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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하기
□ 문보영 : 30년 후의 내 모습은 평상시에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사진이나 캠코더를 들고 다닐 것 같다. 아이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친구들의 아이를 잘 돌보아줄 것 같다. 친구들이 귀찮아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필요한 직업은 어떠한 직업이든 적성보다는 흥미가 더 중요해야 한다고 본다. 재미있게 할 수 있거나 성취감이 있거나 보람이 있으면서도 따뜻한 심성을 키울 수 있다면 필요한 직업이다. 별명은 미술시간에 나왔는데 1학년 때 모나리자 그림을 보면서 닮았다고 해서 ‘모나리자’가 되었다. 평소에 많이 졸린 편이라서 눈을 크게 못 뜬다. 평소에 재미있는 생각을 많이 해서 헤벌쭉하다.
--> 30년 후의 모습에서 친구의 아기들을 봐준다고 했는데, 그 때는 나이가 너무 많다. 즐길 수 없다면 손자들과 같이 영화를 보러가거나 할 것이다. 보영이가 스스로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직업은 ‘미술치료’나 ‘심리치료’와 같은 것이었다. 교사도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해서 계속 교사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 김종헌 : 30년 후의 내 모습은 특별히 어떨 것이라고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분명한 것은 어딘가에서 꼭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 같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없고 각자의 위치가 소중하다고 본다. 별명은 ‘허니’라고 부른다. 특징이 없고 평범해 보인다. 노래 부르는 것은 좋아한다. 목소리가 좋다.
--> 구체적으로 원하는 직업이 뭔가? 대학에 가서 찾아볼 생각이었음. 원래 경찰이 되고 싶었는데 경찰대 시험에 떨어졌음. 그래서 자신이 없어진 상태. 경찰이 되고 싶은 이유는? 경찰이 정의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특별이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정하지 않아도 대학에 가서 탐색을 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 김성현 : 처음에 아무도 모르는 나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했는데, 이것이 자기만 아는 나인지 자기도 모르는 나인지 생각했다. 사람이 이런 면이 있다면 자기도 모르는 면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나만 알고 있는 자기 자신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하다. 여기 있는 나는 ‘현실관계 속에서 관계를 맺고 있고 현실에 얽매여서 살아가는 나’이다. 30년 후의 내 모습은 솔직히 생각해보지 않았다. 너무 시골이 아니라 도시 근교 농촌에서 화단을 가꾸고 생활하고 싶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직업에 대해서 단정하기는 어렵다. 솔직히 나에게 가장 필요한 직업은 내가 좋아하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다. 내가 만족할 수 있다면 된다. 별명은 ‘김빠’이다. 얼굴에 점이 많아서 ‘점돌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 지방에서 왔어도 평촌 목련단지에 산다. 안동이 안양보다 좋은 점은 ‘한가하고 안락하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정년퇴직이 빠르니까 50세이면 퇴직을 할 것이라고 본다.
□ 방미경 : 나는 많은 역할이 있고 나를 정의할 수 있는 많은 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처럼 나를 정의해보라고 하면 딱히 할 말은 없다고 본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물어본다면 자신의 본질을 포장해서 드러낸다. 실제로는 이기적이고 무신경하기도 하고 활발해 보이지만 외로움을 많이 탄다. 그러나 남들은 나의 포장된 모습을 많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관계’로 나를 정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렇게밖에는 정의를 내리기 어렵다. 30년 후 나의 모습은 희망사항인데, 생활이 안정되어 있고 평안한 가정에서 화목하게 가정을 이루고 아들·딸도 잘 키워놓고 중년을 맞이한 편안한 주부의 모습이다. 여행을 많이 다니는 편이라서 세계 여행을 다니고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직업은 특별히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장 원시적인 일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농업이나 수산업, 생산직이 가장 필요하다고 본다. 가장 처음부터 발생했고 의식주를 충족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별명이 없어서 곤란했다. 얼굴의 피부는 누르스름하고 얼굴이 불그스름해지고, 둥그스름하게 생겼다. 넉넉해 보인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 아이디가 왜 wavebang인가? 지금은 머리가 괜찮은데 곱슬이 심했다. 성이 방씨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을 했다. 만약 세계여행을 갈 수 있다면 이탈리아에 가고 싶다. 서양사에 관심이 많다. 옛날에 찬란했던 로마문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찬란했던 역사를 가까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날씨도 따뜻하기도 하다. 그런 날씨를 좋아한다. 겨울이면 이불 속에서 꼼짝하지 않고 버틴다. 미경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관계는?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 그리고 친구들일 것이다. 좋아하는 강아지. 강아지는 힘든 재수 생활의 유일한 활력소이기도 했다. 그것이 정서적으로 도움이 많이 되었다.
□ 신지연 : 이것밖에 안되나 싶어서 세어보았다. 뭐가 포함이 되는지 생각해보거나 이 사람들은 꼭 여기에 올려놓기를 원했던 사람도 있다. 그렇지 않고 나 하나만 놓고 생각해보면 끝이 나지 않았다. 남들은 나를 이렇게 평가하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대하고 있는데 생각해보면 그것이 완전한 나의 모습은 아니다. 다른 이들이 왜 내 모습 중 일부를 보지 못하는지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지금 여기 있는 나나 아무도 모르는 나에 대해서도. 나는 그냥 나인데 나를 상대하고 있는 사람들은 각자 다르게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30년 후에는 삼류소설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고, 숙박업을 하고 싶어서 우리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경치 좋은 곳을 찾고 있을 것이다. 55세가 되었을 때 정해놓은 땅에 건물도 짓고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직업은 만족할 수 있는 직업이다. 돈이나 명예나 보람을 가질 수 있는 직업은 많은데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고 개인이 하고 있는 일에 만족하면 된다. 별명은 ‘벼슬’이다. ‘닭벼슬’에서 ‘닭’이 떨어져나간 것이다. 잊어버려서 ‘붕어’였다고 소리를 질러서 ‘닭’이 되었는데 그것이 ‘벼슬’이 되었다. 눈썹이 옅어서 모나리자라고 이야기한 적이 많고 이마가 넓어 보인다.
--> 관계에 대해 세분화했는데 나의 친구의 친구라고 했을 때 가장 생각이 나는 친구들의 명단을 생각해본 것이다. 힘들 때 같이 있었던 고등학교 3년간의 친구들, 어렸을 때 의왕시 살 때의 친구들,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외삼촌이 생각이 났다. 양명여고 학생이고 예비 대학생이기도 하고, 새의 주인(밥 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조그맣게 해서 누구나 집처럼 느낄 수 있도록, 세 가족이나 네 가족 정도 머물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밥도 차려주고 혼자 여행 온 사람들도 챙겨주었으면 좋겠다. 잠만 자고 가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내가 돌아다니면 여행지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지 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항상 그곳에 있으므로 나를 지나쳐 인상이 남은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고 또 다른 집과 같은 느낌이 있었으면 좋겠다. 혼자 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성적을 올리겠다는 조건을 걸고 해남 ‘땅끝마을’에 갔었다. 그분들이 잘 해주셨고 아무 곳에나 가도 항상 있다고 이야기하셨다. 제일 처음에는 가족여행을 갔고 혼자 가서 배우고 싶어서 갔다 온 곳인데, 그곳에서는 자연의 아름다움보다는 그 분들의 마음씨와 그분들의 일에 대한 존경, 그리고 글 쓰는 것 이상으로 해보고 싶은 갈망이었다. 의도하지 않았던 그 분들과의 만남에서 누구나 왔다가고 다시 올 수 있고, 인간도 배울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혼자 하는 여행은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음악을 듣고 책 몇 권 사진만 갖고 갔다. 맘대로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어버리면 다시 전화해서 오기도 했다. 가이드가 있는 여행은 그 길만 가지만 혼자 가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안 좋은 점은 엄마가 돈도 주셨고, 어머니에게 말씀을 해놓으셔서 그랬지만. 끝에는 가족에게 구속이 있었다. 하지만 자연물만 보지 않고 혼자 생각할 것이 많아져서 좋다. 가족이 여행에 함께한다는 것이 큰 틀이나 굴레도 생각하고, 혼자 있다는 것이 자유인데 평소에 가족이 그렇게 하는가? 나는 가족여행이 꿈인데. 어렸을 때 부모님이 보수적이어서 혼자 내버려두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핸드폰도 억지로 갖게 되었다. 가족여행도 좋지만 동생도 봐야 하고 짐이 되는 경우도 있다. 여행지에 가서 노래방에 가자는 경우도 있다.
□ 선소영 : 내 소개를 하라고 했으면 아마도 성격보다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이다. 나는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진짜 나의 모습인지 내가 알고 싶은 것인지 궁금했다. 30년 후에는 50살인데 시골로 가서 살고 싶다. 동물을 좋아하는데 많이 기르면서 살고 싶다. 강아지나 고양이 등.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직업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별명은 ‘할머니’이다. 얼굴의 특징은 눈이 튀어나왔고 그래서 ‘개구리’가 별명이었다. 쌍꺼풀이 아니라 눈에 주름이 있어서 ‘코끼리’라는 별명도 있었다.
--> 단지 가디건 때문에 할머니라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는 것을 좋아해서 그럴 수도 있다. 소영이를 한 단어로 표현해보라고 하면 ‘동그라미’라고 표현하고 싶다. 생긴 것도 둥글둥글하고 성격도 뭔가를 고집하거나 하지 않고 원만하다. 나쁘게 말하면 우유부단하다. 성격의 특징이나 생긴 것의 특징 모두 ‘동그라미’라고 할 수 있다. 장래희망이 딱 정해져 있지는 않은데, 역사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싶다. 역사를 너무나 재미있게 배웠다. 중학교 때 선생님 영향이나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공부를 할 때 너무나 재미있어서 관심과 흥미가 생긴 것이다.
□ 방민혁 : 사람은 누구나 관계를 맺으면서 산다. 내 주위의 사람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지 어떤 관계를 갖는지 생각하게 한다.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라고 했는데 그것을 나는 ‘관계를 맺으면서 주체를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30년 후 나와 같은 나이 정도의 2세가 있을 것이고, 지금 아버지와 같은 내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과 다른 것이 있겠지만. 장래희망은 건물주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직업은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지도자가 있어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 요즘 별명은 ‘방치’임. 소수 방씨는 가문에 집착을 많이 한다. 항렬자로 하면 가운데에 ‘치’자가 들어간다. 얼굴의 특징은 매일 다른데 관상 중에서 눈만 ‘인상’이라고 하면 그것이 매우 강하다고 이야기한다. 옛날부터 무섭게 생겼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태어날 때부터 이랬다고 한다. 친구들은 고릴라 닮았다고 이야기한다.
--> 건물주가 되고 싶은 이유는 재산을 그렇게 관리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이다. 원래 이름은 ‘방치설’이라고 함. 족보에 그렇게 올라가 있음. 집이 평범하다면 건물주가 되기까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텐데 어떻게 건물주가 될 것인가? 건물주가 되려면 돈도 많아야 하고, 복잡할 것 같은데 희망사항임.
□ 채윤경 : 우리나라에 ‘채’라는 성은 오만 명이 있다. 그렇게 강조해야 잊지 않는다. 나는 이 시를 잃고 감동을 한 것이 웬만큼 인생을 살지 않으면 이런 생각을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를 찾을 수 있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를 정의하는 것이 가장 좋다. 나는 이미 단독적이지 않고 사회 속에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고 했는데 그 속에서 발견하는 모습이 가식이라고 생각해도 진짜일 수 있다. 나는 그 안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넣고 싶다. 나는 ‘비상을 꿈꾸는 새’라고 정의를 하고 싶다. 아직 내 시대가 오지 않았고 아직 나는 날개를 펴지 못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날아오를 것이다. 30년 후의 내 모습은 항상 상상을 하는데, 친구들과도 상상을 하면서 즐거워한다. 30년 후에는 외로운 아줌마가 되어 있을 것이다. 결혼을 하되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이 꿈이다. 내 아이에게 쏟는 헌신이 싫은 것이 아니라, 내가 거기에 쏟는 것이 싫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사회에 있다고 생각해왔다. 사회에 대해 일을 하면서 아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나쁜 엄마이므로, 내가 아이를 낳는 것보다는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나의 장래 희망은 ‘대통령’이다. 초등학교 이후에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대중씨가 ‘정치는 흙탕물 곳에 핀 연꽃’이라고 하는데 정치를 욕하지 않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저 사람이 진심으로 우리를 위하고 있다는 것을 믿게 하고 우리나라가 부강해지고, 그리고 통일을 이루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직업은 ‘재수하면서 생긴 습관’인데 항상 구체적인 것을 생각한다. 살다가 인간이 시작되면서 음악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음악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작가인가 생각했는데 이런 전문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중요한 게 있을 수 있다. ‘농부’가 가장 중요하고, 교육과 가정을 담당하는 ‘엄마’가 중요하다.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엄마’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을 굴려키운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별명은 ‘채반’이다. 애정을 갖고 부를 때 ‘채반장’의 약자인 ‘채반’이라는 이름을 많이 부른다. 중학교 때 친구들이 ‘채반’이라고 부르면 순수했던 그 때가 생각나서 눈물이 핑 돈다. 눈동자가 갈색이다. 꾸미는 데도 별로 소질이 없고 얼굴에 특징이 없다. 눈·코·입은 낫지만 모아놓으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만족한다. 목소리가 톤이 낮은 편이다. 애를 쓰고 올려도 톤이 낮다. 항상 직선적으로 말을 한다. 이 상처를 극복해야 저와 친구가 될 수 있다.
--> 누구나 다 아이를 낳고 싶어 하지 않는데 어떻게 할까? 입양을 하려고 한다. 출산율 저하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서 미안하기도 하다. 가정과 사회 중에서 택하라고 하면 ‘사회’를 택하겠다고 했는데 가정에 완벽하지 못하면 그렇게 하려던 것 같다. 완벽주의자 아닌가? 실제로 그렇다. 공부를 하더라도 그렇다.
□ 김선민 : 가문에 자부심이 많지만 나는 광산김씨의 종손이다. 아무도 모르다고 하는데 난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내 자신을 알기 위해 세상을 살아간다고 본다. 나도 나에 대해서 알면 다른 이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그렇다면 여기에 앉아있는 나는 ‘지금까지의 내 조각을 다른 이들과의 관계라는 끝’으로 묶어놓은 것 같다. 나의 꿈은 학자이다. 공부를 계속 하고 싶은데 ‘고고학’을 하고 싶다. 30년 후에는 식구들 전체와 밥을 먹는 것이 꿈이다. 아버지와 함께 밥을 먹어본 적이 없다. 안빈낙도의 삶을 살면서 세상을 피곤하지 않게 살고 싶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직업을 생각하면 자기 직업이 가장 중요하겠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성직자’라고 생각한다. 현재사회에서 필요한 직업은 마음의 양식을 찾아주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본다. 별명은 ‘부주의’이다. 교복도 벌써 네 번째이다. 음악시간에 의자로 친구를 찍은 적이 있다. 실수로. 두 번째는 ‘빠다’이다. 외국에서 살다 와서 가끔 발음이 구른다고 해서 그렇게 생긴 별명이다. 얼굴의 특징은 ‘흉터’이다. 주변에 폐가 되어서 미안할 때도 많다.
--> 어릴 때에는 오래된 물건을 보는 것이 좋았다. 커서 책을 보았는데 ‘모든 세상 돌아가는 일은 인간을 알면 알 수 있고, 자신은 고고학을 통해 옛날 사람들을 알아서 많은 사람들을 알고 싶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와서도 그 일이 눈에 띄었다.
□ 안승리 : ‘승리’가 이름인데 공교롭게도 성이 ‘안’이다. 내가 타인의 시각에서 구성되었을 때 아무도 모르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조금씩은 알고 있는데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한 부분이 부각되는 것이라고 본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거창한 역할이 주어지기 보다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조금씩 규정지어지는 것이라고 본다. 이 교실에서 보이는 면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조금은 피상적인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런데 이야기를 해보니까 처음에 생각했던 고정관념은 많이 없어졌다. 30년 후의 내 모습은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고, 50대에는 늦은 것 같지만 세계 여러 곳에 다니면서 불가사의를 찾아다니는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고대인들의 신비로움이 궁금하다. 남편이 경제적으로 뒷받침을 해주면 그곳을 돌아다니고 싶다. 인격적인 면에서 보면 갑작스럽게 죽었을 때 많은 사람이 슬퍼해줄 수 있는 인간적인 향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첫인상이 안 좋고 원만하지 못해서 개인적으로 사람으로 존경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여 매정하게 대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원만해지기를 원한다. 조금만 참았으면 되는 것을 망친 것이 안타깝다. 그래서 향기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직업은 생계가 보장되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자아성찰과 자기만족도 중요하지만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아무래도 생계가 보장되는 것이 일차적이다. 별명은 ‘슝리’처럼 중국어 발음이 나는 것이다. 친한 친구들은 ‘가식’이라고 한다. 목소리가 처음 만났을 때나 윗사람을 만났을 때 좋은 목소리가 나오다가 장난칠 때 목소리가 다르다. 그래서 친구들이 가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재수를 하면서 살이 많이 쪄서 얼굴이 동글동글하다. 평범한 얼굴이다.
--> 진성고에 간 이유는 공부를 안 해서 인생이 불확실한 것이 문제라고 생각해서 규율 엄격한 학교에서 긍정적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방송반에서 아나운서를 담당했다. ‘불건전한 이성교제가 없는 학교’라고 하는데 남녀가 반이 나뉘어 있고, 중간에 문이 있어서 그 문에는 선생님만 다닐 수 있다. 원칙적으로는 교류가 없어야 하지만 쉬는 시간에 편지도 주고받기도 한다. 아날로그적이기는 하지만 낭만이 있다. 생각만큼 엄격하지는 않는다. 선생님들도 훌륭하신 분들이다. 선생님들이 인격적으로나 학업적으로 존경할만한 분들이 많고 선생님들과의 관계가 매우 돈독하고 친구들과는 가족처럼 지낸다.
□ 황지영 : 아무도 모르는 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내가 생각하는 것의 느낌은 나만 알고 있는 것이므로 다른 이들이 나타나는 것만 보는 것과 다르게 아무도 모르는 나는 ‘나의 생각과 느낌’이다. 많은 분들이 자신을 모르고 있다고 하는데 나는 누가 물어보면, 이름을 말하고 취미와 특기, 고등학교 등을 이야기할 것이다. 이 사람은 관계를 썼다는 것 자체가 발상이 특이하다고 본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은 많이 해보았지만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정의하지 못했다. 30년 후에 나는 ‘공무원’이 되어서 편안하게 살 것이다. 돈이 좀 있으면 마당에서 동물을 키우고 아이들이 많은 주택가에서 살거나, 주말에 아기들 있는 곳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 여행을 좋아해서 돈만 있으면 가까운 곳이라도 많이 가는데 세계여행, 많이 알려지지 않고 숨겨진 생활이나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지만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싶다. 친구들이 대부분 결혼을 안 한다고 하는데 친구들과 곁에서 살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직업은 어떤 사람이 태어났을 때 그 사람 옆에 있어주는 것. 혼자 태어나면 외로운데 옆에 같이 있어주는 것이 꼭 필요하다. 별명은 ‘고구마’이다. 얼굴이 검다. 생긴 것이 쌍꺼풀도 없고 부수하고 편한 스타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처음에 얼굴형이 고구마처럼 갸름한데 처음에는 달걀형이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고구마와 포카혼타스라고 이야기한다. 수능 한달 전부터 수능 날까지 쌍꺼풀이 생겼다가 다음날부터 없어졌다. 그래서 안타깝다. 눈이 작다.
--> 아버지가 행정공무원이신데, 집안이 어려우니까 할아버지가 공부에 대해 부정적이어서 공부에 대한 열망이 강하셨다고 한다. 공무원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틀에 박히고 복지부동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를 보면 산도 좋아하고 활동적이다. 아버지를 보면서 생각이 깨졌다. 공무원이 생각보다 자유롭고 자기 일도 많이 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무원이 좋아졌다. 아버지가 자수성가 하시면 굉장히 주장이 강하고 자식에 대한 집착과 공부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 그런데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는가? 아버지는 프라이드가 매우 강하다. 그리고 가족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겉으로는 일부러라도 자식을 사랑하고 품어주시려고 노력하시는 편이다. 중학교 때 많이 놀기도 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에는 무척 힘들기도 했다.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고 아버지의 영향으로 매우 자립적이다.
□ 이승준 : 처음 이 시가 너무 잡다하다고 생각했지만 좋게 생각하면 한 사람에게도 이런 많은 관계들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대한민국의 고3으로서 인생의 중요한 관문 앞에 서 있는 한 인간이다. 그런데 안양외고 친구들에게 한명의 친구이고, 나는 나이므로 나는 알겠지만 남의 생각을 잘 모른다. 그게 항상 궁금하다. ‘남이 될 수 없는 내가 나’인 것 같다. 나는 내가 가장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남이 나를 볼 때에는 내가 남을 볼 때처럼 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30년 후의 나의 모습은 50세가 코앞이지만 30대 중후반처럼 젊어보일 것 같다. 그리고 가정을 갖고 행복하게 살며, 50세 정도가 되면 취미활동도 할 테니까 고고 유적을 구경하러 다니고 싶다. 돈을 많이 벌어서 고고학에 기부도 하고 고고 유적을 같이 돌아다닐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직업은, 조금 지나면 직업이 없어도 인간은 알아서 잘 살 것 같다. 그렇지만 인간관계가 중요하다고 본다. 직업은 아니지만 남자와 여자를 떠나서 친구가 있는 것이 좋다고 본다. 별명은 ‘빨갱이’이다. 평소에 잘 빨개지기 때문이다. 얼굴의 특징은 잘 모르겠다.
--> 남동생이 평소에 밉다. 이제는 그럴 일이 별로 없겠지만 늦게 집에 오면 먹을 것을 혼자 다 먹기도 한다. 수십 번을 말해도 안 듣는다.
□ 정현섭 :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직업은 농부나 어부는 생존본능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직업으로 갖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가장 필요한 것은 말을 가르치는 직업인 것 같다. 문화를 발달시키거나 발전시키려면 언어를 가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별명은 중학교 때 ‘정특수’라는 별명이었다. 특수반이랑 1년 동안 짝을 했다. 얼굴의 특징은 눈이 크고 왼쪽 눈에 아래 위로 점이 있어서 눈을 감으면 ‘나누기’가 되어 별명이 된 적이 있다.
□ 권영지 : 언론 쪽에 꿈이 있으므로 기자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함. 결혼에 대한 생각은 아직 정립이 되어 있지 않음. 해야 한다는 확신이 없어서 아이가 있을지 잘 모르겠다. 30년 후에는 제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것이라고 본다. 별명은 ‘외계인’임. 외모에도 배경이 있겠지만 하는 행동이 특이해서 중학교 때 아이들이 그렇게 부름.
□ 최수미 : 30년 후에는 가정도 있고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변호사였으나 힘들다는 것을 알고 새로운 탐색을 하고 있는 중임. 연기를 좋아함. 쇼 하는 것도 좋아함. 50살이면 생활에 안정도 되어 있을 것이므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할 것이다. 노래도 부르고 나가서 연기하는 뮤지컬 배우를 하고 있을 것이다.
2. 반 이름 정하기 / 전원일기
✤ 11월 29일 수업하기 - 내 생각에 모순이 있다.
1.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은 평상시에 결론을 쓰는 말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말을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화를 이룬다는 말을 쓸 때에는 주장에 확신이 서지 않을 때 반박을 당할 때의 보루를 남기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출제자의 의도와 배치되었을 때 감점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해서이기도 하다. 또 조화라는 단어 자체가 호감을 준다. 좋아보이고 포괄적으로 감싸는 느낌이 든다. 논술속성상 자신의 견해를 제시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자신이 주장한 견해가 뭉뚱그려지기도 한다. 조화라는 단어를 생각해보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결론에 쓸 말이 아니라 꼭 써야 한다고 하더라도 부연설명이 첨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구체적인 대안이라는 것 자체가 논술이 꼭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것은 아닌데 본인이 대안이 없을 때 ‘조화’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국보법 폐지’에 대해 예를 들면 ‘존속’과 ‘폐지’의 주장 사이에 ‘조화’를 이룰 수 없다. 그런데도 국보법을 존속시키되 악습을 폐지하는 것은 조화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그것은 조화가 아니라 선택적 수용인 것이다. 조화라는 개념을 오해했기 때문에 선택적 수용을 말하면서도 ‘조화’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조화’라는 단어의 개념이 불분명한 것이다.
- 현실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 자체가 훨씬 현실적인 것 아닐까? 어차피 한쪽을 택해도 가능성이 없다면 섞어놓는 것이 현실성을 높인다. 국보법은 폐지와 존속 자체에서 해결이 안 되므로 서로가 수용될 수 있는 수준에서 개정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보법은 존속시키되 악습을 폐지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으나 이것은 조화가 아니라 선택적 수용이라고 했다. 그런데 조화라는 말과 선택적 수용이라는 말의 차이는 무엇인가? 선택적 수용이라는 말은 내가 주장을 일관성 있게 하지만 반대되는 의견을 첨가하는 것을 의미하지 내용 두 개를 통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조화라고 하면 비슷한 비율로 정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많이 쓰는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은 ‘명백한 견해의 차이가 있는 것’에서 조화는 가능하지 않고 ‘선택적 수용’만이 가능하다. 구체적인 선택적 수용의 내용을 구성한다면 그것에는 ‘조화’라는 단어가 들어가도 될 것이다.
- ‘조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주장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상황에서는 그것이 필요할 수도 있는 것이다.
- 조화라는 범주 큰 말을 써버리면 범주가 넓으니까 자신의 견해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다면 선택적 수용이라는 면을 부각시켜야 한다. 그것은 ‘조화’가 아니라 명확한 자신의 견해가 되는 것이다.
----> 조화를 이루자는 말을 쓸 수 있는 때는 언제인가?
- 조화를 이루어야 할 때의 예시는 전통문화와 외래문화의 조화를 이야기한다.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외래문화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선택적 수용이라는 것 아닌가?
-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경우가 있는가? 사형제도 존폐론과 같은 것은 기다 아니다가 확실한데, 두 이익 집단의 이익이 상충할 경우 서로 조금씩 같은 비율로 양보하면 양자가 살 수 있다. 그런 경우는 조화가 가능하다. 국가적 정책으로 성장을 택하면서도 복지정책을 취하는 것은 성장과 분배의 조화라고 할 수 있는가? 성장과 분배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닐 수 있다. 입장 간에서는 조화가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마무리되더라도 그것은 조화가 아니라 힘의 균형이다. 힘의 균형을 통해서 일정하게 선택적 수용을 하는 것이다. 대립되는 견해가 아닐 경우에는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능하다. 조화는 공존이라는 점을 전제로 해야 한다.
- 대립적인 경우에는 ‘조화’라는 말을 쓸 수 없는데도, 우리가 ‘조화’를 쓰는 이유는 교과서에 나와 있기 때문이고, 교과서는 이미 사회를 대립적인 조건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2.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
- 모든 것은 위치가 부적절하다는 견해로 귀결됨.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문장은 문제제기하는 문장으로서 뒤에 방법이나 방향이 명확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결론으로 쓴다면 그 뒤에 나와야 할 구체적인 방법이 나올 자리가 없기 때문에 안 된다.
- 난제에 부딪쳤을 때 구체적인 방향 제시를 하지 못하고 마무리하는 방식이다. 도피처로 보이는 이유는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 말이 사용될 가능성이 있을까?
- 문제제기로도 훌륭할 수 있다.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도 ‘누가’ ‘어떤 방법으로’ 인식을 바꾸어야 하는지가 불분명하다. 여기에서도 그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어떤 주장에 대해 반박하면서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했을 때 이것을 이렇게 바꾸라고 요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런 왜곡된 인식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이 있어야 한다.
- 제도가 다 갖춰져 있고 인식만 바꾸면 될 때는 어떠한가? 고위 관료층이 시민의 종이라는 인식이 아니라 시민들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할 때, 그 사람들에게 인식을 바꾸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요구할 수 있다는 것.
- 일정한 사고 체계로 갔을 때 위기에 봉착하면 바꾸자는 말이 의미가 있다.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새로운 인식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시험을 볼 때에도 한쪽으로만 생각에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럴 때 어떻게 할까?
- 인식의 변화가 바로 행동의 변화로 나타날 수 있을 때. 개인적 측면에서 보자면 그런 고민이 축적된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선입견이나 편견에 의해 단정하고 있을 때 인식을 바꾸면 진리를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를 몰랐을 때 그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있다가 인식을 바꿈을 통해서 제대로 된 기회를 갖게 된다. 이미 축적된 전제가 있을 때.
3. ~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 자주 사용하는 말이기 때문에 어떻게 문제가 되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여기에 드러난 자신의 태도를 이야기함. 그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논의를 함. 세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를 함. 노력해야 한다는 말은 매우 추상적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인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이 빠져 있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해결방법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알 바가 아니라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기도 하다. 주체 없는 개념과 구체적인 내용 없는 ‘노력’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은 것과 동일하다.
---> 어떤 경우에 이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
- 문제점을 해결하면 그것을 사용해도 좋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방향이 제시되어 있다면 그것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써도 좋다. 필자의 주체적인 생각이 담겨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4. 그 외에
앞에 문제를 제기해놓고 그것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말을 다시 쓰는 것.
<사회자 순서>
선민 - 승리 - 영지 - 민혁 - 성현 - 승준 - 미경 - 소영 - 윤경 - 종헌 - 수미 - 보영
✤ 12월 1일 수업하기(사회 : 선민)
1. 곽탁타
(1) 주제
- 본성을 편안하게 하는 곽탁타의 나무심기에서 찾은 교훈
- 인간의 본성을 선하게 봄.
- 천성을 따르는 나무심기
- 천성을 존중하고 인위를 자제하라.
(2) 이 글의 교훈은 무엇인가?
- 나무의 천성이나 본성을 따르고 단지 그것을 자라는 것에 방해하지 않을 뿐이지 억지로 자라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교육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썼는데 교훈은 인위적으로 하면 더 역효과가 나고 본성대로 자라게 해야 한다.
- 자신을 위한 진정한 발전이나 앞으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삶을 윤택하게 하려면 타고난 천성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타라는 사람이 뿌리가 뻗어나가는 방향을 제한하지 않고 나무의 성장 가능성을 열어두고 가는 것 같다. 자신의 욕심이나 인위대로 나무의 성장과정을 방해하지 않고 나무를 자신의 욕망을 담아내는 그릇이나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 그래서 나무의 성장에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 다른 어떤 것을 사랑하거나 좋아하게 될 때 자신의 기준이 아닌 그 자체의 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됨. 여기서 타라는 사람이 나무를 심게 될 때 천성을 따르고 정성을 다했다. 나무는 성격이 있듯이 사람에게도 다른 성격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환경에 나무를 맞추려고 하듯. 우리가 사람을 좋아할 때 그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내 관점에 입각해서 하려고 한다. 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그 차이와 다른 점을 인정하고 그 차이를 존중해야 사랑하는 것이다. 나무를 심을 때 나무의 성격을 그대로 두고, 거기에 맞게 사랑을 쏟는 타의 비유이다.
(3) 교육에 대한 비판
- 교육적인 면에서 사람을 기르는 데 있어서 억지로 일정한 틀에 얽매게 하는 것은 역효과가 난다. 우리는 자기개발이나 능동적인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단 기본적인 교육적 토대와 함께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이것이 한꺼번에 이루어지기 어려우므로 교육 관계자들의 각성이나 의지가 중요하다.
- 본성을 그르치는 것이 가정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과잉보호가 문제이다.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부모님들이 빼앗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그래서 생각하는 힘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빼앗기므로 사회에 나갈 때 스스로 하기 어렵다. 그래서 타율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성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기 어려운 조건이라고 본다.
- 우리 시대 교육의 어떤 측면이라고 했는데 과잉보호는 오히려 일부분이고, 전체적으로는 과잉보호라고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우리나라 전반적으로 지나친 교육열이 문제가 된다고 본다. 지나친 교육열 때문에 공부를 잘하는 아이와 다른 분야에서 잘하는 아이들이 문제가 된다. 공부에만 매진하도록 하니까 자기의 본성과 같은 재능을 찾지 못한다.
<질문 1> 본성이란 무엇인가? 인간에 있어서나 나무에 있어서나.
- 여기에서 전제는 본성과 천성은 가만히 놔두어도 크게 무성하게 자란다는 것이다. 그것은 천성이 선이라는 전제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을 교육에 적용해보면, 아이가 태어났을 때 무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선이나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부모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오류를 지적하는 것 같다. 그 때의 ‘선’은 선악의 선이기 때문에 ‘선’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인간은 원래 선이라는 것을 갖고 있다고 본다.
- 그런데 그것은 타고난 자질이라고 볼 때 그것을 자체로 선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러하도록 타고 난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나 나무나 마찬가지로. 지금 자신의 진정한 자질을 표현해야 하는데, ‘그 진정한 자질’, ‘타고난 자질’이 천부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본성에서는 선과 악을 택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질문 2> 나무를 심고 기르는 자의 역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이렇게 되도록 이끈다는 것도 아니고 마구잡이로 놔두는 것도 아니고 방해하지 않는 정도이다. 자리를 잡아주는 것은 아니지만 심는 것만 해놓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돌본다. 원래의 흙이어야 한다고 열심히 이미 노력을 한다. 나무가 자라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제거하는 것이다. 곽탁타가 하고자 했던 말은 ‘방해되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 그렇게 되면 부모들의 교육열이나 학교에서의 주입식 제도들도 ‘북돋아주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너무 심한 과정이 될 수 있다. 너무 애정을 쏟으면 내가 심은 나무와 사이가 나빠진다고 했으므로. 적정선 이상으로 도와서는 안 된다는 말인 것 같다.
- 사람이 자라려면 어느 정도 생장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키고 나서 본성이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일단 독립할 때가 되면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처음에 심어놓고 그대로 두되라는 말은 일단 본인이 자신의 본성에 대해 찾고 난 이후라는 말이다. 내버리기 전에 나무가 본성을 뻗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과정이 있다. 모든 나무는 뿌리를 뻗어나가기를 바라고, 고르게 북돋기를 바란다. 앞에서 먼저 조건을 갖춘 후에 나중에서야 내버려둔다고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도울 수 있는 것은 최대한으로 도와야 하고, 그것이 돕지 않는 방향으로 가야 하면 그래야 한다는 것 같다.
- 여기에서는 본성을 좋은 방향으로 본다. 나무는 휜 것이 본성일 수도 있는데 곧게 뻗고 열매가 많은 것을 본성이라고 보는데, 그것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보는 것 같다. 본성을 살리는 것이 놔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서는 최대한 도와준다는 말이다.
- 어느 정도 자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기반이 갖춰진 상태에서 좋은 쪽으로 발현할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자랄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준다. 기반이 갖춰지면 나무가 옳게 자란다. 그런데 나무에 병충해가 생기거나 이상하게 나무가 자라면 해가 되는 것을 제거해야 자랄 수 있는 것이다. ‘곽탁타’는 본성을 발현하면 알아서 잘 자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뒤에서 지나친 관료들의 참견이 백성들을 힘들게 하지만 너무 방관했을 때 생산력이 줄어들 수 있다. 그러려면 적절하게 자극을 해서 고양을 시킬 필요도 있다.
- 말하는데 모순이 있는데 ‘본성대로 살게 한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나쁜 점이 있으면 잘라낸다는 것이다. 본성대로 살게 하려면 기본 방향을 제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냥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런데 해가 생기면 없애주고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해주는 것은 ‘본성대로’가 아니다.
2. 토끼의 삶
(1) 이 글의 제목
- 준비 없이 욕망만 앞선 토끼, 물 없이 사막을 건너다.
- 빛의 본질을 깨달은 굴 속의 토끼
- ‘우물을 빠져나간 개구리가 본 바다와 같이’. 하나는 준비 없이 나간 자가 맞게 되는 비극도 있을 수 있고, 또 하나는 본질을 찾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이 얻는 정당한 대가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다. 후자를 택해서 ‘우물안 개구리가 더 넓은 하늘을 보게 되고 바다를 보았을 때 정말 큰 충격을 받기는 하지만 더 배우는 것이다.
(2) 현대인의 모습
- 무언가 하고자 하는 열의와 욕구는 큰데 준비 없이 일을 저질러서 일을 그르치는 사람을 생각함. 음식점을 창업하려면 가게의 위치가 적절한지 목표로 설정한 손님의 나이나 성별 직업이 무엇인지 등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준비하지 않고 가게를 내면 부도가 난다. 토끼는 정보가 전혀 없는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나? 동굴 안에서 빛이 들어오는 곳을 안다면 신중하지 않았다고 본다. 저기까지 올라가는 것이 피투성이였는데 그 빛에 대한 근원적 차단이 아니라,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데 무조건 기쁨에 넘쳐서 뚫은 것이다.
- 준비를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중에서 있다가 남녀공학으로 가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 그렇지만 이 사람은 피투성이가 되도록 노력하지는 않는데?
- 현대인에 비유한다고 했는데 현대사회에서 매스미디어의 측면에 맞춰봄. 토끼가 처음에 굴 속에 있었는데 밖에서 비친 빛만을 보고 살았다. 그것은 진정한 세상이 아니라 가공된 정보이다. 집권층에 의해 가공된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다가 정보의 본질을 알기 위해 세상에 나왔으나 본질을 알면 그것이 좋은 면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서, 자유를 위해서는 희생이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소경이 된 것 같다. 매스미디어에 둘러싸인 채로 허위의식 속에 살던 현대인이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3) 토끼의 이후 삶이 어떠했을까?
- 토끼는 도전정신을 가졌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마음에 안 든다. 결과적으로 비참하게 된 것이 마음에 안 든다. 이 아이는 눈이 멀었으나 귀머거리였다. 그런데 눈은 멀었지만 귀가 뜨였고 소리의 아름다움을 깨달았으므로 해피엔딩일 수 있다.
- 굴 안에서 진짜를 보고 싶어서 나간 것이다. 굴 안에 없던 많은 것을 만나지만 눈이 먼 상태에서 보지 못하고 들을 것이다. 좋은 것이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를 공격할 수 있는 동물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이 없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보면 또다시 산을 내려가서 이야기하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무조건 밖에 있는 것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때로는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도 있을 필요가 있다.
- 결과를 생각했는데 나와서 귀로 들으면서 세상을 다니는 것일 수 있다. 장님의 충격이 너무 커서 다시 굴 속으로 들어가서 굶다가 죽을 수 있다. 나오다가 온 몸의 충격이 커서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있다. 토끼가 왜 그 상황에서 만족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했지만 이미 새로운 세상을 안 이상 더 이상 자기가 있는 공간은 의미가 없다.
- 피를 많이 흘려서 피 냄새를 맡고 온 맹수에게 죽는다고 생각한다.
3. 송아지
(1)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논점
-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집착과 그것이 줄 수 있는 위험성.
- 길들이기 : 아버지가 길들이는 방법(반항과 성숙과 무감각)과 돌이가 길들이는 방법(사랑을 표현함으로써 길들이기)
- 소와 주인공의 관계에 대해 ‘주종관계’로 인식하고 있음. 부모와 소의 관계, 그리고 돌이와 소의 관계가 다른 점은 힘의 굴복에 의한 주종관계인가, 자발적이고 끈끈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주종관계인이다. 부모와 소의 관계라면 소가 아이에게 그렇게 달려오지 않고 따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소는 자기의 존재가 돌이에 의해서만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송아지는 돌이 없이 있는 것이나, 달려가서 돌이와 함께 죽는 것이나 둘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국가주의나 전체주의에서 힘의 굴복에 의한 주종관계는 자신을 던지거나 자기가 죽거나 하는 굴복을 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목숨을 바치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주종관계가 있다. 그것의 위험성이다.
- 곁다리로 하나를 더 넣자면, ‘전쟁’이라는 것이 짧은 글이지만 전쟁의 비극성이 드러난다. 송아지가 돌이가 순수한 우정을 나누는데, 그 둘을 나누는 전쟁의 비극성 보여준다.
- 아버지 입장에서는 돌이를 이용해서 소를 건강하게 잘 키우려고 했던 것 같다.
- 돌이의 행동과 태도를 관심 있게 보았다. 돌이는 사소한 생명에 대해 세심한 배려를 할 줄 안다. 갑자기 전쟁이 닥치면 소를 챙길 시간이 없이 도망치기 바쁜데 진짜로 소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쪽지를 남기고 진정한 애정을 보여준다. 마지막에 소와 같이 얼음물 속에 잠기는데 그 때 소를 진정한 인격체로 보는 것이다.
- 전쟁 상황에서 소를 내버려두고 간 것이 이기적인 도피였는지 최선의 방법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둘 다인 것 같다. 누구나 살려고 하지만 이 상황에서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이 이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것 같다. 만약 소가 아니라 사람이었다면, 예를 들어 장애인이었다면 더 비극적이기도 하다. 대인지뢰가 세 명의 병력을 빼도록 하듯이, 한명이라도 더 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버린다는 개념이기보다는 혼자 살도록 한다는 것이므로 다를 수 있다고 본다.
- 원래 송아지는 돌이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의도하지 않더라도 죽음으로써 자기 주인에게 보상을 했으므로 선한 의도를 갖고 어떤 일을 했더라도 결과가 비극적이라면 결론은 비극이다. 우리가 착한 의도를 갖고 있어도 오해가 쌓일 수 있듯이 그런 비극이 나타날 수 있다.
(2) 제목 붙이기
- “친한 원수”. 친한 사이이고 소중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을 죽게 한 것이므로. / 그러나 돌이가 같이 죽음을 선택한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원수는 원한을 쌓아야 하는데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죽음이다. 사랑하게 되면 죽음도 아름다운 것 아닌가? 부모는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봐야 했기 때문에 더 비극적일 수도 있다.
4.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1) 이 그림을 본 생각
- 처음에는 당황함. 우리 머릿속에 관념적으로 파이프의 이미지가 내재해있고 그것이 내 이미지와 맞아떨어지므로 우리는 이것이 파이프라고 결정한다. 하지만 인간이 이미지를 통해 실체를 바라보는데 그것이 본질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 파이프 그림과 그 글자를 연관시키지 않는다면 아무런 모순과 문제가 없다. 두 가지가 같은 종이에 있다고 해서 ‘이것’이라는 말이 반드시 그 그림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문자와 이미지가 항상 동일맥락이 아니라는 뜻이다.
- 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해도 된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다. 파이프가 아닌 수도꼭지라는 이름을 붙일 수도 있듯이 이름과 본질이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꼬끼오’ 하고 닭이 운다고 하지만 외국 사람들은 ‘코커두들드’라고 한다. 명칭과 그 실체가 반드시 일체하는 것은 아니다.
- 파이프라는 단어와 실제 파이프에 대한 약속이다. 약속 때문에 파이프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삼는 것 보다는 이미지에 대한 문제제기인 것 같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당연히 파이프를 그린 그림에 불과하다. 즉 이미지가 그 실체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파이프이다. 보통 이 그림을 접할 때 우리는 여기에서 접하지만 마그리트의 그림이라는 선입견이 있고, 이런 그림을 보면 미술책이나 미학책에서 접한다. 이 그림의 가치를 따지기 전에 이 그림이 가치 있을 것이라는 관념이 먼저 들어간다. 백남준씨가 ‘예술은 재미있는 사기’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것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하는데, 그렇게 고민을 하게 하려고 했을 수 있다. 너희가 이 그림을 보는 것인가, 아니면 내 이름을 보는 것인가를 던지려고 할 수도 있다.
- 사람들이 이 글씨를 빼고 보면 파이프라고 생각한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사회에 반항하는 척하려고 한 것이고, 이런 그림을 한번 그리니까 여러 사람들이 이건 예술이라고 하고, 그래서 이런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생기니까
- 화가가 이것을 그려놓고 너무 못 그렸으니까 쪽팔려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글을 써 놓았을 수도 있다.
- ‘파이프’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 자체가 이것을 파이프라고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거꾸로 보면 미끄럼틀 같다. 코끼리를 입에 넣어서 소화하기 전에 있는 보아뱀. 호루라기. 재떨이. 이런 모양의 라이터. 피아노 다리 같기도 하다. 검은 스타킹을 신은 마네킹 다리.
(2) 이와 유사한 사례
- 지하철 학원 끝나고 가면 붐비는 시간이다. 모두들 서 있는데 노약자 좌석에 어떤 깔끔한 양복을 입고 자고 있었다. 그 앞에 할머니가 서 계셨다. 그래서 나이 드신 분이 있는데 왜 안 내리냐고 했는데, 내리는 것을 보니 장애인이었다. 항상 장애인이라고 하면 힘든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온전한 모습의 장애인을 보고 장애인이라는 생각조차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 최후의 만찬에 아무도 여자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일종의 선입견. 고등학교 영어선생님이 산적이나 도둑놈처럼 생겼다. 친근하게 느끼고 있지만 내가 만약 그 선생님을 모르는 상태였다면 지하철에서 만났을 때 다른 칸으로 갔을 것이다.
- 퀼트에 대한 것.
- 이 그림을 접하기 전에 말 그림이 있고, ‘사과’라고 써 있고, 사과 그림이 있고 ‘말’이라고 써있다. 이 그림이 보기 전에 파이프그림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하는데 만약 사과와 같은 당연한 것이라면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퀴즈 프로그램에서는 다를 수 있다. 텔레비전에서 영상 밑에 자막이 나온다. 그렇게 되면 그 영상도 자막으로 이해하게 된다. 영상과 문자가 결합했을 때의 파괴적 효과.
5.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서
(1) 사고의 변화가 시사하는 바
- 모자라는 것에 만족함. 느림의 미학, 완벽을 포기함으로써 얻어지는 행복,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 동그라미는 탐험이 동기가 되어서 조각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를 중요하게 여길 수 있다.
- 다른 존재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끼워맞춘다.
- 살면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주체가 되지 못하고 의지와 무관하게 행동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멈출 수 없다고 했는데 어떤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의도하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되는 모습도 있을 수 있다.
- 자기가 잃어버린 모습을 찾는 것을 삶의 과정과 동일시한다. 동그라미는 다른 이들과 만나면서 생각이 많아진다. 여담인데 동그라미가 발음을 제대로 못하는 것은 너무 빨라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 인류라고 보면 계속 새로운 제도를 끼워 맞추고 안되면 버리는데, 야경국가나 자유방임으로 가다가 큰 정부라고 했는데 계속 구르다가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결국 가면서 제도는 개선되고, 조각이 안맞는다고 버렸지만 계속 구르면서 자기에게 맞는 조각이 나타날 것 같고, 계속 굴러갈 것이다. / 완전한 동그라미가 되었는데 그것을 버린 것이므로 맞는 제도를 포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나중에 잘 맞지만 끝이 톱니바퀴 같은 것을 찾으면 느리게 가면서도 자신을 완벽하게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 조그마한 조각을 주체로 생각해보았다. 동그라미가 ‘너는 그저 너 자신이기를 원하나?’라고 할 때 ‘누군가의 조각일 수도 있고, 나 자신일 수도 있다’고 답했다. 이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개인은 자기 자신이기도 하고, 단체 안의 일부일 수도 있다. 그 조각은 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않으려고 했을까? 불완전한 동그라미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 같다. 내가 필요하면 쓰고 아니면 맘대로 하라는 말.
- 그는 ‘넌 아마 나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을 거야’라고 이야기했다. 왜일까? 조심성이다. 넌 분명히 맞을 거야라고 하면 남의 의사를 무시하는 것이 되므로 간접적으로. 결합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맞을지 아닐지 고민할 수도 있다.
- 동그라미 하나만 나오지만 다른 동그라미도 있다고 생각했다. 같이 조각을 찾으러 다녀서 동그라미들끼리 서로 완벽한 조각을 찾기 위해 경쟁할 수도 있다. 자기에게 맞는 것을 찾았지만 욕심 때문에 더 완벽한 조각을 찾을 수 있다. 무한경쟁시대에 자신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완벽성을 추구하기 위해서 경쟁한다. / 그러나 버리고 즐겁게 행복하다고 했다. 만약 완벽하기 위해서였다면 내려놓은 것이 더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현대인들은 과정에서 행복을 찾지 않고 결과에 행복감을 느낀다. 그런데 돌아보고 생각해보면 의미 있는 것은 고3이지 점수가 아닐 수 있다.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점점 완벽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질적으로 완벽해진다. 그런데 너무 빨리 달리면 주위의 것을 고친다. 동그라미는 조각을 찾는다는 것에 빠져서 우리 주위의 것들을 돌아보고 음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도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결국 결과이기도 하다. 행복의 초점이 미래에 가 있는 것이 문제이다.
- 동그라미는 혼자 있었다. 사람은 혼자 있고 싶기도 하다. 여행도 혼자 가보고 싶다. 동그라미 조각도 가끔은 혼자 있고 싶기도 하고, 누군가와 더불어 완벽해지고 싶기도 하다. 남과 어울려 완벽해지는 것과 자기 혼자 남아있고자 하는 욕구. 모두가 있다. 나 자신도 소중한 존재라는 것. 내 조각이 없다면 너도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 사회 속에서 인간은 완벽해진다. 모두의 부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순간 너무 빨리 간다. 나 자신이 아니게 되고 나의 통제 밖으로 넘어간다. 내 스스로 통제하고 싶은 욕구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스스로를 찾는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 개인이 스스로를 통제하는 완벽함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 조각이 있을 때의 완벽성은 외형적인 완벽성이고, 동그라미는 외형적인 완벽성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됨. 그래서 진정으로 내면의 완성을 원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조각을 버리고 간 것이다.
- 다수의 횡포라고 볼 수도 있다. 동그라미는 한 조각을 잃어버리면 큰 조각에 불과하다. 자신이 필요하니까 작은 조각을 찾고, 그것이 끼니까 힘의 균형을 이루었다. 어느 정도 만족할 만큼 되니까, 또는 별로 필요 없다고 생각하거나, 질렸거나 해서 작은 조각을 밀어내고, 큰 조각이 작은 조각을 마음대로 하고 다시 작은 조각 필요 없이 자기 혼자 굴러가는 것일 수 있다. / 깨달음을 얻은 것 아닌가?
- 조각의 입장에서 보면 ‘넌 누군가의 잃어버린 조각이지’라고 말할 때 이후 조각은 확신에 차 있는 것이 없다. 자신에 대해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잃어버린 조각이 딱 맞는 것이었다면 서로를 알아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다. 외형적인 면은 맞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일 수 있다.
- 동그라미가 조각을 찾으려고 했으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어떤 두려움이 있었을 수 있다. ‘넌 아마 나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을 거야’라는 말 안에는 한구석의 두려움을 표현한다. 세상을 음미하면서 살고 싶었을 수 있다.
- 조각은 일부가 되기를 바라기도 하고, 아닐 수도 있다.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을 수 있다.
- 끼워 맞췄을 때 새로운 동그라미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새로운 동그라미가 통제범위를 벗어나서 흩어졌다고 하는데 조각을 잃어버리기 전의 동그라미도 통제를 잘 하고 있었다는 전제는 없다. 그 전의 동그라미도 빨리 굴러가려고 할 수 있다. 잃어버리기 전에 빨리빨리 굴러갔지만 잃어버리고 나서 그 때는 경험하지 못한 소중한 것이어서 버린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새로운 기쁨을 찾는 것 같다.
- 또 조각을 찾으러 가는 것은 무식해서 했던 짓을 또 하는 것일 수도 있다.
- 그 조각이 원래 자기가 잃어버렸던 조각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면 또 다른 조각을 찾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을 잘 맞춰서 느리게 갈 수 있는 조각.
- 조각을 찾으러 가는 것은 ‘실제적 조각’의 의미가 아닌 ‘정신적인 목표’일 수도 있다. 조각 자체가 구체적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신적인 안정감을 찾을 수 있도록 정해놓은 허구일 수도 있다.
✤ 12월 3일 수업하기
□ 오늘의 주제 : 이분법 (사회 : 안승리)
1.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이분법
- 남자와 여자라는 이분법 : 이분법이라는 인식이 나타나게 되는 원인은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차이에서 나왔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데 이 평등이란 것이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양 끝에서 누가 우월한가의 차이 없이 양 쪽에 있는 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대해 토론을 해보았으면 좋겠다. 남자와 여자로 나누었는데 그것은 이분법인데 그것 말고 다르게 나눌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같은 여자일 경우 여자를 같은 편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분법이다. 여자들은 일단 동지라고 생각하고, 남자들끼리도 동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 이것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 두 개가 나눠진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살 때 누구를 서로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것이 있고, 누구를 왕따 시키는 것도 있다. 그럴 때 자신이 이야기를 해보지도 않고 특정한 개인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 이분법의 한 부분이다. 잘 모르면서도 낙인찍고 단정 짓는 것도 이분법이다.
- 우리나라와 우리나라가 아닌 나라로 나누는 경우도 이분법이다. 항상 우리를 단일민족으로 생각하고 나라에 대한 우월의식을 갖도록 해왔다. 그래서 다른 나라를 우리와 경쟁상대거나 문제가 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이분법이다. 특히 일본과의 관계에서 조금만 잘못이 있어도 일본인들이 하면 안 좋게 보고, 우리나라 사람이 하면 옹호하는 것, 그것이 한국과 일본을 나누어서 일본은 나쁜 쪽, 우리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분법이다.
- 친구들과 이야기를 할 때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연예인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내가 누구를 좋아한다고 할 때, 나와 동일하지 않은 것은 싫어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적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음.
2. 우리 주변에서 나타나는 이분법의 원인은 무엇인가?
- 원인을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특히 ‘왕따’의 경우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자아이들이 편을 갈라서 자신들이 주류라고 하고 아닌 아이들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그러면서도 다닐 때에나 이야기할 때에는 웃으면서 손도 잡는다. 이런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할 수 없다. / 남자와 여자가 노는 방법이 달라서 그런 것이다. 여자들은 축구를 하기보다는 모여서 이야기하는 방식인데, 그렇게 되면 많이 모이기 어렵고 그렇게 되면 쑥덕공론이 된다. 그것을 즐기기도 한다. 여자는 숫자가 많은데 남자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반반인 경우에도 남자들은 공동체 의식이 많은 반면에 여자들은 갈려서 노는 특성이 있다.
- 이것이 쉽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고나 사례가 많은데 그것을 일일이 파악하기 어려우니까 이분법으로 나눠서 파악하면 쉬워지기 쉽다. 태도와 대처방안을 생각해내기가 쉬워진다.
- 선배와 후배로 나누는 것도 이분법일 수 있다. 우리나라 사회 자체가 나이를 중심으로 나누는 것에 익숙해있다. 언어와 지칭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고 하는 것. 나라의 문화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숫자가 반반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경험을 인정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학교라는 시스템 자체가 선후배를 강하게 규정하여 조직의 체계를 유지하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그것을 장려한다.
- 이런 것이 나타나는 원인은 자기 집단을 유지하려는 본능에서 기인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의가 바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막돼먹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예의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그 사회에서 강조하는 것, 예를 들어 충이나 효와 같은 것은 그렇게 안하기 때문이다.)
- 문화적인 측면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 민족의 수치심 등 문제가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일종의 ‘트라우마’이다. 북방민족도 똑같이 학살을 해도 현재의 위치로 봐서 강대국과 약대국의 차이로 인해 나타나는 것 같다. 반미의식이 강한 사람이라면 나쁘다고 이야기하지만 그 일을 약소국이 하면 그 문제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 결국 강대국와 약소국으로 나눈다. 또 그 역사적 사건과 현재간의 시간 차이도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일제 강점기는 아직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서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일본사람에 대한 인식도 비슷할 수 있을 것이다.
- 가공된 측면도 있을 것이다.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경쟁을 더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일본이 식민지화한 것도 있고 중국도 그렇지만 우리나라가 일본과 경쟁해야 할 측면이 많으니까 일부러 경쟁심을 자극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지역감정의 경우도 뿌리 깊은 것이 아니고 외국에 나가면 영남과 호남은 중요하지 않기도 하다.
- 귀속성과 안정성을 가지려고 하는 심리가 있을 수도 있다. 나의 특성을 일반화하고 그의 특성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배타하여 자기가 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에서 안도감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 안양에서 살아서 잘 모르다가 강남 대성에서 재수를 하면서 그 집단이 기득권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득권의 집합체이다. 기본적으로 강남과 강남이 아닌 것을 먼저 구분하여 종류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신들만의 부류로 완전히 독립된 자신들만의 성을 만든다. 모든 견해에 있어서 대립이 된다. 정책적으로 볼 때 선생님들부터 모든 입장에서 부딪친다. 행정수도이전에 대해서도 나는 찬성하는 입장이었는데 헌재에서 기각된 날 그곳은 학원 전체가 축제 분위기이기도 했다. 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견해는 그들의 견해가 아니라 그들 부모의 견해이기도 하다. 그래서 함부로 너희들은 함부로 부모의 생각만을 하느냐고 비판하기는 어렵다.
- 그러나 기득권의식만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에게도 이분법이 있어서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어렵다. 아무리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해도 일단 강남이라는 것이 확인된 이상 속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 원래는 동물이 이분법적 사고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더 사유하면서 그것을 극복하고 깨기 위해서 노력해온 과정이기도 한 것 같다. 텔레비전에서도 말초적인 분석이라고 하면 멋진 남녀와 안 멋진 남녀로 구분이 되는데, 모든 것이 이렇게 나누어지기만 하는 것이 바로 동물적·원초적 이분법적 사고이기도 하다.
3. 소설이나 드라마에서의 이분법
- 드라마에서는 착한 여자와 나쁜 여자로 그냥 나뉜다. 그렇지만 재평가될 만한 것이 많이 있다. 맨 처음에는 착했는데 유진과 지성의 관계를 알면서 그렇게 나쁘게 변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 여자가 악녀가 될 수 있는 것이 나름대로 설득력 있게 나온다. 예전부터 지성을 좋아하다가 지성이 사진에 관심에 팔려서 꾸준히 기다렸는데 그 여자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나타난 유진이 대단히 미웠을 것이다. 옛날에는 이유 없이 악녀였지만 지금은 그래도 나름대로 근거는 댄다. 그럴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누군가의 편을 들어야 하고 응원할 수 있어야 드라마를 보는 재미가 있다. 모두가 이해가 되면 혼란을 느끼고 질려서 보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사람들은 내 편이 확실해서 내가 응원할 수 있고 남을 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드라마에서 필요한 구성이다. 정당성을 가진 악한 여자가 항상 나와야 한다. 갈등이 필요한데 나누어야 갈등이 생긴다.
- 고전 소설에서는 대부분 무조건 나쁘게 나온다. 그런데 과연 재평가할만한 가치가 있는가? 흥부와 놀부를 보면 놀부가 근면성실하다고 나와 있는데 착하면 복을 받고 나쁘면 반드시 망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 선한 인물들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는 것. ‘잭과 콩나무’에서 잭이 주인공이고 거인은 힘이 세니까. 어린 마음에 신기한 물건이 있으면 갖고 싶고, 부모님 몰래 갖고 오고 싶고, 그런 스릴을 즐기려고 한다. 18세가 넘어야 허락되는 것을 미리 하면 재미있으나 그 이후에 하면 재미가 떨어지는 것처럼 어린 시절 욕망의 문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거인은 나쁜 놈이라는 규정성이 있는 것 아닌가? 톰과 제리에서도 어릴 때 보면 톰이 제리를 괴롭히려고 하면 ‘나쁜 톰’이라고 하는데 보면 제리가 괴롭힌다. 오히려 톰이 어리석게 당하고 불쌍하다. 그런데 어릴 때는 막연하게 크면 나쁜 것으로 간주된다. 약자와 강자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 고전소설에서도 예쁘고 안 예쁘고가 중요하다. 새엄마와 언니들은 언제나 못생기고, 착한 아이들은 예쁜 것으로 간주된다.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기거나 하는 것과는 다르게 본능적 시각적으로 예쁜 것을 보면서 선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쁜 것에도 종류가 있다. 외모와 사람을 연결하여 구분하는 것도 독특한 이분법이다.
- 미국의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미국에 적대적인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 사람들을 물리침으로써 결국 세계가 평화롭게 된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선악대비는 자신감의 발로이다. ‘지구를 지킨다’는 모토가 자기 나라의 우월감이 반영된 것이다. 보통은 적이 외계가 있다. 지구 안에 있는 것보다는 외계에 있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007의 적국이 변하는 것을 보면 미국의 인식의 변화를 알 수 있다.
-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속한 집단이 열등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갈라놓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만약 우리나라가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면 우리나라만 보지 아무도 사가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기 때문에 그런 영화를 만들고 외국으로 보내는 것이다. 실제 우월감이 존재한다. 그것이 말이 되니까 다른 사람들도 수긍하는 것이다. 미국이 세계평화를 지킨다는 것은 미국사람들의 의식이기도 하다. 우월적인 집단의 우월감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힘이 셌다면 그랬을 것이다. 외국인노동자들을 괴롭히는 것도 엄청 심하다. 힘이 센 것 아닌 것만이 아니라 다수를 점하고 있느냐 아니냐도 문제인 것 같다.
4.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았던 동화
- 만화영화는 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악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말 자체가 통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나쁜 사람으로 그려놓고 있으니까 개선할 여지 자체가 없다. 원래 마녀라는 개념이 권위있고 좋지 않은 일을 해결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몰아갔기 때문에 결국 ‘마녀’라는 개념도 그렇게 된다.
- 양치는 소년. 이것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과정이기도 하다. 왜 그 사람을 그렇게 고독하게 내버려두었는가? 미녀와 야수에서도 벨이 그 성에 있다가 무사히 돌아왔는데 게스톤이 나쁘게 이야기하면서 해치러 간다. 의사소통의 단절에 의한 파국적인 결말이다. 인어공주의 원작도 인어공주가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헨젤과 그레텔의 경우 부모와의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대부분의 동화에서는 ‘적극적인 여성은 나쁘다’고 이야기한다.
- 팥쥐와 팥쥐 엄마에게 안 좋게 보고 평가하고 그래서 팥쥐와 팥쥐 엄마는 열등감이 쌓이다가 감정적이 될 때 그것이 심해지니까 폭발한 것이다. 콩쥐도 그렇게 따지면 팥쥐와 팥쥐 엄마를 무시했을 것이고 의사소통이 안 되는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 서로 열등감을 자극하는 방향이었을 것이다. 유영철도 사회가 그 사람을 양산한 것이다. 원래는 선하거나 나쁘지 않았을 텐데 사회적으로 그 상황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상황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의사표현을 잘 못한 것이 문제이다. 그 논리대로라면 어렵게 자라도 남을 도우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의 본성에 대해 말 못하겠지만 내재적이다. 그것이 자신의 만행을 정당화할만한 하나의 변명은 될지언정 그것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부모와도 미미한 것에서부터 화가 나고 발끈하여 싸우게 되면 그 과정에서는 예상치 않았던 이야기들도 튀어나오게 되고, 그래서 평소에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중에 큰 싸움으로 번지게 된다.
- 이런 이야기 속에 나타난 것이 그 자체로 편견이나 선입견이 된다. 외모에 의해 선과 악이 판단되기도 하고, 크기로도 선과 악이 판단되기도 한다. 아이들도 예쁜 여자가 호감이 간다고 선택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편견의 답습이다. 드라마에 예쁘지 않은 사람이 나왔을 때 당혹스럽다. 예쁘지 않은 여주인공을 무슨 힘으로 응원할 수 있는가? 본질적이지 않은 부분으로 본질을 판단하려고 하는 경향들을 양산한다.
- 콜럼비아 고등학교의 총기난사 사건에서 학생들을 선량한 학생들과 문제 있는 학생들로 나누고, 문제 있는 학생들을 축출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것은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 12월 6일 수업하기
□ 토론주제 : 데이터스모그 (사회: 민혁)
1. 이 글은 무슨 사회현상을 말하는 것인가?
- 정보가 넘치는 데이터스모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임. 우리에게 필요 없거나 문제가 있는 정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 스모그는 연기와 안개에 대한 것인데,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섞인 상태에서 스모그는 앞이 안보이게 되므로 좋은 데이터가 있다 하더라도 섞여있고 골라낼 수 없도록 막막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 같다.
- 우리가 정보를 판별할 수 없는 상황에 있어서 그것을 판별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 우리가 원했기 때문에 이것이 생겼고, 이제는 너무나 흔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방향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따라온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이 맨 마지막에 이야기하듯 도시 스트레스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자극의 폭격이 얼마나 해로운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과밀화된 데이터가 넘치는 사이에서 해롭고 해롭지 않은 것을 판단하고 원인을 찾아서 해결책을 찾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 친구가 보낸 메일 다섯 통을 얻기 위해서 스팸메일 200통을 지우는 수고를 해야 한다. 제목만 보고는 메일을 구분하기도 어렵다. 내가 원하는 정보인지 아닌지도 판단하기 어렵다. 정보 과잉으로 인해서 우리는 필요한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를 구분하기 어렵다.
2. 데이터스모그의 실태나 양상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 광고도 우리를 계속 따라다닌다. 게임에서 스포츠 놀이를 할 때에도 나이키도 많이 보이고, 영화에서도 특정한 메이커 이름을 다 내준다. 본질적인 의미를 떠나서 상업적인 의미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지운다고 하지만 그것이 더 눈에 띄게 만든다. 옷이나 상품에 브랜드 이름이 붙어있는 것 자체도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내가 걸어갈 때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지 않더라도 ‘폴로’가 써 있으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나를 규정하게 되기도 한다. 상업적인 광고가 많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내가 규정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광고의 수용자인 내가 그 이름으로 규정되는 것에 얽매이고 그것에 대해 헷갈리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판단에 주체성이 없어진다. 정보가 일상 생활에까지 깊숙하게 침투해와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 현상에서 광고를 수용하는 입장에 있는 대중의 주체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감각의 과부화로 인해서 판단력도 없고 판단의 명분도 없어지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 필요 없는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데이터스모그이다. 광고가 홍수가 되어서 주체성을 상실한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주체성이 없어서 그렇게 된다는 것인가? 데이터스모그에 의해 진실이 은폐된다. 정보의 신빙성이 없어지는 것도 문제이다. ‘지식인’에 가서 누르면 정보가 툭 튀어나오는데 그것이 신빙성이 없어서 신뢰할 수 없다. 정보가 쏟아지면 스스로 그 정보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상태가 된다.
- 필요한 정보들을 구분해내는 것이 어려움. 정보피로 증후군. 설령 필요한 정보가 많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너무 많은 정보는 정보가 아니다.
3.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에 대해 토론해보자.
(1) 정보의 홍수는 어떻게 판단력을 잃게 만드는가?
- 정보가 많다고 해서 바로 판단력을 잃는 것은 아닐 것이다. 판단력을 잃게 되는 것은 많으니까 나에게 필요한지 아닌지를 다 검토하기 어렵다는 의미에서 그런 것 같다. 옛날에는 지식이 어느 정도 걸러져서 채로 치므로 진실한 정보가 어느 정도 남는다. 그런데 걸러지지 않은 지식에서 어느 것이 옳은지 아닌지 판별하기가 어렵다.
- 현대인들은 감각적인 것이 문제이다. 예전에는 작은 정보를 갖고도 판단력을 가졌는데 지금은 이미지를 매우 중시하기 때문에 정보 그 자체가 편리하고 쉽고 감각적으로 다가오게 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판단할 필요가 없는 정보, 감각적인 정보, 생각할 필요가 없는 정보를 원하는 것 때문에 생기는 것임.
- 영화를 보면 ‘최고의 영화’라는 찬사들이나 ‘우리나라 세계 최초’와 같은 수식어가 붙어서 나온다. 검증되지 않은 것인데도 틀린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별 의미 없는 수식어들이 붙어있는 경우도 많이 있다. 사람들에게 유용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초’라는 수식어가 사람들에게 일정하게 그에 대한 판단을 유도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모르는 정보를 접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참조하게 되므로 판단하기 전에 인식함에 있어서 기존의 판단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이미 판단을 포함한 정보가 나돈다는 것임. 그 판단에 휩쓸려 있을 수 있다는 것임.
- 정보가 아무리 쓸모가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많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조그마한 양의 정보가 있을 때에는 그 정보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으나, 그것이 너무나 많아지면 수용자들은 도저히 그 정보를 처리할 수 없고 효용이 없다. 정보는 존재함으로써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가치가 있는 것이다.
(2) 데이터스모그의 다른 문제점들
- 시간을 낭비하게 한다. 컴퓨터 할 때 시간낭비를 많이 느끼는데 내가 해야 할 것만 하고 싶어도 그것이 나를 지연하게 만든다. 좋은 것이라도 그것을 분류하는데 많은 시간이 든다면 의미 없을 수 있다. 내가 원했던 것이라고 할지라도.
- 감각의 과잉으로 인한 피로가 많아진다. 신경을 빼앗기게 한다.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한다. 어떤 면에서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도 한다. 광고에서 휘황찬란한 것이 나오면 더욱 스트레스를 받는다. 정보는 자신을 더 두드러지게 보이기 위해서 더 자극적이 된다. 그로 인해서 노이즈는 너무나 심해져서 사람들을 견딜 수 없게 만든다.
- 원치 않는 돈을 많이 쓰게 만든다. 돈이 쓰이는 데에는 가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상품의 스타일을 높이기 위해서 쓰는 것은 헛되이 쓰도록 만드는 것이다. 광고를 만드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좀 더 좋은 프로그램을 볼 권리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 지식을 접할 수 있는 범위가 좁고 가치가 귀하고 희소성을 갖고 있는데 널린 것이 정보라서 정보의 가치가 더욱 낮아지게 된다. 여기저기 퍼서 나를 수도 있으므로 정보는 떠돌아다닌다. 대통령이 아는 지식을 나도 알고, 내가 아는 지식을 꼬맹이도 아는 것이 문제일 수 있다. 정보의 대중화로 인해서 정보의 진중함이 사라진다. 그것은 정보의 하향화를 낳는다. 그런데 대중화한다고 해서 질이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명문과 출처가 뚜렷한 정보가 아니라 대중화로 인해서 그러한 신뢰성이 없는 정보들이 많아진다는 것이 문제이다. 상업성이 짙어지면서 더욱더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이익을 쫓는 광고들도 많아지고 정보생산자들이 많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만들어진 방대한 양의 정보 과잉에서는 정보의 높은 질을 기대하기에는 어렵다.
- 현대는 인터넷을 통해서 정보를 접한다. 그런데 사용할 수 있는 계층과 없는 계층 간의 정보 격차가 생긴다. 그런데 일정한 연령 이상으로 넘어가면 상대적으로 인터넷 사용이 적다. 접근할 수 있는가에 따라 격차가 심해지는 것이 문제이다.
- 정보를 특정인만 갖고 있는 것은 문제이고, 정보를 여럿이 나눌 수 있다는 점은 우리가 중요하게 된다. 그런데 소수가 갖고 있는 정보는 정보이고, 모두가 갖게 되면 그것은 상식이 된다.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하고, 모르면 바보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 다른 정보가 나타나야 하고, 그렇게 되면 그 정보를 또 얻어야 하는 상태가 된다.
- 접속하지 못했을 때의 불안감이나 스트레스도 매우 많다. 내가 핸드폰이 없을 때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낀다. 남들이 조정하고 통보하는 등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다. 핸드폰 사기 전까지 불편함이 없다가 지금은 귀찮아지기도 한다. 꼭 남과 연결해야 친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느낌이 그런 것이지 생각을 그렇게 안하면 된다. 세상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있음. 뉴스를 보지 않았을 때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 등. 정보가 워낙 많기 때문에 그 속에서 정보들을 다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 스트레스이다.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지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 정보를 다 활용하고 습득할 수 있는 사람들이 승자가 되고 있다. 필요한 정보를 뽑아내는 것이 현대사회의 조건이 된다.
- 너무 쓸데없는 정보가 많아도 구별할 수 없지만, 만약 정보가 너무 없다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몇 년 지나면 어떻게 변질될지 알 수 없다. 스모그라는 말 자체가 너무 퍼져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적당한 수준의 정보가 필요하다.
- 많은 것도 많은 것이지만 알맹이 정보는 별로 퍼지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부동산 정보가 많이 오는데 핵심정보라면 잘 풀지 않는다. 정보는 많지만 활용할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 문제이다.
- 사람들은 시간에 대한 조급증이 있어서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정보를 얻고 싶어 한다. 그러나 빠른 정보를 공급하는 인터넷은 더 많은 정보를 내놓아서 그것을 처리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투여하도록 만든다. 쓸모 있는 정보를 가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투여된다.
4. 다른 제시문을 통해서 이야기하기
(1) 제시문 (나)에 대해 이야기
- (나)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보다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자기주장을 명료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인 것 같다. 쓸데없이 많은 것보다는 필요한 때에 핵심만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침묵도 자신의 말을 명료하게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침묵함으로써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다. 그런데 침묵을 많이 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벙어리나 말이 적은 사람들이 침묵은 의도적인 침묵이 아니다. 말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지우개에 대해 설명을 하다가 더 이상의 설명을 붙이지 않고 놔두는 것도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다. 침묵이 없는 말은 그 자체로 의미가 없다.
- 침묵이라는 것이 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중요한 말을 하고 싶으나 그냥 남기는 경우가 있다. 뭐라고 말해야 할 줄 알지만 ‘∙∙∙’을 씀으로써 더 부각시키는 느낌을 준다.
- 사이사이의 공백과 침묵이 그 말의 의미를 더욱 명료하게 하는 것이다.
-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다. 끊임없이 정보를 제공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이 진정하게 이야기하려면 알맹이가 되는 말을 하라는 말인 것 같다.
(2) 제시문 (다)에 대해 이야기
- (다)는 정보가 과잉된 근본적인 이유가 자기만의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스팸메일도 광고를 받는 사람들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다.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또 무작위 정보만이 아니라 꼭 필요한 사람에게 연계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 시장원리가 지배하게 되면 정보의 홍수가 나타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시장원리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될 수 있을 것이다.
- 인의는 모든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원하는 방향대로 따라오는 것도 인의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은 것은 바보이지만 이익추구보다는 여타의 것을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임. 예를 들어 타인을 배려하는 것 등의 자세를 의미한다.
- 이익을 취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이익이 인의에 우선하는 것에 대해 나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인의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런데 인의가 핵심이기보다는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국가에서 ‘인의’를 추구하지 않고 ‘이익’을 이야기한 것에 대한 비판임.
- 여기에서 말한 인의가 사익이 아닌 공익을 추구하는 것이 될 수 있음. 스팸메일을 보내는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것이지만 제도적 억압도 필요할 수 있다.
- 인의가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익 말고 인의가 있다는 것이다. 이익만 취해서는 위태로워진다고 하는데, 여기에서의 ‘만’이라는 말은 서로가 자신의 이익만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결론은 ‘이익’을 취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익이 안 좋다는 의미이다. 서로 자신의 이익만을 취하려고 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말하고 있음.
-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염두에 두고 그것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 서로 자기 것만 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 남을 생각하는 것이나 정당한 이익을 취하게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기도 하다.
5. 다른 제시문에 근거하여 비판하고 대안을 이야기하기
- (다)에서 나온 결론이 이익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인의에 바탕한 공익’을 추구하자는 것이라면, 왜 이익을 이야기하냐, 인의를 이야기해라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좋은 정보를 제공하려는 사람도 있다. 정보는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좋은 정보가 있고 쓸 데 없는 정보도 있으나, 상업적 성격이 짙은 것에는 해당이 많이 된다. 이익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말고 스팸메일에만 해당하는 것이다.
- (나)의 관점에서 비판한다는 것은 쓸모 없는 정보가 너무 많으면 안 되는 것이고 (다)는 상업적인 것과 너무 결부되면 안 되는 것이라도 이야기하는 것 같다.
- 그러나 정보를 과연 쓸모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 맞는가? 스팸메일조차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도 그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너무나 많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단력을 이야기할 상황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침묵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일단은 양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 일정한 법적 규제를 만들어서 무작위적으로 보내는 메일에 대해 규제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법에 대한 과신인데 세세한 기준을 제시하기 어렵고, 소비자들에게 필요한 정보도 차단당할 수 있다.
- [데이터스모그]에서 이야기하는 해결책은 다음의 네 가지이다. 첫째로는 휴대폰을 들도 다니지 않는다. 둘째로는 각종 인터넷 뉴스그룹에 가입하지 않는다. 셋째로는 업그레이드에 매달리지 않는다. 넷째로는 데이터단식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 (나)에서 침묵이 말과 동일한 실존적 가치를 갖는다고 말했다. 그럴 때 정보를 주는 사람에게 이야기한다고 했지만 이것은 수용자와도 관련이 있다. 핸드폰을 없애는 것과 비슷하게 정보를 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침묵함으로 더 소통이 되는 것일 수도 있다.
- 2003년 경제·경영부문 최고의 책이라고 선정된 것이 [아담스미스 구하기]라고 함.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이 [국부론]이라고 하는데 그는 이기심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그는 [도덕감정론]을 가장 최고의 책으로 꼽았다. 정보는 피할 수 없으나 거기에서 대처를 잘 해야 한다고 본다.
- 정보에 대한 압박감을 버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내가 안다고 해서 세상이 잘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모른다고 해서 세상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정보에 대한 압박감에서 벗어나서 조금씩 침묵하면 그것이 더 큰 의미가 생길 수도 있다.
✤ 12월 8일 수업하기
□ 가족·인종·민족에 대한 닫힌 의식(사회 : 승준)
1. 가족·인종·민족에 대한 닫힌 의식이란 무엇일까?
- 내가 인종차별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학원가에서 백인들이 많은데 흑인들을 접할 기회는 별로 없다. 지하철을 탈 때 흑인이 서 있었다. 그런데 옆에 서 있으니까 이 사람이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나조차도 인종에 대한 편견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게 백인을 우월하게 여기고 흑인을 나쁜 사람으로 간주한다. 재난영화를 봐도 세계 사람들을 재난에서 구출하는 역할은 대부분이 백인이다. 그리고 흑인은 범죄 집단으로 구성된다. 또는 영웅을 못살게 구는 것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영화의 영향도 무시 못 하는 것 같다.
- 닫힌 의식이라는 것이 내가 있는 집단이 우월하고 다른 집단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과도해져서 내 편에게는 잘해 주는데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배척하는 것이다. 그것을 결정적으로 느꼈을 때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 나라 사람들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데 그게 왜 나쁜 일인가’하는 생각을 내가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닫힌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적게 받아도 된다고 판단하는 것이므로.
- 내집단과 외집단에 동일한 비판논리를 적용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타 집단에 대해서 비판하다가도 동일한 논리로 비판을 받아야 할 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 일본에 대해 분노하면서 한국의 베트남 학살에 대해서는 말이 없는 것. 동북공정 문제에서도 우리가 잘못했고 원인을 제공했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합리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건을 똑같이 저질렀을 때 사람들은 합리화하려고 한다. 내가 하면 이유가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이 했을 때에는 사건 자체가 나쁘다고 객관적으로 비판을 한다. 내 가족이 저지른 것과 모르는 사람이 저지른 것에 대해 다르게 판단하기도 한다.
- 사람에 대한 가치를 얼마나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비행기가 추락해서 100명이 죽었을 때 그 사람들 모두가 미국사람일 때 느끼는 감정과 한국 사람일 때 느끼는 감정이 다르다. 100명의 미국 사람 중 한국 사람이 죽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내가 아는 사람이 싸울 때 한번이라도 더 때리기를 바란다. 가치의 비중을 다르게 두는 것이다.
- 삼성전자가 핸드폰의 벤츠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는 것.
- 미국이 테러리스트를 처단하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갑자기 북한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 갑자기 뜨끔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도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닫힌 민족의식이다. 그것이 합리적이기보다는 우리 집단이라는 이름 아래 그것을 동일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가 전쟁을 일으킬 때 우리나라가 잘못한 전쟁이라고 치면 닫힌 민족주의 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옳다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이익이 되어서라기보다는 그저 관념적으로 내가 속한 공간이 옳다는 생각이 있는 것.
- 흑인들도 자기들이 열등하고 백인들이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도 닫힌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중화와 오랑캐로 나눈 중국 송나라를 생각해보면, 선비족이나 여진족이나 거란족도 중국을 동경했다. 그곳이 문화적으로 뛰어난 민족이라고 생각해서 그렇다. 우리나라 역시도 중화사상에 물들어 있었으므로 그것도 닫힌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2. 닫힌 의식은 나쁜가?
- 닫힌 의식이 과연 나쁜가? 우리가 교육을 하는 것도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는 인재를 만들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나라에는 도움이 되는 것이다.
- 우리 가족과 옆집 가족이 싸울 때 우리 가족의 편을 드는데 그것이 극복 가능한 것인가?
- 닫힌 의식이 좋으냐 나쁘냐는 아닐 수 있다. 그런데 나라를 위한다는 것은 닫힌 의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관용을 갖고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인 것 아닌가? 다른 집단을 배제하는 사람을 과연 원해야 하는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 국사교과서를 보면 우리나라가 주체적이고 자주성이 강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침략당한 횟수를 다 생각해보면 꾸며냈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나라 역사가 화려하고 자주적이고 뛰어난 민족이었다고 이야기함으로써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키우려고 한다. 교육인적자원부라는 점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자원’이라는 말은 인재를 키운다는 것인데 오히려 닫힌 의식을 조장하고 있는 것 같다.
- 애국심과 닫힌 민족주의는 다르다고 본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좋지만, 그리고 나라에 대한 자부심은 필요하지만 우리나라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닫힌 것으로만 보는 것은 문제이다. 하지만 국사교과서를 보면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외국에 나가는 것은 ‘진출’이고 우리나라에 온 것은 ‘침략’이라고 말한다.
3. 민족주의와 닫힌 민족주의는 다른가?
- 둘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닫힌 민족주의가 나쁜가? 국사책에도 국수주의적인 면이 있다. 이런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국가정책상 필요하다. 국사에서 나라의 자긍심을 높이는 것은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교과서 왜곡이라든가 하는 면에서는 닫힌 민족주의이다. 불합리하게 자기의 집단을 미화하고 왜곡하는 것이므로.
- 민족주의는 언젠가는 충돌한다. 정부가 심하게 닫힌 민족주의라고 생각한다. 만약 중국의 정책상 필요하고 애국심을 키워주는 데 필요하다고 한다면 내가 그 민족이었다면 그렇게 비판적이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서로 민족주의를 키워 가면 언젠가는 충돌하게 된다. 그러나 못 넘을 벽이다.
- 나에게 어떤 상황이 닥쳐도 나라에 따르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벽을 넘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전쟁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충성을 다한다고 했을 때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생각한다.
- 인간 개인으로 놓고 보면 자기의 이익을 바라게 된다. 그 개인이 모여서 만든 집단이기 때문에 그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 본성이다. 집단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이 동일시된다는 것.
- 민족주의가 지나치면 닫힌 민족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할 때 그것에 반대하는 것이 민족주의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반대하는 것이 민족주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무조건 그것을 지지함으로써 불합리한 것을 지지하게 되면 ‘닫힌 민족주의’가 된다.
- 합리적이고 나라를 위한 것이라는 점은 아무리 밀어붙여도 닫힌 의식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불합리한 것은 그 자체로 닫힌 의식이 된다. 민족주의가 심해져서가 아니라 두 가지는 별개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우리나라가 축구를 이기기 위해서 경기에서 응원하는 것은 대리전 양상을 띤다. 그래서 사람들이 옷을 입는 것도 달라진다. 축구를 보면서 그것을 따지기도 한다.
- 삼성에 대해 우리가 기분이 좋고 자부심을 느낀 것은 삼성이 대한민국 브랜드라는 인식이 우리에게 있고 그것이 세계 시장에서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합리적으로 따지지는 못하지만 사람들이 88올림픽을 잘한 나라라고 하고 깨끗하다고 할 때 감정적으로 좋아진다. 그런 것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고, 허구적 감정일 경우가 많이 있다.
4. 왜 우리는 국가의식을 갖고 있는 것일까?
- 태극기를 걸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가 당연하게 생각해왔는데, 여호와의 증인의 경우에는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하지 않고 애국가를 부르지 않았다. 여호와의 증인이 그런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단이라고 몬다. 도덕과 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세계시민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가? 왜 우리는 국사를 배워야 하고, 누구를 위해 배워야 하는가?
- 지금은 국사를 선택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선택권을 없앤 채 국사를 배우도록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대한민국 사람이 여기에서 살고자 한다면 기본적인 흐름을 알고 있어야 사회에 적응해나갈 수 있다. 한국 사람이 한국에서 살 때 가장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지식이다.
- 윤리는 국가윤리이고, 국사도 역사가 아니라, 국사를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반대한다. 국사를 배워야 한다는 전제를 하고 그것이 국사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아무 생각 없이 학교에서 ‘우리들은 1학년’을 배우기 전에 ‘국기에 대한 맹세’를 배운다. 국사는 어느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래서 국가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느끼게 된다. 국사를 배울 때에는 국가에서 원하는 인재를 키우자는 내용으로 역사를 서술한다고 본다. 책의 목적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국가에서 교묘하게 닫힌 민족주의를 조장한다. 그런데 닫힌 민족주의는 잘못된 것이다. 허구적인 이데올로기이고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국가에서 필요한 것인데 조장을 하는 것이다.
- 뭐든지 기초를 알아야 심화과정을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긍정을 하든 부정을 하든 기초 소양으로 배워야 한다.
- 닫힌 의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국사를 배우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사료의 나열이 아니라 나라에서 원하는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 ‘국가’를 중심으로 배치하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나라라는 것이 계속 우리에게 주입이 되고 그것이 왜 우리에게 주입이 되고 우리를 얽매야 하는지가 의문이다.
- 국가정체성은 근본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가 국가를 위해서 희생해야 하는가? 개인이 왜 국가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깊이 학문을 탐구할수록 서로가 국사의 왜곡을 욕하지만, 그것은 한국사를 왜곡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한·중·일 역사가 만나서 아시아의 역사를 만들고 유럽도 스웨덴과 독일과 유럽의 역사가 아닌 유럽의 역사를 편찬한다. 그 국가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세계화시대에서 세계주의와 세계시민의 윤리가 더 강조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국사나 국가윤리가 사람들의 애국심에 결정적 요소이다. 그런데 그것은 명분도 없다.
- 국가가 닫힌 민족주의 의식을 조장하고 애국심을 조장하고 자주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을 좋아할 수도 있다고 본다.
- 그런데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모인 것은 국가라는 관념의 벽을 무너뜨린 상태에서 연구한다. 그래서 국가의 벽을 무너뜨리는 힘이나 방안이 없는 상태에서 그 이후의 동아시아사 수립은 지나친 것이다. 지금은 국가이지만 예전에는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을 조장해서 끌어나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예전에도 제사장들이 권위를 가졌다. 조장하는 면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고 이것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면 이것을 뒤엎는 것은 몽상이다.
- 그런데 사람에게 억압을 주고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왜 국가여야 하는가? 전 세계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도 있는데 왜 그것이 국가이고 왜 나를 국가의 시민으로 만들고자 하는지도 문제이다. 세계에 하나의 정부가 있어서 그 정부가 유리한 방향으로 조장한다면 문제가 없는가?
5. ‘차이에 대한 관용’이 부재할 때 나타나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 삼성에 대한 막연한 국가적 자부심이 존재한다면 그곳의 노동자들이 노사분규를 일으킬 때 막연하게 그 노동자들에 대한 분노감을 갖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합리적인 판단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 차이에 대한 관용이 없는 것. 친구 사이에 관용이 없으면 절교를 한다. 왕따의 경우도 차이에 대한 관용이 없어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형태이다. 집단주의가 센 나라들이 그렇다.
- 가족 안에서도 특이한 아이가 있으면 가족들이 인정해주기 보다는 배타한다. 동성애의 경우 집에서 계속 때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누나 옷을 빌려 입고 화장을 하고 한 사람에 대해 차이를 관용하지 못한 것이다. 그 사람을 위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정말로 위하고자 한다면 같이 사회를 향해 싸워야 한다.
- 나에게 그런 일이 닥쳐온다면 죽고 다시 태어나면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합리화하고 논리적으로 대응하겠지만, 내 동생이 그렇다고 한다면 현재 살면서 겪을 고통을 생각해서 그것을 막으려고 할 것이다. ‘돌아온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닌 것이 아님.
- 관용의 범위가 또래 남자들보다는 또래 여자들을 좋아하는 경향을 지닌다. 내가 만약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라면 관용을 베풀 수 있으나, 여성이라면 내가 두려워할 것 같다. 그러나 누군가는 누군가를 짝사랑할 수 있다. 일방적인 관계라면 소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담일 수 있다. 성장단계에서 여성과의 친밀함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더 나이를 많이 먹었을 때 나와 가장 친한 여성 친구와 가정을 이룰 수 있는데도 차이에 대한 관용이 없어서 그런 일이 없는 것이다.
- 홍세화씨가 우리학교에 왔는데, ‘똘레랑스’는 관용보다는 ‘용인’에 가깝다고 한다. 용인은 녹여서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관용은 우위에 있는 사람들이 봐주는 것에 가깝다. 배타적 용어에는 우열관계가 녹아있다. 그런 경계 속에 개인을 속하게 만든다.
6. 오늘날의 민족분규나 타민족에 대한 배타적 태도와 정체성
- 배타적 태도는 합리적인 문제들을 가린다. 타민족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통해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과 연관된다. 미국이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을 통해서 정체성을 확립하면 그것은 내면의 공통적인 특징을 왜곡한다. 그래서 미국의 흑인들은 정체성을 왜곡당하고 혼란스럽게 된다.
- 용광로처럼 녹이는 것이 아니라 샐러드처럼 살아남는 것이 바람직한 정체성일 수도 있다.
- 배타적인 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이다. 이슬람에 대한 태도 등. 체첸의 분리 독립이나 라마를 위해 독립하려는 것 안에도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 사람들이 겪게 되는 고통이나 혼란이 있을 수 있다.
- 배타적인 태도와 정체성을 고려하면, ‘나’와 아닌 ‘다른 것’을 규명함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세우는 태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인 것을 느낄 때 예를 들어 일본과 축구를 할 때 광분하는 것.
- 전쟁이 시작된 것 자체가 타민족에 대한 배타적 태도로부터 나의 정체성을 세우는 것임. 존립의 위기에 닥쳤을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던 것 같다. 인간은 남을 배타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만든다. 사람의 심장은 왼쪽에 있다. 그래서 심장을 잘 찌르기 위해 오른손잡이가 되었다는 것도 그에 속한다고 봐야 할 것임.
- 이런 배타적 태도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유지 확대하게 되기도 한다. 아랍 사람들이 지하드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나라가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보루라는 이름으로 국가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형성하게 되는 것과 동일함.
---> 허구의 세상 위에 세워진 정체성은 자신의 존재조건과 다른 판단을 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집단의 정체성이 합리적 기반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것이 닫힌 집단주의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다.
✤ 2004년 12월 10일 수업하기
□ 토론주제 : 우리 시대의 윤리적 문제 해결방안 (사회 : 성현)
1. 제시문에 나온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기
(가) 지금까지는 제로썸이었지만 지금은 윈-윈 세츄에이션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으며, 그것은 ‘형제애’의 정신이라는 것으로 표현한다.
- 지금까지는 서로 죽고 죽이는 경쟁의 사회였다는 이제는 공생의 사회가 되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 공생이라는 것이 경제적인 측면보다는 다른 이들의 슬픔에 공감하고 나눠줄 수 있는 감정적인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형제애의 시대가 도래하는 증거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경제적 상황에서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상황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임.
- 누군가가 아무도 바라지 않은 상태로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시대적인 분위기가 서로 돕는 것을 요구하고 그것이 더 이익이 된다는 것을 파악하고 그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상대의 성공이 나의 성공에 도움이 되면 그것을 형제애라고 말한다.
- 여기에서의 형제애는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 때라는 전제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를 돕는 것이 나에게 유리하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남에게 베푼다는 것과 그것이 의무이자 당연한 것이라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 형제애는 충분히 자기만족에 근거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다른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여유 있는 인간이고 도와줄 수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만족을 하기 위해 도와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만족에 의지하고 있는 개념이다.
(나) 각자의 촛불을 끄면 아무도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임. 촛불을 켠 것은 수능을 잘 보자고 모임을 가진 것이다. 자기가 잘 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했을 때 윤수가 ‘모두 승리하면 누가 패배하냐’고 말한다. 모두가 1등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공생하는 마음으로 살자는 이야기인데 그렇게 되면 망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여기에서 승리와 패배를 이야기하는 것은 경쟁을 전제로 한다. 각자의 촛불을 끈다는 것이 경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 수능이라는 것 자체가 전국 석차가 나오고 대학을 가는데 그래서 친구들 하나하나가 다 경쟁상대가 된다. 그래서 그렇게 보지 말고 같은 공부를 하고 힘든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수험생 자체로 보자는 말일 수도 있다.
- 촛불을 끄라고 했는데 수능 이틀 전에 그것을 끄라고 하면 그 의식을 하지 말자고 하는 것인지 잘 알 수 없다.
- 모두가 승리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 것으로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촛불을 끄라는 것과 모두가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은 동일한 이야기이다. 윤수와 다른 학생들은 서로 대립적이지 않다. 다른 시각이다.
(3)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고전자본주의에서의 경쟁시대 모습을 말한다.
- 이기심의 폐해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폐해를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경제적인 것으로 말하면 자유방임주의의 폐해를 말할 수도 있다. 정치나 다른 사회에서 보면 인간이 이기적인데 법이 없으면 혼란할 수 있으므로 인간 사회의 관계를 규정하는 법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 인간이 원래 정의나 공정성을 갖지 않은 존재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법이나 제도로 교화시킬 수밖에 없다. 윤리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인위로서 사람들을 정의롭게 하고 윤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 앞에서 왕이 사악함을 고치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결국 실패하는데 법으로도 고칠 수 없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결국 이 사람들이 나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가질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불행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만 생각하는 것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2. 이러한 견해가 우리사회의 윤리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인가?
- (가)는 같은 입장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나)는 경쟁의 상태에 놓여있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국의 고3들이 너의 적이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경쟁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내가 얼만큼 공부했고 내 능력이 어떤지 확인하기 위해서 보기도 한다. 그런 수단으로 해야 하는데 무조건 잘 봐야 한다는 맹목적 사고를 갖고 무조건 경쟁상대로 생각하고 경쟁에 대한 왜곡된 상태에서 사회의 윤리 문제가 생긴다. 내 친구가 잘되면 배가 아플지 몰라도 좋은 인맥이 될 수 있어서 나에게 좋은 것이다. 예전에는 친구가 잘 되면 마냥 좋은 것이었는데 그것은 이후 내가 잘 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공생의 원리는 진심으로 남을 축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서로서로 이익이 되는 측면이 있다.
- 해결방법이 틀어진 것 같다고 하는데, 우리는 ‘전국의 고3이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자극제가 되었다. 경쟁상대라고 생각하는 것이 열심히 하는 친구를 보고 자극을 받는 것이다. 그것이 윈-윈 게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수능이 자기 능력을 평가한다고 하는데 수능은 참여하는데 의의가 있는 시험이 아니다. 이미 수단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 여기서 말하는 형제애는 진정한 형제애가 아니라 서로가 상대의 성공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 같다. 진짜 형제애가 아니라 그 친구의 성공이 필요하다면, 그 시대가 도래했다고 하면 그것은 한계적이다. 개인적인 이익이 걸려있지 않은 형제애가 있기도 하다.
- 예를 들어 핸드폰을 파는 곳에서 핸드폰이 많이 생산되면 통신업체도 좋다. 그런 측면을 말하는데 학연처럼 일방적으로 끌어주거나 공정하지 못한 경쟁이 되는 것과는 다르다.
- 가입자수가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핸드폰 업체들이 많아지는 것은 공생관계가 아니게 된다. 그런데 담합이 되면 서로 좋을 수는 있으나 결국 수용자에게는 좋지 못하다.
- 길거리에서 쓰러져 있는 임산부를 병원으로 옮기는 것은 자신에게 이해가 없더라도 해산의 기쁨을 함께 느끼는 것이므로 그것을 형제애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버려두고 가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것이 윤리 문제 해결이다.
- (가)가 윤리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자기만 잘되고 남들이 못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잘되고 남들도 잘되는 상황이 ‘윈’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더 이익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상호 평등한 윈-윈이 아니게 된다. 자신에게 금전적으로 이익이 될 때 형제애가 생긴다고 본다.
- 셋째와 넷째 단락은 자기 개인적인 이익이 걸려있지 않을 때의 형제애를 이야기하는데 둘째 단락은 자기가 잘 되려고 남이 잘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기심이 한단계 더 진화한 상태이다. 속으로는 내가 더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우회적으로 이야기하는 무서운 상태라고 본다.
- 이기심의 진화라는 데에 동의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이익이 된다. 모두가 좋을 수 있다. 이기심이 더 진화가 되었든 아니든 결과적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 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가는가에 따라 다르다. 자신들이 불법적으로 행위함을 통해서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범죄들을 저지르면서 윈-윈을 할 수도 있다.
3. 우리시대의 심각한 윤리 문제
(1) 극빈곤층 문제 - 형제애의 정신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 극빈곤층이 생겼다는 사실이 우리 시대의 윤리 문제이다. 더 벌고 덜 버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더 버는 사람들이 부당하게 모으는 경우도 있고 베풀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인가? 극빈곤층의 존재 자체가 사회의 윤리 문제이다. 거리의 노숙자들이나 밥을 못 먹는 사람이 있는 것이 사회의 윤리 문제이다.
- 내가 그 사람을 도와주지 않으면 죄의식이 생긴다. 당연히 도와주어야 하는 것인데도. 죄의식이 있어서 도와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기쁨을 추구하기 때문에 도와주는 것이기도 하다. 무조건적으로 보장을 해줘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인데도 마치 자신이 ‘도움을 주는 것’처럼 하는 것이 문제이다. 남을 도와주는 것 자체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인데 그것을 이기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다. 신앙심이 깊어서 복지기관에서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는데, 너는 네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 그런데 형제애는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하는 것이 선택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 측면일 수도 있다. 그 의무감이 없다면 설령 형제애가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 내가 내는 세금 자체가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세금과 같은 형태가 아니라 이불을 갖다 준다던가 돈을 준다던가 하는 행동을 말하는 것인가? 사회에서 해야 할 문제를 개인에게 넘기는 셈이 된다. 사랑의 리퀘스트와 같은 것은 매우 불쌍하게 묘사되면서 국가에서 해야 할 일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심하다.
-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구걸을 할 때 그 사람들을 도와준다. 그것을 도와주지 않으면 죄의식을 느끼거나 해서가 아니라 내가 이 정도 사는 것이 잘 나서가 아니라, 처음에 태어났을 때 윤리적으로 높거나 똑똑하거나 남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태생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주어졌고, 그래서 의무감이 생긴다고 본다. 귀족층이 된 것이 잘나서가 아니기 때문에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생긴다고 하는 것이다.
- 개인에게 그 의무감을 갖게 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렇게 하려면 정부에서 개인에게 매월 한 명의 노숙자에게 얼마씩을 지원해라라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 의무감을 갖게 하는 것은 문제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의무감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의무감이 전제되면 그것은 국가의 의무로 제기되고, 사회적 측면에서도 그렇다.
(2) 수능부정 - 경쟁보다는 동료의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 개인이 촛불을 끈다는 의미가 한 가지 부분으로 달려가는 것, 무조건 좋다고 달려 나가는 맹목적인 추구를 이야기하는데 자신에게 필요한 욕망이 무엇이고, 내가 추구하는 욕망이 진정한 자신의 욕망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각자가 촛불을 끄고 모두가 함께 한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 수능부정은 경쟁의 룰이 흩어진 것임. 경쟁이 너무 심화되어서 그것이 나은 폐해이기도 하다. 경쟁의 룰을 교묘하게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임. 그런데 그렇게 무너뜨리는 것은 왜 문제가 되는가? 이것은 동료의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 수능부정 메일을 받아본 적이 있다. 해킹을 해서 메일 주소를 알아내서 재수 비용을 다 대줄테니 시험을 대신 볼 수 있는지에 대해 물어보기도 함. 막바지에 긴장이 되면서 누군가가 대리시험을 봐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수능부정을 하고서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큰 문제임. 도덕불감증도 있지만 그런 부정을 했는데도, 내년에 그냥 시험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문제이다.
- 통일할 수 있고 같은 조건에서 시험을 봐야 하는데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것이므로 통제를 하는 것이 타당하다. 시험의 룰을 무너뜨려서 시험의 공신력이 무너지면 그 다음부터는 돈이 있거나 힘이 있는 사람의 권리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그렇게 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민감하지 않은 상태이다.
- 촛불을 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모두를 경쟁시스템으로 만들지 않으면 가능한가?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가?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 촛불을 끈다는 것은 동지가 된다는 것이다. 반끼리 뭉쳐야 하고 서로 도움이 되고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하는데 한 반에서 같은 대학 같은 과에 가는 아이들이 별로 없다. 우리가 토론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게 되고, 나와 다른 생각을 배우게 된다. 그것을 통해서 아집을 버리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동료라는 의식을 갖는 것이 결국 패배자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다.
- 수능부정에서는 동기와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이므로 이때의 동지와는 다르다.
- 윤수나 고3학생들이나 결국 지향점이 똑같다고 볼 수 있나? 승리하는 것과 패배하지 않는 것과는 같은 것 아닌가? 그런데 윤수는 경쟁을 관두자는 소리이다. 마라톤이 아니라서 다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모두 승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촛불을 끄면 패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촛불을 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이기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라는 것이다. 나만 잘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임. 나만 잘되겠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임.
- 그러나 그것은 매우 막연한 이야기임. 그렇게 경건한 마음으로 결과에 임하면 되지만 결국 결과는 경쟁이 있으므로 나는 승리자 또는 패배자가 될 뿐임. 그렇게 보면 촛불을 끈다는 것은 ‘경쟁을 없애자’는 것일 수 있음. ‘경쟁에서 벗어나자’는 것임. 시험 자체가 윈-윈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동료의식이나 전체가 잘 되도록 하자는 것은 불가능함.
- 시험이라는 것이 승리자와 패배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시험을 잘 봤다고 승리자도 아니고 시험을 못 봤다고 패배자도 아니다. 그저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해서 보고, 그에 걸맞게 가면 되는 그런 것이지 시험 결과에 따라 승리자와 패배자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승리자와 패배자가 나뉘는 것은 승부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런데 승부는 남을 이겨야겠다는 마음가짐임. 그렇게 보자는 것. 시험 자체가 승부가 아니다.
- 승부 자체를 없앨 수 있다. 작년에 ‘대학을 보낼 때 누구를 가장 먼저 보낼 것인가?’에 대해서 토론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그 때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을 보내야 한다고 말했으나 대학을 가고 싶은 사람을 보내면 된다고 말했었다. 대학을 가고 싶은 사람이 간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리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 ‘서울대폐지’는 위계서열의 맨 윗부분을 없애자는 의미를 넘어서서 일정한 특권을 유지하여, 사회 전체를 정체시키고 있는 현상을 막아보자는 것임.
(3) 트로글로다이트 - ‘밀양고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가?
- 약한 것에는 집단적으로 휩쓸릴 수 있다. 그런데 심한 범죄 상황에 집단적으로 휩쓸린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 중 하나이다. 그 학생들이 종신형을 받지 않는 이상 그 여학생들은 평생 집밖으로 나가기도 어려울 것이다. 범죄에 대한 죄의식이 없는 것이 우리 시대의 심각한 윤리의 문제의식.
- 공창제를 하는 것은 이미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으므로 그것이 오히려 성폭행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할 수 있다.
- 이러한 범죄가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결국 법이 없고 서로 자신의 이기심에 따라 행위하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 대해서 각인하도록 해야 한다. 막연한 이기심의 사례가 아니라 구체적 사례가 있어야 할 것.
-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해로 돌아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은 남의 문제에 대해서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국 이러한 문제들이 확산되는 것이다. [스파이더 맨]에서 그가 나쁜 놈에게 ‘당해봐라’ 생각하다가 결국 자신의 삼촌이 죽게 된 것.
- 결국 모든 문제가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것. 자신의 범죄와 자신의 이기심이 결국 자신에게 부메랑이 된다는 것을 인식시켜야 한다.
✤ 12월 13일 수업하기
□ 오늘의 주제 : 경쟁에서 벗어나기 (사회 : 미경)
1. 이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기
- 굳이 비유를 하자면 강의에서 들었듯이 경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무한히 수많은 애벌레들이 경쟁을 하는데 꼭대기에 다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야기를 하지 않고 계속 올라가게 만드는 구조를 형성한다. 꼭대기에 있는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 구조를 지키기 위해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또 줄무늬 애벌레는 노랑애벌레가 날아와서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는데 그것을 믿지 못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결국 내려오는데 여기에서는 결말이 나와 있지 않지만 내가 본 그림책에서는 줄무늬 애벌레도 노랑나비처럼 날아가게 된다. 꼭대기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안 줄무늬 애벌레는 사람들에게 오르기만 하지 말고 내려가서 날 수 있는 힘을 기르자고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서 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성숙’을 의미하는 것 같다.
- 꼭대기에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는데 맨 위에 올라가 있는 애벌레들이 상류층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이 꼭대기를 지키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꼭대기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 다른 애벌레들이 올라오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 비밀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체제를 유지하려는 태도와 같다.
- 애벌레들이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경쟁을 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맨 위에 아무 것도 없는 것도, 나도 위에 올라가려고 하지만 맨 위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러면서도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 비슷하다. 어떤 애벌레가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나비가 될 수 있겠냐. 최선을 다해서 애벌레의 삶이나 즐기자”고 이야기한다. 나비가 되어서 내면적으로 성숙하거나 다른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서 안주하고 지금의 상황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 올라갔다가 자신의 삶이 애벌레가 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려오면서 애벌레들을 들여다보았는데 애벌레들이 다 다르면서 그토록 아름다운 것에 놀랐고, 과거에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에 대해 놀랐다고 말한다. 그런데 위로 올라가보는 것도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 하나가 “그것이 사실이라도 하더라도 말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두려움 때문에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 위로 올라가봐야 내려올 생각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위로 올라간 아이들 중에 줄무늬 애벌레가 올라가기 전에 떨어져나가서 죽는다. 높이 올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깨닫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경험하지 않고도 무언가를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올라가지 않고도 허구성을 미리 알 수 있는 애벌레가 있었다면 그가 바로 나비가 되었을 것이다.
- 비유를 하자면 수능을 공부하는 우리의 모습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대기까지 갔는데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열심히 공부를 해서 끝까지 점수를 올려보았지만 그것이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위는 선택의 폭이 좁은지 알 수 없지만, 점수에 맞춰 적성도 아닌 과를 가야 한다면 그것이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기둥 안에 있는 한 누구나 그런 것 아닌가? 삶도 무언가를 추구해서 높은 위치를 얻거나 사회적인 명망을 얻거나 입신양명을 하는 것이 실제로 남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실제로 이룰 것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해도 허무함만이 남을 수 있다. 구운몽에서 이야기하듯이 다 이루어보았으나 허무하고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 위로 올라가도 선택의 폭이 좁을 수 있다는 것은 ‘내려갔을 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 꼭대기에서 일어난 사태보다 낫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내려가기가 어렵다. 꼭대기에 올라가 있다면 그것이 설령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다른 길을 찾기는 더 어려울 것 같다. 무언가 가진 것이 많으면 버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 노랑애벌레가 뭘까 생각해보려고 했다. 아마도 그가 ‘진실에 대해 말한 것’ 같다. ‘올라가봤자’라고 이미 말을 했는데도 줄무늬 애벌레는 노랑애벌레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엄격하게 마음을 먹었다. 이미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들었어도 그런 생각을 하면 안된다고 마음을 다져먹는 것이다. 꼭대기에 도달하려고 했는데 결국 그의 말을 알게 되었다.
- 발표하는 것을 들었을 때 고민이 되었는데 이 애벌레들이 꼭대기에 도달하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애벌레로서 성공하는 삶이 꼭대기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나비가 될 수 있는 거야’라고 말한다. 정말 참된 애벌레들의 성취는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나비가 되는 것인데, 이들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그것이 아닌 다른 것에 치중하고 있다. 노랑애벌레가 나비가 됨으로써 “너희들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나비가 되는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줄무늬 애벌레는 깨달았으나 갈등이 생기고 있다. 그러나 그는 “나비를 보았어. 삶에는 무엇인가 보다 충만한 것이 있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확신은 없고 갈등도 있으나 진정하게 자신이 추구해야 할 것을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 “그는 눈들이 다 다르면서 그토록 아름답다는 것에 놀랐다”고 말한다. 맹목적으로 올라갈 때에는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다시 가능성의 발현을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그 때부터 다른 이들의 아름다움이 보이는 것이다. 진정으로 추구하는 바, 자기 안의 가능성을 발현하는 과정이다.
- 올라가려는 욕구는 인간에게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다. 나비가 된다는 것도 올라가는 것이다. 그런데 애벌레들은 그것을 나비가 되어서가 아니라 기둥을 만들어서 오르려고 하였다. 그러다보니 오르는 것이 목적이고 나비는 오르는 것이 바로 자신이 노니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도 성취의 욕구는 당연한 것이다.
- 제목의 “꽃들에게 희망을”인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에는 애벌레들이 모두 자신들의 오르려고 했으나 이들이 나비가 됨을 통해서 결국 꽃들에게도 희망을 주게 되었고 세상에 꽃이 활짝 필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것이다.
-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거나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 갈 때 손해를 보지는 않는다. 그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에도 꼭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열심히 올라가는데 나비가 된 애벌레 말고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다 따라가고 있다.
- 줄무늬 애벌레가 나와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다. 모두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끝까지 올라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했다. 알았으나 내려갈 때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비현실적인 것 같았다고 말한다.
- 줄무늬 애벌레는 운이 좋아서 알 수 있었던 것이고 다른 애벌레들은 맨 위에 올라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애벌레가 아니어서 끝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꼭대기에 뭔가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가? 꼭대기에 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올라갈 힘이 없다. 그것을 안다면 과연 우리는 올라갈 수 있는가? 꼭대기에 있는 아이들은 떨어진다.
- 우리의 실생활에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 것일까?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성공을 지향하는데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뭐가 있는지 몰라도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무엇이 갖고 싶은데 돈이 없거나 살 형편이 안 된다면 올라가면 이런 일로는 고통 받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들이 올라가고 싶어 하는 곳에 우린 와 있는 거야’라고 말하는데 그 아래 기둥에 있는 자들이 우리를 우러러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해서 올라가려고 하는 것일 수 있다. 꼭대기에 올라가면 그것을 지키려고 말도 안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처럼 떨어지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 있다. 아예 밑에서 올라가려는 사람들보다 더 힘든 삶을 살게 될 것 같다. 꼭대기에서는 1, 2점 차이로 피를 말려서 훨씬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된다.
- 꼭대기는 없는 것 같다. 재산상으로든 성적 상으로든 여러 가지 면에서 보았을 때 대기업의 간부라고 하더라도 욕구는 무한하다.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많은 것을 바란다. 경영인은 회사를 늘리려고 하고 공부를 하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알아내려고 한다. 꼭대기가 인간의 욕구라면 무한하기 때문에 저 사람이 행복할 것이라고 해도 그 사람들은 그 위치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 꼭대기는 없지만 행복한 사람들은 있을 수 있다. 꼭대기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꼭대기를 넘어가면 새로운 기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수 있으니 무엇이 꼭대기라고 말할 수는 없다.
2. 각자가 지향하는 꼭대기는 무엇인가?
- 아직도 그렇지만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제일 위를 차지하고 싶은 욕구를 갖고 있지는 않다. 아예 꼭대기까지 올라가고 싶지 않다.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행시에 최연소로 합격하고 싶었다. 주류를 형성하여 잘 하면 차관과 장관도 노려볼 수 있겠으나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고 그런 곳까지 올라가면 더 구속될 것 같다. 그래서 올라가서 1급까지는 해보고 싶다. 유적을 찾아다니는 것을 해보고 싶다. 나중에 취미가 더 생기면 그런 것도 해 볼 것이다.
- 내가 대통령이 되어서 하고 싶은 일은 통일이다. 평화통일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과 같은 말도 싫어하고 방법은 좀 더 생각해보아야 하겠지만 우리나라를 부자로 만드는 것이 꿈이다. ‘부자’라는 말이 나라 전체의 GNP가 아니라, 윤리 문제라고도 말했던 바, 극빈층에 대한 제도적 보장만이 아니라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표이다. 사람들의 기본적인 삶이 채워지지 않고 있을 때 그것을 분배하는 것이 목표이다. 한 개인이 사회에서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가장 큰 것이 대통령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을 것.
- 경영인이 되고 싶다. 벤처라도 좋고 대기업이라면 더 좋은데 그 속에서 새로운 경영에 도전해보고 싶다. 왜 우리는 평범한 직장인이 꿈이 아닐까?
- 어릴 때에는 이런 꿈을 다 꾸어보았겠지만 길거리에서 사람을 잡아놓고 ‘이 사람을 아냐’고 물을 때 ‘좋은 쪽으로 안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90%가 될 수 있다면 좋을 것. 좋은 쪽으로 이름을 알린다고 했을 때 ‘간디’ 정도면 무난하다. 위인전에 남는 꿈은 누구나 꾸어보았을 것이다.
- 나는 교사가 꿈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교사라는 직종이 안정되고 수입이 보장되고 평생직장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재수학원 선생님도 그렇고 학교 선생님들도 힘을 주었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내 안위만을 위해서 하는 직업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재수하면서 생각이 변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꼭대기는 돈이나 명예보다는 나중에 내가 키운 제자들이 훌륭하게 되어서 나를 찾아오면서 흐뭇해하는 상상을 한다. 그것을 느낄 수 있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훌륭하게 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 특별한 꿈을 갖고 있지는 않다. 어차피 죽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죽고 하는데 무언가를 찾아서 이름을 붙여놓고 이름이 남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성공시대’나 ‘영웅시대’의 경우 사람들을 미화시키고 그들이 저지른 문제들에 대해서 모두 다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무화되어 버린다. 빌 게이츠가 돈을 번 과정이 치사했다고 하더라도 반 정도 기부를 한다. 박세리는 자신이 운동을 해서 정당하게 벌어도 기부를 하지 않는다.
- 작년까지는 내가 원하는 것이 ‘기자’였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사회의 정의보다는 활동적이었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만히 있다. 비유하자면 내려가기 무서워서 멈춰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3. 나비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 경쟁을 통한 성취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가? 경쟁을 통하지 않은 성취라는 것은 가능할까? 그것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떤 것일까?
- 나비가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애벌레가 아니라는 것이다. 애벌레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비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깨달으려면 한 번 씩 올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뤄서는 안 되고 이루는 과정만이 있는 것이다. 나비가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꽃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
-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이 경쟁에 의한 성취라면 그러한 경쟁의 끝에는 설령 성취가 있다 하더라도 허무할 수 있다. 그러나 나비가 된다는 것은 그러한 경쟁을 통하지 않은 자신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충만한 것, 자신을 온전히 발현하기 위한 요구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경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도 가능한 것이다.
-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하는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하는가? 잘 한다는 것은 이미 그 안에 경쟁이라는 것, 비교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개념이다. 한 사람이 요리를 잘한다고 했을 때 그것으로서 내가 충만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나비이기도 하다.
- 부모님은 현실이 냉혹하다고 말을 한다. 나는 미술이 하고 싶지만 미술이 직업이 될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것이 부모님이 세상을 오래 살아서 세상을 많이 아는 것인지 아니면 가치관이 다른 것인지 혼란스럽다.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욕구일 수 있고, 어떤 것이 진짜 자신의 발현인지 알 수 없다. 새로운 기둥, 다른 기둥을 올라가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
- 결국 새로운 것은 없을 수 있다. 지금의 기둥이 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기둥이 허구인 것을 안다. 경쟁의 세계는 물신의 세계이다. 사람을 겉껍데기로 규정하게 만들고, 그 안에서 물신화된 인간들은 행복하지 않다. 만약 행복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묻힌 감정에 불과하다.
- 그러나 계속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온전한 것일 수도 있다. 비록 허구이지만 새로운 삶의 모습을 알 수 없다면 우리는 이 상황에서 그냥 살아가는 것이 행복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것에 행복만 느낀다면 된다. 이 말은 맞는 말이다. 성공한 청소부는 왜 있을 수 없는가 생각했다. 나는 그럴 수 없으나 그 과정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나는 그게 안 된다. 누구나 자기 위치에서 만족할 수 있고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이 허구의 세계라는 것이다.
- 지겨움과 힘듦은 다르다. 그 느낌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힘들다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고, 그것이 잘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고3 때는 힘들지만 필요하니까 한다. 하지만 재수생이 되면서 이 공부가 가끔은 의미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 지겨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삶을 알 수 있다.
- 인간이라는 존재는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아는 존재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자신 존재의 괴리를 깨닫곤 한다. 그런 ‘불안감’을 느낄 때 인간은 ‘일상성으로 전락’ 하거나 아니면 스스로를 대자적 존재로 세우기도 했다. 그런데 매트릭스에서 뛰어나온다는 것이 곧 행복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시지포스가 돌을 다시 굴리는 것도 영원히 고통스럽지만 그는 그것을 선택한다. 자신의 인간됨을 위해서이다. 중요한 것은 선택이다.
- 벗어나는 것이 도망치는 것이어서 비겁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일상으로 회귀한다는 것인데 이 현실이 힘들어서 나를 속이고 잠시 힘든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를 속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허구가 확실한 세계와 나비가 되는 세계인지 또 다른 기둥인지 모르는 선택의 과정에 서 있기도 하다.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아는 것 자체가 중요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선택이다.
- 나비가 되고 싶은 사람이 많을까? 그 선택이 불확실할 때. 그리고 기둥 꼭대기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데 과연 우리가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는 선택의 가능성과 고통이기도 하다.
<정리>
우리가 나비가 되는 것을 원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지만 각자가 선택을 하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숙제이다.
✤ 12월 15일 수업하기
□ 합평하기 (사회 : 소영)
1. 타인의 소문이나 평판
(1) 이 글의 주제
-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반성과 비판을 통해 무비판적으로 결정된 본인의 모습에서 벗어나서 나의 모습을 주체적으로 모색하자.
-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은 사회 안에서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기란 불가능하지만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문제가 있으므로, 타인과 내가 바라는 모습을 주체적으로 모색해나가야 한다’는 것임. 그런데 그 내용에는 제시문의 내용이 들어있지 않다.
- 보편적인 실수를 범하고 있는 글이라고 했는데,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고 글이 나가 있으나 제시문에 나와 있지 않은 주체성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
(2) 제시문이 들어있지 않음.
- 제시문이 요약이나 거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나타나있지 않은데, 제시문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그래도 되는지에 대한 것이 궁금함. 그런데 세 글을 논의의 근거로 삼으라고 했으므로 세 글이 설명되어 있지 않으면 문제가 됨.
- 주체성을 갖자는 것이 잘못되었다면 이 논의의 근거로 삼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전개하다보니 오류가 생긴 것인지 아니면 그 자체가 오류라는 것인지 확인을 해야 함. 주체성으로 결론지어진 이유가 요구사항에서 비판적으로 논술하라고 하니 그에 얽매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본다. 제시문 독해를 넣지 않았으나 비판적인 논술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는 것으로 보임. 비판적으로라는 말이 나쁜 것으로 이야기하도록 요구하는 것으로 강박을 갖고 있다.
- 그런데 이 글은 주체성을 가지라고만 하는 것은 아님. 보통 주체성을 가지라고만 하면 ‘남의 말에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양방향성의 상호 보완적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외부의 영향을 배제하지 않고 그 점에서 주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이 글의 주장은 나름대로 논리적 근거를 갖고 있음.
- 주제를 이것 말고 다른 것으로 쓴 사람이 있는가? 타인의 시선은 어차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것을 이용해서 자극을 받는 것으로 이용하자고 이야기를 함. 즉 구속을 받지 말고 이용을 하자는 것임.
- 여기에서 전제를 세세하게 쓰지 말라고 했는데 첫 단락이 전제를 서술하는 단락임.
(3) 논점을 이탈하고 있지 않은가?
- 이 글은 논점을 정확하게 지킨 것인가 아닌가? 논점을 정확하게 지키지 못하고 있다. 논제는 세 가지 글에서 ‘타인 속에서 자신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쓰라고 한 것인데, 여기에서는 영향을 받는 것 자체를 문제시하고 일단 그것을 문제점으로 간주하고 글을 쓴 것이 문제라고 본다. 또한 여기에서는 세 글을 논의의 근거로 삼아야 하는데 세 글에서 나타난 것에서 영향이 어떻다는 것을 끌어내야 한다. 그런데 제시문 각각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을 근거로 삼으면 일정한 이야기가 되고 있다.
- 논리적 근거가 없이 뚜렷한 것임. 논리가 비약을 하고 있음. 타인의 시선이 문제점이 될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지 않은 글인 것 같다. 결론 지어지는 방법이 ‘주체성을 상실하고 있으니까, 주체성을 회복하자’는 결론으로 나타나고 있음.
- 그러나 주체성을 상실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뒤에서는 타인에 대한 일방적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양방향성을 회복하자는 점에서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음. 그래도 이것은 결론에 대한 압박 때문에 영향을 논술해도 되는데, 굳이 이런 종류의 결론을 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 영향만 써도 된다. 반드시 그 해결방안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 이 글은 ‘타인의 시선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쓴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 일방적으로 작동했을 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임.
- 이 글이 논점을 이탈한 글이라고 했는데 왜 이 사람이 논점을 이탈한 글을 쓰게 되었을까? 처음 써 본 글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비판적이라는 말을 문제점을 찾으라는 말로 이해해서 그렇게 썼을 수도 있다.
(4) 이 글 자체의 논리성
- 이 글을 놓고 이 글 주장의 논리성이나 일관성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 사람들이 완전히 타인에게만 이끌려서 사는 것처럼 오버하고 있다. 실제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시선이 개입되는 동시에 모두가 주체성을 잃는다고 말하는데 실제 내 생각은 원래 나만의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그런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 이 사람이 근거로 들고 있는 주제문이 비문이라고 생각한다. 몇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우선 개인의 주체적 의사결정 문제가 있다. 다른 하나는 집단의 의견과 구성원의 의견간의 불일치성이다.
- 여기에서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의 문제점 두 가지를 밝히고 있는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문제와 뒤에서 나온 ‘문제’ 개념에 혼동이 있다. 여기에서 자신이 밝히겠다고 하는 문제점의 의미와 같지 않다고 하면 ‘불일치성’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사람이 제대로 글을 쓰려고 한다면 ‘개인의 주체적 의사결정에서 주체성을 상실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집단의 의견과 구성원의 의견간의 불일치성이 있을 때 집단의 의견을 그냥 따라간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와 다른 하나가 맞는가? 둘다 똑같은 이야기 아닌가?
- 이 글의 논리성에서 핵심적 문제는 ‘일방적 영향’ 문제에 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5) 이 글을 어떻게 고치면 될까?
- 이 사람이 서론에 제시문을 분석한 것처럼 쓴 것 같다. 제시문을 읽고 다 아울러서 서론에 망라를 해 놓은 것 같은데 그것보다는 논제의 요구사항을 충실하게 지키기 위해 제시문 분석과 더불어서 요구사항의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제시문 (다)의 일부를 뽑아서 ‘그런데 그 중에서도 일방적 시선은 더 문제가 크다’고 하면서 이 글을 압축적으로 연결했다면 가능했을 것임.
- 만약 이 사람이 논리적 일관성을 갖고자 했다면 서론에서 ‘타인의 시선이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등등’에 대해 먼저 서술하고 출발하면 가능할 것.
2. 사회적 자살
(1) 이 글의 문제
- 이 글을 아주 잘 썼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단락과 두 번째 단락이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갔고 분석도 훌륭했으나, 그 뒤에서부터는 연결이 안 된다. (다)에서 해결책을 찾은 것은 대단히 참신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시한 ‘목표를 세운다’는 말은 앞에서 제기한 내용들과는 전혀 다른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 뒤는 한계를 찾다가 고민해서 만들어낸 한계인 것 같다.
- 처음과 두 번째 문제가 잘 되었으나 원인을 잘 찾아놓고는 개인적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사회적 요인과 관련이 없는 내용이 써 있다. 첫째, 둘째 문단과 셋째, 넷째 문단이 서로 다른 글인 것처럼 보인다.
- 매우 산뜻한 해결책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찾았을 때 ‘개인적으로 해결하지 말고, 사회적으로 해결하자’고 이야기해야 할 것임. 해결책이 산뜻하다고는 해도 (가)에 나오는 문제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연결을 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런 방식으로는 그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워진다. 앞에서 카드빚을 진 사람이나 농민운동가가 새로운 목표를 수정하거나 한다면 이 밑에서 이야기한 한계점은 고쳐서 이야기할 수 있다.
- 나는 개인적 해결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면 반대로 네 번째에서는 사회적인 것을 이야기하면 되는 것 같다. 세 번째를 개인적으로 심봉사가 ‘죽은 사람은 살아날 수 없으니 내 자식이나 잘 키워보자’고 했는데, 대안으로 사회적으로 문제일 수 있다고 썼는데 선생님이 비판을 하신 바, ‘심봉사의 태도’에서 찾으라는 것이 아니라 ‘해결책’을 찾으라는 것이었으므로 그것은 해결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이 사람의 글은 사회적 자살이 핵심이다. 자신이 잘 분석을 해놓고도 그것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 사람은 자살은 사회적 요인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을 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캐치하지 못했으므로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이다.
- 뒤르켐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있다면 훨씬 더 (다)에서 인본주의적인 측면을 찾아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핵심을 찾아내야 뒤와 연결이 된다.
(2)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 제시문에서 파악한 바 ‘사회적 자살’이라고 하는 문제들을 정확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해석을 굉장히 잘 해 놓고도 제일 중요한 것을 ‘사회적’이라고 말해놓고도 왜 캐치를 하지 못했는가에 대해 알 수 없다.
- 중간에 원인을 쓰는 문단을 하나 더 만든다. 사회의 변화에 개인들이 적응하기 어려워서 생긴 문제들로 원인을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 이런 관점에 입각하여 (다)의 해결책을 찾아내고, 그 원인과 결부시켜 그 해결책의 한계를 이야기하면 될 것이다.
3. 뫼비우스의 띠와 굴뚝청소
(1) 이 글의 문제점
- 이 글의 주제는 무엇인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꺼번에 한다.
- 뫼비우스의 띠가 양면성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맞지 않는다. 양면성을 (나) 제시문에 적절하게 적용하지 못한 것 같다. 사건에 양면성이 있는데 한 가지 면만 봤다는 것은 아니다. (나) 제시문이 말하는 것이 신문기사를 쓴 사람도 객관적인 것 같지만 전제하고 있는 것이 자살사이트에서 만나서 자살하게 되었다는 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살의 원인을 단정 짓고 있다.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을 뫼비우스의 띠와 연결하여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자살 사이트가 자살의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나) 제시문에 대한 견해를 논술해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사건의 수사 과정에 대한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으므로 논점을 잘못 잡았다고 본다.
- 논제에 대해서는 잘 따라갔는데 끼워 맞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굴뚝 이야기에다 섣불리 단정 짓는 것과 양면성을 (나) 제시문에 적용한 것이 억지이다. 이야기에서 이끌어낸 것도 덜 들어맞는 것 같다.
- 뫼비우스의 띠는 안과 밖의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것인데, 앞에서는 진리추구의 자세를 이야기하고 뒤에서도 양면성을 알게 되는 진리추구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양면성은 뫼비우스의 띠에서 자못 도출했다. 주장이 약간 왔다갔다 한다. (가)에서는 진리추구를 이야기하다가 (나)에서는 다양한 시각을 가지라고 이야기한다.
- 첫 단락에서 갑자기 ‘수학적 지식’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뫼비우스의 띠라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말을 한 사람이 굳이 수학교사가 아니어도 된다. 괜히 수학교사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있지 않은 말을 너무 많이 치장했다.
- 그 잘못을 다 해도 결론에서 어떻게 이렇게 교묘하게 돌아왔는가가 궁금하다. 과정이 어찌 되었든 결론 하나는 화끈하다. 그런데 결론은 너무 많이 들어오던 과제이다. 하지만 자살사이트에서 이런 결론까지 나오는 것은 훌륭하다.
- ‘진리추구의 방법’이라는 큰 주제를 쓰면서 비슷한 말을 너무나 많이 섞어서 쓰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는 의문을 가지라는 말, 섣불리 단정 짓지 말라는 말, 양면성을 이해하라는 말, 경계 짓지 말라는 말, 문제의식을 가지라는 말, 개방적으로 생각하라, 한 면만 보지 말라는 말, 총체성을 가지라는 말 등을 마구 섞어 쓰고 있다.
- 세 번째 문단에서 뫼비우스 띠의 양면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모든 것이 한쪽 경우만을 가질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양면성에 대한 설명을 끼워 맞춘 것이다.
- 그런데 이 글은 적어도 ‘진리추구’라는 일관된 주제를 향해서 흐르고 있다는 것이 훌륭한 점이다. 하고 싶은 말은 ‘진리추구’라는 큰 틀에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엄밀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중간에 섞어 쓰게 되는 것이다.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면서 비슷한 이야기들을 많이 쓰는 것이 문제이다. 글이 너무 추상적으로 흐른다.
(2) 어떻게 고쳐쓸 것인가?
- 우리는 굴뚝 청소와 뫼비우스를 분리하여 이야기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가) 제시문 내용이 하나라는 의미이다.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므로 세심하고 정교하게 문제가 나온다고 이야기했으므로 일관된 맥락으로 해석해주어야 한다고 본다. 뫼비우스의 띠와 굴뚝청소를 모아서 하나를 연결해서 이야기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
- 그렇게 보이려고는 노력했으나, 잘 안되었다. 잘 연결해보자.
- 이 글을 선택한 이유는 1)두 가지 내용을 하나로 연관시키기 2)비슷한 내용 섞어쓰지 않기 3)추상적 제시문을 구체적 내용에 적용해보기를 하기 위해서.
4. 역사적 존재로서의 진실한 삶
(1) 문제가 있는 점에 대해 이야기하기
- 이 글이 중상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이라는 말을 쓰면 왜 안 되는가?
- 이 글을 무척 좋아한다. 글이 아주 명료하고, 학생들이 쓸 수 있는 글 중에는 최상이라고 본다. 앞에 것을 보았을 때 이렇게 쓸 수 있는 것은 재수생이라고 생각한다. 말을 꼬지 않고 정확하게 표현한다. 마지막 두 문단만 빼면 무척 훌륭하다. 첫 문단 세 번째 줄에 마음속으로는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비굴하다고 이야기했는데 여기에서 모순점을 잘못 찾은 것 같다. 그리고 복권 이야기는 쓰지 않았어야 한다.
- ‘복권’ 이야기는 정말로 연관성이 없다. 갑자기 왜 등장했는지 알 수 없다.
- 아Q와 같은 사람들로 인해서 나치즘이 합법적이 된다는 말은 근거가 없다. 그냥 읽는 것만 해도 되는데 일일이 추정을 해야 하므로 무척 힘이 든다. 근거를 제대로 써 주어야 한다. 세 번째 단락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등등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글이 재미가 없다.
- 이 글을 쓴 사람이 혁명이라는 단어에서 심하게 코드가 꽂혀 있어서 글 전체가 자신이 갖고 있는 배경지식과 자신의 의견을 반영하고 있어서 틀은 잘 맞추고 있으나, 하고자 하는 말은 자신이 원하는 말, 즉 ‘혁명’이다. 나치즘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흐름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나름대로 이해를 해보자고 읽어보면 이해할 수는 있다. 무비판적인 사회흐름을 타고 누군가에게 이용을 당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처음에 아Q의 행동에는 모순점이 많다고 출발한 것은 중구난방이라고 본다. 뛰어나다고 보기보다는 문제에서 요구하는 대로 잘 해주고 있다. 문제는 주인공의 사고와 행동에서 드러나는 모순을 기술하라고 했는데, 모순점을 찾다가 다시 복권 이야기를 해서 이상하게 되었고, 아Q의 행동에 대해 사회제도의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떠넘기는 것이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진실한 삶도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못하고 있고, 그 뒤에 이야기하는 바 복지제도에 대한 것은 문제이다.
- 첫 번째 문단에서는 아Q의 모순점을 기술한다. 두 번째에서는 그가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서술한다. 그리고 세 번째 문단에서도 역사적 존재로서의 진실한 삶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뒤에 나온 ‘사회제도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이 글의 큰 비약이다.
- 이 사람이 찾은 모순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아니다. 모순은 매우 정확하게 찾은 것이다. 이 사람이 찾은 모순은 우리가 생각하는 모순보다 더 높은 것이다.
-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글을 서술하다보니 이상한 글들이 마구 들어와 있고 그래서 결국은 논제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부분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글을 서술한 것이다.
✤ 2004년 12월 17일 수업하기
□ 토론하기 : 능력 없는 자의 인권 (사회 : 윤경)
1. 제시문에 대해 정리하고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가) 소외를 느끼고 있다. 존재로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고객 하나로 인정되는 것. 그것이 소외의 양상이다. 인간이 목적으로 대우받지 않고 상품을 파는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 예전에는 고객과의 관계가 작은 집단이고 더 인간적인 관계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백화점에서는 고객과 점원의 관계가 아무런 관계를 갖지 못한다. 인간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단지 돈으로만 보게 되는 것도 넓어진 인간관계의 반영인 것 같다. 텔레비전에서 정규방송에서 차지하는 방송이 홈쇼핑이다. 쇼호스트들이 상품을 파는데 상품의 질을 떠나서 그냥 방송을 하는 것이다. 실제 본인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 광고가 넘치고 있다. 소비자들이 원하시면 필요하시면 사거나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기를 강요하고 있다. 안 살 거면 사지 않아도 되지만 그렇다면 저 사람들만큼의 이미지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인식시켜서 상품의 판매를 강요하기도 한다. 짧은 시간에 소비자들에게 상품을 설명하고 사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판매하고 그것을 사도록 한다. 광고는 이미지를 굳힌다. 삼성에서는 이미지화하되 정을 강조하고 인간미를 부각시킴을 통해서 본질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중으로 왜곡되는 현상을 만든다.
- 몇 십 년 전부터 고객의 위상이 변했다고 하는데 왜 그랬을까? 고객이 너무 수가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 슈퍼마켓에서 자기 동네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던 것에서 이제는 온 나라와 온 세계를 겨냥하므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포괄하는 이미지를 만든다.
- 고객의 위상이 높아진 것도 있다고 본다. 고객이 더 대접받는 상황도 있다. 이것은 한쪽 면만을 쓰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고객을 수단화하는 것이지 진정한 왕으로서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상행위 자체가 물건을 파는 것이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상행위는 상행위 자체로 끝난다. 그러나 지금은 서비스업이다. 그리고 구매자의 범위와 연령과 능력이 바뀌었으므로 요새는 친절하게 대해준다. 내가 느끼는 바에 의하면 오히려 더 고객으로서 대접받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상행위는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다.
- 그런데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결코 인간적인 것은 아니다. 위상이라는 것이 자기 마음 속에서 생각했을 때 내가 친절하게 서비스해주고 싶은 사람으로서 친절하게 하는 것과 월급을 받기 위해서 친절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인간적인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겉으로 존대하는 말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손님 자체를 생각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위상이 약화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물건을 굳이 팔라고 하지 않아도 팔렸다. 그런데 지금은 생산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에 팔려고 노력한다. 돈을 벌기 위한 방편으로 서비스 노동을 덧붙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덤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을 판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고 그 사람 개개인을 잘 아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할인마트는 샘플을 붙여놓는 것처럼 덤을 주기는 하지만 고객을 위한다기보다는 유통기한 안에 팔려고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고객을 위한 서비스라는 것과는 다르다. 단골이라고 고기를 두 개 끼워주는 것도 아니다.
- 과거에는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하지만 사람들은 고객일 뿐이지 아는 사람이 아니다. 백화점은 고객을 놓치려고 하지만 추상적인 고객일 뿐이지 구체적인 고객으로서 대접을 받지는 않는다. 위상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대상을 의미한다.
- 지금은 소비자가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생산자가 팔기 위해서는 소비자의 권한이 매우 커졌기 때문이고 소비자의 권한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다루는 위상은 높아졌다 낮아졌다는 측면이 아니라, 하나의 숫자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지 존재 자체로 취급받지 않는 위상이 된다는 의미이다.
- 한양대 수시는 적성검사를 한다고 한다. 한양대에서는 수시를 선발할 때 대학에서 올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선택과 판단이기보다는, 수시가 갖는 본연의 특성이 아니라, 8만원을 들고 오는 수시 원서의 수로 계산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학생의 입학 기회의 또 다른 선택이 아닌 돈을 버는 기회로 보는 것. 한국에서의 적응 여부를 알기 위해 친구들 전화번호와 이름을 물어보는 것이 있었음. 그것을 위해서 친구들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는 것.
-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인식. 특정한 ‘기호’로 인식되는 것. 친구들을 볼 때 메이커로 인식하는 것, 그리고 어느 대학 어느 과를 간 누구로 인식하게 되는 것.
- 광고나 백화점과 고객으로 생각하면 사람이 많아지고 대형화되었기 때문에 개개인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대화할 수 없는 상대가 되었다는 점이 있다. 대중매체든 인터넷이든 자신과 상관없거나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내 상품을 알릴 필요가 생겼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나) 사업이 발달하면서 인간이 기계에 의존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에 익숙해지면서 아날로그적인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 사람들은 노래가 없으면 춤추기가 어려워지기도 하다. 워드 작업이 손으로 하는 것보다 훨씬 편하다. 기계화에 물들도 그것이 편하다고 보고, 당연시하다보니 그 상태가 지속되거나 더 나아지려고 하는 것.
- 편리하게 되다보니 글을 쓰는 것이 어려워진다. 아이들이 글씨를 못 쓰고 맞춤법도 틀린다고 한다. 기계화로 인해서 인간의 능력이 퇴화되고 있다. 오히려 발달할 기회가 줄어들게 된 것 같다.
- 옛날에는 세탁기가 없었는데 이제는 일상화되고 있다. 이것은 좋고 고마운 일이다. 빨래가 설거지에서 벗어날 기회가 생겼으므로. 그런데 그렇게 벗어났다면 예술적 가치를 위해 그 시간을 쓸 것 같은데 그런 기계가 우리의 힘을 덜어주었더라도 나아지는 것이 없다. 과거보다 시간이 더 많이 남지 않는다.
- 인간이 얽매여 있다. 편하게 쉬려고 할 때 엄마가 청소기를 밀라고 하거나 세제를 뿌리라거나 하게 된다.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귀찮게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지고 그래서 더 여유를 찾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된다. 청소기보다 빗자루가 더 빠르기도 한다. 청소기가 없다면 청소를 자주 하지 않을 것이다.
- 핸드폰 없을 때에도 잘 살았는데 핸드폰이 생김으로 인해서 결국 서로 연락을 하게 된다. 기계는 사람들이 의존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특성이 있는가? ‘편리’는 인간을 취하게 만드는 마약과 같은 것인가? 여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없이 살아보면 처음에는 불편하지만 나중에는 괜찮다. 그것을 계속 보고 있는 것은 습관이 된다. 핸드폰 없으면 주위 사람들이 불편하다. 그런데 나만 좋지 남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 물건 자체에 익숙해진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통해서 하는 행동이 습관화되는 것 같다. 한 달에 한번 하는 것이 익숙해지면 반드시 그렇게 하게 된다. 핸드폰이 없어도 잘 산다고 하지만 결국 핸드폰을 사게 된다. 내가 생각을 안 해도 어쩔 수 없이 수요가 늘어나게 된다. 가장 문제는 에어컨이다. 한번 에어컨을 틀기 시작하면 도저히 여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 미래에는 훨씬 더 기계화가 될 것이다. 로봇이 일을 다 하고 사람들은 우아하게 놀게 되는 그림이 그려진다. 하지만 기계화가 진전된다고 과연 인간이 그렇게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사람들은 편리한 기계를 쓰고 있으면 편리해보이고 다른 이들과의 관계가 있으므로, 그리고 사회에서 많이 쓰고 소외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계속 쓰게 된다.
- 인간은 소비를 해야 살 수 있다. 기계화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맞춰서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돌이키기는 어렵다. 그런데 왜 김치냉장고가 생겼을까? 예전에는 그것이 없어도 잘 먹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김치냉장고가 생기게 되었다. 필요가 수요를 만들지 않고 수요가 필요를 만들기도 한다. 또는 사람이 그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 의해서 평가를 받게 되기도 한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도 일단 이용을 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삶이 거기에 맞춰지는 경우가 많다.
- 기계화과정에 처한 상황이 왜 그런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김을 굽는 판이 있는데 요즘에는 그런 것이 별로 없다. 손수 하려고 해도 김을 구운 것을 판다. 소비가 주체가 되는 생활에서 우리를 기계화되도록 만든다.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현저히 줄어든다. 일반 아파트 단지에는 묻을 곳이 없어서 김치냉장고가 생긴다. 인간 스스로가 하게끔 하는 것이 점점 줄어든다.
- 일단 돈이 되는 쪽으로 생각하고 만든다. 김 굽는 것 한번 사면 사람이 약간 손이 갈 뿐 싸게 먹을 수 있으나, 일단 김을 구워서 팔면 훨씬 편하니까 김 굽는 것을 만들지 못하도록 할 수도 있다. 김치냉장고도 주부의 심리를 파악해서 만든 것이다. 김치냉장고의 이야기에서 의문이 있었던 것은 엄마가 되어도 안 그럴 것 같다고 말했는데 그렇지 않을 것이다. 김장을 하면 자유자재로 둘 수 있다. 그런데 그냥 냉장고에 넣으면 쉽게 변해서 귀찮다. 사람들은 약간 편한 것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편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사람들의 속성이다. 지금 아파트에서는 불가능하다.
- 생활양식의 변화가 생기고 있다. 매일 시장을 가고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주일 단위로 만들고 생활하는 것은 여성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생활양식의 변화가 기계문명의 변화를 만들기도 하고, 역으로 기계문명의 변화가 생활양식의 변화를 만들기도 한다.
- 기계화가 된 것이 기계를 소유하고 있는 것 자체가 부를 상징한다. 김치냉장고나 드럼세탁기, 그리고 지펠 냉장고가 주부들의 소망이다. 친구들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심리가 사람들을 그렇게 몰아간다. 김치를 매일 사먹는데도 김치냉장고를 샀다. 있는 것의 개선이 아니라 약간의 편리를 중심으로 더 많은 것을 사게 만든다.
- 사람들의 삶이 기계의 의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능력이 점차로 퇴화되고 기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 상업적 이유, 편리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파악한다. 또 필요하지 않은 제품이라도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독특함이 있다. 또한 생활양식이 그에 맞춰서 변화하는 것이다.
(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소외이다. 우리는 아파트에 산다. 그런데 옆집이나 같은 동 사는 사람들이 옆집이 아니라 남일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름을 모르고 대강 형식적으로 안다. 친한 이웃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런데 요즘은 아파트 스타일이 복도형이 아니라 계단식이라서 두 집밖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사도 잦다. 그래서 친해지기 어려운 상황이다. 채팅을 해도 아이디를 쓰는데 옛날 동호회에서 닉네임은 알지만 이름은 잘 모른다.
- 결국 인간소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빠르게, 빠르게’를 요구한다. 경쟁화되어서 빠르지 않으면 남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자기와 자기 가족을 위해서만 살 수밖에 없다. 이 지문에서 이 사람이 죽을 것을 예상했으면서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이유는 죽으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바쁘더라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보다 빠른 것을 추구하는 사회가 인간소외 현상을 가속화시켰다고 본다.
- 한 사람은 죽을지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은 죽을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 귀찮은 일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 생긴 문제이다. 우리도 연예인들을 씹는 것을 좋아해도 내 머리 아픈 일은 잘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사람에 대한 책임감이 생기는 것이 귀찮아서 돌아선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을 피하는 것이다.
- 이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거나 어찌해야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잘 모를 수도 있다.
- 숙박계에는 거짓 나이와 거짓 이름을 쓴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런데 우리가 싸이를 하는 것을 보면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또 다른 재미를 갖고 있다. 싸이가 왜 재미있을까? 선택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싸이월드의 매력은 나를 공개한다기보다는 내가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홈피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그 사람들을 알 수 있는 것. 싸이월드가 이렇게 유행하는 것은 정신병적 요소이다. 심지어는 자신의 일기까지 보여준다. 랜덤까지 해서 남의 것을 훔쳐보는데 그것을 관음증이라고 한다. 그런데 싸이월드는 선택적 노출이다. 온전한 자신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것은 내 사생활이 아니라 실제로 만들어진 나이다. 싸이는 조작된 것이다. 실제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남들 것을 볼 때에는 마치 이 사람이 그 사람일 것 같은 착각을 하기도 한다. 물론 그 사람을 안다면 조작된 것임을 알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조작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냥 믿게 된다.
- 어렸을 때 말 못할 비밀이 생기면 일기장에 적고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기호화하기도 한다. 그런데 몰랐으면 하면서도 누군가 그것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공존한다. 그런데 왜 남이 아는 것을 좋아할까? 말할 수 없지만 그런 마음을 살짝 드러내는 방식임.
- 이런 현상이 어떤 것인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정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현상이 도대체 어떤 것일까? 몇 십 년 전의 친구 관계와 지금의 친구 관계가 양상이 다르다. 어머니 때의 친구들을 보면 영혼을 나눈다는 것인데 지금의 친구관계는 그렇게 가지는 않는다. 여기에서는 같이 여관방에 가서 자지만 이름도 모른다.
- 친구 집에 가서 외박하려면 그 친구를 잘 알아야 한다. 현실과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친구관계가 아니라 처음 만난 사람들이다. 구체적으로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 않는다. 친구가 될 수도 있었는데 원치 않고 방도 따로 들어간다.
- 우리 사회가 이렇다고 하는데 그냥 내가 그렇다고 하면 안 될까? 누구나 지금은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상처받기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귀찮다. 3학년이 되니까 생일을 챙겨야 하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찾아가서 축하해줄만한 친구들은 몇 명이 되지 않지만 생일이 되면 아이들이 돌아다니면서 돈을 걷어 선물을 사준다. 그런 관계가 부담스러워서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자기가 맺고 싶어서 맺는 관계가 아닐 때는 그렇다.
- 사람들이 총 인생을 따져도 관계 맺을 사람들이 많지 않았으나 이제는 관계의 양이 많아졌다. 관계를 통해 내가 위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빼앗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수학원에 들어갔을 때 아무도 사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누군가를 만나면 얘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고,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고, 서로 챙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다 낭비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단절을 시킨 것이다. 내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 인간이 매우 힘든 극한의 상태에 놓여있을 때 인간은 누구와 관계 맺기가 버거워진다. 이 사람이 설령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사람과 관계를 맺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힘들었을 것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것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 관계를 맺고 소통한다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것을 갈망한다. 사람이 절대고독의 상황에서 관계를 맺지 못하면 영혼이 고독해진다. 감상적인 외로움이 아니다. 인간 닭장 같은 공간에서 몇 천 명의 아이들과 같이 있다가 고시원에 가면 고독의 시간이 온다. 방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가라앉고 책을 보는 행위 자체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누구나 이런 힘든 상황이 되는데, 누군가가 그것을 함께 해준다면 힘을 낼 수 있으나 아무도 그것을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나를 신경 써주지 않는 공간에 있으면 공간을 부정하게 되고, 같이 있는 사람들을 부정하게 된다. 그 관계 안에서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는 경우가 된다.
-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너무나 버거워서 그 책임을 지기 어렵다면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다.
- 이런 관계의 형성은 개인적 자아는 형성되지 않았으면서도 집단의 정체성은 해체된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불안정한 문제이기도 하다는 생각. 이것이 사람들이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2. (라)는 해결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 어느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나’를 중심으로 하는 다른 인간들과의 적극적인 관계 맺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가)에서 백화점 운영하는 사람들이 고객을 기호화해서 취급하게 되었을 때 자신도 그렇게 취급될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인간이 기계에 얽매이는 것을 그것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생각한다면 이런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부족함을 기계에 의탁하여 푸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간관계로 풀고자 한다면 해결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모두가 공동체이므로 다른 이의 피해는 결국 나에게도 피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 그런데 거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인식을 바꾸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와 관계된 것은 다른 이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지만, 결국 이것은 현실에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인식을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바꿀 수 있다는 것인가?
- 이 글이 불교에서의 ‘연기설’과 비슷하다.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가 우는 것처럼 관계없어 보이지만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로 되어 있고, 모두가 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깨닫기는 어렵다.
- 굳이 나와 연계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죽음이나 다친 것이 나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있다.
- 그런데 제시문과 같은 것은 과거의 사고일 수 있다.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의 인간이라는 관념은 이미 무너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런 관념은 무너진 상황이고, 그런 공동체의 부활이 아니라, 개개인을 온전하게 세우고 그 속에서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것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2004년 12월 20일 수업하기
□ 합평하기 두 번째 (사회 : 종헌)
1. 희생양
- 논제에서 쉼표 뒤에 ‘극복방안’을 논술하라는 것인데, 사례가 극복방안과 연결되는 사례여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위 내용과 관련된 사례라는 것인가? 그것은 제시문의 내용과 연결되는 사례라는 뜻이다. 다만 극복방안에 대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임.
- 처음에 문제점을 각각 밝히고 공통적인 원인을 찾는 것은 잘 되었다. 그런데 서론에서 문제를 밝힌 것은 좋다. 그렇지만 결론의 극복방안은 매우 약하다. ‘노력이 필요하다’거나 ‘사랑이 주가 되는 사회’라는 말은 추상적이다.
-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한다’는 주제여서 너무 추상적이다 보니, 극복방안에서도 구체적인 대안을 만들기에는 어려울 수 있다. 당연히 추상적인 내용이 나올 수밖에 없다. 독해가 구체적이었다면 구체적인 방안이 나왔을 것이다.
- 첫 번째 문단에서 현대사회에서 나타나는 양상을 ‘외국인 노동자’ 예시를 들었는데 이것이 올바른지에 대해 판단이 잘 안 된다. 이 지문을 해석했을 때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희생과 자발적 희생이 다르다는 것이었는데, 이 사례는 폭력적 희생에 가깝지 않은가? 대부분의 희생은 폭력적 희생인데, 여기에서는 특히 ‘제도적으로 포장된’ 희생에 대한 것이다.
- 폭력적 희생인지 자발적 희생인지에 대한 정의보다는 ‘아닌 척하면서 그렇게 한다’는 것으로 알아들으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유도하는 것이라는 개념은 알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거기에서 ‘산업연수생 제도’가 그것을 유도하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적인 폭력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인지에 대해 검토를 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 산업연수생 제도의 정의는 서론에 있는데 여기에서는 불법체류 노동자의 현실태를 이야기하는 과정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읽힌다. 그런데 이것이 (가) (나)와 같은 형태라고 생각해서 찾았을 것인데, 여기에서는 이 사례가 적합한지에 대해 알기 어렵다. 서론에서는 ‘수단으로 느끼는 인식에 대한 반성’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도 제시문에 나타난 문제점과 유사한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 썼을 것.
- 산업연수생 제도는 배제에 의한 폭력임. 그러므로 제시문 해석한 내용과는 다르다.
- 여기에서는 ‘희생’보다는 희생을 시킨 행위자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래서 사례에서 혼동이 있었던 것 같다. 비판의 대상들이라고 하면 행위자만이 아니라 희생자도 어떤 태도를 취했을 때 문제점이 있을 것 같다. 우리가 그것을 지목하지 않고 있다. 행위자에 대한 태도로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 여기에서 예시를 든 것이 (가)와 (나)를 합해서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했다는 것 때문에 이런 예시를 찾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적합한 예시라고 본다. 그런데 이것을 제도에 의한 희생으로 국한하면 (가)와만 연관되고 (나)와는 잘 연관되지 않는다.
-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여기는 인식으로 반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쓴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글 전체와 일맥상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존엄성을 보장할 때 우리의 정체성을 고양시킨다는 말은 말이 안 된다. 존엄성을 보장한다고 해서 정체성이 고양된다는 것은 논리적 비약과 오해가 있는 말이다. 이 글 쓴 사람은 당연하다고 전제하였으나 우리가 볼 때에는 그것이 읽히지 않는다.
- 입시설명회 강의를 들었는데 논술에서 일관성을 계속 강조한다. 이 글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추상적이지만 벗어나는 문단이 없다는 점에서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한 셈이다.
- 이 글에서 결론은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한 폐단을 막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했고, 자발적으로 희생시켰다는 점도 이야기한다. 그런 점에서는 일관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또 그 위에 여자를 자신의 편의를 위한 도구로 여겼다고 말하고 토사구팽도 비슷한 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일관성은 있다.
- 논술을 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가 나왔을 때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포장된 비자발적 희생’이라고 쓰지 않고, 이런 방식으로 쓸 것 같다. 문제가 원하는 것을 드러냈고, 요구사항도 잘 썼다. 그리고 나름대로는 독해도 잘 했다. 그러나 주제문이 추상적인 것이 문제이다.
2. 독아론
- 앞에 첫 번째 문단이 제시문 (가)와 (나)를 요약한 것으로 보인다. 글에 나와 있는 문장을 그대로 따오기도 했고, 글이 너무 길다. 독해를 잘 했다는 내용을 보여주기 위해서 글을 쓴 것이라고 보이는데, 사례를 잘 들어서 설명을 해주어도 될 것이다. 이 글이 만약 요약이 아니었다고 하면, 그래서 자신이 잘 이해한 내용을 중심으로 썼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 이 글에서는 (가)의 내용을 쓰고, 그 사례를 들고, (나)를 비판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요구사항을 그대로 충실하게 지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서 요약을 하고 구체적인 사례로 넘어간 것이 그리 긴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런 것이 있어야 글을 이해하기 쉽다고 본다. 이 상황에서는 제시문 요약이 더 효과적이다.
- 첫 번째 문단일 뿐이지, 꼭 서론을 쓴 것은 아니다. 길게 느껴진 것은 이해를 완벽하게 한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가 해석을 제대로 했다기 보다는 (가)를 요약한 방식으로 글을 서술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중언부언, 중복된 내용 서술하지 않기.
- 여기에서 FTA에 대한 것은 아주 적합한 사례라고 할 수 있으나, 자율학습은 뭔가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 아들의 경우는 아버지에 대해 반항을 하거나 자기주장을 관철한다면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아들은 ‘독아론’으로 비판할 수는 없다고 본다.
- 타자와의 대화가 필요하려면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매우 즉자적인 해결방안이다. 규칙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과의 의사소통이 대화라고 한다면 그리고 내 전제를 남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뒤집는 정도의 해결책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에서 해결책을 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므로 타자성을 전제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점만 이야기하면 된다. 그렇지만 한 이야기의 반복이므로 그냥 지우면 된다고 본다.
- 자율학습의 내용은 빼는 것이 좋다고 본다. 선생님이나 부모님들이 공부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태도와 같다. 예시를 구체적으로 들으라고 하니까 여러 개를 들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 같은데, 타율학습과 선생님들의 강요가 서로 잘 맞지 않는다. 그래서 예시는 없는 것이 깔끔하다. 차라리 FTA를 더 충실하게 설명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다. 뒤의 것을 쓰고자 한다면 학생이 공부를 하려고 할 때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더 잘 된다’는 전제를 다 갖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독아론이 될 것이다.
- 이 글에서 잘 썼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제시문의 서술자인 나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를 한 부분이다. 대화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남편이 자신과 공통규칙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점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한 것이므로 잘 썼다. 하지만 뒤에 보면 ‘해결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있어서 이것을 문제로 삼고 있다는 것으로 보인다.
- 제시문 (가)의 독해 : 비대칭적인 관계라는 말은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철학은 내성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철학은 내성에서 시작되는데 상대방의 대화는 타자와 하는 것이므로 핵심은 ‘타자성’을 전제하는 것이라고 본다. 위에 보면 외국인이나 아이와 정신병자와의 대화는 특이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대화법이다. 독아론이라고 하는 것은 공통된 전제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 그렇다면 첫 번째 단락은 과연 독해가 잘 된 것일까? 이것이 잘 해석이 되었는지 아니었는지가 나오는 이유는 아직 대답을 잘 못한다. 이 사람도 이것을 확실하게 이해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느낌이 오는 것이다. 대충 이해한 것이다. 온전한 소화가 안 되어서 요약을 하게 된 것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감은 잡은 것이다.
- 그런데 독해의 실수로 ‘모놀로그의 개념을 자기 혼자만의 생각’으로 독해했다. 그래서 이것을 문제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래서 아내의 태도를 그렇게 비판했다. 이 점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3. 환경문제
- 서론에서 환경문제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열거하는데, 분량도 너무 많다.
- 얻을 수 있는 시사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되지 꼭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은 마지막에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분명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점이 이 글에서 좋은 부분이다.
- 비교적 잘 된 점이 (가)ㆍ(나)ㆍ(다)를 연결하기 어려운데 여기에서는 무척 연결을 잘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좋다고 본다. 그것을 ‘절제’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해서 연결한다.
- 세 번째 단락 마지막 부분이 ‘환경에 대한 무비판적 태도가 환경문제의 주요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세 번째 단락의 첫 번째 문제는 ‘환경자원에 대한 무절제는 엔트로피라는 현상을 일으킨다’는 문장이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환을 하려고 해도 연결이 부자연스럽다. 여기에서는 유기적 연관 없이 다른 이야기로 휙휙 넘어가버린다. 앞에서 서술한 것을 요약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요약이 아니다. 무비판적 태도가 무엇인지가 앞에서 설명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 두 번째 문단이 제시문 (가)에 대한 견해이고, 세 번째 문단이 제시문 (나)에 대한 견해라고 생각했으나 세 번째는 (나)에 대한 설명이 작위적이다. 여기에서는 (나)에 대해 엔트로피의 증가현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은 의미가 없다. 여기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되고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연결과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가)와 연결시키지 않은 채 엔트로피 자체에 대해서만 다루면 안 된다. (가)와 (나)가 따로 놀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나름대로 연결시키고 있다.
- (가)에서 끌어낸 것이 ‘환경자원에 대한 무절제’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연결을 시키다보니 무리하게 ‘절제’라는 주제를 뽑아낸 것 같다. 그것이 오히려 제시문의 핵심을 비껴가게 되어 버렸다. 부수적인 것으로 연결을 시킨 것이다. 특히 ‘환경자원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부분만 뽑아서 넣고, 전반적인 것을 서술하지 못했다. ‘경제적’이라는 말은 개인적인 것, 단기적인 것을 중시한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경자원에 대한 무절제’를 (가)의 핵심으로 정리한 것은 잘못이다.
- 연결한 것이 ‘환경에 대한 무비판적 태도’라고 정리한 것은 맞는가? 이것은 비약이다. (가)에서는 환경에 대한 절제를 이야기하고, (나)에서는 엔트로피를 이야기하는데 이것이 환경에 대한 무비판적 태도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 그리고 ‘무비판적 태도’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 환경문제를 환경오염 문제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핵심은 환경오염의 문제이기보다는 환경문제이고, 그것은 아마도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할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읽어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이 글이 뽑혔을 때 이유가 있다면 마지막 부분이 정확하고 인상적이어서 그런 것 같다. 그리고 나름대로 연결을 하려고 하는 노력이 있다.
- 결론에서 단순히 ‘절제’를 이야기하게 되면 시사점이 될 수 없다. 그 절제가 어떻게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그것의 구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중요함.
- 엔트로피 현상을 자기 위주로 해석을 하고 있다. 엔트로피 증가 현상이 환경문제의 하나의 일환인 듯한 느낌을 준다. 엔트로피는 문제가 없으나 그것이 너무 빠르게 증가하면 문제가 된다. 그것은 물리법칙을 의미하는 것일 뿐, 그 자체가 환경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엔트로피 증가 현상이 환경문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 여기에서는 환경문제의 구체적 성격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함. 제시문을 연결시켜보면 그것은 ‘환경오염’ 문제가 아니라, ‘자원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환경오염’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문제가 된다. 만약 ‘환경문제’로 쓰면 어떤 차이가 생길까? 자원의 부족은 환경오염이 아닌 환경문제이다.
- 세 번째 문단의 예시는 무엇이 문제인가? “환경자원의 사용에 대한 무절제는 환경오염을 일으킨다는 것”으로 주장한다. 그런데 엔트로피는 환경자원에 대한 무절제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 그로 인한 ‘오염’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둘 다를 건드리고 있는 것이므로 마지막에 그것이 상호 악순환이라는 점을 설명하면 나름대로 좋을 것.
- 경제적이라는 말은 절제하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절제를 하지 않으면 과도하게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고 그것이 결국 환경오염을 일으킨다.
- (다)에서 뽑아낸 것은 ‘절제’이다. 앞에서의 논리가 그러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나올 것이다. 그런데 (다)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과연 ‘절제’인가? 값은 4센트짜리로 경제적으로는 같지만 이것은 뭔가 낭비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경제적 비용으로 보면 같다고 하더라도 다른 측면으로 보면 이것은 ‘낭비’라고 말하는 것이다. 엔트로피와 연결해보면 그렇다.
- 엔트로피와 절제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지 경제적 측면이 아니라, 엔트로피 측면에서도 절제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두 개는 결국 우리가 먹을 아이스크림을 빨리 없앤다는 것은 엔트로피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마지막 문장은 멋있게 끝내보려고 하는 것 같지만 ‘2센트 아이스크림 콘 두 개는 경제학적 가치로는 동일할지 몰라도’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라고 본다.
- 제시문 (다)의 결론은 경제학적 관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며, 그것은 때로는 상징적 낭비가 되거나 남에게 볼썽사나운 모습을 갖게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경제학적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임. 경제학으로 생각하지 말고, 다른 이들의 이목이나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같은 것도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임.
- 글을 썼을 때 더 높은 가치를 생각하자고 이야기했는데,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다른 이들에 대한 고려, 엔트로피 법칙 등에 대한 고려가 필요. 전체에 대한 책임을 의미하는 것임. 제시문 (다)에서 생태학적 관점을 뽑아낼 수 있을까? 그것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므로 쉽게 생태학적 관점을 추려내기는 어렵다. 공동체적 의식 또는 공존의 관점을 생각해볼 수는 있다. 즉 먹을 수 없는 타인에 대한 고려 없이 혼자서 두 개 먹는 것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으므로. ‘공존’의 문제의식을 제대로 풀어서 설명해줄 수 있다면 가능.
- ‘절제’와 쓸 데 없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을 동일하게 볼 수 있는가? 자원을 한쪽에서 이용을 많이 하게 되면 다른 쪽이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므로 총량이 정해져있는 상황에서 효율적 분배를 위한 조절ㆍ통제를 이야기할 수도 있다. 어른들이 못 먹게 한 것 등.
4. 지식과 문화의 독점
- 글쓴이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음. “문화의 공존이었다가 그 관계가 바뀌었다. 힘을 앞세운 문화와 지식의 소유화, 게다가 지금은 소유의 양극화까지 벌어지고 있다. 강한 자만 소유한다. 그런데 문명은 공동체에 바탕하는 것이므로 적극적으로 이것을 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 제시문 (나)를 기술을 가진 북반부와 자원을 가진 남반부가 서로 소유를 주장한다는 내용은 다뤄져 있지 않고 북반구가 문제라는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제시문에서는 힘으로 빼앗는 것에 대한 것을 비판하고 있음.
- 제시문 (가)를 분석할 때에도 힘의 논리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힘을 앞세운 소유를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님. 힘으로 뺐었다는 점에 너무 초점을 맞추고 있음. 힘만 있다면 문화와 지식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음. 이것이 제시문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기 때문에 맞을 수 있다고 봄.
- 마지막 문단에서 ‘획일성’을 띠게 되었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해결책도 힘의 논리를 경계하거나 아집을 되돌아보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라는 추상적인 말로 마무리를 한다.
- 오늘날의 사례로 들은 것이 과연 적합한가?
- 논제에서는 ‘사회변화에 따라’ 특정한 개인과 집단에 귀속되는 것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문명화 지식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데, 제시문에서는 최근 힘을 앞세운 것을 비판하고 있다고 필자의 주장을 뽑았다. 그런데 제시문은 힘을 앞세운 것에 대한 비판이기보다는 ‘비합법적인 수단’에 의존하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문화와 지식의 소유’가 정치적 상황에 의해 왔다갔다 하는 현상을 추려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힘으로 빼앗아갔으나 내놓지 않았으므로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비합법적인 것에 대해서
- 과거에는 개인에게 소유된 것이 아니었다. 문화와 지식의 소유라는 것이 정치적 상황이나 기술적 측면 등 ‘문화와 지식 외적 상황에 의해서’ 소유가 바뀌는 현상이 있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미 소유의 개념이 더 이상 과거와 다르게 생겨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외적 상황이나 힘의 논리에 의해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한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계속 외적 상황에 따른 소유의 변화가 생길 수 있는데 현대사회에서 외적 상황을 다양하게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 논제에서 말하는 ‘사회의 변화’가 어느 시점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쓰는 사람 각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 (나) 제시문은 단지 분쟁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북반구가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 자신의 기술력을 갖고 남반구의 생물공유지를 자신의 것으로 하려고 한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
- “힘의 논리에 의한 소유”라는 것이 왜 문제이고 나쁜지에 대해서 설명을 하지 않는다면 맨 마지막 문단에서 ‘힘의 논리에 의한 소유’를 빼앗자고 이야기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 글에서 ‘힘의 논리’로 접근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이 사람은 한번을 더 넘어가버렸다. “소유가 없었다가 힘의 논리에 의해 소유가 생겼고”, 그것이 매우 문제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힘의 논리를 없애고 소유를 다시 없애도록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공유시스템이 ‘힘의 논리’가 된 이유가 현재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현재의 힘의 논리’는 어떤 것인지를 밝혀야 한다. 그렇다면 ‘그 힘의 논리’에 대한 비판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지 힘의 논리 일반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오늘의 현실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라고 물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오늘의 현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 문화 자체가 다양하게 이루어져왔고, 지식과 문화가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 귀속되는 것 자체가 근대의 문제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힘의 논리’는 너무 오래된 문제이므로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의 귀속의 이유로 설명하기에는 어렵다. 힘의 논리는 언제나 존재했고, 계속 귀속현상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현재’에는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설명만 있으면 된다. ‘오늘날’의 문제로 일반화하지 못하고 있다.
- 공유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소유권을 분명하게 하자고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공유를 하고자 한다면 단지 ‘공유하자’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 공유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가)의 경우 일단 일본에게서 뺏어서 세계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생물공유지만 공유할 것이 아니라 기술까지도 공유해야 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 기술을 갖고 자원까지 복속시키면 평형을 지향할 수 없다. 그래서 개런티를 주는 방식으로 기술력을 양도하고 자원의 일부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여 서로에게 양보를 한다면 서로가 평형을 지향할 수 있다고 본다. ‘소유’가 어쩔 수 없다면 이제는 그 ‘소유’를 인정하는 방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리를 해주어야 한다.
- 제시문을 잘못 파악했다 하더라도 일관성이 있으면 된다. 설령 교수가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하더라도 상관이 없다. 문제를 내면 ‘이런 식으로 접근하라’는 구조가 있는 것인데, 그 접근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 ‘힘의 논리’를 잡아서 글의 흐름이 잘 읽힌다. 4대문명은 조금 주관적이다. 전에는 따로 있다가 청동기 시대 때 전체를 통합했으므로 그 때부터는 공존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읽힌다. ‘다양한 문화와 지식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왔다’는 말이 전제로 다 있기 때문에 이 내용을 또다시 쓰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
<글쓰기 어떻게 할까?>
- 반드시 주제문과 개요를 쓴다.
주제문은 논제와 제시문을 갖고 흐름을 만들어서 문장을 써야 하는 것이다.
<과제> 올해 가장 중요한 시사 세 가지와 그 이유 생각해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