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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1
대혜 (大慧宗曠) 선사의 기변 (機辯) 을 병법에 비유하자면 한신 (韓信:漢代의 명장) 과 백기 (白起:전국시대의 명장) 에 짝할 수 있다. 그들이 성채를 휩쓸고 고을을 섬멸할 때 거리적거리는 자는 격파하고, 부딪치는 자는 땅바닥에 쓰러뜨리니 백만이나 되는 마구니들은 멀리서 그의 모습만 바라보고서도 창을 거꾸로 든 채 도망친다. 사람들은 당당한 군사가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가로막는 자가 없는 것을 볼 뿐, 대장기 아래 편히 앉아 있는 노선사는 이제껏 한 치의 쇠붙이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
휘하의 비장 (裨將) 들은 그가 구축한 진영터의 발자취를 살펴보면서 그가 탄식하고 말했던 것들을 모아 「무고 (武庫)」라 이름하였으니 우리 국왕의 창고에도 과연 그와 같은 칼이 있었구나. 그러나 선사께서 말하지 않았던가. 취모검 (吹毛劍) 이란 움직이지 않아도 온누리 모두가 칼과 창이라고. 잠깐 이 창고 속에 들어간 자가 혹시 도적 마음을 모두 없애고 재빨리 칼날 위에서 몸을 뒤집을 수 있다면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중달 (司馬仲達) 을 도망치게 만드는 격이며, 그렇지 못하다면 칼을 잃어버린 지 오래인데 그제서야 뱃전에다 칼이 떨어진 곳을 새겨놓는 자일 것이다. 나를 알아줄 것도, 나를 허물할 것도 오로지「춘추 (春秋)」 뿐이다.*
순희 (淳熙) 병오년 (1186) 4월 초하루 담재 (淡齋) 에서 이영 (李泳) 이 쓰다.
1. 한 물음에 세 답 / 동산희광 (洞山希廣) 도인
동산희광 (洞山希廣) 도인은 재주 (梓州) 사람인데 총림에서는 그를 광무심 (廣無心) 이라 하였다. 그가 처음 행각할 때, 운개수지 (雲蓋守智) 스님에게 물었다.
ꡒ흥화 장 (興化存獎:830~883) 스님이 유나 (維那) 를 친 뜻은 무엇입니까?ꡓ*
수지스님이 승상 (繩滅) 에서 내려와 두 손을 활짝 펴고 혓바닥을 쑤욱 내밀어 보이자 희광스님은 좌복으로 한차례 쳤다. 이에 수지스님이 말하였다.
ꡒ이는 바람의 힘으로 움직인 것이다.ꡓ
다시 석상 임 (石霜琳) 스님에게 묻자, ꡒ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ꡓ고 되물었다. 희광스님이 또다시 좌복으로 한차례 치니 임스님이 말하였다.
ꡒ좋은 좌복이긴 하다만 너는 낙처 (落處) 를 모르는구나.ꡓ
희광스님이 또다시 진정 (眞淨克文:1025~1102) 스님에게 묻자,ꡒ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ꡓ고 되물었다. 희광스님은 또다시 좌복으로 한차례 치니 진정스님이 말하였다.
ꡒ그가 치니 너도 치는구나.ꡓ
희광스님은 이 말에 크게 깨쳤다.
진정스님은 그에게 송을 지어 주었다.
대장부가 끊을 것을 스스로 끊지 못하니
흥화는 학인을 가르치는 데 철저한 사람이었네
그 후 저절로 눈이 열렸으나
몽둥이질에 벌금까지 물고 절에서 내쫓겼네.
丈夫當斷不自斷 興化爲人徹底漢
2. 게송으로 인가하다 / 석상 초원 (石霜楚圓) 선사
자명 (慈明:石霜楚圓, 987~1040) 낭야 (慧覺) 대우 (大愚守芝) 등 몇 사람이 분양 (汾陽善昭:947~1024) 스님 곁을 떠날 때, 서로가 참두 (參頭:참문할 때 대표가 되는 것) 되기를 사양하자 분양스님이 말하였다.
ꡒ이번 길은 법납으로 따질 일이 아니니 나의 게송 한 수를 들어 봐라.ꡓ
하늘에는 머리가 없고
길주성 경계에는 창칼이 번뜩이는데
장군은 필마를 타고 숲 아래 지나가니
원주성 안이 왁자지껄하는구나.
天無頭 吉州城畔展戈矛
將軍疋馬林下過 圓州城裏뇨啾啾
자명이 앞으로 나서면서, ꡒ제 (楚圓) 가 도대체 무슨 인물이라고 감히 이와 같은 부촉 〔記〕 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ꡓ 하고는 드디어 대중을 거느리고 절을 올린 후 떠나갔다.
3. 3관 화두만 나오면 막혀버리니 /진정 극문 (眞淨克文) 선사
담당 준 (湛堂文準:1061~1115) 화상이 처음 진정스님을 찾아뵙자 진정스님이 물었다.
ꡒ요사이 어디에서 왔는가?ꡓ
ꡒ대앙산 (大仰山) 에서 왔습니다.ꡓ
ꡒ여름 안거는 어디에서 보냈는가?ꡓ
ꡒ대위산 (大山) 에서 보냈습니다.ꡓ
ꡒ어디 사람인가?ꡓ
ꡒ흥원부 (興元府) 사람입니다.ꡓ
진정스님이 두 손을 활짝 펴보이면서 물었다.
ꡒ내 손은 어찌하여 부처님의 손을 닮았지?ꡓ
스님이 어찌할 바를 모르자 진정스님은 말을 이었다.
ꡒ찾아오는 사람마다 하나하나 또박또박 대답하다가도 `부처님 손…' 이야기만 나오면 곧장 막혀버리니 병통이 어디에 있다 생각하느냐?ꡓ
ꡒ저는 모르겠습니다.ꡓ
ꡒ눈 앞에 있는 그대로가 완전한데 더이상 누구를 통해서 알려 하느냐?ꡓ
4. 은혜를 잊어버린 자 / 선섬 (善穢) 도인
선섬(善穢) 도인은 오랫동안 설두중현 (雪竇重顯:980~1052) 스님에게 공부한 분이다. 설두스님이 금아사 (金輪寺) 의 주지로 추천하려 하니 섬스님은 이 말을 듣고는 밤에 몰래 방장실 벽 위에 게송을 써놓고 도망쳐 버렸다.
조사의 등불을 이을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영남 혜능에게 끼지 못할 나의 도가 부끄럽기 때문이오
삼경 달빛아래 암두산을 떠나갈 제
말없이 돌아보는 푸른 산에 그리운 마음 뿐이외다
삼십여년 동안 사해에서
스승 찾아 벗을 찾아 한가한 날 없었는데
오늘 아침에사 무심경지 이르게 되어
무심결에 이 산을 쫓겨나는 몸.
不是無心繼祖燈 道慚未廁嶺南能
三更月下離巖穢 眷眷無言戀碧層
三十餘年四海間 尋師擇友未嘗閑
今朝得到無心地 却被無心趁出山
섬도인은 그 뒤에 개선사 (開先寺) 의 주지로 세상에 나와 덕산혜원 (德山慧遠) 스님의 법을 잇고, 이어 설두스님에게 이 사실을 서신으로 전했다. 설두산 앞에 사는 노파가 섬도인의 심부름꾼을 보고 기쁜 얼굴로 물었다.
ꡒ섬수좌가 세상에 나와서는 누구를 위하여 향을 피우던가?ꡓ
ꡒ덕산 혜원선사요.ꡓ
이 말에 노파는 욕지거리를 퍼부어댔다.
ꡒ설두스님이 그의 똥창자를 깨끗이 씻어주고 선을 설해 주었는데 어떻게 그처럼 배은망덕할 수 있느냐!ꡓ
5. 그대로가 눈알 뿐 / 운거 효순 (雲居曉舜) 선사
운거효순 (雲居曉舜) 노스님은 항상 천의회 (天衣義懷) 스님이 덩쿨선 〔葛藤禪〕 을 설한다고 비난해 왔었는데, 어느 날 회스님이 입적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법당 위에서 합장하고 말하였다.
ꡒ기쁘다, 덩쿨나무가 자빠졌구나!ꡓ
원통법수 (圓通法秀:1027~1090) 스님이 당시 그의 회하에서 유나를 맡고 있었는데 항상 욕과 꾸지람만을 들었던 터였다. 그래서 그는 도반에게, ꡒ내 저 늙은이에게 한바탕 따져야겠다ꡓ고 하였다.
야참법문 때 또 욕하고 꾸짖자 법수스님이 대중 앞에 나아가 큰소리로 「원각경」의 말씀도 듣지 못했습니까……ꡓ하는데 갑자기 효순스님이ꡒ오랫동안 서 있었다. 대중들이여, 안녕!ꡓ 하고는 방장실로 돌아가버렸다. 이에 법수스님이 말하였다.
ꡒ저 늙은이는 온 몸이 눈알이라 회화상을 욕할 만하다.ꡓ
6. 한번 넘어져도 저러한데 / 도솔 혜조 (兜率惠照) 선사
호남 (湖南) 의 소경 순 (小景 淳) 스님은 재주와 학문이 있어「무봉탑명 (無縫塔銘)」을 저술한 적이 있다. 대통선본 (大通善本:1035~1109, 운문종) 스님이 그의 운을 따서「무봉탑명 (無縫塔銘)」에 화답하였다.
연기 노을은 등뒤에서 피어나고
별빛과 달빛은 처마를 뚫는다.
煙霞生背面 星月遶簷楹
순스님은 악록사 (嶽麓寺) 에 살면서 계율을 지키며 정진하였는데 우연히 하룻 밤에는 법당 계단을 지나오다가 발을 헛디뎌 자빠지자 곁에 있던 스님이 겨드랑이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그 후로 혼수상태에 빠져 인사불성이 되었으며, 평소 그가 저술한 글마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도솔혜조 (兜率惠照:임제종 황룡파) 선사가 처음 행각하다가 악록사를 지나가는 길에 그곳 노스님이 순스님에 관해 해준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 말하였다.
ꡒ이생에서 참선하여 마음자리를 밝히지 못한다면 나도 순스님과 같이 될 것이다. 우연히 발 한 번 잘못 디다가도 저와같이 되었는데 더구나 죽은 뒤에는 어떻게 되겠는가!ꡓ
7. 절을 하든 말든 / 법화 지언 (法華圍言) 선사
여대신 (呂大申) 이 집정할 때 휴목일 (休沐日) 을 맞아 미리 글을 보내, 법화 언 (法華圍言) 스님에게 재를 청하였다. 그 이튿날 생각대로 법화스님이 관아에 도착하여 당상에 앉았는데 여대신이 뵈려고 앞으로 나아가 절을 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를 망설이며 생각하고 있는 차에 지언스님이 큰소리로 불렀다.
ꡒ여노인! 애쓰지 말고 빨리 나오시오. 절은 해도 좋고 안해도 좋소.ꡒ
여대신이 절을 올려 존경을 표시하였다. 재를 마치고 미래의 운세가 어떻느냐고 묻자, 지언스님은 붓을 들어 큰 글씨로 ꡐ박주 (亳州)ꡑ라는 두 글자를 써주면서 그 까닭에 대해서는 전혀 말이 없었다. 후일 재상을 그만두고 ꡐ박주ꡑ 자사 (刺史) 가 되어 해묵은 문서들을 정리하다가 그 두 글자가 앞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것이 자신에 맞는 예언임을 알게 되었다.
8. 걸림없이 제방의 사견을 비판하다 / 진정 극문 (眞淨克文) 선사
진정 (眞淨) 화상이 동산사 (洞山寺) 에서 물러나와 절강 (浙江) 지방에 돌아다니다가 제주 (除州) 낭야 기 ( 起) 화상의 처소에 이르자 대중이 소참 법문을 청하였다. 이에 진정스님은 아무 거리낌 없이 제방의 이견과 사견을 맹렬히 비난하고 법좌에서 내려오며 기스님을 보고 말하였다.
ꡒ주지가 여기 이렇게 있으니 새삼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ꡓ
ꡒ스님 말씀이 맞습니다.ꡓ
두 사람은 마주보며 크게 웃고 나갔다.
9. 참선할 마음이 있는 사람을 거두다 / 섭현 귀성 (葉縣歸省) 선사
섭현귀성 (葉縣歸省) 화상은 냉엄하고 담담하여 납자들이 어려워하였다. 부산법원 (浮山法遠:운문종) 스님과 천의의회 (天衣義懷:운문종) 스님이 대중승으로 있을 때 특별히 그를 찾아갔는데, 때마침 눈보라가 치는 차가운 날씨였다. 귀성화상은 그들을 욕하며 쫓아내고 심지어는 객승의 숙소 〔旦 過寮〕 까지 찾아와 찬물을 끼얹어 옷을 흠뻑 적셔놓았다. 이에 다른 스님들은 모두 성을 내며 떠나갔지만 법원스님과 의회스님만은 좌복을 정돈해 놓고 옷을 단정히 하고 다시 객사채에 앉아 있으려니 귀성스님이 또 찾아와 꾸짖었다.
ꡒ끝까지 떠나지 않는다면, 나는 너희를 때리겠다.ꡓ
법원스님이 앞으로 가까이 다가서며 말하였다.
ꡒ저희 두 사람은 스님의 선을 배우려고 수천 리 길을 특별히 찾아왔는데 어찌 물 한 바가지 끼얹었다고 떠나가겠습니까? 설령 때려 죽인다 해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ꡓ
귀성스님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ꡒ너희 두 사람은 참선을 시킬 터이니 물러가서 방부를 들여라.ꡓ
이어서 법원스님에게 전좌 (典座) 소임을 맡아보게 하였다.
대중들이 그 메마른 생활을 힘들어 하고 있던 차에 귀성스님이 우연히 장원 (莊園) 으로 나갔다. 법원스님은 몰래 자물통 열쇠를 훔쳐내어 기름과 국수를 가져다가 오미죽 (五味粥) 을 만들었는데 죽이 익을 무렵 귀성스님이 갑자기 승당으로 돌아왔다. 죽을 다 먹은 후 승당 밖에 앉아 전좌를 불러오라 명하자 법원스님이 와서 먼저 말하였다.
ꡒ실은 기름과 국수를 꺼내다가 죽을 끓였으니, 스님께서 벌을 내려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ꡓ
귀성스님은 그에게 훔쳐낸 물건의 값을 계산하라 하고 그의 의발 (衣鉢) 을 값을 쳐서 환수한 다음, 몽둥이 30대를 때린 후 절에서 쫓아내 버렸다. 법원스님은 저자에 숙소를 마련하고 도반을 통하여 용서를 빌었지만 귀성스님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돌아와 살기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대중을 따라 입실만이라도 허락해 주십사 하고 다시 간청하였지만 여전히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귀성스님이 거리에 나갔던 차에 법원스님이 여관 앞에 혼자 서 있는 것을 보고서, ꡒ이곳은 절의 사랑방이다. 네가 여기에서 오래 머물렀는데 자리세는 냈느냐?ꡓ 하고 그가 갚지 못한 돈을 계산하여 추징하도록 하였다. 법원스님은 조금도 난색을 보이지 않고 저자에서 탁발하여 돈으로 바꾸어 갚았다. 귀성스님이 또다시 어느 날 저자거리에 나갔다가 법원스님이 탁발하여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는 대중에게 ꡒ법원은 참으로 참선에 뜻이 있는 사람이다ꡓ 하고서 마침내 그를 불러들였다.
10. 술 고기로 부모님 제사를 모시다 / 분양 무덕 (汾陽無德) 선사
분양 무덕 (汾陽無德:善昭) 선사가 하루는 대중에게 말하였다.
ꡒ간밤 꿈에 돌아가신 부모님이 나와서 술과 고기, 그리고 종이돈 〔紙錢:망자천도 때 쓰는 가짜 종이돈〕 을 찾았다. 그러니 속가의 풍속대로 제사를 받들어야겠다.ꡓ
그리고는 창고 〔庫堂〕 에서 이 일에 쓸 물건을 마련하여 위패를 모시고 세속에서처럼 술잔과 고기를 올리고 종이돈을 불살랐다. 제사를 마친 뒤 지사 (知事:절의 사무를 책임맡는 지위) 와 두수 (頭首:선원 대중의 지휘를 맡는 지위) 를 모이게 하고 소반에 남아있는 음식을 나누어 주니 지사들은 이를 마다하였고 무덕스님 혼자서 가운데 앉아 태연하게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었다. 대중들은 술과 고기 먹는 중을 어떻게 스승으로 삼을 수 있겠느냐며 걸망을 메고 떠나고 자명 (慈明:石霜楚圓) ․대우 (大愚) ․천대도 (泉大道:芭蕉谷泉) 등 예닐곱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무덕스님은 그 이튿날 법당에 올라 설법하였다.
ꡒ수많은 잡귀신 떼를 한 상의 술 고기와 두 뭉치의 종이돈으로 모조리 쫓아 보냈다. 「법화경」에 이르기를 ꡐ이 대중 속에는 가지와 잎은 없고 오로지 진짜 열매만 남아 있다'고 하였다.ꡓ
그리고는 법좌에서 내려 오셨다.
11. 두 차례나 시험할 것 없소 / 진정 극문선사
진정스님이 행각할 때 두 스님과 동행하여 곡은산 (谷隱山) 을 찾아가니 설대두 (薛大頭) 가 물었다.
ꡒ세 사람이 동행하면 반드시 그 중에 지혜로운 사람이 하나 있다고 하는데 누가 지혜있는 자인가?ꡓ
두 스님은 말이 없고 진정스님이 어깨 아래 서 있다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악! 하고 할을 하였다. 설대두가 주먹을 세우고 때리려는 태세를 보이자 진정스님이 말하였다.
ꡒ번거롭게 두 차례나 시험할 것 없습니다!ꡓ하자, 설대두는 주장자를 끌고 달아나 버렸다. 설대두는 석문산 (石門山) 자조 (慈照:谷隱睛聰) 선사를 친견한 스님이다.
12. 하마대 (下馬臺) / 덕부 (德敷) 선사
운정산 (雲頂山) 의 부 (德敷) 선사가 성도부 (成都府) 부사의 청으로 관아에 가서 법좌에 올랐을 때, 악영장 (樂營將) 이라는 사람이 앞으로 나와 절을 하고 일어나서 관아 문밖의 하마대 (下馬臺) 를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ꡒ한 입에 서강의 물을 다 마시는 일은* 묻지 않겠습니다만 스님께서는 저 관아 문밖의 하마대를 삼켜버릴 수 있겠습니까?ꡓ
스님은 양손을 펴보이면서, 곱게 가루내어 가져오라고 외치니 이 말에 악영장은 깨친 바 있었다.
13. 문병 온 사람을 고자질하다니 / 원통 (圓通) 선사
자경 (自慶) 장주 (藏主) 는 촉 사람으로, 총림에 이름이 알려졌으며 진여 (眞如:慕喆) ․회당 (晦堂:祖心) ․보각 (普覺) 등 큰스님을 두루 찾아뵈었다. 그가 여산 (山) 을 돌아다니다가 도성에 들어와 법운사 (法雲寺) 의 원통선사 (圓通禪師:法雲法秀, 운문종) 를 만나보고자 수 (秀) 대사와 함께 법운사를 찾아갔다. 수대사는 거기서 공부하게 되었고, 자경스님은 경장주 (慶藏主) 라고 이름을 알리자 원통스님은 잠시 다른 곳에 머물도록 하라면서 자리가 비면 곧 들어오게 하겠다고 하였다. 자경스님은 지해사 (智海寺) 에 머물다가 우연히 병을 앓아 눕게 되었는데 수대사는 그를 문병하고 싶었으나 사중의 일로 여가가 없었으므로 몰래 산문을 빠져나와 지해사로 찾아가 자경을 만났다. 자경은 원통스님에게 서신을 보내 수대사가 법규를 어기고 산문을 출입하였다고 알렸다. 원통스님은 서신을 받고 이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야참법문에서 몹시 꾸짖었다.
ꡒ자경은 참으로 소인이다. 도리를 하느라 문병하러 질문을 나간 사람을 도리어 고자질하다니 이 어찌 제대로 된 사람이 할 일이겠는가?ꡓ
자경스님은 이 말을 듣고 드디어 숨을 거두었는데 총림에서는 모두 그가 원통스님의 꾸지람을 듣고 죽었다고 하였다.
14. 의리를 높이 사다 / 원통 (圓通) 선사
무주 (撫州) 명수사 (明水寺) 의 손 (法遜) 선사가 법운사 (法雲寺) 에서 시자를 하고 있을 무렵 도림 임 (道林琳) 스님이 그곳에 머물게 되었는데, 방장스님이 특별히 신참스님을 위해 차를 마련하였다. 법손스님은 몸소 요사채로 찾아가 그를 초청하였는데 때마침 도림스님은 자리에 없었고 그와 동행한 승려가 옆방에 있다가 돌아가 있으라고 하면서 그가 오면 대신 말해주겠다고 하였다. 법손스님이 간 후 그 스님은 이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는데 공양이 끝난 뒤 북을 울려 차 모임에 모이게 하였으나 도림스님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에 원통 (圓通) 스님은 신참스님이 왔느냐면서 빨리 데려오라고 하였다. 도림스님이 도착하자 원통스님은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 대중 앞에 서게 하고서 꾸짖었다.
ꡒ산문에서 특별히 차를 마련하여 총림의 예의를 표하려 하였는데 너는 무슨 까닭에 게으름 피우며 제때에 오지 않았느냐?ꡓ
ꡒ북소리를 듣던 차에 때마침 뱃속이 거북하여 곧장 달려오지 못했습니다.ꡓ
ꡒ내가 파두 (巴豆:설사제 생약) 를 가지고 북을 쳐서 네 똥이 나오게 한 것은 아니다.ꡓ
원통스님이 이렇게 꾸짖는데 법손스님이 앞으로 나서며 말하였다.
ꡒ제가 그를 청하는 일을 잊었기 때문이니 저를 절에서 쫓아내십시오.ꡓ
그러자 동행했던 스님이 대중 앞으로 나와 말하였다.
ꡒ이 일은 시자와 신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시자의 말을 받아 놓고 잊어버렸기 때문이니, 제가 두 사람을 대신하여 절을 나가겠습니다.ꡓ
원통스님은 그들의 의리를 높이 사서 모두 용서해 주었다.
15. 사리 이야기 / 진정 극문선사
여러 총림에서는 큰스님들이 입적한 후 전신을 화장하여 사리를 얻는 일이 매우 많다. 그 중에서도 진정 (眞淨) 선사의 사리는 크기가 콩알 만하고 오색이 영롱하면서도 견고하였다. 곡산 조 (谷山祖) 선사는 진정스님의 수제자였는데 스님의 사리를 많이 거두어다가 유리병에 담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공양하였다. 묘희 (妙喜) 스님이 곡산을 지나는 길에 한번 시험하고자 쇠다듬이 위에 사리를 올려 놓고 망치를 들어 내리쳤으나 다듬이와 망치는 모두 움푹 패여 들어갔지만 사리는 부서지지 않았다. 이는 평소 실천이 명백하였고 깨달은 경지가 초연한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16. 견처만 분명하다면 / 흥양 현 (賢) 선사
쑥대머리 현 (賢蓬頭:興陽 賢스님의 별명) 스님은 강주 (江州) 사람으로 위산사(潙山寺) 진여 (眞如:大慕喆) 스님의 문하에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견처가 분명하고 기봉 (機鋒) 이 날카로워 스승을 능가하는 일이 있기도 하였으나 행실이 근엄하지 못하여 대중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였다. 진여스님은 방장실 뒷편에 암자를 마련하여 현스님 혼자 거처하도록 하고 방장실 앞으로 좁은 길을 내서 형제들의 왕래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후 2년 만에 그를 대중의 수좌로 추천하고 입승으로서 불자 (拂子) 를 잡게 하니 남보다 설법을 훨씬 잘하여 모든 대중이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후 영주 (州) 흥양사 (興陽寺) 의 주지로 여러 해를 살면서 불법을 크게 펼쳤으며 입적한 뒤 육신이 허물어지지 않았다.
원오 (圓悟克勤) 스님이 위산사에 있을 때 그 일을 직접 보았으며, 묘희스님이 흥양 (興陽) 에 갔을 때까지도 그의 육신사리를 보았다고 한다.
17. 대중에 살 때처럼 주지하다 / 담당 문준선사
담당 문준 (湛堂文準) 스님은 흥원부 (興元府) 사람이며 진정스님의 맏상좌이다. 분령(分寧) 운암사 (雲巖寺) 에 주지자리가 비어 군수가 황룡 사심 (黃龍死心:悟新, 1043~1114) 선사에게 아는 사람을 천거해 주면 그 자리에 모시겠다고 하자 사심스님이 말하였다.
ꡒ준산주 (準山主) 가 주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를 모르지만 그의「세발송 (洗鉢頌)」 만 보아도 매우 훌륭합니다.ꡓ
군수가 그 게송을 들려달라고 하자 사심스님은 게송을 소개하였다.
다 쓸데없는 일
납승의 콧구멍 큰 물건은 아래로 처져 있도다
만일 모르겠거든
동쪽마을 왕씨 아줌마에게 물어보렴.
之乎者也 衲僧鼻孔 大頭向下
若也不會 問取東村王大姐
군수가 남달리 생각하고 예를 갖추어 간곡히 맞이하자 문준스님 또한 사양하지 않았다.
그는 일생동안 검약으로 자신을 다스려왔으며 비록 대중을 거느리고 법을 펴는 주지였지만 대중승으로 있을 때와 다를 바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면 뒷편 시렁에서 뜨거운 물을 한 국자 떠서 얼굴을 씻고 다시 그 물로 발을 씻었으며, 그 밖의 생활도 대략 이와 같았다. 법회가 끝나면 방장이나 행자나 길 가는 사람처럼 평등하게 지냈고, 땅을 쓸고 차 끓이는 일까지도 몸소 하여 옛사람의 풍채가 있었다. 참으로 후손들에게 좋은 모범이었다.
18. 나한상을 불 때서 얻은 사리들 / 불조 고 (佛祖曠) 선사
법운사 (法雲寺) 불조 고 (佛照曠) 선사가 지난 날 경덕사 (景德寺) 철나한원 (鐵羅漢院) 에 물러나 있었는데 법당에는 나무로 깎은 나한 (羅漢) 이 몇 분 봉안되어 있었다. 겨울의 날씨가 몹시 추웠으므로 고스님은 그것을 태워 화롯불을 감싸안고 새벽까지 지냈는데 이튿날 재를 버리다가 수없이 많은 사리를 얻었다.
여러 좌주 (座主) 들은 모두 그를 외도라고 하였다.
그러나 불조스님은 단하 (丹霞天然:729~824) 스님과 같아서 속인의 눈으로는 시험할 수 없다는 분이다.
19. 선사어록에 주해를 붙이다가 / 진료옹 (陳了翁)
연평 (延平) 진료옹 (陳了翁) 의 이름은 관 (瓘) , 자는 영중 (瑩中) 이며 자호는 화엄거사 (華嚴居君) 이다. 조정에서는 꼿꼿하고 강직하여 옛사람의 매서운 기품이 있었다. 그리고 불경에 뜻이 있어 논리는 좌중을 압도하였지만 참선만은 크게 깨치지 못한 채 선종의 기연을 뜻으로 해석하였다. 남 (黃龍慧南) 선사의 어록을 무척 좋아하여 거의 다 주해를 붙혔지만, ꡐ금강 (金剛) 과 토우 (土偶) 가 등을 맞대고 비비면…'이라는 구절만은 손을 대지 못했다. 한 번은 누군가에게, 이 말은 반드시 출처가 있을 것인데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 적이 있다.
속담에 ꡐ매우 지혜로운 사람도 눈 앞의 석 자 (尺) 에는 어두울 때가 있다'함이 과연 거짓말이 아니다.
20. 「석문록」에 빠진 일화 / 자조 온총 (慈照睛聰) 선사
자조 온총 (慈照睛聰) 선사는 수산 (首山省念:926~993) 스님의 법제자이다. 함평 (咸平:998~1003) 연간에 양주 (襄州) 석문사 (石門寺) 에 주지를 지냈는데 어느 날 그 고을 태수가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매질을 하고 모욕을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대중들이 길 왼편에 서서 맞이하였고 수좌가 앞으로 달려나와 태수가 아무 죄 없는 스님께 이처럼 모욕을 하였다고 위로하였다. 자조스님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며 ꡒ평지에서 뼈무더기가 일어날 것이다ꡓ라고 하였는데, 손가락 끝을 따라 한 무더기의 흙이 솟아 올랐다. 태수가 이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곳을 깎아버리자 또다시 처음처럼 솟아올랐는데 그 후 태수의 온 가족이 양주 (襄州) 에서 몰사하였다.
한 스님이 총스님에게 물었다.
ꡒ깊은 산 가파른 절벽 위에도 불법이 있습니까?ꡓ
ꡒ있지!ꡓ
ꡒ무엇이 깊은 산 가파른 절벽에 있는 불법입니까?ꡓ
ꡒ기괴한 바윗돌은 범의 모습이요, 불붙은 소나무는 그 기세 용과 같다.
무진거사 (無盡居君:張商英) 는 스님의 이 이야기를 좋아했으면서도 `「석문록 (石門錄:온총스님의 어록)」에 이 두 가지 일만은 기재하지 않았다. 이는 모두 묘희스님이 무진거사에게 직접 들은 말이다.
21. 치성광 주문의 감응 / 이상로 (李商老)
여산 (山) 의 이상로 (李商老) 는 집을 수리하다가 토지신의 노여움을 사서 온 집안이 종기를 앓게 되자 의원을 찾아 치료하였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다. 마침내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가족이 모두 마음을 가다듬고 향을 사르며 「치성광 (熾盛光) 」주문을 외우면서 토지신의 노여움을 빌었다. 7일이 못되어 하얀 옷을 입은 노인이 소를 타고 그 집에 있다가 갑자기 땅이 꺼져내리면서 빙빙돌며 땅속으로 말려 들어가는 꿈을 꾸었는데, 그 이튿날 어른이나 아이나 모두 나았다. 정성어린 마음의 감응이란 그림자와 산울림처럼 빠른 것이니, 부처님의 법력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 있겠는가.
22. 청풍 명월을 가지고 다닌다더니 / 수옹 화엄 (修華嚴) 스님
수옹 화엄 (華嚴:投子修, 운문종) 스님은 원조 본 (圓照宗本:1020~1099) 선사의 법제자인데 길을 걷다가 엎어지면서 깨친 바 있어 게를 지었다.
이 한 번의 곤두박질, 이 한 번의 곤두박질!
만냥 황금을 쓴다해도 괜찮지
머리 위에는 삿갓, 허리춤에는 보따리
청풍 명월이 지팡이 끝에 걸렸네.
這一交這一交 萬兩黃金也合消
頭上笠腰下包 淸風明月杖頭酪
부정공 (富鄭公:弼) 은 항상 수옹 (修顒) 스님에게 도를 물어 왔는데 하루는 수옹스님이 법상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보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깨쳐 송을 지어 원조스님에게 보냈다.
수옹스님을 한 번 보고 깊이 깨달아
이 인연으로 노스님의 심법을 전해받았으니
천리강산이 가로막혀 있다해도
신령스런 그 모습 오묘한 그 음성이 눈앞에 선하외다.
一見顒師悟入深 因緣傳得老師心
江山千里寥云隔 目對靈光與妙踵
부정공은 승상을 그만두고 낙중 (洛中) 에 살면서 수옹스님의 가르침을 생각하여 초제사 (招提寺) 의 주지로 초청하였다. 수옹스님이 경내에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몸소 나아가 맞아들이려고 수레에 오르는데 마침 사마온공 (司馬溫公:司馬光) 이 찾아와 물었다.
ꡒ상공은 어디를 가는 길입니까?ꡓ
ꡒ초제사 수옹스님을 마중가는 길이오.ꡓ
ꡒ나와 같이 갑시다.ꡓ
이에 수레를 나란히 타고 교외로 나아가 우정 (郵亭:간이 역) 에서 한참동안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수십 명의 짐꾼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사마온공이 그들에게 물었다.
ꡒ누구의 짐이냐?ꡓ
ꡒ초제사에 새로 부임하는 스님의 짐입니다.ꡓ
이 말에 사마온공은 말을 타고 돌아가려 하자 정공이 그에게 물었다.
ꡒ화엄스님을 만난다고 하더니 무슨 까닭에 먼저 돌아가시오?ꡓ
ꡒ나는 이미 그 사람을 만나 보았소!ꡓ
그는 끝내 먼저 돌아가고 말았다. 묘희스님이 지난 날 소경 (少卿) 이의중 (李儀中) 을 만난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하였다.
23. 환속당했다가 복권되다 / 효순 노부 (曉舜老夫) 선사
효순 노부 (曉舜老夫:운문종) 스님이 여산 서현사 (棲賢寺) 의 주지로 있을 때 괴도관 (槐都官) 이 남강 (南康) 태수가 되어 사사로운 감정으로 그의 승복을 벗겼다. 정인사 (淨因寺) 대각 연 (大覺懷璉) 선사는 일찍이 효순스님의 회하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효순스님이 환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정인사로 모셔서 주지방에 기거하도록 양보하고 자기는 구석 방에 거처하였다.
당시 인종 (仁宗) 은 자주 회련스님을 궁중으로 불러 도를 물었지만 회련스님은 끝까지 효순스님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루는 가왕 (圈王) 이 황제의 명을 받아 정인사에 가서 승려들에게 음식공양을 했는데 대각스님이 효순스님의 곁에서 몹시 공손하게 시봉하는 모습을 보고서 대궐에 돌아가 아뢰었다. 인종 (仁宗) 은 효순스님을 편전 (便殿) 으로 불러 만나보고는, ꡒ위대한 도풍을 간직한 산림의 진짜 달사 (達君) 로다ꡓ 하며 감탄하였다. 그리고는 부채 위에 ꡒ효순에게 내리노니 옛처럼 승려가 되게 하고 특별히 다시 서현사의 주지로 명하노라ꡓ라고 써주었으며, 자의가사와 은발우를 하사하였다.
효순스님이 서현사의 주지에서 파면되었을 때, 두 장정이 가마를 메고 가다가 나한사 (羅漢寺) 앞에 이르러, 이미 우리 선원의 노스님이 아니니 멀리 갈 것 없다고 의논하고는 가마를 버리고 돌아가버렸는데, 효순스님이 서현사로 다시 오게 되자 먼저 사람을 보내 두 장정을 위로하며 말했다. ꡒ당시 너희들의 행동이 옳은 것이었으니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ꡓ
효순스님은 절에 이르자 법당에 올라 송을 하였다.
까닭없이 참소입어 쫓겨났던 몸
반년남짓 세월을 속인이었네
오늘 또다시 삼협사에 돌아오니
기뻐할 이 그 얼마며 노여워할 이 그 몇일까.
無端被枉遭迍 半年有餘作俗人
今日再歸三峽 寺幾多喜幾多嗔
효순 노부스님은 어느 날 거량하였다.
ꡒ염관 (鹽官齊安:?~842, 마조스님의 법제자) 스님이 시자를 불러 물소뿔 부채를 가져오라 하니, 그 부채는 이미 부서졌다고 하였다. 염관스님이 ꡐ부채가 부서졌으면 내 물소를 돌려다오' 하자 시자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ꡓ
그리고는 이에 대해 말하였다.
ꡒ삼복 더위라 부채가 필요할 때인데 시자가 되어 자기 할 일을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염관도 너무나 다그친 것이다. 어찌하여 그대로 내버려두지 못하였는가? 시자도 그 당시 염관이 ꡐ부채가 부서졌으면 내 물소나 돌려다오' 하였을 때, 곧 그에게 ꡐ이미 바람에 날려 쓰레기더미로 들어가 버렸습니다!'라고 했어야 한다.ꡓ
취암 (翠巖) 진점 흉 (眞點胸, 可眞, ?~1064) 스님은 일찍이 효순 노부스님에게 무사선 (無事禪) 을 설한다고 욕을 하였는데 석상 법영 (石霜法永) 스님이 가진스님에게 사람을 보내 말을 전하였다.
ꡒ효순이 동산 (洞山曉聰) 스님의 회하에 있을 때 고경인연 (古鏡因緣) 을 그렇게나 깨달았는데 설마 무사선을 설하였겠는가? 그를 욕한다면 그대 스스로 한쪽 눈 〔一隻眼〕 을 잃게 될 것이다.ꡓ
효순스님은 그 말을 듣고 송을 지었다.
나는 선이 뭔지 몰라
그저 발씻고 침상에 올라 잠잘 뿐
겨울 오이는 그저 둥글고
표주박은 구불구불하네.
법영스님도 송으로 답하였다.
나도 선이 뭔지 몰라
그저 발씻고 침상에 올라 잠잘 뿐
목침이 떨어지는 바람에
사원의 벽돌이 박살났구려.
石霜不會禪 洗脚上牀眠
巖子撲落地 打破常住甎
효순스님은 어느 날 상당하여 말했다.
ꡒ황혼이 진 뒤에는 버선을 벗고 잠을 자다가 새벽녘에 일어나 다시 행전을 묶는다. 밤사이 바람 불어 울타리 넘어지니 노비를 모두 불러들여 대나무를 쪼개어 울타리를 일으켜 세우는구나!ꡓ
그리고는 법좌에서 내려왔다.
雲居不會禪 洗脚上牀眠
冬瓜直儱侗 瓢子曲彎彎
24. 평실선 (平實禪) / 법촉 선사
오조 (五祖法演:?~1104) 스님의 회하에 법촉 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그가 인사하러 왔을 때 오조스님이 물었다.
ꡒ만법과 짝하지 않을 자는 어떤 사람인가?ꡓ
ꡒ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ꡓ
이 말에 오조스님은 손으로 법촉을 가리키며 ꡒ그만 그만! 그대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무엇인가?ꡓ 하였는데 법촉은 이 말 끝에 느낀 바 있었다.
그 후 동림사 (東林寺) 선비 도 (宣秘度) 스님의 회하에 가서 평실선 (平實禪) 의 이치를 완전히 터득하였다. 법촉스님은 어느 날 꽃 한 가지를 들고 선상을 한 바퀴 돌고난 다음, 손을 모아 향로 위에 꽂은 후 말하였다.
ꡒ스님께서 말씀해 보시오. 이 뜻이 무엇인가를.ꡓ
선비스님이 여러 차례 말하였지만 법촉은 대답하지 않았다. 두어 달이 지난 뒤에 드디어 법촉에게 물었다.
ꡒ그대가 말해ꡓ
ꡒ저는 다만 꽃을 향로에 꽂았을 뿐인데 스님께서 스스로 의심하였습니다. 무슨 다른 일이라도 있습니까?ꡓ
25. 오조스님의 세 제자들
불안 (佛眼淸遠, 1067~1120) 선사가 오조 스님 회하에 있을 때였다. 원오 (원悟克勤:1063~1135) 스님이 ꡐ제일구에서 알아차리면 부처와 조사의 스승이 될 수 있고 제이구에서 알아차리면 인천 (人天) 의 스승이 될 수 있으며 제삼구에서 알아차리면 자신도 구제하지 못한다' 하신 임제대사의 말씀을 들어 설법한 적이 있었다. 하루는 불안스님이 원오스님에게 느닷없이, ꡒ내가 너에게 삼구를 보여 주겠다ꡓ 하고는 손가락을 꼽으면서 ꡒ이것은 제이구, 이것은 제삼구ꡓ 하고는 곧장 달아나 버렸다.
원오스님이 이 일을 오조스님에게 말하니 오조스님은 ꡒ그거 좋구나!ꡓ 하였다.
불안스님은 마침내 오조스님을 하직하고 귀종사 (歸宗寺) 진정 (眞淨克文:1025~1102) 스님을 뵈러 떠나갔는데 그후 오조스님이 원오스님에게 말하였다. ꡒ귀종은 파도가 거세고 큰 깃발을 휘둘러대는 수단을 쓴다. 청원이 그곳에 가더라도 반드시 그와 맞지 않을 것이다.ꡓ 그런데 며칠이 안되어 불안스님은 원오스님에게 서간을 보내왔다.
ꡒ여기 귀종사에 와보니 우연찮게 그물에 구멍이 났다. 운거 청 (雲居:靈源惟淸, ?~1117) 수좌의 「회당화상 찬 (晦堂眞贊)」에, ꡐ소문엔 부귀를 누린다 하더니만 막상 보니 가난뱅이로군!ꡑ 하는 구절을 듣고 의심하였는데, 막상 그를 만나보니 그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ꡓ
그 해를 넘기고 그는 다시 오조산 (五祖山) 에 돌아왔는데 대중들이 설법을 청하니 불자를 잡고 심성 (心性) 에 관한 선을 설법하였다. 오조스님은 청원이 이처럼 선을 설법하니 이제는 아무도 그를 어쩌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원오스님은 일찍이 기주 (州) 북쪽 오아사 (烏牙寺) 의 방 (方) 스님에게 공부하였고, 불감 (佛鑑) 스님은 동림사의 선비 도스님에게 공부하였다. 두 사람 모두가 조각 (照覺) 스님의 평실선을 터득한 후 함께 오조의 문하에 왔는데 평소 얻은 바를 한 구절도 써보지 못하고 오랫동안 깨친 바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ꡐ오조가 일부러 그르쳐 놓았다ꡑ 생각하고 불손한 말을 하고 화를 내면서 떠나려 하니, 오조스님이 말했다.
ꡒ너희들은 이곳을 떠나 절강성을 돌아다니다가 한 차례 열병을 겪을 것이니 그때 비로소 나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ꡓ
원오스님은 금산사 (金山寺) 에 도착하자 갑자기 열병에 걸렸는데 무척 심하여 중병려 (重病閭:요양소) 에 옮겨졌다. 그래서 평소에 터득한 선으로 병을 이겨보려고 하였지만 한 구절도 힘이 되지 못하자 오조스님의 말씀을 되새겨보고 병이 조금이라도 나으면 곧장 오조산으로 돌아가겠다고 스스로 맹서하였다. 한편 불감스님도 정혜사 (定慧寺) 에 있다가 역시 열병을 앓아 위급하게 되었다. 원오스님은 다시 깨어나자 정혜사를 경유하여 불감스님을 끌고서 회서 (淮西) 까지 함께 돌아왔다. 그러나 불감스님은 그때까지도 고집을 버리지 않고 원오스님에게 먼저 돌아가라 하니, 어쩔 수 없이 원오스님만이 그 길로 오조산에 돌아왔다. 법연 (오조) 스님은 기뻐하면서 ꡒ네가 다시 돌아왔느냐ꡓ 하고는 곧 선당에 들어가게 하고 시자를 시켰다.
그 후 반달이 지났을 무렵 우연히 진제형 (陳提刑:覺民) 이 벼슬을 그만두고 촉으로 돌아가는 길에 산중을 지나다가 오조스님에게 도를 물었는데 이야기 끝에 오조스님이 말하였다.
ꡒ제형은 어린시절에 「`소염시 (小艶詩)」를 읽어본 적이 있소? 그 시 가운데 두 구절은 제법 우리 불법과 가까운 데가 있습니다.ꡓ
소옥아! 소옥아! 자주 부르지만 볼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랑이 내 목소리를 알아줬으면 함이다.
頻呼小玉元無事 祗要檀郞認得聲
제형은 연신 네, 네, 하였고 오조스님은 자세히 생각해 보라고 하였다.
때마침 원오스님이 밖에서 돌아와 곁에 모시고 섰다가 물었다.
ꡒ듣자하니 스님께서 「소염시」를 인용하여 말씀하는데 제형이 그 말을 알아들었습니까?ꡒ
ꡒ그는 소리만을 들었을 뿐이지.ꡓ
ꡒ단랑이 나의 목소리를 알아줬으면 하였는데 그가 그 소리를 들었다면 어찌하여 깨닫지 못했습니까?ꡓ
ꡒ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가? 뜰 앞의의 잣나무니라. 앗!ꡓ
원오스님은 이 말에 갑자기 느낀 바 있어 방문을 나서니 닭이 홰에 날아올라 나래를 치며 우는 모습이 보였다. 이에 다시 ꡐ이것이야말로 그 소리가 아니겠느냐' 하고 드디어 소매 속에 향을 넣고 방장실에 들어가 자기가 깨달은 바를 말하니 오조스님에게 말하였다.
ꡒ부처나 조사들의 큰 일이란 하열한 근기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너의 기쁨을 도왔구나!ꡓ
그리고는 다시 산중 노스님들에게 ꡒ나의 시자가 선 (禪) 을 알았다ꡓ고 널리 알렸다.
한편 불감스님은 절강에서 오조산으로 돌아온 뒤에도 머뭇거리며 선뜻 선원에 들어오려 하지 않자 원오스님이 말하였다.
ꡒ나와 네가 서로 헤어진 지 겨우 한달 남짓인데 지금 서로 만나 예전과 비교하니 어떻느냐?ꡓ
ꡒ나는 그저 네가 의심스럽다.ꡓ
불감스님은 마침내 선당에 들어왔다.
어느 날 원오스님과 함께 오조스님을 모시고 산에 놀러갔다가 오조스님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동사 (東寺:如會禪師, 744~823) 스님이 앙산 (仰山:慧寂, 802~887) 스님에게 물었다.
ꡒ너는 어디 사람이냐?ꡓ
ꡒ광남 (廣南) 사람입니다.ꡓ
ꡒ내 듣기에는 광남에 풍랑을 멈추게 하는 구슬 〔鎭海明珠〕 이 있다 하는데 그 구슬을 얻었는가?ꡓ
ꡒ얻었습니다.ꡓ
ꡒ구슬은 무슨 색이던가?ꡓ
ꡒ보름 달밤엔 나타나지만 그믐엔 보이지 않습니다.ꡓ
ꡒ내게 보여주지 않겠는가?ꡓ
앙산이 차수 (叉手) 하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말했다.
ꡒ저는 어제 위산에 도착하여 이 구슬을 찾아보라는 말을 듣고는 대답할 말이 없고 펼쳐 보일 이치도 없었습니다.ꡓ
오조스님은 불감스님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ꡒ이미 구슬을 얻었다 해놓고 그 구슬을 찾자 그 때는 대답할 말도 없고 펼쳐 보일 이치도 없다고 한 것은 어찌된 일인가?ꡓ
불감스님은 아무 말이 없다가 그후 어느 날 갑자기 원오스님에게 말하였다.
ꡒ앙산이 동사를 만난 인연에 대하여 나도 할 말이 있다. 동사는 당시 한 알의 구슬만을 찾았는데 앙산은 당장 한 더미의 구슬을 쏟아 놓았다.ꡓ
원오스님은 이 말을 깊이 수긍하였다.
26. 청개구리 참선 / 진정 극문선사
유의옹 (劉宜翁:劉宜)*은 일찍이 불인 원 (佛印了元:운문종) 선사에게 공부했다는 자부심으로 진정스님을 얕보아왔었는데, 하루는 운거사 (雲居寺) 를 거쳐 귀종사 (歸宗寺) 에 갔다가 법당에서 진정스님을 만나자 그에게 물었다.
ꡒ장로께서는 경전을 익혀온 지 몇 해나 되었소?ꡓ
ꡒ설법 잘하는 고관이 오기만을 기다렸소.ꡓ
ꡒ나는 이 모임에는 들어가지 않겠소.ꡓ
ꡒ지금 이 모임 속에 있는 것을 어찌하려오?ꡓ
유의옹이 무어라 하려는데 진정스님은 손뼉을 치며 말하였다.
ꡒ청개구리 선 〔蝦禪〕 이 뛰어봤자 한 번이지!ꡓ
또 한 번은 앉아 이야기하던 차에 유의옹이 진정스님의 승복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ꡒ이것을 무엇이라 부르오?ꡓ
ꡒ참선복이라 하오!ꡓ
ꡒ참선이 무엇이오?ꡓ
진정스님은 먼지를 툭툭 털면서 ꡒ털어지지 않는군!ꡓ 하였다.
노인이 대꾸를 못하자 진정스님은 한 차례 내려치고서 말하였다.
ꡒ고작 이런 솜씨로 나를 시험하려 들다니….ꡓ
27. 30년을 화주하다 / 혜연 (惠淵) 수좌
홍주 (洪州) 봉신현 (奉新縣) 의 혜안사 (慧安寺) 는 산문이 길 옆에 있어서 황룡사 (黃龍寺) ․늑담사 (潭寺) ․동산사 (洞山寺) ․황벽사 (黃岫寺) 등지로 오가는 납자들이 모두 거쳐 가는 곳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주지 자리가 비어 있어 홍주 태수가 보봉사 (寶峰寺) 의 진정 (眞淨) 스님에게 서신을 보내 적임자를 추천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보봉사의 두수 (頭首) 나 지사 (知事) , 혹은 나이 많은 스님들은 모두 그곳으로 가기를 싫어하였다.
당시 연 (惠淵) 수좌라는 이가 있었는데 향북인 (向北人) 으로 강직하고 자립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회당스님, 진정스님 등에게 공부하여 실로 깨친 바 있었지만 나타내지 않고 대중에 묻혀 지내니 아무도 그를 알지 못하였다. 그가 두수나 지사 등이 서로 미루고 가지 않으려 한다는 말을 듣고 진정스님에게 아뢰었다.
ꡒ저도 갈 수 있습니까?ꡓ
ꡒ갈 수 있지.ꡓ
드디어 답장을 보내 혜연수좌를 천거하니 혜연수좌는 공문을 받자 곧장 떠나갔다. 당시 제일수좌 〔座元〕 로 있던 담당 (湛堂) 스님이 혜연수좌에게 물었다.
ꡒ그대는 그곳에 가서 어떻게 주지를 하려는가?ꡓ
ꡒ저는 복이 없는 사람이니 모든 사람과 인연을 맺고 스스로 걸망을 등에 메고 거리에 나가 목탁을 두들겨서 대중에게 공양할 것입니다.ꡓ
ꡒ이 일은 모름지기 노형만이 할 수 있는 일이오.ꡓ
그리고는 게송을 지어 전송하였다.
스님이여! 신오 땅에 들어가거든
중생을 잘 이끌어
잠시 나귀다리는 숨겨놓고
먼저 부처님의 손을 펴시오
시비를 지적하고 미추를 분별하여
죽이고 살리는 칼자루를 잡고서
사자후를 하며
중생의 근기에 응하여
육신의 입을 여시오
동서남북으로 흩어지려는 자들을
구슬이 맴돌고 옥이 구르는 것처럼 가르치시고
자기를 모르는 모든 이에게
단박에 무명의 늪에서 헤쳐 나오게 하소서
하 하 하
3에다 3을 곱하여
3 3은 9가 되듯
조사 조사가 이 법을 전해왔고
부처 부처가 손수 주셨다오.
師入新吳 誘携群有
且收瘻脚 先展佛手
指點是非 分張好挑
秉殺活劍 作師子吼
應群生機 解布袋口
擬向東西南北 直敎珠回玉走
咸令昧己之流 頓出無明窠臼
呵呵呵
見三下三 三三如九
祖祖相傳 佛佛授手
연수좌는 혜안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날마다 화주를 계속해 왔고 잠시 쉬어가는 스님네를 만나면 절 안으로 맞이하여 쉬도록 하고 자신이 돌아가 공양을 마련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였다. 이처럼 30년간을 비바람이 몰아쳐도 변함없이 계속 한 결과 불전 (佛殿) 과 장서각 (藏書閣) , 나한당 (羅漢堂) 세 채를 새로 세웠고 사원에 있어야 할 것들을 모두 갖추어 놓았다. 황룡 사심 (黃龍死心) 선사가 그곳을 방문하자 혜연수좌가 말하였다.
ꡒ신 (新:사심) 장로! 당신은 항상 알음알이를 없애라 〔沒意智〕 는 하나만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싹 쓸어버리기를 좋아하니, 오늘밤 여기에 머물면서 그대와 더불어 큰 법문을 자세히 따져보기를 기대하오.ꡓ
사심스님은 그를 꺼리며 시자에게 말하였다.
ꡒ저 사람은 진정 깨달은 바 있는 자라서 그와 더불어 어금니를 드러내고 우열을 가릴 수는 없으니 차라리 여기를 떠나 쉬는 것만 못하겠다.ꡓ
그래서 그곳에서 묵지 않고 떠나가 버렸다.
연수좌는 혜안사에서 세상을 마쳤다. 다비를 하니 육근 (六根) 가운데 세 가지는 허물어지지 않았고 사리가 무수히 나왔으며 신기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여 여러 달을 끊이지 않았다. 봉신현은 병화 (兵火) 로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부서져 버렸지만 혜안사의 여러 전각만은 우뚝하게 남아 있었다. 이 어찌 원력의 성취로 신중들의 가피가 있었던 결과가 아니겠는가? 오늘날 제방에서 팔장을 끼고 눈 앞의 것들을 누리려고만 하는 자들이 연수좌의 풍모를 듣는다면 부끄러운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28. 둔하던 기봉이 날래지다 / 법운 고 (法雲曠) 선사
법운 고 (法雲 曠) 스님은 여러 스님 문하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원통 기 (圓通圓璣:1036~1118) 도인의 회하에 이르렀다. 방장실에 들어가니 원통도인이 화두를 거량하였다.
ꡒ조주스님이 투자 (投子大同:819~914) 스님에게, 크게 죽은 사람이 문득 살아날 때는 어떠냐고 묻자, 밤길을 걷게 할 수는 없으니 동이 트거든 찾아오라고 대답하였다.ꡓ
원통도인이 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고스님은, 은혜가 커서 갚기 어렵다고 답하였고, 원통 도인은 그를 매우 칭찬하였다. 그 후 며칠이 지나 그를 입승 (立僧) 으로 천거하여 불자를 잡고 설법하게 하였는데 고스님은 기봉 (機鋒) 이 둔하여 온 법당이 웃음바다가 되자 부끄러운 빛이 역력하였다. 그 이튿날 특별히 대중을 위하여 다회 (茶會) 를 열었는데 상 위에 다구 (茶具) 를 벌여 놓고서도 부끄러움 때문에 처신할 바를 몰랐다. 그러다가 우연히 다구를 건드려 엎어 버리니 표주박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툭 툭 툭 몇번을 뛰자 화두에 답하는 방법을 깨닫게 되었다. 그후엔 기봉이 빠르고 날카로워 감히 당할 수 없었다.
그 후 다시 진정스님의 회하에 가서 조사의 게송을 보게 되었다.
마음은 허공계와 같아서
허공과 같은 법을 보여주니
허공을 깨쳤을 때
옳은 법도 그른 법도 없다네.
心同虛空界 示等虛空法
證得虛空時 無是無非法
이 게송을 보고서 활짝 크게 깨쳤다. 뒷날 세상에 나아가 주지가 되었을 때 법당에 올라 소참법문을 할 적이면 으레, ꡒ나는 소성 (紹聖) 3년 (1096) 11월 21일 마음 선 〔方寸禪〕 을 깨달았다ꡓ고 하였다.
또 이런 말을 하였다.
ꡒ나는 희령 (7寧) 3년 (1070) 에 승적을 봉상부 (鳳翔府) 에 올렸는데 그 당시 화산 (華山) 18주 (州) 를 모조리 함락시켰다. 너희 가지 〔茄〕 와 표주박과 같은 놈들이 어떻게 이 일을 알 수 있겠는가?ꡓ
칙명으로 법운사 (法雲寺) 의 주지가 되었을 때 개당하는 날, 황제가 하사한 향을 가지고 찾아온 사신이 어록을 바치도록 요구하였다. 당시 홍 각범 (慧洪覺範) 스님이 그 회하에 있었는데 시자더러 그를 청하여 어록을 엮도록 하면서 ꡒ이 노화상의 참모습을 보라ꡓ고 하였다. 각범스님이 어록을 편집하여 바치자 다 읽은 후 각범스님에게 말하였다.
ꡒ만일 생사를 해결하는 선을 구하는 일이라면 내게 돌릴 것이려니와 이와 같이 꽃을 꺾어 비단 족자를 만들고 사륙체 (四六體) 의 문장으로 아름다운 말을 펴는 일이라면 반드시 우리 홍형이라야 할 수 있는 일이다.ꡓ
법운스님은 평소 기개가 여러 선림을 압도하여 세속의 무리를 마치 어린아이 쓰다듬듯 하였으니 그가 깨친 경지가 남보다 훨씬 앞선 데가 있기에 감히 그럴 수 있었으리라.*
29. 담당선사의 탑명 / 무진 (無盡) 거사 | 종문무고 2006.02.24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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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담당선사의 탑명 / 무진 (無盡) 거사
스님 (대혜) 은 담당 (湛堂) 스님이 입적하자 각범 (覺範) 스님에게 행장을 부탁하고, 용안 조 (龍安慧照:1049~1119) 선사의 소개 편지를 가지고 특별히 형남 (荊南) 의 무진거사 (無盡居君) 를 찾아가 탑명 (塔銘) 을 청하였다. 처음 무진거사를 만났을 때 그는 선 채로 스님에게 물었다.
ꡒ스님은 그처럼 짚신만 신고 이 먼길을 왔습니까?ꡓ
ꡒ저는 수천리 길을 걸식 행각하면서 상공을 찾아왔습니다.ꡓ
ꡒ나이가 몇이오?ꡓ
ꡒ스물 넷입니다.ꡓ
ꡒ수행승 〔水牛〕 이 된 지 몇해나 되었소?ꡓ
ꡒ2년 되었습니다.ꡓ
ꡒ어디서 이런 겉치레를 배워 왔소?ꡓ
ꡒ오늘에야 상공을 만나 뵈옵니다.ꡓ
무진거사는 웃으면서 우선 앉아서 차나 마시자고 하였다.
앉자마자 무슨 일로 먼길을 찾아왔느냐고 물으니 스님은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ꡒ늑담 (潭:담당) 스님께서 입적하여 다비를 하였는데 눈동자와 치아 몇개는 부숴지지 않았고, 무수한 사리가 나왔습니다. 이에 산중의 노스님들이 모두 상공의 문장으로 탑명을 마련하여 후학들을 격려하고자 하기에 부득이 먼길을 찾아와 청을 드리게 되었습니다.ꡓ
무진거사가 말하였다.
ꡒ나는 죄인으로 이곳에 머문 뒤론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위해 글을 짓지 않았소. 이제 한가지 물어 볼테니, 대답을 한다면 탑명을 지을 것이나 그렇지 못한다면 돈 5관 (五貫) 을 줄터이니 발길을 돌려 다시 도솔사로 가서 참선이나 하시오.ꡓ
ꡒ그러시다면 상공께서 물으십시오.ꡓ
ꡒ내 듣자하니 문준 노스님의 눈동자가 부숴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정말이오?ꡓ
ꡒ정말입니다.ꡓ
ꡒ내가 묻는 것은 그 눈동자가아니오.ꡓ
ꡒ상공은 어떤 눈동자를 물으셨습니까?ꡓ
ꡒ금강의 눈동자를 물었소.ꡓ
ꡒ금강의 눈동자야 상공의 붓끝에 있습니다.ꡓ
ꡒ이렇게 되면 이 늙은이가 그를 위해 광명을 찍어 내어 그것으로 천지를 비추라는 얘기로군!ꡓ
스님은 뜨락으로 내려서며 말하였다. ꡒ스승께서는 복이 많으신 분입니다. 상공의 탑명에 감사를 드립니다.ꡓ
무진거사는 이를 허락하면서 웃었다.
탑명은 대략 다음과 같다.
사리라는 것은 공자․노자의 책에서는 듣지 못한 물건이다. 세존께서 열반하시자 제자들이 사리를 거두어 탑을 세우고 공양하였다. 조주 종심 (趙州從:778~897) 선사는 만여개나 되는 사리가 나왔고, 근세에도 융경사 (隆慶寺) 의 한 (閑) 선사, 백장사의 숙 (元肅) 선사는 다비한 연기가 미치는 곳까지 모두 사리를 이루었다.
출가자의 본분은 생사대사인데 만일 생사가 닥쳐왔을 때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임종 때 하나하나 분명히 유언을 남기는 시골 서리만도 못할 것이다. 사대 (四大) 로 된 몸이란 여러 인연이 거짓 합한 것이니 본래부터 사리라는 것에 어찌 체성 (體性) 이 있겠는가. 그러나 수행이 정결하고 정업 (淨業) 이 확고하면 영명 (靈明:마음) 이 확 트여 사후의 과보를 미리 알므로 놀라지도 겁을 내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의보 (依報) 와 정보 (正報) * 두 가지가 터럭만치도 어긋남이 없다. 거치른 세간심은 본분사에 있어서는, 하루 스물네시간 가운데 끊임없이 흐르는 미세한 망상을 비춰보지 못하고 크나큰 아만심 (我慢心) 을 낸다. 이것은 업주 (業主) 인 귀신이 우리 몸을 빌어 집을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사리가 구슬처럼 흘러나오고 6근이 부숴지지 않기를 바란다면 그것이 될 말이겠는가?
30. 총림의 달사 / 복엄 치 (福嚴) 선사
복엄 치 (福嚴) 스님은 동천 (東川) 사람으로, 처음 행각하면서 진여 (眞如:大慕喆) 스님을 뵙고 바른 안목을 깨쳤다. 위산 (山) 의 지객실 〔知客寮〕 에서 입승 (立僧) 으로 있다가 실언을 해서 물러나 원두 (圓頭:菜田의 일을 맡아보는 자) 가 되어 속죄를 청하니 진여스님이 말하였다.
ꡒ너는 박복한 사람이니 채소밭 일을 하여 대중을 공양하는 것이 제격이다.ꡓ
2년간의 소임이 끝나자 교체해 주기를 청하고 아울러 이 회하를 떠나 진정스님과 오조스님을 찾아뵙겠다고 하니 진여스님이 말하였다.
ꡒ여러 곳을 두루 돌아다니는 일은 옛 성인이 남긴 모범이니 지체하지 말고 떠나거라.ꡓ
먼저 동산사 (洞山寺) 의 방장실을 찾아가니 뜻이 계합하여 진정스님은 스님에게 대중을 통솔하게 하고 입승을 삼았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있다가 다시 사조 (四祖) 스님의 회하를 찾아가 수시로 오조스님을 만나보았다. 오조스님이 그를 시험해보니 과연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점이 있기에 사조에게 말하였다.
ꡒ치수좌는 총림의 달사 (達君) 인데 어찌하여 그를 대중의 수죄에 천거하지 않습니까?ꡓ
사조는 그의 말을 따랐으며, 오조스님도 상당법문을 할 때면 그의 지견과 하는 일을 칭찬하였다.
이수찬 (李修撰) 이라는 이가 장사 (長沙) 태수로 임명되자 사조는 그에게 서찰을 보내 치선사를 천거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복엄사 (福嚴寺) 에 주지자리가 비어 보융 평 (普融道平:?~1127, 임제종 양기파) 선사 또한 다른 사람을 추천하였다. 태수는 먼저 추천했으니 사조선사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였지만 사조선사가 보내온 서신을 찾지 못해 그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마침 손님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차에 쥐 한 마리가 선반 위에 놓인 두루마리 한 묶음을 앞에 떨어뜨렸는데 주워 보니 치수좌를 천거한 사조의 서신이었다. 태수는 신통하게 생각하여 치선사를 간곡히 청하였다.
31. 귀신을 천도하다 / 담당 문준선사
늑담 심 (潭福深) 스님은 하동 (河東) 사람이며 진정 (眞淨) 스님의 법제자이다. 그의 회하에 오시자 (悟侍者)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우연히 지객실에 있다가 장작 불꽃을 휘젓는 스님을 보고 갑자기 깨친 바 있었다. 곧장 방장실로 올라가 깨친 바를 알렸더니 스님은 그를 내쫓아버렸다. 그 후로 정신을 잃고 연수당 (延困堂) 동편 변소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그 후 밤이 되면 항상 장경각이나 지객실이나 변소 등 세곳에 출몰하여 짚신을 옮겨 놓거나 물병을 건네 주거나 하여 온 대중을 괴롭혔다.
담당 (湛堂) 스님이 절강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돌아와 수좌가 되었는데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깊은 밤중에 일부러 연수당 동쪽 변소에 들어갔다. 그때 벽 위에 걸린 등불이 희미해지더니 갑자기 꺼져버리고 옷을 벗으려 하자 오시자가 물병을 가지고 왔다. 이에 담당스님은 아직은 필요없으니 옷을 벗을 때까지 기다리라 하고 옷을 벗은 후 물병을 받아 놓았다. 그리고 당시 오시자가 목매 죽은 곳에서 용변을 보니 잠시 후에 또다시 똥닦는 막대를 가져왔다. 그가 변소를 나가려 할 때 담당스님이 병을 가지고 가라고 불러 세웠다. 오시자가 병을 받자마자 그를 붙잡아 손을 더듬어보니 흐물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단단한 것 같기도 하였다. 담당선사가 그에게 물었다.
ꡒ네가 오시자냐? 네가 그 당시 지객실에 있다가 장작 불꽃을 휘젓는 스님을 보고 깨달았다는 바로 그 사람이냐? 참선하고 도를 배우는 일이란 오로지 생명의 본원이 가는 곳이 어딘가를 알기 위함이다. 그러나 네가 장경전에서 단 (端) 수좌의 짚신을 옮겨 놓은 일이 어찌 네가 그 당시에 깨달은 그것이 아니겠느냐? 또한 네가 지객실에서 목침을 옮겨놓은 일이 어찌 네가 그 당시에 깨달은 그것이 아니겠느냐? 밤마다 이곳에 있다가 사람들에게 물병을 건네주는 것이 어찌 네가 그 당시에 깨달은 그것이 아니겠느냐? 무슨 까닭에 갈 곳을 모르며 어쩌자고 여기서 대중을 괴롭히기만 하느냐? 내가 내일 대중들에게 권유하여 너를 위해 경전을 읽도록 하고 돈을 모아 죽을 마련하여 천도할 터이니 너는 특별히 생사 벗어나기를 구하고 이곳에 머물지 말라.ꡓ
말을 마치자 마자 힘껏 밀쳐버렸더니 마치 기왓장과 돌탑이 무너지듯 와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그 후로 그의 자취가 끊겼는데 담당스님의 한쪽 팔꿈치는 얼음처럼 차가웠으며 반달이 지나서야 회복되었다. 이는 귀신의 음기 (陰氣) 가 사람의 몸에 닿아 차가운 기운이 이와같이 침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32. 의술을 베푼 공덕으로 과거에 급제하다 / 허지가 (許知可)
허지가 (許知可) 는 비릉 (毘陵) 사람이다. 일찍이 고을의 천거로 과거를 보았으나 낙방하고 돌아오는 길에 오강 (吳江) 의 평망 (平望) 에 배가 닿아 묵어가게 되었는데 그날 밤 흰옷을 입은 사람이 꿈 속에 나타나 말하였다.
ꡒ너는 음덕이 없기 때문에 급제하지 못했다.ꡓ
허지가는 말하였다.
ꡒ저희 집안은 가난하여 남에게 줄 만한 재산이 없습니다.ꡓ
ꡒ의술을 배우지 않겠느냐? 내가 너의 지혜를 도와주겠다.ꡓ
허지가는 꿈에서 깬 후 집으로 돌아와 그의 말을 실천에 옮겼고, 과연 편작 (扁) 의 오묘한 의술을 얻게 되었다. 그후 병을 앓는 사람이면 귀천을 묻지 않고 병세를 진단하여 약을 지어 주되 약값을 받지 않으니 환자가 문에 가득히 모여들었으며 낫지 않는 환자가 없었다.
그 후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향시 (鄕試) 에서 급제하고 서울 과거장을 가는 도중 평망 (平望) 에 배를 댔다. 꿈 속에 지난 날의 흰 옷 입은 이를 만났는데 그가 시를 지어 허지가에게 주었다.
의술을 베푼 공덕이 커서
진루 (陳樓) 사이에 끼어 있었네
대전 위에서 이름 부르는데
여섯번째를 다섯번째로 바꿔 부른다.
施醫功大 陳樓間阻
殿上呼臚 喚六作五
허지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 그후 급제하여 급제자의 이름을 부르는데, 원래는 여섯번째였으나 전시관 (殿試官) 이 그 윗사람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아 결국 다섯번째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씨 (陳氏) 와 루씨 (樓氏) 사이에 그의 이름이 끼여있게 되자 그제서야 지난날의 예언을 깨닫게 되었다.
33. 황후가 내려준 법복 / 불광 무애 (佛光無碍) 선사
불광 무애 (佛光無碍) 선사는 소주 (蘇州) 영안사 (永安寺) 에서 천자의 칙명으로 대상국사 (大相國寺) 혜림선원 (慧林禪院) 의 주지로 부임하였다. 혜공 (慧恭) 황후는 일찍이 주렴 사이로 알현을 마치고 하늘로 날아가는 선사의 모습을 보고는 그 후로 태관 (太官) 이 올린 황제의 음식으로 공양올리고, 선사가 먹다 남긴 음식을 거두어 궁중으로 가져오게 하였다. 또한 지금 (地錦) 이라는 비단으로 법복을 만들어 손수 선패 (禪牌) 를 수놓아 하사하면서 불법을 받드는 정성을 표하였다. 겨울에는 붉은 비단으로 만든 휘장 〔帷帳〕 을 하사하였을 뿐 아니라 의복과 그릇에 이르기까지 많은 물건을 하사하였다. 불광선사는 대궐에서 하사받은 법복을 법운사의 불조 (佛照;曠) 선사에게 내려주었고 법운사의 스님은 다시 홍주 (洪州) 보봉사의 담당 (湛堂文準) 스님에게 보내주면서 서신을 썼다.
ꡒ지금 (地錦) 으로 지은 법의를 사제 (師弟) 에게 보내노니 스승의 도를 행하라.ꡓ
담당스님이 입적한 뒤 그 법의는 보봉사에 소장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34. 평상무사를 잘못 이해한 스님 / 조각 (照覺) 선사
조각 (照覺, 昭學) 선사가 늑담사 (潭寺) 에서 호계사 (虎谿寺) 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는 관문 왕자순 (觀文 王子淳) 의 청에 응한 것이다. 개당 후 폐지되었던 온갖 것들을 다시 세우고, 승당 (堂) ․소참 (小參) ․입실 (入室) 등의 법회를 하느라고 하루도 한가한 날이 없었다.
그가 한번은 회당 (晦堂祖心) , 진정 (眞淨克文) 등 동문 노스님들에 대해 스승 (先師:慧南) 의 선 (禪) 만을 얻었을 뿐 도 (道) 는 얻지 못하였다고 평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스님 (대혜) 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각선사는 지견과 이해를 세우지 않는 평범 무사한 것을 도 (道) 라 생각하여 더 이상 묘한 깨침 〔妙悟〕 을 구하지 않은 것 같다. 그는 덕산, 임제, 조동, 운문 등 여러 불조들의 진실한 돈오견성법문 (頓悟見性法門) 을 건립 (建立:임시방편) 이라 생각하고 능엄경에서 ꡐ산하대지는 모두 밝고 묘한 참마음 〔妙明眞心〕 이 드러난 것'이라는 구절을 헛된 말로서 역시 ꡐ건립ꡑ이라 하였다. 그는 또 옛 사람이 현묘한 이치를 논한 것을 선 (禪) 이라 생각하여 옛 성인을 속이고 후손의 귀를 어둡게 만들었으니, 눈에 근육이 없고 살갗에 피가 흐르지 않는 무리이다. 그는 으레껏 전도되어 있으면서도 태연스레 이를 깨닫지 못하니 참으로 가엾은 일이다.
「원각경」에서는, ꡒ말세중생은 도를 이루려고 하면서도 깨달음은 구하려 들지 않고 오로지 남에게 듣는 것만을 더하여 아견 (我見) 만을 늘린다ꡓ 하였다. 또 말하기를, ꡒ말세의 중생이 비록 좋은 벗을 구하려 하나 삿된 견해를 지닌 자를 만나 올바른 깨침을 얻지 못하니 이를 외도종성 (外道種性) 이라 한다ꡓ 하였다. 그것은 삿된 견해 〔邪見〕 를 지닌 스승의 잘못이지 중생의 허물은 아니라 하였는데,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
그러므로 진정 (眞淨) 스님은 소참법문에서 말씀하셨다.
ꡒ요즘 어떤 사람들은 평상심이 도라는 것을 최고의 법칙이라 고집하면서 하늘은 하늘, 땅은 땅, 산은 산, 물은 물, 중은 중, 속인은 속인이라 한다. 그들은 달이 크면 30일, 작으면 29일을 줄곧 풀잎과 나무에 기생하듯 지내다가 부지불식 간에 완전히 미혹해 진다. 그리고는 갑자기 ꡐ내 손은 어찌하여 부처님 손을 닮았느냐'고 물으면, ꡐ이것은 스님의 손'이라 대답하고, 내 다리는 어찌하여 당나귀 다리를 닮았느냐'고 물으면, `그것은 스님의 다리'라 대답하며, ꡐ사람마다 하나의 태어난 인연이 있는데 어느 것이 그대의 태어난 인연이냐'고 물으면, `ꡐ저는 어느 고을 사람이다' 하고 대답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착각하지 말아라. 모든 일에 다만 평상 (平常) 이라는 한 길만을 온당하다 생각한다면 반드시 나아가야 하고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에 다시는 한 발자욱도 옮겨놓지 못한다. 구덩이에 빠질까 겁에 질려 기나긴 세월을 한결같이, 봉사가 길가듯 한 발을 떼어놓을 때도 지팡이를 꼬옥 움켜쥐고서 놓아버리지 못한 채 기대 가는 것과 같다.ꡓ
또 회당 (晦堂) 스님이 참학인 (參學人) 들에게 말씀하셨다.
ꡒ너희는 여산 (山) 의 무사갑 (無事甲) 속에 가서 앉아 있거라ꡓ 하였는데, 오늘날 조각선사의 자손들은 마치 꺼진 재처럼 되었으니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다.
35. 깊은 밤에 본 두 스님 / 불조 고 스님
불조 고 (佛照曠) 스님이 처음 귀종사 (歸宗寺) 의 주지로 있을 때, 오로지 법도에 맞게 하여 조금치도 게으른 일이 없었다. 어느 날 깊은 밤에 예불 〔修敬〕 을 마치고 승당 (僧堂) 의 화로 앞에 앉아 있으려니 갑자기 두 스님이 승당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한 사람은 긴 눈썹에 눈처럼 흰 머리칼이었으며, 또 한 사람은 소년이었는데 모두가 훤출한 키에 용모가 빼어났다. 고선사는 마음속으로 ꡐ나의 회하에도 이런 승려가 있었구나' 하면서 기뻐하였는데, 잠시 후 두 사람은 승당 밖으로 나갔다. 고선사는 뒤를 밟았는데 그들이 불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따라 들어갔다. 안에는 등불이 환하게 밝혀 있고 향로에는 그때까지 불씨가 남아 있기에 고선사는 향을 사르고 예불을 하였다. 두 사람이 다시 밖으로 나가자 또 그 뒤를 밟았는데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향갑을 불전 안에 놓아둔 채 잊고 나왔기에 몸을 돌이켜 찾으려고 하니 불전의 문에 자물쇠가 잠겨 있었다. 마침내 불전의 수직행자 (守直行者) 인 수순 (守舜) 스님을 불러 열쇠로 문을 여니 향로에는 아직도 향 연기가 흩어지지 않았으며 향갑이 보계 (寶堦:佛像으로 오르는 계단) 위에 놓여 있어 자신도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묘희스님은 불조선사에게서 직접 이 말을 들었는데 그 때 수순행자가 곁에 있으면서 그곳을 가리키며 이 이야기를 증명하였다.
36. 대대로 불법을 보호하다 / 여몽정 (呂蒙正)
대승상 여몽정 (呂蒙正) 은 낙양 (洛陽) 사람이다. 벼슬하기 전에는 생활이 막연하였는데 한달동안 끊임없이 눈이 내리자 부자 집을 두루 찾아다녔지만 그의 어려움을 보살펴주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때 지은 시는 대략 다음과 같다.
열군데 붉은 대문 찾아가면 아홉 곳은 문마져 굳게 닫고
온몸 가득 눈바람 맞고 돌아오니
집에 들면 처자얼굴 보기 민망하여
밤새껏 차가운 화롯불을 하염없이 뒤적인다.
十謁朱門九不開 滿身風雪又歸來
入門懶妻兒面撥 撥盡寒爐一夜灰
그의 정황을 상상할 만하다. 하루는 길에서 스님 한 분을 만났는데 그의 어려운 형편을 가엾게 생각하여 절로 초대하였고, 돌아갈 때 음식, 의복과 얼마의 돈을 주어 보냈다. 그러나 겨우 한 달이 지나자 또다시 어렵게 되어 다시 스님을 찾아가니 스님이 말하였다.
ꡒ이는 대책이 못되니 식구를 절 행랑으로 옮겨서 살게 하시오. 공양 때가 되면 대중이 먹는대로 죽이건 밥이건 줄터이니 이렇게 하면 긴 대책이 될 것이오.ꡓ
여공은 그의 말을 따랐다. 의식이 곤란하지 않자 드디어 모진 마음으로 책을 읽고서 그 해 과거에 응시하여 향시 (鄕試) 에 급제하니, 스님이 말과 노비를 마련하고 행장을 갖춰 주어 도성의 과거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성시 (省試) 에서도 급제하여 전시관이 호명하는데 그가 장원이었다. 처음 서경통판 (西京通判) 에 임명되어 스님과 만났으나 평상시처럼 변함 없었고, 10년이 지나 드디어 재상이 되었다. 천지에 제사를 지내는 교사 (郊祀) 때가 되어 봉급이 내려지면 이를 모두 내각 (內閣) 에 보내 보관시키니 태종 (太宗) 이 하루는 그에게 물었다.
ꡒ경은 여러 차례 교사 (郊祀) 를 지냈는데도 어째서 봉급을 청하지 않는가?ꡓ
ꡒ신 (臣) 은 사사로운 은혜를 갚지 못한 곳이 있습니다.ꡓ
태종이 다그쳐 묻자 그가 하는 수 없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태종은 ꡒ승려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던가ꡓ 하면서 감탄하였다. 그리고는 그 스님의 이름을 자세히 기록하여 올리도록 명하고 붉은 가사와 사호 (師號) 를 추가하여 그의 남다른 행적을 표하였다.
여공은 그가 쌓아둔 봉급 수만냥을 계산하여 서경 (西京) 에 편지를 보내고, 그 스님에게 사찰 수리와 대중공양에 필요한 경비를 요청하도록 하였다. 그 절은 원래 철마영 (鐵馬營) 에 있었는데 태조 (太祖) 와 태종 (太宗) 두 황제가 태어난 곳이다. 태조 때에 이미 절을 지었으나 그 이름은 잊혀졌으며, 그 스님이 바로 그곳의 주지다. 태종이 특별히 돈을 하사하여 사원을 중건하고 친필 액자와 도첩을 주었다.
여공은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면 예불하고 다음과 같이 축원하였다.
ꡒ우리 집안에 삼보를 믿지 않는 사람이 태어나지 않도록 하여 주시고, 자손 대대로 조정의 녹을 먹으면서 불법을 외호하도록 하여 주십시오.ꡓ
그의 조카 신국공 (申國公) 여이간 (呂吏簡) 은 해마다 정월 초하루가 되면 집안의 사당에 차례를 지낸 후 곧 향불을 사르고 광혜 원련 (廣慧元璉:951~1036) 선사에게 서신을 써 보내면서 더욱 그를 존경하였다. 신국공의 아들 여공저 (呂公著) 또한 신국공에 봉해졌는데 정초마다 천의 의회 (天衣義懷) 선사에게 서신을 보냈으며, 우승상 여호문 (呂好問) 도 설날이 되면 원조 종본 (圓照宗本) 선사에게 서신을 보냈으며, 우승상의 아들 여용중 (呂用中) 도 설날마다 불조 고 (佛照曠) 선사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 집안이 대대로 마음으로부터 불교를 믿고 몹시 공경한 데에는 역시 그 유래가 있었던 것이기에 이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를 일깨우고자 한다.*
37. 정성껏 시봉한 덕택에 얻은 법문 / 처응 (處凝) 선사
보령 용 (保寧仁勇) 선사의 상수 제자인 처청 (處淸) 스님과 처응 (處凝) 스님은 함께 백운 단 (白雲守端:1025~1072) 선사에게 공부하였다. 처응스님은 가장 오랫동안 시자를 했었는데 수단선사에게 가슴앓이 병이 있어 처응스님은 항상 화롯불에 무우를 구워 두었다가 어느 때라도 필요하면 가져다 드렸다.
수단선사는 부대사 (傅大士:497~569) 가 경을 강의한 일*에 대하여 송을 지었다.
대사가 언제 경을 강론할 줄 알았던가
보지선사 방편과 쌍벽을 이루었네
한차례 책상을 쳤을 뿐 아무일 없으니
양무제의 눈알이 휘둥그래질 만하다.
大君何曾解講經 誌公方便且相成
一揮案上俱無取 直得梁王努眼
수단스님은 처응스님을 위해 이 송을 들려주고는 ꡐ휘둥그래질 만하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이 한 구절은 처응스님을 위하여 노파선 (老婆禪) 을 설한 것으로 처응스님은 이 말을 친히 들었다 하여 송의 아래에 덧붙여 두었다.
처응스님은 후일 서주 (舒州) 천주산 (天柱山) 의 주지를, 처청스님은 용서 (龍舒) 태평사 (太平寺) 의 주지를 지냈는데 큰 기변 (機辯) 이 있어 오조 연 (五祖法演) 스님이 그들을 경외하였다. 처청스님이 처응스님에게 말하였다.
ꡒ아우의 선은 노스님을 위하여 화롯불에 무우를 구은 정성의 대가로 얻은 것이다.ꡓ
38. 보고서도 만나보지 못한 부처님 / 웅수재 (態秀才)
정화 (政和:1111~1117) 연간에 웅수재 (態秀才)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번양 (陽) 출신이다. 그가 홍주 (洪州) 서산 (西山) 을 돌아다니다가 취암사 (翠巖寺) 를 지나가게 되었다. 장로 (長老) 사문 (思文) 스님은 불인 원 (佛印了元:雲居了元) 선사의 법제자로서 역시 번양사람이었으므로 그에게 두 노비를 보내 가마에 태우고 불전 〔淨相〕 에 오게 하였다. 지나오는 도중에 짙고 깊은 숲 골짜기에서 우연히 한 스님을 만났다. 그는 옛 사람의 모습에다 정신이 맑아 보였으며 긴 눈썹과 새하얀 머리에 나무잎을 엮어 옷을 만들어 입고 반석 위에 앉아 있었는데 마치 벽 위에 걸려있는 불도징 (佛圖席:梵僧) 의 초상화와 같았다.
웅수재는 혼자서 생각했다.
ꡒ요즘은 저런 스님이 없다. 양좌주 (亮座主) 가 서산에 숨었다고 하던데 아마 그가 아직껏 살아있는 성싶다.ꡓ
그리고는 가마 밖으로 나와 앞으로 공손히 나아가 여쭈었다.
ꡒ혹시 양좌주가 아니십니까?ꡓ
그 스님이 손으로 동쪽을 가리키기에 웅수재와 두 노비는 그의 손을 따라 바라보다가 뒤돌아 보니 스님은 간 데가 없다. 그 당시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그치자마자 웅수재가 몸소 반석위로 올라가 그가 앉았던 자리를 살펴보니 그 자리는 말라 있었다. 이에 그곳에서 머뭇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ꡒ전생의 인연이 두텁지 못하여 보고서도 만나지 못하였구나.ꡓ
39. 「선상명」 / 개선 선섬 (開先善穢) 선사
개선 섬 (開先善穢) 스님은 귀종사의 남 (慧南) 선사를 위하여 「선상명 (禪牀銘) 」을 지었다.
진주는 조개에서 나오고
옥토끼는 둥근달을 잉태하는데
이 선상을 보아하니
도를 깨쳐주는 중매장이로다.
明珠産蚌 涼兎懷胎
觀此禪牀 證道之媒
그 다음에 남선사가 귀종사명(歸宗寺銘) 을 지었는데ꡐ놓아버리니 편안하다〔放下便穩〕ꡑ는 구절에 개선스님은 깊이 수긍하였다.
40. 흥교사의 새 주지 탄 (坦) 선사
선주 (宣州) 흥교사 (興敎寺) 의 탄 (坦) 선사는 온주우씨 (溫州牛氏) 자손으로, 집안 대대로 은 (銀) 세공업을 하였다. 그는 은병을 갈고 닦다가 홀연히 깨달은 바 있어 드디어 출가하여 비구계를 받고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낭야 광조 (廣照:慧覺) 선사의 법제자가 되었다.
회 (天衣義懷, 운문종) 선사가 흥교사에 주지로 있을 무렵 탄선사는 그곳 수좌로 있었는데, 의회선사가 다른 곳에 주지가 되어 떠나면서 탄선사를 후임 주지로 추천하려 하였다. 그 당시 조경순 (景純) 이 완릉 (宛陵) 태수로 있었는데 의회선사는 조경순이 외부의 논의에 따를까 두려워하여 관세음보살 앞에서 축원하였다.
ꡒ만일 탄선사의 도안 (道眼) 이 밝아 주지를 맡길 수 있다면 조학사의 꿈에 현몽하여 주소서.ꡓ
조태수는 그날밤 소 한마리가 흥교사의 법좌 위에 앉아 있는 꿈을 꾸었다. 의회선사가 아침 일찍 관아에 나아가 이별을 고하는데 조태수가 간밤의 꿈이야기를 하자 의회선사는 크게 웃었다. 조태수가 그 까닭을 물으니 의회선사가 의회선사가 말하였다.
ꡒ탄수좌의 성이 우씨 (牛氏) 이니 그것도 소는 소가 아니겠소?ꡓ
조경순은 그 자리에서 공문을 보내 탄선사를 청하니 탄선사는 청을 수락하고 법좌에 올라 갔다.
설두 (雪¿重顯) 선사의 회하에 있던 화주 (化主) 성종 (省宗) 스님이 그곳에 있다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ꡒ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는 사람마다 콧대가 하늘을 찔렀는데 세상에 나온 뒤로는 무슨 까닭에 깜깜무소식인가?ꡓ
탄선사가 말하였다.
ꡒ계족산 (鷄足山) 봉우리 앞에 바람이 쓸쓸하다.ꡓ
ꡒ아직은 안된다, 다시 말하라.ꡓ
ꡒ장안 (長安) 가득 큰 눈이 내렸다.ꡓ
ꡒ그 누가 이 뜻을 알리오. 나로 하여금 남전 (南泉) 선사를 생각나게 하는구나.ꡓ
성종화주는 이 말을 마치고 소매자락을 떨치고 대중 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절을 올리지 않았다. 이에 탄선사는 ꡒ흥교사 새주지는 오늘 손해를 보았구나ꡓ 하고는 바로 방장실로 돌아간 후 사람을 보내 성종화주를 데려오도록 하였다. 그가 이르자 따져물었다.
ꡒ좀 전에 한 마디를 잘못 대답하였다. 그렇다고 많은 대중 앞에서 절 하지 않은 것을 덮어둘 수는 없지 않느냐?ꡓ
ꡒ대장부로서 무릎 앞에 황금이 있다 하더라도 안목 없는 장로에게 어떻게 절을 올릴 수 있겠는가?ꡓ
ꡒ나에게 또다른 말이 있다.ꡓ
이에 성종화주가 조금전에 물었던 말을 되풀이 하는 가운데 ꡐ아직은 안된다. 다시 말하라!ꡑ라는 구절에 이르자 탄선사가 말하였다.
ꡒ나에게 몽둥이 30대가 있는데 너에게 주어 설두스님을 치도록 하겠다.ꡓ
성종화주는 마침내 절을 하였다.
41. 30년 이상을 참구하다 / 원오 극근 (圜悟克勤) 선사
원오 (圜悟) 스님이 위산사 (山寺) 에 있을 때 진여 (眞如) 스님이 그에게 물었다.
ꡒ어떤가?ꡓ
ꡒ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합니다.ꡓ
ꡒ그것이 온갖 번뇌에 매여있는 범부의 경지임을 알아야 한다. 이 노승도 그 속에서 30여 년을 있었지만 비슷한 경지를 얻었을 뿐이다.ꡓ
그 다음 회당 (晦堂祖心) 선사를 친견하자 회당스님이 말했다.
ꡒ내 12년 동안 절의 주지를 했어도 깨닫지 못했는데 이제와서야 발끝으로 부처를 걷어찰 줄 알게 되었다.ꡓ
원오선사는 후일 소각사 (昭覺寺) 의 주지가 되었는데 한 장로가 그에게 물었다.
ꡒ유철마 (劉鐵磨) 가 위산스님과 문답한 일과 설두스님이 지은 어가행송 (榮街行頌) 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ꡓ
ꡒ내가 지금부터 40년을 더 참구한다해도 여전히 설두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오.ꡓ
장로는 탄식을 하였다.
ꡒ소각사의 스님께서도 오히려 이처럼 말하는데 더구나 다른 사람이야 어떻겠는가!ꡓ
42. 동사 (東司) 라 하니 동쪽에서 찾지만 / 진정 (眞淨) 선사
낭중 (郎中) 전익 (錢弋) 이 진정 (眞淨) 선사를 방문하여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낭중이 변소에 가려고 하니 진정스님이 행자를 보내 서쪽으로 안내하도록 하였는데 전익이 느닷없이 말하였다.
ꡒ동사 (東司:화장실을 가리키는 말) 라 하고서 어째서 서쪽으로 가라 합니까?ꡓ
ꡒ많은 이들이 동쪽에서 찾지.ꡓ
이에 대하여 스님 (대혜) 께서 말하였다.
ꡒ아! 조주선사가 투자 (投子大同) 선사에게 물었을 때 ꡐ밤길을 걷게 할 수는 없고 동이 트면 찾아오라ꡑ고 대답했던 말도* 이보다는 훌륭하지 못하다.ꡓ
43. 여러 절 주지 모임에서 / 진정 (眞淨) 선사
남강 (南康) 땅 여러 사찰의 주지 모임에 불인 (佛印:雲居了元) 선사가 뒤늦게 이르자 진정선사가 물었다.
ꡒ운거는 어찌하여 이처럼 늦었습니까?ꡓ
ꡒ짚신 신고 귀종 (歸宗) 의 뱃속을 지나오느라고 늦었소.ꡓ
ꡒ귀종에게 도리어 먹혀버렸구나.ꡓ
ꡒ토해내지 못한 건 어찌하려오?ꡓ
ꡒ토해내지 못했으면 똥으로 싸버렸나?ꡓ
44. 노스님의 영정을 모시고 / 진정스님
진정 (眞淨) 스님이 수시로 갑자기 시자를 불러 노스님을 모셔오라고 하면 시자는 혜남 (慧南) 선사의 영정을 가져다가 펼쳐 놓았다. 그러면 손을 이마에 얹고서, ꡒ이 분은 우리 노스님이 아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ꡓ 하면서 이맛살을 찌푸린다. 그렇게 반나절쯤 있다가 다시 거둬들이도록 하는데 번번히 이처럼 되풀이 하였다.
그러나 잠암원 (潛庵淸源) 스님은 혜남선사의 영정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또한 스님 (대혜) 은 매년 새 곡식과 과실을 얻으면 반드시 불상과 원오선사에게 공양한 뒤에야 맛을 보았다. 그리고는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ꡒ부처님과 노스님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어떻게 이처럼 될 수 있었겠느냐.ꡓ
45. 「신심명」의 주석 / 낭야 혜각 (慧覺) 스님
도위 (都尉) 이화문 (李和文:李導) 이 낭야 각 (慧覺) 스님에게 「신심명 (信心銘) 」의 주석을 부탁하였다. 낭야선사가 큰 글씨로 한 구절을 쓰고 아래에 작은 글씨로 한 구절을 써주자 이화문은 한 번 보고서 몹시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46. 의회스님의 법문
순 노부 (曉舜老夫) 스님이 어느 날 원통 수 (圓通法秀:운문종) 선사에게 물었다.
ꡒ듣자니 그대가 회 (天衣義懷) 스님을 친견했다던데 사실이냐?ꡓ
ꡒ사실입니다.ꡓ
ꡒ무슨 법문을 하시던가?ꡓ
ꡒ투기송 (投機頌) 이 있었습니다.ꡓ
1 2 3 4 5 6 7이여
만길 봉우리 앞에 한쪽 발로 서서
검은 용의 턱밑에서 여의주를 빼앗고
한 마디로 유마힐을 간파하였노라.
一二三四五六七 萬仞峯前獨足立
尊得瘻龍頷下珠 一言勘破維摩詰
ꡒ좋지 않다. 다른 법문 없었는가?ꡓ
ꡒ하루는 장로 한 분이 찾아오자 의회선사는 불자를 들어보이며 그에게 알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의회스님은ꡐ귓밥은 두조각의 가죽이요, 치아는 한벌의 뼈ꡑ라고 하셨습니다.ꡓ
이 말에 스님은 참으로 선지식이라고 감탄하면서 그 후로 의회선사를 존경하게 되었다.
47. 강주를 그만두고 / 황벽 도천 (黃道泉) 선사
균주 (筠州) 황벽 도천 (道泉) 선사는 처음 「백법론 (百法論)」을 배워 강주로서 명성이 자자하였으나 선종으로 옷을 바꿔 입고 남방으로 내려와 동산에서 진정 (眞淨) 스님을 친견하였다. 그가 지은 오도송 (悟道頌) 은 대략 다음과 같다.
한 방에 창고를 몽땅 쳐부수니
일체 보화가 모두 나의 것
一鎚打透無盡藏 一切珍寶吾皆有
기봉이 빨라서 아무도 그를 당할 자가 없었는데 진정스님은 이렇게 탄식한 적이 있다.
ꡒ애석하다. 선사 (先師:慧南) 를 미처 친견하지 못하겠구나.ꡓ
그 후 그는 법상에 올라 설법하다가 법좌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입적하니 진정화상의 말은 더욱 영험이 있었다.
48. 발밑을 보라 / 불과 극근 (佛果克勤) 선사
삼불 (三佛:佛鑑慧懃․佛眼淸遠․佛果克勤) 스님들이 오조 (五祖法演) 선사의 회하에 있을 때였다. 하루는 정자 위에서 밤늦도록 이야기하다가 방장실로 돌아오니 등불은 꺼져 있었는데 오조선사가 어둠 속에서 각기 한마디씩 던져보라는 것이었다.
이에 불감 (佛鑑) 선사는 ꡒ오색 봉황이 하늘에서 춤춘다ꡓ 하였고, 불안 (佛眼) 선사는 ꡒ쇠 뱀이 옛길에 누었다ꡓ 하였고, 불과 (佛果) 선사는 ꡒ발밑을 보라ꡓ 하였다.
그러자 오조선사는 ꡒ우리 종문을 망칠 놈은 극근 (克勤) 이다ꡓ라고 하였다.
49. 화두참구하는 법 / 회당 (晦堂祖心) 선사
초당 (草堂善淸:1057~1142) 스님이 회당 (晦堂祖心) 스님을 모시고 서 있는데 회당스님이 ꡐ바람과 깃발ꡑ 화두를 거론하면서 물었다. 초당스님이 ꡒ아득하여 들어갈 곳이 없습니다ꡓ 하고 대답하자 회당스님이 말하였다.
ꡒ너는 세간에서 고양이가 쥐잡는 모습을 보았느냐? 두 눈을 부릅떠서 깜박거리지도 않고 네 발을 땅에 버틴 채 꼼짝 않고서 집중하고 머리와 꼬리를 일직선으로 곧추세운다. 그렇게 해서 쥐를 덮치면 잡히지 않는 때가 없다. 참으로 마음에 다른 인연이나 망상이 없이 육근의 창문을 고요하게 하고서 단정히 앉아 말없이 참구한다면 만에 하나라도 잘못이 없을 것이다.ꡓ
50. 은사스님의 말씀을 받들다 / 청소 (淸固) 수좌
청소 (淸固) 수좌는 민현 (縣) 사람이다. 자명 (慈明:石霜楚圓) 선사에게 13년 동안 의지하였다가 80세가 되어서야 호상 (湖湘) 녹원사 (鹿遺寺) 에 주석하였으나 애당초 사람들과 사귀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그를 알지 못하였다.
종열 (從悅:1044~1091) 수좌는 처주 (處州:虔州) 사람인데 우연히 그의 이웃에서 살게 되었다. 종열수좌가 꿀에 담은 여지 (荔枝) 를 먹으려는 찰라에 청소수좌가 문앞을 지나가자 종열수좌는 그를 불렀다.
ꡒ이것은 노인의 고향에서 나오는 과실이니 함께 먹읍시다.ꡓ
ꡒ스승 〔先師〕 께서 돌아가신 후 이 음식을 먹어보지 못한 지 오래다.ꡓ
ꡒ스승이 누구십니까?ꡓ
ꡒ자명선사요.ꡓ
종열수좌는 깜짝 놀라 의아해 하였으며 남은 과일을 그에게 보내 조금씩 친하게 되었다.
그 후 청소수좌가 그에게 물었다.
ꡒ그대가 친견한 사람은 누구요?ꡓ
ꡒ동산 극문 (洞山克文) 스님입니다.ꡓ
ꡒ극문스님은 누구를 친견하였소?ꡓ
ꡒ혜남 (慧南) 스님입니다.ꡓ
ꡒ`납짝머리 남두[南頭〕스님 '이 스승을 뵈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후손의 법도 (法道) 가 이렇게 성하구나!ꡓ
종열수좌는 이 말에 더욱 그를 달리 생각하였다. 하루는 향을 가지고 찾아가서 예배를 올리려 하니 청소수좌는 그를 피하면서 말하였다.
ꡒ나는 박복한 사람이라 스승께서 사람을 가르쳐서는 안된다고 내게 수기를 하셨다.ꡓ
한달 남짓 지나자 종열수좌의 성의를 가상히 여겨, 평소 아는 것을 말해보라고 하였다. 종열수좌가 자신이 깨친 바를 상세히 말하자 청소수좌는 ꡒ부처 속으로는 들어갈 수 있지만 마귀 속으로는 들어갈 수 없구나ꡓ 하고서 다시 말하였다. ꡒ마지막 한 구절이라야 비로소 굳게 닫힌 관문에 이른다.ꡓ
이처럼 닦아가기를 반년만에 청소수좌는 처음으로 그를 인가하고 주의시켰다.
ꡒ극문 (克文) 이 그대에게 보여준 것은 모두 올바른 지견이었다. 내 비록 그대를 위하여 이를 점검해서 그대가 자유자재로 수용 (受用) 할 수 있도록 했지만 그대가 너무 일찍이 스승 곁을 떠나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할까 두렵다. 뒷날 결코 나의 법제자가 되어서는 안된다.ꡓ
후일 종열수좌는 세상에 나아가 진정선사의 법을 이었는데, 그가 바로 도솔 종열 (兜率從悅) 선사이다.
51. 대인이 나타난 모습 / 운거 선오 (雲居善悟) 선사
운거 오 (雲居善悟:高庵) 스님이 용문사 (龍門寺) 에 있을 무렵 한 스님이 뱀에게 물렸다. 불안 (佛眼) 선사가 ꡒ이곳은 용문 (龍門) 인데 어찌하여 뱀에게 물렸느냐ꡓ고 물으니 선오선사가 곧바로 대답하였다. ꡒ과연 대인이 나타난 모습입니다.ꡓ
후일 이 말이 소각사 (昭覺寺) 에 전해지자 원오 (圜悟) 선사가 말하였다.
ꡒ용문사에 이런 중이 있었단 말이냐? 동산
52. 배로 가나 걸어가나 매 한가지 초당 선청 (草堂善淸) 선사
초당 (草堂善淸) 스님이 임천 (臨川) 에서 우연히 스님 (대혜) 을 만난 적이 있었다. 한자창 (韓子蒼) 이 스님을 초청하여 그의 집에 머물게 하면서 물었다.
ꡒ선청스님은 어떻습디까?ꡓ
ꡒ얼마 전에 들으니 방거사龐睛:?~809〕가 마조 (馬祖道一) 대사에게 물었던 ꡐ만법과 짝하지 않는 이 (不與萬法爲侶) ꡑ라는 인연에 대해 ꡐ어룡과 새우를 어디에서 찾으리 〔貌龍蝦 向甚處著〕ꡑ라고 염송을 하였소.
만일 이와 같다면 그의 명성은 헛되이 얻은 것이오.ꡓ
한자창이 이 말을 초당선사에게 알려주자 초당선사가 대답하였다.
ꡒ그대가 그에게 전해 주시오. 비유하면 한 사람은 배로 가고, 한 사람은 육지로 갔는데 두 사람 모두 목적지에 이르렀다ꡓ고.
스님은 이 말을 듣고 초당이 도를 얻었다고 수긍하였다.
53. 희유 (希有) 합니다 / 수보리 (須菩提)
수보리 (須菩提) 는 공 (空) 도리를 가장 잘 이해한 분으로, 그가 태어날 때 집안이 모두 비어 있었다. 세존께서 법좌에 오르시자마자 수보리는 대중 앞에 나아가 ꡒ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ꡓ 하였는데 말해 보아라. 그가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이렇게 말했겠는가를.
천친 (天親) 보살은 「무량게 (無量偈)」를 지어 오로지 ꡐ희유ꡑ라는 두 글자만을 찬양하였고, 원오선사는 이 한 마디가 하나의 쇠말뚝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육조 (六祖慧能) 대사는ꡐ응무소주이생기심 (應無所住而生其心)ꡑ이라는 구절을 듣고 그대로 깨친 것이다.
54. 밭가는 농부의 소를 빼앗듯이 / 오조 (五祖) 선사
원오 (원圜悟) ․불안 (佛眼) ․불감 (佛鑑) 세 선사가 오조스님의 회하에 함께 있을 때였다. 어느 날은 셋이서 ꡒ노스님은 그저 무미건조하기만 해서 이따금씩 마음이니 성품이니 마저 설법하지 않으신다ꡓ하고는 ꡒ불신 (佛身) 은 하는 일이 없고 어느 범위 (數:有無, 迷悟 따위) 에도 떨어지지 않는다ꡓ 한 것으로 법문을 청하니 오조스님이 말하였다.
ꡒ비유하자면 맑은 마니주가 오색을 비추는 것과 같으니, 오색은 범위 (數) 이고 마니주는 불신이다.ꡓ
원오선사가 두 선사에게 말하였다.
ꡒ스님은 대단히 설법을 잘하신다. 우리는 설법할 때 매우 힘이 들지만 스님은 한두 마디로 끝내 버리니 분명 그는 한 마리의 늙은 호랑이다.ꡓ
오조스님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만일 마음이니 성품이니를 설법하면 구업짓는 것이라 하고 다시 말씀하였다.
ꡒ고양이는 피를 핥는 공덕이 있고 범은 주검을 일으켜 세우는 공덕이 있다. 선이란 이른 바 밭갈이 하는 자의 소를 빼앗고 굶주린 자의 밥을 훔치는 것처럼 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모두 진흙덩이를 가지고 노는 놈들이다.ꡓ
55. 똥물이나 퍼 부어라 / 대혜 (大慧) 선사
스님 (대혜) 께서 어느 날 조거제 (趙巨濟) 에게 말하였다.
ꡒ노스님 (원오선사) 께서 갑자기 떠나면 다른 사람이 와서 그들에게 선 (禪) 을 가르치게 될 것이다. 그가 이 화두 〔轉語〕 는 이렇게 깨닫고, 저 화두는 저렇게 깨닫고, 하면 뜨거운 똥물이나 퍼 부어라. 기억하라!ꡓ
56. 인가를 받으러 왔다가 대혜선사
스님 (대혜) 이 운거사 (雲居寺:원오스님이 계신 곳) 에 수좌로 있을 무렵, 어느 날 서적장 (西積莊) 에 갔다가 원통사 (圓通寺) 에서 온 객승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였다.
ꡒꡐ여자출정 (女子出定)ꡑ 화두에 관한 수좌의 송을 보고 깨달은 바 있어 수좌의 인가를 받고자 특별히 찾아왔습니다.ꡓ
ꡒ그런 게 아니니 가보게나.ꡓ
ꡒ제가 아직 깨달은 곳을 이야기하지도 않았는데 어찌하여 그게 아니라 하십니까?ꡓ
스님은 거듭 손을 저으며 말하였다.
ꡒ가보게. 그런 게 아니네. 그런 게 아니야!ꡓ
객승은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57. 단 한 번에 적을 무찔러라 / 대혜선사
원오 (圜悟) 스님이 어느 날 수좌실에 와서 설법하였다.
ꡒ밀인 (密印) 장로는 4년 전에 이미 이 경지를 보았는데 금산사 (金山寺) 에 와서 법좌에 올라서도 이 경지만 하나하나 되풀이 할 뿐 완전히 거두지 못하니 어떻게 학인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이는 마치 보검을 가득 실은 수레에서 밑바닥이 보일 때까지 한자루씩 계속 끄집어 내는 것과 같다. 그러나 본분의 수단이라면 한자루만 빼어 들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데 어째서 굳이 다 끄집어 낼 것 있느냐?ꡓ
그때 한 스님이 이 설법을 듣고 스님 (대혜) 에게 말하였다.
ꡒ제가 지난 날 그의 소참어록을 보고서 그가 평소에 세밀하고 풍부하게 공부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대중을 마주하여 하나가 끝나면 또 하나씩, 이렇게 알고 있는 바를 모조리 드러내려고만 하였지 쉴 생각은 없었던 것입니다.ꡓ
스님이 말하였다.
ꡒ사실은 그런 게 아니다. 용은 반잔의 물만 있어도 구름과 안개를 일으키고 큰 비를 내릴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굳이 큰 바다 속으로 수레를 몰고 가면서 `나에게 많은 물이 있다'고 하겠는가? 또한 서로가 싸울 때 창 한자루만 가지고서도 적의 말을 보자마자 그것이 바로 내가 처치해야 할 것임을 알아 가까이 다가서서 한 창에 적을 무찌르고 말의 등에 올라타는 것과도 같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모름지기 이래야만 하는 것이다.ꡓ
58. 금강경 백독보다도 대우 수지 (大愚守芝) 선사
대우수지 (大愚守芝) 스님은 그의 회중에 매일 금강경을 백번씩 독송하는 스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시자를 보내 그를 불러온 후 물었다.
ꡒ그대가 매일 금강경을 백독씩 한다는데 사실이냐?ꡓ
ꡒ그렇습니다.ꡓ
ꡒ그대는 경의 뜻을 참구해 본 일이 있는가?ꡓ
ꡒ해본 적이 없습니다.ꡓ
ꡒ너는 하루에 한번씩만 읽고 부처님의 뜻을 참구하거라. 만일 한 구절에서 깨친다면 한방울의 바다물만 마셔보아도 모든 강의 물맛을 알 것이다.ꡓ
그는 스님 (대우) 이 가르쳐준대로 하던 어느 날 ꡐ응당 이와같이 알고, 이와같이 보고, 이와같이 믿고 깨닫되 법상 (法相) 을 내지 말지니라 〔應如是知 如是見 如是信解 不生法相〕ꡑ 한 구절에서 별안간 깨친 바 있었다. 마침내 이 사실을 아뢰자 수지선사는 문득 선상 앞의 개를 가리키면서 개 부르는 시늉을 하였으나 그가 아무런 대꾸가 없자 선사는 그를 쫓아내 버렸다.
59. 기봉만 가지고는 안목을 판가름하기 어렵다 / 대혜선사
스님이 말하였다.
ꡒ참선이란 기봉 (機鋒) 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으로 반드시 자신이 옳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예전에 운개 지 (雲蓋守智) 스님은 도안이 밝은 분이었다. 하루는 태수가 산사에 들어와 담공정 (談空亭) 에 쉬면서 스님에게 물었다.
ꡐ무엇이 담공정입니까?ꡑ
ꡐ이것이 담공정이요.ꡑ
태수는 이를 불쾌히 생각하여 드디어 똑같은 질문을 본 모고 (本慕顧:雲蓋智本) 스님에게 하였다. 그는 ꡐ정 (亭) 자만 가지고서도 설법할 수 있는데 무엇하려고 입으로 공 (空) 을 이야기하겠느냐ꡑ고 대답하니 태수는 기뻐하여 마침내 그를 운개사의 주지로 옮겨주었다.
본선사는 수지선사에 비하면 훨씬 못하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실은 기봉만으로 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봉 원 (寶峰道元:昭覺) 수좌 또한 도가 있는 스님이었지만 화두에 답하는 기봉이 둔하여 각범 (慧洪覺範) 선사는 그를 원오두 (元五斗) 라 불렀다. 오두란 입김을 불어 쌀 다섯말이 익혀질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한 마디 대답한다는 뜻이다.ꡓ
스님이 말하였다.
ꡒ요즘 사람들은 전도된 것을 따를 줄만 알지 바른 이치는 따를 줄 모른다. 이를테면 무엇이 부처냐고 물어 마음이 부처라고 하면 도리어 평범한 대답이라 생각하고, 무엇이 부처냐 해서 등롱이 벽을 따라 천태산에 오른다고 해야 대단하다고 말을 하니 이것이 어찌 전도된 것을 따르는 일이 아니겠는가?ꡓ
스님이 말하였다.
ꡒ장무진 (商英) 거사가 도솔 열 (兜率從悅) 선사를 뵙고 회당 (晦堂祖心) 선사를 조롱하는 송을 지었다.
황룡산 용의 소문 오래도록 울렸는데
와 보니 산에 사는 늙은이 뿐
치고 받는 주먹질 속에
따로 통하는 마음 있음을 알아야 하리.
久響黃龍山裏龍 到來只見住山翁
須知背觸擧頭外 別有靈犀一點通
당시 여러 총림에서는 감탄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 산승이 뒤에 태어나 이 송을 보았을 때는 애석하게도 무진거사는 이미 죽은 뒤였다. 그는 ꡐ치고 받는 주먹질 속에 따로 통하는 마음 있음을 알아야 하리ꡑ라고 하였으나 이 송으로 회당선사를 보려 한다면 너무 거리가 먼 일이 아니겠는가?
영원스님이 일찍이 회당선사의 초상화에 찬을 썼다.
황룡삼관을 거슬러 꺾어 놓으니
영취봉에 현묘한 기틀을 초월하고
한 주먹 보이시니
황룡산에 적나라 (赤裸裸) 한 본면목이 드러났네
소문으로는 부자라 하더니만
만나보니 가난뱅이라
노년에 돌아가는 즐거움을 노래하니
이 때문에 사람들이 산에 사는 늙은이라 하였네.
三問逆摧 超玄機練鷲嶺
一擧垂示 露赤體練龍峯
聞時富貴 見後貧窮
年老浩歌歸去樂 從敎人喚住山翁
황노직 (黃魯直) 이 이 이야기를 듣고 웃으면서 말하였다. ꡐ무진거사가 따로 통하는 마음이라 한 것은 철없는 장난꾸러기가 허공에다 귓구멍을 댄 격인데 영원선사가 찬을 지어 이를 설욕하였다.ꡑ
이 글을 옮겨 쓰면서는 한 획도 더 붙이지 않았다.ꡓ
60.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계책 / 오조 법연선사
오조 (五祖) 스님이 말하였다.
ꡒ삼승인 (三乘人) 이 삼계 (三界) 의 지옥을 벗어날 때, 소승과 (小乘果) 는 반드시 방편에 의지해야 하니 마치 땅을 파거나 벽을 뚫거나 나아가서 하늘의 창문을 통하여 벗어난다. 오직 보살이라야만 애당초 지옥에 들어갈 때 먼저 옥졸에게 의심을 사지 않도록 일체를 평상시대로 한다. 그러다가 어느 하루 서신을 보내 술 고기를 마련하여 옥졸을 찾아가 같이 먹으면서 몹시 취하게 한 다음에 그들의 의복과 행전과 두건을 빼앗아 자기 몸에 걸치고 자기의 헤진 옷을 옥졸에게 입힌다. 옥졸의 머리에 목칼을 씌워 감옥 속에 앉혀놓은 후 옥졸의 방망이를 들고서 공공연히 큰 문으로 나온다. 참선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이처럼 해야 한다ꡓ.
오조스님이 말하였다.
ꡒ세상 사람들은 마치 학질을 앓는 것 같다. 한차례는 추위에 떨고 한차례는 열에 뜨고 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생이 다 간다.ꡓ
61.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닌데 / 원오 (圜悟) 선사
범현군 (范縣君) 의 호는 적수도인 (寂困道人) 이다. 성도 (成都) 에 있을 때 불과 (佛果克勤) 선사를 찾아보니 불과선사는 그에게 ꡐ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닌데 이것이 무엇인가?ꡑ라는 화두를 참구하도록 하였다. 한마디도 할 수 없고 입을 뻥긋할 수도 없고 계속 들었으나 착수할 곳이 없자 갑자기 근심이 되어 선사에게 물었다.
ꡒ이 밖에 또다른 방편으로 저를 깨닫게 해줄 수 없습니까?ꡓ
ꡒ방편이 하나 있기는 한데, 그것은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닙니다.ꡓ
적수도인은 여기서 깨닫고는 말했다.
ꡒ원래 이처럼 가까이에 있는 것을…….ꡓ
62. 세 가지 질문 / 도솔 종열 (兜率從悅) 선사
도솔 열 (兜率從悅) 선사가 여산 서현사 (棲賢寺) 에 수좌로 있을 때 홍주 (洪州) 태수 웅백통 (態伯通) 이 용안 (龍安) 도솔사의 주지로 초청하였다. 종열선사는 참학인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였다.
ꡒ첫째, 풀[ 無明〕을 헤치고 현묘함을 참구하는 것은 오직 성품을 보려는 것인데 지금 스님들의 성품은 어디에 있는가?
둘째, 자성 (自性) 을 알면 바야흐로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데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는 어떻게 벗어나겠는가?
셋째, 생사를 해탈하면 문득 갈곳을 알겠지만 사대 육신은 흩어져 어디로 가는가?ꡓ
무진거사는 세 수의 송을 지어 이에 답하였다.
우거진 여름 숲에 소쩍새 울고
햇빛에 구름 흩어지니 우주가 맑아라
증삼 (공자 제자) 에게 증석 (증삼 부친) 을 묻지 마시오
옛부터 효자란 아비 이름을 부르지 않는 법.
陰森夏木杜鳴鳴 日破浮雲宇宙淸
莫對會參問會晳 從來孝子諱名
인간이 염라사자의 전갈 받으면
천상의 화관이 시들게 되네
얼씨구! 몸을 바꿀 좋은 시절이여
염라노인이 알지 못하도록 하오.
人間鬼使符來取 天上花冠色正萎
好箇轉身時節子 莫敎閻老等閑知
동편 마을 이씨 아내 금슬 좋은데
거치른 들녘 가을바람에 눈물 적시네
갈대 붉은 역귀 강나루 남쪽 언덕은
어느덧 장씨의 낚시터가 되었구나.
鼓合東村李大妻 西風曠野淚沾衣
碧蘆紅蓼江南岸 却作張三坐釣磯
종열선사는 도솔사의 주지로 있은 지 5년이 되던 어느 날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기고 말없이 입적하였다.
내나이 마흔여덟
성인이고 범인이고 모두 죽였네
내 영웅이라서가 아니라
용안으로 오는 길이 미끄러워서였지.
四十有八 聖凡盡殺
不是英雄 龍安路滑
63. 깨친 자가 서로 만났을 때 / 연관 (緣觀) 선사
양산 관 (梁山緣觀:조동종) 스님의 회하에 원두 (園頭:채소밭 관리 책임을 맡은 사람) 한 사람이 있었는데 선을 깨친 바 있었지만 그를 불신하는 대중이 많았다. 하루는 어느 스님이 그를 구슬러서 그의 경지를 드러내도록 하기 위하여 그 원두에게 물었다.
ꡒ어찌하여 주지에게 한두 가지 화두를 질문하여 인연을 맺지 않소?ꡓ
ꡒ나는 나아가 묻지 않겠지만 만일 내가 나선다면 그 늙은이를 선상에서 내려와 땅에 서 있도록 만들 것이다.ꡓ
그후 양산선사가 법상에 오르자 과연 나와 물었다.
ꡒ집안 도둑을 막기 어려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ꡓ
ꡒ그가 원한을 품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ꡓ
ꡒ안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ꡓ
ꡒ무생국 (無生國) 으로 내쫓아 버려라.ꡓ
ꡒ그곳은 그가 안신입명 (安身立命) 할 곳이 아닙니까?ꡓ
ꡒ죽은 물에는 용이 살지 않는다.ꡓ
ꡒ산 물 속의 용은 어떤 것입니까?ꡓ
ꡒ물결을 일으키되 파랑 (波浪) 이 일지 않는다.ꡓ
ꡒ갑자기 폭포가 쏟아지고 산악이 무너질 때는 어떻습니까?ꡓ
양산선사는 과연 법좌 위에서 달려내려와 그를 콱 잡고 말하였다.
ꡒ그대는 이 노승의 가사 자락을 적시지 마시오.ꡓ
스님 (대혜) 이 말하였다.
ꡒ깨달은 사람끼리 만났을 때는 자연히 주고 빼앗고 하는 것이 볼만함을 알아야 한다.ꡓ
64. 발심한 지 일년이 지나면 / 담당 문준선사
담당 (湛堂文準) 스님이 말하였다.
ꡒ선납자가 막 대중으로 들어와 처음 발심했을 때는 불보살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가도 1년이 지나면 부처의 허리 부근에 와서 마치 유리병처럼 매달려 있다. 애당초는 텅 비고 깨끗하다가 더러운 물이 반병쯤 들어가 흔들면 속에서 출렁출렁 소리가 난다. 그러나 갑자기 본색인 (本色人) 이 나타나 그것을 보고 말한다. `네가 가진 이 병은 본래 깨끗했으나 더러운 물에 더럽혀졌다'고. 게다가 병이 가득 차지 않아서 출렁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이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하려면 반드시 병을 기울여 물을 쏟아내고 흔들어 깨끗이 씻은 후 병에 예전처럼 가득히 깨끗한 물을 부어 놓으면 물소리가 나지 않을 것이다. 무슨 까닭에 물소리가 나지 않는가? 물이 가득 찼기 때문이다.ꡓ
65. 병에 맞게 약을 쓴다면 / 대혜스님
엄양 (嚴陽) 존자는 조주 (趙州從) 선사를 친견한 사람인데 한 스님이 그에게 물었다.
ꡒ무엇이 부처입니까?ꡓ
ꡒ흙덩이다.ꡓ
ꡒ무엇이 불법입니까?ꡓ
ꡒ지진 〔地動〕 이지.ꡓ
ꡒ무엇이 스님입니까?ꡓ
ꡒ죽 먹고 밥 먹는 사람이다.ꡓ
ꡒ무엇이 신흥원 (新興院) 의 물입니까?ꡓ
ꡒ앞에 보이는 강물이다.ꡓ
이에 대하여 스님 (대혜) 이 말하였다.
ꡒ이런 법문은 마치 아이들의 장난처럼 보이지만 이런 법문에 들어갈 수 있어야만이 안락을 얻은 자이다. 진정스님*이 고금의 화두를 들어 말한 경지는, 설두선사보다 못하지 않은데도 그의 후손들은 전수받아 익혀오는 동안 도리어 궁색한 말꾼이 되고 말았다. 그저 한결같이, 옛사람은 어떻게 했을까? 진여 (眞如慕喆) 스님은 무어라고 한 마디를 던졌으며 양기 (楊岐方會) 스님은 무어라고 한 마디 했을까를 물을 뿐이다. 너희들은 쓸모없는 숱한 일에 신경쓰고 있지만 병을 고치는 데에는 당나귀나 낙타 등에 실은 많은 약이 필요치 않다. 병에 맞게 약을 쓴다면 울타리 밑에서 주운 한줄기의 약뿌리로 병을 고칠 수 있는데, 주사 (朱砂) 니, 부자 (附子) 니, 인삼이니, 백구 (白求) 따위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ꡓ
66. 오조스님께 인정을 받은 스님 / 진정 극문선사
진정 (眞淨) 스님에 회하에 소태 (昭泰) 수좌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그가 오조스님을 찾아왔다. 오조스님은 그가 진정 (眞淨) 스님의 어록을 거론하는 것을 보고, 이 사람 (진정) 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라면서 칭찬하였다.
스님 (대혜) 이 말하였다.
ꡒ오조선사는 혜남 (慧南) 스님 회하에서 회당 (晦堂祖心) 스님과 진정스님 두 분만을 인정하였을 뿐, 그 나머지는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오조스님의 사람됨은 마치 솜으로 감싼 한자루의 칼과 같아서 부딪치기만 하면 단칼에 너의 목줄기를 찔러 죽이고 만다. 진정스님이라면 어떤가? 다리에 붙어 있으면 다리에서 너를 찔러 죽일 것이며, 손에 붙어 있으면 손에서 너를 찔러 죽일 것이며, 목에 붙어 있으면 목에서 너를 찔러 죽였을 것이다.ꡓ
67. 세 사람의 화답시
부마도위 (駙馬都尉) 이준욱 (李遵勗) 은 석문 총 (石門睛聰) 선사에게 심요 (心要) 를 얻었는데, 게송 두 수를 지어 발운사 (發運使) 인 주정사 (朱正辭) 에게 보낸 적이 있다. 당시 허식 (許式) 이 회남 (淮南) 조운관 (漕運官) 으로 있었는데 주공이 허공에게 이공의 글을 보이고 함께 화답시를 짓자고 청하였다. 이공의 송은 다음과 같다.
도를 배우려면 모름지기 무쇠인이어야 하며
마음에서 착수해야 판가름이 난다.
學道須是鐵漢 著手心頭便判
여기에 두 사람이 화답했다.
비는 나무꾼을 재촉하여 집으로 가게 하고 (주)
바람은 고기배를 강언덕으로 밀쳐 보낸다 (허)
雨催樵子還家 (走)
風送漁舟到岸 (許)
그들이 부산 원 (浮山法遠) 선사에게도 화운 (和韻) 하기를 청하자 부산스님은 이렇게 읊었다.
도를 배우려면 모름지기 무쇠인이어야 하며
마음에서 착수해야 판가름이 난다
온 몸이 비록 눈알이라 하여도
또다시 붉은 용광로에 달굼질을 해야하리
저예는 나무에 부딪혀 밀명 (密命) 을 잃고*
예양은 몸을 감추려 숯을 삼켰네*
백로의 그림자 가을 강에 떨어지고
바람은 양 언덕에 갈대꽃을 날려오네.
學道須是鐵漢 着手心頭便判
通身寥是眼睛 也待紅爐再煆
鉏麑觸樹迷封 豫讓藏身呑炭
鷺賑影落秋江 風送蘆花兩岸
여러 사람이 이 송을 보고 크게 존경하였고 이준욱은 스스로 화운하였다.
참선을 하려면 모름지기 무쇠인이어야 하고
마음에서 착수해야 판가름이 나네
곧장 무상보리로 나아가
일체의 시비를 상관하지 말라.
參禪須是鐵漢 著手心頭便判
直趣無上菩提 一切是非莫管
지금은 오직 뒤에 지은 한 수만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68. 주지하는 일 / 오조선사
불감 (佛鑑慧懃) 스님이 처음 서주 (舒州) 태평사 (太平寺) 에 주지해 달라는 청을 받고 오조스님께 하직인사를 하니 오조스님이 말하였다.
ꡒ절의 주지는 자기를 위해 네가지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는 세력을 다 부려서는 안되며, 둘째는 복을 다 누려서는 안되며, 셋째는 규율을 다 시행해서는 안되며, 넷째는 좋은 말을 다 해서는 안된다. 무엇 때문인가? 좋은 말을 모두 다 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쉽게 여기며, 규율을 다 시행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번거롭게 여길 것이다. 또 복을 다 누리면 반드시 인연이 외로워지며 세력을 다 부리면 반드시 재화가 닥치게 된다.ꡓ
불감선사는 재배를 올리고 말씀을 가슴깊이 되새기며 물러났다. 그후 불감선사가 영원 (靈源惟淸) 선사에게 하직인사를 하자 영원선사가 말하였다.
ꡒ주지란 마땅히 주장자, 보따리, 삿갓을 방장실 벽위에 걸어놓았다가 납자처럼 가볍게 떠나는 것이 좋다.ꡓ
69. 남을 비방하지 않는 것이 좋은 일 / 원오선사
서사천 (徐師川) 이 불과 (佛果圜悟) 선사와 함께 서기실 〔書記寮〕 에 갔다가 불과선사의 머리 꼭대기를 보고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ꡒ이 늙은이는 발꿈치가 땅에 닿지 않았군.ꡓ
ꡒ항아리 속의 자라가 달아날 수 있을까?ꡓ
ꡒ좋아! 늙은이의 발꿈치가 땅에 닿았구나.ꡓ
ꡒ남을 비방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ꡓ
70. 사주대성의 성씨 / 풍제천 (馮濟川)
오룡장로 (烏龍長老) 가 풍제천 (憑濟川:?~1153) 을 방문하여 이야기를 나누던 차에 풍제천이 물었다.
ꡒ예전에 한 관원이 사주대성 (泗州大聖) 에게 대사는 성씨가 무엇입니까 〔姓何〕 하니, 하성 (何姓) 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어느 나라에 사십니까 〔住何國〕 하니, 하나라에 산다 〔住何國〕 고 하였다는데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ꡓ
장로가 대답하였다.
ꡒ대성 (大聖) 은 본래 어느 성 〔何姓〕 도 아니고 어느 나라 〔何國〕 에도 살지 않지만 인연따라 가르치고 제도한 것 뿐입니다.ꡓ
풍제천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ꡒ대성은 결정코 성이 하씨며 하국에 산다고 하였습니다.ꡓ
이처럼 여러 차례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마침내 스님 (대혜) 에게 서신을 보내 이 공안을 결단해 달라고 하자 스님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ꡒ나에게 몽둥이 육십대가 있는데 삼십대는 대성을 칠 것이니 이는 그가 성을 하씨라고 한 것이 틀렸기 때문이다. 삼십대는 풍제천을 칠 것이니 이는 그가 대성의 성을 결정코 하씨라고 한 것이 틀렸기 때문이다. 오룡장로에게는 스스로 알아서 물러나게 하노라.ꡓ*
71. 재물시주 법시주 / 무진거사
무진거사가 그의 마을 집에 있을 무렵, 흉년이 들어 도사 (道士) 무리들이 그의 집을 찾아와 식량 보시를 청하였다. 무진거사는 각자에게 금강경을 외우도록 하여 일부분만 외운 자에게는 쌀 한말을 주고 전체를 외운 자에게는 석섬 두말의 쌀을 시주하여 반야인연 (般若因緣) 을 맺었다. 이 때문에 재물시주와 법시주 두 가지를 했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스님들을 만날 때면 언제나 「노자 (老子)」를 읽게 하여 그들 서로가 서로를 알게 하였다. 여기에서 가르침을 보호하려는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72. 금강경을 외우던 노파 / 대혜선사
요등관 (等觀) 이 담주 (潭州) 선화현 (善花縣) 에 지사로 있을 때였다. 한 노파가 매일 저자거리에서 금강경을 외우며 걸식을 하다가 밤이 되면 산기슭으로 돌아가 자는데, 갑자기 며칠 동안 구걸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더니만 갈가마귀 떼들이 노파가 머문 곳에 모여들어 시끄럽게 울어 댔다. 사람을 보내 살펴보라 하니 그 노파가 「금강경」을 품에 안고 바위 옆에서 죽었는데 갈가마귀 떼가 흙을 물어다가 노파를 덮어주더라는 것이었다.
스님이 법상에 올라 이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때 요지사도 그 법회에 참석했었다.
73. 해골에 붙인 게송 / 대혜선사
스님이 하루는 명월암 (明月庵) 에 갔다가 벽에 걸려있는 해골 그림을 보았는데 거기에는 풍제천 (馮濟川) 의 게송이 있었다.
시신은 여기 있는데
그 사람 어디메 있나
알겠노라 신령한 그 하나는
살가죽에 있지 않음을.
屍在這裏 其人何在
乃知一靈 不居皮袋
스님은 이를 수긍하지 않고 게송 하나를 지었다.
이 해골이
바로 그 사람
신령한 그 하나가 가죽이며
살가죽이 신령한 그 하나라네.
卽此形骸 便是其人
一靈皮袋 皮袋一靈
74. 장무진거사의 약전 (略傳)
승상 장무진 (張無盡) 은 19세에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가는 도중에 상씨 (相氏) 성을 가진 사람 집에 묵게 되었다. 상씨 집에서는 전날 밤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내일 정승을 맞으라고 일러 주기에 첫새벽부터 방을 깨끗이 치워두고 기다렸다. 해질녘이 되어서야 누런 도복 (道服) 을 입은 가난한 선비가 찾아왔는데 그가 곧 장무진이었다.
상씨는 예의를 갖추어 맞이한 후 그에게 물었다.
ꡒ서생 〔秀才〕 은 어디로 가는 길이오?ꡓ
장무진이 사실대로 말하자 상씨가 말하였다.
ꡒ서생이 아직 부인을 맞지 않았다면 내 딸을 그대에게 보내 집청소하는 일이나 받들게 하겠소.ꡓ
무진이 사양하였으나 상씨는 이번 걸음에 급제를 하지 못한다 해도 이 약속을 어기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그후 과연 급제하여 그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처음 주부 (主簿:문서․장부 담당관) 로 임명되었는데 사찰에 들어가 잘 정돈된 장경과 범협 (梵夾:작은 불교 문서들) 을 보고, 우리 공자의 가르침이 오랑캐의 책만큼도 사람들의 숭앙을 받지 못하는구나 하고 불쾌히 여겼다.
밤새껏 서원 (書院) 에 앉아 먹을 갈고 붓을 빨면서 종이 위에 기대어 긴 한숨을 쉬며 야반 삼경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자 부인 상씨가 남편을 부르며 말하였다.
ꡒ나리께서는 밤이 깊은데 어찌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십니까?ꡓ
무진이 조금 전에 느낀 것을 말하고서 ꡐ무불론 (無佛論)ꡑ을 지으려 한다고 하니 상씨가 응수하였다.
ꡒ이미 부처가 없다 〔無佛〕 해놓고 무슨 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ꡐ유불론 (有佛論) ꡑ을 지어야 옳겠습니다.ꡒ
무진은 그 말을 의아해 하다가 결국은 그만 두었다. 그가 동료의 집을 방문했을 때 불감 (佛鑑) 앞에 놓인 경전을 보고서 무슨 책이냐고 물으니「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脛) 」이라고 하였다. 그는 손에 닿는대로 책을 펼쳐 보다가 ꡒ이 병은 지대 (地大) 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대를 떠난 것도 아니다ꡓ는 구절에서 이렇게 감탄하였다.
ꡒ오랑캐의 말도 이럴 수 있는가!ꡓ
그리고는 이 책이 몇 권이나 되느냐고 물으니 동료는 세 권인데 빌려가도 좋다고 하였다. 집에 돌아와 그 책을 읽고 있는데 부인 상씨가 물었다.
ꡒ무슨 책을 보십니까?ꡓ
ꡒ유마힐이 설법한 경이요.ꡓ
ꡒ이 경을 숙독한 후 ꡐ무불론 (無佛論)ꡑ을 지으십시요.ꡒ
무진은 두려워하면서 부인의 말을 남다르게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불법에 깊은 신심이 생겼고 조사의 도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후일 강서 (江西) 조운사 (曹運使) 가 되어 조사들의 법석을 두루 참방하면서 맨 먼저 동림사의 조각 총 (照覺常總:昭覺常總) 선사를 찾아뵈었다. 상총선사는 그의 경지를 따져보아 자기와 부합되자 마침내 그를 인가하면서 말하였다.
ꡒ나에게 법을 얻은 제자가 하나 있는데 옥계사 (玉溪寺) 주지 자고경 (慈古鏡:紹慈) 선사이다. 그도 함께 이야기할 만한 사람이다.ꡓ
그후 무진은 다시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다스리다가 분령 (分寧) 지방을 지나게 되었다. 그곳의 여러 선사들이 마중나왔으나 무진은 그곳에 도착하자 먼저 옥계사의 소자 (紹慈) 선사에게 예의를 표하고 그 다음에 여러 절의 선사와 인사한 뒤 맨 마지막으로 도솔 종열 (兜率從悅) 선사를 방문하였다.
종열선사는 왜소한 사람이었으나 장무진은 일찍이 공덕장 (德莊) 에게 말을 들었으므로 그를 만나자 곧 이렇게 말하였다.
ꡒ스님께서는 문장에 능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ꡓ
종열선사는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ꡒ조운사는 한쪽 눈 〔一隻眼〕 을 잃었소. 나는 임제 (臨濟) 의 9대손인데 조운사와 마주 앉아 문장을 논한다는 것은 마치 조운사가 나와 마주앉아 선을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ꡓ
그러나 장무진이 그의 말을 수긍하지 않고 어거지로 손가락을 꼽으며, 이렇게 해서 9대가 되는거냐고 하면서 또다시 물었다.
ꡒ옥계사는 여기에서 얼마나 됩니까?ꡓ
ꡒ30리.ꡓ
ꡒ도솔사는요?ꡓ
종열선사는 소리를 지르면서 5리 된다고 하였다.
무진은 이날 밤에 도솔사에 갔다. 그 전날 밤 종열선사는 하늘로 솟아오르는 해를 손에 움켜잡는 꿈을 꾸었는데 이 이야기를 수좌에게 전하면서 말하였다.
ꡒ태양 〔日輪〕 이란 움직이며 돈다는 뜻이다. 듣자하니 장 (張) 조운사가 머지않아 이곳을 지나간다 하니 내가 그를 만나 큰 송곳으로 찔러 줄 것이다. 만일 그가 수긍하여 머리를 돌린다 〔回顧〕면 우리 불문에 다행한 일이 될 것이다.ꡓ
수좌가 말하였다.
ꡒ요즘의 벼슬아치들이란 떠받들어 주는 데에 익숙한 사람들인데 혹시 잘못되어 엉뚱한 일이 생겨날까 두렵습니다.ꡓ
ꡒ골치거리를 우리 절에서 물리치기만 하면 되니, 별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ꡓ
무진거사가 종열선사와 이야기하던 차에 동림사 상총선사를 칭찬하였으나 종열선사가 그를 수긍하지 않자 절 뒤의 의폭헌 (擬瀑軒) 에 시를 써 붙였는데 내용은 대략 이렇다.
여산에서 낙처 (落處) 를 찾지 않고
코끼리왕의 코가 하늘까지 닿았네.
不向山尋落處 象王鼻孔漫遼天
이 시의 뜻은 동림선사를 인정하지 않음을 비난한 것이다. 무진이 슬슬 종문의 일에 대하여 말을 꺼내기 시작하자 종열선사가 말하였다.
ꡒ오늘 조운사를 모시고 인사하였습니다. 피곤하실 터이니 편히 주무십시오.ꡓ
밤이 깊어지자 종열선사는 다시 일어나 무진거사를 찾아와 종문의 일을 논하였다. 향을 사르고 시방제불을 청하여 증명해주십사 하고는 말하였다.
ꡒ동림스님이 이미 조운사를 인가했다고 하는데 조운사께서는 불조의 가르침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나는 곳이 있습니까?ꡓ
ꡒ있소.ꡓ
ꡒ무슨 말에 의심이 납니까?ꡓ
ꡒ향엄 (香嚴:?~898) 의 독각송 (獨脚頌) *과 덕산 (德山) 의 탁발 (托鉢) 인연*입니다.ꡓ
ꡒ여기에 의심이 있다면 그 나머지에도 어찌 의심이 없겠소. 말후구 (末後句) 란 있는 것인지 없는지나 말해보시오.ꡓ
ꡒ있소.ꡓ
종열선사는 크게 웃고 방장실로 돌아와 문을 닫아버렸다.
무진은 밤새껏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오경 (五更) 에 침상에서 내려오면서 책상을 걷어차 버렸는데 갑자기 느낀 바 있어 송을 지었다.
북도 치지 않고 종도 치지 않았는데 발우 들고 돌아오니
암두 (?~886) 스님 한 말씀 우뢰같았네
과연 3년밖에 못 살았으니
이는 그에게서 수기받은 것이 아니겠나.
鼓寂鍾沈托鉢回 巖頭一拶語如雷
果然祇得三年活 莫是遭他受記來
드디어 방장실의 문을 두들기며 말하였다.
ꡒ내가 도적을 잡았습니다!ꡓ
종열스님이 말했다.
ꡒ장물은 어디에 있느냐?ꡓ
무진이 말을 못하자 종열선사가 말하였다.
ꡒ조운사는 가시오. 내일 다시 봅시다.ꡓ
그 이튿날 무진이 간밤에 지은 송을 종열선사에게 바치자 선사는 무진에게 말하였다.
ꡒ참선을 하여도 명근 (命根) 이 끊어지지 않은 채 말을 따라 이해를 내면 그렇게 말하게 되는 법이다. 깊이 깨치기는 했지만 지극히 미세한 곳에 이르러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울 안으로 떨어지게 한다.ꡓ
종열선사는 그 후 송을 지어 무진의 깨침을 증명해 주었다.
한가히 걷는 발길
걸음걸음 모두 그럴 뿐
비록 성색 속에 살아도
어찌 ꡐ유무ꡑ에 얽매이겠나
한마음은 차이가 없고
만법 또한 다르지 않으니
바탕과 쓰임을 나누지 말고
곱고 거침을 가리지 말라
막힘없이 기변에 응하고
얽매임 없이 사물에 응하니
옳다, 그르다 하는 생각 다하여
범인, 성인이 구분 없네
누가 얻고 누가 잃었으며
무엇을 가까이 하고 무엇을 멀리하랴
머리 뽑아 꼬리 만들고
가득찬 것을 비었다고 하네
마구니 경계에서 몸을 뒤집고
삿된 길에서 발길을 바꾸되
역순이 아님을 분명히 알면
공부를 할 것이 없으리.
等閑行處 步步皆如
寥居聲色 寧滯有無
一心靡異 萬法非殊
休分體用 莫擇精麤
臨機不礙 應物不拘
是非情盡 凡聖皆除
誰得誰失 何親何疎
拈頭作尾 指實爲虛
凶身魔界 轉脚邪塗
了非逆順 不鮎工夫
무진거사는 종열선사를 맞이하여 건창 (建昌) 에 이르는 동안 낱낱이 살펴보고 게송 열 수를 지어 그 일을 서술하였는데 종열선사도 열 수의 송을 지어 답하였다. 때는 원우 (元祐) 8년 (1093) 8월이었다.
75. 서로 모르지만 닮은 모습 / 석상 임 (石霜琳) 선사
협산 인 (夾山璘) 선사와 석상 임 (石霜琳) 선사는 오랫동안 불일 재 (佛日智才) 선사에게서 공부하였다. 공부를 마친 후 그들은 함께 상강 (上江)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황룡사에 이르러 혜남선사의 상당 소참법문에 동참하였다. 임선사는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입실 (入室) 하기를 바라자 인선사는 화를 내며 한대 때린 후 떠나버렸다.
임선사는 뒷날 크게 깨쳐 기봉이 뛰어나 설법을 했다하면 진정선사와 닮은 점이 있었으나 진정선사와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석상사의 주지로 있을 때 송을 지어 진정선사에게 전하도록 스님을 보냈는데 그 송의 뒷구절은 다음과 같다.
분주떠는 사해 납자들이여
신풍 (新豊) 에 오지 않는다면 아마도 멍청이겠지.
憧憧四海參禪者 不到新豊也是癡
76. 경에 주석을 붙이는 일 / 이통현 (李通玄)
도생 (道生: ?~434) ․승조 (僧肇:383~414) ․도융 (道融) ․승예 (僧叡) 는 구마라즙 (鳩摩羅什:344~413) 의 훌륭한 제자들로서 사의보살 (四依菩薩) 이라 불리웠다. 그러나 일찍이 구마라십과 함께 「유마경 (維摩脛)」에 주석을 붙이다가 불가사의품 (不可思議品) 에 이르러 모두 붓을 놓고 말았다. 아마도 이 경계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었기에 한 마디도 붙일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이장자 (李長者:通玄) 의 화엄론 (華嚴論) 은 화엄볍계에 들어가서 문장을 해석했기에 마치 해와 별처럼 명백하고 얼음 녹듯 의심이 없다. 몸소 확연한 인연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겠는가?
77. 대혜스님이 찾아다닌 여러 선지식
선주 (宣州) 명적 정 (明寂紹) 선사는 낭야 (揶慧覺) ․설두 (雪竇重顯:운문종) ․천의 (天衣義懷:운문종) 등 선배 큰스님들을 두루 찾아뵙고 시봉하면서 법문을 청하였다. 세상에 나와서는 흥교 탄 (興敎坦) 스님의 법제자가 되었는데 탄선사도 낭야선사의 법제자이다. 후일 태평주 서죽사 (瑞竹寺) 로 옮겨 서당 (西堂) 에 거처하였는데, 스님 (대혜) 이 처음 행각할 때 그를 찾아가 설두선사의 「염고 (古)」․「송고 (頌古)」에 대하여 가르침을 청하였다. 소정선사는 스님에게 화두를 들게 하고, 모든 것을 스스로 보고 스스로 말하도록 하였을 뿐 그의 말은 조금치도 빌려주지 않았다. 스님이 옛 성인들의 미묘한 종지를 깨치자 소정선사는 대중 앞에서 스님은 부처님이 다시 온 사람이라고 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스님은 그 후 다시 영주 (州) 대양사 (大陽寺) 에 가서 원 (元) 수좌, 동산 미 (洞山道微) 스님, 견 (堅) 수좌 등을 참방하였는데, 도미스님은 부용 (芙容道楷:조동종) 선사 회중에 수좌로 있었으며 견주좌는 그곳 시자로 10여 년을 지낸 스님이었다. 스님은 세 분 아래서 오랫동안 지내면서 조동 (曹洞) 의 종지를 모두 깨쳤다. 그곳에서는 법을 주고 받을 때, 모두가 팔뚝에 향을 피워 함부로 법통을 전수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하였는데, 스님이 곰곰히 생각해 보니 선 (禪) 에 전수할 법이 있다면 불조가 스스로 깨치셨다는 법은 무엇인가 하였다. 그래서 그곳을 떠나 담당선사에게 귀의하였다.
어느 날 담당선사가 스님에게 물었다.
ꡒ너의 코는 어째서 오늘 반쪽이 없느냐?ꡓ
ꡒ보봉 (寶峰) 문하에 있습니다.ꡓ
ꡒ엉터리 참선꾼이군!ꡓ
또 어느 날 시왕전 (十王殿) 상을 단장하는 곳에서 물었다.
ꡒ이 관리의 성씨는 무엇인가?ꡓ
ꡒ양씨 (梁氏) 입니다.ꡓ
이 말에 담당선사는 손으로 자기의 머리를 매만지면서 말했다.
ꡒ양씨인데 복두 (幞頭) 가 적은 것을 어찌할꼬?ꡓ
ꡒ비록 복두는 없지만 코는 비슷합니다.ꡓ
ꡒ엉터리 참선꾼이군!ꡓ
한번은 경을 보고 있는데 물었다.
ꡒ무슨 경을 보느냐?ꡓ
ꡒ「금강경」입니다.ꡓ
ꡒ「금강경」에서는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운거산은 높고 보봉산은 낮은가?ꡓ
ꡒ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기 때문입니다.ꡓ
ꡒ너는 좌주 (座主:강사) 의 심부름꾼이 되겠구나.ꡓ
어느 날 또 물었다.
ꡒ고 (曠) 상좌야! 나의 이 선을 너는 한번에 이해하였다. 그래서 너에게 설법을 하라면 설법을 할 수 있고, 「염고 (古)」․「송고 (頌古)」와 소참 (小參) ․보설 (普說) 법문을 하라면 그것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못하는 일이 있는데 너는 알겠느냐?ꡓ
ꡒ무슨 일입니까?ꡓ
ꡒ네가 한 가지 알지 못한 게 있지. 네가 이 한 가지를 알지 못하니, 내가 방장실에서 너와 이야기할 때는 선이 있다가도 나서자마자 없어져버리며, 정신이 맑아서 사랑할 때는 선이 있다가도 잠이 들자마자 없어져버린다. 만일 이렇다면 어떻게 생사와 대적할 수 있겠는가?ꡓ
ꡒ바로 그것이 제가 의심하는 점입니다.ꡓ
그후 담당선사의 병세가 위독하자 스님이 물었다.
ꡒ스님께서 만일 이 병환에서 일어나지 못한다면 저를 누구에게 부탁하여 그 큰 일을 끝마치게 하시렵니까?ꡓ
ꡒ극근이라는 스님이 있는데 나도 그를 알지 못한다. 네가 만일 그를 만나면 반드시 도롤 이룰 수 있을 것이지만 끝내 그를 만나지 못하면 수행을 계속하다가 후세에 다시 태어나 참선을 하도록 하라.ꡓ
78. 뜻을 굳게 세우다 / 보령 인용 (保寧仁勇) 선사
보령 용 (保寧仁勇) 선사는 사명 (四明) 땅 사람이다. 처음 교학을 하다가 옷을 바꿔 입고 설두 중현 (雪竇重縣:운문종) 선사에게 귀의하여 도를 물으니, 설두선사는 그를 ꡐ꽤재재한 좌주 (座主) ꡑ라고 하였다. 인용선사는 뜻하지 않게 당의 (堂儀:승당에서 의전보는 소임) 를 맡았는데 임기가 다 되자마자 자기 이름패 〔單子〕 를 뽑아들고 설두산을 향하여 예배하고 맹서하였다.
ꡒ이생에서 행각 참선하여 나의 도가 설두스님보다 나아지지 못한다면 결코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ꡓ
그후 인용선사는 장사 (長沙) 운개사에 이르러 양기 회 (楊岐方會) 선사를 참방하여 백운 수단 (白雲 守端:1025~1072) 선사와 사형사제가 되었다. 후일 세상에 나와 보령사의 주지로 있었는데 인용선사의 도는 총림에 퍼져 그의 말처럼 되었다. 참으로 사람이 뜻을 굳게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79. 황룡사 전 (前) 주지 / 혜남 (慧南) 스님
황룡사 (黃龍寺) 의 전 주지가 선원의 집채들을 새로 지으면서 하나하나 총림의 체제와 규격에 맞게하니 어떤 사람이 그를 비웃었다.
ꡒ스님은 선을 모르면서 무엇에 쓰려고 그러십니까?ꡓ
ꡒ선을 설법할 사람이 스스로 오게 될 것이다.ꡓ
선원이 다 되자 마침내 적취사의 혜남 (慧南) 선사를 주지로 청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그러나 뒷날 혜남선사가 왔을 때는 황룡사 전 주지는 입적한 뒤였다.
혜남선사가 어느 날 문득 꿈을 꾸니 귀신이 나타나, 가서 탑을 지키게 해달라고 하였다. 혜남선사는 이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는데 어느 날 방장실에 앉아 있으려니 또다시 지난 날 밤 꿈에 나타난 귀신이 찾아와 탑을 지키고 싶다고 하였다. 혜남선사가 그 까닭을 묻자, 교대할 사람이 오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얼마후 그의 말대로 소상 (塑像) 을 만드는 사람이 왔다. 이에 혜남선사는 토지신을 만들게 하고 옛 토지신을 황룡사 전 주지의 탑을 지키게 하였다.
80. 시끄러운 저자에서 앉은 채 입적하다 / 태류 (太瘤) 스님
태류 (太瘤) 는 촉 (蜀) 땅의 스님이다. 대중 속에 있으면서 항상 불법이 뒤섞여 다른 견해 〔異見〕 들이 일어나는 것을 개탄해 오다가, 내가 참선하여 진정한 지견을 얻게되면 구업 (口業) 을 아끼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발원하여 마조 (馬祖道一) 선사의 탑에 여러 해 동안 끊임없이 예배를 드려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탑에서 흰 빛줄기가 뻗어나오는 감응을 얻고 깨달았다.
그후 총림에서 가는 곳마다 노스님을 시험해오다가 설두산을 지나면서, ꡒ이 늙은이는 입 속에 침이 질질 흐르고 있구나ꡓ 하였다. 설두선사는 이 말을 듣고 마음이 편치 못하였다. 태류스님이 설두선사를 만나자 설두선사가 그에게 물었다.
ꡒ그대는 나를 인정하지 않느냐?ꡓ
ꡒ늙은이가 생각대로 입 속에 침이 질질 흐르고 있군!ꡓ
이어 좌복을 집어 던지고 곧바로 나와 버렸다. 그곳 직세승 (直歲僧:선원의 수리 및 중창 등 각종 공사를 맡아보는 소임) 이 그를 달갑게 생각지 않아 사람을 보내 도중에서 태류스님을 때려 한쪽다리를 부러뜨려 버렸다. 태류스님은 그것이 설두 늙은이가 시켜서 한 짓일거라며 후일 반드시 그의 한쪽다리가 부러져 내게 빚을 갚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뒤에 그의 말대로 되었다. 태류스님은 그뒤 서울에 가서 저자거리에서 제멋대로 하고 다녔다. 한 벼슬아치가 자기 집으로 모셔 공양하겠다고 청하자 여러번 사양하였으나 그는 굳이 머물도록 하면서 더욱 스님을 존경하였다. 항상 시첩 (侍妾) 을 시켜 스님 앞에서 공양을 받들게 하였는데 어느 날 우연히 그 벼슬아치가 그의 방에 찾아오자 태류스님은 일부러 첩을 농락하였다. 벼슬아치는 이 일을 계기로 예우를 바꿨고 스님은 마침내 그 집에서 떠나올 수 있었다. 그후 며칠 있다가 시끄러운 저자거리에서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81. 예언대로 받은 업보 / 평 (平) 시자
대양사 (大陽寺) 의 평 (平) 시자는 여러해 동안 명안 (明安:警玄, 조동종) 선사의 선실에서 공부하여 그의 종지를 다 터득하고 생사문제를 자기 일로 삼았으나 동료를 모함하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였다. 낭야 광조 (廣照) 선사와 공안 원감 (公安圓鑑:浮山法遠) 선사가 대중승으로 있을 때 분양 (陽善昭:임제종) 선사가 명안선사의 종지를 탐색해보기 위하여 두 선사를 대양사에 머물도록 하였다. 명안선사는 평시자에게 은밀히 종지를 전수하면서, 동상종 (洞上宗:曹洞宗) 을 일으켜 멀지 않아 깨달은 것이라 하였다.
두 선사는 분양선사에게 말하였다.
ꡒ평시자라는 사람이 있는데 명안선사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가리키면서 ꡐ평시자는 이곳이 좋지 않다ꡑ고 하였습니다. 또한 엄지손가락을 구부려 가운데 손가락과 교차시켜 세 갈래로 보여주면서, 평시자가 이곳을 떠난다 하여도 여기에서 죽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ꡓ
명안선사는 입적하면서 ꡐ전신을 묻어도 10년은 무난할 것이며 대양사를 위하여 열심히 이바지할 것이다ꡑ라고 유언하였다. 유해를 탑에 넣을 때 문도들은 평시자가 선사에게 불리한 짓을 할까봐 두려워 하였다. 도위 (都尉) 이화문 (李和文:遵) 이 시주한 금은 따위의 기물 (器物) 로 탑명을 새겼는데 과연 그것이 없어졌다.
그후 평시자가 대양사의 주지가 되었을 때, 갑자기 스승의 탑이 풍수지리에 좋지 못하니 시신을 꺼내 화장해야겠다고 하였다. 산중의 노승들이 모두 간곡히 만류했으나 평시자는 지신에게 방해되는 일이 있다며 결국 탑을 파헤쳤다. 선사의 모습은 마치 산 사람같았으며 장작불이 모두 탄 뒤에도 그대로였다. 대중은 모두 놀랐으나 평시자는 마침내 도끼로 뇌를 부수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지피자 잠깐 사이에 재가 되고 말았다.
대중이 이 사실을 관아에 알렸고, 평시자는 탑안의 물건을 절취하고 은사에게 불효하였다는 죄에 걸려 환속 당하였다. 평시자는 자칭 황수재 (黃秀才) 라 하고 낭야선사를 찾아가니 낭야선사가 말하였다.
ꡒ예전의 평시자가 지금은 황수재가 되었구나. 내 대양사에 있을 때 네가 하는 짓을 다 보았다.ꡓ
그리고는 드디어 받아들이지 않자 또다시 공안선사를 찾아갔는데 공안선사 역시 돌아보지도 않았다. 평시자는 의탁할 곳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뒷날 세갈래 갈림길 입구에서 범을 만나 잡혀 먹혔다. 그는 결국 대양선사가 손가락을 굽혀 보여준 그 예언을 면하지 못한 것이다. 슬픈 일이다.
82. 게송 천 수를 지었으나 / 태화 (太和) 산주
아미산 (峨山) 의 백장로 (白長老) 가 한번은 이렇게 말하였다.
ꡒ고향사람인 설두스님이 지은 백여 수의 송은 문장이나 뜻이 남보다 뛰어나지 않는데도 어찌하여 부질없이 세상에 큰 명성을 얻었을까.ꡓ
그리고는 드디어 게송 천수를 지어 열곱절 많게 하고 스스로 이를 엮어 문집을 만들었다. 그는 후일 자신의 명성이 설두선사를 압도하리라고 잘못 생각하고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감상해주기를 요구하였다.
당시 태화산주 (太和山主) 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그는 당대에 도 있다는 큰스님을 두루 친견하고 법창 우 (法昌遇:1005~1081) 선사에게 법을 얻은 분이다. 그는 세상에 나와 태화사에 주지를 하면서 산주 (山主) 라 불릴 만큼 그 기세가 여러 선림을 압도하였고, 함부로 인가해주지 않았다. 백장로가 자기 송을 가지고 태화산주를 찾아가 귀감이 될 만한 한마디 말을 얻어서 후학들에게 신임을 받으려 하였으나 태화산주는 그 송을 보고서 침을 뱉고 말하였다.
ꡒ이 송은 마치 겨드랑이에서 노린내나는 환자가 바람머리에 서 있는 것과 같아서 냄새를 맡아줄 수가 없다.ꡓ
그 후로 백장로는 다시는 남에게 내보이지 않았다.
후일 황노직 (黃魯直:정견) 은 그 말을 듣고 성도 (成都) 대자사 (大慈寺) 에 가서 큰 글씨로 벽 위에다 시 한수를 썼다.
아미산 백장로
게송 천 수를 지어 문집을 내었더니
태화산주 말씀이 걸작이라
겨드랑이 노린내나는 환자가 바람머리에 서 있는 것 같다나.
峨嵋白長老 千頌自成集
大83. 나고 죽는 인연을 자기 뜻대로 하다 / 귀종 가선 (歸宗可宣) 선사
귀종 선 (歸宗可宣) 선사는 한주 (漢州) 사람이다. 낭야 광조 (廣照) 선사의 법제자인데 곽공보 (郭功甫:郭祥正) 와는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어느 날 갑자기 남강 (南康) 태수가 무슨 일로 그를 문책하니 선선사는 사람을 보내 곽공보에게 서신을 전하면서 서신 전하는 자에게 현령에게는 보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당시 곽공보는 남창 (南昌) 의 태위 (太尉) 로 있었는데,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ꡒ나에게는 다하지 못한 세상 인연이 6년 더 남아있는데 오늘날 이 핍박을 견딜 수 없어 그대의 집에 의탁하여 태어나고자 하니 그대가 살펴주기를 바라오.ꡓ
선선사는 마침내 열반하였다.
곽공보는 편지를 받고 기쁨과 놀라움으로 가슴이 벅찼다. 그날밤 그의 아내는 꿈속에서 선선사가 어렴풋이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 자기도 모르게 ꡒ이 곳은 스님이 오실 곳이 아닙니다ꡓ 하고 소리쳤다. 곽공보가 그 까닭을 몰으니 아내가 꿈이야기를 하자 그는 등불을 밝히고 선선사의 서신을 내보였다. 과연 임신을 하여 아기를 낳자 그의 이름을 선노 (宣老) 라 하였다. 겨우 돌이 되자 기억하고 묻는 것이 옛과 다름 없었다.
세 살이 되던 해 백운 단 (白雲守端) 스님이 그의 집 앞을 지나간 일이 있었다. 곽공보가 스님의 이름을 부르며 쫓아나가 만나자 멀리서 그를 바라보고 사질 (師姪) 이라고 불렀다. 백운스님이 그에게 물었다.
ꡒ스님과 헤어진 지 몇 해요?ꡓ
ꡒ4년이요.ꡓ
ꡒ어디서 헤어졌소?ꡓ
ꡒ백련장 (白蓮莊) 에서요.ꡓ
ꡒ무엇으로 증명하겠소?ꡓ
ꡒ아버지 어머니가 내일의 재에 스님을 초청할 것이요.ꡓ
갑자기 문밖에 수레를 끌고가는 소리가 들리자 백운스님이 물었다.
ꡒ문밖에 무슨 소리요?ꡓ
선노가 수레 밀치는 시늉을 하자 다시 물었다.
ꡒ지나간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ꡓ
ꡒ평지에 한줄의 도장이 파이지!ꡓ
그는 여섯살이 되자마자 아무런 병도 없이 죽었다.
84. 환생한 자를 꾸짖음 / 원조 종본 (圓照宗本) 선사
해인 신 (海印超信) 스님은 낭야선사의 법제자로 계부 (桂府) 사람이다. 소주 (蘇州) 정혜사 (定慧寺) 주지를 지냈으며 80여세를 살았다. 평소에 방어사 (防禦使) 주공 (朱公) 의 집에서 공양청을 받아 여러 차례 그의 집에 갔는데 어느 날 주공이 물었다.
ꡒ스님께서는 후생에 저의 집안에 오셔서 태어나시겠습니까?ꡓ
이에 스님은 미소를 지으며 승낙하였다. 절에 돌아가자 병을 얻어 며칠만에 죽었는데 그가 죽던 날 주씨 집에 계집아이가 하나 태어났다.
원조 본 (圓照宗本:운문종) 선사가 당시 서광사 (瑞光寺) 에 주지로 있었는데 이야기를 듣고 그 집을 찾아갔다. 태어난 지 한달 된 아기를 안고 나왔는데 원조선사를 보자 곧 웃으니 원조선사가 고함을 쳤다.
ꡒ해인아! 너는 틀렸다!ꡓ
계집아이는 몇 번 울고는 죽어버렸다.
85. 글 따라 해석할 뿐 도안이 없는 장로 / 지복 (知福) 장로
장로사 (長蘆寺) 지복 (智福) 장로는 도안이 밝지 못한 사람이었다. 항상 시주한 것을 가지고 상강사 (上江寺) 의 스님들에게 음식 공양을 하였는데 원통 수 (圓通 法秀) 선사가 이 이야기를 듣고 그를 찾아가 사실을 시험해 보려하였다. 마침 그곳에 도착했을 때 지복장로의 상당법문을 듣게 되었다.
ꡒ거치른 밭에서 풀과 곡식을 가려내지 못하면 죽어야 할 멍청이며 손 닿는대로 풀을 뽑아낸다면 그래도 조금은 나은 편이다.ꡓ
말을 마치고 곧장 법좌에서 내려오니 법수선사는 깜짝 놀라 ꡒ이처럼 선을 설법하는데 그 누가 그에게 선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가ꡓ 하였다.
그리고는 제방에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말일 뿐이라 생각하고 몸소 방장실을 찾아가 예를 갖추어 절을 하고 앞에서 본 이야기를 자세히 하였다. 이어 아까 했던 상당법문을 다시 청하자 지복장로는 글에 따라서 그 뜻을 해석해 주었다. 이에 법수선사가 ꡒ이러니까 제방에서 그대가 선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말이 거짓이 아니다ꡓ 라고 하였다. 지복장로가 이를 수긍하지 않자 법수선사가 말을 이었다.
ꡒ종을 울려 대중을 모아 놓고 법수상좌가 여기에서 스님과 겨뤄본다고 말해주시오.ꡓ
이 말에 지복장로는 그만두고 떠나가 버렸다.
86. 어제는 옳았지만 오늘은 틀렸다 / 지각 (智覺) 스님
화주 (和州) 의 개성 (開聖) 각 (覺) 노스님은 처음 장로사 (長蘆寺) 부철각 (夫鐵脚:운문종) 선사에게 공부하였으나 오래도록 깨친 바가 없었다. 그래서 동산 오조 (五祖法演) 선사의 법을 듣고 그 회하로 바삐 달려갔는데 하루는 방장실에서 그에게 물었다.
ꡒ석가 미륵도 오히려 그 사람의 노예라 하는데, 말해 보아라. 그가 누구냐?ꡓ
ꡒ호장삼 흑이사 (胡張三黑李四:아무개, 모든 사람) 입니다.ꡓ
오조스님은 그 말을 수긍하였다. 당시 원오 (圜悟) 선사가 그곳 수좌로 있었는데 오조스님이 이 말을 일러주자 이렇게 말하였다.
ꡒ좋기는 좋지만 실상을 잃어버릴까 두렵습니다. 그냥 놓쳐버려서는 안되니 다시 그 말에서 찾아보도록 하시오.ꡓ
이튿날 각스님이 입실하자 어제와 같은 질문을 하니 ꡒ어제 스님께 모두 말씀드렸습니다ꡓ 하였다.
ꡒ무엇이라 하였소?ꡓ
ꡒ호장삼 흑이사라고 하였습니다.ꡓ
ꡒ아니지, 아니야.ꡓ
ꡒ스님께서는 어찌하여 어제는 옳다 하였습니까?ꡓ
ꡒ어제는 옳았지만 오늘은 틀렸네.ꡓ
각스님은 이 말끝에 크게 깨쳤다. 후일 각스님은 세상에 나아가 개성사의 주지가 되었는데 장로사 (長蘆寺) 부 (夫) 선사의 법석이 크게 성황인 것을 보고서 마침내 부선사의 법을 잇고 깨달은 경위는 돌아보지 않았다. 부선사에게 향을 올릴 때 갑자기 가슴이 방망이질 하더니 드디어 아픈 부분에 종기가 생겨 구멍이 뚫렸다. 유향 (乳香) 으로 떡을 만들어 구멍을 막았으나 오랫동안 낫지 않아 결국 죽고 말았다.
87. 참선을 배우다 / 왕형공 (王荊公)
왕형공 (王荊公:安石) 이 하루는 장산 원 (蔣山讚元:?~1086) 선사를 방문하여 좌담하다가 고금의 인물을 논하는 차에 원선사가 말하였다.
ꡒ상공께서는 호흡이 가빠 남들에게까지 거칠게 들리니 이는 글 짓고 문헌 찾는 일에 몹시 피곤하여 심기가 고르지 못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어찌하여 좌선으로 이 큰 일을 체득하지 않습니까?ꡓ
왕형공은 그 말을 따라 선을 하였는데 하루는 장산선사에게 말하였다.
ꡒ좌선이란 참으로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습니다. 내가 몇 해 동안「호가십팔박(胡十八拍)」 을 지으려고 하였지만 이루지 못하였는데 간밤에 앉아 있는 사이에 모두 이루었습니다.ꡓ
장산선사는 크게 웃었다.
왕형공이 하루는 장문정공 (張文定公) 에게 물었다.
ꡒ공자가 세상을 떠난 지 백년만에 맹자가 나왔는데 맹자 이후 사람이 끊어지고 없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ꡓ
문정공이 말하였다.
ꡒ어찌 사람이 없다하시오? 공맹을 능가하는 사람도 있소.ꡓ
ꡒ누굽니까?ꡒ
ꡒ강서의 마조 (馬祖) 대사 탄연 (坦然) 선사, 분양 무업 (陽無業) 선사, 설봉 (雪峰義存) 선사, 암두 (巖頭悍) 선사, 단하 (丹霞天然) 선사, 운문 (雲門文偃) 선사입니다.ꡓ
왕형공은 열거하는 선사의 이름을 듣고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무슨 뜻이냐고 되물으니, 장문정공이 말하였다.
ꡒ유가는 문호가 얕아서 인재를 거두어 들이지 못하여 인재가 모두 석씨에게 귀의했기 때문입니다.ꡓ
왕형공은 그 말에 감탄하였다. 뒷날 이 말을 무진거사에게 하였더니, 무진거사는 책상을 매만지면서 달인 (達人) 의 말씀이라고 극찬하였다.
88. 박복한 금생의 과보를 돌이켜 생각하다 / 내시 임관찰 (任觀察)
임관찰 (任觀察) 은 내시 (內侍) 가운데 현명한 사람이었으므로 휘종 (徽宗) 은 그를 지극히 총애하였다. 그는 불교에 마음을 기울여 선지식을 두루 참방하고 항상 스스로 탄식하였다.
ꡒ내 다행히 사람으로 태어나기는 하였지만 몸이 온전치 못하고 또한 낳아주신 부모마저 모른다. 생각해보면 전생에 남을 경멸하고 천대했기 때문에 이런 과보를 받게 된 것이다.ꡓ
그 뒤로 서원을 세워 쉬는 날에는 자기 집으로 돌아와 사람과 일체 만나지 않고 향을 사르고 예불하였다. 그리고는 피를 뽑아 「화엄경」을 베껴 썼는데 한 글자 쓸 때마다 삼배 (三拜) 를 올리면서 내생에는 나를 낳아준 부모를 알게 해달라고 발원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는데 임씨가 빨리 나오지 않자 버럭 화를 내며, 손님이 집에 왔는데 어째서 나오지 않느냐고 했다. 임씨가 웃으면서 집에서 한권의 사서 (赦書) 를 베끼고 있다고 하였다. 손님이 그 이유를 묻자 경문을 가져와 보여주면서 ꡐ이 책은 염라대왕 앞에서 쇠몽둥이를 맞고 쇠뭉치를 삼킬 때 용서받을 수 있는 글ꡑ이라 하니 손님은 두려운 마음으로 깜짝 놀라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그도 한 부 베껴 썼다고 한다.
89. 도인스님에 대한 고자질 / 수단 (守端) 선사
오조 (五祖法演) 스님은 서주 (舒州) 백운산 (白雲山) 해회 (海會) 선원의 수단 (守端) 스님에게 귀의하여 뼈속 깊이 완전히 생사대사를 해결하였다. 수단스님은 그에게 백운산 앞에 있는 물레방앗간에서 방아찧는 일을 맡겼다. 법연스님은 해마다 방앗간 밑에서 지껑이와 밀기울을 거둬 판 돈으로 경전에 주석을 쓰기도 하고 이자를 불려 인부를 고용하고 대중공양을 하며 그밖에 남은 돈은 절 돈으로 넣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수단스님에게 그의 잘잘못을 고자질하였다. 법연은 날마다 방앗간에서 술을 마시고 고기 먹으며 심지어는 건달패와 계집까지 기르고 있다 하였다. 이 말이 선원에 널리 퍼지자 법연스님은 일부러 고기와 술을 사서 방앗간에 매달아 놓고 건달패와 부녀자에게 화장분을 사주면서 바르게 하였다. 그리고는 선객들이 방앗간을 찾아오면 부녀자의 손을 잡고 전혀 거리낌없이 큰소리로 웃곤 하였다.
하루는 수단스님이 방장실로 불러들어 그 까닭을 묻자, 법연스님은 그저 다소곳할 뿐 다른 말이 없었다. 수단스님은 법연스님의 뺨을 갈겼지만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절을 하고 물러났다. 수단스님은 혀를 차며 썩 꺼지라고 호통을 치니 법연스님은 자신이 계산을 마치고 사람을 데려와 대조할 때까지 기다려 주십사 하였다.
하루는 수단스님에게 아뢰었다.
ꡒ제가 방앗간에 있으면서 술과 고기를 사고 남은 삼 천냥을 절 돈으로 넣었습니다.ꡓ
수단스님은 크게 놀랐으며 그때야 비로소 소인배들의 질투임을 알게 되었다. 당시 원통법수 (圓通法秀) 선사가 수좌로 있다가 사면산 (四面山) 에 주지해달라는 청을 받고 떠나자 수단스님은 곧장 법연스님을 수좌로 삼았다
90. 수마기 (水磨記) / 담당 문준선사
담당문준 (湛堂文準) 스님은 제갈공명 (諸軫明) 의 「출사표 (出師表)」를 읽고 문장 짓는 법을 터득했다.
그는 「나한공소 (羅漢供疏:나한에게 공양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ꡒ범어의 아라한 (阿羅漢) 이란 이곳 (중국) 말로는 ꡐ무생 (無生) ꡑ이라 한다. 그들은 삼계 25종의 번뇌를 벗어나 분단생사 (分段生死) 를 초월하였으며 여래의 부촉을 받아 천인 (天人) 의 공양을 받을 만하며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고 복되게 하는 분이다. 그러므로 시주들은 공양을 성대히 해야 한다.ꡓ
또한 「수마기 (水磨記:물레방아에 대한 글)」를 지었다.
ꡒ늑담산 (潭山) 은 옛날 마조 대적 (馬祖大寂) 선사께서 많은 선승들과 함께 부처되기를 겨루시던 큰 도량으로 비록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하나 불법에서 멀어진 적이 없는 곳이다. 다만 그동안 선지식들의 경지가 똑같지 않고 간혹 고하 (高下) 가 있었기에 멀어진 일이 있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마조선사에게 한 스님이 무엇이 부처냐고 묻자 마음이 부처라고 대답한 일 등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중생이 본래 성불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높고 낮음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불법에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말세에는 내가 법을 설하노라 하는 자도 있다. 그러기에 부처가 되려고 스승을 구하면서 이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송 원부 (元符) 무인 (1098) 년에 한중 (漢中) 의 의충 (意忠) 스님이라는 분은 스승을 찾아 도를 묻고 부처가 되려고 참선을 하는데 긴장대를 가지고 다니다가 만나면 한바탕 놀다 가곤 하였다. 그 한바탕의 놀음은 일시적인 것이었으나 그 공덕은 천고에 이로움을 주었으니 낡은 제도를 혁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영인 (人) *은 아직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옛날부터 있어온 틀에다가 상황을 맞춘다. 변통 (變通) 이란 나에게 있는 것인데 어찌 규칙으로 큰 뜻을 얽어매 옛사람의 규범에 국한되는가? 이 때문에 제 자식은 가르칠 수 없다고 하였다. 가르치는 것은 언어의 찌꺼기이지 지극히 오묘한 마음의 이치는 아니다. 지극히 오묘한 마음은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언어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설령 밝은 스승이 은밀히 전해주어도 마음으로 스스로 깨닫는 것만 못하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얻고 손으로 응한다는 말이 있다. 이 모두가 신령한 심법 (心法) 의 묘용 (妙用) 이다.
그러므로 보리를 찧으려면 맷돌을 써야 하고 쌀을 찧을 때는 연자방아를 써야 하고 국수를 뽑으려면 채를 써야 하고 껍질을 없앨려면 부채를 써야 하는데, 그 규모와 규칙은 모두 빗장 (關) 에 달려있다. 이 소식만 달통하게 되면 모든 것을 조작하지 않아도 스스로 돌아간다. 물로 비유해 말하자면 한 물결이 움직이자마자 앞 물결 뒷 물결 모든 물결이 줄줄이 이어져 끝이 없다. 맷돌로 말하자면 한 개의 바퀴가 돌자마자 큰 바퀴 작은 바퀴 모든 바퀴가 움직여 끝없이 돌게 됨과 같다. 이로 말미암아 위 아래가 서로 호응하고 높고 낮은 데가 함께 작동하니 그 묘한 작용이란 자연에서 나온 것이어서 사람의 힘을 빌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도 그 기묘함은 볼만하다. 매우 현묘해야만 좌우로 돌고 종횡으로 오가면서 서로 서로 부딪치며 큰 법음 (法踵) 을 낸다. 그 법음은 모두가 고 (苦) ․공 (空) ․무상 (無常) ․무아 (無我) 와 바라밀 (波羅蜜) 이니 듣는 자는 그 마음을 듣고, 보는 자는 그 성품을 보며, 냄새 맡고 맛보고 알아차리는 데 이르기까지 모두 법희 (法喜) 와 선열 (禪悅) 을 얻게 될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쌀과 국수 등 여러 가지 공양거리를 만들어 창고와 주방 (香積) 에 공양하여 이 두 가지로 선승들과 왕래하는 선불자 (選佛者) 를 배부르게 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ꡓ
91. 스스로 깨치고 남을 지도하려면 / 대혜선사
스님이 말하였다.
ꡒ요즈음 불과 (佛果圓悟) 선사 회중에서 공부한 납자는 불안 (佛眼淸遠) 선사를 뵈려 하지 않고 불안선사 회중에서 공부한 납자는 불과선사를 뵈려 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많은 봉사들이 코끼리를 만지는 격이니 어떻게 두 노스님의 뜻을 알겠는가? 그들은 불안선사가 곧 규범을 갖춘 불과선사이며, 불과선사가 바로 규범을 갖추지 않은 불안선사라는 점을 전혀 모르고 있다. 사람을 지도할 때 눈 멀게 하지 않으려면 불과선사를 찾아보아야 한다. 만일 불안선사만 본다면 열반당 (涅槃堂) 의 선 (禪) 이니, 스스로는 구제할 수 있어도 남을 지도하지는 못한다. 혜남 (慧南) 노선사의 회하에서 깨달음을 얻은 납자들에게 진점흉 (眞點胸:可眞) 선사를 뵙도록 하는 것은 가진선사의 수단이 매섭고 신랄하여 학인을 지도하는 데 남다른 면모가 있기 때문이다.ꡓ
스님이 하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ꡒ요즘 참선하는 사람들은 마치 파리떼와 같아서 조금만 비린내가 풍겨도 그곳에 머물고 만다.처음부터 그런 것을 모두 뽑아버리고 아무 냄새 없는 곳을 찾아 평지에 머물러야 한다. 예로부터 학인을 잘 지도하는 작가종사로 목주 (睦州道明) 스님이란 분이 있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ꡐ너에게 앉을 곳이 있는 것을 보면 곧장 깎아 없애고 처음부터 모든 것을 깎아 나아가야 한다.ꡑꡓ
스님이 또 하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ꡒ학인을 가르치는 종사는 안주하는 곳 〔落地處〕 이 있어서는 안된다. 만일 안주하는 곳이 있으면 학인이 앞에서 떠나가는 꼴을 보게 된다.ꡓ
하루는 또 말하였다.
ꡒ너희는 오직 생각을 불살라 놓고 보아라. 재가 되어 갑자기 화로 밖으로 싸늘한 콩 한 알이 튀어나와야만 아무 일 없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ꡓ
스님이 보봉사 (寶峰寺) 에 있을 때, 원 (元) 수좌가 스님을 보고 지극히 좋아하였다. 하루는 휴가를 얻게 되어 이상노 (李商老) 를 찾아보고 한달쯤이면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는데 막상 40일이 넘어서야 돌아오니 원수좌는 스님을 보고서 갑자기 말하였다.
ꡒ아! 세월이 덧없이 빠르구나.ꡓ
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식은 땀을 흘렸다.
스님은 동산 (洞山良介) 선사의 「오도송 (悟道頌)」*을 보다가 ꡐ그 (渠) 도 있고 또 나 (我) 도 있다면 무슨 선 (禪) 이 되겠는가?ꡑ 하는 의심이 생겼다.
이에 담당 (湛堂) 스님에게 다시 가르침을 청하니, 담당스님은 스님에게 도리어 한 번 거론해 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스님이 거론하자 담당스님은, ꡒ너는 거론하는 것도 모르냐ꡓ면서 밖으로 밀쳐내 버렸다.
원오 (圜悟) 선사가 스님에게 말하였다.
ꡒ달마가 서쪽에서 와 무엇을 전해주었는가?ꡓ
ꡒ모두 둔갑한 여우 〔野狐精〕 의 견해랄 수는 없습니다.ꡓ
ꡒ호랑이 머리에 걸터앉아 호랑이 꼬리를 잡아 당긴다면 제일구에서 종지를 밝혔다고 하는데 무엇이 제일구인가?ꡓ
ꡒ이것은 제이구입니다.ꡓ
스님이 하루는 이렇게 말하였다.
ꡒ여기에는 날마다 향상해 나가는 선이란 없다.ꡓ
그리고는 손가락을 한번 튕긴 뒤, ꡒ만일 이 뜻을 안다면 당장에 법문을 끝내겠다ꡓ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ꡒ요즘 어떤 종사들은 학인을 지도하면서 서너 차례 입실한 뒤에도 그의 경지를 분명히 가려내지 못하고 스스로 깨친 것을 말해보라고 한다. 다시 그에게 견처 (見處) 가 어떻느냐고 물으면 학인은 자신의 견처를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 도리어 네가 말할 수 없는데 내가 어떻게 너를 볼 수 있겠느냐고 하니, 이런 식으로 해서는 어떻게 학인을 지도하겠느냐?
천 대도 (谷泉大道) 선사가 자명사 (慈明寺) 에 간 이야기를 듣지도 못하였느냐? 자명선사가 곡천선사에게 물었다.
ꡐ조각구름 산골짜기에 피어나는데, 행각하는 이여, 어디에서 왔는가 〔片雲生谷口 遊人何處來〕ꡑ'
곡천스님이 대답하였다.
ꡐ간밤에 어느곳에 불이나서 옛사람의 무덤을 태웠는고 〔夜來何處火 燒出古人墳〕ꡑ
자명스님이 ꡐ아직은 안되겠다. 다시 말하라ꡑ 하여 곡천선사가 대뜸 호랑이 울음소리를 내자 자명선사는 선사만이 임제 종풍을 이어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들의 이와 같은 문답 몇 구절을 보면 어디에서 그들의경지를 볼 수 있을까? 모름지기 이래야만 한다ꡓ.
스님이 말하였다.
ꡒ나는 의지가 굳고 정성스런 사람을 기다리되 자질이 되어야 하니, 바로 한번 뛰어 여래의 경지에 들어가는 그런 자질을 말한다.
참선에는 반드시 직심 (直心) ․직행 (直行) ․직언 (直言) ․직어 (直語) 가 있어야 한다. 말과 마음이 곧은 까닭에 처음부터 끝까지 지위 중간에 왜곡된 상 (相) 이 영원히 없다. 조사가 서쪽에서 와서 직지인심 (直指人心) , 견성성불 (見性成佛) 을 제창하였고, 어느 스님이 운문 (雲門文偃) 선사에게 무엇이 부처냐고 묻자 마른 똥막대기라고 하였다. 여기서 이리저리 헤아리는 것도 이미 멀어진 일인데 더구나 거짓말이겠느냐.ꡓ
무애(無礙)선사가 법해(法海)선사의 영정에 찬을 청하자 스님이 말하였다.
“상강(上江)지방의 노스님들은 대개가 하강(下江)지방 운문(雲門)의 문하를 비웃는데 각인 (覺印:保寧子英, 운문종)선사만은 비웃지 않았다. 그것은 각인선사가 일찍이 보령 용(保寧仁勇)선사와 진정(眞淨克文)선사를 친견하였고, 원통 법수(圓通法秀: 각인스님의 은사)선사가 일찍이 순 노부(舜老夫)와 부산 원(浮山法遠)선사를 친견했기 때문에 이들을 틀별히 예우한 것이다. 그러나 대본(대본:慧林宗本) 소본(소본: 法雲善本)․부철각(부철각:長蘆應夫)스님 등은 모두 가소롭게 생각한다. 법해선사는 각인선사의 법제자이고 각인선사는 원통선사의 법제자이다.
찬은 다음과 같다.
원통의 문정을 드넓혔고
운문파를 이으셨다
선상에 바로 앉아 온갖 괴물 노려보니
비로인을 차고 마귀와 외도를 굴복시키되
한 마리 법구가 번개불보다 빠르다
도량에서 움직이지 않고 삼매에 들었으니
찬양하고 헐뜯는 자 모두 문둥병에 걸리리라.
廓圓通門 續雲門派
燕坐胡牀 虎視百怪
佩毘盧印 摧伏魔外
一句當陽 電光非抉
不動道場 而入三昧
贊之毁之 俱遭白癩
이는 법해 노스님이 터럭 끝에서 끝없는 법계에 노닐었음을 말해준다. 원통선사는 일찍이 수단(白雲守端)스님의 회하에서 수좌가 되었다가 사면사(四面寺)의 청을 받아들여 주지가 되었다. 그당시 법연스님은 해회(海會)선원에서 방아찧는 일을 맡아보다가 원통선사를 뒤이어 수좌가 되었다. 원통선사가 서현사(棲賢寺)의 주지로 옮겨가자 법연스님이 뒤이어 사면사의 주지가 되었다.
수단스님이 지은 ꡐ송고(頌古)ꡑ 가운데 “해가 동쪽에서 뜨니 밤은 서쪽으로 떨어진다 [日出東方夜落西]”는 구절이 있었는데 원통스님이 ꡐ야(夜)자를 정ꡐ(定)ꡑ자로 고치자 수단스님은 웃으면서 그의 뜻을 따랐다.
92. 도적 집안에서 도적을 만드는 비방/오조선사
오조스님이 하루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여기 나의 선은 무엇과 같다고 할까. 이를테면 도적 집안에서 도적을 만드는 것과 같다. 도적의 집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하루는 아버님이 늙은 후엔 우리 식구를 어떻게 보살펴야 할까, 일이라는 것을 배워두어야 되겠다 생각하고 마침내 아버지에게 말하자 그의 아버지는 좋은 생각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그래서 하룻밤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큰 집에 가서 담장에다 구멍을 뚫고 집안으로 숨어들었다. 아버지는 궤짝을 열고 아들에게 그 속으로 들어가 옷과 돈을 가지고 나오라 하고서 그가 들어가자 궤짝문을 닫고는 다시 자물쇠를 채웠다. 그리고는 일부러 대청 마루를 두들겨 그 집안 사람들이 놀라 깨도록 하고서 자기는 먼저 담구멍을 찾아 도망쳐버렸다. 그 집 사람들은 곧 달려나와 불을 밝혀 살펴보고는 도적이 들어왔다가 이미 가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편 그 아이는 궤짝 속에 갇혀서, 우리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였을까 하며 걱정에 빠져 있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궤짝 속에서 쥐가 궤짝을 갉아먹는 소리를 내니 그 집에서는 하인을 보내 등불을 켜고 열어젖혔다. 궤짝이 열리는 순간, 도적 아이는 몸을 솟구쳐 등불을 끄고는 하인을 밀치고 밖으로 뛰쳐 달아났다. 그러나 그 집 사람들이 뒤쫓아 왔다. 중도에 이르러 도적 아이는 갑자기 우물 하나를 발견하고서 큰 돌을 우물 속으로 떨어뜨렸고, 사람들이 우물 속을 기웃거리며 도적을 찾고 있을 때 집으로 도망쳐 왔다. 아버지에게 그 까닭을 묻자 그의 아버지는 아무말도 하지 말라면서 어떻게 해서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아들이 모든 일을 낱낱이 이야기 해 주자 아버지는 그제서야, 그렇게 했으면 다 된 거라고 하였다.“
93. 세 종류의 스님 / 원통 법수(圓通法秀)선사
스님(대혜)이 들려준 이야기다.
“원통 수(圓通法秀)선사가 눈 내리는 모습을 보고서 말하였다. ꡐ눈이 내릴 때면 세 종류의 승려가 있다. 가장 우수한 승려는 승당 안에서 좌선을 하고 중간쯤 되는 승려는 먹을 갈아 붓을 들고 시를 지으며 가장 못난 승려는 화롯가에 둘러앉아 먹고 떠든다.ꡑ
내가 정미년(1127) 겨울 호구사(虎丘寺)에 있을 때 내 눈으로 이 세 종류의 중들을 똑똑히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선배 스님들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94. 선지식을 찾아가다 /오조선사
오조(五祖)스님이 처음 원조(圓照宗本)선사에게서 공부할 때 고금의 공안을 모두 깨쳤으나 한 스님이 흥화(興化存獎 :830~888)에게 물은 공안만은 알 수가 없었다.
한 스님이 흥화선사에게 물었다.
“사방팔방에서 닥쳐올 땐 어떻게 합니까?”
“중간을 쳐라!”
그 스님이 절을 하자 흥화선사가 말하였다.
“내가 어제 마을의 제사에 가다가 중도에서 때아닌 폭풍으를 만나 옛 사당 속에서 비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오조스님은 이 공안을 가지고 또다시 가르침을 청하자. 그것은 임제의 가풍이니 그의 자손에게 찾아가 물어 보라고 하였다. 오조스님은 그 말대로 부산 원(浮山法遠)선사를 친견하고 공안에 대하여 가르침을 청하자 부산선사가 말하였다.
“이런 비유를 들 수 있다. 마치 서너집 되는 촌 마을에 땔감 장수가 긴 막대의 양편에 땔감을 담아 둘러메고서, 중간 서당(書堂)에서는 오늘 무슨 일을 하려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이 말에 오조는. 그런 경계는 대수롭지 않다고 하였다. 당시 부산 법원선사는 이미 연로하여 귀가 어두웠으므로 마침내 한분의 젊은 장로를 찾아가 보라고 하였는데 그가 바로 백운 단 (白雲守旦)선사였다. 부산선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그를 알지는 못하나 임제의 삼돈봉(三頓棒) 인연에 붙인 게송을 보니 그의 견지가 고결하였다. 그를 찾아가면 묻고 결택할만한 것이다.”
오조스님은 그 말을 따랐다.
“진정스님이 어느 날 황룡 노스님에게 말하였다.
ꡐ백운 수단이 임제 삼돈봉에 붙인 게송은 저의 경지와 같습니다.ꡑ
ꡐ너는 임제 삼돈봉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ꡑ
이에 진정스님이 송을 거론하자 황룡스님은 악! 하고 할을 한 뒤에, ꡐ백운은 깨달았지만 너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ꡑ고 하였다.“
95. 임제스님의 사빈주 /원오선사
원오(圜悟)스님이 오조스님에게 임제스님의 사빈주(四賓主)가 무엇인지 가르쳐 달라고 하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하나의 격식일 뿐이다.”
“이 무슨 부질없는 일입니까?”
“이것은 말 앞에서 서로 먼저 타려고 치고박는 것과 같아서 넘어지면 만사 끝장이다.”
96. 평실선을 자부하다가 /불감 혜근선사
불감(佛鑑慧懃)선사는 평소 평실선(平實禪)을 참구한다고 자부하며 오조스님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오조스님의 선은 그저 딱딱하게 사람을 바꿔놓기만 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에 원오스님이 말하였다.
“그런 도리가 아니네. 평실(平實)이란 것이 있다면 내게 보여주게. 언제 그런 얘기가 있었던가?”
그래서 서서히 믿게 되었는데, 뒤에 삼라만상이 모두 법에서 도장 찍히듯 나온 것이라는 설법을 듣고 갑자기 깨달은 바 있어 말하였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시어 ꡐ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ꡑ이라 하셨는데 지금은 여러 총림에서 많은 사람들이 곡지인심 설성성불(曲指人心 說性成佛)한다.”
97. 참선병 /원오선사
원오(圜悟)스님이 오조스님 회하에 있을 때였다. 오조스님이 원오스님에게 “너는 다 좋은데 작은 병통이 하나 있다”고 하니 원오스님은 자기에게 무슨 병이 있느냐고 재삼 간곡히 물었다.
오조스님이 대답했다.
“다만 선병이 많다.”
“본래 참선하기 위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까?”
“다만 보통때 이야기하는 것은 괜찮을 것 같구나.”
이때 어느 스님이 갑자기 물었다.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선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싫어합니까?”
“아이구, 가슴이야!”
오조스님이 하루는 원오스님에게 무봉탑(無縫塔) 화두를 물으니 원오선사는 어리둥절하다가 방장실에서 섬문 밖에서 뒤따라 나와서야 말할 수 있었다. 이에 오조스님이 드디어ꡐ말 해냈구나ꡑ하니 원오스님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잠시라도 놓쳐버리면 감당할 수 없습니다.
98. 지견과 정해가 많은 납자들 /대혜선사
스님(대혜)이 입실했던 제자들이 물러간 후 한가이 앉아있다가 갑자기 말하였다.
“요즘 납자들은 지견(知見)과 정해(情解)가 많다. 쓸모없는 말, 긴 이야기를 기억해서 그 속에서 답을 구하는 것은 마치 손에 값을 따질 수 없는 마니주(摩尼珠)를 쥐고 있다가. 어는 누가 손 안에 있는 게 무엇이냐고 하면 갑자기 그 구슬을 버리고 흙덩이를 집어올리는 것과 같은 꼴이다. 그건 멍청이다. 그렇게 참구한다면 당나귀 해가 되도록 참선을 해도 깨치지 못할 것이다.”
스님이 하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기 내게는 사람들에게 줄 법이 없고 다만 사건에 따라서 판결을 내려줄 뿐이다. 비유컨대 무엇보다도 애지중지하는 유리병을 가지고 오면 내가 한 번 보고는 너를 위하여 곧 유리병을 깨뜨려 버릴 것이다. 네가 그대로 오는 것을 보면 나는 너의 두손을 잘라 버릴 것이다. 이 때문에 임제스님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라고 말한 것이다.
말해 보아라. 선지식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가를 살펴 보아라. 그것이 무슨 도리인가를. 그런데 요즘 납자들은 공부를 할 때 이것을 깨닫지 못하니, 잘못이 어디에 있는가? 다만 그것을 밝혀 나가고자 한다면 이렇게 해도 안되고 이렇게 하지 않아도 안되며, 이렇게 하거나 하지않거나 모두 안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느가?
너는 한마디 말[轉語]을 가지고서 이를 밝혀 나가려는가? 영원히 그것을 밝히지 못할 것이다. 옛 사람은 단도직입적이었다. 그러나 너는 단도직입적인 곳으로 가려하지 않고 그저 분명하게 밝히려고만 드니, 이래서 도리어 깨침이 늦어진다.“
스님이 어느날 말하였다.
“나는 평소 남 욕하기를 좋아하는데 현사(玄沙師備:825~908)스님의 어록을 읽다가 그분이 영운(靈雲志勤)스님을 시험한 구절을 보고서 대단히 기뻐하였다.
현사스님이 지근스님에게, ꡐ알긴 잘 알았으나 노형께서는 아직 철저히 깨치지 못했음을 내 감히 보증합니다ꡑ하였는데 이 말은 우뚝 솟은 만길 벼랑같은 느낌이다. 그후 영운스님과 이야기를 마친 후 또다시 현사스님이 말하였다.
ꡐ너는 처음엔 그처럼 깨달은 것 같다가 뒤에는 도리어 이처럼 똥싸고 오줌을 싸느냐?ꡑ
내가 이 이야기를 원오스님에게 물으니 원오선사는 웃으며 말하였다.
ꡐ그가 뒤에 가서 그랬다는 것은 나도 이해할 수 없구나.ꡑ
마침내 요사채로 돌아와서야 비로서 현사스님이 매우 괴상스런일을 꾸몄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원오스님에게 말하자 원오선사는 웃으면서 ꡐ기쁘다, 네가 알아냈구나!ꡑ하였다.“
회당(晦堂祖心)스님이 요즘 제방에는 이런 약두(藥頭:약방을 관리하는 스님)가 없는 곳이 많다고 하니 스님은 “절대 말하지 말라, 바깥 사람이 이 험한 소리를 듣겠다”고 하였다.
어느 노스님이 상당법문을 하였다.
“내가 노스님 회중에 있으면서 말후구(末後句)라는 것을 얻었으니, 이를 대중에게 보시 (布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는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다시 말하였다.
“만법과 짝이 되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네가 한 입에 서강의 물을 모두 들어마신 뒤에야 너에게 말해 주리라.”
그리고 나서 그 노스님은 법좌에서 내려왔는데 이 모습을 본 스님(대혜)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라면 그렇게 하진 않겠다. ꡐ내가 노스님 회중에 있으면서 말후구라는 것을 얻었으니 이를 대중에게 거사(擧似:들어 보여줌)하지 않을 수 없구나ꡑ하고서 법좌에서 내려오겠다.”
99. 주지에게 생강 판 스님 /동산 자보(洞山自寶)선사
동산 보(洞山自寶)선사는 오조 계(五祖師戒:운문종)스님의 법제자로, 여주(廬州)사람이다. 그의 인품은 청렴하고 부지런하였다. 일찍이 오조산에서 소임을 볼 때 사계선사는 병환 중에 행자를 고사(庫司)에 보내 생강을 가져다가 약을 달이도록 하였는데 자보스님은 행자를 꾸짖고 주지 않았다. 행자가 이 사실을 아뢰자 사계선사는 돈을 주면서 사오도록 하니 자보는 그때서야 비로소 생강을 집어 주었다.
그후 규주(筠州) 동산사(洞山寺)에 주지자리가 비어 군수는 사계선사에게 서신을 보내 아는 사람 가운데 주지를 천거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사계선사는 ꡐ생강을 팔던 사람이면 주지를 할 만하다ꡑ며 마침내 그를 동산사의 주지로 보냈다.
그후 귀종사의 길을 비키라고 소리치는 귀인의 행차를 보게 되었다. 어떤 관리냐고 물으니 현위(縣尉)라고 하면서 길을 비키라 하였다. 이에 자보선사가 길 왼편의 한쪽에 비켜 서 있는데 갑자기 말이 꿇어 앉아 가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러자 자보선사는 축생이 도리어 사람을 알아 본다고 하였는데 현위는 그가 자보선사임을 알고서 재배한 후 떠나갔다.
그후 다시 운거산(雲居山)으로 옮겨 갔는데 어느 날 밤 산신이 가마를 메고 절을 맴돌기에 자보선사가 너의 아버지를 들어 올리고 네 딸을 들어 올려서 방장으로 올라가라고 하였더니 산신이 다시 가마를 메고 방장으로 돌아왔다.
자보선사가 처음 행각을 할 때 한번은 여관에서 잠을 자다가 창녀가 치근거리자 마침내 침상을 양보하고 함께 자게 되었다. 선사가 좌선하다가 날이 밝자 길을 떠나려 하니 창녀는 잠 잔 값을 요구하였다. 자보선사는 돈을 주고 문을 나서면서 어젯밤 덮은 이불을 태워버리고 떠났다. 창녀가 부모에게 이를 사실대로 말하자 마침내 그 집에서 모셔다가 음식을 대접하고 사과하면서 참다운 부처님 제자라고 하였다.
그가 지은 「달마조사 찬」은 총림에 널리 알려졌고, 냥야 각(瑯琊慧覺)스님이 지은 화답시는 지금도 「정법안장(正法眼臟)」에 실려있다.
100. 참선 못하는 병통 /대혜선사
한 스님이 스님에게 물었다.
“저는 참선을 할 수 없는데 병통이 어디에 있습니까?”
“병은 여기에 있다.”
“저는 무엇 때문에 참선은 못합니까?”
“눈뜨고 자리에 오줌싸는 놈아! 때리기 전에 꺼져라!”
101. 운문위 종지를 떨친 사람들 /천의의회(天衣義懷)선사
회(天衣義懷)선사가 원통 수(圓通法秀)선사에게 말하였다.
“원청 주(元靑州:天鉢重元), 경복 건(慶福建), 그리고 그대까지 세 사람이 우리 종지(雲門宗)를 크게 떨칠 것이며, 그 나머지는 모두 그들의 근기게 따라 도를 감당할 것이다.”
102. 선지식에게로 인도하다 /운개 수지(雲蓋守智)선사
도솔 열(兜率從悅)선사가 도오산(道吾山)에 수좌로 있을 때 지(守智)노스님은 운개산(雲蓋山)에 계셨다. 종열선사가 하루는 수십명의 납자를 거느리고 수지스님을 찾아갔느데 수지화상은 종열선사와 몇마디 주고 받지 않고사도 종열선사의 경지를 알았다. 그리고는 웃느면서 말하였다.
“수좌를 보아하니 기질은 훌륭한데 이찌하여 말은 마치 술취한 사람 같이 하느냐?”
종열선사는 얼굴을 붉히고 식은 땀을 흘리면서. “바라옵건대 스님께서는 자비를 아끼지 마시고 가르침을 주십시오” 하였다. 다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얼마 후 또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자 종열선사는 망연자실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입실히려 하였으니 수지스님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공은 대중의 수좌로서 설법하는 사람이다, 나는 보고 들은 게 넓지 못하니 무슨 도움이 되겠느가?”
종열선사가 재삼 간청하였으나 수지스님이 말하였다.
“나는 복이 없어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였으니. 설령 내가 수좌의 절을 받는다 해도 뒷날 반드시 나 때문에 시비를 듣게 될 것이다.”
끝내 입실을 허락하지 않고 다시 종열선사에게 물었다.
“수좌는 법창 우(法昌倚遇)선사를 뵌 적이 있는가?”
“그의 어록을 보고서 내 스스로 깨닫기는 하였지만 만나보고 싶진 않습니다.”
“동산 문(洞山克文)스님을 뵌 적이 있는가?”
“그 관서자(關西子)말입니까? 머리가 없는 놈입니다. 그의 승복자락을 잡아당기면 지린내가 진동하는데 그에게 무슨 훌륭한 점이 있겠습니까?”
“수좌는 그 지린내 나는 곳을 참구하라.”
종열산사는 그의 가르침을 따라 동산스님을 찾아가 귀의하였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심오한 종지를 깊이 깨치고 다시 수지(守智)노선사를 찾아가자 수지스님이 말하였다.
“수좌는 관서자(關西子)를 만난 후에 대사(大事)는 어떻게 되었는고?”
“만일 스님의 가르침이 없었더라면 일생을 헛 보낼뻔 하였습니다.”
이에 향을 사르고서 절을 올렸다.
그후 종열선사는 세상에 나와 동산스님의 법제자가 되었지만 평소에 그의 문도에게 자신이 운개스님의 가르침으로 동산스님을 찾아가게 된 이야기를 해 주고, 너희들은 마땅히 스승의 예로서 수지선사를 섬겨야 한다고 훈계하곤 하였다/
그후 수지선사가 입적했을 때는 혜조(慧照)선사가 도솔사의 주지로 있었는데 그는 종열선사의 상수제자였다. 수지선사의 장례는 모두 혜조스님이 주관하였는데 그를 스승으로 예우한 것은 좋열선사의 부탁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103. 눈으로 불성을 보아라[眼見佛性] /대혜선사
스님(대혜)이 하루는 말하였다.
“보살이란 눈으로 불성을 보는 사람이니 반드시 눈으로 불성을 보아야만 되느니라.”
和曾有言 雅臭當風立
已後從他眼自開 棒了罰錢趁出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