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주씨(新安朱氏)장파,중파,계파
1. 관향(貫鄕)의 유래(由來)
ㅁ시조 주희(朱熹) 휘국문공(徽國文公)의 원향(原鄕)이 중국 신안으로서 신안주씨(新安朱氏)로 내려오던 중 문공(文公)의 증손(문공의 차자(次子) 거공(鉅公)의 셋째 손자) 잠(潛) 청계공(淸溪公)은 남송(南宋)의 한림학사(翰林學士)였는데 조정이 몽고 침입으로 화의(和議)에 기울자 이를 개탄(槪嘆), 가정(嘉定) 17년(1224)에 이남일녀(二男一女)와 문하생 엽공제(葉公濟)등 칠학사(七學士)를 대동, 고려로 망명한 것이 전라도 금성(錦城)(현(現) 라주(羅州))에 정착, 그 후손들이 분산(分散)한 입향 세거지에 따라 관향이 릉성(陵城), 전주(全州), 압해(押海) 등 여러갈래였던 것을 조선 고종때 원사부기록국장(元師府記錄局長)이던 주석면(朱錫冕)(문공의 31세(世))이 조정에 발의 조선에 거주하는 주자(朱子) 후(後)의는 문공(文公)의 원향(原鄕)대로 신안(新安)으로 통일해줄 것을 상소하여 윤허가 내림으로써 신안주씨의 복관(復貫)이 통일되었다.
2. 이거(移居)와 분파(分派)
ㅁ청계공(淸溪公)의 사자(嗣子) 여경(餘慶) 여양공(汝陽公)은 려조(麗朝) 고종(高宗)때 악정(樂正)이 되었다. 후(後)에 밀직사(密直使)로 증직되었다. 여양공의 장자(長子) 문절공(文節公)은 1260년 남원판관(南原判官)에 서임(敍任)되었다.
ㅁㅁ● 장(長) 파(派)
문절공(文節公)의 장자(長子) 인장(印長) 정숙공(正肅公)은 려조(麗朝) 충렬왕 1315년 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되었다. 후손들은 주로 전라도지방에 산거(散居)하고 있다.
ㅁㅁ● 중(仲) 파(派)
문절공(文節公)의 차자(次子) 인원(印遠) 문간공(文簡公)은 1277년에 한림학사(翰林學士), 1278년 안주병마판관(安州兵馬判官), 1301년에 경상안렴사(慶尙按廉使)를 거쳐 삼사좌윤(三司左尹)이 되었다. 문공의 11세(世) 정공(精公)은 조선(朝鮮) 개국공신의정부좌찬성의금부사(開國功臣議政府左贊成義禁府事) 봉웅성군(封熊城君)이다. 문공의 19세(世) 몽룡(夢龍) 무열공(武烈公)은(1563∼1633) 선전관(宣傳官) 금산군수유원진병마절제사(金山郡守柔遠鎭兵馬節制使) 증가선대부형조판서(贈嘉善大夫刑曹判書)에 (향사(享祀) 진주 평천서원(平川書院)) 문공 25세(世) 광성공(光成公)(1714∼1775)이르렀다개녕(開寧) 등지를 거쳐 성주(星州) 용암(龍岩) 지수동(智水洞)에 입향, 1599년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나고 1602년 전쟁공신 선정을 논의할 무렵 무열공의 전공을 시기하는 권신배들이 또 한차례 무열공을 모함한 사건이 일어났다.선조 실록을 보면 화수와 함희적 두 역적의 초사 에 무열공이적들과 모의한 적수라고 하여 무열공이 수감 되었다.
그러나 무열공의 충의와 전공을 잘 알고계신 선조대왕 은 화수 가 괴수라는 말은 믿을것이 못된다.
주몽룡이 비록 용맹스럽고 날새다하나 어찌 역적의 우두머리가 되겠는가 ? 하시고 이른바 괴수라고
하는 주몽룡등 5사람이 수감되어 있는데 , 어찌 괴수가 다섯 사람씩이나 되겠는가?
하시며 친국을 거절했다.그후 조사결과 무고임이 밝혀져 수감된지 70여일만에 석방되었다.
이 무고 사건으로 인하여 억울하게도 무열공은임진 공신록에 오르지 못하였다.
그후 무열공은 8년만에 고향집을 찾아갔으나 왜란으로 인하여 고향마을은 폐허가 되고 일가친척은
물론 친 자손들 마저 유리되어 생사를 알수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공은 착잡하고 슬픈 심정을 달래며 험난한 세상을 우려하여 가계의 계보를 정리한 다음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기셨다.아~! 나의 선조는 무원인 이다.
후손들은 난을 피하여 각지방으로 피난. 경북 칠곡 .대구.성주 용암 지수, 마월(麻月), 지수동에
주자(朱子) 영정을 모신 영각(影閣) 여수.고흥.강진.완도.영암.해남. 등지에 산거(散居)하다.
ㅁㅁ● 계(季) 파(派)
문절공의 삼자(三子) 인환(印還) 첨의공(僉議公)은 첨의부사(僉議府使)에 이르렀다. 1272년 공(公)은 조정이 나약해짐을 개탄 이안사(李安仕)와 더불어 함경도 안변에 북사(北徙)했다. 후손들은 이북(以北) 각지에 산거하고 있다
52. 신안주씨(新安朱氏)
【시조】주잠(朱潛)
【인구수】151,227명 (2000년 현재).
【주요 파】▲능성파 ▲웅천파 ▲전주파.
시조 청계공 주잠은 중국 남송 사람으로 유명한 유학자인 주자의 증손이다. 신안은 중국 하남성의 지명이다. 한림원태학사였던 그는 남송이 몽고에 망하자 아들 주여경과 문하생 섭공제 등 7명의 학사를 데리고 고려로 망명했다. 중원의 주인이 된 원은 고려에 주잠의 압송을 요구했다.
주잠은 이때 이름을 적덕(積德)이라 고치고 용담(현 전북 진안군 용담면)에 숨었다. 본관인 신안도 쓰지 못하고 능성을 사용, ▲능성주씨(綾城朱氏)가 됐다. 세월이 흐른 뒤 아들 여경은 고종 때 은사과에 올랐고, 여경의 아들 문절공 열(悅)도 문과에 올랐다.
주열은 천성이 활달하고 검소한데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뛰어나 원종의 신임을 받았다.
원종 때 병부랑중으로써 충청. 경상. 전라 안무사로 나가 크게 치적을 올렸으며 능성군에 봉해졌다. 그는 또 충열왕 때 정조사로 원에 파견돼 공녀 2천명을 요구하는 원세조 쿠빌라이를 설득, 무마시켰다.
주열에게는 인장, 인원, 인환 등 3형제가 있었다.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3형제의 후손이 능성파, 웅천파, 전주파로 갈린다.
주인장(고려 예부상서)과 주인원(병부상서)의 후손들은 이성계가 개국하자 새 왕조에 충성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박해를 받고 주씨들은 벼슬에서 멀어졌다.
주인장(능성파)의 후손은 전남지방에, 주인원(웅천파)의 후손은 경상도 지방에, 주인환(전주파)의 후손은 함경도 지방에 흩어져 농사짓고 학문하는 전통을 이었다.
한편 막내 주인환은 일찍이 이태조의 고조부 목조와 함께 전주에서 함경도로 옮겨가 산 인연을 맺어 그 아들 주단이 태조의 왕고모부가 된다. 주단의 증손자인 주인은 이태조와 죽마고우로 형제같이 자란데다 혈연관계도 있어 위화도 회군 등에 행동을 같이해 조선의 개국공신이 됐다. 조선조 때 주씨 문중의 급제자는 모두 31명. 이중 22명이 주인환의 후손 즉 전주파다.
주몽룡은 능성파로 빛을 못 본 종파였으나 무과에 급제했다. 금산군수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강덕룡, 정기룡 등과 함께 거창 우지현 싸움에서 왜적을 격파, 3룡(龍)으로 불리었다.
유명한 의기 논개도 신안주씨 인물이다.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의 사랑을 받았으나 진주성이 함락되자 촉석루에서 왜장을 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
구한말과 일제 때 주씨 문중에서는 주진수, 주기철, 주용규, 주석환, 주종기 등 숱한 독립투사가 나왔다.
주기철은 웅천에서 남학회를 조직,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3.1운동 때 시위를 주동한 뒤 목사가 되었다. 예수장로회 목사로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신앙구국에 헌신하였다. 일제 말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순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