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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윤시인의 섬기행] 우이도, 동소우이도, 서소우이도
외딴섬 외딴집 고적한 꿈, 그러나 꿈은 깨지는 법
길은 가면 있으나 사람은 영영, 그래도 가야 하나
우이도 돈목 해변.
오후 2시20분, 도초항에서 섬사랑 6호를 탄다. 우이도까지는 서남쪽으로 10여 킬로미터 바닷길을 더 가야 한다. 우이도는 신안군 도초도의 새끼섬이다. 그러나 도초도의 새끼섬 우이도 또한 더 작은 새끼섬, 동소우이도와 서소우이도에게는 어미섬이다.
사람에게만 피가 흐르랴. 섬들도 모두 크고 작은 핏줄로 이어진 혈육지간이다.
우이도는 과거 흑산진의 관할이었다. 일제가 가거도를 소흑산도로 명명했지만 원래는 우이도가 소흑산이라 불렸다. 자산 정약전도 흑산도 유배시 겨울이면 흑산의 혹독한 추위를 피해 우이도로 건너가곤 했다. 우이도가 흑산진의 위수 지역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나그네는 첫 기항지, 동소우이도에 내린다. 이곳 사람들은 동리라 부르는 섬이다. 섬사랑 6호는 우이도 항로에서만 모두 여섯 곳을 들르는 완행 여객선이다. 우이도 본섬의 진리, 예리, 돈목, 성촌과 동소우이도, 서소우이도를 빼놓지 않고 기항하는 여객선은 우이도 사람들의 ‘마을버스’다.
동소우이도 해변 숲속의 빈집.
동리, 동소우이도; 산과 해변을 다 돌아도 한 시간 안짝
섬의 전성기 때는 동리에만 200여명의 사람이 살았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6가구 10여명의 노인들만 산다. 노인들뿐이니 민박을 하는 집도 없다. 배에서 우연히 만난 할머니에게 통사정을 해 민박을 허락받았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둘이서 산다. 전복 양식을 하다 소금 섬, 증도로 이주해간 아들을 따라 가려고 ‘가대’를 내놓았다. 가대란 집과 집에 딸린 전답을 이르는 이 지방 말이다.
짐을 풀고 마을 뒷산을 오른다. 산 고개를 넘으니 외딴 해변에 낡은 집 한 채 오롯하다. 마당은 폐가처럼 어수선하지만 문들은 모두 새 것 같다. 오래된 한옥을 개조한 집이다. 방문은 창호 문이 아니라 판자문에 유리를 달았다. 초봄에 써붙였던 것일까.
동소우이도의 섬고양이들, 고양이도 집이 있으나 나그네는 잘 곳이 없다
부엌문에는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두 문장이 선연하다. 누가 살기 위해 폐가를 수리하다 중단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새로 고처 살다가 금방 떠난 것일까.
텃밭에는 매화나무와 비파나무 어린 묘목들이 풀 속에 파묻혀 있다. 마룻장은 뜯어내다 말았고 마당에는 고기를 굽기 위해 불을 지피던 흔적이 뚜렷하다. 가만히 방문을 열어본다. 집안은 서까래와 파헤쳐진 구들장으로 어지럽다. 필경 누군가 살기 위해 집을 고치다 만 것 같다. 어떤 사정이 있어 일시 중단 했거나 아주 마음을 바꿔 살기를 포기하고 돌아가 버린 것일까. 사립문을 나서면 작은 백사장이 안마당이다. 파도 소리는 꿈결처럼 멀고도 가깝다. 이 집에 잠시 살다 간 사람은 버려진 집과 바다 풍경에 반했던 것이리라. 외딴 섬, 외딴 집, 외롭고, 높고, 쓸쓸하고 고적한 삶을 꿈꾸었으리라. 하지만 깨지 않는 꿈이란 없는 법. 꿈은 사라지고 집은 다시 폐허가 되어 간다.
동리, 섬은 산과 해변을 다 돌아도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을 만큼 작다. 건너 섬 서리는 더 작아 동리의 반도 되지 않는다. 할머니 댁으로 돌아오니 할아버지만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해바라기중이시다.
“꽃게잽이가 한창일 때는 배가 못 다닐 정도로 이 앞 바다가 빽빽했더랬어. 그 담에는 새비잽이 배가 많았는데. 멀리 인천에서도 오고. 어장이 없어지니까 배가 귀해져. 이 건너 대니는 배도 귀해져.”
노인은 거동이 불편해 집 밖으로 나서지 못하고 종일 마당과 방안만을 들락거린다.
“서리만 새비잽이 하는 배가 대여섯 척 있고 멜잡이 배도 있고. 여그 동리는 아주 없어. 옛날에는 이짝이나 저짝이나 어장으로 묵고 살았는디 인자 어장이 없어진께 심들어.”
반찬이 없다지만 낯 모르는 사내가 미심쩍기도 했으리라
양식장 작업을 끝내고 들어오는 거룻배.
노인도 어장을 하기 위해 우이도 본섬에 살다 이 섬으로 이주해 왔지만 일손을 놓은 지 오래다. 동·서 소우이도는 어장 때문에 생긴 마을이었으니 어장이 사라지자 마을도 쇠락해버린 것이다. 떠드는 소리에 잠이 깬 것일까. 할머니가 방문을 열고 나오신다.
“암만 해도 옮겨야 쓸랑갑소. 해줄 반찬이 없어서.”
할머니는 재워주기 어렵다고 하신다. 밥을 해주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나야 한 끼쯤 굶어도 상관이 없지만 노인들 마음은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할아버지가 연신 미안하다며 할머니를 거든다. 대책 없이 들이닥친 나그네가 오히려 면목이 없다.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신 것일까. 꼭 반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낯 모르는 사내가 미심쩍기도 했을 것이다. 두 분의 표정에서 언뜻 그런 느낌이 든다.
할머니는 나그네에게 교회 목사님 사는 사택을 찾아가라고 일러 준다. 그러마고 집을 나선다. 나그네는 교회로 가지 않는다. 어차피 내일 아침 서소우이도로 갈 거라면 지금 건너는 편이 낫겠다 싶은 것이다. 그래 이참에 바로 서리로 건너자. 할머니 댁으로 돌아와 전화를 빌린다. 무턱대고 서리 이장님께 전화를 건다. 이장님은 썩 반가워하지 않는 눈치다. 허나 어쩌랴. 한뎃잠을 자기도 마땅치 않고. 대뜸 사선을 보내주실 수 없겠느냐고 묻는다. 지금은 배가 없으니 기다리라 한다. 작업 나갔던 배가 돌아오면 알아보고 보내실 거란다.
서소우이도로 얻어 타고 온 새우잡이 배.
이장님 목소리로 판단하건데 배를 보내줄 의사가 없다. 서리 선창가에 어선이 여러 척 정박해 있는 것이 빤히 보이지 않는가. 마냥 기다리다가는 날 새고 말 것이다. 헤엄을 치든 날아가든, 나그네가 알아서 건너는 수밖에. 바닷가를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가두리 양식장 근처에서 작업중인 배가 한 척 있다. 새우잡이 배다. 옳다!
배에서 작업중인 선원들에게 서리 이장님 댁에 가려는데 좀 건너 줄 수 없겠느냐고 소리쳐 묻는다. 선원 한 사람이 선장실로 가는가 싶더니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후 선장이 선창머리에 배를 댄다. 배에서는 네 명의 선원들이 잡아온 새우를 세척중이다.
흰 젓새우들!
갓 잡아온 생멸치.
서리, 서소우이도; 전교생 달랑 하나, 그리고 섬마을 총각 선생님
어선이 서리 선창에 접안한다. 서리에는 벌써 새우와 멸치잡이 어장 배 대여섯 척이 정박해 있다. 선창가에서 주민들이 마른 멸치를 분류중이다. 멸치는 크기에 따라 상품 가치가 다르다. 멸치 작업에 온 식구들이 다 달라붙어 있다. 주인 여자는 그물에서 건져온 멸치를 가마솥에 삶아 낸다. 크기는 동리의 절반도 안 되지만 사람은 서리가 많다. 그래봐야 7가구 15~16명의 주민들이 전부지만 뭍에서 들어온 선원들도 있으니 전체 거주 인구는 그보다 더 많을 것이다. 뭍에서 온 선원들은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창고에서 생활하며 조업에 나간다. 어렵게 건너왔으나 역시 예상대로 이장님은 달갑지 않은 표정이 역력하다. 마지못해 재워주기는 하겠지만 폐가에서 잘망정 눈칫잠을 어찌 잘 것인가.
저 가마솥에 멸치를 삶아 낸 뒤 햇볕에 말린다.
마을을 둘러보니 교회와 초등학교 분교 건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럴 때는 무조건 학교로 가는 것이다. 섬의 유일한 공공기관이 아닌가. 마침 선생님이 계시다. 교실에라도 재워달라 하니 선뜻 허락한다.
2학년짜리 초등학생 1명이 전교생의 전부인 도초초등학교 서리 분교.
교실이 곧 교무실. 선생님은 총각 선생님.
둥근 탁자에 학생과 마주 앉아 1대1 수업을 한다. 가정교사가 따로 없다. 신안 섬사람들은 대개 자녀들이 저학년일 때는 섬에서 학교를 보내고 고학년이 되면 목포로 유학을 보낸다. 지금 분교에 다니는 아이의 동생이 4살이니 이 학교는 적어도 10년 동안은 폐교될 염려가 없을 것이다. 급식은 따로 할 수 없어 교육청에서 아이의 집에 쌀을 지원 해준다.
선생님 귀 먹겠다 목소린 소곤소곤.
선생님은 아직 군대도 갔다 오지 않은 새내기 선생님. 교대를 졸업하자마자 이 외딴 섬으로 발령받았다. 선생님은 내년에 입대 예정이다. 어린 후배들을 상관으로 모시고 군생활 할 것이 벌써부터 걱정이다. 교실에는 선생님 책상과 칠판, 책꽂이, 컴퓨터 3대가 있다. 인터넷은 위성 인터넷이다. 놀라워라! 낙도까지 깔린 정보고속도로. 벽에 붙은 표어가 정겹다.
선 생 님 귀 먹 겠 다
목 소 린 소 곤 소 곤
아이 녀석 목청이 제법 좋은 모양이다. 섬마을 총각 선생님에게 저녁까지 얻어먹는다. 배추김치와 김, 된장과 고추장이 전부인 소박한 식사가 나그네에게는 성찬이다. 선생님은 관사로 들어가고 나그네는 교실에 남았다. 서소우이도의 밤이 가뭇없이 깊어간다.
주민은 날씨 전문가, 선원은 뱃길 전문가…누구 말이 옳을까
우이도 앞바다의 무인도들.
교실 마룻바닥에서서 단잠을 잤다. 선생님은 계란 프라이 하나를 넣은 토스트를 건넨다. 고마운 청년이다. 아침 여덟시, 섬사랑 6호를 타고 우이도 진리로 건너갈 예정이다. 태풍이 북상중이라는 소문이 돈다. 내일부터 태풍의 간접 영향권에 들면 이 바다에도 파도가 거세질 것이다. 선창가에는 마을 주민 너덧 사람이 서성거리지만 정작 배를 타는 사람은 나그네 혼자다.
누구는 목포로 멸치와 새우젓을 부치고 또 누구는 선원에게 심부름을 시킨다. 건너 우이도에 보낼 서류 봉투를 들고 나온 사람도 있다. 어제 동리에서 얻어타고 온 새우잡이 배 태성호에는 선원 한 사람만이 나와 있다.
화부.
주민들이 화부에게 건네는 인사는 동일하다.
“몇 개 했능가?”
“세 개 했어라우.”
그도 아니면 말없이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인다.
새우를 세 상자 잡았다는 소리일까? 야간 어로로 고단하지만 배에서 가장 서열이 낮아 밥짓기까지 해야 하는 화부는 먼저 일어나 아침밥을 짓는다. 쌀을 씻는 화부의 팔뚝에 문신 자국이 선명하다.
“태풍 온다네. 반짝 날 좋은가 했드니 기어이 태풍이 오능구마이.”
“들어오겠다는 걸 말렸소. 월욜날 나가야 쓴단 디 어렵지라. 딴 데로 가라 했소.”
“바람 분다면 들어오지 말아야제.”
토요일, 주말에 낚시꾼들이 섬에 오려 했던 모양이다.
내일 태풍이 오든 말든 오늘은 배가 뜬다. 서리에서 우이도 진리는 잠깐이다. 선원은 내일 배가 뜨는 데 문제가 없다고 장담 한다. 누구 말을 안 믿을 수도 없고 누구 말을 온전히 믿을 수도 없다.
주민들은 섬 날씨의 전문가. 선원들은 뱃길의 전문가.
저 통에서 멸치 젓갈이 익어간다.
우이도; 유명한 사막같은 모래 언덕, 잊혀진 빈집들만 띄엄띄엄
진리 포구는 방파제 공사 작업소리만 요란할 뿐 드나드는 사람은 적다. 우이도에 오는 여행객들은 모두 모래언덕이 있는 돈목이나 성촌으로 드나든다. 진리 포구에 구수한 젓갈 냄새가 진동한다. 멸치젓갈을 삭히는 드럼통 여섯 개가 나란하다.
진리도 옛날에는 수군의 진이 있던 마을이었을 것이다. 섬에 다니면 가장 흔하게 접하는 이름이 진리, 진촌, 읍리, 읍동 등의 이름이다. 읍리는 섬의 행정 관청이 있던 마을이고 진리는 수군이 주둔하던 마을이라 보면 된다. 비금도에는 효자비가 많더니 우이도에는 열녀비가 여럿이다. 밀양 박씨, 상원 김씨 열녀비가 길 가에 정렬해 있다. 선정비가 유난히 많은 섬들도 있다. 유행을 따르는 풍습은 시대를 초월한다.
우이도 산 속의 구지뽕 열매(위)와 산머루
우이도는 서소우이도 보다 면적이 열배 이상 크고 인구도 많지만 학교가 없다. 진리에 있던 분교가 폐교된 뒤 아이들이 더이상 돌아오지 않는 늙은 섬이 되었다. 교육청에서는 취학 아동이 없어지면 학교를 폐교시키지만 아이들이 생긴다 해서 다시 학교를 열어 주지는 않는다. 폐교는 쉬워도 개교는 어렵다. 학교가 없는 섬에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 길은 요원하다. 섬은 점점 늙어 가고 무인도가 되지 않더라도 내내 늙은 섬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진리마을에서 돈목이나 성촌마을을 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험한 고개를 넘어야 한다.
십리 산길.
진리 고개 마루 부근에서 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산길을 새로 낼 계획이다. 진리 고개를 넘으니 산 속에 너른 분지가 나타난다.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에 의지에 힘겹게 산길을 오른다. 돈목에서 오시는 길이다. 할머니는 저 느린 걸음으로 족히 두 시간은 걸어왔을 것이다.
산에는 산열매들이 익어간다. 으름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고 가막사리는 시큼하다. 구지뽕나무 열매는 주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산머루는 설익은 것이 반이다. 산머루와 구지뽕 열매를 따서 갈증을 채운다. 가을 산길을 가는 즐거움의 반은 산열매들이 준다.
다 부질없으나 기억마저 사라지면 어찌 애닯지 않으랴
폐촌이 된 마을, 숲 속의 빈집.
산속에 빈집 두 채가 보인다. 돌담만 남은 집터도 여럿이다. 전봇대를 보니 아주 오래된 것들이다. 언제까지 사람들이 살았을까. 젊은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남은 노인들도 이승을 떠나면서 마을은 폐촌이 되었을 것이다.
떠나간 노인들은 저승의 어느 산골짜기 양지녘에 또 집을 짓고 머무시는 것일까.
빈집은 두 채만이 아니다. 빈집과 담장들, 여기도 한때는 제법 흥성한 마을이었다. 농사짓던 산밭도 제법 넓다. 나무를 때고 곡식이 귀하던 시절에는 우이도의 부촌이었을 것이다. 마을은 20여년 전에 폐촌된 대초리. 500여년 전 우이도에 처음으로 생긴 마을이었다. 흑산도에서 건너온 자산도 바람을 피해 이 산속 마을에서 겨울을 났던 것은 아닐까.
시간이여! 가장 오래된 것을 가장 먼저 사라지게 만들었구나.
바닷바람을 덜 받는 산속이라 그런 것일까. 마지막 사람이 떠난 지 20여년이 지났다는데 집들은 조금만 손보면 살 수 있을 정도로 멀쩡하다. 빈집, 광에 놓인 항아리들도 성하다. 괘종시계는 11시15분에서 바늘을 멈추었다. 시계가 멈추고 난 뒤에도 시간은 또 얼마나 무심히 흘러갔던 것일까. 문간방의 낡은 재봉틀만 홀로 녹슬어 간다.
저 망가진 재봉틀처럼 흘러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사람도 생애도 되돌 길은 영영 없다.
재 너머 도로 공사장의 포클레인 소리가 산중의 적막을 깬다. 이제 곧 도로 공사 장비들이 산길을 파헤치고 넘어와 집터와 옛길을 쓸어버리면 누가 이곳에 사람이 살았던 사실을 기억이나 할까. 흔적 있음도, 흔적 없음도 모두 부질없으나 기억마저 사라져버린다면 어찌 애달프지 않으랴.
고운도 머물고 자산도 머물다 간 섬
이 고개를 넘으면 돈목, 성촌 마을이다. 산 아래 모래밭과 바다는 청옥빛으로 푸르다. 모래 언덕이 있는 성촌마을 해변에는 금도치 전설이 서린 굴이 있다. 고운 최치원의 탄생 설화인 금도치 설화가 이 섬에도 전해진다. 우이도와 고운의 인연에서 비롯된 전설일 것이다. 고운이 우이도에서 난 것은 아니나 이중환의 <택리지>는 당나라 유학길에 고운이 이 섬에 기항했을 가능성을 전한다.
우이도 모래 언덕.
신라 때부터 우이도는 중국으로 가는 항로상에 있었다. <택리지>는 영암의 구림이나 월남 마을을 출항한 배가 흑산도, 홍의도, 가거도를 거처 중국에 도착했다고 기록한다. 배들이 순풍을 만나면 6일 만에 당나라의 태주 영파부 정해현에 도착했다고도 하니 중국과의 최단거리 항로로 각광받았음직하다. 장삿배를 타고 이 길로 유학을 떠났던 최치원과 김가기, 최승우 등은 모두 당나라의 과거에 급제했다. 하지만 풍랑이라도 만나면 흑산도로 항해하던 배가 가까운 우이도에 피신하기도 했을 것이다. 당과 신라를 오가는 길에 고운이 우이도와 인연을 맺었을 가능성이 충분한 것이다.
성촌마을에는 우이도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만든 사막같은 모래 언덕이 있다. 하지만 나그네는 성큼 산을 내려갈 수 없다. 나그네는 사막을 찾아 우이도에 왔는가. 사람을 찾아 왔는가.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닐까.
길은 가면 있으나 사람은 돌아오지 못한다. 그래도 가야만 하는가?
새벽은 밤을 꼬박 지샌 자에게만 온다.
낙타야,
모래 박힌 눈으로
동트는 地平線을 보아라.
바람에 떠밀려 새 날이 온다.
일어나 또 가자.
사막은 뱃속에서 또 꾸르륵거리는구나.
지금 나에게는 칼도 經도 없다.
經이 길을 가르쳐 주진 않는다.
길은,
가면 뒤에 있다.
단 한 걸음도 생략할 수 없는 걸음으로
그러나 너와 나는 九萬里 靑天으로 걸어가고 있다.
(황지우 ‘나는 너다 503’)
글·사진/강제윤(http://blog.naver.com/bogilna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