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 손택수
명절 앞날 세탁소에서 양복을 들고 왔다
양복을 들고 온 아낙의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내 양복 주름이 모두
아낙에게로 옮겨간 것 같다
범일동 산비탈 골목 끝에 있던 세탁소가 생각난다
겨울 저녁 세탁, 세탁
하얀 스팀을 뿜어내며
세탁물을 얻으러 다니던 사내
그의 집엔 주름 문이 있었고
아코디언처럼 문을 접었다 펴면
타향살이 적막한 노래가 가끔씩 흘러나왔다
치익 칙 고향역 찾아가는 증기기관차처럼
하얀 스팀을 뿜어내던 세탁소
세상의 모든 구불구불한 골목들을
온몸에 둘둘 감고 있다고 생각했던 집
세탁소 아낙이 아파트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이 접혔다 펴지며 아련한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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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바쁜 도시적 삶에서 빨랫감을 세탁소에 맡기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나는 사무실 부근의 세탁소에 세탁물을 맡긴다. 주로 내가 맡기는 세탁물은 양복과 와이셔츠, 그리고 아이들 교복과 아내의 옷가지들인데 가정의 세탁기로 빨 수 없는 것들이다. 벌써 20여년 가까이 단골 세탁소에 세탁물을 맡겨온 터에 서로가 집안 사정을 훤히 알고 있다.
나보다 두어 살 아래의 세탁소 주인은 눈매가 착한 사람이다. 그의 아내는 그의 곁에서 바느질이며 잔심부름을 하며 일을 도운다.
손택수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는 제목이 말해주듯 '아름다운 세탁소'이다. 문학적 상징으로써의 '세탁소'는 일반 언어의 의미와 같다. 즉 '더러운 것을 씻는다' '주름을 편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주름을 편다'는 쪽에 의미를 두고 세탁소를 형상화 하였다.
"명절 앞날 세탁소에서 양복을 들고 왔다" 양복을 들고 온 사람은 세탁소 주인의 아내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주름이 자글자글하다" 아낙이 나이가 들어 주름이 많은지, 고생을 많이 해 주름이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세탁소는 옷을 깨끗하게 빨기도 하지만 주름을 펴는 곳이기에 아낙의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하다는 표현은 매우 적절하다. 화자의 "양복 주름이 모두 아낙에게로 옮겨간 것 같다"는 생각도 정화의 공간으로써의 세탁소를 잘 설명해 준다.
"세탁, 세탁" 하면서 "세탁물을 얻으러 다니던 사내"가 떠오른다. 그 세탁소 사내의 집엔 "아코디언"처럼 접었다 펴는 "주름문"이 있다. 그리고 그 집은 세상의 모든 "구불구불"한 골목을 온 몸에 감고 있다고 생각되는 곳이었다.
시인의 상상력은 세탁소가 주름을 펴는 공간이라는 일면을 생각하며 독자들의 시선을 "주름"과 관련된 이미지를 끌어와 그것들을 감각적으로, 그러나 정화의 공간으로써의 세탁소를 매우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세탁소 아낙이 아파트 계단을 내려"갈 때 "계단"마저 "접혔다 펴지며 아련한 소리를 낸다"고 하고 있다.
손택수의 시를 읽으며 나의 졸시 <교회와 모텔 사이>를 떠올렸다.
교회와 모텔 사이 / 강경호
교회와 모텔 사이
오래되고 작은 그의 집이 있다.
더럽고 구겨지고 찢어진 것만 먹고 살아온
그의 집에
밤업소 아가씨들 속옷
인부들의 땀에 배인 작업복
신사들의 신사복
고백성사라도 마친 사람들처럼
가지런히 옷걸이에 걸려 있다.
밤이 깊고 어둠이 깊다.
기도를 드리던 교인들 오래 전에 돌아가고
아가씨들 히히덕거리던 소리
주정꾼들 혀 꼬부라진 소란마저 지나간
오줌 냄새 질퍽한 골목길
가로등만 적요하다.
거기 교회와 모텔 사이에서
늦게까지 다리미질하는
피곤한 그의 어깨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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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구는 출판사와 교회 사이에 세탁소가 있다. 서두에 밝힌 것처럼 내가 오랫동안 이용하는 세탁소이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세탁물을 모아 세탁소에 가져가면 착해 보이는 세탁소 주인이 언제나 다리미질을 하고 있다.
손택수의 시가 '주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졸시 <교회와 모텔 사이, 세탁소>는 더러운 옷이 깨끗해진다는 '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더럽고 구겨지고 찢어진 것만 먹고 살아온 그의 집"이라고 세탁소를 사실 그대로 읽어내고 있다. 세탁소가 신분의 차이를 따지지 않고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빨아내는 곳임을 말하고 있는데, 즉 "밤업소 아가씨들의 속옷/인부들의 땀에 배인 작업복/신사들의 신사복"이 평등하게, 그리고 "고백성사라도 마친 사람들처럼" 모두가 함께 섞여 "가지런히 옷걸이에 걸려 있"는 것이다.
밤이 깊어갈 때 "기도 드리던 교인들 오래 전에 돌아가고/아가씨들 히히덕거리던 소리/주정꾼들 혀꼬부라진 소란"의 성과 속이 교차하는 시간에도 세탁소에서는 잠들지 못하고 세탁소 주인이 "늦게까지 다리미질 하"고 있다. 그러므로 "피곤한 그의 어깨 눈부"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서정시란 동일성을 지향한다. 살펴본 두 작품은 '주름'과 "더럽고 구겨지고 찢어진" 것으로 은유된 세상의 허물과 상처를 치유하고 표백함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지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