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보미회<그룹사운드를 사랑하는 모임>
 
 
 
 

회원 알림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 가입
    1. 정희
    2. 임박사
    3. 미즈-전영숙
    4. 커피
    5. 정인상
    1. 안영창
    2. santanaho
    3. 큰바위
    4. 협동예찬
    5. 째카
 
카페 게시글
그룹사운드의 흔적 이야기 스크랩 사랑과 평화
마운틴보이 추천 0 조회 374 10.01.18 23: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미 8군 무대에 선 한국밴드로는 최고 등급인 ‘스페셜 A’ 프로 연주가들로 결성된 ‘사랑과 평화’는 사이키델릭 멜로디의 신중현에 필적하는 흥겨운 흑인 펑키 리듬으로 가요계에 충격파를 날렸던 최정상 록 밴드였다.

이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대학생 가요제 등으로 양산된 아마추어 록밴드들의 아우성 속에서 진정한 프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연주와 독특한 편곡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비록 앨범 발표 때마다 겪었던 멤버 교체의 상흔은 선명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사랑과 평화는 굳건하게 그룹 이름을 유지하며 최장수 록그룹이란 ‘명가’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사랑과 평화는 1974년 결성된 ‘서울나그네’의 멤버들인 리드기타 최이철, 키보드 김명곤, 베이스 이남이, 퍼커션 겸 보컬 이철호, 드럼 김태홍에 세컨드 기타 이근수가 가세한 6인조로 시작했다.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이들에게 대중적 생명력을 불어 넣은 것은 동양방송 DJ겸 가수 이장희였다.

대마초 파동 이후 의류사업가로 절치부심하던 그는 가수로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사랑과 평화를 탄생시켰다. 미8군 시절 흑인병사들의 슈퍼스타로 군림했던 정예 멤버들은 통기타 풍의 ‘한동안 뜸했었지’를 펑키 리듬으로 편곡해 자신들의 음악색채로 재탄생시켰다. 리드기타 겸 보컬 최이철과 작년에 간경화로 사망한 키보드와 편곡을 맡았던 김명곤이 핵심이었다.

1952년생인 리더 최이철의 음악적 재능은 타고난 것이다. 그의 집안은 평북 신의주의 전통있는 음악 집안. 아버지 최경용은 미 8군에서 재즈 트럼펫 연주자로 활동하다 수원고 음악교사를 했고 어머니는 미8군 가수 출신으로 홍콩에서 탭 댄서로 유명했던 이계원씨이었다.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이는 서울 보광동 집에 함께 살았던 트럼펫 연주자인 작은아버지 최상용씨. “할아버지의 풍금 솜씨도 대단했지만 집안에는 늘 재즈음악이 흘렀다. 4~5세 때 항상 듣던 재즈음악을 트럼펫으로 불기도 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어릴 때부터 음악과 함께 지낸 그는 17세 때 허경 등 친구 4명과 밴드를 결성해 1969년 고병희(태양음반 대표)씨의 주선으로 미8군 프로덕션 유니버샬에 소속돼 미 8군 무대에 섰다.

데니스 분장으로 패키지 쇼를 했던 1시간 짜리 ‘데니스 쇼’가 그들의 첫 무대였다. 6개월 후 화양으로 전속을 옮겨 당시 천재소녀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박활란 쇼’의 백 밴드로 들어갔다.

음악 신동으로 AFKN 방송에도 출연했던 최이철은 미8군 시절 웨스 몽고메리의 음악에 빠져 펑키 리듬을 접했다.

그 후 칙 코리아, AWB 등의 음악에 충격을 받고 펑키 리듬 추종자가 됐다. 1년 간의 미8군 생활 후 부산 등 지방 무대에 섰던 최이철은 “음악을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마음에 신중현의 음악 스승인 이교숙에게 화성학을 배우고 이판근에게 재즈의 기본을 배웠다.

1970년 미 8군을 나온 그는 서울 명동의 오비스 캐빈, 닐바나 등 수많은 클럽에서 연주하던 중 재즈 드러머 김대환의 주선으로 6인조 ‘아이들(IDOL)’을 결성해 첫 음반 ‘성음-DG가30.71년2월’을 발표했다.

이 음반은 창작 곡과 팝 히트곡, 사이키델릭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실려 있지만 음악적 완성도보다는 사료적 가치가 더 빛난다. 첫 음반 발표 후 최이철은 김대환, 조용필과 함께 1971년 ‘김트리오’를 결성해 프린스 호텔과 제일백화점 뒤 명동의 홍콩 라이브홀을 주무대로 5분의4 박자의 고난도 레퍼토리를 소화하며 다양한 음악을 경험했다.

그 해 시민회관에서 열린 전국보컬경연대회에서 조용필이 가수왕을 수상한 뒤 솔로를 선언하자 김트리오는 해체됐고 1972년 오비스 캐빈에서 만난 오승근과 함께 5인조 그룹 ‘영 에이스’에서 상당기간 활동을 했다.

1974년에 대구에서 김명곤과 숙명적인 만남이 이뤄진다. 클럽 무대에 서기 위해 대구에 내려갔다가 하숙집에서 당시 솔로로 활동하던 김명곤을 만난 것. 두 사람은 처음엔 서로의 음악에 관심은 가졌지만 의기투합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김명곤이 신체검사에서 시력 때문에 재검 통보를 받고 돌아오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됐다. 두 사람은 당시 해병대를 막 제대한 드럼 김태홍, 베이스 김태옥과 함께 ‘서울나그네’를 결성, 3일간 연습한 뒤 8군 오디션에서 가까스로 D-등급을 받아 군산에서 첫 활동을 시작했다.

미8군에서 승승장구하던 중 이남이와 이철호가 가세하며 오디션 없이도 스페셜 A 등급의 실력파 밴드로 성장했다. 이남이가 신중현과 엽전들로 자리를 옮기는 등 복잡한 멤버 이동을 거친 서울나그네는 1976년 캐롤 음반 한 장을 발표하고 최이철을 제외한 멤버들 상당수가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면서 흩어졌다.

이들은 1978년 “사람들에게 음악으로 사랑과 평화를 주자”는 이남이의 제안과 이장희의 주선으로 다시 모여 ‘사랑과 평화’를 탄생시켰다.

 


데뷔 음반은 슈퍼그룹의 탄생을 알린 팡파르였다. 1978년 아들과 매니저 이름으로 발표된 이장희의 창작곡 ‘한동안 뜸했었지’가 세상에 울려 퍼졌을 때 대중은 물론 연주자들도 생경한 이들의 사운드에 큰 충격을 받았다.

마치 지미 핸드릭스가 기타를 물어뜯고 불태운 파장만큼 최이철의 감각적인 펑키 리듬과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 베토벤의 ‘운명’ 등 클래식을 록과 크로스오버한 김명곤의 화려하고 독특한 편곡, 이남이의 유머러스한 스테이지 매너는 장안의 화제였다.

특히 ‘달빛’에서 들려준 최이철의 마우스 튜브 연주는 압권이었다. 하지만 서울나그네 멤버로 활동했던 이철호가 ‘검은나비’로 가고 대마초 파동에 휘말린 이남이 대신 일본에서 활약하던 이탈리아 출신 베이스트 사르보가 송창식의 주선으로 녹음작업에 참여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당시 우리 사회는 소위 ‘찔러대는’ 디스코 열풍으로 후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상상을 초월한 성공적 데뷔에 흥분한 이장희는 비정규 음반 ‘DISCO-1979년’을 발 빠른 상업적 기획으로 발표했다. 2집에 앞서 발표된 이 음반은 마스터 녹음이 도난당해 서라벌과 대도레코드에서 같은 음반이 발매되기도 했다.

사랑과 평화의 연주는 반주 수준에 머물던 밴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리더 최이철은 79년 문화체육관 공연 때 구경 온 벤쳐스 매니저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나그네’가 집중적으로 방송을 타며 인기를 끌었다.

걸작으로 평가 받는 흥겨운 디스코 풍의 2집에선 ‘장미’가 또 한차례 빅 히트를 터트렸다. 또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여왕벌의 행진’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등 디스코 풍으로 편곡된 클래식 연주 곡들과 ‘축제’ ‘솔바람’ ‘할미새’ 등 창작 연주곡들은 한결 무르익은 음악 빛깔을 뽐냈다.

2집 작업 땐 교통사고로 사망한 드럼의 김태홍 대신 최경희가 합류하면서 최이철, 김명곤, 이근수, 최경희, 송홍섭의 2기 사랑과 평화로 재편되었다. 하지만 1980년 8월 리더 최이철이 대마초로 구속되고 김명곤과의 음악적 불협화음이 빚어지면서 공백기가 찾아왔다.

3년 후 최이철은 검은 나비의 유현상을 픽업해 펑키 향내가 빠져버린 3집 ‘사랑과 평화 넋나래-태양음향. 1982년’을 발표했다.

신예 하덕규가 3곡에 작사를 해주며 힘을 실어 주었는데, 최이철은 “당시 대마초로 구속되는 등 매니저 문제로 혼란스러워 좋은 곡을 쓸 형편이 아니었다”고 털어놓는다. 이후 1988년 4집이 발표될 때까지 김광민, 정원영, 문영배 등이 사랑과 평화를 거쳐갔지만 별다른 음악적 성과는 없었다.

최이철도 새 음반 발표보다는 건반 이호준과 음악활동을 함께 하고 싶어 84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 합류해 활동을 하면서 신촌 야누스 클럽, 신사동 함부르크 등에서 퓨전 밴드를 이끌었다.

3기 사랑과 평화는 용인에서 농사를 짓던 이남이를 설득하면서 시작됐다.

드러머 이병일과 최태일, 한정호 등 젊은 뮤지션을 끌어들여 빅 히트곡 ‘울고싶어라’와 ‘노래는 숲에 흐르고’등을 수록한 4집을 88년 발표했고, 우연히 밤무대에서 ‘울고 싶어라’를 들은 MBC PD에 의해 인기 프로였던 ‘일요일 밤의 대 행진’ 무대에 섰다. 5공 청문회라는 시국 상황과 맞아 떨어져 듣는 이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울고 싶어라’는 이 때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이남이의 솔로 독립으로 팀은 또다시 휘청거렸다. 최이철은 키보드 박성식과 베이스와 보컬 장기호를 영입해 퓨전 재즈 그룹으로 팀 컬러를 일신한 뒤 히트곡 ‘샴퓨의 요정’이 수록된 5집 앨범을 발표하며 4기 사랑과 평화를 가동시켰다.

이들은 사물놀이와 록을 퓨전한 ‘덩더쿵’이란 곡을 들고 ‘환태평양 락 오사카 음악제’에 출전하고 경주 엑스포 특별 무대에 올랐다. 하지만 신입 박성식과 장기호가 “가스펠 음악을 한다”며 남성 듀오 ‘빛과 소금’을 결성해 떠나는 바람에 키보드 안정현과 드럼 이병일, 베이스 이승수로 교체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재즈에서 레게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를 수용해 6집 ‘못생겨도 좋아’, 7집 ‘얼굴 보기 힘든 여자’ 등을 발표하고 콘서트 활동으로 팬들과 교감을 가졌다. 또 오리지널 멤버지만 앨범에는 참여하지 못했던 보컬 이철호가 재가입하며 95년 피리와 태평소를 가미한 음반 ‘Acoustic Funky’를 발표했다.

1999년 리더 최이철과 키보드 안정현이 음악적 갈등으로 끝내 팀을 탈퇴했고, 나머지 멤버들은 기타 송기영과 키보드 이권희를 영입해 6기 사랑과 평화를 구축,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랑과 평화는 내년에 ‘철가방 프로젝트’의 리더인 이남이와 ‘유라시아의 아침’을 이끄는 최이철과 함께 기념 음반 및 콘서트를 기획 중이다. 한국 펑키 록 연주의 대가 최이철은 “자극적인 음악보다는 명상적이고 편안한 음악을 하고 싶다. 나아가 조상들의 뿌리를 찾는 의미 있는 창작작업을 하고 싶다”고 끝없는 탐구 열정을 드러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