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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념과 순종 / 송봉모 신부님
<고통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태도> (1)
고통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태도를 야곱과 요셉의 생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기 전에 여러분, 인간의 눈이 왜 흰자위와 검은자위로 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사람이 물체를 분별하는 것은 흰 자위가 아니라 검은자위입니다.
왜 하느님께서 인간의 눈을 만들었을 때, 검은자위로서 보게 했을까요? 이것은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너의 인생이 어두울 지라도
너의 현실이 눈동자 같이 컴컴하다고 할지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라.
오히려 그 어두움을 통하여 밝은 미래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이제 야곱과 요셉의 생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여러분들이 어떤 식을 고통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초대하려고 합니다.
창세기를 보게 되면 야곱과 요셉이 각각 자기 지나온 인생을 정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인생을 정리하는 모습들이 서로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 차이점을 보게 되면 우리가 앞으로 고통앞에서 어떻게 태도를 갖고 살아야 할지 분명히 정해지게 될 것입니다.
먼저 우리의 성조 야곱의 이야기 입니다. 그가 이집트 재상으로 있던 아들 요셉을 만나기 위해 이집트까지 왔을 때, 황제 파라오가 야곱에게 나이를 묻습니다. "춘추가 어떻게 되십니까?" 그 때 야곱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세상을 떠돈지 130년이 됩니다. 얼마되지는 않사오나 그 날이 다 궂은 일 뿐이었습니다. 살아온 나날이 다 궂은 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생입니다.
야곱의 생은 정말 쉽지 않은 생이었습니다. 참으로 궂은 생이었습니다. 하나의 투쟁이 지나가면 또 다른 투쟁이 기다리고 있는 그런 집념의 생이었습니다. 인간의 운명이 바로 그 사람의 운명이라는 말이 있듯이 야곱은 자신의 그 집념으로 인해서 참으로 고달프고 궂은 인생을 조각 했던 것입니다.
그는 장자권에 대한 집념에서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받아내면서 그 결과로서 집을 떠나 방랑 생활을 20 년간, 타지 생활을 했어야 했습니다. 살아 생전에 사랑하는 어머니 레베카를 보지 못했습니다. 또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집착속에서 그 연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참 인색하고 고약했던 장인 밑에서 돈 한푼도 건지지 못한 채 20년을 노력봉사 했어야 했습니다. 노동력 착취이지요.
그 다음에 돌아오는 길에 야뽁강에서 어떤 남자를 만났는데 하느님의 천사이지요. 이 남자와 씨름을 하면서 축복을 받아내려는 집념으로 이 남자를 놓치지 않고 있다가 채여가지고 한평생 절름발이로 살아가게 됩니다.
또 성미가 급하고 잔인한 성격을 소유한 자녀들로 인해서 항시 마음 조아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자녀들이 세켐의 남자들을 무더기로 죽이게 되면서 언제 어디서 세켐족이 복수할지 몰라 늘 심장 조아리면서 살아야 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맏아들 루우벤이 감히 아버지 야곱의 소실을 건드리면서 같이 잠자리를 하는 불륜을 저지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고통은 20년 타지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돌아오는 바로 그 길, 이제는 행복 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영원한 연인 라헬이 14 년을 기다려서 결혼한 라헬이 길거리에서 죽게 됩니다. 그래서 그 라헬을 오늘날의 베들레헴의 길거리에 그냥 묻게 됩니다.
이러한 고통이 있고 나서 그 라헬이 낳아 준 요셉을 극진히 사랑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야생 동물에게 무참하게 찢겨서 죽었다는 병거소식을 다른 아들들로부터 듣게 됩니다. 이러고 나서 21년 뒤 이제는 눈이 침침하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야곱에게 손주들이 먹을 것이 없어 배를 움켜 쥐고 땅에 딩구는 꼴을 또 봐야했습니다.
이 하나 하나가 엄청난 고통입니다. 그리고 막내 아들 벤자민이 이집트 땅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또 잃어 버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지요. 그의 생은 거친 풍파속에 그야말로 내동댕이 쳐진 험난한 생입니다.
<고통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태도> (2)
한편 그의 아들 요셉의 생을 보겠습니다. 형의 질투를 사서 살해당할뻔 하다가 열일곱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이집트 노예로 끌려 갔습니다. 노예생활 10년 째, 상전의 아내를 겁탈하려 했다는 그런 무고한 죄를 받아 강간 미수죄로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무기수로서 살게 됩니다. 하느님의 돌보심속에 3년 후에 옥살이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누구의 생이 더 고통스러울까요? 언뜻 보면 야곱의 생이 더 고통스럽고 더 비참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비교해 봅시다. 야곱의 생일까요? 요셈의 생일까요? 야곱은 유랑생활을 했지만 요셉처럼 노예생활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야곱은 14년 동안 땡전하나 건지지 못하고 일을 했지만 그래도 자유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철저히 자기 자유가 없는 노예신분이었습니다.
또 야곱옆에는 사랑하는 연인 라헬이 있었지만, 요셉옆에는 사랑하는 연인이 아니라 상전의 부인이 끊임없이 성적 시달림을 했습니다. 요셉은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무기수로서 감옥에서 살았습니다.
요셉의 생이 아버지 야곱보다 훨씬 힘겹고 고통스럽고 또 내일을 모르는 생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야곱과 요셉의 생을 비교하면 야곱의 생은 참 힘들게 보이는데 요셉의 생은 미풍에 돛단배 가듯이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아버지 생은 더 힘겹게 보고 아들의 생은 더 축복 받은 것처럼 보일까요? 그것은 야곱의 집념과 요셉의 순종때문에 그렇습니다. 야곱은 집념이 컸기 때문에 하느님을 향한 의탁과 항복이 무척 늦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눈여겨 보시게 되면 야곱이 하느님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한참 뒤에 나옵니다. 한편 요셉은 어떤 처지에서든 항시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순리대로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보다는 축복이 더 부각됐던 것입니다.
요셉의 삶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존된 삶입니다. 그는 단 한 번도 비극적 사건앞에서 굴복해본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 때문에 어떤 시련이 온다해도 그는 늘 하느님안에서 그 시련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선의대로 요셉의 생을 이끌어줄 것이라는 것을 철저히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심점이 항시 하느님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창세기를 다시 읽어본다면 요셉의 이야기를 읽을 때 항상 주어가 하느님입니다. 제가 몇가지 증거를 드립니다.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파라오의 두 시종장이 꿈을 꾸고 그 꿈 앞에서 요셉에게 해몽을 청합니다. 그 때 요셉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꿈을 푸는 것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얘기 쉽지 않습니다. 요셉이 꿈 때문에 인생을 망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꿈 이야기를 하니까 "하느님만이 꿈을 해석하실 분입니다." 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황제 파라오가 역시 꿈을 해석해 달라고 했을 때도 파라오 앞에서 자기가 해석하는 식으로 하면 얼마나 ... 우리들의 심리잖아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제가 푸는 능력이 있어서 꿈을 해석하겠습니까? 폐하께 꿈을 해석해 줄 분은 하느님 뿐이십니다." 그는 하느님 뿐입니다.
긴 세월이 지나 형님들을 만났을 때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목숨을 살려주려고 저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집트로 보냈습니다." 온 땅에 통치지가 됐습니다.
파라오의 재상으로서, 요셉을 통치자로 임명한 분은 분명히 파라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앞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에집트를 다스리는 재상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그는 여려운 시간이나, 영화로운 시간이나 항상 주어가 하느님입니다. 야곱이 죽기 직전에 요셉의 두 아들 축복 주려고 불렀습니다. "애들은 누구냐?" 고 했을 때,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저를 위해서 주신 아들입니다." 라고 얘기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요셉의 삶은 철저히 하느님 중심입니다. 하느님이 언제나 자기를 돌볼거라는 것을 끝까지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그런 고통에 밀어 넣는 형들에 대해서 단 한 번도 그것을, 상처를 할퀴면서 저주하면서 그 고통을 받아들인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기쁨이든 슬픔이든, 편안함이든, 고통이든 항시 하느님과 함께 받아들였던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안에 하느님이 현존하는지 현존하지 않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한 신앙인 안에 그의 마음과 삶속에 하느님이 현존하고 있다 없다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가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이 현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이 누리는 마음의 평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어떠한 시련속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하느님의 현존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통해서 더 위대하신 분, 우리 주님을 보게 됩니다. 바로 요셉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환경에서 늘 평화를 잃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요셉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기 때문에 요셉의 삶이 그렇게 힘겹게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야곱의 삶은 보이는게 집념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도 힘겹게 보이는 것입니다.
(풍랑속의 고요)
요셉의 삶을 더듬어 보면서 다시금 여러분 앞에 언급하고 싶은 인물은 빅터 프랭클린 입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인물이지요. 나치에 의해서 가족도, 재산도, 집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특별히 그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끊임 없이 어떤 글을 써 오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의미 추구를 통한 치료" 인데요. 그것을 거의 완성하였기 때문에 이제 출간하기를 기다렸던 사람인데 그것마저도 빼앗기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강제수용소에서" 라는 책을 읽어 보게 되면 그가 "의미 추구를 통한 치료" 그 원서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애걸하는 내용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저에게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입니다. 아니 제 생명보다도 더 귀중합니다. 이것은 제 자신보다 더 중요합니다. 제발 이걸..." 그랬을 때 그 간수가 "미친 새끼." 그러면서 따귀를 때립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빼앗아 버립니다.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모든 것을 다 박탈당하고 이제 남은 것은 벌거벗은 몸둥아리 뿐입니다. 이러한 생애에 있어서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프랭클린이 절망에 빠집니다. 그런데 그 절망이 아주 잠시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다 발가벗기고 나서 가스 처형실에서 죽어간 한 죄수의 누더기 옷을 입게 됩니다.
그런데 그 누더기 옷을 입으면서 우연히 윗 주머니에 들어 있는 종이 한장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종이는 히브리 기도서에서 찢어 낸, 종이 조각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님 우리의 하느님은 한 분 뿐이신 주님이시라. 그러니 주님, 우리의 하느님을 너는 온 마음과 온 정신과 온 힘을 다해서 사랑해야 한다."
깨스실에서 죽어간 죄수가 늘 읽었던 종이 쪽지를 발견하면서 프랭클린은 다시 절망속에서 일어납니다. 삶의 의미를 다시 찾습니다. 이 프랭클린이 이야기 합니다.
우리 인생의 언떤 험악한 처지에서도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는 수만 있다면 우리가 삶의 의미를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가진 사람은 어떻게 사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님 우리의 하느님은 한 분 뿐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니 주님, 우리의 하느님을 너는 온 마음과, 온 정신과, 온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이 혼탁한 시기에 도대체 어디서 우리가 삶의 의미, 삶의 가치를 찾겠습니까? 그럭저럭 그냥 살다 죽는 것입니까? 우리가 정말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주님을 우리 이웃에게 전하면서 살아갈 때입니다.
이것만 있다면 어떤 절망 앞에서도 우리는 삶의 의미를 놓치지 않습니다. 이제 강의를 마무리 하면서 제가 결론적인 시를 읽겠습니다.
복음서를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 가시면서 뱃고물을 베개삼아 주무시게 됩니다. 그런데 거친 풍랑이 치면서 제자들이 배안에 들이 닥친 물을 퍼 내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주님께서는 쿨쿨 주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배가 갈아 앉을까봐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바로 이 장면에 대해서 우리 동료 예수 회원 슈미드 콘스가 쓴 영성시입니다.
이 영성시를 들으면서 지난 4 시간 동안의 모든 강의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풍랑속의 고요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의 행위를 우리의 불안한 몸짓으로 알아듣게 합니다.
많은 것들이 우리 영혼을 혼란시키고 심지어는 성난 파도처럼 초조하고 조급한 두려움으로 우리를 엄습합니다.
우리가 혼신을 다해 노를 젓지만
이 모든 노고가 허사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모든 가능성을 다 동원해 보지만 종래 우리는 지쳐버릴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의 제자들처럼
다급한 기도속에서 당신의 자비를 청합니다.
주님, 저희가 침몰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돌보시지 않으십니까?
저희를 구해 주십시오.
같은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십니다.
성서는 이러한 예수님에 대해 도전적인 언어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분은 "뱃고물을 베개삼아 주무시고 계셨다."
침몰 한 가운데서의 방임, 풍랑 속의 절대 고요.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의 손에 굳게 자신의 닻을 내리고 계신 분.
그 아버지가 바로 자신의 고요이며 안전이심을
세상의 그 어떤 힘도, 고통도,
그 분을 고요밖으로 데려내 올 수 없음을 아시는 분
우리는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절대 고요에 이를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왜 너희는 아직도 두려움을 지니고 있느냐? 너희는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두려움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두려움들 하나 하나를 고백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로 믿어야 합니다. 깊고 무서운 심연보다 더 깊은 밑 바탕을, 바로 헤아릴 길 없는 하느님의 충실한 돌보심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어떤 위험에서도 홀로 놔 두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우리는 모든 풍랑과 불안 그리고 죽음까지도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저희 모두는 당신과 같은 배를 타고 있습니다. 거센 풍랑이 몰아치고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해도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만 당신을 부르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풍랑속의 고요이십니다. 당신은 모든 심연을 넘어선 굳건한 기초이십니다. 그러니 저희가 해야 할 오직 한 가지는, 당신을 믿고 풍랑속에서 당신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글은 박영희 자매님께서 송봉모 신부님의 "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이란 강의 테잎에서 녹취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