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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것은 말기 로마군에 관심이 있으신 분에게는 유용한 자료일듯 하네요^^
양쪽 군대
로마군
후기 로마군에 대해서는 4세기 후반/5세기 초의 관료들과 군대 조직의 명단인 Notitia Dignitatum을 통해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아드리아노플 전투 이후이긴 하지만 이것은 AD 378년의 군사 조직에 대해서도 유용한 지침을 제공한다.
아드리아노플 전투 이전에 로마군은 중요한 조직상의 변화를 겪었다. 로마군은 더 이상 그들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공격군이 아니었다. 반면에 이들은 변방에 가해지는 침입을 처리하기에 적절하도록 재조직되었다. 4세기 중반에 군대는 종심 방어를 위해 두 가지 주요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고정된 방어진지 주둔병들은 지위가 낮아졌으며 제국 변방으로 배치되었다(limitanei-변경 방어군). 그리고 새로이 조직된 유연성 있는 부대인 기동 야전군(comitatenses)은 문제가 생긴 지방에 신속히 투입될 수 있는 예비군으로 활동했다.
변경 방어군은 변방 각지에 있는 방어거점에 의지하여 적군의 침입에 대해 즉각적인 방어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담당 지역을 방어하면서 침입에 장애물 역할을 했으며, 동시에 경비 임무와 내부 치안 유지도 담당했다. 제국 전역에 걸쳐 30개의 변경 방어군이 있었으며 변경 사령관(dux)의 지휘를 받았다. 이 부대들은 브리타니아의 색슨 족 접경에서부터 동방의 시리아까지 배치되었다. 도나우 강 방어선의 주요 부대는 발레리아 군, 판노니아 제 2군, 모에시아 제 1군, 다키아 리펜시스 군, 모에시아 제 2군, 스키타이 군이었다. 376년의 전쟁에서 도나우 강 연안의 모든 지휘관들이 고트족의 압력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고트족의 도강을 처리하는 문제에 가장 먼저 직면한 것은 모에시아 제 2 변경군 사령관이었다.
변경 방어군은 고정된 부대로서 같은 지역에 가족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거주했다. 병역은 세습적이었고, 많은 병사들이 부업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적군이 전방 방어선을 뚫고 들어올 경우, 변경 방어군은 위치를 사수하면서 지역 야전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 이 기동군은 일부는 옛 군단들에서 차출된 병사들로 구성되었고, 일부는 새로이 징집된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옛 군단들에서 파견된 병사들은 마케도니아 15군단처럼 그들의 옛 이름을 고수했다. 이오비아니 군단, 헤르쿨리아니 군단처럼 일부 새로 모병된 군단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창설되었다. 나머지 대부분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창설되었다.
Notitia Dignitatum은 제국의 서로 다른 부분에서 근무했던 같은 이름의 부대들을 세니오레스(seniores 시니어의 어원-역자)와 유니오레스(iuniores 주니어의 어원-역자)로 구분한다. 예를 들어 이오비아니 세니오레스는 서방에서 근무했고, 이오비아니 유니오레스는 동방에서 근무했다. 제국의 행정이 발렌티니아누스와 발렌스로 각각 나누어질 때, 서방에 속한 부대는 세니오레스라고 호칭되고, 동방에 속한 부대는 유니오레스라고 호칭된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부대들은 실제로 제국 반대편으로 이동하기보다는 옛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350년, 제국이 갈라지기 전에 이미 적어도 한 개의 유니오레스가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은 몇 년 뒤에 새로운 부대를 양성할 때에도 적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기동 야전군
로마의 야전군은 기본적으로 기동군이었기 때문에 고정된 기지가 없었고, 구성도 상황에 따라 바뀌었다. 예를 들어, 그라티아누스는 동방의 발렌스를 돕기 위해 서방 군대에서 일부를 분리해냈다. 따라서 분리된 사령관 수와 구성은 짧은 기간에 상당히 급격하게 변했을 것이다. 보통 각 황제는 직접 지휘하는 주력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매지스터 밀리툼(군사 고문), 매지스터 페디툼(보병 고문), 매지스터 에퀴툼(기병 고문)의 보좌를 받았다. 이 주력군은 황제 직속군(paesentalis)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직속군을 구성하는 각 병사들은 팔라티니(palatini)라고 불리며 일반 지방 야전군인 comitatenses보다 높은 지위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군대 사이의 파견과 지원군 등으로 인해 병사들이 뒤섞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palatini들은 대체로 높은 지위를 누렸으며 황제 직속군에 집중되어 있었다.
더 작은 규모인 지방 야전군 comitatenses는 코메스에 의해 지휘되었다. 그러나 때에 따라 기병 고문이나 보병 고문(이들은 이름과는 달리 두 병종을 모두 지휘했다.)에 의해 지휘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아미아누스가 트라키아의 코메스라고 호칭한 루피키누스는 처음에는 트라키아의 지방 야전군을 지휘했다. 그러나 위기가 확대되면서 더 고위 지휘관들이 지휘권을 인수했다. 처음에는 보병 고문인 트라야누스였고, 두 번째는 막 기병 고문으로 승격된 사투르니누스였다.
5세기 초의 Notatia Dignitatum은 12개 야전군이 존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방에서, 콘스탄티노플에 거점을 둔 황제 직속군은 두 개의 군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각각 12개의 기병부대와 24개의 보병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추가적으로 3개의 지역 야전군이 있었다. 각각 트라키아(12개 기병부대, 35개 보병부대), 일리리쿰(2개 기병부대, 24개 보병부대), 그리고 오리엔툼(10개 기병부대, 21개 보병부대)에 거점을 두고 있었다. 서방에서는 역시 두 개의 주력군이 있었는데, 하나는 갈리아(12개 기병부대, 35개 보병부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7개 기병부대, 28개 보병부대)에 주둔하고 있었다. 지방 야전군은 브리타니아(6개 기병부대, 3개 보병부대), 서부 일리리쿰(22개 보병부대만 존재), 스페인(16개 보병부대만 존재), 탄기에르(3개 기병부대, 4개 보병부대), 그리고 아프리카(19개 기병부대만 존재)에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370년대의 야전군 조직과 비슷한지는 알 수 없다. 여기 열거된 많은 부대들이 아드리아노플 전투 이후에 창설되었으며 많은 부대가 역시 변경 방어군 limitianei에서 전임되어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376년에 그라티아누스와 발렌스가 각자 상당한 규모의 직속군을 갈리아와 시리아에서 지휘했으며 지방 야전군들이 트라키아와 일리리쿰에서 작전을 진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시로 조직된 다양한 부대들이 서로 다른 시간에 전투에 참가했었다. 그러나 이름이 알려진 부대가 거의 없기 때문에 Notitia Dignitiatum의 조직과 378년의 조직 사이의 차이점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Notitia에 기술된 서방 군대 조직은 5세기 초 스틸리코에 의해 단행된 중앙 집권화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의 일리리쿰과 스페인의 야전군은 아드리아노플과 비슷하다. Notitia의 동방 군 조직은 396년 전후 신병들을 따로 분리해낸 테오도시우스의 조직을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발렌스의 배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일반 야전군 comitatenses와 황제 직속군 palatini에 덧붙여 황제들은 scholae라고 불린 많은 수의 친위군의 경호를 받았다. 이 부대는 312년 밀비우스 다리 전투 이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해산된 옛 근위대(Praetorian Guard)를 대신한 부대였으며 전원이 기병대였다. Notitia는 이 부대가 서방에 5개가 있었으며 각각 5백 명 가량이라고 기술한다. 또한 7개의 다른 부대가 동방에 있었다. 이 부대들은 의식적인 경호대가 아니라 우수한 전투부대였다. 그들의 명성은 아미아누스의 기록에 따르면, 적군 부대가 친위군이 로마군의 전열에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공격을 시작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로마 기병대
3세기 중반 갈리에누스 황제가 기병 예비대를 창설한 이후 군대 내 기병의 비율은 점차 높아졌다. 이것은 전략적이라기보다는 전술적인 문제였다. 기병 부대는 전쟁터에서 견실한 보병 부대를 압도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문제가 발생한 지점에 보다 신속하게 도착할 수 있었고, 제대로 조직되지 않은 침략자들과 맞서서 효과적으로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아드리아노플 전투 당시 동방의 주력 야전군은 4분의 1이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트라키아와 일리리쿰의 산지에 주둔한 지방 야전군의 경우에는 그보다 꽤 적었다. Notitia에 따르면 황제 직속군은 29퍼센트가 기병대였고, 트라키아의 야전군은 14퍼센트가 기병대였다. 그러나 의외로 변경 방어군 limitianei의 경우 기병의 비율이 꽤 높았다. 이것은 지역을 정찰하고 적의 첫 번째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기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주요 임무는 전투의 대열에서 굳건히 버티는 것이 아니라 산적이나 소규모 침입자들의 무리를 추격하는 것이었다. 도나우 강 전선을 따라 전방 부대의 기병대는 32퍼센트는 모에시아 제 1군의 사령관의 지휘를 받았고, 59퍼센트는 발레리아 군 사령관의 지휘를 받았다.
야전군의 기병대는 vexillationes라고 알려져 있다. 그 정확한 규모를 알려주는 증거는 없지만 대체로 200~400명 정도의 규모였던 듯하다. 서류상으로는 5백 명의 정원이었으나 3백 명이 평균이었다. 일부 변경 방어군의 기병부대도 vexillationes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alae(날개)나 cunei(쐐기)같은 옛 이름들을 유지했다. 이것은 오래 전 로마군 보조부대 기병들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었다.(ala는 심지어 공화정 시대, 동맹군이 기병대의 태반을 구성하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이름들은 전술적이나 조직적인 뜻보다는 그들의 역사적인 의미를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이들의 규모에 대한 증거 역시 찾아볼 수 없다. 역시 서류상으로는 5백 명이 정원이겠지만 실제는 훨씬 더 적었을 것이다. 3세기의 일부 기병대는 채 100명도 보유하지 못했던 기록도 있다.
4세기의 로마군은 크게 3개 범주의 기병대를 보유했다. 경무장 척후병, 전통적인 중장기병, 그리고 더욱 중무장한 카타프락토이였다. 경무장 기병은 equites sagittarii(궁기병), 가벼운 투창으로 무장한 equites mauri, dalmatae(무어인이나 달마티아인 기병), 그리고 cetrati(작고 둥근 방패를 소지한 데서 유래한 이름)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무장에 상관없이 그들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같았다. 부대의 전방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적군과 원거리에서 소규모 교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각종 원거리 무기와 속도에 의지하여 피해를 입히고 더 잘 무장된 병사들이 백병전을 벌일 때에는 비켜나왔다. 경무장 기병대에서는 궁기병 sagittarii의 비율이 가장 높았으며 Notitia가 기록될 당시 동방 지방 야전군의 15퍼센트를 구성했다. 활은 경무장 척후병에게 더 넓은 사정거리와 보급의 용이성 때문에 투창보다 더욱 효과적인 무기였다. 일부 기병대(무어인과 달마티아인 같은)는 투창으로 무장을 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그것들을 다루는 타고난 능력 때문이었다. 조금 다른 경우로 변경 방어군도 투창으로 무장했는데 그것은 활보다 투창이 더 훈련시키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속도가 그들의 가장 효과적인 방어수단이었다. 경무장 기병대는 산개 대형으로 배치되었고, 갑옷 종류를 전혀 입지 않았다. 그러나 작고 가벼운 방패는 가지고 다녔다.
경무장 기병대의 정반대 병종은 카타프락토이였다. 이들은 대단히 중무장한 기병으로 종종 말에도 갑옷을 입혔다. 대부분 기병창으로 무장한 충격기병이었다. 그러나 일부 Equites sagittarii clibanarii같이 페르시아 군에서 모방한 중무장 궁기병도 있었다. 카타프락토이는 이 두 종류의 기병을 모두 포함했다. clibanarii가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반면 catafratarii는 사르마티아 중장기병에서 유래된 병종이었다. 그 외에도 armigeri라고 불리는 특별히 중무장한 일부 기병부대도 있었다. 카타프락토이 부대가 아드리아노플 전투에 참가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Notitia에 있는 모든 동방 군대가 꽤 높은 비율의 카타프락토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황제 직속군의 경우 25퍼센트) 아직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지는 않았을지라도 전투에 참가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기병대의 대다수는 지난 1세기동안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부대였다. comites, promito, scutariim stablesiani 등이라고 불린 부대들은 고전적인 보조 기병대(auxilary cavalry)와 유사한 부대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투구를 썼고, 갑옷을 입었다.(대부분 체인메일이었으나 일부 비늘갑옷과 판갑도 있었다.) 그리고 견고한 방패를 들었으며 창과 몇 자루의 투창을 소지했다. 그들의 일반적인 전술은 적군과 소규모 접전을 벌이면서 지치게 만들거나 측면으로 우회하여 기회가 오면 돌격하는 것이었다.
로마 보병대
비록 기병대의 수가 증가하고 중요도가 높아졌다고 해도 전투에서 앞장서는 것은 여전히 보병대였다. 전방을 정찰하고 측면을 보호하면서 적군을 괴롭히는 것은 기병대였지만 전투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보병대였다.
야전군의 보병대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군단병과 보조병이었다. 4세기의 군단들은 과거의 군단들보다 훨씬 작았다. 아마 1개 군단에 채 천 명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예전처럼 군단을 몇 개 대대(코호르트)로 나누는 방식은 여전히 존재했다. 1개 대대는 원칙적으로 5백 명의 병사로 구성되어야 했으나 3세기 기록에 의하면 이집트 주둔 군단의 한 대대는 164명뿐이었다. 그나마 일부 전방기지 방어병들은 그런 이름도 없이 밀리테스(군인)라고만 불렸다.
주력 야전군의 태반은 아욱실리아 팔라티나라고 불린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부대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최초 창설되었다. 최고 5백 명 정원에 평균 300~400명의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5세기 저자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에 의하면 군단병들은 보조병(아욱실리아)보다 더 중무장했으며 더 엄격히 훈련되었다. 그러나 아미아누스의 전투 기록은 보조부대가 비록 비전투기에 지역 주민들과 마찰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매우 강인하여 기동성 있는 부대였음을 보여준다.
군단병과 보조병은 모두 중장보병으로서 밀집대형을 이루어 싸웠다. 이들의 용도는 적군을 백병전으로 격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조병은 더욱 기동성이 있었고, 주 전선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 외에도 각종 척후 임무도 수행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보조병과 일부 군단병은 한 쌍씩 편성되었다. 이러한 배치는 전장에서 같은 패턴의 방패 문양을 가진 부대들이 함께 정렬한 모습으로 확인할 수 있다.
후기 로마 보병이 어느 정도 갑옷을 입었는지는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어왔다. 일부 학자들은 3세기 이후로 로마군은 금속 동체 갑옷을 입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는 3세기의 무덤에 병사들을 그릴 때에는 갑옷을 입지 않은 모습으로 그린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5세기의 베게티우스는 ‘기병의 무장은 고트족, 알라니 족, 훈족의 예를 따라 개량되어 왔지만, 보병은 완전히 무방비했다.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치세 때만 해도 보병은 흉갑과 투구를 착용했었다. 그러나 무관심과 나태함은 군 기강의 느슨함을 가져왔고, 병사들은 자신들의 갑옷이 너무 무겁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황제에게 흉갑을 입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그 후에는 투구를 쓰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우리 병사들은 고트족과의 교전에서 종종 적군의 화살 세례에 무력하게 되었다.’ 라고 기록한 바 있었다.
다른 증거는 그림과 문학작품에서 나타난다. 이 증거들은 3~5세기 보병들이 모두 갑옷을 입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아드리아노플 전투 이후의 혼란으로 인한 갑옷 공급의 부족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전투 이후 변경 방어군에서 기동 야전군으로 전임된 병사들은 갑옷을 입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것이 베게티우스가 그라티아누스 황제 이후에는 갑옷 입지 않은 병사가 대부분이었다고 설명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는 군단병과 보조병이 모두 대부분 갑옷으로 무장했을 것이다. 그 증거로 이러한 기록이 있다. ‘보병은 갑옷의 무게 때문에 압박당했다.’ 갑옷은 대부분 체인메일이거나 비늘갑옷, 또는 주물로 만들어진, 근육의 형상이 새겨진 흉갑이었다. 체인메일은 철로 만들었고, 비늘 갑옷은 청동제였다. 장교들이 주로 착용한 근육 모양 흉갑은 청동제나 철제가 모두 있었다. 유명한 ‘로리카 세그먼타타(서기 1~2세기 군단병들이 착용한 강철제 판금갑옷, 로마군의 갑옷 중 가장 유명한 갑옷이다-역자)’는 3세기 후반부터 사라졌다.
4세기의 중장보병은 커다란 타원형의 방패를 휴대하고 칼(스파타)과 창, 투창(재블린), 다트로 무장했다. 일부는 칼 대신의 백병전용의 작은 도끼를 소지하기도 했다. 과거의 무거운 투창(필룸)은 사라졌다. 보병대는 방어적으로 배치되었고, 6~8열 횡대가 일반적이었다. 적군이 돌격해오면 투창과 다트를 비 오듯이 뿌렸다. 그러고 나서 방패로 벽을 만들고 창을 세워 방어했다.
그밖에 특수화된 경무장 보병대도 있었다. 이들은 궁수, 경무장 투창병, 돌팔매병, 그리고 석궁수였다. 척후병이 더 많이 필요한 경우, 이들 중 일부가 선발되었다. 이들은 18세기 경보병 중대처럼 편성되어 갑옷을 입지 않고 투창과 다트와 방패를 소지한 채 작전에 임했다.
전술
로마군의 조직은 아드리아노플 전투 백 년 전부터 크게 변했지만, 전술은 거의 달라진 게 없었다. 기본적으로 로마군은 중앙에 보병대가 포진하고 양 날개에 기병대가 포진했다. 척후병들은 산병선을 이루어 전열의 선두에 포진했다가 적군이 전진해오면 중장보병 뒤로 후퇴했다. 보병대는 크게 두 개 전열을 이루었다. 첫 번째는 보조병의 전열이었고, 두 번째는 군단병의 전열이었다. 이 기본 편성의 기원은 하드리아누스 황제, 아우구스투스 황제, 심지어 스키피오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궁수는 일반적으로 중장보병의 뒤에 배치되어 보병대의 머리 너머로 화살을 날렸다. 대부분의 전투가 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때로는 본 부대에 앞서서 경무장 기병대의 활동으로 전투가 시작되는 경우도 있었다.(아드리아노플 전투가 그 예다.) 이들은 양 날개로 이동하여 포위 공격을 시도했다. 전통적인 기병과 카타프락토이는 양 날개의 보병 바로 옆에 배치되어 적군 기병대를 격파하고 보병대를 향해 돌진할 기회를 노렸다. 기병대는 보병의 견고한 전열을 전면에서 무너뜨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측면이나 후방이 노출되거나 적군의 전열이 무질서하게 되지 않는 한 기병대는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만약 기병대가, 아드리아노플의 고트족 기병대처럼, 적군이 견고하게 밀집되어 있지 않은 기회를 잡기만 한다면 보병대는 기병대에 의해 손쉽게 짓밟혔다.
베게티우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최고 사령관의 위치는 대부분 대열 우측의 기병대와 보병대 사이다. 이곳이 전군을 지휘하기에는 최고의 위치인데다가......보병과 기병 양면으로 동시에 명령을 내리기에도 편리한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휘하는 예비 기병대와 경무장 보병대로 적군의 왼쪽 날개를 포위하는 것이 사령관의 임무이다. 부사령관의 위치는 보병대의 중앙이다. 그는 그곳에서 보병들을 격려하고 지원한다. 그리고 잘 무장된 예비 보병대가 그의 지휘 아래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서열 3번째 지휘관의 위치는 좌측이다. 그는 신중하면서도 용맹스러운 장교여야만 한다. 만일 군대가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져서 취약해질 경우에 대비하여 그에게는 뛰어난 기병대와 보병대가 맡겨져 있다. 그는 그것을 이용하여 아군이 포위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고대 군대의 우측 날개는 전통적으로 가장 강력한 병력이 배치되었다. 왜냐하면 전진할 때 보병대는 옆 병사의 방패로 몸을 가리기 위해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병대도 우측에 배치되었을 때 더 안전하다고 느낀다. 적군을 포위하기 위해 우회할 때 적과 마주보는 몸 왼쪽을 방패로 가린 채 돌 수 있기 때문이다.(반대로 좌측에 배치된 기병대는 무기를 든 손이 적을 보게 되고 방패를 든 손은 반대편을 향하게 된다―역자) 따라서 우측으로 우회 공격을 하는 것이 한층 더 쉽다. 그 결과 최고의 정예부대는 항상 우측에 위치하게 되었다. 우측이 공격을 하는 사이 좌측은 적군에게 의해 포위되는 것을 막아야만 했다. 이것은 현대까지 이어지는 전통이 되었다. 아직도 퍼레이드를 할 때에는 우측에 상위 부대가 배치된다.
고트족 군대에 대해서는 다음에 번역 끝나는대로 올리겠습니다.
첫댓글 윤덕희님 좋은 전쟁사 자료 감사합니다. ^^
비쟌틴군대와 로마군대랑~ 전력을 굳이 비교한다면 어떤정도인가요?
시대의 차이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비교가 쉽지 않음. 5세기에 서로마가 망했는데 동로마는 15세기에 멸망합니다. 서로마가 망함으로 인해 고대는 끝이 나죠. 고대와 중세, 전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장비면에서 고대 로마는 부진을 면치 못하겠죠. 게다가 군단병으로는 발달한 병기, 전술을 당해내기엔 너무 힘겹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