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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 스크랩 신라왕조의 계보
송형호 추천 0 조회 37 12.05.02 12: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 혁거세거서간
  ■ BC 69 ∼ AD 4
  ■ 건국시조
  ■ 재위 - BC 57 ∼ AD 4
 
 신라 박씨의 시조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박혁거세라고 지칭된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건국설화가 있다. 서기전 69년 3월 1일 당시 사로 6촌의 촌장들이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 언덕 위에 모여서 임금을 모시어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할 것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때 양산 밑 나정이라는 우물 근처에 신기한 빛이 하늘에서 땅에 닿도록 비추고 있고, 흰말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가보니 큰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은 하늘로 날아가고, 알을 깨고서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동천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었다. 이 아이가 박혁거세이다. 알의 크기가 박과 같다고 하여 성을 박이라 하였고, 그 광채로 인하여 이름을 혁거세 혹은 불구내라고 하였다. 고허촌 촌장인 소벌공이 데리고 가 길렀다. 그리고 6촌의 촌장들은 신비롭고 기이하다고 하여 존경하였고, 나이 13세가 되어 이들에 의하여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왕의 칭호는 거서간 또는 거슬한이라 하였고, 나라이름을 서나벌, 서라벌, 서벌 혹은 사라, 사로라 하였다. 서기전 53년에 알영을 비로 맞아들였다.
 이 건국설화는 성읍국가 단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6촌장이란 이미 신라의 개국 이전에 분거하여 살았던 고조선의 유민들이었다. 따라서, 토착세력을 압도한 유이민 박씨집단을 상정할 수 있으며, 말 및 천신하강의 모티프로 볼 때 이들은 말을 토템으로 하는 천신족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혁거세, 불구내 등이 광명을 의미한다는데서도 그들의 태양숭배를 엿볼 수 있다. 이들은 이미 개국연대 이전부터 경주지역에 이주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개국연대가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서기전 57)라는 설은 문제가 있다. 첫째, 《삼국사기》가 신라 중심의 관점에서 신라의 건국을 고구려나 백제보다 먼저 잡은 것이 그러하다. 둘째, 갑자년이라는 간지가 참위설의 갑자혁명설에 입각한 듯하기 때문이다. 혁거세는 서기전 37년 서울에 성을 쌓아 금성이라 하였고, 서기전 32년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이 단계의 사로국은 대체로 경주평야를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
 서기전 28년 낙랑이 침범해 왔으나 국경에 있는 백성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으며 곡식더미가 들에 즐비한 것을 보고 ‘도덕의 나라’라 하고 스스로 물러갔다.
 서기전 20년 마한 왕이 공물을 보내지 않는다고 노하였으며, 이해에 호공을 마한에 사신으로 보냈다. 서기전 19년 마한왕이 죽자 사신을 보내어 조위하였다. 서기전 5년에는 동옥저에서 보낸 사신이 와서 말 20필을 바치기도 하였다.
 죽은 뒤 사릉에 장사지냈다.
 


2. 남해차차웅
  ■ ? ∼ 24
  ■ 신라 제 2 대 왕
  ■ 재위 - 4 ∼ 24

 

 성은 박씨. 혁거세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알영부인이고, 비는 운제부인 또는 아루부인이다. 누이동생으로 아로가 있다. 차차웅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왕은 남해왕뿐이며 《삼국유사》에는 거서간과 동격의 의미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차차웅을 자충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무를 의미하는 신라 방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남해왕 때는 정치 수장적 성격보다는 제사장적 기능이 강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서기 6년에 시조묘를 세우고 8년 탈해가 어질다 하여 맏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으며, 또 대보의 벼슬을 주어 나라의 일을 맡겼다.
 14년 왜와 낙랑의 침입을 막았으며, 재위 21년에 죽어 사릉원에 장사지냈다.

 


3. 유리이사금
  ■ ? ∼ 57
  ■ 신라 제 3 대 왕
  ■ 재위 - 24 ∼ 57

 

 성은 박씨. 노례이사금이라고도 한다. 남해차차웅의 태자이며, 어머니는 운제부인이다. 비의 이름은 알 수 없고, 일지갈문왕의 딸 박씨, 허루갈문왕의 딸 또는 사요왕의 딸이라는 세가지 설이 있으나, 일지갈문왕의 딸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이사금이라는 왕호는 이질금, 치질금이라고도 쓰는데, ‘잇금’을 의미하는 신라 방언이라는 전통적 해석이 있으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다. 사회적으로 이사금시대 왕의 성격은 부족연맹장이라는 설이 있으나, 어떻든 종래의 거서간시대보다는 문물제도면에서 향상된 시대였음은 인정할 수 있다.
 28년에 〈도솔가〉를 지었고, 32년에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이들에게 이, 최, 손, 정, 배, 설의 성을 주었으며, 17관등을 마련하였다고 하나 이때에 된 것은 아닌듯하다. 6부의 여자들을 두 편으로 갈라 길쌈을 짜게 하여 8월 15일에 그 많고 적음을 보아 승부를 결정짓는 가배놀이를 시켰는데, 이때 부른 노래가 〈회소곡〉이었다. 낙랑, 화려, 불내 등의 사람들이 북변을 쳐들어 왔으며, 맥국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삼국사기》에서는 40년에 이서국을 멸하였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14대 유례이사금의 기사가 착오된 것이라 한다. 재위 34년 되던 해에 탈해의 재능이 그의 두 아들보다 뛰어남을 들어 왕위를 잇게 하고 죽어, 사릉에 장사지냈다.

 

 

4. 탈해이사금
  ■ ? ∼ 80
  ■ 신라 제 4 대 왕
  ■ 재위 - 57 ∼ 80

 

 성은 석씨. 토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다파나국의 왕, 용성국의 함달파왕, 혹은 완하국의 함달왕 등이라는 여러가지 전설이 있다. 어머니는 여국왕의 딸 또는 적녀국왕의 딸이라고 한다. 왕비는 남해차차웅의 딸 아효부인이다. 부왕이 비를 맞아 임신 7년 만에 큰 알을 낳자, 왕은 좋지 못한 일이라 하여 버리게 하였다. 이에 보물과 함께 비단에 싸서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보냈다. 궤짝에 실린 탈해는 금관가야를 거쳐 계림동쪽 아진포에 이르렀다. 이때 한 노파에 의하여 건져지고 길러졌다. 그리하여 고기잡이로써 생업을 하며 양모를 공양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탈해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공부를 시켜, 학문과 지리에 두루 통달하게 되었다. 당시 이름난 신하인 호공의 집터가 좋음을 보고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에 묻어놓고는 자기의 집이라 우기니 관가에서는 주장하는 근거를 요구하였다. 이에 자신은 본래 대장장이였으니 땅을 파서 조사하자고 하여,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자 탈해가 승소하여 그 집을 차지하였다. 이같은 내용의 설화에서, 첫째 탈해집단이 경주 동해변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은 그가 죽은 뒤 동악신으로 봉사되었음에서도 확인된다. 둘째는 석씨부족이 어로를 주요생활수단으로 하였지만, 이미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적어도 철을 다루는 능력이 왕위계승에까지 연결되는 강점의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탈해는 서기 8년에 왕의 사위가 되고, 서기 10년에는 대보의 자리에 올랐으며, 유리이사금의 즉위시에 이미 왕위계승의 물망에 올랐지만, 유리이사금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먼저 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으며, 유리이사금이 탈해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탈해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해차차웅의 사위이니 결국 박씨집단의 일원이라는 동속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또, 철을 이용한 군사력 및 거기에 따르는 실질적인 정치실력파의 등장으로 박씨족과 석씨족이 연맹하였으며, 이것은 왕실세력의 폭을 넓혔다고 본다.
 서기 58년 호공을 대보로 삼고, 서기 64년 백제군이 와산, 구양의 두 성을 비롯하여 이후 4, 5회 공격해왔다.
 서기 65년(삼국유사에는 60년)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확인시켜보니, 금궤가 나무에 걸려 있고 그 아래 흰 닭이 있어, 궤를 열어보자 용모가 단정한 아이를 얻었는데, 이가 김알지이다. 왕은 시림을 계림이라 고치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 서기 67년 박씨의 인척으로서 주, 군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주주, 군주라 이름하였다. 서기 77년에는 가야의 군사와 황산진에서 싸웠다.
 죽은 뒤, 성북의 양정 언덕에 장사지냈다.

 

 

5. 파사이사금
  ■ ? ∼ 112
  ■ 신라 제 5 대 왕
  ■ 재위 - 80 ∼ 112

 

 성은 박씨. 유리이사금의 둘째아들로 태자 일성보다 인물이 뛰어나 즉위하였다고도 하고, 유리이사금의 아우인 내로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사요왕의 딸이고 왕비는 허루갈문왕의 딸인 사성부인이다. 비계가 김씨 한기부의 유력자임은 파사이사금이 유찬의 못으로 사냥갔을 때 이찬 허루가 딸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으며, 이어 허루는 주다가 되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파사이사금이 유리이사금의 직계라면 탈해이사금 이후 왕위를 계승한 것이 문제가 없으나, 그가 내로의 아들일 경우 월성에 기반을 둔 석씨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즉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87년에 가소성, 마두성을 쌓았으니, 이것은 경주를 벗어난 맨처음의 축성 기록이다.
 94년에 가야 군사가 마두성으로 쳐들어왔을 때 1,000여명의 기병을 사용하였으니, 이미 기마전투의 양상을 볼 수 있다.
 101년에 월성을 쌓아 궁실을 옮겼다.
 102년에는 음집벌국과 실직곡국 사이의 영토분쟁을 가야의 수로왕에게 부탁하여 해결해 준 뒤에 다시 음집벌국을 쳐서 병합하였다. 그러자 실직국과 압독국도 항복해왔다고 한다. 108년에는 다벌국과 초팔국을 합병하였다. 이러한 파사이사금의 치적에 근거하여 이 왕대를 고대국가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재위 33년에 죽자 사릉원안에 장사 지냈다.

 

 

6. 지마이사금
  ■ ? ∼ 134
  ■ 신라 제 6 대 왕
  ■ 재위 - 112 ∼ 134
 
 지미 또는 지마라고도 한다. 성은 박씨. 아버지는 파사이사금이고, 어머니는 허루갈문왕의 딸인 사성부인이며, 비는 갈문왕 마제의 딸 애례부인 김씨이다. 아버지인 파사이사금이 유찬의 못으로 사냥갔다가 돌아오면서 한지부를 지나게 되었는데, 이때 마제 이찬의 처가 딸을 데리고 나오자 태자 지마가 기뻐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때 혼담이 오간 것을 알 수 있다.
 115년·116년에는 친히 병력을 이끌고 황산하를 건너 가야를 침공하였다.
 125년 말갈군이 대령책으로 쳐들어 왔으나 백제의 원병이 물리쳤다. 《삼국유사》에는 음질국과 압량국을 멸망시켰다고 하였으나, 《삼국사기》에는 파사이사금 때의 기록으로 되어 있다. 재위 23년에 아들이 없이 죽었다.

 


7. 일성이사금
  ■ ? ∼ 154
  ■ 신라 제 7 대 왕
  ■ 재위 - 134 ∼ 154

 

 성은 박씨.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유리이사금, 일지갈문왕, 노례이사금의 형, 지마이사금이라는 네가지 설이 있지만 모두 타당성이 없다. 다만 148년에 박아도를 갈문왕으로 봉한 사실로 미루어 아도갈문왕이 유리이사금의 아들이며 일성이사금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어머니는 이간생부인이다. 비는 지소례왕의 딸 혹은 지마이사금의 딸이라고도 한다.
 138년 금성에 국가중대사를 회의하는 장소인 정사당을 설치하였으며, 여러 차례 말갈의 침입을 받고 그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기도 하였다.
 144년에는 모든 주군이 제방을 수축하고 전야를 넓게 개간하도록 명하였으며, 민간에서는 금은주옥의 사용을 금하였다.
 146년 압독이 모반하자 군사를 보내어 평정하였다.
 148년에는 박아도를 봉하여 갈문왕을 삼았다.

 

 

8. 아달라이사금
  ■ ? ∼ 184
  ■ 신라 제 8 대 왕
  ■ 재위 - 154 ∼ 184

 

 성은 박씨. 아버지는 일성이사금이고, 어머니는 지소례왕의 딸로 박씨이다. 왕비는 지마이사금의 딸인 내례부인 박씨로 8촌 사이의 족내혼이었다. 이와같은 족내혼은 박씨왕족의 힘을 규합하려는 세력연합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56년과 158년에는 계립령과 죽령을 각각 개통하여 소백산맥 이북까지 세력을 뻗쳤다.
 167년에는 군사 2만명과 8, 000명의 기병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서북쪽으로의 영토개척을 이루었다. 이러한 서북지역에 대한 영토개척을 석씨세력의 남하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는 미추이사금의 아버지인 구도가 파진찬이 된 사실을 친석씨계의 부상으로 보는 견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재위 21년부터 31년 사망할 때까지 기록의 공백이 있어 왕실세력의 교체와 관련하여 주목을 요한다. 결국 아달라이사금은 아들이 없이 죽고 석씨왕계가 즉위하게 되었다.

 

 

9. 벌휴이사금
  ■ ? ∼ 196
  ■ 신라 제 9 대 왕
  ■ 재위 - 184 ∼ 196

 

 발휘이사금이라고도 한다. 성은 석씨. 부계는 탈해왕의 아들인 구추각간의 아들로 되어 있으나, 연대상으로 탈해가 죽은 지 104년 만에 즉위한 것이므로 세대간의 차이가 너무 심하다. 따라서 이것은 탈해 이후 석씨세력이 쇠퇴하여 그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때문이거나, 벌휴계가 탈해의 후손이라고 억지로 끌어다 붙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벌휴가 홍수·가뭄 및 그해의 풍흉을 미리 알았고 사람의 사정을 알아맞혀 성인이라 불린 데에서 시조적 성격이 농후하며, 《삼국사기》 벌휴이사금 즉위조이외에 구추에 관한 기록이 없음에서도 짐작이 간다. 어머니는 김씨 지진내례부인이다. 벌휴가 즉위한 것은 아달라이사금이 죽고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웠다고 한다. 이는 전투능력을 비롯한 문화수준에 있어서 우위를 가진 새로운 세력집단이 경주로 진출하여 종래의 지배층을 압도한 것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석씨왕계의 성립 이후 신라는 보다 급격한 영역확대를 실현시켰다.
 185년에 구도와 구수혜를 처음 군주로 삼아 소문국을 치고, 이어 188년 모산성, 189년 구양성, 190년 원산향·부곡성 등지에서 백제와 공방전을 치렀다고 전한다. 왕비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머니가 김씨인 점으로 보아, 이제 박씨계는 고립되고 석씨와 김씨와의 제휴시대를 맞게 된 것으로 보인다.

 

 

10. 내해이사금
  ■ ? ∼ 230
  ■ 신라 제 10 대 왕
  ■ 재위 - 196 ∼ 230
 
 성은 석씨. 벌휴이사금의 태자인 골정과 둘째아들 이매가 일찍 죽고 골정의 아들 조분도 아직 어리므로, 이매의 아들 내해가 왕이 되었다. 어머니는 내례부인이며 비는 조분왕의 누이 석씨로서, 사촌간에 근친결혼을 하였다. 자녀로는 태자 우로와 병마사를 관장하였던 이벌찬 이음이 있었다. 그 밖에 조분왕의 비가 된 딸 아이혜가 있다. 재위기간 동안 백제와의 전투가 빈번하였는데, 214년에 요차성에 백제군이 쳐들어오자 반격하여 백제의 사현성을 함락시켰다. 그뒤 백제가 장산성을 침입하였으나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격퇴하였다. 또, 222년에도 백제가 우두주를 침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의 영토가 아니므로 믿을 만한 것은 못 된다. 그 밖에 가야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은 바 있다. 임금이 된지 35년이 되는 해에 죽었다.

 

 

11. 조분이사금
  ■ ? ∼ 247
  ■ 신라 제 11 대 왕
  ■ 재위 - 230 ∼ 247
 
 성은 석씨. 제귀라고도 하는데, 이는 제분의 잘못일 것이다. 벌휴이사금의 손자로, 골정갈문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구도갈문왕의 딸 옥모부인 김씨이고, 비는 내해이사금의 딸 아이혜부인이다. 내해이사금이 죽을 때 사위인 조분에게 왕위를 잇도록 유언하였다고 하지만, 조분은 이미 벌휴의 대손이었고 개인의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도 왕위 계승의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며, 왕비계 김씨세력의 영향력도 있었을 것이다. 즉위 후 영토확장에 주력하여 231년 7월에 감문국을 정벌하고, 236년 2월에는 골벌국을 병합하여 각각 군으로 삼았다.
 232년과 233년에는 금성과 변경에 침입한 왜적을 물리쳤으며, 245년에는 고구려가 북변을 쳐들어왔다. 이같은 대외전쟁을 주도하였던 장군은 내해이사금의 태자인 우로인데, 그는 244년에 이찬에서 서불한이 되었고 병마사도 맡아보았다.

 

 

12. 첨해이사금
  ■ ? ∼ 261
  ■ 신라 제 12 대 왕
  ■ 재위 - 247 ∼ 261

 

 일명 이해, 점해라고도 한다. 조분이사금의 동모제로, 아버지는 골정이고, 어머니는 옥모부인이다. 즉위년(247)에 아버지 골정을 세신갈문왕에 봉하였다. 따라서, 점해이사금의 즉위를 형제상속으로 보기도 하고, 골정계의 독립이라는 점에서 가계내의 계승으로 보기도 한다.
 248년 고구려와 화의를 맺었고, 255년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해왔으나 이를 빼앗기지 않았다. 한편, 영토의 확장에 노력하여, 달벌성을 쌓았으며 사벌국을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이때에는 사로국이 진한의 전지역을 통일하였다.
 261년 12월에 갑자기 병이 들어 죽었다.

 

 

13. 미추이사금
  ■ ? ∼ 284
  ■ 신라 제13대왕
  ■ 재위 - 262 ∼ 284

 

 미조 혹은 미고·미소라고도 한다. 미추의 계보는 알지에서부터 비롯하여, 알지 →세한 → 아도 → 수류 → 욱보 → 구도 → 미추로 이어진다.

 그러나 문무왕릉비문을 비롯한 금석문자료에는 김씨왕실의 시조를 성한이라 하여, 이를 세한으로 보는 설과 반대의 설이 있어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미추의 조상으로 역사에 나타나는 인물은 아버지인 구도로서 그는 8대 아달라이사금에서부터 9대 벌휴이사금 때까지 활약한 인물이며, 263년에 갈문왕으로 추봉되었다.
 구도는 이칠 갈문왕의 딸인 술례부인 박씨와 혼인하였고, 그의 딸인 옥모부인은 골정 갈문왕과 혼인하였다. 미추이사금의 비는 조분이사금의 딸인 광명부인으로, 결국 그는 조분이사금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 백제가 봉산성·괴곡성 등을 쳐들어왔다는 《삼국사기》의 기사가 있는데,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볼것인가는 학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재위 23년에 죽으니 대릉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14대 유례이사금 14년 이서고국이 금성을 쳐들어왔을 때 귀에 대나무잎을 꽂은 죽엽군이 갑자기 신라군을 도와 이들을 물리친 일이 있는데, 이들 병사들이 돌아간 곳을 찾아보니 죽장릉 위에 대나무잎이 쌓여 있어 선왕의 음덕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설화가 있다.
 

14. 유례이사금
  ■ ? ∼ 298
  ■ 신라 제 14 대 왕
  ■ 재위 - 284 ∼ 298

 

 《삼국사기》의 주에는 《고기》를 인용하여 3대와 14대의 두 임금의 이름이 유리혹은 유례로 똑같다고 하였다. 이른바 신라상고왕위계승의 허구론에 의하면, 눌지와 위의 두 왕이 같은 왕명으로서 ‘늙’의 의미를 가진 역사시대의 눌지가 상대로 투사되어 만들어졌다고도 하고, 이들 셋은 ‘누리’의 뜻을 지녔고 박, 석, 김의 3성에 각각 이러한 이름을 가진 왕이 병립하여 있던 것을 하나의 계보로 만들어 버린 결과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신라 상고의 기사를 그대로 믿는 경향으로 기울어져서, 유례이사금은 제11대 조분이사금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박씨 갈문왕 내음의 딸 □소부인인데 별빛이 입 속으로 들어와 잉태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런데 조분이사금의 비는 내해이사금의 딸 아이혜부인이므로 조분이사금의 비가 둘일리도 없으니, 조분이사금은 유례이사금의 할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설이 있다. 선왕 미추가 네명의 석씨왕에 이어 조분이사금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왕위는 다시 석씨인 유례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유례이사금의 비는 알 수 없다. 왜병이 일례군, 사도성, 장봉성 등을 공격하므로 왕은 백제군과 연합하여 왜에 원정할 것을 꾀하였으나, 서불한 홍권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293년 사도성을 개축하고 사벌주의 호민 80여가를 옮겼다.
 297년 이서고국을 멸하였다.

 

 

15. 기림이사금
  ■ ? ∼ 310
  ■ 신라 제 15 대 왕
  ■ 재위 - 298 ∼ 310

 

 기립이사금이라고도 부르는데, 조분이사금의 아들, 손자, 증손이라는 등 여러 설이 있으나, 나이 차이로 보아서 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기림이사금이 조분이사금의 손자나 증손일 경우, 아버지는 걸숙이고, 어머니는 아이혜부인이다.
 300년에 비열홀을 시찰하였고,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을 망제하였으며, 낙랑, 대방 두 나라가 귀속하였다고 하나 모두 믿기 어려운 기술이다.
 307년에 '덕업일신 망라사방'의 뜻을 따라 국호를 다시 신라로 정했다고 하나, 실제로 이것은 지증왕 4년의 일이었다.
 재위 13년 만에 사망하였고 묻힌 곳은 알려지지 않는다.

 

 

16. 흘해이사금
  ■ ? ∼ 356
  ■ 신라 제 16 대 왕
  ■ 재위 - 310 ∼ 356

 

 내해이사금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각간 수로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내해―우로―흘해로 계보가 이어지는데, 생존연대상으로 미루어 보아 우로와 흘해 사이에 2, 3세대가 더 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어머니는 조분이사금의 딸인 명원부인이다. 기림이사금이 아들이 없이 죽자 왕으로 추대되었다.
 312년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들의 혼인을 청하므로, 아찬 급리의 딸을 시집 보내어 화친을 꾀하였다. 그러나 그뒤 단교하였고, 왜병이 풍도와 변방 민가를 약탈하고 금성까지 포위하였으나 격퇴시켰다. 《삼국사기》에는 330년에 벽골지를 개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백제의 기록이 잘못 들어온 것 같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백제병이 처음으로 쳐들어 왔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두 나라가 처음으로 직접 충돌한 것이라고 보아 《삼국사기》의 초기 백제 관계 기사를 의심하게 한다.
 재위 47년에 아들 없이 죽었다.

 

 

17. 내물마립간
  ■ ? ∼ 402
  ■ 신라 제 17 대 왕
  ■ 재위 - 356 ∼ 402
 
▶ 가계
 성은 김씨. 구도갈문왕의 손자이며, 각간 말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휴례부인 김씨이고, 왕비는 미추이사금의 딸인 보반부인 김씨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미추이사금의 사위라 하였으나, 《삼국유사》의 왕력에는 미추이사금의 아버지인 구도갈문왕의 아들, 또는 미추이사금의 동생인 각간 말구의 아들이라고 기록하여 미추이사금의 동생 또는 조카로도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계보는 확실히 알기 어려우나, 다만 미추이사금과 일정한 근친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아마도 이 때문에 흘해이사금이 후계자가 없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왕이라는 칭호 대신에 《삼국사기》에는 '이사금'으로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마립간'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내물왕 때에 '마립간'의 왕호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이해하여 《삼국유사》의 설을 따르고 있다. 마립간은 수석장 또는 후세의 군장에 대한 존칭어인 상감에 해당하는 왕호로 짐작되고 있다. 왕호가 마립간이었다는 사실은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이 국가적 면모를 일신하여 국가체제가 정비됨으로써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기 때문에 더욱 존엄성이 있는 왕호가 필요해진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로써 내물마립간은 신라의 귀족들인 대등으로 구성되는 귀족회의가 중앙정청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남당'에서 주재하는 명실상부한 최고 통치자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또한 내물마립간 이후부터는 박, 석, 김의 삼성이 왕위를 교대로 계승하는 현상이 없어지고, 김씨에 의한 왕위의 독점적 세습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현상도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하여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 중국문물수입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내물마립간의 이러한 체제내적인 정비는 중국과의 국제관계에도 관심을 가지게 하여, 377년과 382년의 두 차례에 걸쳐서 고구려 사신의 안내를 받아 부견의 전진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382년에 전진에 사신으로 파견된 위두와 전진의 왕 부견 사이의 대화는 당시 신라의 사정을 살피는 데 있어서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태평어람》에 인용되어 있는 《진서》의 기사에 의하면 “그대가 말하는 해동의 일이 예와 같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라는 부견의 질문에 대하여 위두는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명호가 바뀌는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대답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사회에 변화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라사회의 변화도 당연하다는 것으로서 신라의 고대국가체제정비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와 같은 신라와 전진과의 외교관계는 곧바로 중국문물 수입의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국가체제 정비의 허실
 내물마립간대에 와서 신라가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게 된 이유는, 백제 근초고왕이 마한을 정복하고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하자 신라가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백제는 왜와 연합한 다음 왜병을 끌어들여 364년과 393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신라를 침범하였다. 신라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내부를 통합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고, 그 결과로 체제정비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신라 단독으로는 백제와 왜의 연합세력을 물리칠 수 없었기 때문에 신라는 우호적 관계에 있던 고구려의 군사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399년에 내물마립간이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자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그 이듬해 5만명의 보병, 기병 군사를 신라의 국경지대로 파견하여 백제군과 연합한 왜군을 크게 격파한 일이 있었다. 한편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군사적 지원은 결과적으로 신라의 자주적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즉, 고구려와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392년에는 내물왕이 고구려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냈다.
 401년에 귀국한 실성은 내물마립간이 죽은 뒤에 여러 아들들을 배제시켜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여기에는 고구려의 압력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이런 만큼 신라가 내물마립간 때에 대내적으로는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있었다 해도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에 대하여 군사적 지원을 요청해야 하였고, 그 결과 내정간섭을 받을 정도로 기반이 확고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밖에도 내물마립간 때에는 전국에 관원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위문하거나, 흉년이 든 하슬라 지방에 1년 동안 세금을 면제하여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백제의 독산성주가 300명의 주민을 이끌고 투항하자 백제와의 외교마찰을 감수하면서 이를 받아주었으며, 동북 국경지방에서는 말갈의 침입을 방어하였다.

 

 

18. 실성마립간
  ■ ? ∼ 417
  ■ 신라 제 18 대 왕
  ■ 재위 - 402 ∼ 417
 
 성은 김씨. 알지의 후손으로서 이찬 대서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아간 석등보의 딸인 이리부인이며, 왕비는 미추이사금의 딸인 아류부인이다. 왕은 신장이 7척 5촌으로 매우 컸으며, 명민하고 지혜가 많았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왕호가 이사금으로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처럼 내물왕 이래 마립간을 왕호로 사용하였다고 생각되므로 실성마립간이 옳은듯하다. 내물왕이 죽은 뒤 그 아들들이 나이가 어리므로 화백회의에서 실성을 추대하여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내물왕 때 실성이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내물왕을 원망하였다고 한 사실과 그가 401년에 고구려로부터 귀국한 다음해에 내물왕이 죽자 내물왕의 왕자들을 제쳐놓고 즉위한 점으로 미루어 그의 왕위계승에는 고구려의 군사적 후원이 작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403년에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서 미사품을 서불한으로 삼고 군국의 일들을 위임하여 통치하였다. 외교적인 측면에서는 왜와의 화호를 위해서 402년에는 내물왕의 왕자인 미사흔을 볼모로 보내고, 412년에는 고구려와의 우호적 관계 유지를 위해서 내물왕의 왕자인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실성왕의 인질외교는 왜와 고구려 양국과의 관계개선 내지 관계유지라는 대외적인 명분도 있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전왕인 내물왕이 왕자들을 외국에 볼모로 보냄으로써 내물왕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실성왕계를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와는 관계개선을 위한 외교적 노력 이외에 405년에는 왕이 친히 기병을 이끌고 명활성에 침입해온 왜병을 맞아 싸워서 300여명을 참획하는 군사적 응징도 가하였다. 이밖에 413년에는 평양주에 큰 다리를 준공하는 치척도 있었다. 실성왕은 내물왕의 태자인 눌지가 덕망이 있어서 자기의 왕권을 위협하므로 고구려의 힘을 이용하여 눌지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고구려는 눌지를 지원하여 정변을 일으켜서 실성왕은 살해되었다. 이 정변으로 실성왕의 모계인 석씨세력은 김씨계에 의하여 철저히 타도되어 소멸하게 되었다. 실성왕에 뒤이어 내물왕계인 눌지왕이 즉위하였다.

 

 

19. 눌지마립간
  ■ ? ∼ 458
  ■ 신라 제 19 대 왕
  ■ 재위 - 417 ∼ 458

 

 성은 김씨. 아버지는 내물마립간이고, 어머니는 미추이사금의 딸인 보반부인이며, 비는 실성이사금의 딸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최초로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보이는 마립간이 실제로는 내물왕 때 이미 사용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때에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 것은 종래의 왕호인 이사금이 마립간과 더불어 내물과 실성의 양대에 걸쳐 혼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92년에 내물마립간이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었는데, 401년에 귀국한 실성은 내물마립간에 이어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실성이사금은 즉위 후에 자신이 외국에 볼모로 갔던 것을 원망하여 고구려를 이용, 내물마립간의 아들 눌지를 해침으로써 원수를 갚으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정변을 일으킨 눌지에 의하여 살해되고, 눌지는 실성이사금에 이어서 즉위하게 되었다. 이처럼 그의 왕위계승에 고구려의 힘이 작용한듯이 보인다. 그러나 즉위 후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418년에는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동생 복호를 고구려에서 탈출시켰으며, 또한 왜와의 화호를 위해서 실성이사금 때 볼모로 보내졌던 동생 미사흔도 귀국시켰다. 그리고 고구려에 대해서는 424년에 사신을 보내어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고구려의 평양천도 이후의 남진정책에 대항하기 위하여 433년에는 종래 적대적 관계에 있던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였으며, 455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나제동맹에 입각하여 군사를 파견, 백제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미사흔을 귀국시킨 뒤, 왜가 431년·440년·444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서 신라를 침범하자 이를 모두 막아내었다. 그리고 450년에는 신라의 하슬라성주 삼직이 고구려의 변장을 살해한 일로 고구려가 공격해 오자 외교적인 사과로 해결하였다. 이와같이, 불안한 대외적인 위기상황 속에서 왕실 내부의 분쟁을 미리 막기 위하여 왕위계승의 부자상속제를 확립시켰다. 이 때문에 직계인 자비마립간과 소지마립간은 혼란없이 왕위를 계승할 수있었다. 이밖에도 중앙정청인 남당에서 왕이 친히 노인들을 봉양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였고, 저수지인 시제를 축조하여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도모하였으며, 또한 백성들에게는 우차의 사용법을 가르쳐서 화물유통을 쉽게 하였다.

 

 

20. 자비마립간
  ■ ? ∼ 479
  ■ 신라 제 20 대 왕
  ■ 재위 - 458 ∼ 479

 

 성은 김씨. 눌지마립간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실성이사금의 딸 김씨이고, 왕비는 내물마립간의 아들 미사흔의 딸 김씨를 461년에 맞아들였다. 눌지마립간대에 마련된 왕위의 부자상속제에 따라 즉위함으로써 보다 강화된 왕권을 보여주었다. 당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종래의 족제적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는 6부를 개편하는 일이 긴요하였는데, 469년에는 왕경인 경주를 지역적으로 구분하여 방리명을 확정함으로써 왕경의 족제적 성격을 탈피하고 행정적 성격을 강하게 하였다. 국내의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대비하여 눌지마립간 때에 체결되었던 백제와의 공수동맹을 보다 강화하였다. 이 공수동맹에 입각하여 474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백제의 개로왕이 아들 문주를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자 이에 군사를 파견하여 백제를 구원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구원병이 이르기도 전에 백제의 한산성은 함락되고 개로왕은 전사하였다. 이와같이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이 증대되자 자비마립간은 백성을 징발하여 니하, 삼년산성, 모로성, 일모성, 사시성, 광석성, 답달성, 구례성, 좌라성 등 일선지대의 요새지에 새로이 산성을 축조함으로써 고구려의 남하에 대한 방비와 아울러 이미 확보한 점령지의 효과적인 통치를 꾀하였다. 한편 몇차례에 걸친 왜의 침입이 있었는데 모두 효과적으로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463년에는 삽랑성을 침범하고 물러가는 왜병을 크게 격파하였다. 한편, 왕은 연해지방의 두 곳에 성을 쌓아 왜인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467년에는 전함을 수리하여 이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21. 소지마립간
  ■ ? ∼ 500
  ■ 신라 제 21 대 왕
  ■ 재위 - 479 ∼ 500

 일명 비처마립간이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이고, 자비마립간의 장자로서 어머니는 김씨로 서불한 미사흔의 딸이며, 왕비는 이벌찬 내숙의 딸 선혜부인이다. 왕은 어려서부터 효행이 있었으며, 스스로 겸손하고 공손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였다고 한다.
 487년에 사방에 우역을 설치하고 국내의 기간 도로인 관도를 수리하였으며, 490년에는 수도인 경주에 처음으로 시사를 열어 사방의 물화를 유통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자비왕대의 경주의 방리명확정과 아울러 족제적 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는 육부체제를 개편하여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수립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된다. 또한, 소지마립간은 비열성, 일선군, 날이군 등지를 순행하여 병사를 위문하고 재해지나 전쟁지역의 주민들을 위로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유식하는 백성들을 귀농시키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왕의 치적은 신라의 대내적 결속력의 강화와 아울러 농업생산력 증대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소지마립간대에는 고구려가 신라의 변경지방을 자주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맺거나 혹은 가야와도 연합하여 이하, 모산성전투에서 격파하였다. 특히, 493년에 소지마립간은 백제의 동성왕의 결혼요청을 받아들여 이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뒤 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하는 신라와 백제 양국의 공수관계는 더욱 공고해져 494년의 고구려의 신라침입때에는 백제가, 495년 고구려의 백제공격 때에는 신라가 각각 구원병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남하를 강력하게 저지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와의 전투과정에서 변경지방의 요충지에는 삼년산성 등을 개축하거나 증축하여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22. 지증왕
  ■ 437 ∼ 514
  ■ 신라 제 22 대 왕
  ■ 재위 - 500 ∼ 514

 

▶ 가계
 지증마립간이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 이름은 지대로인데 혹은 지도로, 지철로라고도 한다. 내물마립간의 증손이며, 습보갈문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로 눌지마립간의 딸인 조생부인이며, 왕비는 박씨로 이찬 등흔의 딸 연제부인이다. 왕은 몸이 건장하였으며 담력이 있었다고 한다. 재종형인 소지마립간이 후계자가 없이 죽자 64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 정치개혁과 국명제정
 502년에 순장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리고, 주군에 명하여 농업을 권장하도록 하였으며, 비로소 우경을 시행하도록 하는 일련의 개혁조처를 단행함으로써 농업생산력증대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이무렵에는 벼농사가 확대, 보급되면서 수리사업도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바로 우경이 시작되던 해에 순장을 금지시켰다. 이는 불교적인 의미도 없지 않겠으나 농업노동력의 확보라는 측면과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주목된다. 이러한 사회적 생산력의 발달에 기반을 두고 일련의 정치적 개혁을 시도하였다. 우선 503년에는 이제까지 사라, 사로, 신라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던 국명을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왕호를 방언인 마립간에서 중국식인 왕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지증왕은 비로소 고대국가로 정비된 신라국의 왕이 되었다. 이때에 제정된 국명인 신라의 의미는 “왕의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의 영역을 두루 망라한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국명 및 왕호의 한화정책은 단순한 명칭상의 변경만이 아니라 신라가 고대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왕권과 지배조직을 강화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요청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의 고도한 정치조직과 문물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 지방제도의 확립
 또한, 505년에는 친히 국내의 주, 군, 현을 정하였는데, 지방제도로서의 주군제도의 실시는 고구려, 백제, 가야 등의 삼국과의 전쟁에서 얻어진 점령지의 통치와 영토확장의 수단이었다. 즉,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의 수립을 위하여 새로이 신라의 영역내로 편입된 점령지를 행정적 차원에서 일원적으로 파악함으로써 효과적인 지방통치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해에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신라 최초의 군주로 삼은 것도 이러한 지방통치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신라의 군주제는 군사적 필요에 따라 수시로 이동할 수 있는 군정적 성격을 띠었으며,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실질적인 중간기구로서 기능하는 외직이었다.

 

▶ 군사업적과 민생시책의 실시
 한편, 군사적으로는 동북 방면에 파리성, 미실성, 진덕성, 골화성 등 12개성을 축조하여 대외적인 방비를 튼튼히 하고, 512년에는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을 복속시키게 하였다. 그리고 남쪽 방면으로는 신라가 아직 무력으로 완전정복하지 못한 아시촌에 소경을 설치하여 그곳 주민을 행정적으로 회유함으로써 신라의 직할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한 사전조처를 취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상복법의 제정, 서울에 동시의 설치, 선박 이익의 권장 등 일련의 의례와 민생에 관한 시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왕위에 오른 지 15년 만에 78세의 나이로 죽었다. 시호를 지증이라 하였는데, 신라에서 시법을 사용하기로는 지증왕이 처음이었다.


23. 법흥왕
  ■ ? ∼ 540
  ■ 신라 제 23 대 왕
  ■ 재위 - 514 ∼ 540

 

 성은 김씨 이름은 원종. 지증왕의 원자이며, 어머니는 연제부인 박씨이고, 왕비는 보도부인 박씨이다. 신장이 7척이나 되고 도량이 넓으며 남을 사랑하였다고 한다.

 

▶ 병부 설치
 법흥왕은 지증왕 때 일련의 개혁정치를 계승하여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완비하였다. 이같은 점에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517년에 설치한 중앙관부로서 병부의 존재이다. 신라에서 중앙관부로서는 병부가 제일 먼저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권을 왕이 직접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즉, 517년에 비로소 설치된 병부는 눌지왕 이후에 등장하여 왕의 직속으로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장군과 같은 직책을 중앙관부로 흡수하여 재편성한 것이다.

 

▶ 율령제정
 520년에는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공복을 제정하였는데, 이때에 반포된 율령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7관등과 골품제도 등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율령제정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왜냐하면 율령에 의하여 신라내로 통합된 이질적 요소들이 파악됨으로써 통치가 보다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법에 의한 이질적 요소의 강제적 해소는 상대적으로 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권력의 강화를 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상대등 설치
 그리고 이러한 국가권력, 즉 왕권의 강화를 단적으로 나타낸 제도가 바로 법흥왕대에 비로소 설치된 상대등이다. 상대등은 수상과 같은 존재로서 531년에 이찬 철부가 최초로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상대등은 신라의 최고관직으로서 대등으로 구성되는 귀족회의의 주재자였다. 이러한 상대등이 설치된 배경은 왕권이 점차 강화되어 왕이 귀족회의 주재자로서의 성격을 탈피하게 되자 왕 밑에서 귀족들을 장악할 새로운 관직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 외교관계
 법흥왕은 이와같이 대내적으로 체제를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영역확장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522년에 백제의 적극적인 진출에 반발한 대가야가 법흥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결혼을 요청하므로 왕은 이 제의를 받아들여 이찬 비조부의 누이동생을 보내어 동맹을 맺었다. 그뒤 법흥왕은 적극적인 남진정책을 추진하여 524년에는 남쪽의 국경지방을 순수하고 영토를 개척하였다. 이때 본가야의 왕이 와서 법흥왕과 회견하였는데, 아마도 투항 조건을 타진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 본가야는 532년에 금관국주 김구해가 세 아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옴으로써 정식으로 합병되었다. 본가야의 투항은 신라로 하여금 낙동강과 남해안의 교통상의 요지인 김해를 발판으로 가야의 여러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이밖에 대아찬 이등을 사벌주군주로 임명하여 서북방면의 점령지를 관리하게 하였다.

 

▶ 연호사용
 왕권강화와 영역확장 등에 힘입어서 국력이 신장된 신라는 536년에 비로소 독자적 연호인 건원을 사용하였다. 이로써 법흥왕 이래 신라 중고왕실의 거의 모든 왕들은 자기의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게 되었다. 동아시아의 전통사회에서 중국의 주변국가가 중국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자기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일단 중국과 대등한 입장에서의 국가임을 자각한 자주의식의 표현이라는 데 역사적 의미가 있다. 또한 521년에는 종래의 외교노선에서 탈피하여 위진남북조시대의 북조 대신에 남조인 양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것은 백제의 안내를 받고 실현된 것으로 보인다.

 

▶ 불교수용
 그리고 이때 신라에 사신으로 온 양나라의 승려 원표가 불교를 신라왕실에 전해준 것이 불교수용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불교가 신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5세기초 아마도 눌지왕 때이거나 혹은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불교전래의 경로는 고구려를 통한 것이었다. 초기의 전도자, 즉 신라불교 개척자로서의 명예를 지니게 된 것은 아도였다. 그는 인도의 승려로서 묵호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구려로부터 일선군 모례의 집에 숨어서 민간의 전도에 힘썼다. 민간에 전파된 불교는 신라귀족으로부터 동두이복, 의론기궤의 사교로 비난받았으나 신라와 중국과의 외교적 교섭이 열림에 따라 마침내 신라왕실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법흥왕은 불교를 크게 일으키려 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를 받아 고민하던 중 527년에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국가적 공인이 이루어졌다. 법흥왕에 의하여 국가종교로 수용된 불교는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형성에 있어서 이념적 기초를 제공하여 왕실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법흥왕이 말년에 승려가 되어 법호를 법공이라 한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재위 27년 만에 죽자 시호를 법흥이라 하고 애공사 장사지냈다.

 

 

24. 진흥왕
  ■ 534 ∼ 576
  ■ 신라 제 24 대 왕
  ■ 재위 - 540 ∼ 576

 

▶ 가계
 성은 김씨. 이름은 삼맥종 혹은 심맥부. 지증왕의 손자로, 법흥왕의 아우 입종갈 문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김씨이며, 왕비는 박씨로 사도부인이다.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왕태후 김씨가 섭정하였다.

 

▶ 영토확장
 신라의 대외적 발전을 비약적으로 추진시킨 왕이다. 즉위초에는 왕태후의 섭정을 받았으나 551년에 개국이라고 연호를 바꾸고, 친정을 시작하면서부터 적극적인 대외정복사업을 전개하였다.
 550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과 금현성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이듬해 병부령으로 임명된 이사부로 하여금 두 성을 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 이렇게 확보된 한강 하류유역의 전초기지를 기반으로 그해에 백제의 성왕과 연합하여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한강하류유역을 탈환하였으며, 진흥왕은 거칠부를 비롯하여 구진, 비태, 탐지, 비서, 노부, 서력부, 비차부, 미진부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한강 상류유역인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10개 군을 고구려로부터 빼앗게 하였다. 그리고 553년에는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한강하류유역의 전략적인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맹관계에 있던 백제를 기습공격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유역의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 지역의 통치를 위하여 신주를 설치하고, 아찬 김무력을 초대 군주로 임명하였다.

 

▶ 정복활동
 신라가 백제로부터 한강하류유역을 탈취한 사건은 백제와의 사이에 맺어졌던 결혼동맹을 파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백제 성왕은 554년 대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 전투에서 오히려 신주군주 김무력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하였으며, 백제군은 거의 전멸되었다.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은 인적 물적 자원의 획득 이외에도 황해를 통한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였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리하여 564년 이래 거의 매년 중국 남조의 진과 북조의 북제 두 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또한, 법흥왕의 가야에 대한 정복사업을 계승하여 낙동강유역에까지 정복의 손을 뻗쳤다.
 555년에는 비사벌에 완산주가 설치되었는데, 이 사실로 미루어보아 이전의 어느 시기에 아라가야와 비화가야지방이 신라에 의하여 점령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관산성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한 이후에 백제와 연합하였던 대가야는 사실상 신라에 복속된 처지와 다를 바 없게 되었다. 그런데 562년 백제의 신라공격에 힘입어 대가야가 신라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므로, 이사부를 보내어 무력으로 정복하여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신라는 가야의 여러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였으며, 낙동강유역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565년에 대야주를 설치하여 가야지역 통치의 본거지로 삼는 동시에 백제에 대한 방어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이밖에도 동북방면으로 북상하여 556년에 비열홀주를 설치하고 사찬 성종을 군주로 임명하였는데, 이곳을 근거로 하여 568년 이전 어느 시기에는 함흥평야까지 진출한듯하다. 이와같은 고구려. 백제. 가야에 대한 활발한 정복사업의 결과로, 신라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은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네개의 순수관경비와 최근 발견된 단양의 적성비가 이를 말하여주고 있다. 네 개의 순수비 중 경상남도 창녕군에 있는 창녕비는 561년에, 함경남도 함흥군에 있는 황초령비와 이원군에 있는 마운령비는 568년에 각기 건립된 것을 알 수 있으나, 다만 북한산에 세워졌던 북한산비는 건립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진흥왕의 순수관경비는 새로이 신라 영역내로 편입된 지역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확장된 영역을 확인하기 위하여 세워진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 국사편찬과 불교진흥
 진흥왕은 이같은 정복활동뿐만 아니라 대내적인 정치에 있어서도 많은 치적을 남겼다. 우선, 545년 이사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국사》편찬에 관계한 이사부와 거칠부가 모두 내물왕계 후예라는 점과 당시 왕족의 혈연의식이 상당히 고조되고 있었던 점 등을 고려할 때, 중고왕실 왕통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나아가 유교적인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왕자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담겼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법흥왕대에 공인된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였다.
 544년에 흥륜사를 완성하고, 사람들이 출가하여 봉불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었다.
 549년에는 양나라에 유학하였던 승려 각덕이 불사리를 가지고 귀국하자,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에서 영접하게 하였다. 그리고 553년에는 월성 동쪽에 왕궁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나자 왕궁을 고쳐서 불사로 삼고 황룡사라 이름하였는데, 이는 566년에 완공되었다.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사찰로서 이곳에는 574년에 신라 최대의 불상인 장륙상을 주조하여 모셨다. 황룡사가 완공되던 해에는 지원사와 실제사도 준공되었다. 이렇게, 신라왕실의 보호를 받는 불교는 경주를 중심으로 발전함으로써 도성불교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외형적인 사찰건축 외에도 565년에는 승려 명관이 불경 1, 700여권을 진나라에서, 576년에는 안홍법사가 《능가승만경》및 불사리를 수나라에서 각각 가져옴으로써 교리적인 발전의 기틀도 마련하였다.
 또한 572년에는 7일 동안 팔관연회를 외사에서 열어 정복전쟁기간에 전사한 장병의 영혼을 위로하였는데, 이것은 신라 불교가 국가의 현실적 필요에 부응할 수 있는 호국불교임을 나타낸 의식이었다.

 

▶ 화랑도의 창설
 이와같이 진흥왕은 불교의 현실적 필요성을 절감하고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한편, 그 자신도 불교에 매료되어 만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의를 입고 법호를 법운이라 하여 여생을 마쳤으며, 왕비도 이를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거처하다가 614년에 죽었다.
 마지막으로, 진흥왕대의 업적 중 간과할 수 없는 것이 화랑도의 창설이다. 진흥왕은 576년에 종래부터 있어오던 여성 중심의 원화를 폐지하고 남성 중심의 화랑도로 개편하였다. 기록상으로는 576년에 화랑도가 창설된 듯하지만, 실제로는 진흥왕 초기에 이미 화랑도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562년 대가야 정벌시에 큰 전공을 세운 사다함이 유명한 화랑이었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진흥왕은 대내외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신라중흥의 군주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대내적으로는 국가의식과 대외적으로는 자주의식의 상징적 표현이었던 독자적 연호를 세 개나 사용할 수 있었다.
 551년의 개국, 568년의 대창, 그리고 572년의 홍제가 그것이다.
 재위 37년 만인 576년 43세로 죽었다. 애공사 북봉에 장사지냈다.
 


25. 진지왕
  ■ ? ∼ 579
  ■ 신라 제 25 대 왕
  ■ 재위 - 576 ∼ 579

 

 성은 김씨. 이름은 사륜 혹은 금륜. 진흥왕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박씨로 사도부인이며, 왕비는 지도부인이다. 진흥왕의 태자 동륜이 572년에 죽었기 때문에 진흥왕에 이어서 즉위하여 무열왕계의 시조가 되었다. 당시의 왕위계승에 있어서는 이미 부자상속제가 확립되어 있었으므로, 진흥왕의 둘째 아들인 진지왕은 진흥왕의 적손, 즉 동륜태자의 아들인 백정(진평왕)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왕위계승권자가 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아마도 진흥왕대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거칠부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찬탈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추측은 진지왕이 즉위하던 해(576)에 거칠부를 상대등에 임명하여 국정을 맡긴 사실과, 재위 4년 만에 정란황음을 이유로 화백회의의 결정에 따라 폐위되었다는 것과, 또한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지 못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577년에 이찬 세종이 서쪽 변경의 주군으로 침입하여온 백제군을 일선군 북쪽에서 격파하여 3,700여명을 참획하는 전과를 올리고, 내리서성을 축조하여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리서성으로 통하는 길은 2년 뒤에 백제가 웅현성과 송술성을 쌓음으로써 막히고 말았다.
 578년에는 중국 남조의 진나라에 사신을 파견, 진흥왕 이래의 외교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재위 4년 만에 폐위되었다.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다.

 

 

26. 진평왕
  ■ ? ∼ 632
  ■ 신라 제 26 대 왕
  ■ 재위 - 579 ∼ 632

 

▶ 가계, 유년시절
 성은 김씨. 이름은 백정. 아버지는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이며, 어머니는 입종갈문왕의 딸인 만호부인인데, 혹은 만내부인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김씨로서 복승갈문왕의 딸인 마야 부인이다. 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몸이 장대하였으며, 의지가 깊고 식견이 명철하였다고 한다. 그는 작은아버지인 진지왕이 화백회의에 의하여 폐위되자 즉위하였다.

 

▶ 관제의 정비
 진흥왕대를 이어서 왕권을 지속적으로 성장시켰는데, 이것은 관제의 정비에 힘입은 바가 컸다. 즉위하던 해(579) 8월에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에 임명하여 일체의 국정을 맡기고,
 580년(진평왕 2)에는 지증왕의 증손인 이찬 후직을 병부령에 임명하여 군사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진평왕은 이 두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관제의 정비와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실시함으로써 독자적인 왕권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81년에 관리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를 설치하였으며, 583년에는 선박을 관리하는 선부서를 설치하고, 대감과 제감을 각각 1인씩 두었다.
 584년에는 국가의 공부를 관장하는 조부를 설치하고 조부령 1인을 두었으며, 같은해에 또 거승을 관장하는 승부를 설치하고 승부령 1인을 두었다. 그리고 586년에는 문교와 의례를 담당하는 예부를 설치하고 예부령 2인을 두었으며, 591년에는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영객부령 2인을 두었다.

 

▶ 관제분업체제의 확립
 여기서 진평왕대 초기인 580년대에 위화부·조부, 그리고 예부와 같이 중앙관부 중에서도 핵심적인 구실을 담당하는 관부가 설치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이 시기는 신라의 관제발달사상 발전기로서 새로운 행정관부의 창설뿐만 아니라 각 관청간의 분업체제가 확립되었다. 또한, 소속 관원수를 규정함으로써 조직화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어서 진흥왕대의 정복국가체제에서 관부정치체제로의 질적인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진평왕대 말기인 622년 2월 궁정관부를 총괄하는 내성사신을 설치하였고, 진지왕의 아들 김용춘을 처음으로 임명하였다. 이밖에도 623년 정월 병부에 대감 2인을 두었으며, 624년 정월 시위부에 대감 6인, 상사서와 대도서에 대정 1인을 각각 설치하였다. 다음으로 584년에 건복이라고 개원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천명하는 한편, 581년에 건국하여 위진남북조의 분열기를 극복하고 589년에 통일왕조로 등장한 중국 수나라와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 외교관계
 그리고 진평왕대에는 중국에서 발달한 고도의 불교문화를 수용하기 위한 고승들의 구법행과 귀국행이 빈번하게 있었는데, 고승들의 귀국은 대체로 외교사절의 귀국행차와 같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불교수용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지원을 짐작하게 한다. 진평왕 7년(585)에 남조의 진나라로 구법을 위하여 떠났던 고승 지명은 602년에 수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상군과 함께 귀국하여 왕의 존경을 받아 대덕이 되었으며, 589년에 진나라로 구법행을 떠났던 원광은 600년에 조빙사인 나마 제문과 대사 횡천과 함께 귀국하였다. 또한, 596년에 수나라로 구법행을 떠났던 고승 담육은 605년 수나라에 파견되었던 입조사 혜문과 함께 귀국하였다. 국가의 지원을 받았던 고승들은 종교적인 불사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국가사에도 참여함으로써 호국불교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냈다.

 

▶ 고구려 백제와의 관계
 마지막으로, 진평왕대에는 진흥왕대의 고구려·백제 지역에 대한 영역확장의 결과 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빈번한 침입을 받았다.
 602년에는 백제가 아막성으로 공격하여왔고, 603년에는 고구려가 북한산성으로 침입하여왔다. 이에 진평왕은 양국의 침입을 방어하는 한편, 608년에 수나라의 군사와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여 원광에게 〈걸사표〉를 짓게 하고, 611년에 이를 수나라에 보냈다. 그 결과 다음해에 수나라 양제의 고구려 정벌이 있게 되었다. 이후에도 백제는 611년에 신라의 가잠성을 함락시키고, 616년에는 모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624년 백제의 속함성을 비롯한 5성 공격에 대한 신라의 방어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와같이 신라는 여러 차례 백제의 공격을 받아 곤경에 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무렵 신라는 수나라를 이어서 618년에 중국의 통일왕조로 등장한 당나라와 621년부터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거의 매년 당나라에 외교사절을 파견하였다. 신라가 당나라와 수립한 외교관계는 고구려에 대한 당나라의 외교적 견제에 이용될 수 있었다. 즉,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으로 곤경에 처한 신라는 625년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빈번한 침입으로 말미암아 당나라에 대한 조공로가 막히게 됨을 호소하니, 이에 당나라 고조는 우선 626년에 사신 주자사를 신라와 고구려에 보내 양국이 화합하라는 외교적 중재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 결과 고구려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일시적으로 중지하기도 하였다. 진평왕은 당나라에 의한 고구려 견제라는 외교적 노력을 진행시키는 한편, 628년에 가잠성을 포위한 백제군을 격파하기도 하였으며, 629년에는 대장군 김용춘과 김서현·김유신 부자로 하여금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여 항복받기도 하였다. 재위 54년 만에 죽었다. 한지에 장사지냈다. 당나라 태종은 조서를 보내어 진평왕에게 좌광 록대부를 추증하였다.

 

 

27. 선덕여왕
  ■ ? ∼ 647
  ■ 신라 제 27 대 왕
  ■ 재위 - 632 ∼ 647

 

 성은 김씨. 이름은 덕만이다. 진평왕의 장녀로 어머니는 마야부인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위에 추대하고, 성조황고란 호를 올렸다고 한다. 즉, 선덕여왕 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성골’이라고 하는 특수한 왕족의식이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즉위하던 해인 632년에 대신 을제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전국에 관원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하였으며, 633년에는 주군의 조세를 일년간 면제해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634년에 분황사(芬皇寺)를, 635년에는 영묘사를 세웠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634년에 인평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중고왕실의 자주성을 견지하려고 했다. 다만 즉위 이래 거의 매년 당나라에 대해 조공사신을 파견함으로써 당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 백제의 신라에 대한 공격이 빈번해짐에 따라 당나라와 연합함으로써 국가를 보존하려는 자구책의 일환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신라는 642년 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본격적으로 받았다. 이해에 신라는 백제의 의자왕의 침공을 받아 서쪽 변경에 있는 40여성을 공취당하였으며,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도 고구려·백제의 침공을 받았다. 또한 백제장군 윤충의 침공으로 낙동강방면의 거점인 대야성이 함락당하였다. 이와같은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압량주 군주에 임명하여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는 한편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 무렵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자장의 건의에 따라 호국불교의 상징인 황룡사9층탑을 축조하기도 하였다. 신라의 구원요청에 접한 당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양국의 침범을 받게 되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한편 고구려에 대해서는 644년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적 견제를 가하였으나 이는 연개소문에 의해 거부되고 말았다. 그런데 당태종에 의해서 지적되었던 여왕통치의 문제점은 신라 정계에 파문을 일으켜 647년 정월에는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것을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는 김춘추와 김유신에 의해 진압되었다. 여왕은 이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위 16년 만에 죽으니 시호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에 장사지냈다.

 

 

28. 진덕여왕
  ■ ? ∼ 654
  ■ 신라 제 28 대 왕
  ■ 재위 - 647 ∼ 654

 

 성은 김씨. 이름은 승만. 신라 시대 3인의 여왕 중 한 사람이다. 진평왕의 친아우인 국반갈문 왕의 딸이며, 어머니는 월명부인 박씨이다. 진덕여왕은 자질이 풍만하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즉위하던 해(647)에 선덕여왕 말년에 반란을 일으켰던 비담을 비롯한 30인을 붙잡아 처형하고,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그리고 사신의 파견을 통하여 중국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지속시켰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힘을 빌려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진덕여왕이 즉위하면서부터 계속적으로 신라를 침공하여왔다. 이에 신라는 압독주 군주이던 김유신을 중심으로 백제의 공격을 막게 하는 한편, 648년에는 김춘추를 당나라에 보내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청병외교와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숙위외교를 전개하였다. 이리하여 신라는 지금까지 신라문제에 대하여 소극적이던 당나라의 태종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허락받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김춘추의 당나라에서의 외교활동은 결과적으로 신라 내정에도 많은 변화를 초래하여 정치개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즉,649년 중조의관제를, 650년에는 즉위 직후부터 사용하던 독자적 연호인 태화를 버리고 비로소 당나라 고종의 연호였던 영휘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와같이 중국의 관제와 연호의 사용 등은 김춘추의 건의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서 당나라의 선진문물의 수용이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당나라에 대한 신라의 정치적 예속도가 강화되었다는 부정적인 면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651년에 백관의 왕에 대한 정조하례제의 실시와 품주를 개편한 집사부의 설치는 왕권강화의 의미를 가지는 정치적 개혁으로 김춘추·김유신 일파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재위한 지 8년 만에 죽었다

 

 

29. 태종무열왕
  ■ 602 ∼ 661
  ■ 신라 제 29 대 왕
  ■ 재위 - 654 ∼ 661

 

▶ 집안내력
 성은 김씨. 이름은 춘추. 진지왕의 손자로 이찬 용춘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천명부인으로 진평왕의 딸이다. 비는 문명부인인데 각찬 김서현의 딸, 즉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이다. 김춘추는 의표가 영특하고 어려서부터 제세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진덕여왕을 섬겨서 관등이 이찬에 이르렀다. 진덕여왕이 죽었을 때 여러 신하들이 처음에는 왕위계승자로서 상대등 알천을 천거하였으나, 알천이 자신의 늙음과 덕행의 부족함을 들어 사양하고 그 대신 제세의 영걸로서 김춘추를 천거하였다. 이에 김춘추가 추대를 받아 즉위하여 신라중대 왕실의 첫 왕이 되니 당시 나이가 52세였다.

 

▶ 김유신과 밀착
 그의 즉위에는 오래전부터 상당히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있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와 정략적인 측면에서 혼인함으로써 왕위에서 폐위된 진지왕계와 신라에 항복하여 새로이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의 정치적·군사적 결합이 이루어졌다. 즉 진지왕계인 김용춘·김춘추는 김유신계의 군사적 능력이 그들의 배후세력으로 필요하였으며, 금관군주 김구해계인 김서현·김유신은 김춘추계의 정치적 위치가 그들의 출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호이익에 입각한 양파의 정치적 결탁은 신라 중고왕실의 진골귀족내에서 새로운 신 귀족 집단을 형성하게 되어 구귀족 집단의 반발을 받았으며, 선덕왕대 중반기까지는 적어도 신귀족과 구귀족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진 듯하다. 그러나 642년에 신라의 서방요충인 대야성이 백제에게 함락되고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 부처의 죽음은 김춘추계에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김춘추로 하여금 대외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게 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대야성에서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다. 그러나 고구려와의 동맹관계 수립을 위한 이 외교는 진흥왕 때에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공취한 한강 상류유역의 영토 반환 문제로 말미암아 결렬되고, 오히려 김춘추는 고구려에 억류당했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대야성에서의 패배와 고구려에 대한 외교의 실패 등은 김춘추와 김유신계의 정치적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결합을 바탕으로 김춘추는 647년에 일어난 구귀족 세력인 상대등 비담의 반란을 진압시킬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구귀족 집단의 대표자인 비담이 선덕여왕을 옹립하고 있는 신귀족 집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것인데, 오히려 김춘추·김유신계의 신귀족 세력에 의해서 30여명이 숙청당함으로써 분쇄되고 말았다. 이 정변의 와중에서 선덕여왕이 죽자 신귀족은 구귀족과 일시적으로 제휴하여 진덕여왕을 즉위시키고, 구귀족 세력의 대표인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비담의 반란 진압과 진덕여왕의 옹립 과정에서 김춘추·김유신계는 정치적 실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덕여왕 대에는 김춘추에 의한 새로운 방향으로의 외교활동과 내정개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 대당외교와 왕권안정노력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동맹관계 수립에 실패하자 다시 당나라와의 관계강화를위하여 648년에 당나라에 파견되어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추진하였으며, 당태종으로부터 백제공격을 위한 군사지원을 약속받았다. 김춘추에 의한 친당정책은 650년에 신라가 중고시대 전기간을 통하여 계속 사용하여 오던 자주적인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인 영휘를 신라의 연호로 채택한 데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한편 김춘추는 귀국 후에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내정개혁을 주도하였는데, 649년 중조의관제의 채택, 651년 왕에 대한 정조하례제의 실시, 품주의 집사부로의 개편 등 한화정책이 그것이다. 김춘추에 의하여 주도된 내정개혁의 방향은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하고 왕권강화를 실제적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진덕여왕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김춘추 자신이 즉위할 경우에 대비한 정치 작업으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친당외교와 내정개혁을 통하여 신장된 신귀족 세력의 힘을 기반으로 하여 김춘추는 진덕여왕이 죽은 뒤에 화백회의에서 섭정으로 추대되었고, 그리고 그와도 일시적으로 제휴하였던 구귀족 세력의 대표인 상대등 알천을 배제시키면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김춘추는 즉위에 있어서 그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폐위되었던만큼 화백회의에 의하여 추대받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구귀족으로부터 신귀족으로의 권력이양과 왕위계승의 합법성 내지 정당성을 유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무열왕은 즉위하던 해에 우선 아버지 용춘을 문흥대왕으로, 어머니 천명부인을 문정태후로 추증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이방부격 60여조를 개정하는 등의 율령정치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655년에 원자인 법민을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는 한편 아들 문왕을 이찬으로, 노차를 해찬으로, 인태를 각찬으로, 그리고 지경과 개원을 각각 이찬으로 관등을 올려줌으로써 자기의 권력기반을 강화시켰다.
 656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김인문을 군주에, 658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문왕을 집사부 중시에 새로이 임명하여 직계친족에 의한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그의 즉위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였던 김유신에 대해서는 660년에 상대등으로 임명하여 왕권을 보다 전제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것은 태종무열왕이 즉위하기 이전인 중고시대의 상대등은 귀족회의의 대표자로서 왕권을 견제하는 존재이거나 왕위계승 경쟁자로서의 자격이 있었던 것에 대하여, 태종무열왕이 즉위한 이후에 왕의 측근세력인 김유신이 상대등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상대등이 귀족세력의 대표라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전제왕권과 밀착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대등 중심의 귀족세력은 약화될 수 밖에 없으며 신라 중대사회에서는 전제왕권의 방파제 구실을 하는 행정책임자인 집사부 중시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화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 백제병합
 이와같이 친당외교를 통하여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삼고 내정에서는 측근세력의정치적 포석을 통하여 왕권을 안정시킨 다음 고구려·백제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였다.
 655년에 고구려가 백제·말갈과 연합하여 신라 북경지방의 33성을 공취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였고, 이에 당나라의 정명진과 소정방의 군사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또한 659년에는 백제가 자주 신라의 변경지방을 침범하므로 당나라의 군사를 청하여 660년부터 본격적인 백제정벌을 추진하였다. 3월에 소정방을 비롯한 수륙 13만명이 백제를 공격하여 5월에 왕은 태자 법민과 유신, 진주, 천존 등과 더불어 친히 정병 5만명을 이끌고 당군의 백제공격을 응원하였다. 7월에는 김유신이 황산벌전투에서 계백이 이끄는 5,000명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이어서 웅진성으로 피난하였던 의자왕과 왕자 부여 융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이는 신라의 숙원이던 백제를 병합함으로써 반도통일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사비성 함락 이후 9월에 당나라는 유인원의 1만명과 김인태의 7,000명의 군대로 하여금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10월에 태종무열왕은 친히 백제지역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이례성 등 20여성의 항복을 받고 11월에 백제로부터 귀환하여 백제정벌에서 전사한 자들과 전공을 세운 자들에게 상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그리고 항복해 온 백제의 관료들에게도 능력에 따라 신라의 관등을 주어 관직에 보임하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는 동안 고구려는 660년에 신라의 칠중성을 공격해왔고, 661년에는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말갈군과 연합하여 술천성을 공격하고 다시 북한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성주인 대사 동타천이 효과적으로 방어하였으므로 대나마로 관등을 높여 주었다. 이해에 압독주를 대야로 다시 옮기고 아찬 종정을 도독에 임명함으로써 정복된 백제지역의 관리에 적극성을 보였다. 재위한 지 8년 만에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영경사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시호는 무열이며, 묘호는 태종이다.

 

 

30. 문무왕
  ■ ? ∼ 681
  ■ 신라 제 30 대 왕
  ■ 재위 - 661 ∼ 681

 

▶가계와 어린시절
 성은 김씨, 이름은 법민. 태종무열왕의 원자이다. 어머니는 소판 김서현의 작은 딸이며, 김유신의 누이인 문명왕후이다. 비는 자의왕후로 파진찬 선품의 딸이다. 법민은 외모가 영특하고 총명하여 지략이 많았다. 진덕여왕 때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압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당나라에까지 가서 외교활동을 하였다. 부왕 태종무열왕 때 파진찬으로서 병부령을 역임하였으며 얼마 뒤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 백제정벌 참가
 660년에 태종무열왕과 당나라의 소정방이 연합하여 백제를 정벌할 때 법민도 이 전쟁에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661년에 태종무열왕이 미처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죽자 이에 법민이 왕위를 계승하여 삼국통일의 과업을 완수하였다. 그러므로 문무왕이 재위한 21년 동안은 거의 백제 부흥군, 고구려 그리고 당나라와 전쟁의 연속이었다. 문무왕은 즉위하던 해(661) 옹산성과 우술성에 웅거하던 백제잔적을 공파하여 항복을 받고 그곳에 웅현성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663년에 백제의 거열성, 거물성, 사평성, 덕안성의 백제잔적을 정벌하였다. 이때 각지에서 일어난 백제부흥군의 중심인물은 백제의 옛 장군인 복신과 승려인 도침이었다. 이들은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에 근거를 두고 웅진성을 공격하여 신라와 당나라의 주둔군을 괴롭혔다. 이에 문무왕은 김유신 등 28명의 장군과 함께 당나라에서 파견되어 온 손인사의 증원병과 연합하여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비롯한 여러 성을 함락하였다. 이어서 지수신이 끝까지 항거하던 임존성마저 정복함으로써 백제부흥운동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문무왕은 664년 백제왕자였으며 당나라의 지원을 받던 웅진도독부여 융과 화맹을 맺었다.

 

▶ 고구려 정벌
 한편, 문무왕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정벌하는 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즉위하던 해 당나라가 소정방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는 한편, 김유신을 비롯한 김인문, 진주 등의 장군을 이끌고 당군의 고구려 공격에 호응하였다. 대동강을 통하여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던 소정방이 이끌던 당군이 연개소문의 굳센 항전으로 고전하여 662년 김유신을 비롯한 9명의 장군으로 하여금 당군에게 군량까지 보급하게 하였으나 소정방은 당나라로 물러가고 말았다. 문무왕은 666년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여 한림과 삼광을 당나라에 보내어 군사를 청하고 667년 이세적이 이끈 당군과 연합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668년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당군이 신성, 부여성 등 만주의 여러 성을 차례로 공파하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포위공격하므로 문무왕도 6월 김유신, 김인문, 김흠순 등이 이끄는 신라군을 당영에 파견하여 당군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이리하여 9월 보장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문무왕은 고구려 멸망에 공을 세운 여러 장사에게 논공행상을 하고 11월 백제와 고구려의 평정을 선조묘에 고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점령지의 지배를 위하여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중심으로 9도독부, 42주, 100현을 두고 통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정적 조처는 고구려유민의 항쟁으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부흥운동 중에서도 특히 수림성사람으로 대형인 검모잠의 활동이 가장 두르러졌는데, 그는 보장왕의 서자인 안승을 왕으로 맞이하여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670년 안승이 검모잠을 죽인 다음 4천호를 이끌고 신라로 망명하므로 문무왕은 그를 금마저에 머무르게 하고, 고구려왕에 봉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의 부흥운동도 점차 그 세력이 약화되어 좌절하고 말았다.

 

▶ 당나라 축출과 삼국통일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삼국 전체를 자기의 영토로 삼으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이리하여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새로운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문무왕이 옛 백제땅인 금마저에 안승을 맞아들인 것도 고구려부흥 운동과 연결하여 당나라 및 당나라와 결탁한 웅진도독 부여 융의 백제군에 대항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한편, 문무왕은 670년 품일, 문충 등이 이끄는 신라군으로 하여금 63성을 공취하여 그곳의 인민을 신라의 내지로 옮기고, 천존 등은 7성을, 군관 등은 12성을 함락시켰다. 또한, 671년 죽지 등이 가림성을 거쳐 석성전투에서 당군 3천5백명을 죽이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때 당나라의 행군총관 설인귀가 신라를 나무라는 글을 보내오자 문무왕은 이에 대하여 신라의 행동이 정당함을 주장하는 글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여기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여 아찬 진왕을 도독에 임명함으로써 백제 고지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같은해 바다에서는 당나라의 운송선 70여척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에서도 신라와 당나라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특히, 신라가 백제의 고지를 완전히 점령한 뒤에 침략해온 당군과 전투가 가장 치열하였다.
 문무왕 672년 이래로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할 때와 마찬가지로 대군을 동원하여 침략해옴으로써 신라는 한강으로부터 대동강에 이르는 각지에서 당군과 여러 차례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나라는 674년 유인궤를 계림도 대총관으로 삼아 침략해옴과 동시에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일방적으로 신라왕에 봉하여 문무왕에 대한 불신의 뜻을 보이기도 하였다. 신라의 당나라에 대한 항쟁은 675년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해에 설인귀는 당나라에 숙위하고 있던 풍훈을 안내자로 삼아 쳐들어왔으나 신라장군 문훈은 이를 격파하여 1천4백명을 죽이고 병선 40척, 전마 1천필을 얻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서 이근행이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오므로 신라군은 매초성에서 크게 격파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이 매초성의 승리는 북쪽 육로를 통한 당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한편, 676년 해로로 계속 남하하던 설인귀의 군대를 사찬 시득이 지벌포에서 격파함으로써 신라는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당나라는 결국 676년 안동도호부를 평양으로부터 요동성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결과 신라는 많은 한계성을 지니는 것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이남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함으로써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무왕은 이와같이 삼국통일을 완수하는 과정에서도 국가체제의 정비를 위하여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증가한 중앙관부의 업무와 확장된 영역의 통치를 위하여 불가피한 조처였던 것이다. 우선, 문무왕이 재위한 21년 동안 잡찬 문왕을 비롯한 문훈, 진복, 지경, 예원, 천광, 춘장, 천존 등 8명의 인물이 행정책임자로서 집사부 중시를 역임하였다. 문무왕은 이 중에서 특히 문왕, 지경, 예원과 같은 자신의 형제들을 중시에 임명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통일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무왕은 671년과 672년에 걸쳐 병부, 창부, 예부, 사정부와 같은 중앙관부의 말단행정 담당자인 사의 인원수를 증가시켜 업무처리를 원활하게 하였다. 지방통치를 위해서는 673년 진흥왕대에 이미 소경을 설치한 중원에 성을 축조하였으며, 통일한 후인 678년 북원소경을, 680년 금관소경을 두어 왕경의 편재에서 오는 불편함을 극복하고 신문왕대에 완성되는 5소경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삼국통일 후의 신라군사조직은 신라민과 피정복민으로 구성된 중앙의 9서당과 지방의 9주에 설치된 10정이었다. 여기에서 9서당은 대체로 신문왕대에 완성되는 것이지만 9서당 중에서 백금서당은 문무왕이 백제지역을 온전히 점령한 다음해인 672년에 백제민을 중심으로 조직한 것이다. 또, 같은해 장창당을 두었는데 이것은 693년에 비금서당이 되었다. 이로써 보면 9서당 편제의 기초는 이미 문무왕대에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밖에 문무왕 672년 기병을 위주로 하는 지방군제의 하나인 5주서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문무왕의 체제정비작업은 675년 백사와 주군의 동인을 제작, 반포한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시호는 문무이며, 장지는 경상북도 경주군 감포 앞바다에 있는 해중왕릉인 대왕암이다


31. 신문왕
  ■ ? ∼ 692
  ■ 신라 제 31 대 왕
  ■ 재위 - 681 ∼ 692

 

▶ 가계
 성은 김씨, 이름은 정명 혹은 명지, 자는 일초. 문무왕의 장자이며 664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어머니는 자의왕후이다. 왕비는 김씨인데 소판 흠돌의 딸이다. 왕이 태자로 있을 때 비로 맞아들였으나 오래되어도 아들이 없었으며, 나중에 그 아버지의 반란에 연좌되어 왕궁에서 쫓겨났다. 683년에 다시 일길찬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 김흠돌 반란 진압
 신문왕대는 태종무열왕대부터 시작된 신라의 중대왕실의 전제왕권이 확고하게 자리잡힌 시기이다. 왕이 즉위하던 해에 왕의 장인인 김흠돌을 비롯한 파진찬 흥원, 대아찬 진공 등의 모반사건이 있었으나 모두 평정하였다. 김흠돌의 반란은 왕권전제화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던 것으로서 반란의 원인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신문왕비인 그의 딸이 아들을 낳지 못한 사실 또는 모반사건 바로 전에 진복이 상대등에 임명된 사실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이 사건에는 많은 귀족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대해서 신문왕은 주동자뿐만 아니라 말단 가담자까지도 철저한 숙청을 가하였다. 더구나 문무왕 때 상대등이던 이찬 군관도 이 반란의 모의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반란사건에 대한 불고지죄는 군관과 같이 막중한 지위에 있던 귀족을 숙청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이유로 보이지만 신문왕은 이 기회에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하려는 의도에서 과감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함으로써 전제왕권의 확립을 꾀하였다. 이러한 신문왕의 의지는 두 차례에 걸쳐 전국에 반포된 교서에 잘 반영되어 있다.
 682년에 동해에서 얻었다는 만파식적도 위의 모반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즉 만파식 적에는 김흠돌의 반란과도 같은 일체의 정치적 불안을 진정시키려는 왕실의 소망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제왕권하의 신라의 평화를 상징하여주는 것이었다.

 

▶ 국학설립
 같은해에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인재의 교육과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국학을 설립하고 여기에 경 1인을 두었다. 이것은 진덕여왕대에 이미 국학에 소속된 대사라는 관직을 설치함으로써 국학설립을 위한 준비가 착수되었던 것인데 신문왕대에 와서 비로소 완성을 보게 되었다. 한편 불교에도 관심을 두어 685년에는 봉성사와 망덕사를 준공하기도 하였다.

 

▶ 중앙관서 정비
 신문왕대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증대한 중앙관서의 업무와 확대된 영역의 지방통치를 위한 제도정비도 이루어졌다. 우선 중앙관부에서는 682년에 위화부령 2인을 두어 인재등용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게 하고, 공장부감과 채전감 각각 1인을 두었으며 686년에는 예작부경 2인을 두었다. 그리고 687년에는 음성서장을 경으로 올리고 688년에는 선부경 1인을 더 두어 늘어난 중앙관부의 업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특히 685년에는 각 관부에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사지가 설치됨으로써 문무왕 대에 설치된 말단행정 담당자인 사와 아울러 영, 경, 대사, 사지, 사의 5단계 관직제도가 완성되었다.

 

▶ 5소경 9주 완성
 지방의 통치제도에 있어서는 689년에 왕경을 지금의 대구인 달구벌로 옮기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왕경의 편재에서 오는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미 685년에 서원소경과 남원소경을 설치하고 진흥왕대에 설치된 국원소경을 중원소경으로 고침으로써 5소경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설치하여온 군정적 성격이 강한 주도 685년에 완산주와 청주를 설치함으로써 삼국통일 후의 확대된 영역의 효과적 지배를 위한 9주제를 비로소 완성하였는데, 686년과 687년에는 여기에 따른 주·군·현의 정비가 있었다.

 

▶ 9서당 5묘 완성
 마지막으로 중앙의 군사조직에 있어서는 신라인을 중심으로 고구려·백제·보덕국 및 말갈인을 두루 포섭하여 9서당을 완성하였다. 내외의 관제정비와 짝하여 689년에는 관리의 녹봉으로 지급하던 녹읍을 폐지하고 해마다 세조를 차등있게 지급하여 관리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이것은 녹읍을 통한 관리들의 경제력 확대를 억제시킴으로써 전제왕권을 보다 강화할 수 있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와 같은 중앙과 지방에 걸친 제도의 체계적 정비를 통하여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통치질서를 완비한 신문왕은 687년에 직계조상인 태조대왕, 진지대왕, 문흥대왕, 태종대왕, 문무대왕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중대왕실의 정통성을 수립하는 5묘제를 확립하였는데, 이것은 중국제후의 5묘제를 본뜬 것이다.
 692년에는 당으로부터 무열왕의 묘호인 태종이 당의 태종에 저촉되므로 외교적 간섭이 있었으나, 무열왕의 업적에 따른 불가피한 것이었음을 논함으로써 해결하기도 하였다. 능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낭산의 동남에 있다.
 


32. 효소왕
  ■ ? ∼ 702
  ■ 신라 제 32 대 왕
  ■ 재위 - 692 ∼ 702

 

 성은 김씨. 이름은 이홍 또는 이공. 신문왕의 태자이며, 어머니는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 김씨이다.
 691년(신문왕 11)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692년에 즉위하여서는 좌우이방부의 ‘이’자가 왕의 이름과 같으므로 피휘하여 좌우의방부로 관부의 명칭을 고치기도 하였다. 즉위하던 해에 대아찬 원선을 집사부 중시에 임명하여 국정을 위임하였다. 같은해에는 고승 도증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천문도를 왕에게 바쳤다. 천문도는 고구려에 전래된 진탁의 성도와 같은 것으로서 왕실권위의 상징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이 무렵에 의학 교육기관인 의학을 설립하여 의학박사를 두고 《본초경》, 《침경》, 《맥경》 등의 중국 의학서를 교수하게 하였다.
 695년에 서시전과 남시전을 두었는데 이것은 지증왕대에 설치된 동시전과 더불어 왕경의 3대시전으로서 물화의 유통을 쉽게 하였다. 이해에 자월(음력 11월)을 정월로 정하였다가 700년에 다시 인월(음력 1월)을 정월로 바꾸었다.
 698년에 일본국의 사신을 접견하였으며 699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함으로써 양국과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도 유지하였다.
 700년에 이찬 경영의 반란이 있었으며 이 사건에 연좌되어 698년에 중시로 임명되었던 순원이 파면되었다. 반란의 구체적인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어려서 즉위한 효소왕의 유약함과 왕자가 없음을 이유로 다음의 왕위계승을 위하여 일어난 것으로 짐작되며 쉽게 평정되었다.
 702년 7월에 죽어 망덕사동쪽에 장사지냈다. 능은 경주 낭산 동남쪽에 있다.

 

 

33. 성덕왕
  ■ ? ∼ 737
  ■ 신라 제 33 대 왕
  ■ 재위 - 702 ∼ 737
 
▶ 가계
 성은 김씨. 이름은 본래 융기였으나 뒤에 흥광으로 고쳤다. 신문왕의 둘째아들이며 효소왕과 친형제이다.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죽었으므로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비는 전비로 704년에 승부령이던 소판 김원태의 딸인 성정왕후를 맞아들였으나 성덕왕 15년에 왕궁에서 내보내고, 이찬 김순원의 딸 소덕왕후를 계비로 맞이하였다.

 

▶ 국내정치
 성덕왕대는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의 정치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사회전반에 걸쳐서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였다. 우선 정치적으로 국가의 행정을 담당하는 집사부의 중시가 일체의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됨에 따라 전제왕권은 보다 강화될 수 있었다. 아찬 원훈이 성덕왕이 즉위하던 702년에 중시에 임명된 이래로 원문, 신정, 김문량, 김위문, 효정, 김사공, 문림, 선종, 윤충 등 10명의 인물이 성덕왕대에 중시로서 활동하였다. 특히, 이들 중에서 원훈, 사공, 선종의 경우에는 천재지이에 따른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남으로써 중시가 전제왕권의 안정을 위한 방파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711년에는 왕이 백관잠을 지어 군신에게 제시하였다. 백관잠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전제왕권하에서 신하가 지켜야 할 계명을 적은 것으로서 유교적인 충군사상이 주요내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같이, 성덕왕대에 있어서 귀족세력의 약화는 귀족회의의 대표자였던 상대등의 위축된 활동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성덕왕대에는 효소왕 때부터 활동하던 이찬 개원을 비롯하여 인품, 배부, 사공 등 4명이 상대등으로 재직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없는 존재들이었다.

 

▶ 외교정책
 성덕왕은 국내의 정치안정을 기반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추진하였다.
 703년에 일본국의 사신을 접견하는 등 일본과의 관계도 유지하였지만, 특히 당나라와의 관계는 더욱 밀접하여졌다.
 703년에 아찬 김사양이 당나라에 조공한 이래 36년 동안 당에 파견된 신라의 사절 횟수는 43회로서 신라중대왕실의 다른 어느 왕 때보다도 많았으며 사절의 내용은 주로 조공과 숙위, 그리고 하정이었다. 이러한 당과의 빈번한 외교적 교섭은 신라의 국제적 지위를 확고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문물의 수입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하게 되었다.
 704년에 입당사 김사양이 귀국하여 최승왕경을 바쳤고, 717년에는 숙위 김수충이 귀국하여 문선왕과 10철 및 72제자의 화상을 바치므로 국학에 봉안하였다. 이는 전제왕권 안정에 필요한 정치이념으로서의 유교의 적극적 수용의지를 반영한 것이며, 728년에는 왕제인 김사종을 당나라에 파견하면서 신라 귀족자제들의 당나라 국학의 입학을 요청하였다.

 

▶ 위민농본정책
 717년에 의학박사와 산박사를 각각 1인씩 두었고, 718년에는 누각을 처음으로 제작하였다. 이러한 기술 관계의 관직설치와 시설은 모두 유교적 이상정치인 위민 및 농본정책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다. 성덕왕의 위민 및 농본정책은 특히 705년에 동쪽 주군의 백성들이 굶주리며 떠돌아 다니므로 관리를 파견하여 구재하였고, 706년에도 국내에 기근이 들자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을 구재하였으며, 6년에는 백성들에게 오곡의 종자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722년에는 모든 백성들에게 비로소 정전을 지급하였는데, 정전은 정을 기준으로 하여 백성들에게 지급한 토지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가 실제적으로 백성에게 토지를 지급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영농민이 본래 소유하고 있던 토지에 대한 국가적 인정을 뜻하는 것으로서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그 결과 국가는 농민으로부터 많은 세를 거두어들임으로써 재정적 기반을 튼튼히 할 수 있게 되었다.

 

▶ 국방정책
 국방시책으로는 721년에 하슬라도의 정부 2, 000명을 징발하여 북경지방에 장성을축조하는가 하면 722년에는 모벌군성을 축조하여 일본의 침입로를 차단하기도 하였다.
 731년에 일본의 병선 300척이 동해변을 습격하자 이를 공격하여 대파시켰다.
 733년에 당나라의 요청을 받고 고구려의 고지에서 건국하여 신라와 사실상 국경을 접하고 있던 발해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 735년에는 당나라와의 외교적 현안이었던 국경문제를 패강으로 확정지었다. 이로써, 신라의 영토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이남지역으로 결정되었다. 성덕왕은 이 지역의 민심수습과 북방경영을 위하여 이찬 윤충, 사인, 영술 등을 파견하여 평양주와 우두주의 지세를 조사하게 하였다.
 시호는 성덕이며, 이거사의 남쪽에 장사지냈다. 왕릉은 현재 경주시 조양동에 있다.


34. 효성왕
  ■ ? ∼ 742
  ■ 신라 제 34 대 왕
  ■ 재위 - 737 ∼ 742

 

 성은 김씨. 이름은 승경. 성덕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태자 중경이 717년에 죽었으므로 724년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성덕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어머니는 성덕왕의 계비인 소덕왕후이고, 비는 739년에 맞아들인 이찬 김순원의 딸 혜명이다. 효성왕은 즉위하면서 사정부의 승과 좌우의방부의 승을 모두 좌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승’자가 왕의 이름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즉위하던 해(737) 3월에 이찬 정종을 상대등에 임명하여 귀족회의를 관장하게 하고 아찬 의충을 집사부의 중시에 임명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739년 의충이 죽자 이찬 신충을 중시에 임명하고, 왕제인 헌영(경덕왕)의 관등을 파진찬으로 하여 태자로 삼았다. 또, 전 왕인 성덕왕 때에 정상화된 당나라와의 외교적 관계를 한층 강화하는 한편, 외교적 통로를 이용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특히 738년에 당나라 사신 형숙이 신라에 올 때 당나라 현종이 그에게 ‘신라는 군자의 나라’라고 일러준 것을 보아도 당시 신라의 문화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이때 형숙은 《노자도덕경》을 비롯한 서책을 왕에게 바쳤는데, 여기서 신라의 선진문물에 대한 수용자세를 엿볼 수 있다.
 740년에는 파진찬 영종의 모반사건이 있었으나 모두 평정되었다. 반란의 원인은 영종의 딸이 효성왕의 후궁이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왕비가 이를 시기하여 그의 족당과 더불어 후궁을 모살하였다. 이에 영종이 왕비의 족당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보면 단순한 여인들의 투기가 정치적 반란을 유발한 것 같으나 실제는 성덕왕대에 전성을 구가하던 중대 왕실의 전제왕권이 점차 약화되면서부터 그간에 축적되었던 정치적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것은 전제왕권 하에서 억압되었던 귀족세력이 왕권의 약화를 틈타 다시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741년에 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 정종과 경덕왕대에 상대등으로 활동하는 사인이 왕을 대신하여 열병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재위 6년째 되던 742년 5월에 죽으매 시호를 효성이라 하고, 유명에 따라 법류사 남쪽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뿌렸다.

 

 

35. 경덕왕
  ■ ? ∼ 765
  ■ 신라 제 35 대 왕
  ■ 재위 - 742 ∼ 765

 

▶ 가계·정치제도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헌영으로 알려진다. 성덕왕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소덕왕후이다. 효성왕의 친동생으로서 효성왕에게 아들이 없어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처음에는 이찬 김순정의 딸을 왕비로 맞았으나, 743년 다시 서불한 김의충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경덕왕 때에 이르러 새로운 귀족들이 세력을 확장하여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경덕왕과 행정 책임자였던 '중시'는 왕권강화를 위해 관제정비와 개혁조치를 실시했다.
 744년에 이찬 유정이 '중시'에 임명된 이후, 대정, 조량, 김기, 염상, 김옹, 김양상 등 7인이 경덕왕 때에 중시를 지냈다. 특히, 747년에 중시의 명칭을 '시중'으로 바꾸었으며, 또 국학에 제업박사와 조교를 두어 유학 교육을 진흥시키고, 748년에는 정찰 1명을 두어 관리를 규찰하게 하여, 전제왕권 체제를 유지하려 하였다. 왕권을 유지하려는 경덕왕의 노력은 전제왕권을 안정시킨 성덕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거대한 성덕대왕신종을 조성하기 시작한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밖에도 749년에 천문박사 1명과 누각박사 6인을, 758년에는 율령박사 2인을 두었다. 이것은 모두 백성을 생각하는 이상적인 유교정치의 기술적인 분야를 발전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덕왕의 개혁적 제도정비는 귀족세력을 견제하면서 전제왕권체제를 강화하려는 일종의 한화정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제도개혁 비판
 따라서 한화정책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745년에 이르러 귀족세력을 대표하여 상대등이 된 김사인 등이 그 비판의 주역이었다. 그는 756년 상소에서, 최근의 빈번한 천재지변을 들어 현실정치의 모순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시중에 대해서 정치적 책임을 물었다. 이때의 비판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경덕왕이 추진한 한화적 개혁정치가 비판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비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김사인은 757년 병을 이유로 하여 상대등에서 물러났고 대신 왕의 측근인 이찬 신충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755년에 시중으로 있는 동안 김사인의 비판을 받았던 김기가 757년부터 적극적으로 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즉, 757년에는 지방 9개주의 명칭을 비롯한 군현의 명칭을, 759년에는 중앙관부의 관직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덕왕과 집사부가 추진한 한화적 개혁정치는 성공하지 못했다. 다음의 혜공왕 때에 가서 모두 옛 명칭으로 환원된 것은 이같은 사실을 잘 말해준다. 이것은 다시 혜공왕 때에 귀족세력의 정치적 비중이 왕권보다 높아지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 외교와 말년의 정치
 경덕왕은 당나라와의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전통적 방법인 조공과 하정의 사신을 11회나 당나라에 파견함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일본과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못하였다. 경덕왕이 즉위하던 해에 일본 사신이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한 753년에 다시 왔으나 오만하고 무례하다는 이유로 왕이 접견하지 않고 돌려보냈다는 기록으로 이를 알 수 있다.
 757년에 내외관리의 월봉을 혁파하고 다시 녹읍을 부활시켰다. 이것은 새로이 성장하는 귀족세력의 경제적인 욕구가 지금까지 세조만 받던 월봉을 혁파하게 하고, 녹읍의 부활을 제도화시킨 것이라 하겠다. 경덕왕 말기에 정치적으로 성장한 귀족세력은 763년에 경덕왕의 측근세력이었던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옹을 면직시켰다. 왕당파인 이들의 면직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상에 나타나지 않으나, 왕권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의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은 김옹이 물러난 뒤 약 4개월의 공백기를 거쳐, 764년 만종과 양상이 각각 상대등과 시중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서, 양상은 나중에 상대등으로서 혜공왕을 시해하고 신라하대의 첫 왕인 선덕왕으로 즉위하는 인물로서, 경덕왕 때에 이미 귀족세력을 대표하고 전제왕권에 도전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경덕왕 말년의 정치는 왕권과 귀족세력의 정치적 타협 위에서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덕왕은 죽은 후 모지사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왕릉은 월성군 내납면 부지리에 있다.

 

 

36. 혜공왕
  ■ 758 ∼ 780
  ■ 신라 제 36 대 왕
  ■ 재위 - 765 ∼ 780

 

▶ 가계
 성은 김씨. 이름은 건운. 경덕왕의 적자로서 760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어머니는 서불한 의충의 딸 만월부인 김씨이고, 이찬 유성의 딸인 신보왕후가 원비, 이찬 김장의 딸인 창창부인이 차비이다. 혜공왕은 태종무열왕의 직계손으로 계승된 신라중대왕실의 마지막 왕이다.

 

▶ 시대상황
 즉위했던 때의 나이가 8세였으므로 왕태후가 섭정하였다. 혜공왕대에는 집사부 중시를 중심으로 강력한 전제왕권 체제를 구축했던 신라 중대사회의 모순이 본격적으로 노정되었다. 즉 전제왕권의 견제하에 있던 귀족세력들이 정치일선에 등장하여 정권쟁탈전을 전개함으로써 정치적으로 불안정하였다. 따라서, 혜공왕의 재위 16년 동안에는 많은 정치적 반란사건이 있었다. 먼저 일길찬 대공과 그의 동생 아찬 대렴 768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의 측근인물인 이찬 김은거를 비롯한 왕군에 의해서 토멸되었다. 이 반란은 경덕왕에 이어서 중대의 전제왕권 체제를 유지하려는 혜공왕 초년의 정치적 성격을 부인하려는 최초의 정치적 움직임이었다. 김은거는 이 반란의 진압에 대한 공로로 그해에 시중에 임명되었으며, 이찬 신유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 전제왕권 수립 실패
 그리고 769년에 왕은 임해전에서 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인재를 천거하게 하여 새로운 인재들을 모아 전제왕권 체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770년에는 대아찬 김융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도 대공의 반란과 마찬가지로 반혜공왕적 성격의 것이었다. 김융의 난으로 김은거가 시중에서 물러나고 이찬 정문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혜공왕대의 정치적 사건 중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774년 김양상이 상대등에 임명된 사실이다. 즉, 김양상은 경덕왕대에 시중을 역임하였으나 778년에 있었던 대공의 난에 연루되어 시중직에서 물러나고 왕의 측근인 김은거에게 시중직을 물려주었다. 이로써 보면 김양상은 적어도 친혜공왕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데 김양상이 다시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반혜공왕적인 귀족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전제왕권 중심의 중대사회에서 귀족중심의 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775년에는 김은거 및 이찬 염상과 정문의 모반이 두 차례에 걸쳐 있었다. 이들은 모두 전제왕권 유지를 지지하는 세력으로서 귀족세력인 김양상의 대두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두 진압됨으로써 김양상 중심의 정치세력은 더욱 공고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혜공왕일파는 실질적인 정치권력은 상실하고 명목상의 왕위만을 보전하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 무위로 돌아간 정권회복 노력
 그러나 이들이 정권회복에 대한 노력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혜공왕은 재위 16년 동안 11회의 조공, 하정 그리고 사은의 사절을 중국 당나라에 파견하였는데, 이 중에서 8회가 773년에서 776년에 이르는 4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매년 2회씩 파견된 것으로 774년에 있었던 김양상의 상대등 임명에 따른 신라내정에 있어서의 정권변동과 무관하지 않다. 즉, 보다 친당적인 혜공왕일파가 정권회복을 위하여 당나라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혜공왕일파의 이와같은 외교적인 노력도 777년 상대등 김양상의 상소에 의하여 신랄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상소를 통한 김양상의 혜공왕일파에 대한 정치적 경고는 친혜공왕파를 자극하게 되어 780년에 김양상일파를 제거하려는 이찬 김지정의 반란이 있었으나 오히려 김양상과 이찬 경신에 의하여 진압되고 말았다. 이 반란의 와중에서 혜공왕과 왕비는 살해되었다. 그리고 경신의 추대에 의하여 김양상 자신이 제37대 선덕왕으로 즉위하였다


37. 선덕왕
  ■ ? ∼ 785
  ■ 신라 제 37 대 왕
  ■ 재위 - 780 ∼ 785

 

 성은 김씨. 이름은 양상. 내물왕의 10세손이다. 할아버지는 각간 원훈이며, 아버지는 효방 해찬으로 개성대왕에 추봉되었다. 어머니는 김씨 사소부인으로 성덕왕의 딸인데 정의태후로 추봉되었다. 비는 구족부인으로 각간 양품의 딸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 양상의 행적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764년 정월에 이찬인 만종이 상대등에, 아찬인 양상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의 시중 임명은 전제왕권을 재강화하려던 경덕왕의 한화정책이 귀족의 반발로 실패하고 왕당파인 상대등 신충이 물러난 4개월 뒤에 이루진 점으로 보아, 그의 정치적 성격은 경덕왕의 왕권전제화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김양상의 활동은 혜공왕대에 접어들어 두드러졌다.
 771년에 완성된 성덕대왕신종의 명문에 의하면 그는 대각간 김옹과 함께 검교사숙정 대령겸 수성부령검교 감은사사각간으로서 종 제작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감찰기관인 숙정대의 장관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적 위치를 엿볼수 있다. 그는 혜공왕 10년에 이찬으로서 상대등에 임명되었고, 동왕 12년에는 한화된 관제의 복고작업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동왕 13년에는 당시의 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전제주의적인 왕권의 복구를 꾀하는 일련의 움직임을 견제하였다. 혜공왕 16년 2월에 왕당파이었던 이찬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자, 상대등이었던 양상은 4월에 김경신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지정을 죽이고 혜공왕과 왕비를 죽인 뒤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즉위는 무열왕계인 김주원을 경계하고 그들의 반발을 억제하려던 김경신의 강력한 뒷받침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784년에 왕위를 물려주려는 결심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병석에서 내린 조서에서도 항상 선양하기를 바랐다고 한 것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선덕왕의 치적은 두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즉위년의 어룡성에 대한 개편이다. 750년에 어룡성에 둔 봉어를 경으로 고치고 다시 감으로 바꾸었다. 또 하나는 패강진의 개척이다. 781년에 패강의 남쪽 주현을 안무하였고, 782년 한주에 순행하여 민호를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그 이듬해 1월에는 김체신을 대곡진 군주, 즉 패강진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개척사업을 일단 완료하였다. 이러한 패강진의 개척은 왕권을 옹호해 줄 배후세력의 양성 또는 왕실에 반발하는 귀족의 축출을 꾀하려는 정책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재위 6년 만에 죽으니, 불교의식에 따라 화장하고 그 뼈를 동해에 뿌렸다.

 

 

38. 원성왕
  ■ ? ∼ 798
  ■ 신라 제 38 대 왕
  ■ 재위 - 785 ∼ 798

 

▶ 가계
 성은 김, 이름은 경신. 내물왕의 12세손으로 아버지 효양은 명덕대왕, 할아버지 위문은 흥평대왕, 증조할아버지 의관은 신영대왕, 고조할아버지 법선은 현성대왕으로 추존되었다. 어머니는 계오부인 박씨이며 소문태후로 추봉되었고, 비는 숙정부인 김씨로 각간 신술의 딸이다.

 

▶ 김주원과의 왕위 다툼
 왕위에 오르기 전인 780년, 뒷날 선덕왕이 된 양상과 더불어 지정의 난을 진압하였으며, 이때에 혜공왕을 살해하고 양상이 왕위에 오르는 데 기여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그는 양상과 밀착된 인물로서 경덕왕 이래 왕실의 전제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혜공왕 말기의 혼란을 평정한 공으로 780년에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그뒤 선덕왕이 자식이 없이 죽자 태종무열왕의 6세손인 김주원과의 왕위다툼에서 승리하여 즉위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김주원과의 왕위계승다툼에 대한 설화를 전하고 있다. 당시 김경신보다 서열이 높았던 김주원이 왕위에 추대되었는데, 김경신이 복두를 벗고 소립을 쓰고 12현금을 들고 천관사우물로 들어가는 꿈을 꾸자, 여삼의 해몽을 듣고 비밀히 북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비가 와서 알천이 불어 김주원이 건너오지 못하였으므로 신하들이 경신을 추대하였다는 것이다. 또, 뒷날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킨 것을 보더라도 이 점을 짐작할 수 있다.

 

▶ 개혁정치
 785년에 원성왕은 총관을 도독으로 바꾸었으며, 788년에는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였다. 독서삼품과는 유교경전에 능통한 사람을 3품으로 나누어 실력에 따라 관리로 등용한 것으로, 이러한 개혁은 국학을 설치한 지 이미 1세기가 지난 당시 신라사회에 있어서 무예를 중심으로 한 종래의 관리등용법의 개혁이 요청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원성왕대는 하대권력구조의 특징을 이루는 왕실친족집단원에 의한 권력장악의 전형이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즉, 원성왕은 즉위와 동시에 왕자 인겸을 태자로 책봉하여 다음의 왕위계승권자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791년 1월 인겸태자가 죽자 그 이듬해 8월에는 왕자 의영을 다시 책봉하였다.
 793년 2월 의영태자가 죽자 왕손(인겸태자의 맏아들)인 준옹(소성왕)을 이듬해 1월 태자로 책봉하였다. 태자로 책봉된 준옹뿐 아니라 그의 동생인 언승(헌덕왕)도 정치의 중심부에서 활약하였는데, 이처럼 왕과 태자를 정점으로 한 극히 좁은 범위의 근친왕족들이 상대등, 병부령, 재상 등의 요직을 독점하고자 하였다. 또, 이들 근친왕족들에 의하여 왕위가 이어져 하대는 원성왕계로써 특징지어진다. 또, 786년에는 대사 무오가 병법 15권과 화령도 2권을 바쳤는가 하면, 왕 자신도 〈신공사뇌가〉를 지었는데, 그것은 인생 궁원의 변화에 대한 이치를 담은 것이라 한다. 이 책들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791년에 제공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하였다. 제공은 785년에 시중이 된 인물로 그가 일으킨 반란의 성격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같은해에 인겸태자가 죽으니 시호를 혜충이라 하였다. 그리고 제공의 반란이 진압되자 다시 혜충태자의 아들 준옹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 불교진흥과 외교
 원성왕은 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785년에 승관을 두어 정법전이라 하고, 795년에는 봉은사를 창건하였으며 망덕루를 세웠다. 처음에는 화엄종승려인 묘정을 편애하여 내전에 맞아들여 떠나지 못하게 하였으나 후에는 왕의 신임을 잃은 듯하다. 사신을 따라 중국에 갔을 때 자라한테서 얻은 구슬을 당나라 황제에게 빼앗기고 난 뒤부터, 묘정은 사람들의 사랑을 잃게 되었다는 설화가 이를 알려준다. 왕의 치적으로 790년 벽골제의 증축과 발해와의 통교를 들 수 있다. 이와 더불어 795년에 당나라의 사신이 하서국사람 둘을 데리고 와 신라의 호국룡을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잡아가려는 것을 막았다는 설화는 그가 상당한 독자외교를 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798년 12월 29일에 죽으니, 유명으로 봉덕사남쪽 토함악 서쪽동굴에 화장하였고, 능을 추복하기 위한 숭복사가 세워졌다. 아들은 태자로 책봉되었던 인겸과 의영과 예영이 있었고, 대룡부인, 소룡부인이라는 두 딸이 있었다.
 


39. 소성왕
  ■ ? ∼ 800
  ■ 신라 제 39 대 왕
  ■ 재위 - 799 ∼ 800

 

 혹은 소성왕이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성은 김씨, 이름은 준옹. 원성왕의 큰아들인 인겸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씨 성목태후이다. 비는 계화부인으로 숙명의 딸이다. 소성왕은 원성왕의 장손으로서 왕위에 오르기 전 궁중에서 자라면서 789년에 대아찬을 제수받고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며, 790년에는 파진찬을 제수받아 재상이 되었다.
 791년 10월에는 시중에 임명되었으나, 그 이듬해 8월에 병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태자에 책봉된 아버지가 일찍 죽고, 또 그에 뒤이어 태자가 된 숙부 의영이 또한
 794년에 죽자 그가 795년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798년 12월 29일 원성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소성왕의 치적으로 청주의 노거현을 학생녹읍으로 설정한 것을 들 수 있다. 재위 2년째인 800년 6월에 죽었다.

 

 

40. 애장왕
  ■ 788 ∼ 809
  ■ 신라 제 40 대 왕
  ■ 재위 - 800 ∼ 809

 

 성은 김씨. 이름은 청명인데 뒤에 중희라 개명하였다. 소성왕과 계화부인김씨 사이에서 원자로 태어나 800년 6월 부왕의 뒤를 이어 13세에 즉위하였다. 따라서, 즉위초부터 왕은 작은아버지인 병부령 김언승(헌덕왕)의 섭정을 받았다. 애장왕의 치적으로는 두가지를 들 수 있으니, 805년(애장왕 6) 공식20여조를 반포하였으며, 808년 12도에 사신을 파견하여 군, 읍의 경계를 정하였다. 이것은 애장왕의 중앙과 지방제도에 대한 개혁조치로 볼 수 있다. 공식 20여조를 반포하기 1년 전 동궁의 만수방을 새로 만들었으니, 이는 곧 태자의 위치를 굳건히 하려는 조처로 생각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취해진 공식 20여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개혁으로 봄이 마땅하다.
 805년 위화부의 금하신을 고쳐 영이라 하고, 예작부에 성 두 사람을 두는 등의 관제개혁 조처도 같은 성격으로 이해된다.
 806년에는 교지를 내려 불교사원의 새로운 창건을 금하고 오직 수리만을 허락하며, 금수로써 불사하는 것과 금은으로 기물만드는 것을 금하였는데, 이 조처 역시 2년 뒤에 취해진 지방 군현의 경계를 정하는 것과 연관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귀족들은 막대한 토지와 재력을 지니고 지방의 연고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대체로 원당과 같은 절을 세워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다. 애장왕 7년에서 9년에 이르는 개혁조처는 귀족세력을 왕권에 복속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왕권강화를 위한 애장왕의 개혁조처는 중대의 전제주의가 무너지고 귀족세력이 난립하는 하대사회의 풍조 속에서 많은 도전을 받아 성공할 수는 없었으며, 그 결과 그는 왕위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애장왕대의 개혁은 이전 경덕왕대의 한화정책을 이은 것으로 왕권강화이지만, 그 개혁의 주체는 애장왕이 아니라 당시 실력자인 김언승과 수종(흥덕왕)이라고도 추측된다. 애장왕은 국내정치의 개혁과 병행하여 대당외교 외에 일본과의 국교를 트고 있다.
 802년 12월 균정에게 대아찬을 제수하고 가왕자로 삼아 왜국에 사신으로 보내고자 하였으며, 803년에는 일본국과 우호하여 수교하였다. 그리하여 804년, 806년, 808년에 각각 일본국 사신이 내조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802년 순응, 이정에 의하여 가야산에 해인사가 세웠졌는데, 해인사는 당시 왕실에서 경영하는 절이었다.
 809년 7월 언승이 제옹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와 왕을 죽였다.

 

 

41. 헌덕왕
  ■ ? ∼ 826
  ■ 신라 제 41 대 왕
  ■ 재위 - 809 ∼ 826

 

 성은 김씨. 이름은 언승. 소성왕의 동생으로, 아버지는 원성왕의 큰아들인 혜충태자 인겸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 김씨이다. 할머니는 각간 신술의 딸 숙정부인 김씨이며, 비는 숙부인 각간 예영의 딸 귀승부인 김씨이다.
 790년에 대아찬을 제수받아 중국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다음해에는 제공의 난을 진압하는 데 가담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잡찬이 되었다.
 794년에 시중에 임명되고, 그 다음해에 이찬으로서 재상이 되었으며, 796년에는 병부령을 제수받았다. 이로 보면 그는 이미 원성왕 말년에 정치적인 세력기반을 확고하게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세력기반이 애장왕의 즉위와 함께 그를 섭정의 지위에 오를 수 있게 하였다. 애장왕대 그의 세력은 대단하여 그 집안이 당나라의 조정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801년에 어룡성의 장관인 사신이 되었고 이어 상대등에 올랐다. 애장왕대에는 정치개혁이 시도되었다. 곧 805년에 공식20여조가 반포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이와 관련해서 불사를 금하였으며, 808년에는 군·읍의 경계를 정하는 조처를 내렸다. 이러한 개혁은 대체로 중앙집권적인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다만 이러한 개혁의 주도자가 언승이라 추측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애장왕대 최고의 실력자였고 또 뜻을 같이하는 수종이 시중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809년에는 동생인 이찬 제옹과 더불어 난을 일으켰으며, 난중에 애장왕이 살해되고 언승이 왕위에 올라 헌덕왕이 되었다. 헌덕왕대에는 뚜렷한 정책이나 정치개혁이 보이지 않으나 애장왕 당시의 개혁정치가 그대로 이어졌다. 그에 못지않게 왕권강화에 도전하는 세력 역시 거세었다. 비록 난을 일으켜 왕위를 쟁취하였지만, 헌덕왕은 여전히 반대세력의 반발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 결과 정국은 날로 불안해져갔으며 빈번한 기근은 그것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814년에 서쪽 지방에 큰 홍수가 났으며, 815년에는 서쪽 변방의 주·군에 기근이들었다. 이후 816, 817, 820, 821년 등 계속하여 기근이 들었으며, 경우에 따라서 초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마침 당나라에서는 절도사 이사도의 반란을 당하여 신라에 출병을 요청하였다. 헌덕왕은 816년에 김웅원으로 갑병3만을 이끌고 반란의 진압을 돕도록 하였다. 이러한 국내외의 모순이 누적되면서 822년에는 중요한 두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녹진의 인사원칙에 대한 제언이고, 또 하나는 김헌창 난의 발발이다. 당시 충공이 상대등이 되어 인사를 처리하는데 갑자기 병이 들었다. 집사시랑인 녹진이 충공을 찾아가 인재의 쓰임을 목재의 쓰임에 비유하여 인사처리에 적절한 대책을 제언하였다. 그 말을 들은 충공은 물론 부군인 수종과 헌덕왕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때 녹진이 제시한 인사원칙은 왕당파에게 유리한 것으로 왕권에 반대하는 귀족에게는 불리한 것으로 이해된다. 곧 이어 일어난 김헌창의 난은 헌덕왕이 주도한 개혁정치에 반대하여 오던 귀족의 불만이 누적되어 일어났다. 또한, 녹진의 제안이 김헌창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것도 난이 일어나는 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장지는 천림사 북쪽이다.

 

 

42. 흥덕왕
  ■ ? ∼ 836
  ■ 신라 제 42 대 왕
  ■ 재위 - 826 ∼ 836
 
 성은 김씨. 이름은 수종, 또는 경휘·수승. 헌덕왕의 동생으로, 아버지는 원성왕의 큰 아들인 혜충태자 인겸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 김씨이다. 할머니는 각간 신술의 딸인 숙정부인 김씨이고, 비는 소성왕의 딸인 장화부인 김씨인데, 즉위한 해에 죽으니 정목왕후로 추봉되었다. 흥덕왕의 정치적 입장은 헌덕왕의 그것과 대체로 비슷하였다.
 804년 시중에 임명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언승(헌덕왕)과 함께 애장왕대의 개혁정치를 주도하였다고 생각된다.
 809년에 언승이 애장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을 세웠고, 헌덕왕대의 정치에 깊이 관여하였다.
 819년에 상대등에 임명되었고, 822년에는 부군이 되어 월지궁에 들어감으로써 왕위계승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즉위하면서 흥덕왕은 애장왕대로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개혁을 시도하였다.
 827년에 명활전을 설치하였다. 또는 그것이 914년에 설치되었다는 설도 있다. 829년 에는 원곡양전을 설치하였으며, 집사부를 집사성으로 고쳤다. 이때의 개혁은 귀족세력의 억제와 왕권강화를 위한 것이었으며, 헌덕왕대의 김헌창의 난을 마무리짓는 조처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흥덕왕대의 개혁은 이에 그치지 않고 834년에 모든 관등에 따른 복색, 거기, 기용, 옥사 등의 규정을 반포하였다. 이 규정은 왕이 당시 사치풍조를 금지시키기 위하여 발표한 것이라 하지만, 귀족들의 요구에 의하여 골품간의 계층구별을 더욱 엄격히 하고자 취해졌다. 특히 이 규정의 내용은 진골과 육두품을 비롯한 여하의 귀족이나 평민과의 차별을 더 뚜렷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골세력에 대한 배려를 깊이 깔고 있다. 이와 아울러 835년에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봉하였다. 이는 김헌창의 난 평정에 공을 인정받은 김유신 후손들의 현실적인 세력을 배경으로 취해진 조처이다. 그밖의 치적으로 변방에 진을 설치한 것과 불교에 대한 관심을 들 수 있다. 우선 828년에 궁복(장보고)이 중국 당나라의 서주에서 소장으로 활약하다가 귀국하였으므로 1만명의 병졸로써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게 하였다. 다음해에는 당은군에 당성진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827년에는 중 구덕이 당나라로부터 경전을 가지고 들어왔으며, 830년에는 도승 150명을 허가해주었다. 한편, 828년에는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돌아온 김대렴이 차종자를 가지고 돌아오니 흥덕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여 성하게 되었다. 흥덕왕은 앵무새에 대한 노래를 지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그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836년 12월에 죽었다. 장지는 지금의 경주시 강서면 육통리에 있는, 장화왕비와 합장된 흥덕왕릉이다.

 

 

43. 희강왕
  ■ ? ∼ 838
  ■ 신라 제 43 대 왕
  ■ 재위 - 836 ∼ 838

 

 성은 김씨. 이름은 제륭. 아버지는 원성왕의 손자로 익성대왕으로 추봉된 김헌정이고, 어머니는 순성태후로 추봉된 각간 충효의 딸 포도부인이다. 왕비는 충공갈문왕의 딸 문목부인 김씨이다. 아들은 뒤에 의공대왕으로 봉해진 계명이다. 왕이 되기 전 제륭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아버지 헌정이 819년에 병으로 다닐 수 없게 되자 왕으로부터 금장식의 자색 단장이 하사되었다. 흥덕왕이 죽자 사촌동생인 균정과 5촌 조카인 제륭이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다. 이에 시중인 김명과 아찬 이홍, 배훤백 등은 제륭을 받들고, 아찬 김우징과 조카인 예징 및 김양은 균정을 받듦으로써 한때 궁궐에서 서로 싸우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균정은 전사하고 김양은 화살을 맞아 우징 등과 더불어 청해진대사 궁복(장보고)에게로 달아나 의탁하였다. 싸움에 이긴 제륭이 즉위하였고, 김명이 상대등에, 이홍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838년에 불만을 가진 김명, 이홍 등이 다시 난을 일으키자 희강왕은 보전할 수 없음을 알고 자진하였다. 소산에 장사하였다.

 

 

44. 민애왕
  ■ ? ∼ 838
  ■ 신라 제 44 대 왕
  ■ 재위 - 838 ∼ 839

 

성은 김씨, 이름은 명이다. 아버지는 뒤에 선강대왕으로 봉해진 충공이고, 어머니는 선의태후로 봉해진 귀보부인 박씨이다. 할아버지는 원성왕의 큰 아들로 혜충태자로 봉해졌다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은 인겸이고, 할머니는 성목태후 김씨이다. 그리고 비는 각간 영공의 딸 윤용부인 김씨이다. 본래 김명은 희강왕이 되는 제륭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해왔다. 흥덕왕이 죽자 그 사촌동생인 균정과 5촌조카인 제륭이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다. 이에 시중인 김명과 아찬 이홍, 배훤백 등은 제륭을 받들고, 아찬 우징과 조카인 예징 및 김양은 균정을 받듦으로써, 한때 궁궐에서 서로 싸우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균정은 전사하고 김양이 화살을 맞아 우징 등과 더불어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도망하여 의탁하였다. 싸움에 이긴 제륭이 즉위하였으나, 불만을 가진 김명이 이홍과 같이 다시 난을 일으키자, 희강왕은 자진하고 김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김명(민애왕)은 다시 균정계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838년 청해진에 의탁하고 있던 우징 등이 장보고의 군사 5, 000을 이끌고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하여 진격해왔다. 김양, 염장, 장변, 정년, 낙금, 장건영, 이순행 등이 우징을 받들고 있었다. 이해 12월 민애왕은 김민주 등을 파견하여 무주 철야현에서 토벌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패배하고, 그 다음해 정월 달벌에서의 싸움에서도 대패하였다. 민애왕은 월유댁으로 도망갔으나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장지는 알 수없다. 그런데 현재 경주에는 민애왕릉이라고 전해오는 왕릉이 있다.

 

 

45. 신무왕
  ■ ? ∼ 839
  ■ 신라 제 45 대 왕
  ■ 재위 - 839

 

 성은 김씨. 이름은 우징. 할아버지는 혜강대왕으로 추봉된 원성왕의 아들 예영이며, 아버지는 성덕대왕으로 봉해진 균정, 어머니는 헌목태후로 봉해진 진교부인 박씨이다. 그가 아버지 균정과 함께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부상하게 되는 것은 헌덕왕 때였다. 812년에 균정은 시중에 임명되었으며,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자 우징 부자는 왕을 도와 반란군을 평정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828년에 우징은 시중에 임명되었다.
 834년에 균정이 상대등에 피임되자 우징은 아버지가 재상이 되었다는 이유로 시중직을 사퇴하고 대신 김명(민애왕)이 시중이 되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균정과 김명간의 대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흥덕왕이 죽자 그 사촌동생인 균정과 오촌 조카인 제륭(희강왕)이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다. 이에 김명과 아찬 이홍, 배훤백 등은 제륭을 받들고 우징과 조카인 예징 및 김양은 균정을 받듦으로써 한때 궁궐에서 서로 싸워 균정은 전사하고, 우징은 김양등과 더불어 청해진으로 도망하여 장보고에게 의탁하였다. 싸움에 이긴 제륭이 즉위하여 희강왕이 되었으나, 838년에 김명이 이홍 등과 함께 다시 난을 일으키자 희강왕은 목숨을 보전할 수 없음을 알고 자결하였다. 김명은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나, 그뒤 균정계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838년 청해진에 의탁해 있던 우징 등이 장보고의 군사 5, 000을 이끌고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하여 진격해왔다. 김양, 염장, 장변, 정년, 낙금, 장건영, 이순행 등이 우징을 받들고 있었다. 이해 12월 민애왕은 김민주 등을 파견하여 무주에서 토벌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패배하고, 그 다음해 정월 달벌에서 왕군과 토벌군이 맞부닥치게 되었다. 이때 민애왕을 대신하여 왕군을 이끈 자는 대흔, 윤린 등이었는데, 토벌군에게 대패하였다. 민애왕은 난중에 월유댁으로 도망갔으나 병사들에게 살해당하고, 우징이 왕이 되었다. 신무왕의 즉위는 원성왕의 큰아들인 인겸계와 균정계세력의 대립에서 균정계가 승리하였음을 의미한다. 균정계가 승리한 데에는 청해진세력과 이미 거세된 김주원계의 후손인 김양의 도움이 컸다. 신무왕은 즉위한지 반년도 못 되어 죽었기 때문에 별다른 경륜을 펴지 못하였으나, 다만 그는 장보고나 김양에 대하여 배려하고 있었던 듯하다.
 839년에 장보고를 감의군사로 삼아 2, 000호의 실봉을 내렸다. 반면 장보고도 이에 그치지 않고 딸을 왕비로 세우려 하였는데 이것은 청해진세력이 강대해졌음을 알려준다. 신무왕은 장보고 등 왕권에 압력을 가하는 세력을 제압하여야 하는 과업을 앞두고 죽었다. 능은 제형산 서북에 있다.

 

 

46. 문성왕
  ■ ? ∼ 857
  ■ 신라 제 46 대 왕
  ■ 재위 - 839 ∼ 857

 

 성은 김씨, 이름은 경응이다. 신무왕의 태자. 어머니는 정계부인, 할아버지는 원성왕의 손자이며 뒤에 성덕대왕으로 봉하여진 균정, 할머니는 뒤에 헌목태후로 봉하여진 진교부인 박씨, 비는 소명왕후이다. 본래 부인으로 박씨가 있었고, 또 뒤에 위흔의 딸로 비를 삼은 일이 있는데, 소명왕후는 이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신무왕은 흥덕왕이 죽은 뒤 계속되어온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하여 즉위하였지만 6개월도 못되어 죽어, 왕위쟁탈 과정에서 쌓여온 많은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숙제는 그 아들 문성왕대로 고스란히 넘어오게 되었다. 흥덕왕이 죽자 왕위를 둘러싼 균정계와 원성왕의 장자 인겸의 아들인 충공계와의 대립이 노골화되었다. 이 싸움에서 일단 패한 균정계의 우징은 청해진대사 장보고와 김주원의 후손 김양의 도움을 받아 민애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라 신무왕이 되었다. 그 결과 장보고와 김양 등 신무왕을 도운 귀족세력은 그에 상응한 정치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문성왕은 즉위하자 장보고를 진해장군으로 봉하고, 예징을 상대등에 임명하였고 김양에게 소판의 관등을 주면서 병부령으로 임명하였다. 반면, 이와같은 귀족세력은 왕권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841년 홍필의 모반은 그러한 모순의 첫번째였고, 846년에는 장보고의 반란이 있었다. 장보고는 딸을 왕의 차비로 세우려 하였는데, 조신들이 해도사람의 딸을 왕비로 맞을 수 없다고 반대하여 일이 성사되지 않자, 청해진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염장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일설에는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데 반대한 인물이 김양이라 하는데, 842년 김양이 그의 딸을 왕비로 세우는 기사가 이러한 추측을 낳게 한다. 장보고의 난이 진압되자 851년 청해진을 혁파하였으며, 그곳 민호를 벽골군으로 이주시켰다. 궁복(장보고)의 난 이후에도 정치적인 불안은 계속되었다.
 847년 이찬 양순과 파진찬 흥종의 반란이 있었고, 849년 이찬 김식, 대흔의 반란이있었다. 양순이나 대흔은 모두 신무왕을 도와 민애왕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전래로부터 계속된 왕위 다툼은 그대로 계속되다가, 857년 문성왕은 숙부 의정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유조를 내리고 죽었다. 이것은 그 한달 전에 문성왕을 도와오던 김양이 죽자, 상대등인 의정과 시중인 계명이 결합하고 왕을 핍박하여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47. 헌안왕
  ■ ? ∼ 861
  ■ 신라 제 47 대 왕
  ■ 재위 - 857 ∼ 861

 

 성은 김씨. 이름은 의정 혹은 우정이다. 신무왕의 이복동생으로, 아버지는 성덕대왕으로 봉해진 균정이고, 어머니는 충공의 딸 조명부인 김씨이며, 할아버지는 예영으로 원성왕의 아들이다. 슬하에 딸이 둘 있었는데 모두 다음 왕인 경문왕의 비가 되었다. 그리고 궁예는 왕의 서자로 알려져 있다. 왕위에 오르기 전의 행적은 잘 알 수 없으나 아마 아버지인 상대등 균정과 처남인 시중 김명 사이에 왕위계승문제로 암투가 격심하던 흥덕왕 말년(836)에 중국 당나라에 사행하였고, 왕위계승쟁탈전이 일단락된 뒤, 즉 문성왕이 즉위한 직후에는 시중을, 그뒤에는 병부령을 거쳤다가 다시 849년에는 상대등에 임명된듯하다. 그리고 857년에 서불한으로서 조카인 문성왕의 유조를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초에 비가 오지 않고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사람이 많자, 제방을 수리하게 하고 농사를 권장하였다.
 861년 1월,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운 지 오래되었으므로 왕위를 사위인 응렴(경문왕)에게 선위하고 그달 29일에 죽었다. 공작지에 장사하였다.

 

 

48. 경문왕
  ■ ? ∼ 875
  ■ 신라 제 48 대 왕
  ■ 재위 - 861 ∼ 875

 

 성은 김씨, 이름은 응렴, 혹은 의렴으로 부르기도 한다. 아버지는 계명이며, 어머니는 광화부인이다. 할아버지는 희강왕이며, 할머니는 충공의 딸인 문목부인김씨이다. 왕비는 헌안왕의 큰 딸인 영화부인김씨이고, 뒤에 헌안왕의 작은 딸도 왕비로 삼았다. 아들은 황(정강왕), 정(헌강왕), 윤이고, 딸은 만(진성여왕)이며, 동생으로 위홍이 있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일찍이 국선이 되었는데, 헌안왕이 불러 나라 안을 돌아다니면서 본 일을 묻자 선행을 행한 세 사람을 말하였는데, 첫째는 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하나 겸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요, 둘째는 부호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은 사람이요, 셋째는 고귀한 세력가이면서 그 위엄을 보이지 아니한 사람이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헌안왕이 어짐을 알고 사위로 삼고자 하여 왕의 두 딸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게 하였다. 이에 낭도인 범교사의 조언을 받아들여 왕의 큰 딸과 결혼하여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경문왕은 불교에 비교적 관심이 많아 낭도중에도 승려가 많았으며 864년에 감은사에 행차하였고, 866년에는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을 구경하기도 했으며, 871년에는 황룡사구층탑을 개조하였다. 경문왕은 불교 뿐 아니라 국학에도 관심이있어 864년에는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로 하여금 경전의 뜻을 강론하게 하였다. 즉위한 직후 나라를 잘 다스려보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때 왕의 정치를 도운 사람들 중에는 국선출신이 많았는데, 곧 요원랑, 예흔랑 등이다. 이들은 국토를 유람하면서 왕을 위하여 치국의 뜻을 노래로 짓고, 이를 다시 사지인 심필을 시켜 대구화상에게 보내어 〈현금포곡〉, 〈대도곡〉, 〈문상곡〉 등 3수의 노래를 짓게 하였는데, 경문왕이 이를보고 크게 기뻐하여 칭찬하였다고 하는데 가사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즉위 초 861년에 대사면을 실시하고 862년 이찬 김정을 상대등으로, 아찬 위진을 시중에 임명하였으며 866년에는 아버지 계명을 의공대왕, 어머니 광화부인을 광의왕태후, 왕비를 문의왕비로 봉하고 왕자 정을 태자로 삼는 등, 열의를 가지고 정치를 했지만, 진골귀족간의 오랜 분쟁은 일시에 바로잡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중기 이후에는 반란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866년 이찬 윤흥과 그 동생 숙흥, 계흥의 모역과, 868년 이찬 김예, 김현 등의 모반, 874년 근종 등의 모역이 있었다. 그리하여 경문왕은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죽었다. 한편, 경문왕은 산 뱀을 가슴에 덮고 자는 나쁜 습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을뿐 아니라, 당나귀 귀와 같은 큰 귀를 가졌다는 소문도 퍼져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역시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49. 헌강왕
  ■ ? ∼ 886
  ■ 신라 제49대왕
  ■ 재위 - 875 ∼ 886

 

 성은 김씨. 이름은 정.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문의왕후로 봉해진 헌안왕의 큰딸 영화부인 김씨이다.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 계명이고, 할머니는 광화부인이며, 비는 의명부인이다. 동생으로 황(정강왕), 만(진성여왕), 윤이 있었다. 서자로 요가 있어 뒤에 효공왕이 되었고, 딸은 신덕왕의 비가 되어 의성왕후에 봉하여졌다. 즉위한 뒤 헌강왕은 불교와 국학에 대한 관심을 아울러 가졌다.
 876년과 886년에 황룡사에서 백고좌강경을 설치하고 친히 가서 들었다. 이러한 왕의 사찰행은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을 위한 출행이었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망해사가 세워진 것도 헌강왕대이다.
 879년에는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로 하여금 강론하게 하였으며, 883년에는 삼랑사에 행차하여 문신들로 하여금 시1수씩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879년에 신홍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하였다. 그뒤 헌강왕대에는 신라가 태평성대를 누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880년에 왕이 좌우를 거느리고 월상루에 올라 서울의 사방을 바라보면서, 백성들의 집이 볏짚이 아닌 기와로써 이어졌고 밥할 때 장작이 아니라 숯을 땐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유함은 신라 전체가 아닌 이른바 금입택과 같은 진골귀족의 부강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오히려 신홍 등의 반란은 하대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헌강왕대에 신라 하대사회의 위기의식을 나타낸 기록이 보이고 있다.
 879년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군을 순행하였을 때 어디서 온지를 모르는 네 사람이 어가를 따르며 춤을 추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산과 바다의 정령이라 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신이 나타나서 춤을 추니,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이라 한다. 또 헌강왕이 금강령에 갔을 때 북악신과 지신이 나와 춤을 추었다. 그 춤에서 “지리다도파”라하였는데, 이것은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리 알고 도망하여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라 한다. 한편, 동해안의 개운포에 놀러갔다가 동해 용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처용을 만나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 〈처용가〉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처용을 지방세력가의 자제로 보아 헌강왕대에 기인제도가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또한 886년 봄에는 적국인 보로국과 흑수국사람들이 신라와 통교를 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헌강왕은 중국 당나라와 일본과의 교섭을 꾀하기도 하였다.

 

 

50. 정강왕
  ■ ? ∼ 887
  ■ 신라 제 50 대 왕
  ■ 재위 - 886 ∼ 887

 

 성은 김씨. 이름은 황.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로 의공대왕으로 추봉된 계명이고, 할머니는 광의왕태후로 추봉된 광화부인이다.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맏딸로 문의왕후에 봉하여진 영화부인이다. 정(헌강왕), 만(진성여왕), 윤과 형제간이다. 짧은 재위기간 동안에 887년에 정월 황룡사에서 백좌강경을 설치하였고, 이찬 김요가 한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였다.
 5월에 병이 들어 시중 준흥에게 병이 위급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아들이 없으므로 누이 만으로 왕위를 잇게 하라고 부탁하고, 7월 5일에 죽었다. 보리사 동남에 묻혔다.

 

 

51. 진성여왕
  ■ ? ∼ 897
  ■ 신라 제 51 대 왕
  ■ 재위 - 887 ∼ 897

 

 신라 시대 3인의 여왕 중 마지막 여왕이다. 성은 김씨. 이름은 만.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로 의공대왕에 봉해진 김계명이며, 할머니는 광화부인으로 광의왕태후로 봉해졌다.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장녀로 뒤에 문의왕후에 봉해진 영화부인 김씨이다. 형제로는 정(헌강왕)·황(정강왕)·윤 등이 있다. 진성여왕은 즉위 직후 주·군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고, 황룡사에 백좌강경을 설치하는 등 민심수습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887년(진성여왕 2) 2월 숙부이자 남편이었던 상대등 위홍이 죽자 정치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대야주에 은거하던 왕거인의 국왕 비판 등이 있었으며, 888년부터는 주·군으로부터 세금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 국고가 비게 되었다. 이에 관리를 각지에 보내어 세금을 독촉하였고, 이를 계기로 사방에서 도적이 봉기하게 되었다. 이때 원종과 애노가 사벌주에서 난을 일으켰으나 이를 토벌하지 못하였다. 이 난을 계기로 계속해서 적당의 난이 일어났다.
 891년에 북원의 적수 양길이 부하인 궁예를 시켜 동쪽으로 원정하게 하여 명주까지 함락시켰다. 그 다음해에는 완산주에서 견훤이 스스로 후백제를 건국하니 무주 동남쪽의 군현이 모두 그에게 항복하였다.
 895년에는 영주를 손에 넣은 궁예가 다시 저족·생천을 거쳐 한주·철원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영역은 경주를 중심한 그 주변지역에 그치고, 전국토는 대부분 적당이나 지방호족세력의 휘하에 들어갔다. 또, 896년에는 이른바 적고적이 경주의 서부 모량리까지 진출하여 민가를 약탈하는 등 수도의 안위조차 불안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은 894년에 시무10조를 제시하였다. 이 제의는 받아들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진골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최치원의 개혁안은 육두품 중심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어서 진골귀족의 이익과는 배치될 수 있었다. 이 개혁이 시대적 한계성 때문에 시행되지 못함으로써 신라의 붕괴는 막을 수 없었고 후삼국이 정립하게 되었다.
 897년 6월 조카인 헌강왕의 아들 요(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해 12월에 죽었다. 황산에 장시지냈다. 한편, 진성여왕 때에는 거타지 설화가 알려져 있는데, 그 내용은 고려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이 용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설화와 비슷하다.

 

 

52. 효공왕
  ■ ? ∼ 912
  ■ 신라 제 52 대 왕
  ■ 재위 - 897 ∼ 912
 
 성은 김씨. 이름은 요. 헌강왕의 서자이며, 어머니는 의명왕태후로 추존된 김씨부인이다. 할아버지는 경문왕이고, 할머니는 헌안왕의 장녀 영화부인이며, 비는 이찬 예겸의 딸이다. 헌강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길에서 자색이 뛰어난 한 여자를 만났는데, 뒤에 헌강왕이 궁궐을 빠져나가 그 여자와 야합하여 태어난 아들이다. 뒤에 이 사실을 안 진성여왕에 의하여 헌강왕의 혈육이라 하여 895년에 태자로 봉하여지고, 뒤이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재위시 신라는 왕실의 권위가 떨어져서 지방에서 일어난 궁예와 견훤이 서로 패권을 다투는 형세였다. 우선, 지금의 청주나 충주 이북지역은 완전히 궁예의 세력권에 속하게 되었다. 궁예는 901년에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고, 904년에 백관을 설치하였으며, 그 다음해에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신라는 907년에 서남쪽에서 점점 세력을 키운 견훤에게 일선군이남의 10여성을 빼앗겼다. 한반도에서 궁예와 견훤의 세력다툼은 점차 열기를 더하여 갔다. 한편, 궁예의 부하 왕건은 903년 병선을 이끌고 금성 등 10여 군현을 공취하였다. 이후 서해의 해상권은 대체로 왕건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909년에 왕건은 진도군과 고이도성을 공취하였으며, 견훤이 중국 오월에 보낸 사자를 나포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910년에 왕건은 나주를 다시 뺏기 위하여 포위 공격하여 온 견훤군을 대파하였다. 서해상에서 왕건의 전승은 그가 다가올 사회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이상과 같은 정세 속에서도 신라왕실의 실정은 계속되어 911년에는 대신 은영이 효공왕의 천첩을 죽여 왕정을 경계하기까지 하였다. 죽은 뒤 사자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도 하고, 혹은 사자사 북쪽에서 화장하여 뼈는 구지제 동산 기슭에 묻었다고도 한다.

 

 

53. 신덕왕
  ■ ? ∼ 917
  ■ 신라 제 53 대 왕
  ■ 재위 - 912 ∼ 917
 
 성은 박씨, 이름은 경휘, 본명은 수종. 아달라왕의 원손으로 아버지는 정강왕 때 대아찬을 지냈고 선성대왕으로 추봉된 예겸이다. 일설에는 예겸은 의부이고 친아버지는 흥렴대왕으로 추봉된 각간 문원이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성호대왕으로 추봉된 순홍의 딸 정화부인이며, 비는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이다. 슬하에 승영, 위응이 있었는데, 승영은 경명왕이 되었고 위응은 경애왕이 되었다. 신덕왕대의 신라는 실제로 경주지역을 다스리는 데 그쳤고, 국토의 대부분은 궁예와 견훤의 세력권 속에 들어가 있었다. 궁예의 부하인 왕건이 나주를 정벌한 이후 그들의 패권다툼이 더욱 치열해가는 동안 신라의 명맥은 겨우 유지되는 형편이었다.
 916년에 이르러서는 견훤이 대야성을 공격하여 비록 이를 함락시키지는 못하였으나, 그것은 곧 신라의 심장부에 비수를 겨누는 격이 되었다. 이때의 신라왕실은 스스로 후백제나 태봉의 공격을 막아낼 만한 힘이 없었다. 장지는 죽성이라고도 하고 혹은 화장하여 잠현에 묻었다고도 한다.
 

54. 경명왕
  ■ ? ∼ 924
  ■ 신라 제 54 대 왕
  ■ 재위 - 917 ∼ 924

 

 성은 박씨, 이름은 승영. 아버지는 신덕왕,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 할아버지는 선성대왕으로 추봉된 예겸이다. 그러나 일설에 예겸은 신덕왕의 의부이고, 친할아버지는 흥렴대왕으로 추봉된 각간 문원이라고 한다. 경명왕 때에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실제 신라왕실은 왕경인 경주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지역을 다스리는 데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궁예와 견훤 등 지방세력에게 빼앗겼다. 특히, 918년(경명왕 2)에 일어난 현승의 반란으로 신라는 그 운명을 더욱 재촉하게 되었다. 같은해 궁예 휘하의 인심이 돌변하여 왕건을 추대하였고, 궁예는 피살되었다. 그뒤 왕건과 견훤이 패권을 다투게 되었으나, 이들의 패권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이들과 신라왕실과의 연결이었다. 따라서 안동이나 합천지역에서 이들의 패권다툼이 치열하였으나, 싸움은 결국 해상권을 장악한 왕건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또, 경명왕 때에는 여러가지 변괴가 있었다고 하는데, 919년 사천왕사벽화의 개가 울었고, 927년에 황룡사탑의 그림자가 사지 금모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으며, 사천왕사 오방신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 쫓아나왔다는 기록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설화기사의 이면을 생각해볼 때, 당시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불안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재위 7년 만에 죽으니 황복사 북쪽에 장사지냈다.

 

 

55. 경애왕
  ■ ? ∼ 927
  ■ 신라 제 55 대 왕
  ■ 재위 - 924 ∼ 927
 
 성은 박씨, 이름은 위응. 아버지는 신덕왕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 의성왕후이다. 할아버지는 선성대왕으로 추봉된 예겸이다. 일설에는 예겸이 신덕왕의 의부라하여, 친할아버지는 흥렴대왕으로 추봉된 각간 문원이며, 할머니는 성호대왕으로 추봉된 순홍의 딸 정화부인이라고도 한다. 경애왕 때 후삼국의 패권다툼은 이미 왕건 쪽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925년 고울부장군 능문이 항복하였고, 927년 강주의 왕봉규가 관할하는 돌산 등이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왕건과 견훤은 잠시 싸움을 그치고 강화하였는데, 견훤이 보낸 질자인 진호가 고려에서 죽자 견훤은 926년 다시 출병하여 고려를 공격하였다.
 927년 견훤은 신라를 공격하여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궁궐을 노략질하면서 경순왕을 세우고 돌아갔다. 한편, 경애왕 때 황룡사에 백좌경설을 설치하고 선승 300여명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이것을 백좌통설선교라 부르며, 대규모 선승 모임의 시초가 되었다.

 

 

56. 경순왕
  ■ ? ∼ 979
  ■ 신라 제 56 대 왕
  ■ 재위 - 927 ∼ 935

 

 성은 김씨, 이름은 부. 문성왕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신흥대왕으로 추봉된 효종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이며, 할아버지는 의흥대왕으로 추봉된 관○이다. 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들이 둘 있었다. 큰아들은 마의태자이고 막내아들은 범공이다. 고려에 항복한 뒤에 왕건의 큰딸 낙랑공주와 다시 결혼하였다.
 927년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살해된 후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931년 왕건이 경순왕을 알현하여 수십일을 머물렀다. 왕건은 부하들에게 질서와 규율을 지키도록 하니, 수도의 아녀자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고 한다.
 935년 그는 고려에 신라를 넘겨 줄 것을 신하들과 논의하고 김봉휴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복하는 국서를 전하게 하였다. 이때 마의태자는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범공은 머리를 깎고 화엄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그가 신하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거와 보마가 30여리에 뻗쳤다. 왕건은 그를 정승공으로 봉했는데, 그 지위는 태자의 위였다. 왕건은 또 그에게 녹 1000석을 주고 그의 시종과 원장을 모두 등용하였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라 하고 그의 식읍으로 주었으며, 그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았다. 무덤은 장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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