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해석의 기본 원칙"은 무엇인가?(원제: What Is "Interpretive Maximalism?") 출처 : James B. Jordan [Biblical Horizons No. 9]
많은 사람들이 "성경해석의 기본원칙"에 대해서 질문한다. 그들은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 하고, 또 자신이 묵상하고 해석한 본문 해석이 개혁주의(the Refomed) 입장에서 [문법적-역사적](grammatico-historical)이고 [성경신학적](Biblico-theological)인 접근을 한 것인지 알고 싶어한다.
사실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답하는 문제는 상당히 난감하다. 왜냐하면, "성경해석의 기본 원칙"을 논의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접근이 아니며, 그리고 비록 그와 유사한 의미로서 성경해석의 기본원칙을 가지고 있지만 이 원칙은 글로(in print) 표현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종종 평론가들(reviewers)이 나의 "성경해석의 기본원칙"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독특하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별로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내게 '당신의 성경해석의 원칙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것은 정상적이라고 본다.
그러면, 나의 이 모든 "성경해석의 기본원칙"은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우선, 그것은 David Chilton의 계시록 주석인 "The Day of Vengeance"[보복의 날]의 서론에서 직접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Chilton은 성경에서 모든 것, 즉 모든 세부적인 부분들까지도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구약의 모든 게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진술 과정에서 그는 나의 책인 Judges: God's War Against Humanism[사사기주석:인본주의와 다투시는 하나님의 전쟁]에서 이 두 가지 점을 분명하게 하고 있는 것에 대해 고맙게(thanks) 여긴다. 그리고 그는 내가 이 "성경해석의 기본원칙"을 따르고(call)있다고 말을 한다.
Chilton이 지적한 것을 살펴보자. 성경에서 중요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고 주장하는(hold) 주석가들이 있는가? 우리가 성경 본문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그리고 본문을 설명할 때 그 세부적인 부분들의 하나를 제거하거나(dismiss) 무시해야 한다든지, 전부다 던져버려야(thrust) 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을까? 그렇다. 이렇게 주장하는 주석가들이 있다.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적인 해석을 한다고 말하는 자들 중에도 '어떤 본문의 세부적인 부분들은 단순히 문장을 꾸미기 위한 이사여구 정도(colorful information)로 생각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다. 놀랍게도, 그 위대한 B.B.Warfield는 성경 연대기(Biblical Chronology)에 관한 그의 글에서 창세기 5장과 11장의 연대기에 대한 데이터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을 한다.(나의 글에서 이것에 관한 주석을 보라. The Biblical Chronology Question : An Analisis, available from Biblical Horizon for $3.00,postpaid)
이렇듯 특별히 세부적인 부분의 주석(analysis)를 요구하지 않은 범하기 쉬운 실수(easy trap)이다. 예를 들어, 삼하 11:4절은 다윗이 밧세바와 함께 잤을 때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라고 말을 하고 있다. 많은 주석들은 단순하게 그것은 레위기 15장에 있는 율법에 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습이라고 말하고 난 후 다음 구절로 넘어 가버린다. 그러나 나는 왜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구절(information)을 주셨는지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싶다. 다윗은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데 실패했는가? 내 짐작은 다윗이 비록 이 관습(rite)이 의미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 자신을 깨끗게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법궤가 광야(field)에 있었고 거룩한 전쟁이 치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모든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아야 했다.(삼상21/4,삼하11/11)그러므로 그의 부정함은 일상적인(ordinary) 단순한(innocent) 부정함이 아니라 의도적인 하나님의 의식법에 대한 도전이다.(게다가 간음까지!) 시편51편은 다윗이 레위기 11-15장에 나온 모든 종류의 부정함에 대하야 언급한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하여, 부정함은 사실 그 이야기에서 중요한 주제이다. 단지 우리가 세부적인 것들을 중요하게(seriously)다루기만 한다면, 이러한 사실들을 발견할 것이다.(will we see this)
Chilton이 말하고 있는 두번째 "성경해석의 기본원칙"은 구약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point)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부정하는 어떤 해석가들이 있는가? 물론 있다. 많은 오래된 킹 제임스 성경들은(Many older King Jamse Bibles)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구별된 구절들 옆에 별표를 하고 있다. 그것은 나머지 구절들은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 된다.
바로 이러한 성경에 대한 접근 방식을 나는 나의 사사기 주석의 서론에서 반대하고(against) 있다. 복음주의나 개혁주의 진영의 몇몇사람들은 구약 성경중 단지 선택된 몇 구절들이나 문장들만이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신약 성경에서 그 구절들이 언급되거나 인용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신약 성경에서 특별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들만이 예언들과 예표(types)들이 될 수 있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진영에서 다른 입장을 표명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구약성경의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입장은 신약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는 특별한 예표들과 예언들은 예증들(examples)과 모범들(patterns)로써 우리들에게 제공되고 있다는 입장이며, 또한 구약성경의 다른 부분들에서도 (역자주(삽입):그리스도를 예언하는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즉 이들은 구약의 모든 부분들이 그리스도를 가르키지만 어떤 부분(aspects)들은 보다 더 (역자주(삽입):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 좀더 특별한 예표들과 예언들이라 말하는 것이다. 반면에 그렇지 못한 구약의 또 다른 부분(aspects)들은 좀더 희미하고, 보다 일반적인 예표들과 예언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this) 신학교에서 나의 스승들의 대부분이 믿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사사기 주석에서 썼던 것은 바로 이것이다.:"최근에 성경에 관한 복음주의적인 주석들을 특징짓는 "성경해석의 기본원칙"으로부터 우리들이 좀더 도약하기 위하여 이것(i.e.,예표들과 예언들에 관한 작업)을 설명해야 한다. 주어진 구약의 본문(story)이 상징적인 특징(dimension)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특별한 신약 성경 구절들을 가지고 올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러한 상징적인 차원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바로 그 사실에서 전제된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방법들을 어떻게 형상화(image) 했는지 우리가 상상해보듯이, 우리는 성경 이야기들의 좀 더 넓은 의미들 한 번 짐작해보는 것에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타협을 배재하고 최대한의 상징적인 예표들을 요구하는 자('maximalist')는 교부들(the Church Fathers)들에 의해 사용되어졌던 해석과 동일 선상에서 우리들을 한 단계 더 올려놓기 위하여 노력한다.(approach)
이것이 내가 말하고 의미했던 모든 것이다. 구약 성경을 가장 최상으로 해석하는 방법은 그 본문에서 예표론인(typological) 차원(dimension), 즉 그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을 받아들이는데 노력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나의 이러한 성경해석의 원리에 동의하지 않는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해석들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또한 나는 나의 성경해석 원리를 지지자하는 자들을 가지고 있다.
사실, 나는 진지하게 이러한 모형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해석에 있어서 성경신학적인 해석의 범위내에서 본문을 정당하게 취급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신정통치(theonomy)에 있어서 the Bahnsen-Rushdoony(?) type(형식)에 대한 나의 비평은 적절한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들이 이러한 방식을 정당하게 생각하는 것을 올바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나의 스승들과 함께 나는 해석에 있어서 문법적-역사적 해석의 방법은 성경신학적인 사고에 의해 완전해 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내자신의 연구에서 내가 친히 보여줘 왔던 것들이다.(On "theonomy" see james B. jordan, "Reconsidering the mosaic Law: Some Reflections--1988," available from Biblical Horizon)
물론, 내가 제안한 특별한 성경해석의 원리에 이의를 제기하고 논쟁을 원한다면, 언제든지 나는 대 찬성이다. 내가 쓴 모든 책의 서론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은 내가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오직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글을 남기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본문에 근거하여 상호 논의하는 것은 환영하는 바이다.
나는 내가 "성경해석의 기본원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로 결론을 내리려 한다. 그리고 나는 나의 원리가 "성경해석의 최상주의"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나는 다만 일반성도들에게 일반적인 이해(grasp)와 성경신학의 다양한 양상(garden variety)를 보여주기 위하여 영향(attempting)을 끼치는데 "최소한"과 "최대한"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것은 "상동 모형론"("homological typology-<역자주:의미도 잘 통하지 않는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일>과 같은 구절보다는 더 쉽게 보였다.) 물론 나의 원리가 어떤 사람들에게 혼란을 야기시킨다면 유감이다. 나는 이 글이 이런 의문들을 깨끗이 해결되어지기를 바란다.
참고 도서 나는 나의 의견에 대한 좀더 많은 정보를 위하여 나의 모형론에 대한 연구인 ,Through New Eyes: Developing a Biblical View of the world(Brentwood, TN: wolgemoth and Hyatt,1989) 추천한다. 성경의 상징적인 관점(worldview)에 눈을 뜨는데 도움을 준 연구들은 Meredith G. Kline [,Images of the Spirit(Grand Rapids:Baker.1980); Austin Farrer, A Rebirth Images(Gloucester, MA: Peter Smith,1949)]; 그리고 Gorden Wenham의 두 주석 [Leviticuse(Grand Rapids:Eerderman 1979)] 과 [Numbers(downers Grove,IL Inter-Varsity1981)] 그리고 [계시록]은 성경의 상징의 결정판이다. 그리고 David Chilton의 주석, [The Day of Vengence(Fort Worth:Dominion Press,1987)]에 필적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또한 G. Lloyd Carr의 주석, [The Song of Solomon(Downers Grove,lL:Inter-Varsity Press,1984)]도 도움이 된다.
화란 개혁 교회에서 제안되어진(was hammered out) 구속사적인 성경연구에서 좋은 것은 [Sola Scriptura :Problems and Principles of Priching Historical Texts by Sidney Greidanus(Toronto:Wedge Pub. Co;1970)]이 있다. 흐레이다누스는 그의 책,The Modern Preacher and the Ancient Text: Interpreting and Preaching Biblical Literature(Grand Rapids Eerdermans, 1988)에서 그가 주장하는 원리(principles)들은 연습(practise)이라고 한다. 불행하게도, 이 책은 설교하는 법과 설교의 상징적 예언에 관한 부분이 없다. 그래서 흐레이다누스는 이 두가지 문제들을 다루는데 실패했으며, 그의 방법론이 나머지 부분에서 그것들을 통합하는 것에는 그의 책이 빈약하다.
널리 알려진 구속사적 성경 연구는 4권으로 된 책인 S.G. de Graaf의 "약속 그리고 구원"이다. 비록 복사판이지만(그러나 소장하는 것이 가치있음) 훨씬더 깊이 있는 것으로써는 Homer Hoeksema가 쓴 Old Testament History 씨리즈이다. 이 책들은 본문에 대하여 좋은 구속사적인 시각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러한 것들은 Protestant Reformed Church 4949, Ivanrest, Grandvill, Michigan 49418의 신학파에(Theological School)서 하는 해석들이다.(be available from) 나는 내가 사사기 주석을 쓰기 전에 이 모든 책들을 읽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내가 쓴 사사기 주석을 새로운 것이나 다른 것이라고 간주해버릴 때에 내가 놀라고 있는 이유 중에 하나가 이것이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는 이미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It was old hat)
마지막으로 성경해석에 관련된 최근의 세 책들이 주목받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Vern. S. Poythress가 쓴 Symphonic Theology : The validity of multiple Perspectives in Theology; 역시 동일 저자가 쓴 Science and Hermeneutics 그리고 Has the Church Misread the Bible?이 있다. Moises Silva가 쓴 The History of Interpretation in the Light of Current Issues이 있다. 두 사람 다 웨스트 민스터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이들 두 사람은 내가 추구하고 있는 해석적 모델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연구들을 적극적으로(highly) 추천한다.
첫댓글 제임스 조던이 엄청 유명한 사람인가요? 첨 들어 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