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나무
지팡이
샘내마을이
개발되기 전
한때,
우리
집
마당에는
몸체가 기둥처럼 튼튼하고 기름진 가지가 사방으로 높게 펼쳐져진 큰 살구나무가 여름 내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봄이 오면 연보라 빛
꽃이 피고 지면서 푸른 열매가 자라기 시작하여 한 여름에는 붉고 노란빛으로 농 짙게 잘 익어 눈부신 햇살 사이로 미풍에 살랑거리면서 새콤달콤한
맛을 진하게 풍긴다.
전원교회인
우리 집 마당가에 있는 앵두 포도 사과 호두 밤 대추나무들이 다 제몫을 잘하고 있는데, 사택 문 앞마당에 포근하고 우람하게 우뚝 서있는
살구나무는 나무들의 제왕 격이었다. 마당가에 붉게 핀 어여쁜 장미들이 살구나무를 향하여 궁녀들처럼 사뿐히 꽃봉오리를 숙이고 담장 밑에는 키가 큰
향나무들이 제왕의 근위병들처럼 당당하고 기풍 있게 도열(堵列)해 있다.
제왕과
같은 살구나무아래에는 평상이며 의자와 식탁까지 놔두는 야외 응접실이다. 조용하게 앉아 책을 읽으면서 쉬노라면 고양이가 소리 없이 닥아 와 낯짝을
가랑이에 비벼댄다. 이때 대문가에 있던 누렁이와 점둥이가 어느새 알고 짖어대면서 달려오면 고양이는 속이 상해서 “너희들은 참 치사 하다 날
잡아봐라 야옹”하면서 휙 몸을 날려 나무위로 올라가 버린다.
날이
밝은 아침나절이나 해가질 저녁 무렵에는 뒷동산 잡새들과 까치가 살구나무가지에 날아와 한참을 짹짹 재잘거리며 노는데, 집 뒤에 사는 닭과 오리
칠면들이 합창을 하듯이 꼬꼬댁 꿱꿱 꾹꾹거리며 “너희들 우리 집에 왜 왔어”라고 텃세를 부린다. 이런 살구나무 아래 한쪽에는 집 사람이 타는
작은 오토바이와 내가 동네와 파장동까지 나들이 할 때 타는 자전거를 세워 두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우리 식구는 물론 교인들과 방문객들이 앉아서
대화를 하고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는 쉼터이다. 또 가을에는 뒷산자락에서 인분과 개똥을 먹고 한 아름 되게 커서 누렇게 익은 호박을 따
모아놓고, 호박을 썰어 짓이기고 찹쌀가루를 덩어리지게 풀어 끓이면서 완두콩을 넣어 호박죽을 쑤거나 호박떡을 만들어 교인들과 방문객들과 모두
나누어 먹으면서 돌아갈 때에는 잘 익은 호박을 한두 덩어리씩 가져가라고 안겨주던 곳이다.
어느
듯 살구의 계절이 가고 연못가에 있는 모과나무 아래서 향어들이 풍기는 물 냄새를 맡으며, 해가 질 무렵부터 풀냄새 그윽한 잔디밭에서 대추
여름사과 밤 포도 호두가 익어가는 향취에 젖어 가든 식탁에서 저녁을 먹고 진한 커피 한잔을 마신다.
♬주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워 볼 때 하늘에 별 …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내 물은 주님에 솜씨 노래하도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 하 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나올 때 지도자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판결을 받으려고 족장들의 지팡이를 거두어 증거 장막 안 여호와
앞에 놔두었다. 다음날 아침 하나님이 제사장으로 세운 아론의 마른 나무 지팡이에서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열매가 열렸더라.”라는
구약 민수기 17장에 기록 되어있는 신비한 말씀을 상고 해 본다.
자연과
다양하게 접하고 있는 우리 집은 北수원
파장동에서 경부선 철길 쪽으로 한참을 들어가 들판 가운데 있는 야산 아래, 나일 강에 있는 <고센>같은 곳이었다. 마을 앞에는 작은
냇물이 흐르고 수돗물이 들어오지 않아 집집마다 샘을 파서 쓰고, 뒷산에는 꿩 산비둘기 산토끼 너구리와 족제비가 살고 있었다. 또 우리 집 아래
돌배나무 숲속에는 뜸부기가 둥지를 틀고 냇가에는 청둥오리들이 살고 있었다. 날이 흐릴 때면 왜가리들이 전투기 편대처럼 가지런히 떼를 지어 북쪽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보면 비가오고, 북쪽으로 날아갔던 왜가리들이 회향(回向)하여 남쪽으로 가는 것을 보면 날이 개였다.
오십여
세대가 냇물로 농사를 짓고 샘물을 마시고 살기에 샘내마을 천천동(川泉洞)이라고 부르는 우리 동네 뒷동산에는 동제(洞祭)를 지내는 당집이 있고,
길게 생긴 마을 양쪽 끝에는 점치고 굿하는 무당집이 있었는데 남쪽 끝에 있는 무당집은 성업 중이 있었다. 해마다 봄이 오면 농사일을 하기 전에
온 동네가 모여 무당을 불러 큰 굿을 한 다음 점괘에 따라 지명 된 사람들이 뒷산에서 소나무를 베어다가 장승을 깎아,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을
만들어 파장동 쪽에서 들어오는 길목과 지지대고개를 넘어 들러오는 마을 입구에 세웠다. 주민들은 말 못하는 장승에게 올해의 농사를 잘 짓게
해달라고 빌고 가을 추수를 다 끝낸 후, 소를 잡아 동제를 지내고 고기를 나누어 먹으면서 스스로 작은 민속촌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나는
1986년 봄 샘내마을로 이사를 와 마을 이름대로 <수원샘내교회>를 설립하고, 동네를 틀어쥐고 주민들을 미혹하고 있는 악령들과 영적
싸움을 하면서 농촌목회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마을 중간쯤 삼거리에 있는 허름한 집을 사서 교회를 시작하였는데, 다른 곳에서는 허락을 잘 해주지
않았던 갱생보호소가 이미 마을에 한 쪽에 들어와 있었다. 주로 청송-감화소에서 오랜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온 형제들이 사회에 다시 적응하기까지
6개월간 생활하도록 주거와 식생활이 제공되는 곳이다. 우리교회에는 자연히 갱생보호소에 와 있는 형제들이 자주 찾아와 주었는데 눈물겹도록 좋은
형제들이 있었던 반면에 수없이 교회를 힘들게 하고 떠나간 사람들도 있었다.
한편
동네에는 북쪽으로 뚝 떨어진 외딴 곳에 별장 같은 집이 있었다. 이집에는 서울에서 형편이 좀 괜찮은 분들이 별장 겸 해서 짓고 살면서 주인
되시는 분은 서울 중앙일보사에 근무하는 중견 사원이었다. 동네와 격리되어 문이 굳게 닫힌 그 집에 집사람이 찾아가 전도를 하여 그 집의 안주인이
우리교인이 되어 양능민 집사님이 되었고 그 집 애들 지은이와 우용이 경은이가 주일학교에 나왔다. 그리고 1987년 봄 우리가 그 집 아래
1층으로 세를 들어 살면서 양집사의 시어머니, 윤보선 전 대통령의 조카이며 여의사 생활을 하셨던 윤영은 할머니가 우리교회에 나와 세례를 받게
되었다.
동네주민들은
농사를 본업으로 하면서 인근에 있는 SK공장에
다니거나 부업으로 원예시험장에 날일을 하려 다니고 있었는데,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아래쪽 저수지에 있는 붕어와 잉어들이 생수를 마시려고 내
물로 마구 올라올 때면 동네사람들이 양동이에 가득하게 잡아왔다. 1989년 이른 봄 양능민 집사님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어 그
주택을 매입하여 2층을 예배당으로 아래층은 사택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정자나무 같은 살구나무가지는 2층 테라스까지 쭉 뻗어 있어 창문을 열고
주황빛 살구를 따먹었다.
1994년
여름 살구나무 잎 새가 유난히도 짙푸르더니 가지가 휘어지도록 살구열매가 예년보다 많이도 열렸다. 한참 잘 익은 살구를 보는 이마다 보기 좋고
먹음직하다고 예찬을 하고, 교인들과 방문객들이 연일 따먹으면서 그 여름은 가고 초가을이 왔다. 아직 잎이 떨어지려면 한참을 더 있어야 하는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나무 가지에 붙은 푸른 잎이 자꾸만 시들면서 그렇게 기름지고 싱싱하던 살구나무가지가 하나씩 죽어가는 것이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기이한 현상을 보면서 마지막 살아남아있는 가지를 잘라 지팡이를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외딴 우리 집을 포함한 뒷산과 들판이 이미 택지개발지역이 되어 다음해 봄에는 집을 비우고 아랫마을로 이사 가게 되었다. 살구나무는
그것을 알았기에 마지막 열매를 많이 맺혀주고 가을이 오기 전에 스스로 시들어 버린 것일까 (?) 제왕과 같았던 그 살구나무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다만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고 꽃이 피어 살구 열매가 열렸던 것처럼, 살구나무와 하나님만 아시는 신비함인 줄 믿고 그 가지로 만든 지팡이를
고이간직하고 있다. 2006.
1. 24 <샘내마을>에서
(순담)
崔
建 次 牧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