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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진천송씨 스크랩 표옹 송영구
송형호 추천 0 조회 87 10.09.16 12: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출처   http://blog.daum.net/gochangking/6709518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왕궁면 계촌리

瓢翁(표옹) 宋英耉(송영구,1556-1620)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인수. 호는 표옹·일표(一瓢)·백련거사(白蓮居士) 시호는 충숙(忠肅).  성혼의 문인으로 1584년(선조17)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 정철의 종사관,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충청도 관찰사의 종사관이 되었다.

지평(持平) 때 성절사(聖節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헌납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00년 이조좌랑에 이어 청풍군수 등을 지내고, 1607년 성주목사로 나갔으나 권신 정인홍의 미움을 사 파직당했다.

1610년(광해군2) 사간에 이어 필선(弼善)으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1611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냈고,  1616년 병조참판이 되어 1618년 폐모론을 반대, 정청(庭請)에 불참하고 파직당했다.

전주 서산사(西山祠)에 배향되었다

 * 명나라 사신 朱之蕃이 소점한 瓢翁  宋英耉 墓


호남고속도로 익산 인터체인지 일대에는 진천(鎭川) 송씨의 선산이다. 선산에는 아주 아름답게 자란 오래된 육송들이 빽빽하게 서있다. 이렇게 잘 자란 소나무 밭도 그리 흔하지 않다. 이 소나무들은 송씨 집으로 시집올 때 친정아버지인 최상중이 딸에게 "시집갈 때  무엇을 주면 좋겠느냐?". 그러자 그 딸은 "변산 솔씨 서말만 주세요" 라고 하였다. 인터체인지 일대의 보기좋은 육송들은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최씨할머니의  솔씨가 성장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건축된 객사 가운데 그 연대가  가장 앞서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전주 객사 전면에는 커다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 씌어져 있다. 초서체의 호방하고 힘찬 필체이다.

풍패는 한나라 유방이 태어난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전주 역시 조선의 창업주 태조 이성계의 고향이기 때문에 왕도로서의 권위와 품격을 드러내기 위한 배려 였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주지번은 전주에서 서북쪽으로 50리 떨어진 왕궁면 장암리에 살고 있던 표옹 송영구를 만나기 위해 한양에서 내려오던 길에 전주객사에 잠시 들렀다가 기념으로 써준 것이다.

표옹은 임진왜란이 발생한 다음해인 1593년에 송강 정철의 서장관(書狀官) 자격으로 북경에 갔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그때 조선의 사신들이 머무르던 숙소의 부엌에서 장작으로 불을 지피던 청년이 장자의 남화경을 외우는 게 하도 신통하여 그 청년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표옹문집)

그 청년은 남월지방 출신인데 과거를 보기 위해 몇년전에 북경에 올라왔는데 여러 차례 시험에 낙방하다보니 가져온 노잣돈이 다 떨어져서 호구지책으로 이렇게 고용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때 표옹은 이 청년을 불쌍히 여겨 시험답안지 작성 방법을 가르쳐주었고, 자기가 지니고 있던 중요한 서적 수 편을 필사하여 주고, 거기다가 상당한 액수의 돈까지 손에 쥐어 주었다. 그후에 이 청년은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바로 이 청년이 주지번이다. 표옹은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 즉 지인지감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주지번은 을미년(1595년)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러니까 표옹을 만난지 2년 후에 수석 합격한 셈이다.

1606년 당시 주지번은 중국 황제의 황태손이 탄생한 경사를 알리기 위해 조선에 온 공식 외교 사절단의 최고책임자인 정사의 신분이었다. 그러한 주지번이 교통도 매우 불편했을 당시에 한양에서 전라도 시골까지 직접 내려온 것은 오로지 표옹의 은혜에 보답하기위한 사적인 일로서 주지번은 장암리에 살던 표옹을 일생의 은인이자 스승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지번이 왕궁면의 장암에 위치한 표옹집을 방문해서 남긴 흔적은 현재 두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망모당(望慕堂)이라는 편액이고, 다른 하나는 표옹의 신후지지를 택지해 준 것이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자기를 도와준 은인의 양택에는 망모당이라는 글자를 은인의 편안한 사후를 위해서는 음택지를 점지해 줌으로써 은혜에 보답한 셈이다.


    *. 진천송씨(鎭川宋氏)


우리나라 송씨의 선대는 중국 당나라 사람 송주은(宋柱殷)으로 그의 후손 송자영의 세 아들 대에서 3개의 본관으로 갈린다. 첫째 송유익의 후손은 여산송씨, 둘째 송천익의 후손은 은진송씨, 세째 송문익의 후손은 서산송씨가 된다. 송씨는 이들 본관을 합쳐 모두 29개의 본관이 있다. 

진천송씨의 시조는 송주은의 7세손 송순공(宋舜恭)이나, 계대가 불명하여 고려 때 평장사를 지낸 송인(宋仁)을 1세조로 한다. 1125년 충북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에서 출생한 송인이 진천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진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송인의 아들 송원겸이 고려 때 평장사에 올랐으며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한 송언기는 송원겸의 손자로 감찰어사를 지냈으며, 송언기의 아우 송언상은 대장군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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