동과 소득을 분리하려는 시도가 자유주의자들에게서도 발견된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복지국가에서 나타나는 비효율, 재정적자, 관료제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모든 사회보장제도를 완전히 철폐(독일의 경우 백여 가지 이상)하고, 대신 일정한 소득 한계를 정해 그 이하의 소득자들에게 국가가 보조금을 지급(M. Friedman, Negative income system)하는 방식이다. 이들 자유주의자들의 메시지는 모든 사회관계를 시장관계로 단일화시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기본소득(basic income)이 대안 전략으로 갖는 논리적 취약성은 매우 명확하다. 기본소득에 대한 좌파적 아이디어와 신자유주의자의 버전 사이의 실질적 차이는 다만 양적 차이만 존재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Ernst Rohhoff, 1999)”(제갈현숙, 위의 글)
- (신)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언급은 상당히 생뚱맞은 것이다. NIT(부의 소득세)를 주장한 프리드먼을 언급한 것도 전혀 적절하지 않다. 우파들 가운데에는 NIT도 기본소득의 변형으로 인정하는 경우가 있지만, 대다수의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NIT를 기본소득의 변형으로 보지 않는다. 기본소득의 핵심 개념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가깝다면 EITC(노동소득세액공제, 이명박 정부는 ‘근로장려세제’라는 정치적 번역어를 선택함.)가 NIT와 가까운 것이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일부 우파를 제외하고 ‘사회보장제도의 완전 철폐’에 공감하는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없다.
- 그럼에도 그런 일부 자유주의자들의 메시지를 언급하는 가운데 기본소득이 “대안 전략으로 갖는 논리적 취약성은 매우 명확”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논리적인 사고로 볼 수 없다. 혹시라도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신자유주의자들과 동맹을 맺어 기존의 사회보장제도를 제거하고 오로지 효율화와 시장의 관점에서 기본소득 도입에 찬성하는 길을 간다면 그런 비판을 하는 것이 아깝진 않을 것이다.
- 기본소득과 기본보장을 대립항으로 설정하는 것은 전형적인 우파 프레임이다. 때문에 이런 프레임을 빌어 기본소득을 비판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기본소득과 기본보장은 함께 가야만 의미가 있다.
3.
제갈현숙님은 일반적인 기본소득 비판 논리로 다음을 예로 들었다. “노동윤리감소, 피할 수 없는 복지수준감소, 복지국가 철폐에 따른 분배의 축소, 사회분리, 재정안정성, 실현가능성 등이 일반적인 비판요소로 제기되었다”(제갈현숙, 위의 글)고 말이다.
- 제갈현숙님 자신의 생각이라기보다는 기존 비판들을 단순히 모아놓은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예의 적실성에 있어서 약간의 아쉬움은 남는다. 복지 감소, 분배 축소와 같은 것은 극히 일부인 우파적 버전의 기본소득 모델에 대한 비판의 지점일 뿐인데, 이를 일반적인 비판 논리로 끌어왔기 때문이다.
4.
“국가재정 수입구조의 혁신적 전환과 지출구조의 개혁을 통해 기본소득이 제도화된다고 볼 수 있다. 국가 재정의 이와 같은 변화는 선거를 통해서는 불가능하고 결국 정치투쟁의 장에서 권력의 이전으로 가능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국가권력을 바꾸기 위한 이행전술이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인데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빠져있다.”(제갈현숙, 위의 글)
- 제갈현숙님은 이와 같은 급진적 변화가 선거를 통해서는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고 있다. 결국 혁명론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런 질문이 제기될 때마다 참 난감하다. 별로 할 말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브라질이나 나미비아에서의 시도처럼 단계적이고 부분적인 시도라 하더라도 기본소득 제도로 한발 다가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이며, 공허한 혁명론보다는 대안 사회로 한걸음씩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 질문을 이렇게 바꾼다면 보다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제도와 정책의 실현을 앞당길 수 있는 정치적 힘과 국민적 공감대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5.
“현금으로 지급되는 사회적 임금이 가지는 가장 큰 맹점은 노동자와 시민들이 결국 시장으로 순응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띤다. 즉 재화의 생산구조와 서비스의 공급구조는 여전히 시장 메커니즘이 유지된 채 노동자와 시민에게 소득만을 보충할 경우, 포디즘 시기 소비자로 활약했던 노동자들의 소비자로서의 지위가 확대될 것이다. ... 즉 소득보장을 위한 현금급여 형태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반할 수 있는 기재로까지 작동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득보장의 측면은 항상 생산관계와 공급측면의 반자본주의적 기재(‘기제’의 오타인 듯 - 인용자)와 함께 고려되고 설계되어야 한다.”(제갈현숙, 위의 글)
- 그렇다면 현물로 지급되는 사회적 임금은 시장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는가. 그 현물의 생산과 유통에는 시장의 법칙이 작동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결국은 시장의 문제로 귀결되는데, (자본주의적) 시장의 한계를 뛰어넘는 무엇이 필요하다는 전제 자체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은 좌파라면 별로 없을 듯하다. 문제는 무엇을 수단으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 결론은 ‘시장은 안 된다’는 선언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시장을 (전면적이든 부분적이든) 대체할 수 있는 기제를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분명한 대안이 아직 없다면, ‘사회적 경제’ 영역의 확대를 전망할 수 있는 기본소득, 앙드레 고르의 표현을 빌자면 “내재적 부”의 창출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소득이 적어도 공허한 논의보다는 한 걸음 진전된 것임이 분명하다. 앞으로 “생산관계와 공급측면의 반자본주의적 기제”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논의가 함께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6.
“기본소득제도가 이행기 강령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장혜경은 ‘이행기강령으로서의 의미를 지닐려면, 자본주의적 소유관계를 포함한 생산양식 그 자체에 대한 극복내용이 들어가야 하는데 이것이 비어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현시기 자본운동(신자유주의와 자본의 위기전가)에 대한 제기와 이에 대한 파열구를 낼 수 있어야 하는데 기본소득제도 내용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비정규 철폐는 언급하지 않고 기본소득이 비정규 차별을 완화할 수 있다든지, 공황시기 자본의 책임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불로소득 중과세를 제기하는 것이 과연 자본주의 폐기를 위한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점이다. 또한 기본소득제도가 대중의 급진화를 끌어낼 수 있다고 하는 점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진보정당의 선거(공약)가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로 이어지는 모델에는 대중의 주체형성전략은 비어있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노동의 부분적 탈상품화와 사회적 경제영역의 창출이 어떻게 반자본주의로 이어질 것인가에 대한 내용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제기했다. 토론을 마무리하면서 “기본소득제도에서 제기하고 있는 내수중심의 경제, 경제구조 고도화를 통한 위기 해결책은 현 자본의 세계화 국면에서 불가능한 일국 중심의 해결책으로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며 “결론적으로 볼 때 반자본주의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사노준, 위의 글)
- 일단 나는 ‘이행기 강령’이란 표현 자체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 최소 강령, 최대 강령, 이행기 강령 등과 같은 구분법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다만, ‘이행’이란 표현을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간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용한다면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기본소득이 이러한 이행의 유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자본주의적 소유관계를 포함한 생산양식 그 자체에 대한 극복내용”이 ‘사회화’와 ‘노동자 통제’와 같은 추상적 수준을 넘어설 수 있고, 현실의 대안으로 검토되면서 구체적인 토론이 가능하다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그것을 늘 가장 중요시하면서도 정작 그 구체적인 내용을 대중 앞에 제시하지 못하는 상태는 학적인 영역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이라면 적어도 지양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 “노동의 부분적 탈상품화와 사회적 경제영역의 창출이 어떻게 반자본주의로 이어질 것인가”의 문제가 아직 충분히 숙고되지 않은 점은 맞다. 단지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반자본주의 선언보다는 현실의 변화에 어떻게든 구체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 “일국 중심의 해결책”이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우선 ‘국가’ 자체가 존재하는 한 일국 중심의 해결책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국 중심의 해결책을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은 국가 간 체제 혹은 국가 자체의 종말을 전제해야 가능한 이야기다.
- 다음으로, 기본소득은 일국 일부의 주장이 아니다. 세계적인 공감대를 형성해 이미 지구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운동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기본소득 논의에는 지구적 정의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생태적 지속가능성의 문제에 있어서도 지구적 책임감이 깊이 관여하고 있고, ‘지구적 기본소득’의 실현을 위한 행동까지 존재한다.
- 마지막으로, “반자본주의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정작 자신들이다. 기본소득은 ‘트로이의 목마’라도 만들었다. 물론 그 전술이 성공적인 결과를 낳을지 실패할지 아직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성 안으로 아직 들어가지도 못했고, 목마를 만들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로이의 목마’ 비판자들은 성을 함락시켜야 한다는 강한 신념 말고 아직 구체적인 설계도조차 없는 상태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