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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나는 시 스크랩 扶安妓女 李梅窓
스카이이글 추천 0 조회 3 14.01.03 16: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983년 8월 24일 전라북도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의 여류예술인 매창의 묘로 토

광원분묘형이다. 묘 앞에는 높이 100㎝, 윗넓이 39㎝, 아래넓이 35㎝의 ‘명원 이매창지묘(名媛李

梅窓之墓)’라고 쓴 묘비가 서 있다.

 

                                <春思>

        東風三月時  處處落花飛 

     동풍삼월시  처처낙화비 


     綠綺相思曲  江南人未歸 

    록기상사곡  강남인미귀


                동풍 건 듯 부는 삼월 낙화는 여기 저기 날고,

                가인의상사곡은 애절한데 강남의 님은 돌아오지 않는다.


                               <自恨>

    

       東風一夜雨  柳與梅爭春 

       동풍일야우  유여매쟁춘 


          對此最難堪  樽前惜別人 

     대차최난감  준전석별인


   하룻밤 봄비에 버들과 매화는 봄을 다투는데 

술잔 놓고 이별을 아끼는 아타까움 참기 어렵다.


 

 

          ― 江臺卽事( 강대즉사)-

 

        四野秋光好, 獨登江上臺

         사야추광호, 독등강상대.


        風流何處客, 携酒訪余來

          풍유하처객, 휴주방여래. 

 

    가을빛 무르익어  온 들이 곱습데다.

    강가를 거닐다가  정자 위에 오르니,

어디서 멋 아는 사내  술병 들고 옵데다.


 

 

李梅窓이매창(1572~1619) :본명은 이향금(李香今). 호는 매창(梅窓), 또는 계생(桂生)

조선 선조 때의 기생이며 여류시인인 이매창은 1573년에 당

시 부안 현리였던 이양종(李陽從)의 庶女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었기에 癸生, 또는 癸娘이라고도

하였다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히며 기생이 되었는데,  어려서부터 시짓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 주위 사람들을 곧잘 놀라게 했다. 또한 노래, 거문고, 한시에 이르기까지

 모두 잘하였을 뿐아니라 몸가짐과 언행이 매우 단정한 기녀였다

 

부안의 명기로 한시 70여 수와 시조 한 수가 전해지고 있으며 시와 가무에도 능했을 뿐 아니라 특

히 정절의 女人으로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신분이 기생이었던 그녀에게는 술에 취한 손님들이 덤벼들며 집적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매창은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 않았으며, 시를 지어 무색하게 하기도 하였다.


조선 선조 때의 기生이며 여류시인인 이매창에게

언젠가는 지나가던 나그네가 그의 소문을 듣고 와서는, 시를 지어 건넸더니. 매창이 곧 그 운을

받아서 응답하였다.


 

 

             平生恥學食東家  獨愛寒梅映月斜  

             평생치학식동가  독애한매영월사  


             時人不識幽閑意  指點行人枉自多

             시인부식유한의  지점행인왕자다


 

 

                        떠돌며 밥 얻어먹기를 평생 부끄럽게 여기고

                        차가운 매화가지에 비치는 달을 홀로 사랑했었지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어라.


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서운해 하면서 가 버렸다고 한다.

1590년 무렵 부안을 찾아온 시인 촌은 유희경(村隱 劉希慶)과 만나 사귀었다. 매창도 유희경을

처음 만났을 때 시인으로 이름이 높던 그를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촌은집>에 이런 기록이

있다.


그가 젊었을 때 부안에 놀러갔었는데, 그 고을에 계생(癸生)이라는 이름난 기생이 있었다.

계생은 그가 서울에서 이름난 시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유희경과 백대붕 가운데 어느 분이십니

까?"라고 물었다. 그와 백대붕의 이름이 이 먼 곳까지도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이때 비로소 파계하였다. 그리고 서로 풍류로써

즐겼는데 매창도 시를 잘 지어 <매창집>을 남겼다.


 


 

         春冷補寒衣  紗窓日照時 

         춘냉보한의  사창일조시 

 

         低頭信手處  珠淚滴針絲

         저두신수처  주루적침사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구슬 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을 적시누나

 

 

 

16년 동안 헤어져 있다 1607년 유희경을 다시 만난 기록이 있지만 매창은 그와 헤어진 뒤 10여 년

동안 마음으로부터의 정을 주는 사람이 없이 유희경만을 그리며 살았다.

유희경은 원래 천민이었으나 상례에 밝아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례를 집례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으며 영의정을 지낸 사암(思庵) 박 순으로부터 당시를 배웠다. 임진왜란때에는 의병으로 나가

 싸운 功으로 선조로부터 포상과 교지를 받았다. 그는 한시를 잘 지어 사대부들과 교유하였으며,

 같은 천인신분으로서 시에 능하였던 백대붕과 풍월향도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하였다. 9

2세까지 장수했으며 명예직이었으나 종이품 한성부윤까지 제수받은 사람이다.


매창이 죽은 연대는 여러 가지 주장과 추측이 있으나 1668년 개암사에서 그녀를 추모해 발간한

『매창집』에 따르면, 광해군 2년(1610) 38세의 한창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매창의 묘비는 그녀가 죽은 지 46년 만인 1656년에 처음 세워졌다가, 오랜 풍상에 자획이 마멸되

어 1917년 부안의 국악원 부풍시사에서 현재의 비를 다시 세웠다.


이듬해(1610) 여름 허균은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균은 이를 슬퍼하며 두 편의 시를

 지었다. 다음은 그 중 하나이다.


哀桂娘(계낭(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妙句土甚擒錦  淸歌解駐雲

묘구토심금금  청가해주운

 

兪桃來下界    藥去人群

유도래하계    약거인군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燈暗芙蓉帳   香殘翡翠裙

등암부용장   향잔비취군


明年小挑發   誰過薛濤墳

명년소도발   수과설도분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부안현 아전 출신으로 말단 관리였던 매창의 아버지 이양종은 숨은 풍류객으로,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거문고를 배웠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편부슬하에서 자란 매창은 차츰 천재적

인 재기(才氣)를 발휘해 시와 거문고에서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열 살 되던 해 하루는 백운사에

서 시 짓기 대회가 열려 부안의 내노라는 시인 묵객이 모두 모였다. 구경삼아 절에 간 매창은 실로

절묘하기 이를 데 없는 시를 지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步上白雲寺  寺在白雲間

보상백운사  사재백운간


白雲僧莫掃  心與白雲閑

백운승막소  심여백운한



                          걸어서 백운사에 오르니

                          절이 흰구름 사이에 있네

                          스님이여 흰구름을 쓸지 마소

                          마음은 흰구름과 함께 한가롭소


 

          

                                                 백운사(충북 괴산사리면 백운사 )

 


 

눈매가 유난히 맑고 착한 마음씨를 지녔던 어린 매창은 아버지마저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나자 천

애의 고아가 되어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몸가짐이 바르고 시문에 능했던 매창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이 알아주는 명기(名技)가 되었다.

얼굴은 비록 자색이 빼어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사람을 대할 때는 항상 성심을 다하였다고 한다. 어차피 뛰어난 미모는 일순간의 풍정일 뿐 세월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다. 하루는 술꾼이 매창

의 소매를 잡아 끌다가 옷이 찢어졌다.


 

 

醉客執羅衫   羅衫隨手裂

취객집라삼   나삼수수열


不惜一羅衫  但恐恩情絶

불석일라삼  단공은정절


술 취해 나그네 나삼을 잡아

옷소매가 갈기갈기 찢겨졌네.

옷이야 무엇이 아까우리요

다만 그 온정 끊어질까 걱정이네.


매창은 화를 내기는커녕 정이 끊어질 것을 두려워할 정도로 마음이 따뜻했다. 어느 누가 매창을

노류장화의 기생이라 할 것인가. 그녀는 비록 기생의 신분이었지만 풍류와 멋을 아는 여인이었다.


청춘의 외로움에 지쳐 있을 20세의 매창에게도 다정다감한 따뜻한 사랑은 찾아왔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뜰에 심은 매화의 하얀 꽃망울이 가냘프게 떨릴 무렵이었다.

당시 중앙 조정에서 상례학(喪禮學;사람의 사후 처리 절차를 행하는 학문)에 가장 밝았던 촌은

유희경(村隱 劉希慶;선조 때의 賢士. 벼슬을 두루 거쳐 가의대부에 승진하고, 93세에 세상을 떠

남. 증 한성판윤)이 한양에서 내려온 것이다. 오십 객의 유희경 또한 시에 정통해 매창은 오래 전

부터 사모해 오던 터였다. 매창에 대한 소문은 이미 한양까지 자자해 두 사람은 오랜 연인처럼 쉽

게 어울렸다. 술잔이 오가고 취흥이 돌자 도골선풍의 풍채를 지닌 유희경이 지필묵을 잡아 즉흥시

로 추파를 보냈다.


曾聞南國癸娘名  詩韻歌詞動洛城

증문남국계랑명  시운가사동락성


今日相看眞面目  却疑神女下三淸 

금일상간진면목  각의신녀하삼청


일찍 남쪽에(부안) 계랑이란 시인이 있었는데

시와 노래가 한양까지 울렸도다

오늘에서야 직접 고운 모습을 보니

어찌하여 선녀가 지상으로 내려왔는고


붓을 놓으며 유희경이 매창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기의 마음을 알아 달라는 노객

의 투정이다. 매창 역시 마치 가슴속 깊이 감춰 두었던 연정인 양 능란한 필치로 화답했다.


 

 

幾歲鳴風雨   今來一短琴

기세명풍우   금래일단금

 

莫彈孤鸞曲   終作白頭吟

막탄고란곡   종작백두음


비바람에 울리기가 몇 해이던가

몸에는 짤막한 거문고 하나

이제 외로운 곡조는 타지를 말자

죽도록 임과 노래 부르리

                                  

       

                                                    전북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에 있는 채석강


 


 

서로 그리운 정을 시와 노래, 그리고 거문고로 아낌없이 쏟아놓으니 애끓은 정은 밤을 하얗게

잊게 하고, 그윽한 정취는 짧기만 했다. 다음날 두 사람은 부안의 명소인 내소사를 유람하고 채석

강을 두루 돌아다니며 원 없이 정담을 나누며 행복해 했다.


 

그러나 만나면 반드시 이별이 뒤따르는 법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유희경은 급히

상경을 서둘렀다. 평생을 지조로 살아온 유희경은 모처럼 가인(佳人)을 만나 정열을 기울여 사랑

했으나 뜻밖의 생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소첩은 어찌 하면 좋은지요?”

이별의 주안상을 앞에 놓고 매창이 입술을 깨물며 넋두리를 하듯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애끓는 정이야 난들 어찌 너와 다르겠느냐. 간다고 잊을 일이 아니니 안심하고 있거라.

세상이 평온해지면 곧 부안으로 내려오마.”

“국사도 중요하지만 소첩의 마음은 길길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나으리가 야속하고 원망스러울 뿐

입니다.”

사랑에 빠진 매창에겐 전쟁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장육부가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 고독과 외로움에 매창은 견딜 수 없었고 밤낮으로 임을 그리며

눈물을 뿌렸다. 그러나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고 팔도강산이 왜놈들의 천지가 되는가 싶었다.

전쟁중(각처에서 군사를 모아 관군을 도움)이다 보니 세월이 가도 글월 한 장 없는 형편임에 매창

의 마음은 원망으로 가득 찼다.


松栢芳盟日   思情如海深

송백방맹일   사정여해심


江南靑鳥斷  中夜獨傷心

강남청조단  중야독상심


송백같이 굳게 맹세하던 그날

서로 사랑하기가 바다같이 깊었건만

한 번 가신임은 소식조차 끊겨

한밤중 나 홀로 애간장만 태우오


기다리는 시간은 더디 가고 지나간 시간은 짧아 보인다. 인적이 끊긴 뜰에는 꽃이 피고 낙엽만 뒹

굴었다. 매창은 원망이 지나쳐 미워도 했으나 유희경 없는 세상은 이제 하루도 상상할 수 없었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매라.


임진왜란이 격해지면서 유희경은 의병을 모집해 왜군을 물리치는 데 여념이 없었고, 한편으로는

님을 모시며 충성을 다했다. 하지만 유희경은 그 와중에서도 몇 번의 편지를 매창에게 보내기도

했다. 편지 내용은 모두 매창을 위로하며 그리움이 넘치는 시였다.


 


娘家在浪州  我家在京口

낭가재랑주  아가재경구


相思不相見  斷腸梧桐雨

상사불상견  단장오동우


                    그대의 집은 파도 소리 들리는 곳이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네.

                    서로 그리면서도 만나 보지 못하니

                    애간장은 타는데 오동나무에 비만 내리네.

 

               

 

 

더욱더 귀뚜라미 우는 가을밤은 끝없이 고독감에 휩싸이게 한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휑한

 빈자리는 더욱 혼자라는 사실을 뼛속 깊이 느끼게 하고, 나오는 것은 한숨이요 눈물뿐이다.

속절없는 세월은 가을을 지나 겨울로 치닫고, 한 해가 저물어도 기다리는 임은 오지 않았다.

매창은 텅 빈 방에서 긴긴 밤이 하얗게 새도록 거문고를 뜯었다. 지루하고 답답한 마음에 하루하

루를 보내고 있을 무렵 서울에서 허균(許筠)이 내려와 서로 수작을 하게 되었다. 대문장가 허균과

의 만남은 매창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았다. 하지만 지조를 지키기 위해 잠자리만은 꼭 다른 기

생을 추천했다.

“그 어른이 너를 알고 네가 그분을 아는데 백년을 못 만난들 마음이야 변하겠느냐.”

허균의 충고는 매창의 폐부를 찔렀다. 그러나 며칠을 가까이 지낸 일로 세상에는 무수한 헛소문이

 나돌았다. 매창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으나 세상의 인심이란 다 그런 게 아니던가. 그 후 매창은

병을 핑계 삼아 아예 문을 잠근 채 두문불출하였다. 그때의 서글픈 심정을 다음과 같이 시로 읊었

다.


 

誤被浮虛說   還爲衆口喧

오피부허설   환위중구훤


空將愁與恨   抱病掩柴門

공장수여한   포병엄시문


부질없는 풍문이 세상에 떠돌아

세상의 말들이 시끄러워라

공연한 걱정과 원한만 쌓여

병을 핑계 삼아 문을 닫았소.


그리던 님과 다시 만나

그 후 매창은 천층암(千層庵)에 들어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임을 기다렸다. 비록 매창은 머리는

 깎지 않았지만 마음의 번뇌가 사라지고 가슴 한켠에 순수한 그리움만 깊이 쌓여 갔다.

시와 염불로 세월을 보내니 매창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나의 30이 된 것이다.

어느 날 백발노인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계랑아, 계량이 있느냐.”

밤마다 귀를 기울이며 애타게 기다리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매창은 복받치는 설움을 억누른 채

덤덤히 앉아 있었다. 하지만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10년 만의 재회에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 서로의 변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모진 세월에 비록

두 사람의 겉모습은 늙고 변했지만 마음만은 처음 만났을 때나 변함이 없었다.

“다시 만나 뵙게 되니 진정 반갑습니다.”

“백 년을 못 만난들 변할 수야 있겠느냐. 십 년의 세월이 너무 길었구나.”

오매불망 그리던 임을 보니 매창은 이제 야속한 투정부터 먼저 나왔다.

“이번에 또 헤어지면 십 년 후에나 뵐 수 있는지요?”

“또다시 그렇게 도면 야속한 사람은 오히려 나 자신이로다.”

바로 한양으로 따라온 매창은 유희경의 고매한 인품에 안겨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할까, 한양 생활 3년 만에 매창은 해수병이 재발하여 더 이상 한양에서 살 수

가 없었다. 매창은 간병을 위해 고향인 부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는 서해가 바라다 보

이는 산속에 움막을 짓고 날마다 거문고와 시로 세월을 보내며 병을 치료했다. 이때의 고독감과

외로움을 다음의 시에 절절히 남겼다.


雨後凉風玉簞秋   一輪明月掛樓頭

우후량풍옥단추   일륜명월괘루두


洞房終夜寒?響  搗盡中腸萬斛愁

동방종야한공향  도진중장만곡수


            비 온 뒤 서늘하니 가을이 와

            둥근 달은 다락 위에 높이 걸렸네

            밤새워 임 그리는 풀벌레 소리

            애꿎은 내 가슴만 모두 녹이네


천층암(千層庵)-변산면 도청리 수전동


1990년 전라북도에서 발행한 <사찰지>는 변산면 도청리 수전동에 있었던 절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매창이 이곳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登千層庵(등천층암)


                              千層隱佇千年寺, 瑞氣祥雲石逕生.

                              천층은저천년사, 서기상운석경생.


                              淸磬響 星月白, 萬山楓葉요秋聲. 饒많다요

                              청경향 성월백, 만산풍엽요추성. 요


           천층암에 올라서 천층 산 위에 그윽이

           천년사가 서있어 상서로운 구름 속으로

           돌길이 났어라.

           맑은 풍경소리 스러지는 속에 별빛 달빛만 밝은데,

           산이란 산마다 단풍이 들어 가을소리가 가득해라.


 

유희경이 한양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인편이 있을 때마다 간곡한 연정을 담은 편지를 수시로 보내

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몸의 병은 나날이 깊어져 더 이상 회복할 수 없게 되고, 가례(家禮) 연구

에 몰두하여 궁중의 제사를 도맡아 집례(執禮)하던 유희경은 선조의 국상과 광해군의 대례식으로

 자리를 뜰 수 없게 되었다.

매창은 몸이 아플수록 고독감은 절실했고, 즐거웠던 옛날만 생각하면 절로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며 매창은 이승에서 마지막 시를 읊었다.


 

空閨養拙病餘身   長任飢寒四十年

공규양졸병여신   장임기한사십년

 

借問人生能幾許   胸悔無日不沾巾

차문인생능기허   흉회무일불첨건


독수공방 외로움에 병든 이몸은

기나긴 40년이 춥고도 배고팠소

묻노니 인생은 몇 년이나 사는가

가슴에 한이 서려 안 운 날이 없소


죽음이란 어차피 누구나 한 번은 겪게 마련이다. 항상 자신의 세계 속에서 살다가 마지막 순간까

지 임을 그리는 마음을 가슴 가득히 품었으니 누가 그의 죽음을 쓸쓸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직 흙도 채 마르지 않은 매창의 무덤에서 유희경은 땅에 엎드린 채 어깨를 들먹거리며 흐느껴

 울었다. 그럴수록 허탈감은 공허한 메아리로 되돌아와 백발 노인의 귀와 눈을 사정없이 후벼댔

다. 운명은 예측할 수 없으니 가슴에 맺힌 한을 그래서 더욱 길고 슬프다. 노객 유희경의 찢어질

듯한 애절함은 오랫동안 그의 가슴에 남았으리라. 출처:한맥문학


<參考>? 매창은 선조 6년에 나서 광해주 2년에 죽었으니 38세라는 일생을 외로움 속에서 보낸 여

인이다. 당시 촌은 유희경이란 학자는 예론 상례에 밝은 사람이었고 또 그렇기 때문에 평생(92세)

을 깨끗이 살아온 엄격한 선비요 유명한 시인기도 했다. 그런데 이 촌은이 매창을 만나서 그만 파

계를 하고 말았다는 일화를 통해 매창이 어떤 여인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녀가 요염교태로 촌은

을 유혹했을 리 없고 그렇다고 촌은이 미인계에 빠질 위인이 아니다 다만 동도에서 화답하는 시로

혹은 노래로 이심전심으로 서로 통했다는 것이다.



              매창의 다른 시


                   詩韻歌詞動洛城   今日相看眞面目

                   시운가사동락성   금일상간진면목

 

                   却疑神女下三淸   春冷補寒衣

                   각의신녀하삼청   춘냉보한의


                   紗窓日照時  低頭信手處  珠淚滴針絲

                   사창일조시  저두신수처  주루적침사


          글재주 노래 솜씨 서울에까지 울렸어라

          오늘에야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하여라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구슬 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을 적시누나


 

?40대 중반의 大 詩人 유희경과의 사랑은 18세의 매창으로 하여금 그녀의 시 세계를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희경이 서울로 돌아가고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들의 재회는 기약이 없게 되었다.

유희경은 전쟁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는 등 바쁜 틈에 매창을 다시 만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진정 마음이 통했던 연인을 떠나보낸 매창은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이후 쓰인 그의 시들은 님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서 서러움과 한을 드러내고 있다.

16년 동안 헤어져 있다 1607년 유희경을 다시 만난 기록이 있지만 매창은 그와 헤어진 뒤 10여 년

동안 마음으로부터의 정을 주는 사람이 없이 유희경만을 그리며 살았다.

유희경은 원래 천민이었으나 상례에 밝아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례를 집례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으며 영의정을 지낸 사암(思庵) 박순으로부터 당시를 배웠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으로 나가

 싸운 공으로 선조로부터 포상과 교지를 받았다. 그는 한시를 잘 지어 사대부들과 교유하였으며,

 같은 천인신분으로서 시에 능하였던 백대붕과 풍월향도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하였다. 92세까

지 장수했으며 명예직이었으나 종이품 한성부윤까지 제수받은 사람이다.


매창이 죽은 연대는 여러 가지 주장과 추측이 있으나 1668년 개암사에서 그녀를 추모해 발간한

『매창집』에 따르면, 광해군 2년(1610) 38세의 한창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매창의 묘비는 그녀가 죽은 지 46년 만인 1656년에 처음 세워졌다가, 오랜 풍상에 자획이 마멸되

어 1917년 부안의 국악원 부풍시사에서 현재의 비를 다시 세웠다.


 

촌은 유희경이 매창의 죽음을 매도하며 읊은 추모시 두 편은 다음과 같다.


                         맑은 눈 하얀 이(齒)에 눈썹 푸르던 낭자야,

                         홀연히 구름 타고 어디 갔느냐,

                         넋일랑 떨어져서 패읍으로 돌아가고

                         옥골은 어느 뉘가 고향에 묻었는가.

                         객지에서 죽어가니 조문객이 다시 없고

                         오로지 경대 남아 옛 향기 슬프고나.

                         정미(丁未)년간 우리 둘이 다시 만나 즐겼는데,

                         슬픈 눈물 흘러내려 옷자락만 적시누나.


                         향기러운 넋이 상여를 타고 백운 위로 갔으니

                         푸른 하늘 아득하고 돌아올 길 멀고 멀어

                         오직 한곡조 이원(梨園)에 남았으니 

                         왕손들은 다투어 옥진가(玉眞歌)를 부르네

 

 


초가을  이매창(12세 때 지음)


千山萬樹葉初飛   雁叫南天帶落暉

천산만수엽초비   안규남천대낙휘

         

長笛一聲何處是   楚鄕歸客淚沾衣

장적일성하처시   초향귀객루첨의


한 잎, 두 잎. 산 속 나무는 낙엽을 떨구고

기러기는 노을 속으로 울며 가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리 소리에

고향가는 나그네 눈물 흘리네.


                    

 

                                            http://cafe.daum.net/choigenealogy/Du1Y/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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