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스님이 하루는 원숭이들을 보고 말하기를
“원숭이가 각각 한 개의 옛거울(古鏡)을 짊어지고 있구나!”
하니, 삼성스님이
“숱한 오랜 세월 동안 이름이 없거늘 어찌하여 옛거울(古鏡)이라고 합니까?”
하고 물어니, 설봉스님이
“흠이 생겼구나!”
하되, 삼성스님이 말하기를
“일천오백인을 거느리는 대선지식이 화두도 모르십니까?”
하니, 설봉스님이 말하였다.
“노승이 주지 하기가 번거로와서....”
알겠는가?
비가 연잎을 적시니
향기가 집에 떠돌고
바람이 갈대잎을 흔드니
눈은 배에 가득하네.
雪峰一日見미후내云, 者미수各各背一面古鏡.
三聖便問, 歷劫無名何以彰爲古鏡.
峰云, 瑕生也.
聖云, 一千五百人善知識話頭也不識.
峰云, 老僧住持事煩.
會마
雨蒸荷葉香浮屋
風攪蘆花雪滿船
佛紀 2532年 端午節
伽倻山에서
退翁 性徹 씀
선림고경총서(禪林古鏡叢書)간행사
귀의 삼보(귀의삼보)하옵니다.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이 이 땅에 전해져 겨레의 문화 창달에 이바지하고 나라의 동량을 배출하여 온 지도 천육백여년이 지났읍니다.
그러나 세울이 오래 지나고 연륜이 멀어짐에 따라 부처님의 마음을 전하는 선종의 정법은 감추어지고, 고불고조(古佛古祖)들의 바른 뜻은 매몰되어 잘못된 주장만 드러나게 되었읍니다.
성철 큰 스님께서는 이런 선문(禪門)의 병폐를 일찍부터 지적하시고, 그 시정을 위해 몇 해 전에는 선문정로(禪門正路)라는 저서를 출간하기도 하셨읍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에게 참선의 근본 종지인 돈오돈수(頓悟頓修)사상을 쉽게 터득케 하고 선사들의 피나는 수행 과정을 기록으로나마 접함으로써 선종을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케 하는 데에는 무엇이 가장 요긴 할 일인가를 심려해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케 하는 데에는 무엇이 가장 요긴한 일인가를 심려해 오시던 차에, 우리들 주변에 선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필요한 선서(禪書)들이 너무나 빈곤하다는 것을 통감하시게 되었읍니다. 이는 고불고조들의 말씀이 한문(漢文)으로 되어 있어서 언어생활이 다른 요즘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스님께서 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옛 조사 스님들의 말씀 가운데 참선(參禪)을 위해 가장 요긴하다고 생각되는 삼십여 종의 저서들을 가려내어 번역토록 하시고, 그 전집(全集)의 이름을 ‘선림고경총서(禪林古鏡叢書)’라고 지어 주셨읍니다.
한문으로 된 말씀들을 한글로 번역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합니다. 때로는 큰 스님의 구술(口述)을 옮기고, 때로는 선(禪)의 이치를 여쭈면서 글 밝은 이들에게 번역을 부탁하였읍니다.
우리나라 선종사(禪宗史)에서 처음 시도하는 선서 번역 사업인 데에다 큰스님께서 연로하시어 하나하나 감수하실 수가 없기 때문에 번역에 허물이 많으리라 싶습니다. 이 점을 널리 이해하시고, 더러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독자들께서 다함께 동참하시어 더 완벽한 글이 되도록 이끌어주신다면 더없는 다행이겠읍니다.
저희로서는 선림고경총서의 간행 불사(佛事)가 겨레의 공동의 문화 재산이 됨과 아울러 후손들에게 부처님의 크고 밝은 가르침을 전하는 이 시대의 훌륭한 유산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러한 선림고경총서의 원만한 간행이 조계(曹溪)의 개울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되어, 선림(禪林)에 백화(百花)가 난만하고 모든 이들은 자성을 깨쳐 성불(成佛)하길 발원합니다.
佛紀 2532 年 端午節
해인사 백련암(海印寺 白蓮庵)
백련선서간행회(白蓮禪書刊行會)
圓澤 和南
마조록 해제(馬祖錄 解題)
마조스님에 대한 기록은「조당집(祖堂集,952)」을 비롯하여 「종경록(宗鏡錄,960)」「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004)」「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1029)」「송고승전(宋高僧傳,988」,그리고 「사가어록(四家語錄)」과「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1267」등에 전하지만, 스님의 어록이 독립적으로 전하는 것은 「사가어록」뿐이다.
현존하는 「사가어록」(6권)은 명말(明末)에 재편된 것인데, 그 첫째권은 마조스님의 어록이고, 나머지는 백장(百丈),황벽(黃壁), 임제(臨濟)스님의 어록이다. 「사가어록」은 원래 송(宋)나라 초기(1066년경) 황룡 혜남(黃龍慧南:1002-1069)스님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한다.
마조록을 비롯한 송(宋)대 이후의 어록들은 경론을 자구해석(字句解釋)하던 기존의 방식과는 달리, 선(禪)적인 안목으로 불법을 재해석한 선사들의 말씀을 정리한 것이다.
마조스님의 출생과 입적 연대에 대해서는 기록들이 일치하지 않는데, 연구에 의하면 탑명(塔銘)의 기록(706-786)이 가장 믿을 만하다.
스님은 남악회양(南嶽懷讓:677-744)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가장 많은 제자를 길러냈는데, 법제자들은 139명, 혹은 84명이라고도 한다.
마조록에는 「능가경(楞伽經)」「유마경(維摩經)」을 비롯하여「금강경(金剛經)」「화엄경(華嚴經)」「불설법구경(佛說法句經)」「42장경(四十二章經)」등의 경전이 광범위하게 인용되고 있다. 또한 어록에 보이는 “즉심죽불(卽心卽佛)”“평상심이 도이다”하는 말씀이 마조스님 법문의 특색이라 하겠다.
백장록해제(百丈錄解題)
백장스님의 어록은 일찍부터 독립된 본이 있었다. 「조당집(祖堂集)」에 의하면, “교화한 인연은 실록(實錄)에 자세히 실려 있다”고 하였고. 또 “문도 신행(神行)과 범운(梵雲)이 법어를 결집(結集)하여 어본(語本)을 편집하였는데, 오늘날 어본이 후학들에게 유행되고 있다”고 한 탑명(塔銘)의 내용에서 문도들이 모은 어록이 있었다는 기록을 볼수 있다.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에는 어록(語錄)과 광록(廣錄)을 구분하여 싣고 있는데, 광록은 다른 어록과는 달리 긴 자설(自說)의 법문형식으로서 교학적인 배경이 두텁다. 법문은 양변(兩邊)을 떠난 중도(中道)에 입각해 있고, 그 중에서도 대승입도돈오법은 스님의 대승법문이 잘 드러난 부분이라 하겠다.
스님의 제자로서 「전등록(傳燈錄)」에서 말하듯이 위산(위 山)과 황벽(黃檗) 두 스님이 중요하다. 위산스님은 그 제자인 앙산(仰山)스님과 함께 위앙종(위仰宗)의 종조가 되고, 황벽스님은 임제(臨濟)스님을 배출하여 임제종의 원류가 된다. 즉 5가 종파에서 최초의 두 파가 백장스님 아래에서 나온 것이다.
백장스님 이후, 선원(禪院)은 생활면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 이전에는 율원(律院)등에 속해 있던 선원이 독립적인 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상당(上堂)하여 공개적으로 설법하는 설법당(說法堂)이 마련 되었다. 또한 대중운력이나 10가지 소임 등 선원생활을 규율하는 청규(淸規)가 백장스님에서 부터 발달하게 되었다. 이렇게 엄격한 규율과
대중운력을 통한 경제적 자립은 폐불 속에서도 선문(禪門)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점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스님의 일상생활을 나타내는 한마디는 이러하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
조당집 해제(祖堂集 解題)
현존하는 선종사서(禪宗史書) 중 가장 오래 된 「조당집(祖堂集」은 모두 20권으로 되어 있다. 현재 합천 해인사에 있는 것이 세계에서 유일한 것이며, 아직까지는 어떤 섭본(섭本)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보복 종전(保福從展:867-928,云峯義存의 法을 이음)스님의 제자인 문등(文등)이 쓴 ‘조당집 서(序)’에 의하면, 천주(泉州) 초경사(招慶寺)에서 정(靜)과 균(筠) 두 스님에 의해 편집되었고(952), 그 후 고려에서 개판(開版)할 때(고종 32년, 1245) 원래 10권이던 것을 20권으로 만들면서 새로 목차를 만들어 넣은 것을 알 수 있다. 목차 끝에 “해동(海東)에서「조당집」을 새로 간행함에 있어 그 사적이 드러난 253인을 모두 20권에 수록하였다” 한 기록이 그것이다.
「조당집」의 특징으로는 첫째, 그 서(序)에서 “고금 제방의 법요(法要)를 모아 한 권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듯이 조사들의 종지(宗旨)를 전하는 데에 힘썻고, 표현은 구어적이며 간결하다.
둘째, 과거 7불(七佛)에서 시작하여 인도 28대 조사와 중국6대 조사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초조 마하가섭을 제1조, 아난(阿難)을 제2조. 이하 28조 초조달마(初祖達摩), 제29조 혜가(慧可).......제33조 혜능(慧能)으로 하고 있다.
셋째, 남종(南宗) 계통의 스님들에 대해서는 상세히 언급하면서도 우두 법융(牛頭法融), 소위 북종(北宗)인 신수(神秀)․보적(普寂) 등은 조과(鳥과)화상의 끝에 이름만 전하며, 또 우두 법융에서도 다섯 스님은 이름만 열거하고 있다. 한편 남종선의 5가종파 중에서도 임제(임제종),위산․앙산(위앙종),조산․동산(조동종),운문(운문종)스님에 대한 기록은 있으나 법안(법안종)스님에 대한 언급은 없다.
넷째, 신라의 종사(宗師)들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도의(道義)․혜철(惠哲)․홍척(洪陟)․현욱(玄昱)․범일(梵日)․무염(無染)․도윤(道允)․순지(順之)스님 등 8명을 싣고 있는데, 이들은 신라말 9산 선문의 개산조(開山祖,순지스님은 제외)들이며, 모두 서당(西堂)․장경(章敬)․앙산(仰山)등 마조스님의 법을 이었다.
「조당집」은 마조․백장․위산․앙산․동산․조산스님등에 대한 내용과 4가어록의 그것과는 크게 다르므로 여기에 함께 실었다.
「조당집」은 동국역경원에서 나온 완역본이 있다. 또 대한전통불교연구원에서 간행한「조당집 병 논집(祖堂集 병 論集)」에서는 그간의 연구에 대한 눈문들을 소개하고 있다.
차 례
선림고경(禪林古鏡)에 씀 ․․․退翁 性徹/2
선림고경총서간행사(禪林古鏡叢書刊行辭/4
해제(解題)/6
마조록/四家語錄
1. 행록․․․․․․․․․․․․․․․․․․․17
2. 시중․․․․․․․․․․․․․․․․․․․23
3. 감변․․․․․․․․․․․․․․․․․․․31
마조록/조당집
1. 행록․․․․․․․․․․․․․․․․․․․53
2. 시중․감변․․․․․․․․․․․․․․․․55
3. 천화․․․․․․․․․․․․․․․․․․․71
백장록/四家語錄
□ 백장어록
1. 행록․․․․․․․․․․․․․․․․․․․77
2. 상당․․․․․․․․․․․․․․․․․․․83
3. 천화․․․․․․․․․․․․․․․․․․․95
□ 백장광록․․․․․․․․․․․․․․․․ 99
백장록/祖堂集
1. 행록․․․․․․․․․․․․․․․․․․․161
2. 상단․감변․․․․․․․․․․․․․․․ 163
(附錄)四家語錄/江西馬祖道一禪師語錄
祖堂集/馬祖錄
四家語錄/洪州百丈山大智禪師語錄:百丈廣錄
祖堂集/百丈錄
마조록
(四家語錄)
일러두기
1. 본문의 편집체제는 사가어록 임제록을 기준으로 하여 행록.시중. 감변.천화 등으로 구분한다.
2. 사가어록과 조당집의 마조록은 그 구성과 내용상 서로간에 누락 된 부분과 상이한 점이 있어 함께 실었다.
3. 스님들의 생몰연대는 「선학대사전(禪學大辭典)」(大修館書占,19 79)과 「중국불학인명사전(中國佛學人名辭典)」(明復編,方丹出版 社)을 참고 하였다.
4. 부록으로는 경안무자(慶安戊子) 화각본(化刻本)의 사가어록과 해 인사 소장본 「조당집(祖堂集)」에 있는 마조록을 실었다.
1. 행록
강서(江西) 도일(道一:709-788)스님은 한주(漢洲) 시방현(시方縣)사람으로 성은 마(馬)씨이며 그 마을에 있는 나한사(羅漢寺)에 출가하였다. 용모가 기이하여 소걸음으로 걸었고 호랑이 눈빛을 가졌다. 혀 를 빼물면 코끝을 지났고 발바닥에는 법륜 문신 두 개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자주(資州) 당화상(唐和尙)에게 머리를 깎았고 투주(투州) 원률사(圓律師)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당(唐) 개원(開院:713-742) 연중에 (형嶽)의 전법원(戰法院)에서 선정을 닦던 중 회양(懷讓:677-744)스님을 만났는데, 회양스님은 스님의 근기를 알아보고는 물으셨다.
“스님은 좌선하여 무얼하려오?”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회양스님은 암자 앞에서 벽돌 하나를 집어다 갈기 시작했다.
그러자 스님이 말씀하셨다.
“벽돌을 갈아서 무엇을 하시렵니까?”
“거울을 만들려 하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겠습니까?”
“벽들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지 못한다면 좌선을 한들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소수레에 멍에를 채워 수레가 가지 않으면 수레를 쳐야 옳겠는가, 소를 때려야 옳겠는가?”
스님이 대꾸가 없자 회양스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그대는 앉아서 참선하는 것(坐禪)을 배우느냐, 앉은 부처를 배우느냐. 좌선을 배운다고 하면 선(禪)은 앉거나 눕는 데 있는지 않으며, 앉은 부처(坐佛)를 배운다고 하면 부처님은 어떤 모습도 아니다. 머뭄 없는 법에서는 응당 취하거나 버리지 않아야만 한다. 그대가 앉은 부처를 구한다면 부처를 죽이는 것이며, 앉은 모습에 집착한다면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가르침을 듣자,스님은 마치 제호(제호)를 마신 둣하여 절하며 물으셨다.
다시 물으셨다.
“어떻게 마음을 써야만 모습 없는 삼매(無相三昧)에 부합하겠습니까?”
“그대가 심지법문(心地法門)를 배움은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고, 내가 법요(法要)를 설함은 저 하늘이 비를 내려 적셔주는 것과도 같다. 그대의 인연이 맞았기 때문에 마침 도를 보게 된 것이다.”
다시 물으셨다.
“도가 모습(色相)이 아니라면 어떻게 볼수 있겠습니까?”
“심지법안(心地法眼)으로 도를 볼 수 있으니, 모습 없는 삼매도 그러하다.”
“거기에 생성과 파괴가 있습니까?”
“생성이나 파괴, 모임과 흩어짐으로 도를 보는 자는 도를 보는 것이 아니다. 나의 게송을 듣거라.”
심지(心地)는 모든 종자를 머금어
촉촉한 비를 만나면 어김없이 싹튼다
삼매의 꽃은 모습 없는데
무엇이 파괴되고 또 무엇이 이루어지랴
心地含諸種 遇澤悉皆萌
三昧華無相 何壞復何成
스님이 덕분에 깨우치게 되어 마음(心意)이 초연하였으며, 10년을 시봉하면서 그 경지가 날로 더하였다.
이에 앞서 육조(六祖:638-713)스님이 회양스님에게 말씀하시기를, “인도 반야다라(般若多羅)가 예언하기를 ‘그대의 발 아래서 망아지 한 마리가 나와 세상사람을 밟아 버리리라’하셨다”했는데, 스님을 두고 한 말씀이었을 것이다. 회양스님의 제자 여섯 사람중에서 스님만이 심인(心印)을 비밀스러이 전수받았을 뿐이었다.
처음 건양(建陽)의 불적령(佛跡嶺)에서 임천(臨川)으로 옮겨갔고, 다음으로 남강(南康) 공공산(공公山)에 이르렀으며, 대력(大曆:766-779) 연중에 종릉(鍾陵:洪州에 있음)이 있는
개원사(開元寺)에 이름을 걸어두셨다. 그때 대장군(連師)노사공(路嗣恭)이 가풍을 듣고 경모하여 종지(宗旨)를 직접 전수받았고, 이로부터 사방 납자들이 운집하였다.
회양스님은 스님이 강서에서 교화를 널리 편다는 소문을 듣고 대중에게 물으셨다.
“도일(道一)이 대중을 위해 설법을 하느냐?”
“이미 대중을 위해 설법합니다.”
그러자 회양스님은 말씀하셨다.
“도대체 소식을 전해오는 사람이 없구나.”
그리고는 스님 하나를 그곳으로 보내며“ 그가 상당하였을 때‘어떻습니까?’ 하고 묻고 무슨 말을 하거든 기억해 오너라”고 하셨다.
그 스님이 분부대로 가서 물어더니 스님이 말씀하셨다.
“난리통 30년에 소금과 장은 줄여 본 적 없다.”
그 스님이 돌아와 회양스님에게 말씀드렸더니 회양스님은 “그렇군”하셨다.
스님의 입실제자(入室弟子) 139명은 각자 한 곳의 선지식이 되어 더더욱 끝없는 교화를 폈다.
스님께서는 정원(貞元) 4년(788) 정월 중에 건창(建昌) 석문산(石門山)에 올라 숲속을 거닐다가 평탄한 골짜기를 보더니 시자에게 말씀하셨다.
“썩어질 내 몸이 다음달에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리라.”
말씀을 끝내고 돌아와 이윽고 병을 보이므로 원주(院主)가 문안을 드렸다.
“스님께선 요즈음 건강이 어떠하신지요.”
“일면불 월면불(日面佛月面佛)이니라.”
2월1일, 목욕하고 가부좌한 채 입멸(入滅)하셨다. 원화(元和:806-820) 연중에 대적선사(大寂禪師)라 시호하고, 탑은 대장엄(大藏嚴)이라 하였다.
2. 시중
1.
스님께서 대중에게 설법(示衆)하셨다.
“그대들 납자여, 각자 자기 마음이 부처임을 믿도록 하라. 이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달마대사가 남천축국(南天竺國)에서 중국에 와 상승(上乘)인 일심법(一心法)을 전하여 그대들을 깨닫게 하였다. 그리고는 「능伽經」을 인용하여 중생의 마음바탕을 확인(印)해 주셨으니, 그대들이 완전히 잘못 알아 이 일심법이 각자에게 있음을 믿지 않을까 염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능가경」에서는 ‘부처님 말씀은 마음(心)으로 종(宗)을 삼고, 방편 없음(無門)으로 방편(法門)을
삼는다. 그러므로 법을 구하는 자라면 응당 구하는 것이 없어야 하니,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으며, 부처 밖에 따로 마음 없기 때문이다‘하셨다.
선이라 해서 취할 것도 없고 악이라 해서 버릴 것도 없으며,
깨끗함과 더러움 두쪽 다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죄의 본성이 공(空)임을 통달하면 생각생각 어디에도 죄를 찾을 수 없으니 그 성품(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계가 오직 마음일 뿐(三界唯心)이며, 삼라만상이 한 법에서 나온(印)것이이다. 형상(色)을 볼 때, 그것은 모두 마음을 보는 것인데, 마음은 그 자체가 마음이 아니라 형상을 의지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황따라 말하면 될 뿐, 현상이든(卽事)이치에든(卽理) 아무 걸릴 것이 없다. 수행의 결과로 얻어지는 깨달음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에서 나온(生) 것을 형상(色)이라 하는데, 색이 공함을 알기 때문에 난 것은 동시에 난 것이 아니다.
이 뜻을 확실히 알아야 그때그때 옷 입고 밥 먹으면서 부처될 씨앗(聖胎)을 길러내고 인연따라 시절을 보내게 되리니. 더 이상 무슨 일이 있겠는가.
그대들은 나의 가르침을 받고 나의 게송을 들어보아라
마음 바탕을 때에 따라 말하니
보리도 역시 그러할 뿐이라네
현상이나 이치에 모두 걸릴 것 없으니
나는 그 자리가 나지 않는 자리라네
心地隨時說 菩提亦只寧
事理俱無碍 當生卽不生
2.
어떤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도를 닦는 것입니까?”
“도는 닦는 데 속하지 않는다. 닦아서 체득한다면 닦아서 이루었으니 다시 부서져 성문(聲聞)과 같아질 것이며, 닦지 않는다 하면 그냥 범부이다.”
다시 물었다.
“어떻게 이해해야 도를 깨칠 수 있겠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자성(自性)은 본래 완전하니 선이다 악이다 하는 데 막히지 않기만 하면 도 닦는 사람(修道人)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선은 취하고 악은 버리며 공(共)을 관찰하여 선정에 들어가면 바로 유위(有爲)에 떨어진다 하겠다. 게다가 밖으로 치달아 구하면 더더욱 멀어질 뿐이니 3계의 심량(心量)을 다 없애도록만 하라. 한 생각 망념이 3계 생사의 근본이니, 일념이 없기만 하면 즉시 생사의 근본이 없어지며 부처님(法王)의 위 없는 진귀한 보배를 얻게 될 것이다.
무량겁(無量劫) 이래로 범부는 망상심, 즉 거짓과 삿됨, 아만(我慢)과 뽐냄이 합하여 한덩어리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여러 법이 모여 이 몸을 이루었기 때문에 일어날 때는 법만 일어날 뿐이며, 면할 때도 법만 멸할 뿐이다’하였다. 그러므로 이 법이 일어날때 내(我)가 일어난다 하지 않으며, 멸할 때도 내가 멸한다 하진 않는다.
전념(前念).후념(後念).중념(中念)이 생각생각 서로 의지하지 않아서 생각생각 고요함(寂滅)을 해인삼매(海人三昧)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일체법을 다 포섭한다. 마치 백천 갈래 물줄
기가 함께 큰 바다로 모여들면 모두 바닷물이라 이름하는 것과도 같다. 한 맛(一味)에 여러 맛이 녹아 있고 큰 바다에 모든 물줄기가 섞여드니, 마치 큰 바다에서 목욕을 하면 모든 물을 다 쓰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성문은 깨달았다 미혹해지고 범부는 미혹에서 깨달는다. 성문은 성인의 마음에는 본래 수행지위.인과.계급 등 헤아리는 망상이 없음을 모른다. 그리하여 인(因)을 닦아 과(果)를 얻고, 8만겁(八萬劫).2만겁(二萬劫) 동안을 공정(公定)에 안주하니, 비록 깨닫긴 했으나 깨닫고 나서는 다시 미혹한 것이다. 또한 모든 보살은 저 지옥 고통을 보면 공적함(空寂)에 빠져 불성을 보지 못한다. 상근기 중생이라면 홀연히 선지식의 가르침을 만나 말끝에 깨닫고 다시는 계급과 지위를 거치지 않고서 본성을 단박에 깨닫는다. 그러므로 경에서‘범부에게서는 엎치락뒤치락하는 마음이 있지만 성문에게는 그것이 없다’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미혹에 상대하여 깨달음을 설명하였지만 본래 미혹이 없으므로 깨달음도 성립되지 않는다.
일체 중생들은 무량겁 이래로 법성삼매(法性三昧)를 벗어나지 않고 영원히 그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옷 입고 밥 먹으며 말하고 대꾸하는 6근(六根)의 작용과 모든 행위가 모조리 법성이다. 그러나 근원으로 돌아갈 줄 모르고서 명상(名相)을 좇으므로 미혹한 생각(情)이 허망하게 일어나 갖가지 업(業)을 지으니, 가령 한 생각 돌이켜본다면(返照) 그대로가 성인의 마음이다.
여러분은 각자 자기 마음을 깨치면 될 뿐 내 말을 기억하지
말라. 설사 항하사만큼 도리를 잘 설명한다 해도 그 마음은 늘지 않으며, 설명하지 못한다 해도 그 마음은 줄지 않는다. 또한 설명을 해도 그대들의 마음이며, 설명하지 못해도 그대들의 마음이다. 또 몸을 나누고 빛을 놓으며 18가지 신통변화를 나타낸다 해도 나에게 불꺼진 재를 갖다 주느니만 못하다. 장마비가 지난 뒤 꺼진 재에 불기가 없는 것은 성문이 허망하게 인을 닦아 과를 얻음에 비유할 만하며, 장마비가 아직 지나지 않아 꺼진 재에 불기운이 있는 것은 보살의 도업(道業)이 순수하게 익어 모든 악에 물들지 않음을 비유할 만하다.
만일 여래의 방편인 삼장(三長)의 가르침을 말하자면, 쇠사슬같이 끊김이 없어 항하사겁토록 설명해도 다하지 못하게지만, 부처님의 마음을 깨닫는다면 아무 일도 없게 된다. 오랜동안 서 있었으니 이만 몸 조심하라.“
3.
대중에게 설법하셨다.
“도(道)는 닦을 것이 없으니 물들지만 말라, 무엇을 물들음이라 하는가. 생사심으로 작위와 지향이 있게 되면 모두가 물들음이다. 그 도를 당장 알려고 하는가. 평상심(平常心)이 도이다. 무엇이 평상심이라고 하는가. 조작이 없고, 시비가 없고, 취사(取捨)가 없고, 단상(斷想)이 없으며, 범부와 성인이 없는 것이다.
경에서도 이렇게 말하였다.
‘범부의 행동도 아니고 성현의 행동도 아닌 이것이 보살행이
다.’
지금 하는 일상생활과 인연따라 중생을 이끌어주는 이 모든 것이 도(道)이니, 도가 바로 법계(法界)이며 나아가서는 향하사만큼의 오묘한 작용까지도 이 법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심지법문을 말하며, 무엇 때문에 다함 없는 법등(法燈)을 말하였겠는가. 그르므로 일체법은 모두가 마음법이며, 일체의 명칭은 모두가 마음의 명칭이다. 만법은 모두가 마음에서 나왔으니 마음은 만법의 근본이다. 경에서도 ‘마음을 알아 본원(本源)이 통달하였으므로 사문(沙文)이라한다’고 하였으니, 이 본원자리에서는 명칭도 평등하고 의미도 평등하며 일체법이 다 평등하여 순수하여 잡스러움이 없다.
만일 교문(敎門)에서 시절따라 자유롭게 법계를 건립해 내면 모조리 법계이고, 진여(眞如)를 세우면 모조리 진여이며,이치(理)를 세우면 일체법이 이치이며, 현상(事)을 세우면 일체법이 현상이 된다. 하나를 들면 모두 따라와 이사(理事)가 다름이 없이 그대로 오묘한 작용이며, 더 이상 다른 이치가 없다. 이 모두가 마음의 움직임이다. 비유하면 달그림자에는 차이가 있으나 달 자체는 차이가 없고, 여러 갈래 물줄기는 차이가 있으나 그 물의 본성은 차이가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삼라만상은 차이가 있으나 허공은 차이가 없는 것처럼 도리를 설명하는 데에는 차이가 있으나 걸림 없는 지혜는 차이가 없듯이 갖가지로 세운 법이 모둔 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세워도 되고 싹 쓸어버러도 된다. 모조리 오묘한 작용이며 그대로가 자기이니. 진(眞)을 떠나서 세울 곳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운 그 자리
가 바로 진이며, 다 자기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냐.
일체법이 불법이고 모든 법이 바로 해탈인데 해탈이 바로 진여이나, 모든 법은 진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상 생활이 모드 불가사의한 작용으로서 시절인연을 기다리지 않는다. 경에서도 ‘곳곳마다 부처님 계신 곳’이라 하였다.
부처님은 매우 자비로우며 지혜가 있어 선한 본성으로 일체 중생의 얽힌 의심을 부수어 유무(有無)등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한다.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망정이 다하고 인집.법집.(人.法)이 함께 공하여 비할 바 없는 법륜을 굴리고 모든 테두리(數量)를 벗어났다. 그리하여 일마다 걸림이 없고, 현상.이치 양쪽 다 통하니 마치 하늘에 구름이 일어났다가 어느덧 없어지듯 머문 자취를 남기지 않으며, 물에다 그림을 그리듯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대적멸(大寂滅)이다.
번뇌 속에 있으면 “여래장(如來藏)‘이라 하고 거기서 벗어나면 ’청정법신(淸淨法身)‘이라 이름한다. 법신은 무궁하여 그 자체는 늘고 줄음이 없다.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모나고 둥글기도 하면서 대상에 따라 형체를 나타내니 물에 비친 달처럼 잔잔하게 흔들거리며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유위(有爲)를 다하지도 않고 무위(無爲)에 머물지도 않으니 유위는 무위의 작용이며, 무위는 유위의 의지처이다. 의지처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어디에도 의지할 것 없는 허공과 같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심생멸(心生滅)과 심진여(心眞如)라는 뜻에서 보자.
심진여(心眞如)라 하는 것은 밝은 거울이 물상을 비추는 것
과도 같은데, 거울은 마음에 비유되고 물상은 모든 법에 비유된다. 여기에서 마음으로 법을 취한다면 바깥 인연에 끄달리게 되니 그것이 샘생멸의(心生滅義)가 된다.
성문은 소리를 들음으로써 불성을 보고 보살은 눈으로 불성을 보니 그것이 둘 아님을 아는 것을 평등한 성품이라 한다. 이 성품은 차이가 없으나 작용은 같지 않아서 미혹에 있으면 식(識)이 되고, 깨달음에 있으면 지(智)가 되며, 이치(理)를 따르면 깨달음이 되고, 현상(事)을 따르면 미혹이 된다. 그러나 미혹해도 자기 본심에 미혹하는 것이며 깨달아도 자기 본성을 깨닫는 것이다. 한번 깨달으면 영원히 깨달아 다시는 미혹되지 않으니, 마치 해가 뜸과 동시에 어둠은 없어지듯 밝은 지혜가 나오면 어두운 번뇌는 공존할 수 없다.
마음(心)과 경계(境)를 깨달으면 망상이 발생하지 않으며, 망상이 나지 않는 그 자리가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무생법인은 본래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어서 도를 닦고 좌선할 필요가 없으니 닦을 것도 없고 좌선할 것도 없는 이것이 바로 여래의 청정선(淸淨禪)이다.
이제 이 이치를 알았으면 진정코 모든 업을 짓지 말고 본분따라 일생을 지내도록 하라. 가사 한 벌 누더기 한 벌로 앉으나 서나 끊임없이 계행(戒行)을 더욱 훈습하고 정업(淀業)을 더욱 쌓도록 하라.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깨닫지 못할까 무얼근심하랴. 듣느라고 수고하였다. 몸 조심하라.“
3. 감변
1.
서당 지장(西堂智藏:735-814).백장 회해(百丈懷海:749-814).남전보원(南전 普願: 748-834)스님이 마조스님을 모시고 달구경을 하던 차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로 지금같은 땐 무얼 했으면 좋겠는가?”
서당스님은 “공양하기에 딱 좋군요”하였고, 백장스님은 “수행하기에 좋겠습니다”하였다. 남전스님이 소매를 뿌리치면서 그냥 가 버리자, 스님이 말씀하셨다.
“경(經)은 장(藏:서당)으로 들어가고, 선(禪)은 바다(海:백장)로 돌아가는데, 보원(普願:남전)만이 사물 밖으로 벗어났구나.”
2.
남진스님이 대중에게 죽을 돌리는데 스님께서 물으셨다.
“통 속은 무엇이냐?”
“닥치거라. 이 늙은이야! 무슨 말이냐.”
스님께서는 그만 두셨다.
3.
백장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님의 근본 뜻입니까?”
“바로 지금 그대가 선명을 놀리는 자리라네.”
4.
대주 혜해(大珠慧海)스님이 처음 스님을 참례하자 스님께서 물으셨다.
“어디서 오느냐?”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에서 옵니다.”
“여기에 와서 무엇을 구하려 하느냐.”
“불법을 구하려 합니다.”
“자기의 보배창고(寶藏)는 살피지 않고서 집을 버리고 사방으로 치달려 무엇하려느냐. 여기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무슨 불법을 구하겠느냐?”
대주스님은 드디어 절하고 물었다.
“무엇이 저 혜해(慧海)의 보배창고입니까?”
“바로 지금 나에게 묻는 그것이 그대의 보배창고이다. 그것은 일체를 다 갖추었으므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작용이 자유 자재하니 어찌 밖에서 구할 필요가 있겠느냐?”
대주스님은 말끝에 본래 마음은 깨달음(知覺)을 말미암지 않음을 스스로 알고 뛸듯이 기뻐하며 절을 하였다.
6년을 섬긴 뒤에 돌아가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門論)」1권을 지었는데, 스님께서 보더니 대중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월주에 큰 구슬(大珠)이 있는데 뚜렷하고 밝은 광채가 자재하게 사무쳐 막히는 곳이 없다.
5.
늑담 법회(늑潭法會)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스님께서는 나지막히 속삭였다.
“이리 가까이 오게.”
법회스님이 앞으로 가까이 가자 한 대 후려치면서 말씀하셨다.
“셋이서는 함께 역모를 꾸미지 않는 법이라네, 내일 찾아오게.”
법회스님은 다음날 다시 법당으로 들어가서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우선은 돌아가고 내가 상당할 때를 기다렸다가 나오게. 그대에게 증명해 주겠네.”
법회스님은 여기서 깨닫고 말하였다.
“대중의 증명에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법당을 한 바퀴 돌더니 가버렸다.
6.
늑담 유건(늑潭維建)스님이 하루는 법당 뒤에서 좌선을 하고 있었다. 스님이 보시고는 그의 귀에 입을 대고 두 차례 훅하고 불자 유건스님은 선정에서 일어나 스님임을 알고는 다시 선정에 들었다.
스님은 방장실로 돌아가 시자더러 차 한 그릇을 갖다주게 하였는데, 유건스님은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큰 방으로 가버렸다.
7.
석공 혜장(石鞏慧藏)스님은 출가 전에 본래 사냥을 일삼았으며 사문을 싫어하였다. 한번은 사슴떼를 쫒다가 마침 스님의 암자 앞을 지나게 되었다. 스님이 그를 맞이하자 그는 물었다.
“스님은 사슴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지요?”
“그대는 무얼하는 사람이냐?”
“사냥꾼입니다.”
“활을 쏠 줄 아는가?”
“쏠 줄 압니다.”
“화살 한 발로 몇 마리를 잡는냐?”
“한 발로 한 마리를 잡습니다.”
“활을 쏠 줄 모르는구나.”
“스님께선 활을 쏠 줄 아십니까?”
“쏠 줄 알지.”
“스님께서는 화살 한 발로 몇 마리나 잡으십니까?”
“한 발로 한 떼를 다 잡는다네.”
“저놈들도 생명입니다. 무엇 때문에 한 떼나 잡겠습니까?”
“그대가 그런 줄 안다면 왜 스스로를 쏘지 않느냐?”
“저더러 스스로 쏘라 하신다면 쏘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스님께서 호통을 쳤다.
“이놈! 광겁(曠劫)의 무명번뇌(無名煩惱)를 오늘 단박 쉬도록 하라.”
그는 그 자리에서 활과 화살을 꺾어버리고 스스로 칼로 머리카락을 자르더니 스님께 출가하였다.
하루는 부엌에서 일을 하는데 스님께서 물으셨다.
“무얼 하느냐?”
“소를 칩니다.”
“어떻게 치는데?”
“한 차례 풀밭으로 들어가면 바로 콧구멍을 꿰어 끌고옵니다.”
“그야말로 소를 잘 먹이는구나.”
8.
한 스님이 가르침을 청하였다.
“스님께선 4구백비(四句百非)를 쓰지 말고 저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곧장 지적해주십시오.”
“오늘은 생각 없으니 그대는 지장(智藏)에게 가서 묻도록 하라.”
그리하여 지장스님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스님께서 저더러 스님(上座)께 가서 물으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지장스님은 손으로 머리를 어루만지더니 말하였다.
“오늘은 머리가 아프다. 그러나 회해 사형에게 가서 묻도록 하라.”
그리하여 다시 회해(懷海)스님에게 가서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도 잘 모르는 일인데.”
그 스님이 이리하여 스님(마조)께 말씀드렸더니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지장의 머리는 하얗고 회해의 머리는 검구나.”
9.
마곡 보철(麻谷寶徹)스님이 하루는 스님을 따라가면서 물었다.
“무엇이 대열반입니까?”
“급하다.”
“무엇이 급하다는 말입니까?”
“저 물을 보아라.”
10.
대매산(大梅山) 법상(法常:752-839)스님이 처음 참례하고 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바로 마음이 부처다(卽心卽佛).”
법상스님은 그 자리에서 깨닫고는 그때부터 대매산에 머물렸다.
스님은 법상스님이 산에 머문다는 소문을 듣고는 한 스님을 시켜 찾아가 묻게 하였다.
“스님께선 마조스님을 뵙고 무엇을 얻었기에 갑자기 이 산에 머무십니까?”
“마조스님께서 나에게 ‘바로 마음이 부처다’하였다네. 그래서 여기에 머문다네.”
“마조스님 법문은 요즈음 또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달라졌는가?”
“요즈음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하십니다.”
“이 늙은이가 끝도 없이 사람을 혼돈시키는구나. 너는 네맘대로 비심비불(非心非佛)해라. 나는 오직 즉심즉불(卽心卽佛)일 뿐이다.”
그 스님이 돌아와 말씀드러더니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매실(梅實)이 익었구나.”
11.
분주 무업(汾州無業:780-821)스님이 스님을 참례하였다.
스님께서는 그의 훤출한 용모와 종소리같이 우렁찬 목소리를 보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높고 높은 법당(佛堂)이나 그 속에 부처가 없구나.”
무업스님이 절하고 끓어앉아서 물었다.
“3승(三乘) 교학은 그 이론을 대략 공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선문(禪門)에서는 항상 바로 마음이 부처라고 하니, 정말 모르겠습니다.”
“알지 못하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지, 그밖에 다른 것은 없다네.”
무업스님이 다시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찾아와 가만히 전수하신 심인(心印)입니까?”
“그대는 정말 소란을 피우는군. 우선 갔다가 뒤에 찾아오게.”
무업스님이 나가는 차에 스님께서 불렀다.
“여보게!”
무업스님이 머리를 돌리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게 무엇인가?”
무업스님이 딱 깨닫고 절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둔한 놈아! 절은 해서 무엇하느냐.”
12.
등은봉(鄧隱峯)스님이 스님을 하직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디로 가려느냐?”
“석두(石頭)스님에게 가렵니다.”
“석두로 가는 길은 미끄럽네.”
“장대나무를 짚고 가다가 장터를 만나면 한바탕 놀다 가겠습니다.”
바로 떠나 석두스님에게 도착하자마자 선상을 한 바퀴 돌더니 지팡이로 한번 내려치고 물었다.
“무슨 소식인고.”
그러자 석두스님은, “아이고, 아이고!” 하였다.
등은봉스님은 말이 막혔다. 돌아와서 말씀드렸더니 스님(마조)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다시 가서 그가 ‘아이고, 아이고’ 하거든 ‘허.허(噓)’하고 두 번 소리를 내거라.”
등은봉스님이 다시 가서 앞서 했던 그대로 물었더니 석두스님은 이에“허허”하고 두 번 소리를 내었다.
등은봉스님은 이번에는 말이 막혔다. 돌아와 말씀드렸더니 스님께서 말하였다.
“석두로 가는 길은 미끄럽다. 하지 않았더냐.”
13.
등은봉스님이 하루는 흙 나르는 수레를 미는데 스님은 다리를 쭉펴고 길바닥에 앉아 있었다.
“스님, 다리 좀 오무리세요.”
“이미 폈으니 오무릴 수 없네.”
“이미 가고 있으니 물러나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수레바퀴를 굴리며 지나가다가 스님의 다리를 다치
게 했다. 스님께서는 법당으로 돌아와 도끼를 집어들고 말하였
다.
“조금전에 바퀴를 굴려 내 다리를 다치게 한 놈은 나오너라.”
등은봉스님이 나와 스님 앞에 목을 쓱 빼자 스님은 도끼를 치웠다.
14.
석구(石臼)스님이 처음 스님을 참례하자 스님께서 물으셨다.
“어디서 오는가?”
“오구(烏臼)스님에게서 옵니다.”
“오구는 요즈음 어떤 법문을 하던가?”
“여기서 몇 사람이나 아득해(茫然) 있습니까?”
“아득함은 우선 그만두고 간단한(초然) 한마디는 무엇이더냐?”
석구스님이 이에 세 걸음 앞으로 다가가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오구를 일곱 대 때릴 일이 있는데 그대는 기꺼이 받겠는가?”
“스님께서 먼저 맞으십시오. 그런 뒤에 기꺼이 오구스님에게 둘려드리겠습니다.
15.
양좌주(亮座主)가 참례하자 스님께서 물으셨다.
“좌주는 경론(經論)을 훌륭히 강의해 낸다고 들었는데 그런가?”
“부끄럽습니다.”
“무얼 가지고 강의하는가?”
“마음으로 강의합니다.”
“마음(心)은 재주부라는 광대같고, 의식(意)은 광대놀이에 장단을 맞추는 자와 같다. 그것으로 어떻게 경을 알 수 있겠는가?”
양좌주는 언성을 높혔다.
“마음이 강의하지 못한다면 허공이 강의합니까?”
“오히려 허공이 강의할 수 있다.”
양좌주는 수긍하지 않고 그냥 나가버렸다. 계단을 내려가려하는데 스님께서 “좌주!”하고 불렀다.
양좌주는 머리를 돌리는 순간 활연대오하고 바로 절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둔한 중아! 절은 해서 무얼 하느냐.”
양좌주는 절로 되돌아가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나의 논간은 남이 따를 수 없다 하였더니, 오늘에야 마조대사에게 한 번 질문을 받고서 평생했던 공부가 얼음 녹듯 하였다.”
그리고는 서산(西山)으로 들어가 다시는 종적이 없었다.
16.
홍주 수노(洪州水老)스님이 처음 스님을 참례하고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분명한 뜻입니까?”
“절 한번 하라”
수노스님이 절하자마자 스님게서 별안간 한 번 걷어찼다. 여기서 수노스님은 크게 깨닫고 일어나면서 손뼉을 치고“하하”웃으면 말하였다.
“그것 참 신통하고나, 신통해. 백천삼매와 한량없는 묘한 이치를 털끌 하나에서 그 근원을 알아버렸도다.”
그리고는 절하고 물러났다.
그 뒤 대중에게 말하였다.
“마조스님에게 한 번 채인 뒤로 지금까지 웃음이 그치질 않는구나.”
17
방거사(龐居士)가 스님께 물었다.
“만법에게 짝이 되어주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대가 한 입에 서강(西江)의 물을 다 마시면 그때 가서 말해주겠소.”
다시 방거사가 물었다.
“본래인(本來人)을 어둡게 하지 말고 스님께서는 눈을 높이 뜨십시오.”
스님께서 눈을 아래로 홀깃 하자 거사가 말하였다.
“일등가는 줄 없는 거문고를 스님만이 오묘하게 뜯는군요.”
스님께서 이번에는 위로 홀깃 보자 거사는 절을 하였다.
스님께서 방장실로 돌아가자 거사는 뒤따라 돌어가면서 말하
였다.
“조금전엔 잘난 체하다가 창피를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물을 근육은 뼈도 없으나 만 섬 실은 배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이치가 어떻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여기에는 물도 없고 배도 없는데 무슨 근육과 뼈를 말하는가.”
18.
어떤 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는 말을 하십니까?”
“어린 아이의 울음을 달래려고 그러네.”
“울음을 그쳤을 땐 어떻게 하시렵니까?”
“비심비불(非心非佛)이지.”
“이 둘 아닌 다른 사람이 찾아오면 어떻게 지도하시렵니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 주겠다.”
“그 가운데서 홀연히 누군가 찾아온다면 어찌하시렵니까?”
“무엇보다도 큰 도를 체득하게 해주겠다.”
19.
어떤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바로 그대의 뜻은 어떤가?”
20.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떻게 해도 도에 계합하겠습니까?”
“나는 아직 도에 계합하지 못하였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스님께서는 별안간 후려치면서 말씀하셨다.
“그대를 후려치지 않는다면 제방에서 나를 비웃겠지.”
21.
탐원산(耽源山)에 젊은 스님 하나가 있었는데 행각하고 돌아와 스님 앞에서 원상(圓相)을 그리고는 그 위에다 절하고 서자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부처가 되고 싶지 않은가?”
“저는 눈을 비빌 줄 모릅니다.”
“내가 졌다.”
“젊은 스님은 대꾸가 없었다.”
22.
한 스님이 스님 앞에다 하나는 길게, 셋은 짧게 네 획을 긋
* 눈을 누르고 멀쩡하게 보이던 것이 겹쳐 보이는데 본심에서 망상 일으키는 것을 비유한다.
고는 말하였다.
“하나는 길고 셋은 짧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4구백비(四句百非)를 떠나 대답해 주십시오.”
그러자 스님께서는 땅에다 금 하나를 획 긋고는 말씀하였다.
“길다 짧다 말하진 못한다. 그대에게 단변을 끝냈다.”
23.
스님께서 한 스님을 시켜 경산 법흠(徑山法欽:714-792)스님에게 글을 보냈는데 그 속에는 일원상(一圓相)이 그러져 있었다.
경산스님은 뜯자마자 붓을 찾아 가운데 한 점을 찍었다.
그 뒤 어떤 스님이 혜충국사(慧忠國師: ?-775)에게 이 상황을 말씀드렸더니, 국사는 말하였다.
“법흠스님이 오히려 마조대사에게 속았구나.”
24.
한 강사(講師)가 찾아와서 물었다.
“선조에서는 어떤 법을 전수합니까?”
스님게서 되물었다.
“강사는 어떤 법을 전해 주는가?”
“외람되게도 20여본(本)의 경론을 강의합니다.”
“그렇다면 사자(獅子)가 아닌가.”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스님께서”어흠!“하고 소리를 내자 강사가 말하였다.
“이것이 법이군요.”
“무슨 법인가?”
“사자가 굴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스님께서 잠자코 있자 강사가 말하였다.
“이것도 법이군요”
“무슨 법인가”
“사자가 굴 속에 있는 법입니다.”
“나오지도 않고 들어앉지도 않는 것은 무슨 법인가?”
강사는 대꾸가 없었다. 드디어 하직을 하고 문을 나오는데 스님께서 “좌주여!”하고 불렀다. 강사가 머리를 돌리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게 무엇인가?”
강사가 역시 대꾸가 없자 스님께서는 “이 둔한 중아!”하셨다.
25.
홍주(洪州) 염사(廉使)가 물었다.
“술과 고기를 먹어야 옳습니까, 먹지 않아야 옳습니까?”
“먹는 것은 그대의 국록(國祿)이며, 먹지 않는 것은 그대의 불복(佛福)입니다.”
26.
약산 유엄(藥山惟儼:745-828)스님이 처음 석두스님을 참례한 한 자리에서 물었다.
“3승 12분교(三乘十二分校)라면 제가 대략은 압니다. 남방에 서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 한다는 소문은 늘 들었는데 정말 알지 못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스님께선 자비로 가르쳐 주십시오.”
석두스님이 말하였다.
“이렇게 해도 안되고 이렇게 하지 않아도 안되며, 이렇게 하거나 이렇게 하지 않음 둘다 안된다. 자 어떻게 하겠는가?”
약산스님이 어찌할 바를 모르자 석두스님이 말하였다.
“그대의 인연은 여기에 있질 않으니 그만 마조스님의 처소로 가보게.”
약산스님이 명을 받들어 스님께 공손히 절을 하고는 앞에 물었던 것을 그대로 묻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어느 때는 그에게 눈썹을 드날리고 눈을 깜작이게 하며, 어느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고 어뗜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 그대는 어떠한가?”
약산스님이 말끝에 깨치고 절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였다.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나에게 절을 하느냐?”
“제가 석두스님 처서에서는 무쇠소 등에 달라붙은 모기와도 같았습니다.”
“그대가 그렇게 되었다면 잘 간직하게.”
그 뒤 3년 동안 시봉을 하였는데 하루는 스님께서 물으셨다.
“그대는 요사이 견처(見處)가 어떠한가?”
“껍데기는 다 벗겨지고 알맹이 하나만 남았을 뿐입니다.”
“그대의 경지의 마음(心體)이 순조로와 사지(四肢)까지 편안하다 하겠다. 그렇게 되었을진대 어째서 세 가닥 대테(蔑)로 아랫배를 조르고 아무데나 가서 주지살이를 하지 않는가?”
“제가 무어라고 감히 주지노릇한다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네. 항상 다니기만 하고 머물지 말라는 법은 없고, 항상 다니가만 하고 다니지 말라는 법도 없다네. 이익되게 하고 싶어도 이익될 것이 없고, 위하려 하나 위할 것도 없다네. 배(船)를 만들어야지. 이 산에 오래 머물지 말게.”
이리하여 약산스님은 스님을 하직하였다.
27.
단하 천연(丹霞天然:739-824)스님이 두번째 스님을 참례하러 왔을 때 였다. 아직 참례하기도 전에 바로 큰 방에 들어가 나한상의 목을 말타듯 타고 앉았다. 그러자 대중들이 경악하여 급히 스님께 아뢰었다. 스님께서 몸소 큰 방으로 들어가 그를 살펴보더니 말씀하셨다.
“천진한(天然) 내 아들이로군.”
단하 스님은 즉시 땅으로 내려와 절하며“대사께서 법호를 주셔서 감사합니다”하였는데 이 인연으로 ‘천연(天然)’이라 이름하였다.
* 중국의 한 은사는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 뱃속이 터질까 걱정하여 대나무테로 배를 싸고 다녔다. 여기서는 공부가 완숙된 경제를 말한다.
28.
담주 혜랑(潭州慧郞)스님이 처음 참례하자 스님께서 물으셨다.
“그대는 찾아와서 무엇을 구하느냐?”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구합니다.”
“부처님에게는 지견이 없다. 지견은 마군일 뿐이다. 그대는 어디서 왔느냐?”
“남악(南嶽)에서 왔습니다.”
“그대가 남악에서 오긴 했으나 아직 조계의 심요(心要)를 모르는구나. 속히 그 곳으로 되돌아가야지. 다른 데로 가서는 안된다.”
29.
스님께서 한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호남에서 왔습니다.”
“동정호(洞庭湖)에는 물이 가득찼더냐?”
“아닙니다.”
“때맞은 비가 그렇게나 내렸는데도 아직 가득 차지 않았더냐...”
도오(道吾)스님은“가득찼다”하였고,운암(雲岩)스님은“담담하다”하였으며,동산(洞山)은 “어느 겁(劫)엔들 모자란 적이 있었으랴”하였다.
마조록
(祖堂集)
1. 행 록
회양(懷讓)스님의 법을 이었고, 강서(江西)에서 살았다. 스님의 휘는 도일(道一)이며, 한주(漢州) 시방현(十方懸) 사람으로 속성은 마(馬)씨였다. 나한사(羅漢寺)에서 출가하여 회양 스님에 의해 마음의 눈을 뜬 뒤로는 남창(南昌)에서 교화를 펴셨다.
2. 시중.감변
1.
스님께서는 대중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였다.
“그대들은 지금 자신의 마음이 곧 부처임을 믿어야 한다. 이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다(卽心是佛). 그러므로 달마(達摩)대사께서 남천축국(南天竺國)에서 오셔서 상승(上乘)인 일심법(一心法)을 전하여 그대들을 깨닫게 하셨다. 또 자주 「능가경」에 말씀하기를 ‘부처님은 마음을 근본으로 하시고 아무 방편(門)도 쓰지 않은 방편을 펴셨다’하였으며, 또 말씀하시기를 , ‘법을 구하는 이는 아무 구할 것이 없어야 한다.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따로 마음이 없다’하셨다.
선(善)을 취하지도 말고 악(惡)을 버리지도 말아야 하며, 더럽거나 깨끗한 쪽에 모두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죄의 성품이 공함을 통달하면 생각생각 어디에도 죄를 찾을 수가 없는데, 그것은 자기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3계가 오직 마음일 뿐이며 삼라만산이 한 법에서 나온(印)것이다. 형상(色)을 볼 때, 그것은 모두가 마음을 보는 것인데, 마음 스스로가 마음이라 하지 못하므로 현상을 의지해서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황따라 말하면 될 뿐, 현상(卽事)에든 이치(卽理)에든 아무 걸릴 것이 없다. 수행의 결과로 얻어지는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에서 난 것은 형상(色)이라 하는데, 형상이 공함을 알기 때문에 난 것은 동시에 난 것이 아니다. 이 뜻을 체득하면 그때그때 옷 입고 밥 먹으며 부처될 씨앗을 기르면서 그저 인연따라 시절을 보내면 될 뿐이니, 더 이상 무슨 일이 있겠는가.
그대들은 나의 가르침을 받고 나의 게송을 들어보아라
마음 바탕을 때에 따라 말하니
보리도 역시 그러할 뿐이라네
현상에나 이치에나 모두 걸릴 것 없으니
나는 그 자리가 나지 않는 자리라네
心地隨時說 菩提亦只寧
事理俱無碍 當生卽不生
2.
홍주(洪州)태안사(太安寺)의 주지는 경과 논을 강론하는 강
사(座主)였는데 오직 스님(마조)을 비방하기만 하였다.
하룻밤은 삼경(三更)에 귀신사자(鬼使)가 와사 문을 두드리니, 주지가 물었다.
“누구시오?”
“귀신세계의 사잔인데 주지를 데리러 왔다.”
“내가 이제 예순 일곱인데 40년 동안 경론을 강하여 대중들에게 공부하게 하였느나 말다툼만 일삼고 수행은 미처 하지 못했으니, 하루 밤 하루 낮만 말미룰 주어 수행케 해주시오.”
“40년 동안 경론을 강의하기를 탐하면서도 수행을 못했다면 이제사 다시 수행을 해서 무엇에 쓰겠는가? 한창 목마른데 우물을 파는 격이니, 무슨 소용이 있으랴.”
“주지가 아까 말하기를, ‘경론 강하기만 탐하여 대중에게 공부하게 했다’ 하는데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인가? 경전에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스스로를 제도한 뒤에 남을 제도하고,스스로가 해탈한 뒤에 남을 해탈케 하고, 스스로를 조복한 뒤에 남을 조복시키고, 스스로를 고요하게 한 뒤에 남을 고요하게 하고, 스스로가 편안한 뒤에 남을 편안케 하고, 스스로가 깨끗한 뒤에 남을 깨끗하게 하고, 스스로가 열반에 든 뒤에 남을 열반에 들게 하고, 스스로가 줄거운 뒤에 남을 즐겁게 하라‘하셨는데 그대는 자신을 편안하고 고요하게 하지 못했는데 어찌 남에게 도업(道業)을 이루게 할 수 있겠는가.
듣지 못했는가. 금강장(金剛藏)보살이 해탈월(解脫月)보살에게 말하기를, ‘내가 바른 행을 닦은 뒤에야 남에게 바른 행을
닦게 할 수 있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스스로가 바른 행을 닦지 못하고서 남에게 수행케 함은 옳지 못하기 때문입니다’하였다. 그대는 더러운 생사심으로 입을 노리고 따지기만 하여 불교를 잘못 전하여 어리석은 중생을 속였다. 저 세계의 왕이 화가 나서 그대를 잡아다가 그 세계의 칼숲 지옥에 잡아 넣어 혀를 끊으라 했으니, 끝내 피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또 부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는가.
말로서 설한 법을
작은 지혜로 망녕되게 분별하니
그러므로 장애를 일으켜서
자기 마음을 알지 못한다.
자기 마음을 알지 못하거니
어찌 바른 도를 알리요
저 뒤바뀐 지혜 때문에
온갖 죄악을 더한다.
言詞所說法 小智妄分別
是故生障碍 不了於自心
不能了自心 云何知正道
彼由顚倒慧 增長一切惡
그런데 그대는 40년 도안 구업(口業)을 지었으니, 지옥에 들지 않으면 어찌겠는가.
또 옛부터 경전에 분명한 글이 있다. 즉 ‘말로써 모든 법을 말씀하여도 실상(實相)을 나타내지 못한다’ 하였는데 그대는 망상(妄想)으로 입을 놀려 어지러이 말했다. 그러므로 반드시
죄를 받아야 하니, 다만 자신을 탓할지언정 남을 원망치는 말라. 지금 어서 빨리 가자. 만일 늦으면 저 왕께서 나를 꾸짖을 것이다.“
그러자 둘째 사자가 말했다.
“저 왕께서 벌써 이런 사실을 아실터이니, 이 사람에게 수행케 해준들 무방하지 않겠는가?”
첫째 사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하루쯤 수행하도록 놓아 주겠소. 우리들이 돌아가서 왕에게 사뢰어 허락해 주시면 내일 다시 오겠고, 만일 허락치 않으시면 잠시 뒤에 다시 오겠소.”
사자들이 물러간 뒤에 주지가 이 일을 생각했다.
‘귀신 사자는 허락했으나 나는 하루 동안 어떤 수행을 해야하는가.’
아무 대책도 없었다. 날이 밝기를 기다릴 겨를도 없이 개원사(開元寺)로 달려가서 문을 두드리니, 문지기가 말했다.
“누구시오.”
“태안사 주지인데 스님께 문안을 드리러 왔소.”
문지지가 문을 열어주니, 주지는 곧 스님(마조)께로 가서 앞의 일을 자세히 말씀드리고 온몸을 땅에 던져 절을 한 뒤에 말했다.
“죽음이 닥쳐왔는데 어째해야 되겠습니까? 바라옵건데 스님께서 저의 남은 목숨을 자비로써 구제해 주십시오.”
스님께서는 그를 곁에 서 있게 하였다. 날이 새자 귀신사자는 태안사로 가서 주지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다시 개원사로
와서 주지를 찾았으나 차지 못했다.
이때, 스님과 주지는 사자를 보았으나 사자는 스님과 주지를 보지 못했다.
한 스님이 이 일을 들어 용화(龍華)스님에게 물었다.
“주지는 그때 어디로 갔었기에 사자가 찾지 못했습니까?”
“우두(牛頭)스님이니라.”
“그렇다면 국사(國師)께서는 당시 굉장했겠습니다.”
“남전(南전)스님이니라.”
3.
어느날 공양 끝에 한 스님이 와서 몸가짐을 가다듬고 법당으로 올라와 스님께 인사를 하니, 스님께서 물었다.
“지난밤엔 어디에 있었는가?”
“산 밑에 있었습니다.”
“밥은 먹었는가?”
“아직 먹지 않았습니다.”
“광에 가서 밥을 찾아 먹어라.”
그 스님은 대답하고 광으로 갔다. 그때 백장(百丈)스님이 전좌(典座) 소임을 맡았었는데 선뜻 자기 몫을 나누어 주어 공양케 하니, 그는 밥을 다 먹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백장스님이 법당으로 올라가니, 스님께서 물었다.
“아까 밥을 먹지 못한 스님이 있었는데 공양 좀 주었는가?”
“예, 벌써 공양을 마쳤습니다.”
“그대는 뒷날 무량한 복을 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스님께선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그는 벽지불(벽支佛)의 지위에 이른 스님이기 때문이다.”
“스님께서는 범인(凡人)으로서 어찌하여 벽지불의 절을 받으셨습니까?”
“신통변화로는 그렇지만 불법 한마디 하는 데는 나만 못하다.”
4.
스님께서 어느날, 선상(선상)에 올라 앉자마자 침을 뱉으니, 시자가 물었다.
“스님께서는 어찌하여 방금 침을 뱉으셨습니까?”
“노승이 여기에 앉으니 산하대지(山河大地)와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모두 여기에 있구나! 그게 싫어서 침을 뱉았다.”
“종은 일인데 스님께서는 어찌하여 그것을 싫어하십니까?”
“너라면 좋겠지만 나는 싫다.”
“이는 누구의 경지입니까?”
“보살의 경지다.”
나중에 고산(鼓山)스님이 이 인연을 들어 말했다.
“옛사람은 그러하지만 여러분들은 보살의 경지도 아직 얻지 못했다.”
또 말했다.
“옛사람들은 보살까지도 싫어했다. 비록 싫어했으나 보살의
지위를 면저 중득한 뒤에 싫어한 것이라야 싫어함이 된다. 노승은
보살의 지위를 알지도 못했으니, 어떻게 그런 일을 싫어하랴.“
5.
서천(西川)에 황삼랑(黃三郞)이라는 이가 있어, 두아들을 스님께 귀의케 하여 출가하도록 했다. 한 해가 남짓 지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지가 두 스님을 보자마자 부처님과 똑같다는 생각을 내어 절을 하면서 말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를 낳은 이는 부모요 나를 완성해 주는 이는 벗이다’라고 했는데, 두 스님은 벗이 되어 이 늙은이를 완성시켜 주시오.”
두 사미가 말했다.
“아버지께서 비록 나이가 많으시나 그러한 마음이 있으시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노인은 몹시도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거사가 두 비구를 따라 스님(마조)께 갔다. 스님들이 그동안의 일을 자세히 하니 스님께서는 곧 법당으로 올라갔다. 황심랑도 법당 앞으로 나아가니, 스님께서 소리쳤다.
“황삼랑이 아닌가?”
“예, 그렇습니다.”
“서천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대는 서천에 있는가, 홍주(洪州)에 있는가?”
“가정에는 두 가장이 업고, 나라에는 두 왕이 없습니다.”
“그대는 나이가 얼마나 되는가?”
“여든 다섯입니다.”
“비록 그렇게 계산하나 무슨 나이인가?”
“만일 스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일생을 헛 보낼 뻔 했습니다. 스님을 뵌온 뒤에는 칼로 허공을 긋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어디를 가나 진실이리라.”
6.
황삼랑이 어느날, 태안사에 가서 마루 앞에서 통곡을 하니, 양(亮) 좌주가 물었다.
“무슨 일로 통곡을 합니까?”
“죄주를 위해 웁니다.”
“나를 위해 울다니, 무슨 뜻입니까?”
“제가 마조스님께 귀의하여 출가해서 가르침을 받자마자 깨달았다는 말을 들으셨을 터인데 여러분 좌주들은 공연한 이야기나 지껄여서 무엇을 하시렵니까?”
좌주가 이 말에 발심하여 곧 개원사로 가니, 문지기가 스님께 아뢰었다.
“태안사 양좌주가 와서 스님을 뵙고 불법을 묻고자 합니다.”
이에 스님께서 법상에 오르니, 좌주가 와서 뵈었다.
스님께서 좌주에게 물었다.
“좌주는 60권 화엄을 강의한다고 들었는데 그런가?”
“부끄럽습니다.”
“어떻게 강의하는가?”
“마음으로 강의합니다.”
“아직은 경론을 강한 줄 모른는군.”
“어째서 그렇습니까?”
“마음(心)은 재주 부리는 광대 같고, 의식(意)은 광대놀이에 장단맞추는 이 같다 했는데, 어찌 경론을 강의할 줄 알겠는가?”
“마음이 강의할 수 없다면 허공이 강의를 합니까?”
“오히려 허공이 강의할 수 있다.”
좌주가 뜻에 맞지 않아, 당장 나가서 섬돌을 내려서려다가 크게 깨닫고 다시 돌아와 절을 하니, 스님께서 말했다.
“이 둔한 중아! 절은 해서 무엇하느냐.”
양좌주가 일어나니, 등에 땀이 축축히 흘렀다. 밤낮으로 엿새동안 스님 곁을 떠나지 않고 모시다가 나중에 사뢰었다.
“이제 스님 곁을 떠나 스스로 수행할 길을 찾으려 하오니, 바라옵건대 스님께서는 오래오래 세상에 계시어 많은 중생을 제도해 주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좌주가 본사로 돌아와서 대중에게 고했다.
“내 일생 동안의 공부를 앞지를 이가 아무도 없다고 여겼더니, 오늘 마조스님 앞에서 꾸지람을 받고는 미혹한 생각(妄情)이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는 학인들을 모두 물리치고 홀로 서선으로 들어간 뒤에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양좌주가 이런 싯귀를 남겼다.
30년 동안 아귀노릇을 하다가
오늘에야 사람의 몸으로 회복했네
푸른산엔 본디 외로운 구름이 벗이었는데
동사가 다른 이를 따라 딴 사람을 섬겼네
三十年來作餓鬼 如今始得復人身
靑山自孤有雲伴 童子從他事別人
장남(장南)스님이 이 일을 들어서 물었다.
“허공이 경을 강하면 어떤 사람들이 듣는가?”
한 스님이 대답했다.
“아까부터 잠시 함께 기뻐했습니다.”
“무슨 뜻인가?”
“다른 사람이라면 문득 도로 거두시라 했을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역시 불을 잡을 마음이 있도다.”
7.
스님께서 상당하여 그저 잠자코 있으니, 백장스님이 면전에서 자리를 걷어버렸다. 스님은 자리에서 내려왔다.
8.
어떤 이가 물었다.
“무엇이 불법의 요지입니까?”
“바로 그대가 몸과 목숨을 놓아버릴 곳이다.”
“4구백배(四句百非)를 떠나 서쪽으로부터 오신 뜻을 바로 보여 주십시오. 번거로운 말씀은 필요없습니다.”
“내가 오늘은 아무 생각도 없어서 그대에게 말해 줄 수 없으니, 서당(西堂)에게 가서 묻거라.”
그 스님이 서당스님에게 가서 앞의 일을 자세히 말하니, 서당스님이 말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큰스님께 묻지 않았는가?”
“큰스님께서 저더러 스님께 물으라 하십니다.”
이에 서당스님이 얼른 손으로 머리를 짚으면서 말했다.
“내가 오늘 몹시도 머리가 아파서 말해 줄 수 없으니, 해(海:百丈)사형께 가서 묻거라.”
그 스님이 백장스님에게 가서 앞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물으니, 백장스님이 말했다.
“나는 그 경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그 스님이 다시 와서 아뢰니, 마조스님께서 말했다.
“장(藏:서당)의 머리는 희고,해(海)의 머리는 검도다.”
9.
스님께서 인편에 선경산(先徑山) 도흠(道欽)스님에게 글을 보냈는데, 그 속에는 원상(圓相)만이 그려져 있었다. 경산스님이 이를 보자마자 붓을 들어 원상 안에다 한 획을 보탰다.
어떤 사람이 이 일을 혜충(慧忠)국사께 전하니, 국사께서 말했다.
“흠(欽)대사가 또 마(馬)대사에게 속아넘어갔구나.”
10.
어떤 사람이 스님의 앞에다 하나는 길게, 셋은 짧게 네 획을 긋고는 말하였다.
“하나는 길고 셋은 짧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 네 귀절을 떠나서 스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이에 스님께서 한 획을 그으면서 말했다.
“길다고도 말할 수 없고, 짧다고도 말할 수 잆으니, 그대에게 대답해 마쳤노라.”
혜충국사께서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다르게 대답했다.
“어째서 나에게 묻지 않았던가?”
11.
한 좌주가 스님께 물었다.
“선종에서는 어떤 법을 전수합니까?”
스님께서 되물었다.
“좌주는 어떤 법을 전해 주는가?”
“40권 경론을 강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사자(獅子)가 아닌가.”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스님께서 ‘어흠!’하고 소리를 지르니, 좌주가 말했다.
“이것이 법이군요.”
“무슨 법인가?”
“사자가 굴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스님께서 잠자코 있으니, 좌주가 또 말했다.
“이것도 법이군요.“
“무슨 법인가?”
“사자가 굴 속에 있는 법입니다.”
스님께서 따져 물었다.
“나오지도 않고 들어앉지도 않는 것은 무슨 법인가?”
좌주가 대답을 못하고 하직하고서 문을 나오는데 스님께서 불렀다.
“좌주여!”
“예.”
“이게 무엇인가?”
좌주가 대답이 없자 스님께서는 “이 둔한 중아!”하셨다.
이에 대하여 뒤에 백장스님은 대신 말했다.
“보았는가?”
12.
스님께서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화남(화南)에서 왔습니다.”
“동호(東湖)에는 물이 가득찼던가?”
“아닙니다.”
“때맞은 비가 그렇게나 내렸는데도 아직 가득차지 않았더냐?”
이에 도오(道吾)스님이 말했다.
“그득히 찼습니다.”
운암(雲岩)스님이 말했다.
“잔잔하였습니다.”
동산(洞山)스님이 말했다.
“어느 겁(劫)엔들 줄을 적이 있었습니까?”
13.
스님께서 다음날 입멸하시려는데 그날 저녁에 원주(院主)가 물었다.
“스님께서는 4대가 평안치 못하셨는데 요즘은 어떠십니까?”
스님께서 대답했다.
“일면불 월면불(日面佛月面佛)이니라.”
14.
분주(汾州)스님이 좌주로 있을 때 42권 경론을 강하고 스님께 와서 물었다.
“3승 12분교는 제가 대략 그 뜻을 압니다만 선가(宗門)의 뜻은 무엇인지요?”
스님께서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좌우에 사람이 많으니, 일단 가거라.”
분주스님이 자리를 떠서 문을 나오는데 발이 문턱에 걸치자 마자 스님께서 “좌주야”하고 부르니, 분주스님이 돌아보면서 “예”하고 대답했다.
이에 스님께서 말했다.
“이것이 무엇인가?”
분주스님은 당장에 깨닫고는 절하고 일어나면서 말했다.
“제가 42권 경론을 강하면서 아무도 나를 능가할 이가 없다고 여겼었는데, 오늘 스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일생을 헛 보낼 뻔 하였습니다.”
15.
스님께서 백장(百丈)스님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떤 법으로 사람을 지도하는가?”
백장스님이 불자를 세워 대답하니, 스님께서 다시 물었다.
“다만 그것뿐인가, 아니면 따로 있는가?”
백장스님이 주장자를 던졌다.
한 스님이 이 일을 들어 석문(石門)스님에게 물었다.
“한 마디 말로 마대사의 두 뜻을 점칠 수 있는 길을 말씀해 주십시오.”
석문이 불자를 둘어 일으키면서 말했다.
“평상시대로 하는 것도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것이다.”
3. 천 화
스님 밑에서 친히 법을 이어받은 제자 중에 88명이 세상에 알려졌고, 숨어서 지낸 이는 구 수효를 알 수 없었다.
스님 성품은 인자하고 모습은 준수하였으며, 발바닥에는 두개의 고리 무뉘가 있고, 머리에는 가마가 셋이 있었다. 설법하며 세상에 머무르기 40여 년 동안에 도를 닦는 무리가 천 명이었다.
스님께서 정원(貞元) 4년, 무진(戊辰) 2월1일에 입적하니, 탑은 늑담(늑潭)의 보봉산(寶峯山)에 있다. 칙명으로 대적선사 대장엄지탐(大寂禪師大藏嚴之塔)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배상(裵相)이 액(額)을 썼고, 좌승상(左丞相) 호득흥(護得興)이 비문을 지었다.
정수(淨修)선사가 송했다.
마조 도일(馬祖道一)선사는
돌처럼 쇠처럼 완전하게 수행하여
근본을 깨달아 초탈했으니
곁가지를 찾으면 헛수고만 할 뿐이다.
오래 정을 닦던 몸과 마음을
한꺼번에 내던져버리고
남창(南昌)에서 크게 교화를 펴시니
싸늘한 소나무가 천척(千尺)이로다.
馬師道一 行全金石
悟本超然 尋枝勞役
久定身心 一時抛擲
大化南昌 寒松天尺
백장록
(四家語錄)
■ 일러두기
1. 백장어록 본문의 편집체지는 사가어록 임제어록을 기준으로 하여 행록․상당․감변․천화등으로 구분하였다.
2. 백장광록은 사가어록과 고존숙어록,속장경에 각각 체지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이 책에서는 사가어록의 체제에 따라 일련번호를 달았다.
3. 사가어록과 조당집의 백장록은 그 구성과 내용상 서로간에 누락 된 부분과 상이한 점이 있어 함께 실었다.
4. 스님들의 생몰연대는 「선학대사전(禪學大辭典)」(大修館書店,197 9)과 「중국불학인명사전(中國佛學人名辭典)」(明復編,方便出版 社)를 참고 하였다.
5. 부록으로는 경안무자(慶安戊子)의 화각본(和刻本)의 사가어록과 해인사 소장본「조당집(祖堂集)」에 있는 백장록을 실었다.
백장어록
(百丈語錄)
1. 행록
1.
스님의 휘(諱)는 회해(懷海:749-814)이며, 복주(福州) 장락(長樂)사람이다. 성은 왕씨(王氏)로 어린 나이네 세속을 떠나 삼학(三學)을 두루 닦았다. 그때 대적(大寂:709-788, 馬祖스님의 호)스님이 강서(江西)에서 널리 교화를 펴고 있었으므로 찾아가 마음을 쏟아 의지하였는데, 서당 지장(西堂智藏:735-814)․남전 보원(南전普願:748-834)스님과 함께 나란히 깨친 분이라고 이름났었다. 그리하여 당시 세 분의 대사가 우뚝 서게 된것이다.
스님이 마조(馬祖)스님을 모시고 가다가 날아가는 들오리떼를 보았는데, 마조스님께서 물으셨다.
“저게 무엇인가?”
“들오리입니다.”
“어디로 갈까?”
“날아갔습니다.”
마조스님께서 갑자기 머리를 돌려 스님의 코를 한번 비틀자 아픔을 참느라고 소리를 내질렀다. 마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시 날아갔다고 말해보라.”
스님께서는 그 말끝에 느낀 바가 있었다.
시자들의 거처인 요사채로 돌아와 대성통곡을 하니 함께 일하는 시자 하나가 물었다.
“부모 생각 때문인가?”
“아니.”
“누구에게 욕이라도 들었는가?”
“아니”
“그렇다면 왜 우는가?”
“마조스님께 코를 비틀렸으나 철저하게 깨닫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깨닫지 못하였는가?”
“스님께 직접 물어보게.”
그리하여 그 시자가 마조스님께 물었다.
“회해시자는 무슨 이유로 깨닫지 못했습니까? 요사채에서 통곡을 하면서 스님께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마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가 알테니 그에게 묻도록 하라.”
그 시자가 요사채로 되돌아와서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그대가 알 것이라 하시며, 나더러 그대에게 물으라 하셨네.”
스님(백장)이 여기에서 깔깔 웃자, 그 시자가 말하였다.
“조금 전에 통곡하더니 무엇 때문에 금방 웃는가?”
“조금 전에 울었지만 지금은 웃네.”
그 시자는 그저 멍할 뿐이었다.
2.
다음날, 마조스님께서 법당에 올라왔다. 대중이 모이자마자 스님께서 나와서 법석(法席)을 말아버렸더니 마조스님은 바로 법좌에서 내려왔다. 스님께서 방장실로 따라가자 마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조금 전에 말도 꺼내지 않았었는데 무엇 때문에 별안간 자리를 말아버렸느냐?”
“어제 스님께 크를 비틀려 아파서였습니다.”
“그대는 어제 어느 곳에 마음을 두었느냐?”
“코가 오늘은 더이상 아프질 않습니다.”
“그대는 어제 일을 깊이 밝혔구나.”
스님께서는 절하고 물러났다.
다른본(本)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마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디 갔다 오느냐?”
“어제는 우연히 외출하게 되어 미처 모시지 못하였습니다.”
마조스님이 ‘악!’ 하고 고함을 치자 스님께서는 바로 나가 버렸다.
3.
스님께서 다시 참례하면서 모시고 서 있는 차에 마조스님은 법상 모서리의 불자(拂子)를 보고 있었으므로 스님께서 물었다.
“이 불자를 통해서(卽) 작용합니까, 아니면 이를 떠나(離) 작용합니까?”
마조스님이 말씀하였다.
“그대가 뒷날 설법을 하게 된다면 무엇을 가지고 대중을 위하겠느냐?”
스님께서 불자를 잡아 세웠더니 마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통해서(卽) 작용하느냐, 이를 떠나서 작용하느냐?”
스님께서 불자를 제자리에 걸어 두자 마조스님께서는 기세 있게 악! 하고 고함을 쳤는데 스님께서는 곧장 사흘을 귀가 막었다.
이로부터 우뢰같은 명성이 진동하였다. 신도들이 청하여 홍주(洪州)의 신오(新吳) 국경지대인 대웅산(大雄山)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거처하는 바위와 묏부리가 깎아지른 듯 높았기 때문에 스님을 백장(百丈)이라 부르게 되었다.
여기에 머문 지 한 달이 뭇되어 현묘한 이치를 참구하는 남자들이 사방에서 찾아왔는데, 당시 위산 영우(위山靈우:771-853)스님과 황벽 희운(黃蘗希運)스님이 으뜸이었다.
4.
황벽스님이 스님의 처소에 와서 있다가 하루는 하직을 하면
서 말였다.
“마조스님을 친견하고 싶습니다.”
“스님께서는 이미 돌아가셨다.”
“그렇다면 어떤 법문을 남기셨는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그리하여 마조스님께서 두번째 참례했을 때 불자를 세웠던 이야기를 해주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불법은 작은 일이 아니다. 그때 내가 마조스님의 고함(喝)을 듣고 나서 그 뒤로 사흘을 귀가 먹었다.”
황벽스님은 그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혀를 내밀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자네는 이제부터 마조스님의 법을 잇지 않으려는가?”
“아닙니다. 오늘 스님의 법문으로 마조스님의 큰 기틀(大機)에서 나온 작용을 볼 수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마조스님을 모릅니다. 만일 마조스님을 잇는다면 앞으로 나의 법손을 잃을것입니다.”
“그래, 그렇지. 견처(見處)가 스승과 같으면 도는 반쯤밖에 안되고, 견처가 스승을 능가해야만 전수를 감당할 수 만하다. 그대는 스승을 훨씬 넘어설 만한 견처가 있군.”
그 뒤에 위산스님이 앙산 혜적(仰山慧寂:803-887)스님에게 물었다.
“백장스님이 마조스님을 두번째 참례하고 불자를 세웠던 인연에서 두 분의 경지가 어떠하였겠는가?”
“큰 기틀(大機)의 작용을 환하게 나타낸 것입니다.”
“마조스님은 84명의 선지식을 배출하였는데, 몇 사람이 큰 기틀(大機)을 얻고 몇 사람이 큰 작용(大用)을 얻었겠는가?”
“백장스님은 기틀을 얻었고, 황벽스님은 그 작용을 얻었습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가 말로 떠드는 무리(唱道師)일 뿐입니다.”
“그래, 그렇지.”
5.
마조스님이 하루는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느냐?”
“산 뒤에서 옵니다.”
“한 사람을 만났는가?”
“만나지 못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만나질 못했는가?”
“만났더라면 스님께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어디서 이런 소식을 얻었는가?”
스님께서“저의 잘못입니다”하자, 마조스님은 말씀하셨다.
“아니 내 잘못일세.”
2. 상당
1.
스님께서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신령한 광채 호젓이 밝아
육근․육잔을 아득히 벗어났고
영원한 진상 그대로 드러나
문자에 매이지 않도다
심성(心性)은 물듬이 없어
그 자체 본래 완전하나니
허망한 인연 여의기만 한다면
그대로가 여여(如如)한 부처라네.
靈光獨耀 脫逈根塵
體露眞常 不拘文字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2.
어떤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신통한 일입니까?”
“대웅산(大雄山)에 홀로 앉아 있는 것이다.”
그 스님이 절을 하자, 스님께서는 그대로 후려쳤다.
3.
서당(西堂)스님이 스님께 물었다.
“스님은 뒷날 어떻게 사람들에게 법을 열어보이겠습니까?”
스님이 손을 두 번 오무렸다 펴자, 서당스님이 말하였다.
“다시 어떻게 하겠습니까?”
스님은 손을 세 번 끄덕끄덕하였다.
4.
마조스님이 사람을 시켜 편지와 장(醬) 세 항아리를 보내왔다. 스님께서는 법당 앞에 죽 놓으라 하고는 상당하더니 대중이 모이자마자 주장자로 장항아리를 가리키면서 말씀하셨다.
“바로 말을 한다면 부수지 않겠지만 못하면 부수겠다.”
아무리 대꾸가 없자 스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깨버리고 방장실로 돌아갔다.
5.
어떤 스님이 통곡을 하며 법당으로 들어가자 스님께서 물었다.
“무슨 일인가?”
“부모를 함께 잃었습니다. 스님께서 날을 잡아 주십시오.”
“내일 한꺼번에 묻어버리자.”
6.
한 스님이 물었다.
“경전을 의지하여 의미를 이해하면 삼세 모든 부처님의 원수가 되며, 경전을 떠난 한 글자는 마군의 말과 같다 하니 이럴땐 어찌합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동정(動靜)을 굳게 지키면 삼세 부처의 원수가 되며, 그렇다고 이밖에서 따로 구하면 마군의 말이 된다.”
7.
어느 땐가는 설법이 끝나 대중들이 법당에서 내려가는 차에 스님께서 그들을 불렀다. 대중이 머리를 돌리자 스님께서 말씀 하셨다.
“이 무엇인고!”
8.
스님께서 대중운력으로 밭을 개간하고 돌아오는 길에 희운 (希運: 황벽)스님에게 물었다?“
“밭 개간이 쉽질 않지?”
“대중들이 다 일을 했습니다.”
“도용(道用)만 번거롭게 하였군.”
“어찌 감히 일을 그만두겠습니까?”
“얼마나 개간 하였는가?”
황벽스님이 밭을 매는 시늉을 하는데 스님께서 별안간 할(喝)하고 고함을 치자 황벽스님이 귀를 막고 나가버렸다.
9.
스님께서 황벽스님에게 물었다.
“어디 갔다 오느냐?”
“산 아래서 버섯을 따옵니다.”
“산 아래 호랑이 한 마리가 있다는데 너도 보앗느냐?”
황벽스님이 호랑이 소리를 내자 스님께서는 허리춤에서 도끼 를 집어들고 찍을 기세였다. 황벽스님은 스님을 잡아 세우면서 얼른 따귀를 후리쳤다.
스님께서는 느즈막하게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대중들아, 산 아래 호랑이 한 마리가 있으니 그대들은 드나들면서 잘 살펴다녀라. 노승도 오늘 아침 한 입 물렸다.”
그 뒤 위산스님이 앙산스님에게 물었다.
“황벽스님의 호랑이 화두를 어떻게 보십니까?”
“스님께서는 어떻게 보십닊?”
“그때 백장스님이 도끼 한 방에 찍어 죽였어야 했는데 무엇 때문에 이 지졍에 이르렀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대는 그러면 어떻게 보는가?”
호랑이 머리에 탔을 뿐마 아니라 호랑이 꼬리도 붙들 줄 알앗습니다.“
“혜적(慧寂:앙산)아, 무슨 말을 그리 험하게 하는고.”
10.
스님께서 상당할 때마다 늘 한 노인이 항상 법을 들고 대중과 함께 흩어져 가다가 하루는 가지 않으므로 스님께서 물었다.
“서 있는 사람은 무엇하는 사람인가?”
노인은 말하였다.
“저는 과거 가섭불 (迦葉佛) 때 이 산에 살았습니다. 그때 한학인이 묻기를, 수행을 많이 한 사람도 인과에 덜어집니까‘ 하기에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대답하여 여우몸을 받았습니다. 지금 스님께서 대신 이 몸을 바꿀 만한 한 마디를 해 주십시오.”
“그럼 질문해 보게”
“많이 수행할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인과에 어둡지 않다(不昧).”
노인은 말끝에 크게 깨닫고 스님께 하직을 고하면서 말하였다.
“제가 이제는 여우몸을 벗고 산 뒤에 있을 것입니다. 불법대로 화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께서는 유나(維那)에게 종(白槌)을 쳐서 대중에게 점심뒤에 대중울력으로 죽은 스님을 장사지내겠다고 알리게 하였더
니, 대중들은 자세한 내막을 몰랐다. 스님께서는 대중을 거느리고 산 뒤 바위 아래로 가서 죽은 여우 한 마리를 지팡이로 휘저어 꺼내더니 법도대로 화장하였다.
만참(晩參)법문 때 스님께서 앞의 인연을 거론했더니, 황벽스님이 대뜸 물었다.
“옛사람은 깨닫게 해주는 한 마디 (一轉語)를 잘못 대꾸하였기 때문에 여우몸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오늘 한 마디 한 마디 어긋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가까이 오게 . 그대에게 말해주겠네.”
황벽스님이 앞으로 다가가 스님의 따귀를 한 대 치자 스님께서는 박수를 치고 웃으면서 말하였다.
“오랑캐의 수염이 붉다 하려 하였더니 여기도 붉은 수염 난 오랑캐가 있었구나.”
그때 위산스님은 회상에서 전좌 (典座:대중의 臥具나 음식 등 살림을 맡음) 일을 보았는데 사마두타(司馬頭陀)가 여우 이야기(野狐話頭)를 들어 질문하였다.
“전좌는 어떻게 하겠소?.
전좌가 손으로 문짝을 세 번 흔들자 사마가 말하였다.
“꽤나 엉성한 사람이군.”
전좌가 말하였다.
“불법응 이런 도리가 아니라네.”
그 뒤애 위산스님은 황벽스님이 물었던 여우 이야기를 들어 앙산
스님에게 물었더니, 앙산스님이 대답하였다.
“황벽스님은 항상 이 솜씨(機)를 쓰십니다.”
“말해보아라.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솜씨를 얻었는지, 스승에게서 배웠는지를.”
“이는 스승에게서 이어받은 것이기도 하고 스스로 종지를 깨달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그렇지.”
11.
황벽스님이 물었다.
“옛스님들은 어떤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셨습니까?”
스님께서 한참 말이 없자 황벽스님이 다시 물었다.
“뒷날 법손들은 무얼 가지고 법을 전해야 하겠습니까?”
스님께서는 “네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여겼더니.......”하시고는 방장실로 돌아갔다.
12.
스님께서 위산스님과 함께 일을 하다가 물었다.
“불이 있느냐?”
“있습니다?”
“어디 있느냐?”
위산스님이 땔감 한 토막을 가지고 입으로 훅 불어 스님께 건네주었더니 받으시면서 말씀하셨다.
“별레먹은 나무 같구나.”
13.
대중운력으로 김을 매는데 한 스님이 북소리를 듣더니 호미를 들고 일어나면서 깔깔 웃고 돌아가니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정말 좋구나. 이것이 관음보살이 진리에 들어가신 방편이다.”
뒤에 그 스님을 불러서 물었다.
“그대는 오늘 무슨 도리를 보았느냐?”
“저는 이른 아침에 죽을 먹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북소리를 듣고 돌아가 밥을 먹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깔깔거리면서 크게 웃었다.
14.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그대는 누군가?”
“저 아무개입니다.”
“그대는 나를 아는가?‘
“분명히 압니다.”
스님게서는 불자를 일으켜 세우더니 물었다.
“불자를 보느냐?”
“봅니다.”
스님께서는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15.
스님께서 한 스님더러 “장경(章敬)스님 처소로 가서 그가 상당 설법하는 것을 보거든 너는 바로 좌구(坐具)를 펴고 절하라. 그리고 일어나면서 한쪽 신을 벗어들고 그 위의 먼지를 소매로 털어 거꾸로 엎도록 하라” 하였다.
그 스님이 장결스님에게 가서 일러준대로 하였더니 장결스님은 말하였다.
“저의 허물입니다.”
16.
위산.오봉(五峯) . 운암 (雲巖)스님이 모시고 서 있는데 스님 (백장)께서 위산스님에게 물었다.
“목구멍과 입술을 닫고서 속히 말해보라.”
위산스님이 말했다.
“저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그대에게 말해주는 것은 사양치 않겠다만 뒷날 나의 법손을 잃을까 염려스럽구나.”
다시 오봉스님에게 물었더니, 오봉스님이 말하였다.
“스님께서도 닫으셔야만 합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머리를 갈아 그대에게 보여 주겠다.”
다시 운암스님에게 물었더니, 운암스님이 말하였다.
“제가 한 말이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거론해 보십시오.”
그리하여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목구멍과 입술을 닫고 얼른 말해보게.”
운암스님이 “대사께서도 지금(목구멍과 입술) 있지 않습니까?” 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법손을 잃었군.”
17.
상당하여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누가 한 사람 가서 서당 (西堂)스님에게 말을 전해주었으면 한다. 누가 가겠느냐?”
오봉스님이 말하였다.
“제가 가겠습니다.”
“어떻게 말을 전하려느냐?”
“서당스님을 뵙고 나서 곧 말하겠습니다.”
“본 뒤에는 무어라고 말하겠느냐.”
“돌아와서 스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18.
한 스님이 서당스님에게 물었다.
“질문이 있으면 답변이 있다는 것은 우선 그만두고 질문도 없고 답변도 없을 땐 어찌합니까?”
그러자 서당스님이 말하였다.
“썩을까 두려우냐?”
스님께서는 이 소문을 듣고 말씀하셨다.
“원래 이 사형을 의심했었지.”
“스님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일합상(一合相)도 얻지 못한다.”
19.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한 사람은 오래도록 밥을 먹지 않았는데도 배부르다 하지 않는다.”
대중은 대꾸가 없었다.
20.
운암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매일 구구하게 누구를 위하십니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그가 스스로 하도록 하지 않으십니까?”
“그에겐 자기 살림이 없다.”
21.
스님께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서 부처님께 절을 하더니 불상을 가리키면서 어머미께 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어머니가 “부처님이시다”하자,어린이가 말하였다.
“모습은 사람과 닮아 차이가 없군요. 저도 이 다음에 이렇게 되도록 하겠습니다.”
3. 천화
스님께서는 언제나 수고로운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대중들 보다 솔선하였다. 대중들이 모두가 민망하여 도구를 일찍 감추고 그만두시라고 청하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게 덕이 없어서 그러니 다른 사람을 수고롭게 해서야 되겠느냐.”
스님께서는 이리저리 연장을 찾다가 찾질 못하면 밥을 굶으셨다. 이런 연유로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밥 먹지말라”는 말씀이 세상에 퍼지게 된 것이다.
스님께서 당나라 원화(元和) 9년 (814)정월 17일에 시적 (示寂)하시니 춘추는 95세였다.
장경 (長慶) 원년(821)에 칙명으로 시호를 대지선서(大智禪師)라고 하엿으며, 탑은 대승보륜 (大勝寶輪)이라 이름하였다.
백장광록
(百丈廣錄)
백정광록 (百丈廣錄)
1.
말로는 불법과 세속을 가려야 하고, 총론과 각론을 나누어야 하며, 궁극적인 교설(了義敎語)인지 방편교설(不了義敎語)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궁극적인 교설로는 맑음을 논하고 방편교설로는 탁함을 논하며,염법(染法) 쪽의 허물을 설명하여 범부를 가려내고, 정법(淨法)
쪽의 허물을 설명하여 서인을 가려내야하니, 이것은 9부교(九部敎:교학의 총칭)에 입각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목전의 눈 먼 중생에게는 선지식의 지도를 받게 해 주어야 하며,귀머거리 속인 앞에서 말할 경우에는 직접 그를 출가시켜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으며 지혜를 배우게 해 주면 된다.
한편 테두리를 벗어난 범부에게는 그런 식으로 지도해 서는 안되니 유마힐 (維摩詰)이나 부대사(傅大士) 같은 부류가 여기에 해당한다.
백사갈마(白四갈磨)를 받은 사문 앞에서 말할 경우, 그들은 계․정․혜(戒定慧)의 힘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으니, 다시 그런 식으로 설명한다면 그것을 맞지 않는 말(非時語)이라 할 것이며, 맞지 않는 설명이르모 꾸며서 하는 말(綺語)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문에게라면 청정한 법 쪽의 허물을 설명해야 한다. 즉 있다 없다(有無)하는 등의 법을 여의고, 닦고 중득하는(修證) 모두를 떠나며, 그것을 떠났다는 것조차 떠날 것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물든 습기(習氣)를 깎아 없애려는 사문도 탐욕과 성내는 병통을 없애버리지 못했다면 역시 귀머거리도 탐욕과 성내는 병통을 없애버리지 못했다면 역시 귀머거리속인이라 할 것이니, 그에게도 선정을 닦을 지혜를 배우게 해야 한다.
이승(二承)의 경우는 탐욕과 성내는 병통을 다 쉬어 버렸으나 탐내는 마음이 없어진 경계에 눌러앉아 옳다고 여기나 이는 무색계(無色界)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처님의 광명을 가리고 부처님 몸에 피를 내는 것이므로 그에게도 선정을 닦고 지혜를 배우게 해야 하며, 깨끗하고 더러움을 구별해 주어야 한다. 더러운 법이란 탐욕․성냄.․애착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우며, 깨끗한 법이란 보리․열반․해탈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운다․
여기에서 비추어 깨달으면(鑑覺) 깨끗하고 더러운 양쪽 갈래와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법과 색․소리․냄새․맛․촉감․생각과 세간․출세간법에․털끝만큼의 애착(愛取)도 전혀 없게 된다. 이미 애착하지 않게 되고 나서는 애착하지 않음에 눌러앉아 옳다고 여기는데 그것을 처음선(初善)이라 한다. 이것은 조복된 마음(調伏心)에 안주하는 것이며 뗏목이 아까와 버리지
못하는 성문으로서 이승(二乘)의 도이며, 선나과(禪那果)이다.
애착하지도 않고 애착하지 않음에 눌러앉지도 않으면 이를 중간선(中善)이라 한다. 이는 반자교(半子敎)로서 아직은 무색계(無色界)이나 이승과 마군의 도에 떨어짐은 면하였으나, 선병(禪炳)과 보살의 속박이 있다.
애착하지 않음에 눌러 앉지도 않고 눌러앉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내지 않는다면 이것은 마지막선(後善)이라 한다. 이는 마자교(滿字敎)로서 무색계에 떨어짐을 면하고, 선울 닦는 병통에 떨어짐을 면하며, 보살승에 떨어짐을 면하고, 마왕의 지위에 떨어짐을 면한다. 그러나 지혜(智)에 막히고 지위(地)에 막히고 행(行)에 막혀 자기 불성(佛性)을 보는 데에는 마치 밤에 무엇인가를 보는 것과 같다.
불지(佛地)에서 두 가지 어리석음(二愚)을 끊는다 하는 경우는 첫째 미세소지우(微細所知愚), 둘째 극미세소지우(極微細所知愚)이다. 그러므로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은 미진(微塵)을 타파하여 경전(經卷)을 벗어났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가령 이 3구(三句:세가지 善)를 꿰뚫어 세 단계에 매이지 않는다면 교학(敎家)에서는 그것을 세 번 뛰어 그물을 벗어난 사슴에 비유하며 번뇌를 벗어난 부처라고 하는데 그를 구속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연등불(然燈佛)의 뒷 부처님이 속하며, 최상승(最上乘), 상상지(上上智)로서 불도 위에 선 것이다. 이 사람은 불성을 가졌으며 스승(導師)으로서 막힘없는 바람과 막힘없는 지혜를 구사한다. 뒤에 가서는 인과와 복덕․지혜를 자재하게 굴
리니, 수레를 만들어 인과를 실어 다르며 삶에 처하여도 삶에 매이지 않고 죽음에 처하여도 죽음에 매이지 않으며, 5음(五陰)에 처하여도 문이 여닫히듯 5음에 매이지 않아, 가고 머뭄에 자유롭고 드나듬에 어려움이 없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지위와 우열을 논할 것이 없으며 개미 몸을 받아서까지도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모두 불가사의한 정토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는 속박을 풀어주는 말일 뿐이니 저들 스스로에게 부스럼이 없다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부처다 보살이다 하는 것도 부스럼이니, 있다 없다는 식으로 법을 설명했다 하면 모조리 긁어 부스럼이 되는 것이다. 일체법은 모두 유․무(有無)에 포함되는데, 10지보살(十地菩薩)은 탁류(濁流)가 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은 청류(淸流)가 된다. 맑은 모습은 곱게 설명하지만 그것은 흐린 쪽의 허물만 말하는 것이 된다.
지난날 10대제자(十大弟子) 사리불(舍利弗)․부루나(富樓那)와 바른 믿음을 가진 아난(阿難)․삿된 믿음을 가진 선성(善星) 등은 저마다 본보기나 법칙이 있었는데, 모두들 부처님에게 설파당했던 것이다. 그들은 팔만겁을 선정에 머무는 사선팔정(四禪八定)의 아라한은 아니었으나 행할 바를 의지하고 집착하여 정법(淨法)이라는 술에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성문인(聲聞人)의 불법을 들으면 위 없는 도를 행할 마음을 내지 못하고 그래서 선근(善根)을 끊은 불성 없는 사람이라 하는 것이며, 경정(敎)에서는 이를“해탈이라는 깊은
구덩이는 두려워할 만한 곳이다“라고 하였다.
한 생각 마음이 물러나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쏜살같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물러난다고만 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일방 적으로 물러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문수.관음.세지 등이 수다원(須陀洹)지위로 되돌아와 같은 부류가 되어 이끌어 주는 경우를 물러났다 할 수는 없으니, 그런 상황을 수다원이라 부를 뿐이다. 비추어 깨달아(鑑覺) 유.무 모든 법에 매이지 않고 3구(三句)와 맞고 안맞는 모든 경계를 꿰뚫으면 백천만억의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였다는 소문을 듣는다 해도 듣지 못한 긋하고, 그 듣지 않는다는 것에 머물지도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다. 이런 사람을 두고 물러났다 한다면 잘못 생각하는 것이이다. 그들은 어디에도 매어 둘 수 없는데 이를 “부처님은 늘 세간에 계시면서도 세간법에 물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부처님이 법륜 (法輪)을 굴리느라 물러난다고 해도 불.법.승 (佛法僧)을 비방하는 것이며 ,부처님이 법륜을 굴리지 않아 물러나지 않는다고 해도 역시 불.법.승을 비방하는 것이다. 조법사(肇法師)가 말씀하시기를 , “보리의 도는 재볼 수 없음이 위없이 높고 끝없이 드넓으며 끝없이 깊숙하여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말을 하면 살받이가 되어 화살을 부르는 꼴이다” 라고 하엿다. 비추어 깨닫는다(鑑覺) 할 때, 그것은 더러움에 대한 깨끗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니 비추어 깨닫는 것이 그런 것이라 인정 한다면 비추어 깨닫는 것 바깥에 따로 무엇이 있어 모조리 마
군의 말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비추어 깨닫는다는 것을 붙들고 머문다면 그것은 마군의 말과 같으며, 자연외도 (自然外道) 의 말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비추어 깨닫는다는 것이 자기 부처라 해도 그것은 짧은 말이며 헤아리는 말이니 여우 울음소리와도 같아서 오히려 끈끈하게 달라붙는 집착 쪽에 속한다. 스스로 알고 절로 깨닫는 이것이 자기 부처인 줄 전혀 알지 못하고, 밖으로 치달려 부처를 찿는다. 선지식의 설법을 의지하여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는 것이 나오게 하는 약을 지어 밖으로 치달려 구하는 병을 치료한다. 이윽고 밖으로 치달려 구하지 않게 되면 병이 나았으니 약은 버려야 한다.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는 데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선병(禪病)이며, 영락없는 성문이다. 마치 물이 얼음이 되면 얼음 자체가 물이긴 하나 목마름을 풀어주기 어려운 것과도 같으며, 또는 꼼짝없이 죽을 병이라 하기도 하니 세상 의원들도 속수무책일 뿐이어서 원래 이들은 부처가 아니다. 부처라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한다. 부처란 중생 편에서 쓴 약이니 병이 없으면 먹을 필요가 없다. 약과 병이 함께 없으지면 맑은 물과 같다. 부처란 감초를 넣은 물이나 꿀물과도 같아 매우 달콤한 것이나 맑은 물 쪽에서 보면 원래 없다거나 있다거나를 집착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이 이치는 누구나 본래 가진 것이며, 모든 부처와 보살은 구슬(珠)을 보여주는 사람이라고도 하는데,그것은 원래 어떤 물건이 아니므로 그것을 알 필요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으며, 그것이 옳다 그르다 할 필요도 없다.
그저 상대적인 개념 (兩頭可)을 끊기만 하면 된다. 있다느니 있지 않다느니 하는 말을 끊고, 없다느니 없지 않다느니 하는 말을 끊으면 양쪽의 자취가 나타나지 않아 양쪽에서 그대를 잡아당겨도 끌리지 않으며, 어떠한 테두리(量數)도 그대를 얽어 매지 못한다 . 그리하여 부족하거나 완전하지도 않고 범부도 성인도 아니며 밝음도 어두움도 아니다. 앎이 있음도 앎이 없음도 아니고, 얽매임도 해탈도 아니어서 어떠한 이름도 붙일 수 없다. 어째서 실다은 말이 아닌가. 허공을 다듬어 불상을 만든다든가 허공을 청.황.적.백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법은 무엇으로도 견줄 수 없고 비유할 수도 없으므로, 법신은 함이 없어 어떠한 테두리에도 떨어지지 않는다(法身無爲不墮諸 數)”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인의 몸은 이름이 없어 설명할 수 없으며,실다운 이치인 공문(空門)에는 닿기 어렵다. 마치 어디든지 앉을 수 있는 파리도 불꽃 위에는 앉지 못하듯 중생도 그러하여 어디든 반연할 수 있으나 반야(般若)에는 반연하지 못한다. 선지식을 찿아뵙고 하나 하나 알기를 (知解)구한다면 그것은 선지식 마군이니, 말과 견해를 내기 때문이다.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내어 일체중생을 다 제도한 뒤에야 성불하겠다도 발원 하면 이는 보살법지(法智)의 마군이니,서원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재계(齋戒) 를 지키고 선(禪)을 닦으며 지혜(慧)를 배우는 것은 유루선근(有漏善根)이다. 그들은 비록 도량에 앉아성불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항
하사수 모래알만큼의 사람을 제도 한다 해도 모두 벽지불과(壁支佛果)를 얻을 뿐이니, 이는 선근 (善根)의 마군으로서 탐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탐착하지 않고 물들지 않으며 신령한 이치만이 오롯이 남아 매우 깊은 (禪定)에 들어앉아 더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삼매(三昧)의 마군이니, 오래동안 맛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열반에 올라 탐욕을 떠나 고요해지면 그것은 마군의 업 (業)이다. 지혜로 해탈하였다 해도 얼마간 마군의 그물을 벗어나지 않으면 비록 백권 위타경 (圍陀經)을 이해한다 할지라도 모조리 지옥의 찌꺼기로서 부처님과 같아지고자 하나 될 수 없는 일이다.
선.악과 유.무 등 보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면 즉시 공(空)에 떨어지는데 근본을 버리고 지말을 쫓눈 줄을 모르므로 도리어 공에 떨어지는 것이다. 부처와 보리 ,유,무 등의 모든 법을 구하는 것은 근본을 버리고 지말을 쫓는 것이다.
지금 거친 밥으로 생명을 잇고 헤진 옷을 기워 추위를 막으며 목마르면 물을 마시는 일 외에는 모두 유.무 등의 법일 뿐이어서 털끝만큼도 매인 생각이 없다면 이 사람은 점차 가볍고 밝아질 소지가 있다.
선지식은 있음(有)에 집착하지 않고 없음(無)에도 집착하지 않아서 십구(十句) 마군의 말을 벗어나 말을 꺼내도 사람을 얽어매지 않는다. 설법을 해도 스승이라 자칭하지 않고 골짜기의 메아리같이 말이 천하에 가득 차 입으로 짓은 허물이 없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쏠린다.
만일 “나는 설법할 수 있다”라든가 “나는 스승이고 너는 제자이다”하고 말한다면 그것은 마군의 말이다. 또 “눈빛이 부딪치는 곳에 도가 있다”라든가, “부처는 부처가 아니고, 보리.열반.해탈...” 하면서 근거없는 말을 한다. 또한 하나하나 알음알이 (知解)를 근거없이 설명하며 한손을 들고 한 손가락을 세우는 것을 보고는 “이것이 선(禪)이고 도 (道)다”라고 한다.
이런 말은 사람을 얽어매는 것으로 그칠 기약이 없이 비구에게 결박만 더해주는데, 말하지 않는다 해도 구업(口業)을 짓은 것이다. 그러니 마음의 스승이 될지언정 마음을 스승으로 삼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방편교설(不了義敎)에는 인간.천상의 스승이 있고, 부처님(導師)이 있으나 궁극적인 교설(了義敎)에서는 인간.천상에게 스승이 되지 않으며 법을 스승삼지도 않는다. 마음(玄鑑)을 붙잡지 못했거든 우선 궁극적인 교설에 의지해야 할 것이니 조금은 가까운 데가 있기 때문이다. 방편교설은 귀머거리 속인 앞에서나 설명하는 것이 합당할 뿐이다.
한편 유․무 모든 법에 머물지 않고 머뭄 없는 데에도 머물지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내지 않는다면 그를 큰 선지식 또는 오직 한 분이신 부처님이라 한다. 이 큰 선지식에는 두 사람이 없으니 나머지는 모조리 외도이거나 마군의 말이다.
여기서는 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모든 유무 대경법(對境法)을 깰뿐이다. 탐착하고 물들지 말것이며, 결박을 푸는 일을
하지 않기만 하면 되니, 사람을 가르치는 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가르칠 말이 따로 있고, 사람에게 줄 법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이를 외도나 마군의 말이라 한다.
궁극적인 교설인지 방편교설인지를 알아야 하며, 생사를 말하는 것인지 약병(藥病)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또한 반대로 비유를 든 것인지(逆喩) 유사한 비유를 든 것인지(順喩)를 알아야 하며, 총론인지 각론이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닦아서 부처가 된다”, “닦을 것도 있고 깨칠 것도 있다”, “마음이 곧 부처다”,“마음 그대로가 부처다”, 이것은 부처님 말씀이다.“라고 한 것은 방편교설이고 부정논법이 아니며 총론이고 한 됫박쯤 되는 말이다. 또한 염법(染法) 쪽만을 가려 하는 말이고 유사한 비유를 드는 말이며, 죽은 말이고 범부 앞에서 하는 말이다.
한편“닦아서 부처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닦을 것도 없고 깨칠 것도 없다”,“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부처도 부처님 말씀이다”라고 한 것은 궁극적인 교설이고 부정논법이며, 각론이고 백 섬들이 말이다. 또한 3승교(三乘敎) 밖의 말이고 반대 비유를 드는 말이며, 정법(淨法) 쪽에서 하는 말이다. 살아 있는 말이며 수행 지위에 있는 사람 앞에서 하는 말이다.
수다원으로부터 공장 10지(十地)에 오르기까지 무슨 말이든 있기만 하면 모조리 더러운 법진(法塵)에 속하고, 번뇌 쪽에 포함되며, 방편교설에 속한다. 궁극적인 교설에서는 지키라(持)하고, 방편교설에서는 범하라(犯)하는데 부처님의 경지
에는 지키고 범할 것이 없어 궁극적인 교설과 방편교설을 다 인정하지 않는다.
싹을 보고 토질을 알아내고 탁함으로 맑음을 분별하는데, 여기서 비추어 깨닫는 것을 맑은 쪽에서 헤아려 본다면 그 비추어 깨달음은 맑음이 아니고, 비추어 깨달음아니 해도 역시 맑음이 아니며, 맑지 않음도 아니며, 견해(見)도 아니다. 물이 더러우면 물이 더럽다고 말하나 물이 맑으면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으니, 말을 하면 도리어 그 물을 더럽히는 것이다.
묻지 않는 물음도 있고 설명 없는 설명도 있다. 부처님 부처를 위해 설법하지 않으니 평등한 진여법계(眞如法界)에는 부처가 없고, 중생을 제도하지도 않으며, 부처는 부처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은 참다운 복전(福田)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주관인지 객관인지 그 말을 가려내야 한다. 있다 없다 하는 모든 경계법에 탐착하고 물들어 그 경계에 혹하면 자기 마음이 머물지 않고,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내지 않으며, 생각을 내지 않는다는 것에도 머물지 않으면, 자기 마음이 부처이고 관조하는 작용은 보살에 속한다. 마음마음은 주인(主宰)이고 관조하는 작용은 바깥경계(客塵)에 속하는데 파도로 물을 설명하듯 만상을 관조하고는 할 일이 없다. 이렇게 고요함과 동시에 관조하면서도 현묘한 이치라고 자처하지 않으면 자연히 고금을 관통할 수 있다. 그래서“신령함은 관조하는 일(功)이 없
으나 지극한 효험(功)이 항상 있어서 어디서든 부천님(導師)이 될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다.
중생의 분별하는 성품(性識)은 한번도 부처님의 단계를 밟은 적이 없기 때문에 끈끈하게 집착하는 성품으로 때때마다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에 집착한다. 그들은 잠깐 묘한 이치를 맛보아도 약이 되지 못하며, 잠깐 틀을 벗어난 도리를 들어도 믿음이 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서 49일을 말 없이 사유(思惟)하셨다.
지혜가 깜깜하여 무어라 설명하기도 어렵고 비유할 수 도 없기 때문에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말해도 불․법․승을 바탕하는 것이며, 중생에게 불성이 없다고 말해도 불․법․승을 비방하는 것이다. 불성이 있다고 하면 집착한다는 비방을 듣고 불성이 없다고 하면 허망하나는 비방을 들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불성이 있다 하면 보태는 오류(增益謗)를 범하고,불성이 없다 하면 덜어내는 오류
(損減謗)를 범하며, 불성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하면 앞뒤가 안맞는 오려(相違謗)를 범하고, 불성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하면 희론의 오류(戱論謗)를 범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중생이 해탈할 기약이 없겠고, 처음부터 말을 하면 중생이 또 말에 따라 이해를 하여 적은 데는 덧붙이고 많은 것은 덜어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설법을 하지 않고 빨리 열반에 들겠다”고 하셨던 것이다. 그 뒤 과거 부처님 모두가 3승법(三乘法)을 말씀하셨음을 돌이켜 생각하고는 방편설로 거짓 이름을 세웠다. 본래 부처가
아닌데 그에게 부처라 하고, 본래 보리가 아닌데 보리․열반․해탈등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가 백 섬을 지고는 일어나지 못함을 알고 우선 한되․한홉을 지워주었으며. 궁극적인국 교설은 그가 믿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방편교설로 설명해 주었다. 그리하여 선법(善法)이 퍼져 악법(惡法)을 누르기도 하였으나 선과(善果)의 기한이 다 되면 악과(惡果)가 바로 도래하였다. 부처가 되면 중생도 나타나고, 열반에 들면 생사가 나타나며, 밝아지면 어둠이 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엎치락 뒤치락하는 유루인과(有漏因果)로서 그것을 받기를 생각하지 않을 자가 없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거든 상대적인 개념을 끊기만 하면 되니, 어떠한 테두리도 그를 매어두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며, 가깝지도 멀지도 않다. 높낮이도 없고 평등도 없으며 가고 옴도 없다.
문자가 집착하지만 않으면 그대를 막는 양쪽 극단이 그대를 붙들지 못하여 번갈아 나타나는 고락과 엇갈리는 명암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진실된 실제 이치가 진실이 아니기를 하며 허망도 허망이 아니기도 하니, 다듬을 수 없는 허공처럼 테두리를 갖는 물건이 아니다. 마음에 조금이라도 알음알이를 낼틈을 준다면 테두리에 메이게 된다. 또한 괘(卦)의 조짐이 금․목․수․화․토에 관할되듯 아교풀이 다섯 군데를 함께 붙여 버리듯 마왕이 자유롭게 자기 집으로 붙잡아 갈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처음선․중간선․마지막선 세 구절로 연결되어 있다. 처음에는 그에게 좋은 마음을 내도록 하는
것이며, 중간엔 좋다는 마음마저 타파해야 하며 그런 뒤에야 비로소 마지막선이라 하는 것이다. 예컨대 “보살은 보살이 아니니, 그래서 보살이라 한다”,“법은 법이 아니며, 법 아님도 아니다”라 하니, 같은말이다. 여기서 한 구절만을 설명하면 중생들은 지옥에 빠지며, 세 구절을 한꺼번에 설명하면 스스로 지옥에 들어갈 것이니, 그것은 부처님과는 상관없는 일이 된다.
지금의 ‘비추어 깨달음’이 자기 부처라는 것까지 설명하면 처음선(初善)이며,지금은 ‘비추어 깨달음’에 붙들고 머물지 않는다면 중간선(中善)이며, 불들고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내지 않는다면 이는 마지막선(後善)이다. 이상과 같다면 연등부처의 뒷 부처에 속하니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다. 그렇다고 부처는 법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라고 잘못 말하지 말라.
이 땅의 초조(初組)께서 말씀하시기를, “잘 하는 것도 없고 성스러움도 없어야 성스러운 부처님이다.”하고 하셨다. 여기서 성스러운 부처란 9품(九品)의 망상꾸러기(精靈)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용․축생 등의 부류와 제석범천 이하 모든 것들은 다신통변화를 부릴 수 있고, 상품(上品)의 정령도 백겁 고금의 일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찌 그들을 부처라 하겠는가. 저 아수라 왕은 수미산 두 개와 맞먹을 정도로 몸이 매우 크다. 그러나 제석천과 싸울 때에야 힘이 그만 못하다는 것을 알고 배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연뿌리 구멍으로 들어가 숨는다. 그들의 신통변화와 변재가 적은 것은 아니나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할
수는 없으니 절차와 등급이 느슨하여 오르고 내림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깨닫지 못했을 때를 탐진(貪瞋)이라 하고, 깨닫고 나면 부처님의 지혜라고 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옛날과 사람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옛날 하던 것(行履處)과 다를 뿐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2.
누군가가 물었다.
“초목을 베고 땅을 개간하면 죄보를 받습니까?”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죄가 있다고 단정하지도 못하고 죄가 없다고 단정하지도 못한다. 죄가 있고 없고는 사실 그 사람에게 달린 것이다. 있다 없는 하는 모든 법에 탐착하고 물들어서 버리고 취하는 마음이 남아 3구(三句)를 꿰뚫어 마음이 허공과 같지만 허공 같다는 생각도 내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죄가 없다고 단정한다.”
다시 말씀하셨다.
“죄를 짓고 나서 죄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하면 말이 안되고, 죄를 짓지 않았는데 죄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도 안 될 말이다. 율(律)에서 말하기를, ‘본래 미혹하여 살인을 하거나 나아가 서로 살인을 한다 해도 살생죄라 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선종(禪宗) 문하에서이겠는가. 마음이 허공 같아서 어디에도 머물지 않으며, 허공 같다는 생각도 없는데 죄가 어디
에 자리하겠는가.“
다시 말씀하셨다.
“선도(善道)는 닦을 것이 없으니 물들지만 않으면 된다.”
“안팎의 마음을 녹여 다하기만 하면 된다.”
“경계를 관조하는 쪽으로 말하지만 지금 유․무 등 모든 법을 관하는데 아무 탐욕과 집착이 없고 또한 집착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공부하면 될 것이다. 공부는 때묻은 옷을 빠는 것과도 같은데 옷은 본래 있는 것이나 때는 밖에서 온 것이다. 유․무 등 모든 소리와 색은 기름때와도 같은 것이니 아예 마음에 두지 말라. 보리수 아래 32이상과 80종호는 색에 속하고, 12분교(十二分敎)는 소리에 속한다. 그러니 이제 유․무와 모든 성색으로 흐르는 허물을 끊고 마음을 허공같게 해야 한다. 이렇게 공부하기를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해야 할 것이다.
죽는 마당에서는 옛날부터 익숙했던 길을 찾아간다 해도 오히려 끝까지 가지 못하는데, 그때 가서 새로 조복하여 공부한다면 기약이 없다. 죽는 순간에는 좋은 경계가 한꺼번에 눈앞에 나타나는데 마음으로 더 좋아하는 곳을 먼저 받게 된다. 지금 나쁜 일을 하지 않으면 그때 가서도 나쁜 경계가 없고 설사 나쁜 경계가 있다 해도 좋은 경계로 변한다. 죽는 순간에는 두렵고 미친 마음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낱낱의 경계법에 아무런 애욕과 물들임이 없다 해도 그렇다는 생각에 머물지 말아야 자유인다. 지금은 인(因)이고 죽음
은 과(果)인데 과업(果業)이 나타나면 어째서 두려워 하는가.
옛과 자금이 달라짐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에도 지
금이 있다면 지금에도 옛이 있을 것이며, 옛날에 부처가 있었다면 지금도 부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자유를 얻는다면 미래 세상까지 자유로울 것이다.
한 생각 한 생각이 유․무 등 모든 법에 매이지 않는다면 예나 지금이나 부처가 사람이고 사람이 부처일 뿐이다. 이것이 삼매정(三昧定)이기도 하니, 정을 가지고 정에 들어갈 필요가 없고, 선(禪)을 가지고 선을 생각할 필요도 없으며, 부처를 가지고 부처를 찾을 필요도 없다.
다음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법은 법을 구하지 않고 법은 법을 얻지 않으며, 법은 법을 행하지 않고 법은 법을 보지 않아서 자연히 법을 얻는 것이지, 얻음으로써 다시 얻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은 이렇게 바르게 법을 사유하여 독존해야 하며, 독존한다고 인식하는 법지(法智)도 없어야 한다. 본성은 그대로가 여여(如如)하여 인(因)에 의해 자리가 매겨지는 것이 아니니, 이것을 체결(體結)또는 체집(體集)이라 이름하기를 한다. 지혜로 알 수도 없으며 식(識)으로 분별할 수도 없는 것으로서 사량이 끊긴 곳이며 응적(凝寂)한 자체가 다하여 헤아림이 영원히 없다. 마치 바다에서 큰 물결이 다하면 파랑이 다시는 생기지 않는 것과도 같다.”
또 말씀하셨다.
“큰 바닷물에 바람이 없다가 홀연히 소용돌이가 생기면 그
것이 생긴 줄을 안다하니, 이것은 미세한 가운데 거침(細中之추)이다. 앎에서 앎이 없어져 여여(如如)함으로 돌아감은 미세한 가운데 미세함(細中之細)이니, 이것은 부처의 경계이다. 여기서부터 비로소 아는 것이니 이를 최고의 삼매(三昧之頂), 삼매왕(三昧王) 또는 이염지(爾염智)라고도 한다. 이것이 모든 삼매를 내고 모든 법왕자(法王子)를 관정(觀頂)하며․색․성․향․미․촉․법 모든 국토에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고 안팎으로 통달하여 어디든 막힘이 없다.
일색(一色)이 일진(一塵)이고 일불(一佛)이 일색(一色)이며 일체불이 일체색이고, 일체진이 일체불이다. 또한 모든색․성․향․미․촉․법도 이처럼 낱낱이 모든 세계에 두루 가득하다.
이는 미세한 가운데 거친 것으로서 좋은 경계이니, 모든 상근기가 알고 느끼고 보고 듣는 것이며, 모든 상근기가 생사에 드나들면서 일체 유․무 들을 뛰어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상근기가 설명하는 것이며, 상근기가 드는 열반이며, 더할 것 없는 도이며, 견줄 것 없는 주문(呪)이다. 모든 말씀 가운데 으뜸가는 가정 심오한 말씀으로 다다를 사람이 없으며, 모든 부처님이 아껴주신다. 마치 맑은 파도가 맑고 흐리며 깊고 넓은 물의 모든 작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모든 부처님이 아껴주는 것이다. 행주좌와에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당장 깨끗하고 밝은 몸을 나타낼 것이다.
또 말씀하셨다.
“그대들 스스로는 평등하고 말도 평등하듯 나도 그러하며 불
국토 하나 하나마다 소리․냄새․맛․촉감 등 모든 일이 다 마찬가기다. 이로부터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에 오르기까지 가로 세로가 모두 이와 같다. 처음 안 것을 붙들고 깨달았다(解)고 한다면 그것은 ‘정결(頂結)’또는 ‘정결에 떨어졌다(墮頂結)’고 한다. 그것은 모든 번뇌의 근본으로 스스로 지견(知見)을 내어 밧줄도 없이 자기를 결박하기 때문이다. 알 대상에 일부러 얽매여 25유(二十五有)의 세간이 있게 되면, 다시 일체 번뇌문을 흩어 다른 사람을 결박한다. 여기서 처음 안다 한 이승의 견해를 ‘이염식(爾염識)’또는 ‘미세한 번뇌’라 한다. 바로 이것을 끊어없애고 나면 ‘정신을 돌려 공(空)의 소굴에 안주한다’ 하며, ‘삼매의 술에 취한다’고 한다. 또한 ‘해탈 마군에게 결박되어 세계의 생성과 파괴가 좌우되는 정력(定力)이 다른 국토로 새어나가도 전혀 느끼거나 알지 못한다’하며, ‘두려워할 해탈의 깊은 구덩이’라 하여 보살은 모두가 이를 멀리 여윈다.
경전을 읽고 교학을 공부하며 말씀을 배우는 것은 필연코 자기에게로 환원되어야 한다. 모든 말씀은, 지금의 비추어 깨닫는(鑑覺) 성품이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경계에 휩쓸리지 않음을 밝혀주는 것이다.
그대들 여러스님네가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경계에 붙들려 있음을 반조해 본다면 그것은 금강의 지혜(金剛智)로써 자유롭게 홀로 설 자격을 갖추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줄 알지 못한다면 12부경을 다 외워낸다 해도 증상만(增上慢:깨치지 못하고서 깨쳤다고 착각하는 자만심)을 이룰 뿐이어서 부처님을
기만하는 것이지 수행이랄 수 없다. 모든 색과 소리를 떠나고, 떠났다는 그것에도 머물지 않으며, 안다는 것에도 머물지 않아야 수행이랄 수 있다.
경전 읽고 교학을 공부하는 것은 세속의 입장에서라면 훌륭한 일이겠지만 이치를 밝힌다는 입장에서는 답답한 일이니, 10지 수행인도 벗어나지 못하고서 생사 강물에 들게 되는 것이다. 3승교(三乘敎)는 다만 탐내고 성내는 등의 병통을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지 그 의미를 이해하려 들 필요는 없다. 이해가 탐욕이 되고 탐욕은 다시 병통이 되기 때문이다.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법을 떠나고 떠났다는 그것에서도 떠나 3구 바깥으로 철처히 벗어나면 저절로 부처와 다를 것이 없다. 자기가 부처인데, 부처가 되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까 근심할 것이 있겠는가. 그저 부처 아닌 것이 근심일 뿐이다.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법에 얽매이면 자유롭지 못하다. 이치를 확실히 알지 못한 채 복과 지혜부터 갖추면 복과 지혜에 실려다니는 것이 마치 천민이 높은 분을 부리는 꼴이 되니, 우선 이치를 확실히 안 뒤에 복과 지혜를 갖추는 것이 좋겠다. 복과 지혜를 갖추려 하는가. 그때그때마다 금을 흙으로 만들고 흙을 금으로 만들며, 바닷물을 소락(소酪)으로 변화시키고 수미산을 쪼개 가루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사해바닷물을 움켜서 한 터럭에 넣으며, 하나의 의미에서 무량한 의미를 내고, 무량한 의미에서 하나의 의미를 내야 할 것이다.“
또흔 이렇게도 말하였다.
“실각(失脚)해서 전륜왕(轉輪王)이 되면 4천하(四天下) 사람
들에게 하루에 10선(十善)을 행하게 하나 그 복과 지혜는 자기를 비추어 깨닫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을 왕이 될 인연이라 하나. 유․무 모든 모든 법에 반연하고 집착함을 전륜왕이라 하는 것이다. 지금 가슴속으로 유․무등 모든 법을 일체 받아들이지 않아서 4구(四句) 밖으로 벗어남을 비었다(空)고 한다.
공(空)을 불사약(不死藥)이라고도 하는 것은 죽은 왕(前王)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불사약이라고는 하나 왕과 함께 복용하니 두 가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 가지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다 둘이다 하는 생각을 내면 역시 전륜왕이라 할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이 복과 지혜와 네가지 물건(四事:의․식․주․약)으로 4백만억 아승지세계의 6취4생(六趣四生)에게 공양하여 꼬박 80년을 그들의 바램을 들어주고는 뒤에 생각하기를,‘그러나 이 중생들은 모두가 노쇠하였으니 불법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수단원과(須陀洹果)를 얻게 하고 아라한도(阿羅漢道)까지도 얻게 하리라’한다 하자. 중생에게 즐겁게 하는 것만을 베푼다 해도 그 공덕이 한량이 없는데, 하물며 수다원과와 아라한도를 얻게 한 이 시주(施主)의 무량무변한 공덕에랴. 그러나 50번째 사람이 경전을 듣고 따라서 기뻐한(隨喜) 공덕만은 못한 것이다.
「보은경(報恩經)」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마야부인은 5백의 태자를 낳아 그들 모두 벽지불과(벽支佛果)를 얻었는데 멸도(滅度)하고는 각각 탑을 세워 공양하고 낱낱에게 예배하며 찬탄하였다. 그러나 위 없는 보리를 얻을 자
식 하나 낳아서 내 마음(心力)더느니만은 못하다.“
지금 백천만 대중 가운데서 체득한 사람이 하나 있다면 그 가치는 삼천대천세계와 맞먹을 만하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이치를 깊이 깨달으라고(玄解) 늘 대증에게 권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이치가 현묘하여 복과 지혜를 부릴 수 있다면 마치 높은 사람이 천한 사람을 부리는 것과도 같으며, 머물지 않는 수레와도 같다.
그런데 이것을 붙들고 깨달았다는 생각을 내면 ‘상투 속의 구술’이라 하며, 또는 ‘값을 매길 수 있는 보배 구슬’이라 하며, 또는 ‘똥을 퍼 들여온다’고도 한다. 이것을 붙들고 깨달았다는 생각을 내지 않으면 왕의 상투 속에 있는 밝은 구슬을 그에게 주는 것과도 같으니 ‘값을 매길 수 없는 큰 보배’라 하며, 또는 ‘똥을 퍼냈다’고도 한다.
부처님은 속박을 벗어난 사람인데도 도리어 얽매임 속으로와서 이렇게 부처가 되셨다. 또한 생사 저쪽 사람이며, 현묘하게 끊긴 저쪽 사람인데도 이쪽 언덕으로 돌아와 이렇게 부처가 되셨다. 그러나 사람과 원숭이는 함께 가지 못하는 법이니, 여기서 사람은 10지(十地)보살을 비유하고 원숭이는 범부를 비유한 것이다.
경전을 읽어 알고자(知解) 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3승교를 이해하여 영락의 장엄구를 훌륭히 얻고 32상의 굴택을 얻는 것으로 부처를 찾는다면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경에서 말하기를, “소승의 3장학(三藏學)을 탐착하는 자와는
가까이 하지도 말라”하였는데, 하물며 스스로 그러는 경우야 어떠하겠는가. 그는 파계한 비구이며 이름뿐인 아라한(名字羅漢)으로서, 「열반경」에서는 16악율의(十六惡律義)에 넣고 있다. 그것은 물고기를 사냥하며 이익을 위해 고의로 살생하는 것과 똑같은 짓이다. 대승방등(大乘方等)은 감로수 같기도 하고 독약 같기도 하니, 없애버릴 수 있다면 감로 같고, 없애버리지 못하면 독약과 같다.
경전을 읽으면서 저 생사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코 그 의미를 꿰뚫지 못할 것이니, 아예 읽지 않는 것이 휠씬 낫다. 한편으로는 경전도 읽고 선지식도 참례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안목을 갖춰 그 생사라는 말을 분별해야 할 것이다. 명백하게 분별해내지 못한다면 결국 꿰뜷지 못할 것이어서 비구라는 속박만 가중될 뿐이다.
그러므로 교학에서 현묘한 종지를 배운 사람은 문자를 읽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마치 ‘자체(體)는 설명하여도 모습(相)은 설명하지 않으며, 의미는 설명해도 문자는 설명하지 않는다’고 한것과도 같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진실한 말’이라 하며, 문자를 설명하면서 모조리 비방이라 한다면 그것을 ‘삿된 말’이라 한다. 보살의 설명은 법다워야 하니, 그래야 ‘진실한 말’이라 할 것이다.
증생들에게 마음(心)은 지키게 하되 현상(事)에는 매달리지 않게 히야하며, 실천(行)은 하게 하되 이론(法)을 붙들지는 않게 해야 한다. 사람은 설명해야지 문자를 설명해서는 안되며 의미를 설명해야지 문자를 설명해서는 안된다.
‘욕계에는 선(禪)이 없다’고 설명하는 것 역시 두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다. ‘욕계에는 선(禪)이 없다’고 말했다면 무엇을 의지하여 색계(色界)에 이룰 수 있을까. 먼저 발심 수행의 단계[因地]에서 두 가지 정(定)을 익혀야 뒤에 초선(初禪)의 유상정(有想定)과 무상정(無想定)에 이를 수 있다. 유상정은 색계사선(色界四禪) 등의 하늘에 태어나고, 무상정은 무색계사공(無色界四禪) 등의 하늘에 태어난다. 그러므로 욕계에는 선이 없음이 분명하며 선은 색계이다.
3.
어떤 이가 물었다.
“지금 이 국토엔 선이 있다고 하는데 무슨 말입니까?”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동하지도 않고 선에 들지도 않음이 여래선(如來禪)인데, 선이라는 생각을 내는 것조차 떠났다.”
4.
어떤 이가 물었다.
“‘유정(有情)은 불성이 없고 무정(無情)은 불성이 있다’ 한것은 무슨 뜻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으로부터 부처에 이르는 것은 성인이라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며, 사람에서 지옥에 이르는 것은 범부라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다. 범부와 성인 두 경계에 물들고 애착하는 마
음이 있으면 이를 ‘유정은 불성이 없다’라고 하며, 범부와 성인 두 경계와 유․무 모든 법에 갖고 버리는 마음이 전혀 없으며 갖고 버림이 없다는 생각마저도 없으면 ‘무정은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망정의 얽매임이 없기 때문에 무정(無情)이라 이름하는 것이지 목석이나 허공․노란 국화꽃․푸른 대나무 등 감정이 없는 것을 가지고 불성이 있다 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들에게 불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 중에 수기를 받고 성불했다는 자를 경전에서 볼 수 없는 까닭이 무엇인가? 지금 비추어 깨달음(鑑覺)은 유정의 변화를 받지 않는 점이 푸른 대나무와도 같으며, 모든 근기에 다 응하고 모든 상황을 다 아는 것이 노란 국화꽃과도 같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단계를 밟아 보았다면 무정에 불성이 있다 하겠지만 부처님의 단계를 밟아 보지 못했다면 유정에게 불성이 없다하겠다.”
5.
한 스님이 물었다.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법화경 화성유품에 나오는 부처님)은 10겁(十劫)을 도량에 앉아 있었는데도 불법이 목전에 나타나지 않아서 불도를 이루지 못하였다 합니다. 어째서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겁(劫)이란 ‘막힘’ 또는 ‘머뭄’이라고도 하니 하나의 착함에 머물고 열 가지 착함에 막히는 것을 말한다. 인도에서는 부처
(佛)라 하고, 이 땅에서는 그것을 깨달음(覺)이라 하는데, 자기의 비추어 깨달음(鑑覺)이 착함에 막히고 집착되므로 선근인(善根人)에게서 불성이 없다. 그러므로 ‘불법이 목전에 나타나지 않아 불도를 이루지 못했다’고 한 것이다.
악에 부딪치는대로 악에 머무는 것을 ‘중생의 깨달음’이라 하고, 선에 부딪치는대로 선에 머무는 것을 ‘성문의 깨달음’이라 하며, 선․악 양쪽에 머물지 않고 머물지 않음을 옮다고 여기는 자를 ‘이승의 깨달음’ 또는 ‘벽지불의 깨달음’이라 한다.
선․악 양쪽에 머물지 않고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내지 않음을 보살의 깨달음‘이라 한다. 또한 머물지 않고 어디에도 머물것이 없다는 생각을 내지 않아야만 비로서 ’부처의 깨달음‘이라 한니, 마치 ’부처가 부처에 머물지 않아야 진실한 복전(福田)이라 이름한다‘고 한 것과 같은 이야기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홀연히 이를 체득한 자가 있다면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라 하니, 어디서나 스승이 되어 부처가 없는 곳에서는 부처라하고, 법이 없는 곳에서는 법이라 하며, 스님 없는 곳에서는 스님이라 하며 ’큰 법 바퀴를 굴린다‘고 하는 것이다.
6.
어떤 스님이 물었다.
“옛부터 조사들께서는 모두 비밀스러운 말씀으로 계속 전수 해왔다 하니 무슨 의미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비밀한 말은 없으며, 여래께서는 비밀스럽게 간직한 것이
없으시다. 비추어 깨닫는다 함은 말은 분명하나 형상을 찾아도 끝내 찾지 못하니 이것이 ‘비밀스러운 말’이다. 수단원(須陀洹)에서 10지(十地)에 오르도록 무슨 말이든 있기만 하면 모조리 법의 티끌에 속하고, 무슨 말이든 있기만 하면 번뇌라는 테두리에 들어가고 방편교설에 속하니 말이 있었다는 하면 무엇이든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긍극적인 교설마저도 부정하는데 다시 무슨 ‘비밀한 말’을 찾겠는가.”
7.
또 물었다.
“바다에서 물거품 하나가 일어나듯 허공이 대각(大覺)에서 생겼다 하였는데, 무슨 뜻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허공은 물거품에, 바다는 자성(自性)에 비유된 것이다. 신령하게 깨닫는 자기 본성은 허공을 능가하므로 ‘바다에서 물거품 하나가 일어나듯 대각에서 허공이 나왔다’고 한 것이다.”
8.
또 물었다.
“숲은 베어도 나무는 베지 말라‘ 하였는데 무슨 말입니까?”
스님께서 말씀 하셨다.
“숲은 마음에 나무는 몸에 비유된 것인데, 숲으로 설명해야 두려운 마음이 생기므로 ‘숲은 베어도 나무는 베지 말라’고 한
것이다.“
9.
또 물었다.
“‘말을 하면 표적이 되어 화살을 부른다’하니, 말을 하여 표적이 되고 나면 근심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심에 매인 점이 똑같다면 무엇으로 승속을 구별하겠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화살을 쏘아 도중에 딱 부딪치듯 해야만 한다. 만일 어굿난다면 반드시 다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골짜기에서 메아리를 찾는다면 여러 겁 동안 찾아도 그 모습을 볼 수 없으니 메아리는 입가에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잘 잘못은 찾아와서 묻는데에 있다. 귀결점을 묻는다면 도리어 화살을 맞을 것이니, 역시 ‘허깨비인 줄 알면 허깨비가 아니다’ 한 말씀과 같다.
삼조(三租)께서 말씀하시기를, 현묘한 종지를 모르고 망념을 가라앉히느라 헛수고하는구나‘ 하셨다. 또 ’보이는 것(物) 보는 것(見)이라 오인한다면 마치 기와 부스러기를 가진 것과 같으니 무엇에 쓰겟으며, 보는 것이 아니라 한다면 목석과 무엇이 다르랴‘하고 하셨다.
그러므로 보는 것이다 아니다 하면 둘 다 잘못이니, 이 한가지 예로 모든 것을 견주어 보라.”
10.
또 물었다.
“번뇌와 32상이 본래 없다는데, 어떻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부처님 쪽의 일이다. 본래 번뇌가 있었다거나 지금 32상이 있다는 것은 범부의 생각일 뿐이다.”
11.
또 물었다.
“끝없는 몸을 가진 보살(無邊身菩薩)이 여래의 정수리를 보지 못한다 하니 어째서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끝이 있다 없다는 견해를 냈기 때문에 여래의 정수리를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제 있다 없다 등의 모든 견해가 전혀 없고 그 견해 없음마저도 없다면 이것을 ‘정수리가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다.”
12.
또 물었다.
“지금 사문들은 다들 말하기를,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경․논․율․선(禪)과 지식(知解)을 낱낱이 배우므로 신도들에게 네 가지로 공양을 받을 만하다’고들 하는데 정말 받을 만합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관조하는 작용(照用)으로 볼 때 소리․색․냄새․맛과유․무 모든 법 등 낱낱의 경계에 티끌만큼의 집착이나 물들음도
없고,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음에 머물지도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없다면 이런 사람은 매일 만 냥의 황금도 받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유․무 등 모든 법을 대할(照) 때 6근의 반연을 다 깎아내 털끌만큼도 탐욕과 애착을 다스려 버리지 못하고, 나아가서는 시주에게 쌀 한톨 실낱 하나라도 구걸한다면 축생이 되어 무거운 짐을 지고 끌려다니면서 하나하나 갚아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집착이 없는 사람이며 구함이 없는 사람이며 의지함이 없는 사람이니, 지금 분주하게 부처가 되고자 탐착한다면 모두가 등지는 짓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오랫동안 부처를 가까이 하면서도 불성을 모른 채 세상을 구제하는 자를 구경할 뿐, 6취(六趣)에 윤회하면서 오랫만에야 부처를 보는 자, 그를 두고 부처 만나기 어렵다 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문수는 7불의 스승이며 사바세계에서 으뜸가는 보살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부처를 보노라 나는 법을 듣노라 하는 근거없는 생각을 내어 부처님에게 위신력을 받고 두 철위산(鐵圍山)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알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다만 모든 학인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주고, 후학들이 이러한 생각을 내지 않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있다 없다 하는 등의 모든 ‘보배 여의주’라 하며, ‘보배 꽃으로 발꿈치를 받쳐 든다’하는 것이다.
부처다 법이다 하는 견해를 내는 것은 유․무 등으로 보는
것이니 이것을 두고 ‘눈병난 눈으로 사물을 본다고 하며, ‘봄에 매임(見纏)’‘봄에 덮임(見蓋)’ 또는 봄의 재앙(見蘖)이라고도 한다.
이제 생각 생각 모든 견문각지(見聞覺知)와 모든 티끌 때를 다 없앤다면 한 티끌 한 색이 온통 한 부처이며 한 생각 일으켰다 하면 그대로 한 부처인데, 3세5음(三世五陰)의 생각 생각이라면 그 숫자를 뉘라서 헤아리겠는가. 이것을 ‘허공을 가득 메운 부처’라 하며,‘분신불(分身佛)’,‘보배탑’이라 하니, 그러므로 항상 찬탄하는 것이다.
지금 연명하는 것을 보면 쌀 한 톨과 한 포기 채소에 의지한다. 먹지 못하면 굶어 죽고, 물을 마시지 못하면 목말라 죽으며, 불을 쬐지 못하면 추워서 죽는다. 하루라도 없으면 살지 못하고, 하루 쯤 없다 해도 죽지는 않으나 4대(四大)에 붙들려 여전하지 못하다.
도통한 옛사람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다. 불에 타고자 하면 탔고, 물에 빠지고자 하면 빠지지 않았다. 살겠다면 살았고, 죽겠다면 죽었다. 이렇게 가고 머물음이 자유로우니, 그에게는 자유로울 분수가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어지럽지 않다면 부처를 구하거나 보리․열반 구할 필요가 없다. 만일 부처를 집착하고 구한다면 탐심에 속하며, 탐심이 변하여 병이 된다. 그러므로 ‘부처 병 고치기가 가장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불법을 헐뜰어야만 밥을 먹을 수 있는데, 여기서의 밥이란 신령하게 알아보는 자기 본성으로서 번뇌 없는 밥(無漏飯)․해탈밥(解脫飯)을 말한다. 이 말은 10지(十
地)보살을 치료하는 것으로서 초발심부터 십지에 이르기까지이다. 지금 조금이라도 구하는 마음이 있기만 하면 모두다 ‘파계승’,‘명자나한(名字羅漢)’ 또는 ‘여우’라 이름하는데, 그들은 분명히 공양을 받을 자격이 없다.
지금 메아리같이 고르게 소리를 듣고, 바람같이 평등하게 냄새를 맡으면서 일체 유․무등의 법을 떠나고, 떠났다는 것에도 머물지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으면 이런 사람에게는 어떠한 허물도 얽어매지 못한다.
위 없는 보리․열반을 구하기 때문에 ‘출가’라고 이름하나 그래도 그것은 삿된 발원이다. 하물며 ‘나는 할 수 있다’‘나는 안다’하면서 세간에서 승부를 다투며 논쟁하는 경우이겠는가.
한 문중을 탐하고 한 제자를 아끼며, 한 안주처에 연연해 하고 한 신도와 관계를 맺는다. 옷 한 벌, 밥 한 그릇, 명예 하나, 이익 하나에 다시 ‘나는 그 모두에 걸림이 없다’하는데, 이는 스스로를 속일뿐이다.
자기 5음(五陰)에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몸 마디마디가 토막난다 해도 원망하거나 아깝다는 마음이 전혀 없고 번뇌도 없다면, 나아가서는 자기 제자가 다른 사람에게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채찍을 맞고 이상과 같은 낱낱의 일을 당한다 해도 한 생각도 너다 나다 하는 마음이 없다며, 그래도 한 생각도 없다는 그것을 옳다고 여겨 거기에 머문다면 그것을 ‘법 티끌’이라 하니, 10지(十地)에서도 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생사의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사람들에게 권하기를 ‘삼악도(三惡道)를 두려워하듯 이 법
티끌을 두려워해야만 홀로 설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가령 열반을 능가하는 어떤 법이 있다 해도 조금도 값지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걸음마다 부처로서 연꽃을 밟을 것도 없이 백억의 몸을 나툰다 유․무 등 모든 법에 털끌만큼이라도 애욕에 물든 마음이 있다면 연꽃을 밟고 다닌다 해도 마군의 짓과 똑같은 것이다.
‘본래 청정하다’거나 ‘본래 해탈하였다’는 데에 집착하여 이대로가 부처이며 선도(禪道)를 이해했다고 자처하는 자는 자연외도(自然外道)에 속하며, 한편 인연에 집착하여 닦아 증득을 이루는 자는 인연외도(因緣外道)에, 무(無)에 집착하면 단견되도(斷見外道)에,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亦有亦無)는 데 집착하면 변견외도(邊見外道) 또는 우치외도(愚痴外道)에 속한다.
부처다 열반이다 하는 등의 견해를 내지 않기만 하면 된다. 유․무 등 모든 견해가 전혀 없으며 견해가 없다는 것도 없음을 바르게 봄(正見)이라 한다. 또한 아무것도 들음이 없고, 들음이 없다는 것도 없음을 바르게 들음(正聞)이라 하며, 이것을 두고 외도를 꺾었다 하는 것이다. 또한 범부 마군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아주 신통한 주문(大神呪)이며, 보살 마군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가장 높은 주문(無上呪)이며, 나아가 부
처라는 마군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견줄 바 없는 주문(無等等呪)이다. 중생 아수라를 변화시키고 2승 아수라를 변화시키며, 보살 아수라를 변화시키니, 이렇게 하여 3변정토(三變淨土)가 되는 것이다.
유무(有無) 범성(凡聖) 등 모든 법은 광석에 비유되고, 자기의 여여한 이치(如理)는 금(金)에 비유된다. 금과 광석이 분리되면 순금이 드러나니 홀연히 어떤 사람이 돈과 보배를 찾으면 금을 돈으로 만들어 그에게 주는 것이다. 마치 국수 자체는 진정 모든 모래와 진펄이 없어 어떤 사람이 시루떡을 구걸하면 국수를 시루떡으로 만들어 주는 것과도 같다. 또는 지혜로운 신하가 왕의 마음을 잘 알아서 왕이 행차할 때 선타파(先陀婆)*하고 부르면 즉시 말을 대령하고, 밥
먹을때 선타파 하고 부르면 즉시 소금을 바치는 것과도 같다. 이상은 현묘한 종지를 공부하는 사람이 잘 통달하여 어김없이 기연에 응함을 비유 한 것이며, 또는 육절사자(六絶獅子:6근․6진을 끊은 사람)라고도 한다.
지공(誌公)스님이 말하기를, ‘사람에 따라 백 가지 변화를 지어낸다’고 하였다.
10지(十地)보살은 주리지도 않고 배 부르지도 않으며,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 그러나 태우려 해도 태울 수 없으니, 일정한 테두리(量數)에 의해 한계
*선타파: 원래는 소금, 그릇,물,말(馬)을 뜻하는 말, 왕의 마음을 잘 아는 총명한 신하가 제때제때 알아서 이것들을 바친데서 유래하여, 지혜로운 이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지워진다. 부처님은 그렇지 않아서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지
만, 타려하면 타고 빠지려 하면 빠진다. 바람․물등 4대를 자유롭게 부리므로 모든 색이 부처님 색이며, 모든 소리가 부처님 소리다.
더러운 찌꺼기인 변하는 자기 마음이 다하여 3구(三句) 밖으로 뚫고지나야 이 말을 할 수 있다. 청정한 보살 제자는 매우 밝아서 무슨 말을 하든지 유무에 집착되지 않고 모든 작용(照用)에 있어서도 청탁에 구애되지 않는다.
병이 있는데도 약을 멱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이며, 병이 없는데 약을 먹으면 성문(聲聞)이다. 한 가지 법을 단정적으로 집착하면 정성성문(定性聲聞)이며, 그저 많이 듣기만 하면 증상만성문(增上慢聲聞)이다. 또한 남을 알면 유학성문(有學聲聞)이며, 공정(空寂)에 빠지고 자기를 알면 무학성문(無學聲聞)이다.
탐․진․치등은 독이며 12분교(十二分敎)는 약이니, 독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약을 떼지 못한다. 그러나 병 없이 약을 먹으면 약이 도리어 병이 되어, 병이 없어져도 약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나지 않고 소멸하지 않음은 무상(無常)의 의미이다.
「열반경」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세 가지 약한 욕심이 있다. 첫째는 사부대중이 에워싸주었으면 하는 욕심이고, 둘째는 모든 사람이 내 문도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욕심이며, 셋째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성인이나 아라한임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욕심이다.
또한「가섭경(迦葉經)」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첫째는 미래의 부처님을 뵈었으면 하는 것이며, 둘째는 전륜왕(轉輪王)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며, 셋째는 찰리(刹利)의 큰 성씨를 가졌으면 하는 것이며, 넷째는 바라문의 큰 성씨를 가졌으면 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는 것이다.’
이상의 약한 욕심부터 먼저 끊어야 한다. 집착하고 물들어 요동하는 마음이 있기만 하면 그것을 ‘악한 욕심’이라 하는데, 모두가 6욕천(六欲天)에 들어가 파순(波旬)에게 부림을 당할것이다.”
13.
또 물었다.
“이십년 동안을 항상 ‘똥을 치우라’하셨는데 무슨 뜻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있다 없다 하는 모든 지견을 쉬고 모든 탐욕을 쉬어 낱낱이 3구(三句) 밖으로 뚫고 지나면 이를 ‘똥을 치웠다’고 한다. 부처와 보리를 구하며,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법을 구하면 그것은 똥을 퍼 들여오는 것이지 또을 펴낸다고 하지는 않는다.
부처라는 견해를 지어내 볼 것이나 구할 것, 집착할 것이 있다 하면 ‘희론의 똥’이라 하며, ‘거친 말’, ‘죽은 말’이라 한다.
마치 ‘큰 바다는 죽은 시체를 잠재우지 않는다’ 한 말과도 같다.
부질없이 지껄이는 말을 ‘희론’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말
하는 사람이 청․탁을 분별하면 그것을 ‘희론’이라 한다.
경전에서는 모두 스물 한 가지 공(空)으로 중생의 티끌 번뇌
를 닦아 없애준다고 한다. 또한 사문이 재계(齋戒)를 지키고,
인욕과 화합을 닦으며 자비희사(慈悲喜捨)하는 것은 일상적인
승가의 법도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완전히 부처
님의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이니 탐착으로 의지하는 것을 인정
할 수는 없다. 부처나 보리 등의 법을 얻고자 하는 자는 손을
불에 갖다 대는 것이다.
문수보살은 ‘부처다 법이다 하는 견해를 일으키기만 하면 자
기를 다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문수보살은 부처님 앞에서 칼을 빼어들었고, 앙굴마라는 부처님에게 칼을 들이댔던 것이다. 저 ’보살은 5무간업(五無間業)을 지어도 무간 지옥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 말씀과도 같다. 그들 보살은 원통(圓通)으로 빈틈없으니 5역죄(五逆罪)로 빈틈없는 중생의 그것과는 다르다.
파순으로부터 부처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진 기름때를 털끌만큼도 갖지 않는다 해도 그런 데에 의지하여 집착하면 ‘이승의도’라 한다. 하물며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이해한다 하며 논쟁과 승부 다투는 말을 하는 경우이겠는가. 이들은 논쟁승(論爭僧)이지 무위승(無爲僧)은 아니다.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에 탐착하여 물들지 않으면 이를 남이 없음(無生)이라 하며, 바른 믿음(正信)이라고도 한다. 일체법을 믿고 집착하면 ‘믿음을 갖추지 못했다’하며, ‘믿음이 완전하지 못하다’, ‘치우쳐서 고르게 믿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를 일천제(一闡提:성불할
종자가 없는 중생)라고 이름한다.
이제 단박에 깨치려 하는가. 사람(人)과 법(法)을 동시에 딱 끊어 비우고(空), 3구(三句) 밖으로 꿰뚫어야 하니, 그것을 ‘온갖 테두리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사람’이란 믿음이며, ‘법’이란 계율․보시․지혜(聞慧)등이다. 보살은 차마 성불하지 않고 차마 중생이 되지도 않으며, 차마 계율을 지니지도 않고 차마 파계를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지키지도 않고 범하지도 않는다’고 하였던 것이다.
지(智)는 흐리고 관조(照)는 밝으며, 혜(慧)는 맑고, 식(識)은 탁하다. 부처로 말하자면 관조하는 지혜(照慧)라고 하며, 보살이면 지(智)하 하고, 이승과 중생 쪽으로 치면 식(識) 또는 번뇌라고 한다.
부처라는 결과 속에는 중생이라는 원인이 들어 있고 중생 원인 속에도 부처라는 결과가 들어 있다. 부처에게 있어서는 법륜을 굴린다(轉法輪)하고, 중생에게 있어서는 법륜이 구른다(法論轉)하고, 보살에 있어서는 영락장엄구(纓珞莊嚴具)라 하고, 중생에게 있어서는 오음총림(五陰叢林)이라 한다.
부처에게 있어서는 본지무명(本地無明)이라 하는데, 이는 무명의 밝음(無明明)이다. 그러므로 ‘무명이 도의 바탕이 된다’하였으니, 어둡게 가리운 중생의 무명과는 다르다. 저것(彼)은 객관이고 이것(此)은 주관이며, 저것은 들리는 것(所聞)이고 이것은 듣는 것(能聞)이다. 그것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不一不異), 아주 없어지지도 않고 항상하지도 않으며(不斷不常),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不來不去). 살아 있는 말(生語
句)이며, 틀을 벗어난 말 (出轍語句)로서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으며,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 다 이와 같다.
온다 간다, 단멸이다 영원하다, 부처다 중생이다 하는 것은 죽은 말이다. 두루하다 두루하지 않다, 같다 다르다, 단멸이다 항상하다 하는 등은 외도의 설이다. 반야바라밀은 자기 불성인데 마하연(摩詞衍)이라고도 한다. 마하(摩詞)는 크다는 뜻이고, 연(衍)은 수레(乘)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자기의 지각(知覺)을 지켜 머물면 또한 자연외도(自然外道)가 된다. 지금의 비추어 깨달음(鑑覺)은 지킬 필요가 없으며, 따로 부처를 구할 것도 없다. 따로 구한다면 인연외도(因緣外道)에 떨어진다.
이 땅의 초조(初祖)께서는 ‘마음에 옳다고 여기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르다 할 것도 있게 된다’고 하셨다. 어떤 것을 귀중하게 여기면 그것에 혹하게 되니, 믿으면 믿는데 혹하고 믿지 않으면 비방을 이룬다. 그러므로 귀하다 귀하지 않다 하지 말고, 믿는다 믿지 않는다 하지도 말라.
부처님은 무위(無爲)도 아니다. 무위가 아니라 해서 허공과 같은 적막함도 아니다. 또한 부처님은 허공같이 큰 마음을 가진 중생(大心衆生)으로서 비추어 깨달음이 많다. 비록 많다고는 하나 그 비추어 깨달음은 청정하여 탐내고 성내는 귀신이 그를 붙들지 못한다.
부처님은 온갖 번뇌를 벗어난 분으로 털끌만큼의 애욕과 집착이 없으며, 애욕과 집착이 없다는 생각마저도 없으니, 이를 6도만행(六度萬行)을 빠짐없이 갖추었다고 한다, 장엄구(莊嚴具)가 필요하다면 갖가지가 다 있으며, 필요치 않아서 사용하
지 않는다 해도 잃지 않는다. 이렇게 인과와 복지(福智)를 자유롭게 부린다. 이는 수행이며 수고롭게 일을 하며 무거운 짐을 진 것은 아니데, 이를 수행이라 부른다 해도 도리어 이같지 않다.
삼신이 한문(三身一體)이며, 한몸이 삼신(一體三身)이다.
첫째는 법신실상불(法身實相佛)로서 법신불은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으니 밝음과 어둠은 허깨비의 변화에 속하는 것이다. 실제의 모습(實相)은 헛것(虛)을 상대로 지어진 이름이다.
그러나 본래 이름이란 없는 것이다. ‘부처님 몸은 함이 없어(無爲) 어떻난 테두리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한 것과도 같다.
성불하여 일신을 공양하는 등은 한 됫박 한 홉 들이쯤 되는 말이다. 요컨대 탁함을 상대로 맑음을 가려내 붙인 이름이므로 ‘실상법신불’이라 한 것이다. 또한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이라 이름하며, 허공법신불, 대원경지(大圓鏡智:제 8식의 전변), 제8식(第八識),성종(性宗)*,공종(空宗)*,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은 불국토, 굴 속에 있는 사자, 금강후득지(金剛後得智)*,무구단(無垢檀), 제일의공(弟一義空),현묘한 종지(玄旨)라 이
*성종(性宗):차별상(差別相)을 중심으로 일체법을 설하는 상종(相宗)에 대해 평등하고 진실된 성품을 설하는 종지.
*공종(공종): 상(相)을 부정하여 일체법의 실상인 공(空)을 설하는 종지. 중국에서는 유종(有宗)과 공종(空宗),혹은 상종(相宗)과 성종(性宗)으로 제교(諸敎)를 분류해 왔는데 유종,상종에는 소승과 유식, 공종, 성종에는 삼론종, 화엄종등이 있다.
*금강후득지(金剛後得智):금강정(金剛定)을 얻은 뒤 다시 차별지를 써서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님의 지혜.
름붙이기도 한다.
삼조(三祖)께서 말씀하시기를,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부질없이 생각만 고요히 한다’고 하였다.
두번째 보신불(報身佛)로서 보리수 아래의 부처님이다. 또는 환화불(幻化佛)이라고도 이름하며, 상호불(相好佛),응신불(應身佛),원만보신노사나불, 평등성지(平等性智:제7식의 전변), 제7식(第七識), 안과에 응하는 부처님(酬因答果佛)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52선나수(五十二禪那數)와 같고, 아라한, 벽지불, 모든 보살과 같다. 또한 생멸 등의 괴로움을 받는 것도 똑같지만 중생이 업에 매어 고통을 받는 것과는 다르다.
세번째는 화신불(化身佛)로서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에 아무런 집착과 물듬이 없으며, 물들음이 없다는 것마저 없다. 4구(四句)를 벗어나 훌륭한 말솜씨를 갖추셨으니 화신불이라 이름한다. 이 분이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이며, 대신변(大神變)이며, 유희신통(遊戱神通),묘관찰지(妙觀察智:제6식의 전변), 제6식(第六識)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공양하면 3업(三業)이 청정해져서 전(前際)에도 끊을 번뇌가 없었고, 지금(中際)도 지킬 자성이 없으며, 뒤에(後際)에도 이룰 부처가 없다. 이렇게 3제(三際)가 끊겼고, 3업(三業)이 청정하며, 3륜(三輪)이 공적하고, 3단(三檀)이 공(空)하다,
무엇을 ‘비구가 부처님께 공양하고 모신다’하는가?
6근(六根)에 번뇌(漏) 없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장엄한다고도 하는데, 모든 번뇌가 빈(空無)것을 수풀과 나무로 장엄했
다 하며, 모든 물듬이 빈 것을 꽃과 열매로 장엄했다 하는 것이다.
빈(空無) 불안(佛眼)으로 수행인을 파악하고 법안(法眼)으로 청탁을 분별하면서 청착을 분별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면 그것을 눈 없는 데(無眼)까지 도달했다면 한다. 「보적경(寶積經)」에서는 ‘법신을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것으로는 구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색(色)이 없기 때문에 육안(肉眼)으로 볼 것이 아니며, 망정이 없으므로 천안(天眼)으로 볼 것도 아니다. 모습을 떠났으므로 혜안(慧眼)으로도 볼 수 없고, 모든 행(行)을 떠났으므로 법안(法眼)으로 볼 것도 아니며, 모든 식이 떠났으므로 불안(佛眼)으로 볼 것도 아니다.이러한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을 부처의 생각(佛見)이라고 한다. 색(色)은 색이나 형색(形色)이 아님을 진색(眞色)이라 하며, 공(空)은 공이나 창공(太虛)이 아님을 진공(眞空)이라 하나, 색과 공도 또한 약과 병이 서로를 다스린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법계관(法界觀)에서는 ‘색(色)에 즉하지 않았다느니 할 수 없으며, 공(空)에 즉했다느니 공에 즉하지 않았다는니 할 수도 없다’라고 하였다.
눈․귀․코․혀․몸․의식에 모든 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제7지(第七地)에 전변해 들어간다‘고 한다. 7지(七地)보살은 칠지에서 물러나지 않고 위로 3지(三地)를 올라(向上)간다. 모든 보살의 심지(心地)는 명백(明白)하여 쉽게 오염되어 불이라고 말만 해도 바로 탄다.
색계(色界)에서 올라겸 보시가 병이고 간탐(간貪)이 약이며, 색계에서 내려가면 간탐이 병이고 보시가 약이 된다.
유작계(有作戒)란 세간법을 끊는 것이며, 다만 몸과 손으로 조작하지 않아 허물이 없으면 이를 무작계(無作戒)라 하며, 또는 무표계(無表界),무루계(無漏戒)라 하기도 한다. 그러니 마음을 움찔했다(擧心動念)하면 모조리 파계(破戒)라 하는 것이다. 이제 있다 없다 하는 모든 경계에 혹하지 않고 혹하지 않는 데에 머물지도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으면 그것을 ‘빠짐없이 배우고 부지런히 생각(護念)하며 널리 유포한다’고 한다.
깨닫지 못했을 때를 어미(母)라 하고, 깨닫고 나서를 자식(子)이라 하는데, 깨달음이 없다는 생각도 없음을 어미 자식이 동시에 없어짐이라 한다. 이렇게 선에도 매이지 않고 악에도 매이지 않으며, 부처에 얽매이지도 않고 중생에게 매이지도 않는다. 테두리(量水)에도 마찬가지며, 나아가서는 아무런 테두리에도 매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는 얽매임에서 벗어나 한량을 뛰어넘은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앎(知解)이나 설명(義句)에 탐착하는 것은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여 소락(수酪)을 많이 먹이기만 할 뿐 소화가 되고 안되고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이 말은 10지(十地)에 비유된다. 즉 인간․천상에게 존대받는 번뇌, 색계 무색계에 태어나 선정과 복락을 누리는 번뇌, 자유롭게 신통으로 날며 숨고 난타나면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 정토(淨土)에 두루다니며 법을 듣지 못하는 번뇌, 자비희사(慈
悲喜捨)와 인연(因緣)을 닦는 번뇌, 공(空)과 평등한 중도(中道)를 닦는 번뇌, 3명(三明)․6통(六通)․4무애(四無碍)를 닦는 번뇌, 대승심을 닦아 사홍서원을 발하는 번뇌, 초지,2지,3지,4지에서 분명히 이해하는 번뇌, 5지,6지,7지에서의 모든 지견(知見)번뇌, 8지,9지,10지에서 이제(二諦)를 동시에 관조하는 번뇌와 나아가서는 불과(佛果)를 닦는라 백만아승지겁 옹안 행하는 모든 번뇌까지 설명이나 앎을 탐할 뿐 도리어 얽어매는 번뇌임을 모른다. 그러므로 ‘강을 보아야만 향상(香象)을 뛰울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14.
누군가 스님께 물었다.
“보십니까?”
스님께서 대답하셨다.
“본다.”
다시 물었다.
“본 뒤에 어떻습니까?”
그러자 스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보는 것이 둘이 아니다. 이제 보는 것이 둘이 아니라면 보는 것으로 볼 것을 보지 않는다. 만일 보는 것을 다시 본다면 앞에 보는 것이 보는 것이냐, 뒤에 보는 것이 보는 것이겠냐. 마치‘볼 것을 볼 때엔 보는 것이 아니며, 보는 것은 오히려 보는 것을 떠나 보는 것이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법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실행되지 않으
면 모든 부처님께서 빨리 기약을 주신다(授記)고 하였다.”
그러자 이렇게 따져 물었다.
“보는 것이 이미 보는 것이 아니라 한다면 기약을 주신다는 말이 어떻게 기약을 주신다는 말이 되겠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먼저 종지(宗)부터 깨달은 사람은 빨아놓은 옷처럼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상(法相)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습 떠난 것을‘부처’라 하는 것이다. 허와 실을 둘 다 간직하지 않고 중도만이 오롯하고 묘하다. 한 가닥 같은 이 길을 통달하여 후진들이 그 단계에 계합하므로 ‘기약을 준다’고 할 뿐이다.
무명(無明)은 아버지이고 탐애(貪愛)는 어머니이며, 자기는 병이고 다시 자기를 치료함은 약이다. 자기라는 칼로 다시 자기 무명과 탐애라는 부모를 죽이므로 ‘부모를 살해한다’고 했던 것이다. 한 마디 말로 일체법을 견주어 타파하니, 때 아닌 때에 밥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더. 있다 없다 하는 등의 모든 법은 때 아닌 밥이며, 나쁜 음식이며 보배 그릇에 담긴 더러운 음식이다. 또한 파계이며, 망령된 말이며, 잡스러운 음식이다.
부처님은 구함이 없는 사람이니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법을 탐하여 소유하거나 조작하면 모두가 위배되는 것으로 도리어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이렇게 탐하고 물들면 그것을 모조리 ‘수수(授手)’라고 이름한다.
탐내거나 물들지 않고, 탐내거나 물들지 않음에도 머물지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조차도 없으면 반야화(般若火)라
한다. 이것은 손가락을 태우고 신명을 아끼지 않으며, 사지를 마디 마디 찢고, 세간을 벗어나며 저 세계에서 이 세계를 다스리는 것이다.
오장육부에 12분교와 유․무등 모든 법을 털끝만큼이라도 남겨두었다면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하고 얻을 것이 있어 마음을 내고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여우라고 한다. 이제 오장육부에 아무 구할 것도 얻을 것도 없다면 대시주(大施主)이며 사자후이다. 이 사람은 또한 얻을 것이 없는 거기에 머물지도 않고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없으니 육절사자(六絶獅子)라고 부른다.
너다 나다 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모든 악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겨자씨에 수미산을 받아들이면서 일체 탐․진․팔풍(八風) 등을 일으키지 않는 것과 같다. 또한 입 속에 큰 바위의 물을 머금으면서 일체 허망한 말은 귀에 받아들이지 않으며, 몸으로 남에게 전혀 나쁜 짓을 하지 않아서 모든 불을 뱃속에 넣은 듯이 한다.
이렇게 낱낱의 경계에 혹하지 않고 성내지도 기뻐하지도 않으며 자기 육근문두(六根門頭)에서 깎아내고 정화하면 일 삼을 것 없는 사람(無事人)으로서 모든 알음알이(知解)를 극복하고 두타행(頭陀行)정진한다 하겠다. 이를 천안(天眼), 또는 분명히 관조함으로써 눈을 삼는다(了照爲眼)고 한다. 또한 법계성(法界性)이라 하니, 수례를 만들어 인과를 싣는 것이다.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여 중생을 제도하면 앞 생각(前念)이 나지 않고 뒷 생각(後念)이 이어지지 않는다. 앞 생각의 활동
(業)이 없어지는 것을 중생을 제도했다고 한다. 앞 생각에 성을 내면 기쁜이라는 약으로 치료하니, 그것을 부처님이 계셔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모든 말씀은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니 병이 같지 않으므로 약도 다르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부처님이 있다 하고 어떤 때는 부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실다운 말로 병을 다스려 차도가 있으면 낱낱이 실다운 말이지만 차도가 없으면 그 모두가 허망한 말이다. 그러나 실다운 말이 견해를 내면 망령된 말이되고, 망령된 말이 중생의 전도를 끊으면 실다운 말이 되니 병 또한 허망하여 허망과 약이 서로 다스리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여 중생을 제도하신 9부교(九部敎)의 말씀은 방편교설(不了義敎)이다.
성냄과 기쁨, 병과약이 그대로 자기라서 다시는 두 사람이 없는데, 어느 곳에 세간에 출현하는 부처가 있으며 어느 곳에 제도할 중생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경(經)에서도 ‘멸도(滅度)를 얻은 중생은 사실 없다’고 하였다. 또는 ‘부처와 보리를 좋아하지 않고 유․무 모든 법에 집착하고 물들지 않음을 남을 제도한다(度他)하고, 자기를 고집하여 머물지 않음을 자기를 제도한다(自度)’고 하였다.
병이 같지 않기 때문에 약도 다르고 처방도 다르니 한 쪽으로만 고집해서는 안된다. 부처와 보리 등의 법에 의지하면 모조리 일정한 방향에 의지함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에 있어서는 한결같지 않다’고 하였던 것이다.
경전에서는 그것을 노란 잎사귀를 돈이라고 속이고 빈주먹
속에 있다고 속여 어린 아이를 달래는 비유를 들어하고 있다. 그러나 사라음은 이 이치를 모르니 그것을 무명(無明)과 같다고 한다. ‘반야를 행하는 보살은 내 말에 집착하거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는다’하였다. 성내는 마음은 돌덩이 같고 애욕은 강물과 같다. 지금 성내는 마음과 애욕만 없다면 산하석벽을 꿰뚫고 당장 귀머거리 속인병을 다스리며 다문변설(多聞辯說)로 눈병을 다스릴 것이다.
사람이 부처가 되면 얻었다(得)하고 사람이 지옥으로 떨어지면 잃 었다(失)한다. 옳다(是)그르다(非)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삼조(三祖)께서 말씀하시기를, ‘시비득실을 동시에 놓아 버리라’하셨다.
있다 없다 하는 등의 모든 법에 집착하여 머물지 않으면 그것을 유연(有緣)에 머물지 않는다 하고, 머물지 않는 거기에도 머물지 않으면 그것을 공인(空忍:忍은 바른 앎, 지혜라는 뜻)에 머물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 그대로가 부처이며 선도(禪道)를 깨달았다고 고집하는 자를 내견(內見)이라 하며, 인연과 닦아 얻음을 통해 이룬다고 집착하는 자를 외견(外見)이라 한다.
지공(誌公)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견과 외견 모두가 착각이다’라고 하셨다.
눈․귀․코․혀가 각각 유․무 모든 법에 집착하여 물들지 않으면 이를 4구게(四句偈)를 수지(受持)한다고 하며, 사과(四果)라고도 한다.
6입(六入)에 자취가 없는 것을 육신통(六通)이라 한다. 유․
무 모든법에 막히지 않고, 막히지 않음에 머물지도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다면 이를 신통(神通)이라 한다. 나아가 이 신통을 지키지 않으면 신통이 없다고 한다. ‘신통이 없는 보살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니, 가장 불가사의한 향상 부처님(佛向上人)이시다. 또한 자기천(自己天)이며, 지혜로 관조함이다. 찬탄은 기쁨이며 기쁨은 경계에 속한다. 이렇게 기뻐할 경계는 하늘이며 찬탄하는 것은 사람이어서 사람과 하늘이 만나니 이것을 ‘청정한 지혜(淨智)는 한늘, 바른 지혜(正智)는 사람’이라 하기도 한다.
본래 부처가 아닌데 부처라 하면 그것은 체결(體結)이며, 부처라는 생각을 내지 않고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다는 것마저도 없으면 이를 매임을 없앴다(滅結), 또는 진여(眞如),체여(體如)라 한다.
부처를 구하고 보리를 구하는 것을 현신의(現身意)라 하니, 조금이라도 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모조리 현신의라 한다. 그러므로 ‘보리를 구함이 훌륭한 구함이긴 하나 티끌(塵累)을 더할뿐이다’하였다. 부처를 구하면 부처 대중이며, 유․무 등 모든 법을 구하면 중생 대중인데 이제 비추어 깨달음으로 유․무등 모든 법에 머물지 않으면 대중의 테두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소리․냄새․맛․촉감․법 등을 낱낱이 좋아하지 않고, 그 모든 경계를 탐착하지 않아서 십구(十句)의 탁한 마음이 없기만 하면 요인성불(了因成佛)*이며, 글(文句)을 배워 깨닫고자
*이치를 바로 비추어 부처가 되는 것을 요인 성불이라 하는 것에 비해 여러
하는 자는 인연성불(因緣成佛)이라 한다.
부처님을 보고 부처님을 알면 부처님을 설명할 수 있지만 안다 본다 하면 되려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부처가 알고 부처가 보고 부처가 설명한다 해야 맞을 것이다. 이것은 불(火)을 본다 하면 옳겠지만 불이 본다 할 수는 없고, 칼로 물건을 벤다 하면 옳겠지만 물건이 칼을 벤다 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부처를 안다는 사람, 부처를 보았다는 사람, 부처를 설명하는 사람은 향하수 모래알 같으나, 부처의 앎, 부처의 봄, 부처의 들음, 부처의 말씀은 만에 하나도 없다. 이들은 자신에게 눈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의지하여 눈을 삼을 뿐이다. 경전에서는 이를 추론(比量智)이라고 부르는데, 지금 부처의 지해(知解)를 탐하는 것도 역시 비량지이다.
세간법으로 드는 비유를 유사비유(順喩)라 하는데 방편교설이 그것이다. 궁극적인 교설(了義敎)은 반대비유(逆喩)인데 머리․눈․골수․뇌를 버린다 한 것이 그것이다. 지금 부처․보리등의 법을 사랑하지 않는다 함은 반대비유로서 버리기 어려움을 머리․눈․골수․뇌에 비유하였다. 있다 없다 하는 모든 경계법을 관조함을 머리라 하고, 있다 없다 하는 경계법의 모양에 꺾이게 됨을 손이라 하며, 목전에 경계를 전혀 관조하지 않을 때를 골수․뇌라 한다.
성지(聖地)에서 범인(凡因)을 익혀 부처님은 중생 속에 들어가 동류로 이끌어 주시니, 그들 아귀와 함께 사지 마디마디를 불에 태우며 반야바라밀을 설명하여 발심하게 한다. 만일 오로
가지 수행하는 연(緣)을 빌어 부처가 되는 것을 인연성불이라 한다.
지 성인의 경지에 있기만 한다면 무엇을 의지하여 그들에게 가서 말해주겠는가.
부처님은 모든 부류에 들어가 중생들에게 배와 뗏목이 되어 주고 그들과 함께 무한한 수고로움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부처님은 괴로운 곳에 들어가 중생과 함께 괴로움을 받지만, 가고 머뭄이 자유로와 중생과 같지는 않다.
부처님은 헛되게 괴로움을 받지 않는데 어떻게 괴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괴롭지 않다 한다면 이 말은 틀린 것이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 부처님은 신통이 자재하다느니 자재하지 못하다느니 하고 잘못 만들 한다.
부끄러운 줄 아는 사람이라면 감히 부처님은 유위다 무위다하지 못하며, 감히 부처님은 자유롭다 자유롭지 않다 하지 못한다. 찬탄하는 약방문(藥方文)을 제외하고는 추한 양 갈래를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경에서는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불보리를 한 쪽에 봉안하려 한다면 그 사람은 큰 죄를 짓는 것이다’하였고, 또‘부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 준다면 허물이 없다’라고도 하였다.
무루(無漏)우유가 유루(有漏)병을 치료하는 것과도 같으니 그 소는 고원에 있지도 않고 하습지에 있지도 않아서 이 우유로 약을 만들 만하다. 여기서 고원은 부처를 비유한 것이고 하습지는 중생을 비유한 것이다.
‘여래실지법신(如來實智法身)에게는 이 병이 없다’한 것과도 같다.
막힘없는 말솜씨로 자유롭게 날면서 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면 그것을 쓰라린 생로병사의 아픔이라 한다. 이것이 버섯국을 가만히 마시고 설사병을 앓다가 돌아가신 것이며, 가만히 밝은 자취를 숨긴 것이다.
밝음과 어둠을 모두 버리고, 갖느니 갖지 않느니 하지를 말라. 또한 갖지 않다는 것마저 없애라. 그는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다.
왕궁에서 태어나 야소다라를 받아들이고 여덟가지 모습으로 성도하였다(八相成道)한 것은 성문외도가 망상으로 헤아린 것이니, ‘잡다하게 먹는 몸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순타(純陀:부처님께 마지막 공양을 올린 사람)가 말하기를, ‘나는 여래께서 결코 받지 않고 먹지도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하였다.
무엇보다도 두 눈을 갖추고 양쪽 일을 관조해내야(照破)하며, 한 쪽 눈만 가지고 한 쪽으로만 가서는 안되니, 그러면 저쪽 어디에 가게 될 것이다. 공덕천(功德天)과 흑암녀(黑暗女)는 늘 같이 다니는데 지혜있는 주인은 둘 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음을 허공같이 하고 배워야만 비로소 이룰 것이 있다.
인도의 첫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 ‘설산(雪山)은 큰 열반에 비유된다’하셨고, 이 땅의 초조(初祖)께서는 ‘마음마다 목석같이 하라’하셨다.
삼조(三祖)께서는 ‘분명하게 인연을 잊는다’하셨고, 조계(曹溪)스님께서는 ‘선이고 악이고 전혀 생각하지 말라’하셨으며,
스승(先師:마조)께서는 ‘길 잃은 사람이 방향을 못가리는 것과도 같다’하셨다.
또한 조공(肇公)은 ‘지혜와 총명을 막아 버리고 홀로 깨달아 그윽하고 그윽한 자이라’하셨으며, 문수는 ‘마음은 허공 같아서 예배․공경으로 볼 바가 아니며, 심오한 수다라(修多羅)는 듣지도 못하고 수지(受持)하지는 못한다’하셨다.
이제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을 전혀 보지도 듣지도 말고 육근(六根)을 막아라. 이렇게 공부하고 이렇게 경전을 지녀야 비로소 수행할 자격이 있다 하겠다. 이 말은 귀에 거슬리고 입에 쓸 것이다. 이 가운데서 이처럼 할 수만 있다면 다음 생 다음 다음 생에 나서는 부처없는 큰 도량에 앉아서 평등하고 바른 깨달음 이루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악을 선으로 바꾸고 선을 악으로 바꿔 악법으로 10지보살을 교화하고 선법으로 지옥․아귀를 교화한다. 밝은 곳에서는 밝음의 결박을 풀고 어두운 곳에서는 어두움의 결박을 풀 것이다. 황금을 흙으로 만들고 흙을 황금으로 만들면서 모든 것으로 자유롭게 변화해 낼 수 있다.
항하사 세계 밖에서 구제해 주기를 바라는 자가 있으면 부처님께서는 즉시 30상을 그 사람 앞에 나타내 그 사람의 언어로 설법해 주신다. 근기 따라 교화하고 상대에 맞우처 다른 모습으로 무든 세계에 변화해 나타난다.
이렇게 아(我)와 아소(我所)를 떠났다 해도 저쪽 일에 속하며, 작은 작용이며, 불사를 짓는 법위에 포함된다. 크게 작용하는 자는 형체없는 데에 그 큰 몸을 숨기고, 들릴락말락한
소리에 큰 음성을 숨긴다. 마치 나무 속의 불과 같고 종소리
북소리와도 같아 인연이 닿지 않았을 때는 그것이 있다 없다 할수 없는 것이다. 축생이 천상에 태어날 과보를 침 뱉듯 버린다. 보살은 육도만행을 닦으며 마치 죽은 시체를 타고 강둑으로 건너듯, 감옥에 갇혔다가 변소간 구멍으로 빠져나오듯 한다. 부처님이 30상을 나타낸다 해도 그것을 ‘기름때 절은 옷’이 라고 한다. 또한 ‘부처님은 한결같이 오음(五陰)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틀린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부처님은 허공이 아닌데 어떻게 한결같이 받아들이지 않기만 하겠는가. 가고 머뭄이 자유로와 중생과는 다르다. 한 천계(天界)에서 한 천계에 이르며, 한 불국토에서 한 불국토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변함없는 법이다.
또 말하기를, ‘3승교(三乘敎)에 의거한다면 그들의 신심어린 공양을 받으면 그들은 지옥에 있으며, 보살은 자비를 행하여 동류가 되어 교화 인도하며 은혜에 보답해야지, 항상 열반에만 있어선 안된다’고 한다.
또 말하기를, ‘불이 불을 바라보둣이 만지지만 않으면 불이 사람을 태우지 못한다’라고 한다.
이제다만 10구(十句)가 없으면 된다. 탁한 마음․사랑하는 마음․물든 마음․성내는 마음․고집하는 마음․머무는 마음․기대는 마음․집착하는 마음․가지려는 마음․그리워하는 마음은 하나에 가각 3구(三句)가 있다 낱낱이 3구 밖으로 꿰뜷으면 일체 비추는 작용(照用)을 자유로이 내 맡기며 말하고 입 다물고 울고 웃는 모든 행위가 부처님의 지혜일 것
이다. 오래 서 있었다. 편히 쉬어라.“
15.
누군가 물었다.
“무엇이 대승도에 들어가 활짝 깨치는 요법입니까(大乘入道頓悟法)?”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보다도 그대는 모든 인연을 쉬고 만사를 그만두라. 선(善)․불선(不善)․세간․출세간,일체 모든 법을 다 놓아 버리고 기억하거나 생각하지 말라. 몸과 마음을 놓아 버려 완전히 자유로와야 한다. 마음을 목석같이 하여 입 놀릴 곳 없고 마음 갈 곳이 없어야 한다. 마음의 대지가 텅 비면 구름장이 열리고 해가 나오듯 지혜의 햇살이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다만 모든 인연을 쉬어 탐애와 성냄과 집착,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망정이 다하면 5욕8풍(五欲八風)이 닥쳐도 꿈쩍하지 않는다. 견문각지(見聞覺知)에 막히지 않고 모든 법에 혹하지 않으면 자연히 갖가지 공덕과 신통묘용(神通妙用)을 갖춘 해탈인이니, 모든 경계를 대할 때 마음에 다툼과 혼란이 없다. 거두지도 않고 흩지도 않은 채 성색을 꿰뜷어 아무 걸림이 없으니 이런 사람을 도인(道人)이라 하는 것이다. 선악․시비 그 어느것도 쓰지 않으며, 한 법도 애착하지 않고, 한 법도 버리지 않으니 이를 대승인(大乘人)이라 한다.
모든 선악, 공유(空有), 더럽고 깨끗함, 유위와 무위, 세간과 출세간, 그리고 복이니 지혜니 하는 것에 매이지 않는 것을
부처님의 지혜라 한다.
시비나 미추, 옳은 이치다 그른 이치다 하는 온갖 알음알이(知解)와 망정이 다하면 얽어맬 수 없어서, 어딜 가나 자유로우니, 이를 초발심보살이 그대로 부처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는 것이다.“
16.
누군가 물었다.
“어떤 경계를 대할 때 어찌해야 마음이 목석 같을 수 있겠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법은 본래 스스로 말하지 않으니, 공(空)도 스스로 말하지 않으며, 색(色)도 말하지 않는다. 또한 시비와 염정도 사람을 얽어맬 마음이 없다. 단지 사람 스스로가 허망한 마을을 내어 얽매이고 집착하여 몇가지로 이해와 지견을 지어내고 몇가지로 애욕과 두려움을 낼 뿐이다. 모든 법이 저절로 생기지 않고 자기 한 생각 망상이 전도되어 모습을 가짐으로써 있게 되었음을 깨달아 마음과 경계가 본래 서로 닿을 수 없음을 알면 그 자리 그대로가 해탈이고 낱낱이 모든 법이 어디나 그대로 적멸 도량이다.
또 본래 성품은 무엇이라 이름붙일 수 없어서 본래 법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며, 더러움도 깨끗함도 아니며, 공도 유도 선도 악도 아니다. 단 이것이 모든 염법(染法)에 어울려주면 그것을 인간․천상․이승(二乘)의 경계라 이름하는 것이다.
더럽거나 깨끗한 마음이 다하여 속박에도 머물지 않고 해탈에도 머물지 않으며, 유위 무위․속박 해탈등 모든 헤아림이 없어 생사를 일으켜도 그 마음이 자재하면 마침내 허망한 허깨비인 5온(蘊) 18계(界) 등 티끌이나 나고 죽는 온갖 문(12人)과 합하지 않고 아득히 벗어나 기대지 않는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가고 머뭄에 걸림없어 문 열리듯 생사에 왕래하게 되는 것이다.
도는 닦는 사람이라면 괴로움과 줄거음, 마음에 맞고 안맞는 갖가지 일이 닥쳐오더라도 물러서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명이나 의식을 염두에 둔다거나 공덕과 이익을 탐내서는 안된다. 세간 어느 법에도 걸림 없으며 가까이 하거나 사랑하지 않고 고로움과 줄거움을 똑같이 여기며, 거친 옷으로 추위를 막고 맛 없는 음식으로 연명해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나 귀머거리․벙어리같이 되어야 약간이라도 비슷해질 여지가 있을 것이다.
만일 마음 속으로 널리 지해(知解) 경계의 바람에 휘말려 생사 바닷속으로 되돌아 갈것이다. 부처님은 구함이 없는 사람이니 구하면 이치에 어긋나고, 이치는 구할 것 없는 이치이니 구하면 잃는다. 그렇다고 구함 없는 데에 집착하면 다시 구하는 것과 같아지며, 무위에 집착하면 다시 유위와 같아진다.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법에 집착하지 않고, 법 아니데 집착하지도 않으며, 법 아님이 아닌 데도 집착하지 않는다’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여래께서 얻어신 이 법은 실재(實在)도 아니며 헛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일생동안 목석 같은 마음으로 5음 18계와 갖가지 처(人), 5욕 8풍에 휘말리거나 빠져들지 않을 수만 있다면 생사의 인(因)이 끊긴다. 자유롭게 가고 머물며 모든 유위인과(有爲因果)나 유루(有漏)에 매이지 않는다. 뒷날 다시 스스로 얽매이지 않는 이것으로 인(因)을 삼고 동사섭(同事攝)으로 이익케하며, 집착 없는 마음으로 모든 사물을 대하며, 걸림 없는 지혜로 모든 속박을 풀어줄 것이니, 그것을 ‘병에 따라 약을 쓴다’라고 한다.”
17.
누군가 물었다.
“이제 출가하여 계를 받고 몸과 입이 청정해져 이미 모든 법을 갖추었다면 해탈할 수 있겠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조금은 벗어났으나 아직 심해탈(心解脫)이나 일체처해탈(一切處解脫)은 얻지 못했다.
18.
누군가 물었다.
“무엇이 심해탈이며 일체처해탈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불․법․승(佛法僧)을 구하지 않고, 복과 지혜,지해(知解)도 구하지 않으며,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망정이 다하고 구함없는 이것을 옳게 여겨 붙들지도 않으며, 다한 그곳에 머물지도 않으며, 천당을 좋아하고 지옥을 두려워하지도 않아서 속박과 해탈에 걸림 없으면 그것으로 몸과 마음, 그 어디에 대해서나 ‘해탈’했다 하는 것이다.
그대가 어느 정도 계율을 닦아 3업이 청정하다 하여 다 끝냈다 말하지 말라. 항하사 만큼의 계․정․혜(戒定慧) 방편과 무루해탈(無漏解脫)은 전혀 털끝 만큼도 맛보지 못했음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눈 귀가 어두어지고 백발에 주름살 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당장에 힘써 용맹정진하여 끝끝내 성취해야 한다. 늙음과 괴로움이 몸에 닥치면 슬픔과 애착에 얽매여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마음 속은 두려워 어디도 의지할 곳이 없어 갈 곳을 모를 것이다. 이럴 때 가서는 손발을 정리할래야 할 수 없고 설사 복과지혜, 명리나 물질이 있다 해도 전혀 구제하지 못한다.
마음 지혜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경계를 반연할 뿐, 반조할 줄은 몰라서 다시는 부처님의 도를 보지 못하고 일생 지었던 모든 선악의 업연(業緣)이 한꺼번에 눈앞에 나타난다.
종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6도(六道)의 5음(五陰)이 동시에 눈앞에 나탄난다. 찬란한 빛을 내며 장엄함 모습으로 펼쳐지는집, 선박, 수레등은 모두 자기 마음에서 탐내고 좋아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나쁜 경계는 모조리 좋아할 만한 경계로 변하는데, 거기서
더 좋아하고 탐낸 쪽을 따른다. 이렇게 업식(業識)에 끌려가서 붙는데로 생(生)을 받게 되는데 자기 의지라고는 전혀 없이 용(龍), 축생, 양민,천민 등 정처없이 가게 된다.”
19.
누군가 물었다
“어찌해야 자기 의지를 얻을 수 있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지금이라도 할려면 할 수 있다. 5욕8풍을 마주하더라도 갖거나 버릴 마음이 없고, 간탐․질투․탐애 등 아소(我所)의 마음이 다하고 더러움과 청정함을 함께 잊으면 해와 달이 하늘에 떠 있는 듯 걸림없이 비출 것이다.
마음마다 흙덩이나, 나무토막․돌같이 해야 하고 생각생각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해야 한다. 또한 큰 코끼리가 강물을 끊고 건너듯 의심과 착각을 없애야 하니, 이러한 사람은 천당 지옥 어디에도 끌려들지 않을 것이다.“
백장록
(祖堂集)
1. 행록
마조(馬祖)스님의 법을 이었고, 강서(江西)에서 살았다. 스님의 휘는 회해(懷海)이며, 복주(福州) 장락현(長樂縣)사람으로 성은 황(黃)씨다. 어릴 적에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서 부처님께 절을 하더니 불상을 가리키면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저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처님이시다.”
“생김새가 사람 같아서 나와 다름이 없는데요! 뒷날 나도 부처가 되겠습니다.”
그 뒤에 스님이 되고서는 최상승(最上乘)을 흠모하여 바로 대적(大寂:마조스님의 호)스님 회상으로 가니, 대적스님이 보자마자 맞이하여 입실(入室)케 하였다. 스님께서 깊은 관문을 깨달은 뒤에는 다시는 딴 곳으로 가지 않았다.
스님께서 평생동안 고상하고 절도있게 수행한 일은 형용키 어렵거니와 날마다 운력에는 반드시 남보다 먼저 나섰다. 일
맡은 이가 민망하게 여겨 몰래 연장을 숨기고 쉬기를 청하니, 스님께서 말했다.
“내가 아무런 덕(德)도 없는데 어찌 남들만 수고롭게 하겠는가.”
스님께서 두루 연장을 찾다가 찾지 못하면 공양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하는 말이 천하에 퍼지게 되었다.
2. 상당․감변
1.
어떤 스님이 울면서 법당으로 들어오니, 스님께서 물었다.
“어째서 그러느냐?”
“부모가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스님께서 장사지낼 날을 잡아 주십시오.”
“우선 돌아갔다가 내일 오너라. 한꺼번에 묻어주겠다.”
2.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했다.
“내가 한 사람을 서당(西堂)에게 보내 말을 전하려 하는데
누가 가겠는가?”
오봉(五峯)스님이 나서서 대답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어떻게 말을 전하겠는가?”
“서당스님을 만나는대로 말하겠습니다.”
“무엇을 이야기하겠는가?”
“돌아와서 스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3.
위산(위山)스님이 밤늦게 스님를 뵈러 왔는데 스님께서 그를 보자마자 말했다.
“화로에 불을 좀 지펴다오.”
“불씨가 없습니다.”
“아까 불씨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리고 벌떡 일어나 화롯가로 가서 손수 재를 헤쳐 불씨 한덩이를 집어들고는 말했다.
“이게 불이 아니고 무엇인가?”
위산스님은 당장에 깨달았다.
4.
스님께서 위산스님과 일을 하다가 물었다.
“불이 있는가?”
“있습니다”
“어디에 있는가?”
위산스님이 나무가지 하나를 들고 두어번 분 뒤에 스님께 바치니, 스님께서 말했다.
“벌레 먹은 나무 같구나.”
5.
누군가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그대는 누구인가?”
“저는 아무아무라 합니다.”
“그대는 나는 아는가?”
“분명합니다.”
스님께서 불자(拂子)를 세워 들고 말했다.
“그대는 이 불자를 보는가?”
“봅니다.”
스님께서 문들 말을 그쳤다.
6.
어느날, 운력을 하는데 어떤 스님이 갑자기 북소리를 듣자 소리 높여 웃으면서 절로 돌아오니, 스님께서 말했다.
“장하다. 이것이 관음이 진리에 드는 문(門)이로다.”
그리고는 다시 그 스님에게 물었다.
“아까는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그렇게 크게 웃었는가?”
“제가 아까 북소리가 나는 것을 듣자 돌아와서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크게 웃었습니다.”
스님께서 그만 두었다.
이에 장경(長慶)스님이 대신 말했다.
“역시 재(齋)로 인하여 경하하고 찬탄(慶讚)하는 것이로다.”
7.
누군가 물었다.
“경에 의해서 뜻을 이해하면 3세 부처님이 원수이고, 경을 떠나서는 한마디라도 마(魔)의 말과 같다 하는데 어찌합니까?”
“동작을 굳이 지키고 있으면 3세 부처님이 원수요, 이 밖에 따로 구하면 마의 동작과 같다.”
8.
어떤 스님이 서당(西堂)스님에게 물었다.
“물음이 있고 대답이 있는 것은 묻지 않겠습니다. 묻지도 않고 대답치도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썩을까 걱정해서 무엇하려는가?”
스님께서 이 말을 전해 듣고 말했다.
“처음부터 그 노장을 수상히 여겼다.”
한 스님이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하자 스님께서는 “일합상(一合相)은 얻을 수 없다”하셨다.
9.
스님께서 어떤 스님에게 이렇게 시켰다.
“장경(章經)스님에게 가서 그가 설법하려고 상당하거든 절하고 일어나니 그이 신발 한 짝을 들고 소매로 먼지를 턴 뒤에 머리에 거꾸로 이고 나오라.”
그가 가서 스님의 지시대로 낱낱이 시행하니, 장경스님이 말
했다.
“내가 잘못했다.”
10.
스님께서 행각할 때 선권사(善權寺)에 가서 경을 보려 하니, 주지가 허락치 않고 이렇게 말했다.
“선승(禪僧)이 의복도 단정치 못하니 경을 더럽힐까 걱정이다.”
스님께서 그래도 경 보기를 간절히 청하니. 마침내 허락하였다. 스님께서 경을 다 본 뒤에 바로 대웅산(大雄山)에 가서 가르침을 폈다. 그 뒤, 공양주(供養主)를 하던 스님이 선권사로 와서 주지를 만나니, 주지가 물었다.
“어디서 떠났는가?”
“대웅산에서 왔습니다.”
“누가 주지로 계시는가?”
“아마도 우리 스님께서는 행각하실 때, 이 절에서 경을 보신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해(海:백장)상좌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러자 주지가 합장을 하고 말했다.
“나는 참으로 범부로다. 그때는 그가 인천(人天)의 참 선지식임을 몰랐다!”
11.
또 물었다.
“여기에는 무슨 일로 왔는가?”
“소(疏)를 지으려 합니다.”
주지가 손수 소를 지어 온갖 일을 가르쳐 준 뒤에, 공양주를 데리고 스님께 왔다.
스님께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얼른 산 밑으로 내려와서 그 들을 맞이해 와서 모든 인사를 마치고는 주지에게 선성(禪床)에 앉을 것을 권하면서 말했다.
“내가 꼭 한 가지 주지께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주지가 사양타 못해 자리에 오르니, 스님께서 물었다.
“주지께서는 강을 하실 어떻게 하시오?”
“마치 금쟁반에 구슬 굴리듯 합니다.”
“금쟁반을 들어버리면 구슬은 어디에 있소?”
주지가 대답을 못했다.
12.
또 물었다.
“교(敎)에서 말하기를, ‘분명하게 불성(佛性)을 보면 문수(文殊) 보살의 경지와 같다’하였는데 이미 분명하게 불성을 보았다면 의당 부처님과 같아야지 어째서 겨우 문수와 같다 하겠소?”
주지가 또 대답치 못했다.
이 일로 납의(衲衣)를 입고 선(禪)을 배워 호를 열반(涅槃)
화상이라 했으니, 그가 곧 제2의 백장(百丈涅槃)이었다.
13.
스님께서 어느날 저녁 깊은 잠에서 깼는데 갑자기 더운물이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시자도 깊은 잠에 빠져 불러도 깨어나지 않았다. 조금 뒤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면서 시자를 불렀
다.
“큰 스님께서 더운물을 찾으시오.”
시자가 벌떡 일어나 물을 끓여 스님께 가지고 오니, 스님께서 놀라 물었다.
“누가 이렇게 물을 끓여오라 하던가?”
시자가 앞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 하니, 스님께서 손가락을 퉁기면서 탄식했다.
“나는 결국 수행하는 법을 모르고 있었구나. 만일 수행할 줄아는 사람이라면 사람도 느끼지 못하고 귀신도 알지 못해야 하는데 오늘 나는 토지신에게 내 마음을 들켜 이렇게 되었다.”
14.
스님께서 운암(雲岩)스님을 보자 다섯 손가락을 들어 세우면
서 말했다.
“어느 것이 그대인가?”
운암스님이 “아닙니다”하니 스님께서 “어찌 그렇겠는가?”
하셨다.
15.
어느날, 스님께서 4경(새벽1시에서 3시)이 되도록 법당에
앉아 있었다.
그때 시자이던 운암이 세 차례나 곁에 와서 모시고 서 있었
다. 세번째 와서 모시고 섰을 때는 스님께서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침을 뱉으니 이에 시자가 물었다.
“스님, 지금 어째서 침을 뱉으셨습니까?”
“그대의 경계가 아니다.”
“저는 시자입니다. 저에게 이야기를 못하시면 누구에게 하시겠습니까?”
“물을 필요가 없다. 그대가 물을 일도 아니고 또 내가 말 할 일도 아니다.”
“스님께서 열반하신 뒤에라도 알고자 합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사람을 몹시도 괴롭히는구나! 내가 사람이 못나 조금 전에 갑자기 보리와 열반이 생각나길래 침을 뱉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토록 오랫동안 보리와열반, 요의(了義)를 말씀하셨습니까?”
“남에게 전할 수 없다. 그러기에 그대가 물을 일이 아니며,
그대의 경계도 아니라 하지 않더냐.“
16.
스님께서 법어를 내렸다.
“목구멍도 입술도 다물고서 속히 일러보라.”
어떤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
“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스님께서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말하기는 사양치 않겠으나 뒷날 내 자손들을 속일 것이다.”
이 말씀에 운암스님이 대답했다.
“스님, 지금도(스님의 자손이)있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 소리쳤다.
“우리 자손들을 망쳤도다.”
17.
스님께서 또 이렇게 법어를 내렸다.
“견(見)의 강물이 코끼리도 떠내려가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 보셨습니까?”
“보았다.”
“보신 뒤엔 어떠셨습니까?”
“견(見)을 둘이 없는 것으로써 보았느니라.”
“이미 말씀하시기를, ‘견을 둘이 없는 것으로써 보신다’하셨는데 견으로써 견을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일 견을 다시 본다면 앞의 것을 보십니까? 뒤의 것을 보십니까?”
이에 스님께서 말했다.
“견을 볼 때에 견은 견이 아니니라. 견은 견까지도 연윈 것 이어서 견으로는 미치지 못하느니라.”
18.
스님께서 또 이렇게 법어를 내렸다.
“옛사람이 한 손을 들거나 한 손가락을 세우고서도 그것을 선이다 도다 하였는데 이 말이 끝없이 무수한 사람을 속박하는 구나. 설사 아무말 않더라도 역시 입으로 짓는 허물이 있다.
부(부)상좌가 이 일을 들려주며 취암(翠岩)스님에게 물었다.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그것이 입으로 짓는 허물이 됩니까?”
“그저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상좌가 이틀을 말없이 지냈는데 취암스님이 부상좌에게 물었다. “엊그제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대 뜻에 맞지 않는 모양인데, 자비를 버리지 마시고 자세히 말씀해 주시오.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그것이 입으로 짓는 허물이 됩니까?”
부상좌가 손을 번쩍 드니, 취암스님이 다섯 활개를 땅에 던져 절하고 소리 내어 통곡하였다.
19.
스님께서 어느날 시자더러 제1좌(座)에게 가서 이렇게 묻게하였다.
“실제의 이치에는 한 티끌도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불사(佛事)를 하는 쪽에서는 한 법도 버리지 않는다 한 말씀은 궁극적인 교설(요義敎)에 속하는가. 방편교설(不了義)에 속하는가?”
제1좌가 대답했다.
“물론 궁극적인 교설(了義敎)에 속한다.”
시자가 돌아와서 아뢰니, 스님께서 시자를 때려서 내쫓았다.
20.
어떤 이가 물었다.
“무엇이 도에 들어 활짝 깨닫는 대승법(大乘入道頓悟法)입니까?”
스님께서 대답했다.
“우선 그대는 모든 반연을 쉬고 민사를 쉬어서 착한 일, 착하지 못한 일 등 세간의 온갖 것들을 모두 놓아버린 뒤에 기억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라. 몸과 마음을 놔버려 자유롭게 하면, 마음은 목석(木石)간이 되고 입으로는 말할 것이 없고 마음으로는 분별할 길이 없어진다. 마음은 허공 같아 지혜의 해가 저절로 나타나는데 마치 구름이 흩어지면 해가 나둣 할 것이다. 온갖 반연인 탐욕․성냄․애착 등을 모두 쉬어서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생각이 다하여 5욕(五欲)과 8풍(八風)을 대하더라도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그러한 속박을 받지 않으며, 모든 경계에 혹하지 않게 되면 자연히 신통과 묘용(神通妙用)을 갖출 것이니 이는 해탈한 사람이다. 온갖 경계를 대할 때 마음에 조용함도 어지러움도 없고 거둘 것도 흩어버릴 것도 없어서 온갖 빛과 소리를 만나더라도 걸림이 없으면 이런 이를 도인(道人)이라 한다. 온갖 선악(善惡)과 더럽고 깨끗함, 유위
(有爲)세계의 복과 지혜에 얽매이지만 않으면 그것을 부처의
지혜라 한다. 시비나 미추, 옳은 이치나 그른 이치 등 모든 소견을 다 없애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어딜 가나 자유로우면 그
것을 처음 발심한 보살이 당장에 부처 지위에 올랐다고 한다.
모든 법은 스스로가 말하지 않아서, 공(空)도 스스로를 공이라 하지 않고 색(色)도 스스로를 색이라 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 더럽고 깨끗함도 사람을 속박할 생각이 없는데, 사람들 스스로 함부로 헤아리고 집착하여 갖가지 견해를 짓고 갖가지 소견을 일으킨다. 그런데 더럽다 깨끗하다 하는 마음이 다하여 얽매임에도 머무르지 않고 해탈에도 머무르지 않아서 온갖 유위 무위의 견해가 없이 평등한 마음씨로 생사에 처한다면 그 마음은 자유로울 것이다. 마침내는 헛된 번뇌와 5온,18계, 생사와 모든 감관과 어우르지 않고 훤출히 뛰어나 의지한 곳이 없을 것이다. 어디에도 구애되지 않아서 가고 옴에 자유로우니, 생사의 길에 왕래하되 마치 문을 여닫는 듯할 것이다.
만일 갖가지 괴로움과 즐거움이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을
만나더라도 물러서는 마음이 없어야 하며, 명예나 의식(衣食)등의 이익을 생각지도 말고, 온갖 공덕이나 이익 등을 탐내지도 말며, 세상 법에 마음을 걸리게 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친하고 좋아하며 괴롭고 즐거운 것이라도 생각에 두지 말며, 거칠은 음식으로 목숨을 잇고 옷을 입되 추위와 더위를 막을 뿐, 우뚝하니 바봐 같고 귀머거리 같이 되어야 비로소 조그만치 가까와질 여지가 있다. 생사(生死)의 길에서는 알음알이를 널리 배우거나 복과 지혜를 구하여도 진리에는 이익이 없고, 도리어
알음알이의 경계가 일으키는 바람에 휘말려 생사바다로 돌아가
게 될 것이다.
부처는 구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니 구하면 이치에 어긋나고,
진리는 구할 것이 없는 이치니 구하면 잃는다. 그렇다고 구함
이 없는 것에 집착하면 도리어 구하는 것과 같다.
이 법은 실(實)도 없고 허(虛)도 없으니, 만일 평생 동안 마음이 목석(木石)과 같아서 5음․18계․5욕․8풍에 흔들리지 않으면 생사의 원인이 끊어져서 가고옴에 자유로와 모든 유위(有爲)의 인과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뒷날엔 속박없는 몸으로 중생과 동화되어 이익케 하고 속박없는 마음으로 모든 것에 응하며 속박없는 지혜로 모든 속박을 풀어서 병에 맞추어 약을 줄 것이다.“
21.
어떤 이가 물었다.
“지금 계를 받아 몸과 마음이 청정해지고 온갖 착한 법을 다
갖추면 해탈을 얻겠습니까?“
“조금은 해탈을 할 수 있으나 마음의 해탈을 얻지 못하면 온
갖 해탈을 얻지는 못한다.“
“무엇이 마음의 해탈입니까?”
“부처도 구하지 않고, 알음알이도 구하지 않아서 더럽고 깨끗한 생각이 다한 뒤엔 이 구함없는 경지도 옳다고 고집하지 않아야 한다. 다한 경지에도 머무르지 않고, 지옥의 속박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천당의 즐거움도 좋아하지 않고, 일체법
구애되지 않아야 비로소 해탈하여 걸림이 없게 될 것이니 몸과
마음 등 모두를 해탈이라 하게 된다.
그대들은 조그만한 계행이나 선행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치
말라. 항하수 모래와 같이 수많은 무루(無漏)의 계․정․혜를 가졌다 하더라도 전혀 쓸모가 없으니, 열심히 용맹정진하라.
귀 먹고 눈 어두운 늙음의 고통이 몸에 다가올 때까지를 기다리지 말라.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마음은 두려움에 떨면 갈곳이 없으니 이 지경이 되면 손발을 쓰려 해도 소용이 없다.
설사 복과 지혜와 지식이 있다 하여도 전혀 구제할 수 없는데,
그것은 마음의 눈이 열리지 못하고 오직 모든 경계를 반연하여
돌이킬 줄 모르기 때문이다. 또 일생 동안의 악업(惡業)이 모두 앞에 나타나서 반갑거나 두려운 6도와 5온이 앞에 나타나면 모두가 훌륭한 집․배․수레로 보여서 찬란히 빛난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탐욕과 애착을 따랐기에 모두 좋은 경계로 보이는데, 보이는 데 따라서 인연 많은 곳으로 태어나니 전혀 자유가 없어 용이 될지 축생이 될지 양반이 될지 상놈이 될지 전혀 기약이 없다.”
“어찌해야 자유로와집니까?”
“이제 5욕과 8풍을 대하여도 마음에 버리거나 선택함이 없고, 더럽거나 깨끗함이 모두 없어져서 하늘의 해와 달이 아무것에도 걸리지 않고 비추는 것같이 되어, 마음이 목석(木石)과 같고 강을 건너는 코끼리같이 전혀 의심이 없으면 이 사람은 천당이나 지옥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22.
스님께서 또 말했다.
“경을 읽거나 서적과 어록을 보는 목적은 모두가 자기에게로 돌아가야 된다. 온갖 교법은 오직 현재 감각하는 성품인 자기를 밝히는 것이라야 하는데, 유무(有無)의 모든 경계에 끄달리지 않아야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導師)께서도 온갖 유무의 경계를 꿰뚫어 무찌르셨으니, 이것이 「금강경」에 있는 자유와 독립의 경지이다.
만일 그렇게 되지 못하면 설사 12부경을 다 외운다 하여도 모두가 증상만(增上慢)을 이루게 될 것이며, 도리어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 되어 수행도 아니고 경이나 어록을 보는 것도 아니다.
만일 세상이 좋은 일뿐이라 하거나 밝은 사람 쪽으로만 향하다면 이는 옹색한 사람이다. 10지(地)에서도 세상의 흐름을 해탈치 못하고 생사(生死)의 강으로 흘러들어가니, 지식으로 어구(語句)를 찾는 일만은 하지 말아야 된다. 지식은 탐욕에 속하고, 탐욕은 병을 이루니, 지금이라도 유무(有無) 모든 법을 여의어 3구(三句) 밖으로 뛰어나면 자연히 부처님과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다. 이미 스스로가 부처인데 어찌 부처가 말을 하지 못한다고 근심하랴. 오직 부처가 유무 등 모든 법에 얽매여 더욱더욱 부자유하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므로 먼저 진리의 바탕 위에 서지 못한 채 복과 지혜가 있는 것은 마치 천한 이를 귀하다 하는 것 같으니, 진리의 바탕에 먼저 선 뒤에 복과 지혜가 있어서 때에 맞추어 행동하니
만 못하다. 그렇게 되면 흙을 가지고 금을 만들고 바닷물을 소酪(소酪)으로 바꾸며, 수미산을 뭉개 먼지를 만들며, 한 이치를 무량한 이치로 하고 무량한 이치를 한 이치로 하게 될 것이다.“
그 밖의 교화한 인연은 실록(實錄)에 자세히 실려 있다. 조칙으로 시호를 대지(大智) 선사라 하고, 탑호(塔號)를 대보승(大寶勝)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