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6명으로 이루어진 두 팀이 네트를 사이에 두고 손으로 공을 주고받는 경기.
개요
배구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 ...
선수들은 둘레 약 65㎝, 무게 260~280g의 공기를 넣어 부풀린 가벼운 공을 그물 너머로 주고받으면서, 공이 되돌아오지 못하고 상대 팀 코트 안에 떨어지게 해야한다. 상대편에서는 이것을 막기 위해 공이 코트 바닥에 닿기 전에 한 선수가 공을 쳐올려 동료에게 보내고, 동료는 그 공을 그물 너머로 보내거나 3번째 동료에게 넘긴다. 그러면 3번째 동료는 그것을 그물 너머로 보낸다. 한 팀은 공을 3번 접촉한 뒤에는 반드시 그물 너머로 되돌려보내야 한다.
농구가 너무 격렬한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실내 경기로 고안된 배구는 1895년에 미국 매사추세츠 주 홀리오크의
기독교청년회(YMCA) 체육 이사인 윌리엄 G.
모건이 창안했다. 모건은 원래 이 경기를 '민토네트'라고 불렀지만, 스프링필드대학교(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의 한 교수가 공을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고 발리(volley)로 되받아 치는 이 경기의 특성에 주목하여 '발리볼'(volleyball)이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모건은 최초의 규정집인 〈북아메리카 기독교청년회 체육연맹의 공식 안내서 Official Handbook of the Athletic League of the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s of North America〉(1897)를 출판했다. 이 경기는 곧 학교·운동장·산업체·군대를 비롯한
미국의 여러 단체에서 남자뿐 아니라 여자에게도 폭넓은 인기를 얻었고, 그후 다른 나라에도 소개되었다.
1916년에는 YMCA와
미국대학체육협회(National Collegiate Athletic Association/NCAA)가 공동으로 규정집을 발행했다. 1922년 미국 최초의 전미배구대회가 YMCA 전미체육위원회 주최로 뉴욕 시 브루클린 중앙 YMCA에서 열렸다. 1920년대 중엽에는 비공식적인 전미배구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1928년에 미국배구협회(United States Volleyball Association/USVBA)가 결성되어 규칙을 제정하고 경기를 관장하는 기구로 인정받게 되었다. 1928년부터 USVBA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4, 1945년을 제외하고는 해마다 전미남자배구 선수권대회와 전미성인(35세 이상) 남자배구 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여자 대회는 1949년에 시작되었고 성인(30세 이상)여자 대회는 1977년에 추가되었다. 이외 미국의 전국 규모 대회는 YMCA 및 NCAA와 같은 USVBA 회원 단체가 주최한다.
배구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미군을 통해 유럽에 소개되어 전국 규모의 배구단체가 잇따라 조직되었다. 1947년
국제배구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Volleyball/FIVB)이 파리에서 창설되었으며, USVBA도 13개의 창립 회원 가운데 하나였다. 1980년대 중엽에는 FIVB 회원이 145개국 이상으로 늘어났다. 현재 FIVB 본부는 스위스 로잔에 있다.
국제배구대회는 1913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1회 극동경기대회에서 시작되었다. 아시아에서는 배구가 선교사가 세운 학교를 통해 처음 도입되었는데, 1900년대초에는 지금보다 코트가 넓고 그물 높이는 더 낮았으며 1팀이 9명의 선수로 구성된 9인제 배구였다. 극동경기대회를 확대한 아시아 경기대회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까지도 9인제 배구를 채택했다. 선수들은 서브권을 얻은 뒤 시계바늘과 같은 방향으로 돌지 않고 고정된 위치에서 경기를 했다. 서브할 차례가 되면 서브를 한 뒤 자기 위치로 되돌아갔다. FIVB가 후원하는 세계배구선수권대회(1949년에는 남자만, 1952년부터는 남녀 모두)는 표준화된 경기규칙과 판정방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배구는 1964년 도쿄
올림픽 대회 때 남녀 경기 모두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80년대 중엽에 이르자
소련의 남녀배구 팀이 세계선수권대회와 올림픽 대회를 석권했다. 소련에서 배구의 인기는 1952년에 모스크바에서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렸을 때 한 경기를 관람한 관중이 4만 명에 이르렀다는 사실로도 입증되었다. 1964년 올림픽 대회에서 우승한 뒤 널리 알려진
일본의 여자배구 팀은 배구에 대한 민간기업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일본배구협회도 그들을 격려했다. 이밖에도 이 팀은 국제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우승했을 뿐 아니라, 1962, 1966, 1967년에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회 때 미국 여자배구 팀은 은메달을 땄고 남자배구 팀은 금메달을 따서, 올림픽 대회 배구 종목에서는 처음으로 미국에 값진 메달을 안겨주었다. 유럽 선수권대회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폴란드·불가리아·루마니아·소련이 선두를 다투었다.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남태평양 지역에서도 배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범아메리카주경기대회(남아메리카, 중앙 아메리카, 북아메리카를 포함)는 1955년에 배구 종목을 추가했고, 브라질·멕시코·캐나다·쿠바·미국이 자주 우승을 다툰다. 아시아에서는 한국·중국·일본이 우세하다.
FIVB는 국제배구대회를 4년 주기로 개최할 것을 권장했고, 이런 주기는 1969년 월드 컵 선수권대회로 시작되었다. 월드 컵은 올림픽 대회가 열린 이듬해에 열린다. 월드 컵이 열린 이듬해에는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리고, 그 이듬해에는 지역 대회(예를 들면 유럽 선수권대회, 아시아 경기대회, 아프리카 경기대회, 범미주경기대회 등)가 열리며, 그 이듬해에는 올림픽 대회가 열린다(
스포츠 기록:배구,
올림픽 대회).
배구에는 최소한의 장비와 공간이 필요하며, 실내뿐 아니라 옥외에서도 할 수 있다. 길이 18m, 너비 9m인 코트 바닥은 매끄러워야 하며 중앙선을 중심으로 정확히 둘로 나뉘어 있고, 두 팀은 그 두 구역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거나 배정받는다. 선수들은 경기가 진행되고 있을 때는 중앙선을 완전히 넘을 수 없다. 중앙선에서 양쪽으로 3m 떨어진 곳에 중앙선과 평행한 선이 하나씩 그어져 있는데, 이 선보다 앞쪽에서는 후위 선수가 네트 꼭대기보다 높은 위치에서 공을 상대편 코트로 넘길 수 없다(스파이크라고도 하는 강속구와 같은 공격 행위는 대개 전위 선수들이 네트 가까이에서 수행할 때 가장 효과적이고 위력적임).
네트는 정확히 중앙선 위에서 코트를 가로질러 팽팽히 쳐야 한다. 이 네트의 공식 높이(네트 꼭대기에서 코트 중앙의 바닥까지)는 남자가 2.43m이고, 여자는 2.38m이다. 청소년이나 낮은 네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네트 높이를 조정할 수 있다. 네트 양쪽에는 코트 경계선 바로 위에 수직 테이프가 부착되어 있어서, 심판들은 서브된 공이나 상대편 코트로 넘어간 공이 수직 테이프의 바깥쪽 가장자리를 따라 네트 위로 1m쯤 뻗어 있는 유연한 안테나 안으로 들어갔는지 바깥쪽으로 나갔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 공은 완전히 이 두 안테나 사이로 네트를 넘어가야 한다. 서비스 구역은 엔드 라인 바깥쪽으로 엔드 라인의 오른쪽 1/3 뒤에 표시되어 있다. 서브는 이 구역 안이나 뒤에서 해야 한다. 자유롭게 움직이고, 행동이 방해받을 위험을 줄이고, 네트를 맬 기둥과 심판이 설 자리를 마련하려면 코트 주위에 최소한 1.8m 너비의 여유 공간이 있어야 한다. 마음놓고 공을 서브하거나 받아넘기고, 공이 천장에 닿지 않고 경기를 계속하려면 코트 위에 최소한 7.8m 높이의 빈 공간이 필요하다.
공식 대회에서는 각 팀은 6명으로 구성되는데, 그중 3명은 네트와 가까운 자리에 그물을 마주보고 일렬로 서서 전위를 맡고, 나머지 3명은 후위로 백코트에서 경기를 한다. 서브권을 가진 팀의 오른쪽 후위(2번째 줄 오른쪽에 있는 선수)가 엔드 라인 밖의 서비스 구역으로 가서 공을 손이나 주먹이나 팔로 쳐 상대 팀 코트로 넘기면서 경기가 시작된다. 상대 팀은 그 공을 받아서 공과 3번 넘게 접촉하지 않고 다시 네트 너머로 보낸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선수는 공을 잡거나 홀딩해서는 안 되며, 네트를 건드리거나 상대편 구역으로 들어가서도 안 된다. 공은 코트 바닥에 닿아서는 안되고, 한 선수가 2번 연속해서 공과 접촉할 수 없으며, 엉덩이 아래로는 어느 신체 부위도 공에 닿아서는 안 된다. 서브권을 가진 팀이 랠리에서 이겼을 경우 그 서브를 한 선수가 다시 서브를 한다. 서브권을 가진 팀이 서브권을 잃으면 서브를 받던 팀이 서브를 하게 되고, 그 팀의 선수들은 시계바늘과 같은 방향으로 한 자리씩 이동한다. 오른쪽 전위는 오른쪽 후위로 가서 서비스 구역에서 서브를 한다. 랠리에서 이긴 팀은 1점을 얻고 서브권을 갖는다. 최소한 2점을 앞서서 먼저 25점을 얻는 팀이 세트의 승자가 되며, 24:24 동점이 된 경우에는 2점차 리드가 될 때까지 계속한다. 5세트 경기를 하는데, 마지막 5세트는 2점 리드해서 15점까지 경기한다
1916년 3월 25일 YMCA 운동부와 유년부의 고문으로 내한한 미국의
반하트에 의해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반하트는 배구에 관한 강습회도 열어 배구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배구는 1925년부터 시작된 조선체육협회 주최의 조선신궁대회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31년 이후 경기의 내용에 있어서도 상당한 발전이 있었고, 참가 팀 수와 대회 수도 늘어났다. 1938~41년에는 남자 전문부의 보성전문학교 선수들이 배구계를 대표했으며, 1945년 11월 20일에는
대한배구협회가 창설되어 한국 배구의 오늘이 있기까지 주체적인 역할을 담당해왔다.
1956년 10월에는 대한배구협회가 주최하는 대회 가운데 가장 권위있는 전국남녀종별선수권대회가 창설되었다. 1959년 제40회 전국체육대회에서는 처음으로 6인제 배구가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1964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대회(도쿄)에 참가하여 남자 10위와 여자 6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이를 시발점으로 1966년 제25회 방콕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남녀 2위, 1957년 제25회 세계여자선수권대회에서 3위, 1970년 제6회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남녀 2위, 1973년 제21회 우루과이 월드 컵 대회와 모스크바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3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1976년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 대회에 참가해 배구 사상 처음으로 여자 배구가 동메달을 땄다. 한편 청소년 배구의 경우 1977년 제1회 세계 주니어 선수권대회에서 여자 팀이 우승했으며 대학 배구도 1979년 멕시코 시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출전해 1위를 기록했다. 또 한국은 1980년 제1회 아시아 주니어 선수권대회에서 남녀 1위를 비롯하여 제2회 세계 주니어 선수권대회에서 3위, 일본 NHK배 국제대회에서 남자부 1위와 여자부 3위 등의 실력을 발휘했다. 1984년에는
FIVB 국제배구대회를 창설하고, 10월 25~30일 제1회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했으며, 이 대회에서 남자 2위와 여자 2위의 성적을 올렸다. 1986년에는 남자 청소년 팀이 아시아 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의 1위에 이어 이듬해 바레인에서의 제4회 세계청소년남자선수권대회에서도 우승했다.
1984년 국내 정상급의 남녀 대학 팀 및 실업 팀을 총망라한
대통령배전국남녀배구대회가 창설되어 동계 스포츠로서 정착하면서 지방 배구의 활성화와 관중의 증대 및 배구 인구의 저변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1985년부터는 남녀 꿈나무 선수들을 꾸준히 발굴하여 육성해오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배구는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에서 예상외의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고, 1992년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회에서도 우리의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1994년 제12회 히로시마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여자배구가 중국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1998년 제13회 방콕 아시아 경기대회에서는 남녀 모두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2002년 제14회 부산 아시아 경기대회에서는 남자배구팀이 우승을 차지했다.
첫댓글 어서 멋지게 퍼다 놓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