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마을의 형성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이야기 하는자는 친한벗을 이간하는 자다.
마을의 형성은 1250년경 회양(금강산부근)부사 조신(趙愼)의 3대 손 익상(益祥)이 [고려 중엽 연자(衍字)의 17대조(代組)] 덕임(德林)[현 장암면 마정리]에서 이주하여 마을 를 형성하였다고 하며,
조선 시대에는 임천 군 남산 면사무소가 있었다하여 남산 부락이라 칭하였는데, 고종32년 (1895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해 하곡리 일부를 합방하였으며, 지방 관제 개편 이전에는 임천군 남산면 이었고 [장전리,후포리(북고리), 탑리,하곡리,황교리(黃橋里/지금은 상황리)하황리] 로 분리 되였으나, 조선 총독부령 111호에 의거 현재의 부여군 장암면 하황리로 1914년 3월 1일 개편 되었다.
장전리에서 이어지는 그 시절 도로는
장전리-탑상골-하야골-새우실-남산초등학교-되챙이-왕님으로 길이 이어졌다.
하황리 마을의 구성
하황리라는 지명은 누른다리 황교(黃橋)에서 유래 되었는데 백제 시대 때 왕이 능행(陵幸)때 쉬어가던 곳이라는 데서 붙여진 지명이며 황자(黃字)는 오행 (五行)[금 목 수 화 토 (金木水火土)]중 土에 해당되고 황색(黃色)으로 중앙(中央)의 왕(王)을 의미하는 것 등 왕과 관련된 곳으로 이 지역에 전설(傳說)로 구전(口傳)되어 오고 있다.
마을 중앙에 야산으로 수박제가 있고
북서쪽에 동그락산 과
그 밑에 도치성(호수)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여름이면 멱을감고 수영을하여 마을 사람들이 모두가 수영을 배웠고, 보리바심 후 목욕을 즐겼으며, 겨울에는 매기를 파 고기를 잡고, 강태공들이 고기를 낛던 마을사람들의 즐거웠던 추억이 깊이 자리잡고 있으나, 제방 축조와 농지 정리로 매몰되었다.
조수 간만의 차가 사리 만조때 약 5m정도 되며,
제방축조 전에는 금강 상류에서 3형제가 서서 오줌만싸도 홍수가 날정도로 저지대 극심한 침수지역이었으나, 70년도 말 제방을쌓고 홍수를 막아 문전 옥답을 만들었고, 특용 작물중 수박 참외는 송주골집 조남정씨가 선구자 였지만 많은 실패도 있으셨다.
지금은 도시 인구 집중으로 소비층이 확대 되면서 수박이 고향에 큰 소득원이 되고있다.
하황리는
남산골이라 부르는 자연 부락 과 누른들 황교를 중심으로 서남쪽에 금배, 대챙이, 동쪽에는 동내기, 남쪽에는 비선골, 북쪽에는 홀탱이, 서쪽에는 새터, 마을로 이루어져있다.
싹산 큰봉 아래 남사골 전경과, 문전옥답 까지도 비닐하우스가 늘어선
모습은 달라진 농촌 풍경을 였볼수있으며
수박제 아래 옹기종기 모여사는 홀탱이는 지형이 농산물을 쓸어담는
삼탬이 같은데 그로인해서 인지 모두가 부농으로 잘 살아가고있으며
듬배 앞의 탁 트인 들판은 이마을 사람들을 넉넉하고
넓은 마음으로 살아가게하는 경관이 되었으며
또한 동으로는 파진산이 있어 일출의 기상과 정기를 이어받아
학문과 인성이 뛰어난 자손들을 배출하였다.
그 밑으로 금강이 흐르며 백제 시대 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이 금강을 이용하여 굿드래 나루터로
무역이 이루어졌으며 금강은 천연적인 백제의 방어요세로 활용되었다.
또한 금강은 특산 어종이 많았으나 특히 봄이면(3-5월)조개, 우여, 황복은 별미중 별미요, 나른한 봄 날 입맛을 돋구었으나, 지금은 금강 하구원 둑으로 어로가 막혀 둑 상류에서는 찾아 볼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 도 때가되면 그 맛을따라 서울에서 강경까지 찾아가 우여회 와 황복을 먹고 오지만 타 지역에서 사다가 판다고 하니 토종 맛은 찾아보기 어렵다.
서남쪽으로는 성흥산이있어 백제시대 때 봉화대가 있던 곳으로
산 위에 오르면 가까운 부여, 강경, 논산을 넘어 익산의 미륵산, 멀리는 장항제련소까지가 눈에 들어온다. 이런 지형지세 덕으로, 특히 신라에 대한 방어 기지로서 매우 중요한 산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에서 장군바위 전설등 남산을 조명해보면 우리 고향도 군사적 요충지 였음을 였볼수있다.
"2006년도 성흥 산성 해맞이 행사"
마을 전설로는
비녀바위(남산골뒤산), 장군바위(수박제 황교방향), 기바위 (금배마을 뒤 산), 비독거리 (난제 조태성 선생의비석이 서있던 자리)이며 현재도 이 비석은 존재하며 많은 사람들의 추앙으로 남산사에 위패를 모셔 숭배하고 있다.
인적 구성
인적 구성은 풍양조씨 전주이씨 외 타성씨도 있었으며 약 70여 세대 150여명이 현재 거주하고 있으나 자녀 교육 노후관련 등으로 떠나는 주민이 생겨나고 있다.
생업으로는
벼농사와 특용작물 재배를 하고 제방 축조 등으로 수해가 비교적 적어 도시 생활자보다 윤택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며 범죄 없는 마을로 지정도 되었으며 협동농업 기계화 영농법을 도입 농업종사자의 고령화에 적극 대처하고 있으나 자유무역으로 인한 값싼 농산물 유입 등 중국농산물과 경쟁해야할 어려움도 현존하고 있다.
문화재 남산사
남산사 는( 난제 조태징, 백인당 조명규, 귀적재 조수진 ) 3인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학문 과 행실이 뛰어난 분들로 3분들은 3종간이다.
남산 초등 학교
1, 개교 : 1943년 9월 7일 ( 간이학교설립 ) 당년도 9월 28
일 초 등 학교 승격 개교.
2, 지금까지 졸업생수.
1, 남자 : 1738명.
2, 여자 : 1438명.
3, 금년도 60회 졸업생 배출.
4, 현재 학생 수 전교생 52명 유치원 8명.
5, 학교 운영으로는
1) 농어촌 거점학교 운영.
2) 학력신장 시범학교운영.
3) 교실 수업개선 사회과 연구학교운영. 등을 성공리에 마
치면서 군내는 물론, 도내, 전국적으로 훌륭한 학교 앞
서가는 학교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6, 동문 동향으로는 농촌 진흥청장, 교육장 배출과 교육, 정
치, 경제, 문화, 사회, 각 분야에 진출되었고, 동문들 간에
도 상호 협조가 돈독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은 동문수학한
선후배의 정겨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이 고향을 떠나면서 입학생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현상은 국가적인 과제라 아니할 수 없고, 그에따라 장암초등학교나 부여초등학교로 편입될수도 있음이 현실이나, 고향을 지키시는 여러분과 훌륭하신 선생님들이 계신한 우리 모교는 더 큰 질적 발전이 있으리라 봅니다.”
하황리 교회의 역사를 보면
“해방후 3분의 신자가 계셨는데”
ㅇ, 송주골집 조남정씨 모친 (이씨)
ㅇ, 수골집 조남빈씨 모친 (이씨)
ㅇ, 남사골집 이완근씨 조모 (조씨)
3분이서
석동리 교회까지 다니시므로 남산에 교회가 서게된 모태가 되었으며,
처음 남산에 교회가 선 곳은 [새우실] 지금의 남산국민학교 뒤 호독집 쪽이었다
새우실의 지명 전설
하야골로 넘어가는 고개에
바위 두개가있어 새우의 눈이 되었고
좌로는 비토거리쪽으로 흐르는 개천이있고
우로는 하야골로해서 도치성으로흐르는 개천이있어 새우의 수염이 되었고
호독집 뒤 산이 새우의 몸통같다하여 붙여진 지명 이었다.
남산의 교통 수단으로는
1, 5 일 장마다 통통배를 타고 강경장을 다녔으며 강경에서 기차를타고
타 지역도 나들이 했다.
2, 도보로 강경 과 부여를 다녔으며 지역을 있는 나루는 반전나루, 봉무
쟁이 나루, 두루미나루, 황바위나루, 마바위나루, 귀암나루, 굿드레나
루 등이 있었다.
남산인의 종교
또한 남산은 유도를 숭상하였고 충효 사상이 깊어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를 행함이 삶에 근본으로 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지금도 고향 을 사랑하는 마음이 모두가 한결같다.
특히 남산에 사시면서 효행이 지극하다하여 효자비를 비토거리에 세워드린 분들이 있으시니, (댁호/가 나 다 순으로)
ㅇ, 가장골집 죽 천 (竹 泉) 조남준(趙南駿)어르신과.
ㅇ, 빈 집 송 산 (松 山) 조남준(趙南俊)어르신과,
ㅇ, 와중리집 사의당 (四宜堂) 조남규(趙南奎)어르신이다,
남산 인 들은 앞으로도 서로 사랑하며, 충효를 실천하며,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이곳에서 영원히 이어갈 것이다.
남산의 역사는
일평 조남권 고문님께서 기술해 주셨고,
기타 자료는 인터넷 검색, 전화 사실확인을 통해 카페 지기가 올렸습니다.
회원님들 께서도 좋은 자료 (사진 포함)있으시면 올려주시면 합니다
지역별 남산 향우회 의 활동
[서울]
남산 향우회 북한산 산행
남산향우회는 여건에따라 산행을 합니다.
함께 참석하셔서 좋은 추억 만드시면 고맙겠습니다.
첫댓글 지금까지 잘 모르고 있었네.. 좋은 자료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