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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창이씨 익평공파 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효진
가 문 을 빛 낸 인 물 | |
성 함 |
주 요 기 록 사 항 |
이중인(李仲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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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작림(李作林) |
고려 때 전리총관사록(典理總管司錄)을 역임하였고 1220년(고종 7년) 회성군(橫性君)에 봉 하여졌다 |
이극관(李克寬) |
고려 때 전서(典書)를 역임 하였다 |
이 견(李 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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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미(李仁美) |
고려 때 교리(校理)를 지냈다 |
이승연(李承衍) |
고려 원종(元宗) 때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소윤(小尹)을 거처 평장자(平章事)에 이르렀다 |
이 조(李 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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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숙(李 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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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태(李 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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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기(李天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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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李 瑜) |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
이영서(李永瑞) |
1410∼1450(세종 3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석류(錫類), 호는 노산(魯山)·희현당(希賢堂). 판관을 지낸 종미(宗美)의 아들이다. 일찍이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 3등으로 급제, 집현전에 들어갔다. 그뒤 수찬에 올라 강희안(姜希顔)과 더불어 금은(金銀)으로 불경을 썼다. 이어서 병조·예조·이조의 정랑을 거쳐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내고 퇴임하였다. 글씨에 뛰어났다. 돌아가신후 증직(贈職)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순충덕적덕(純忠積德) 보조공신(補祚功臣) 영의정(領議政)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에 봉군(封君)되시다 |
이명철(이명철) |
1460년(세조6) 평양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삼사(三司)요직을 거쳐 이조참의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
이 지(李 芝) |
시호는 정숙(靖肅), 연산군 때 벼슬을 버리고 평창에 은거하였다 |
이계남(李季男) |
1448∼1512(중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걸(子傑). 1479년(성종 10) 지평을 거쳐 1486년 사헌부집의로 근무하다가 그해에 우부승지·우승지를 역임하였다. 1489년 좌승지로 있다가 같은해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이듬해 호조참의가 되었다. 1491년 충청도관찰사로 천거되었을 때 장령 이거(李#거21) 등이 그가 아무런 공로도 없고 특별한 재능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관찰사 임명에 반대하였으나 그대로 임명되었다. 1493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가 같은해 한성부우윤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함경도관찰사로 자리를 옮겼다. 1506년 중종반정이 있던 날 새벽에 박원종등이 군대를 이끌고 대궐로 향하여 진군할 때에 유자광과 합류하여 반정에 협력하였으므로 보사반정공신 2등에 녹훈되고 평원군(平原君)에 봉하여졌다. 1511년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
이계동(李季仝) |
1450(세종 32)∼1506(중종 1). 조선 전기의 무신. . 자는 자준(子俊). |
이 광(李 光) |
1474(성종 5)∼1496(연산군 2).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명원(明遠). 형조참판 계남(季男)의 아들이다. 1491년(성종 22)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494년(연산군 즉위년) 연산군이 죽은 성종을 위하여 불재(佛齋)를 올리자 성균관의 유생으로서 이목(李穆) 등과 함께 불사로 명복을 비는 것은 선왕의 뜻이 아니라는 상소를 하여 정거처분(停擧處分)을 받았다. 그후 죄가 풀리고 149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이르렀으나 23세로 요절하였다. 시문과 글씨가 뛰어났고, 말타기·활쏘기를 잘하였다. |
이 창(李 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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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필(李漢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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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보(李珍寶) |
조선 때 이조판서(吏曺判書)를 역임하였다 |
이 택(李 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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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충(李廷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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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숙(李 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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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병(李之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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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롼(李昌煥) |
자는 회원(晦元) 호는 해은(海隱).학행으로 세마(洗馬)에 천거되고 익찬(翊贊)에 이르렀다 |
이창현(李昌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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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담(李時潭) |
1654년(효종5) 문과에 급제한 후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
이희명(李希明) |
자는 언회(彦晦) . 조선 때 도호부사(都護府事)를 역임하였다 |
이희문(李希文) |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
이 양(李 瀁) |
조선 때 사예(司藝)를 역임하였다 |
이광직(李光稷) |
조선 때 참판(參判)에 올랐다 |
이광익(李光瀷) |
조선 때 참의(參議)에 이러렀다 |
이인변(李仁弁) |
조선 때 지평(持平)을 지냈다 |
이 유(李 愈) |
자는 숙겸(叔謙). 조선 때 우윤(右尹)울 역임하였다 |
이광부(李光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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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휘(李祥徽) |
1696년(숙종22) 문과에 급제한후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였다 |
이광익(李光瀷) |
1703(숙종 29)∼1780(정조 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원숙(源叔). 판서 계남(季男)의 9세손으로, 태석(泰錫)의 아들이며, |
이동욱(李東郁) |
1739(영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유문(幼文), 호는 소암(蘇巖). 1766년(영조 4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778년(정조 2) 사은사의 서장관이 되어 심양(瀋陽)에 다녀왔으며, 1783년(정조 7)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의 서장관으로 다시 청나라에 갈 때 아들 승훈(承薰)을 동반하였다. 이때 승훈이 북경(北京)에 들어가 천주교회 남당(南堂)에서 최초로 영세를 받았고, 돌아올 때에는 《천주실의 天主實義》 등 천주교서적 및 서양학술서적을 사가지고 귀국하여 우리나라에 처음 천주교를 퍼뜨렸다. 1791년 의주부윤이 되었고, 이해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났을 때에 아들 승훈이 이벽(李蘗)·정약전(丁若銓) 등과 함께 교회의 지도급인물이 되어 활동 하였는데, 정부의 박해가 시작되자 그는 천주교서적을 불사르고 동시에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서학을 배척하는 의지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
이승훈(李承薰) |
1756(영조 32)∼1801(순조 1). 한국천주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으로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 세례명 베드로.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 아버지는 참판 동욱(東郁)이며, 어머니는 이가환(李家煥)의 누이이다. 서울 남대문 밖 반석동(盤石洞:지금의 中林洞 일대)에서 태어나, 장성하여 마재〔馬峴〕의 정재원(丁載遠)의 딸을 아내로 맞아 정약전(丁若銓)·약현(若鉉)·약종(若鍾)·약용(若鏞)과 처남매부 사이가 되었다. 1780년(정조 4)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는데, 이때 북경으로부터 들어온 서학이 남인 소장학자들 사이에 활발히 연구되어오던 터라 그도 역시 서학에 접하게 되고, 서학 모임의 중심인물인 이벽(李檗)과도 자연 친교를 맺어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 약 40일간 그곳에 머물면서 선교사들로부터 필담으로 교리를 배운 뒤, 그라몽(Gramont)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1784년 수십종의 교리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묵주(默珠)·상본(像本)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이벽·이가환·정약종 형제 등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과 상의하여 명례동의 김범우(金範禹)집을 신앙집회소로 정하고 정기적인 신앙의 모임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785년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집회를 가지던 중 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된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한때 배교하였지만, 곧 교회로 돌아가 신자들에게 세례와 견진성사(堅振聖事)를 집전하는 등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하였고, 1787년에는 정약용과 반촌(伴村:지금의 惠化洞)에서 천주교 교리를 강술하는 등 교회활동을 영도하였다. 그러나 가성직제도가 교회법에 어긋난 행위임을 알고는 이 조직을 해산하고 성직자영입운동을 추진하였다. 1789년에 평택현감으로 등용되었는데, 때마침 1790년 북경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이 돌아와 가성직제도와 조상제사를 금지한 북경주교의 명을 전하자, 보유론적(補儒論的)인 이해에서 출발한 그의 신앙은 유교적 예속과 천주교회법의 상치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어 고민하던 끝에 다시금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1791년 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의 폐제분주(廢祭焚主)로 인한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권일신(權日身)과 함께 체포되어 향교에 배례하지 않았던 사실과 1787년의 반회사건(伴會事件)이 문제되어 투옥되었지만, 관직만을 삭탈당하고 곧 방면되었다. 1795년 주문모(周文謨)신부를 체포하려다 실패한 을묘실포사건(乙卯失捕事件)이 일어나 성직자영입운동에 관계하였던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충청남도 예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 풀려났으나, 순조가 즉위한 1801년 신유박해로 이가환·정약종·홍낙민(洪樂民) 등과 함께 체포되어 4월 8일 서대문 밖 형장에서 대역죄로 참수되었다. 문집으로 《만천유고 蔓川遺稿》를 남겼다. 그의 가문은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내었다. 즉, 1868년(고종 5)에 아들 신규(身逵)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하고, 1871년에 증손인 연구(蓮龜)·균구(筠龜)가 제물포에서 순교하였다. 이승훈은 1856년(철종 7)에 아들 신규의 탄원으로 대역죄만은 신원되었다. |
이치훈(李致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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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엽(李茂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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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의(李在誼) |
1785(정조 9)∼1868(고종 5). 천주교회 순교자. 세례명 토마스. 한국천주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이승훈(李承薰)의 손자이다. 이승훈의 세 아들(宅逵·國逵·身逵) 중 아버지 택규와 작은아버지 신규는 천주교를 신봉하였기 때문에 그도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가까이하였고, 정하상(丁夏祥)과 반년 가까이 동거하면서 교리를 배웠다. 1837년(헌종 3)조선교구 제2대교구장인 앵베르(Imbert)주교가 조선에 들어오자, 그의 복사(服事)가 되어 주교의 전교활동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로 앵베르가 체포되어 순교하였으나, 그는 홍주로 피신하여 화를 면하고, 박해가 뜸해지자 현석문(玄錫文) 등과 함께 교회재건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845년 김대건(金大建) 부제(副祭)가 입국할 때 의주 변문까지 가서 그를 무사히 서울까지 인도해왔고, 김대건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갈 때 현석문·최형(崔炯)과 함께 동행하여 상해(上海)로 가서 김대건의 사제서품식에 입회한 다음, 조선교구의 제3대교구장으로 부임하게 된 페레올(Ferre'ol)주교와 함께 귀국하였다. 그뒤 주교를 도와 전교활동을 계속하던 중, 1846년 병오박해로 김대건이 체포될 때 그 연루자로 붙잡혔으나 배교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1868년 4월 외국인주교와 김대건신부를 국내로 인도해왔다는 죄목으로 다시금 체포되어 모반부도죄(謀叛不道罪)로 5월 28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
이신규(李身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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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권(李順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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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규(李正奎) |
1864(고종 1)∼1945. 한말의 의병. 일명 장규(章奎). 호는 옥산(玉山). 충청북도 제천출신. 소년시절부터 시와 문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스승 유인석(柳麟錫)과 충청북도 제천·장담(長潭) 등지에서 거의, 의진을 편성하여 참모장으로서 적과 접전하였다. 1896년 1월 유인석이 충주성을 점령할 때 참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2월에는 유인석의 종사관으로서 제천·충주·단양·풍기·평창 등지로 행군하면서 군수(軍需)를 증가시켰다. 3월에는 유인석이 판서 심상훈(沈相薰)의 설득을 듣고 조정에 의병의 입장을 전하려고 갔다가 심상훈이 의병을 보호할만한 위인이 못된다는 것과 의병관계의 인물을 체포하려 하자 서울로 탈출하였다. 9월 유인석을 호위하여 서간도 통화현(通化縣)으로 망명하였다. 뒤에 유인석과 종군하였던 《종의록 從義錄》을 남겨 초기 의병운동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이종하(李鐘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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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춘(李永春) |
1903∼1980. 의사·사회사업가. 호는 쌍천(雙泉). 평안남도 용강군 지성면에서 종현(宗鉉)의 다섯째아들로 태어났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9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다음, 모교에서 병리학을 연구, 1935년 일본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뒤 바로 전라북도 군산의 일본인이 경영하는 구마모토농장(熊本農場)의무실의 진료소장으로 부임하였다. 그의 평생사업은 의사로서의 진료사업과 사회사업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1948년 농촌위생연구소를 처음 설립하고, 후에 다른 부설 진료기관과 합병하여 한국농촌위생원을 다시 설립하여 농촌사회 및 농민생활 전반에 대한 조사연구를 하여 그동안 47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고, 기관학술잡지로서 《농촌위생 農村衛生》을 발행하였다. 진료사업으로서는 1945년 개정중앙병원을 개설하여 여러 곳에 산하 진료소 및 치과진료소를 두었다. 1948년 정읍군에 화호중앙병원을 설치하였고, 1961년 개정뇌병원을 개설하여 지역농민들에게 많은 의료혜택을 주었다. 또, 농어촌지역 주민들의 교육과 보건요원확보의 필요성에 따라 1951년 개정간호학교, 1952년 화호여자중학교, 1961년 화호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농촌보건요원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보건사회부의 위촉을 받아 보건간호원·양호교사·결핵관리요원·가족계획사업요원의 단기수련사업도 실시하였다. 1957년 농촌위생원 구내에 일심영아원(一心#영05兒院)을, 1965년 군산에 일맥영아원(一麥#영05兒院)을 설립하여 농어촌에서 버림받고 의지할 곳이 없는 영아들을 양육하였다. 공직으로서 대한적십자사 조직위원·대한의학협회 대의원·세브란스의과대학 재단이사·전북대학교 평의원·대한공중보건협회장·대한기생충학회장·대한기생충박멸협회장·대한가족계획협회 이사·보건사회부기생충대책전문위원·국제로터리클럽 377지구 총재 등을 역임하였고, 제6회국제열대의학회에 참석하여 분과의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그동안의 공적으로 대한민국 문화훈장·대한적십자사 봉사장, 1975년 연세대학교로부터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죽은 다음 정부에서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 |
이병식(李炳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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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근(李炫瑾) |
1912년~1940년.함경남도 북청에서 출생.서울경신고보 2학년 때 광주학생사건이 일어 나자 반일 투쟁과 만세운동을 주동하여 퇴학을 당하였으며 동경으로 도피하여 나가노 중학교에 편입하여 일본학생구절사건으로 1931년 4학년때 퇴학을 당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