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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계룡 (曺繼龍)--창녕조씨 시조
신라태사 창성부원군(新羅太師 昌城府院君)
자(子)---응신(應神)
조 응신 (曺應神)--중헌대부(中憲大夫)
중헌대부(中憲大夫) 자(字) 허중(虛中)
신라서사 중헌대부 (新羅筮仕 中憲大夫)로 시강원 태부시어사 ,상주국태자태부,지군국정사
부(父)---계룡(繼龍) 자(子)---수원(壽元),수형(壽亨),수정(壽貞)
조 수형 (曺壽亨)--사인공 (舍人公)
사인공 (舍人公) 자(字) 사여(士予)
신라문과 한림학사 동각사인 겸 안순변사 종사 중훈대부
배위는 원주차씨 승상(丞相) 검부(檢夫)의 따님이시다.
부(父)---응신(應神) 자(子)---돈(敦) 신라태사 창성부원군(新羅太師 昌城府院君)
조 돈 (曺 敦)--지후공(祗候公)
자(字)--여후(汝厚)
신라문과 문하사관역 중문지후로 복주밀금도단련사 겸 용호위대장군 판도관서중헌대부
배위는 전주이씨 사공(士空) 한(翰)의 따님이시다.
부(父)---수형(壽亨) 자(子)---흠(欽)
조 흠 (曺 欽)--아간시중공(阿干侍中公)
부(父)---돈(敦)
조 겸 (曺 謙)--고려태악서승(高麗太樂署丞)
배위는 고려태조의 제2비 신덕왕후 왕씨의 딸 덕흥공주
자(子)---서(瑞)
조 연우 (曺 延祐)--평장사공(平章事公)
평장사공(平章事公)
부(父)---서(瑞) 자(子)---한지(漢知
조 한지 (曺 漢知)--평장사공(平章事公 )
문하시랑평장사(平章事)
묘소--평산 수월봉 (平山 水月峰)--
경종(계묘년1723년)에 처음 찾아서 후손 명교(命敎)가 비문을 적어 썼다.
조 익청 曺 益淸 [?~1353]
시호 양평(襄平). 충숙왕 때 중랑장(中郞將)이 되고, 충혜왕 때 충숙왕·충혜왕 부자간의 불화를 해소 하려고 진력하였다. 대호군(大護軍)이 되어 간신 송팔랑(宋八郞)·홍장(洪莊) 등을 잡아 문초하다가 오히려 무고로 1332년(충혜왕 2) 주안무사(濟州按撫使)로 좌천되었다. 1343년(충혜왕 복위 4) 기철(奇轍)·이운(李芸) 등과 원나라에 있으면서 충혜왕의 탐학을 비난하고, 고려를 원나라 영토의 일부로서 성(省)을 두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시종(侍從)한 공으로 1352년 1등공신에 책록되고, 좌정승(左政承)에 올라 하성부 원군(夏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순성직절동덕찬화공신(純誠直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았다. 공민왕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조 정통 曺 精通
호는수운, 신라 태사인 諱계룡의 후손으로 리부시량 평장사인 諱용기의12세손인데 증조의 諱는 연운이요 官職 중량장이며 조부의 諱는 이남인데 증시중 이며 考의 諱는 성이니 증시중 이다. 고려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1284년(충렬왕 10) 호군에 오르고, 1290년(충렬왕 16) 도첨의 찬성사를 역임하였다.公은 대대로 벼슬을 한 집안에서 태어나 문학이 세상에 뛰어나 일찍이 장원 급제하여 관직이 시중에 이르렀고 晦軒 안향선생과 더불어 문교의 진흥을 위해 함께 노력했고 관직이 癸酒 인 禹卓과함께 불륜을 糾彈 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아 관에서 물러나 나주 남평현의 봉황산 밑에 내려가 살게 되었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 보면 짤막하게나마 기록이 남아있다. 때는 원종 15년 갑술(1245년) 6월 갑자일에 백관이 궁중에서 멀리 있는 태자를 왕으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다. 공께서 원나라에 다녀왔다가 태자가 귀국하여 왕이 되시니 충렬왕 이시다. 원나라에 다녀오신 공으로 시중벼슬을 빨리한 것이다. 아들이 다섯인데 첫째가 경룡, 둘째가 응룡, 셋째가 한룡,넷째가 변룡, 다섯째가 현룡이다. 공민왕때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치니 조씨오룡이라 하였다. 공민왕께서 은총을 베풀어 아버지를 철야군에 봉하고 사는곳을 五龍洞이라 부르게 하였다.
조 한룡 曺 漢龍
호는 세염, 시호는 청간. 고려 때 시중(侍中)을 역임하였다 국사는 효자요 대학자이시며 시중 벼슬 까지 하신 정치가 이시기도 하다 고려 말에 신돈이란 중이 임금의 스승임을 빙자하여 못된 짓을 하였으나 감히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 무렵 연명으로 임금께 상소를 올린 것이 신돈의 미움을 사서 아버지와 형제간 들이 뿔뿔이 헤어지게 된다. (여주 시흥 송도 등지에 오룡파 후손들이 살고 있다는 전설과 일맥 상통하게 된다.)
조 응룡 曺 應龍
호는 봉강이니 철야군(정통)의 둘째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효도와 우애심이 깊었고 타고난 성품이 뛰어나게 聰明(총명)하여 나이 십여세에 부현 철야군이 시를 지어보라 하시니 공이 그 말씀에 따라 지은 시이다 봉강공이 어렸을 때 여러 선비들과 그 부현인 수운공 앞에서 지은 시인데 여러 선비들이 놀라 칭찬이 대단하였다는 기록이 장흥읍지에 실려있다.
[부모와 천지만물은 매한가지다.총명한 사나이는 좋은 사람이 된다.
말만꾸며 잘하면 앵무새같이 천하다.오직 충효는 벌과같이 참되어야 하고.
경양하는 마음으로 벗과사귈것이며.입신양명하여 부모를 즐겁게하고.
잘먹고 잘입어도 배움이 없으면.늙어 백발되어 허송청춘을 후회하리라.]
조 민수 曺 敏修 [?~1390]
1361년(공민왕 10) 순주부사(順州府使)로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물리쳐 공신 2등에 책록되고, 이듬해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를 거쳐 전리판서(典理判書)•밀직사 동지사(密直司同知事) 등을 지냈다. 1368년 명나라가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을 포위하자 좌상시(左常侍)로 의정주등처 안무사(義靜州等處安撫使)가 되어 명나라의 위협에 대처하고, 충근보리공신(忠勤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우왕 초 경상도도순문사로 왜구를 격퇴하고, 문하부지사(門下府知事)•서북면도체찰사(西北面都體
察使), 1379년(우왕 5) 문하평리(門下評理), 1383년 문하시중(門下侍中)을 거쳐 창성부원군(昌城府
院君)에 봉해졌다. 다음해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전라도 조전원수(助戰元帥)를 겸하고, 1385년 문
하부판사(門下府判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군(遼東征伐軍)의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출정한 뒤 위화도(威化島)
에서 이성계(李成桂)와 회군(回軍)하여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 공으로 충근양절선위동덕안사공신(忠勤亮節宣威同德安社功臣)에 책록되고, 양광•전라•경상•서해•교주도 도통사(楊廣全羅慶尙西海交州道都統使)를 지냈다.
1389년(창왕 1)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하여 조준(趙浚) 등의 탄핵으로 창녕(昌寧)에 유배
된 뒤 창왕의 생일에 특사로 풀려났으나, 우왕의 혈통을 에워싼 논쟁으로 이성계 일파에 대항하다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고, 이듬해 다시 창녕으로 유배, 배소에서 죽었다.
조 저 曺 著
시호는 장양.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조 의생 曺 義生
호는 원촌. 고려 때 태학사(太學士)를 지냈으며,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조 신 曺 伸
자 숙분(叔奮). 호 적암(適庵). 문장이 뛰어나고, 특히 시를 잘 지었으며, 어학에도 능해 1479년(성
종 10) 통신사(通信使) 신숙주(申叔舟)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 문명(文名)을 날렸다. 왕이 친히 시를
지으라고 하자 그 글이 아주 뛰어나 사역원정(司譯院正)에 특선(特選)되었다. 역관(譯官)으로 명나
라에 7회, 일본에 3회 왕래하였다. 명나라에 갔을 때 안남국(安南國) 사신과 수십 편의 시를 지어 수
창(酬唱)하여 이름을 날렸다. 중종의 명으로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편찬하고, 만년에는 금
산(金山)에 은거하며 풍류로 세월을 보냈다. 저서에 《적암시고(適庵詩稿)》 《소문쇄록(痙聞堺
錄)》 《백년록(百年錄)》 등이 있다.
조 위 曺 偉 [1454~1503]
자는 대허라 하고 호는 매계라하니 세칭 매계선생으로 불리운다.
선생은 1454년 (단종2년 갑술) 봉산면 인의동에서 울진현령 계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할아버지가 심인데 여말의 고려의 국운이 상잔하여 다함을 한하여, 김산(현 김천)으로 낙향한 창녕조씨의 김산 입향조가 되며, 음으로 산원을 지냈으나 30세로 조세하고 뒤에 병조참의로 증직되었다. 선생의 증조부는 단성좌명공신으로 서성군에 봉해진 밀직부사추봉 의정부좌찬성 경수이며, 고조부는 판전의 사사 중 문하시중 창성부원군 우희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생각이 특이하여 동생 적암 신과 같이 말을 배우면서부터 글자를 알고 7세때 능히 시문을 지어 이름이 났으니 이 때의 사람들이 매우 기이하게 여기고 그 장래가 크게 기대된다 하였다.
선생은 10세 영남사림의 종사이자 매형인 점필재 김종직에게 글을 배워 학업이 일취월장 하였고,
11세 종숙부인 영의정 충간공 석문에게 소학을 친수받으니 충간공이 매우 기특하게 여겨 그 장래를 촉망하고 가숙에 머물게하여 경서의 이치와 학문하는 방법을 가르치었다.
18세 충간공의 집에서성균관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21세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곧 바로 승문원 정자를 배하고 다음해 예문과 점열을 배하였다.
1497년(성종 10년)선생 26세 때 홍문과 부수찬으로 배하였는데 이때 영안도(함경도) 삼봉도의 난민을 초유코저 경차관을 선발하는데 조정에서 그 인선에 있어 의논이 분분하였다.
조 식 曺 植 [1501~1572]
자 건중(楗仲). 호 남명(南冥). 시호 문정(文貞). 김우옹(金宇勒) 곽재우(郭再祐)는 그의 문인이자
외손녀 사위이다. 삼가현(三嘉縣:지금의 합천) 토골[兎洞]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20대 중반까지는
대체로 서울에 살면서 성수침(成守琛) 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열중하였고, 25세 때 《성
리대전(性理大全)》을 읽고 깨달은 바 있어 이때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으로 이사하여 산해정(山海亭)을 짖고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1538년 유일(遺逸)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다가, 45세 때 고향
삼가현에 돌아온 후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살면서 제자들 교육에도 힘썼다.
1548~1559년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 단성현감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 등 여러 벼슬에 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하였다. 단성현감 사직 때 올린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국왕 명종과 대비(大妃) 문정왕후(文貞王后)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렇게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處士)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1551년 오건(吳健)에 이어 정인홍(鄭仁弘) 하항(河沆) 김우옹 최영경(崔永慶) 정구(鄭逑)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조 신충 曺 信忠 [군사공]
부(父)는 조 익청(曺 益淸)
벼슬은 18세 문과 가정대부 강계도좌익병마사판희천군사이니 ,조선 태종조에 제직되었으나,나아가
지 않고 영천에 퇴거하였다. 기일은 7월29일이고, 묘는 영천 남면 고모곡(古毛谷) 진좌이니 10대손 전주(殿周)가 묘표를 지었고 , 11대손 하기(夏奇)가 썼다. 배위는 영천최씨니 부는 판서 중연(仲淵)이고 기일은 7월19일이다. 묘소는 자인(慈仁) 적지리 축좌이니 , 고모곡과의 거리는 30리이다. 아들은 상보(尙保),상정(尙貞-상진(尙眞)이라고도 함),상직(尙直-무후),상치(尙治-부제학,충정공) 상명(尙明-덕원부사)이 있다.
조 상치 曺 尙治
부(父)는 조 신충(曺 信忠)
자 자경(子景). 호 단고(丹皐) 정재(靜齋). 시호 충정공(忠正公). 어머니는 최중연의 딸이다.
길재의 문인으로 ,1419년(세종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 1424년(세종6년)좌정언이 되고, 이
어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세종 문종 단종의 세 왕을 섬겨 성삼문(成三問) 박팽년
(朴彭年)과 함께 총애를 받고, 1455년(단종3년) 집현전 부제학에 발탁되었다. 세조(世祖)의 왕위 찬
탈 뒤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극력 사양하고 외부와의 모든 접촉을 끊고 은거 하면서 후학을 양성 하였다. 1791년 (정조15년)단종의 장릉(莊陵)에 배향되고 , "노산조부제학 조상치의묘"라 새긴 묘비를 세워 세조의 신하가 아님을 밝혀 충의를 기렸다.
조 석문 曺 錫文 [1413~1477]
초명 석문(碩門). 자 순보(順甫). 시호 공간(恭簡). 관찰사 항(沆)의 아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
(謁聖文科)에 급제, 정자(正字) 집현전부수찬(集賢殿副修撰) 정언(正言)을 지내고, 이조 형조 예
조의 정랑을 거쳐 안산군지사(安山郡知事) 홍주목사(洪州牧使) 상호군(上護軍) 형조지사(刑曹知
事)를 역임하였다. 동부승지가 되어 세조의 즉위를 도와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고, 도승
지에 승진된 후 1459년(세조 5) 창녕군(昌寧君)에 봉해졌다.
이어 이조참판으로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호조참판을 거쳐 1466년 우찬성 겸 호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병마부총사(兵馬副摠使)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공신 (敵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승진하였다. 1468년 왕명으로 노사신(盧思愼) 과 함께 《북정록(北征錄)》을 편찬한 뒤 예종 즉위 초 남이(南怡) 강순(康純)의 옥사를 처리하여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476년 부원군 (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이듬해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었다.
조 계은 曺 繼殷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준성(遵聖). 구서(九敍)의 아들이며, 판중추부사 계상(繼商)의 형이다.
1506년(중종 1)연산군의 폐정으로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4등에
책록되었다. 151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목사•종부시정에 이르렀으나, 벼슬에뜻이 없어 향리에 은거하였다. 창산군(昌山君)에 봉하여졌다
조 계상 曺 繼商 [1466~1543]
자 종성(宗聖). 시호 충정(忠貞). 부사 구서(九敍)의 아들. 1495년(연산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으로 창녕
군(昌寧君)에 봉해지고 대사헌이 되었다.
1512년(중종 7) 이조참판 때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518년 예조참판 때 신진사류
(新進士類)의 등용을 반대하여 정광필(鄭光弼)에 의해 파직된 뒤 재기용되어 공조판서에 승진하였
다. 1531년 김안로(金安老)와의 불화로 부처(付處)되었다가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우찬
성으로 등용되고, 후에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가 되었다.
조 계형 曺 繼衡 1470년(성종1)∼1518년 (중종13)
號 退憂堂(퇴우당), 字는 平甫(평보)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조성좌의 8대(9세)조부임.
1470년(성종1) 5월 5일 : 종5품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한 父인 '조순(曺珣)'과, 母인‘안동權氏’사이
에 차남으로 출생 '허백당 홍귀달(虛白堂 洪貴達)’에게 수학함. 이 때 함께 수학한 동문은 안동 예안 출생으로 호조참판 지중추부사를 역임한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등이 있음.
조 숙기 曺 淑沂 [1434~1509]
자 문위(文偉). 현령 안중(顔仲)의 아들. 1475년(성종 5) 생원(生員)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
로 급제한 뒤 사어(射御)에 능해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479년 이조좌랑 때 도원수 윤필상(尹弼
商)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건주위(建州衛) 정벌에 공을 세워 3관등 특진되었다. 홍문관교리 •예
빈시부정(禮賓寺副正) 의주목사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연산군 초 대사간 대사헌을 역임
하고, 1500년(연산군 6)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문무를 겸전하여 국방에 공헌하고,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다.
조 윤손 曺 潤孫 [1468 - 1547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창녕(昌寧). 시호 장호(莊胡). 1502년(연산군 8) 무과에 급제한 뒤, 다음해
선전관이 되고, 1506년 유빈(柳濱) 등과 함께 연산군을 폐하려 했으나,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
宗) 등의 반정이 먼저 성공하여 공신녹권(功臣錄券)만 받았다. 1509년(중종 4) 웅천현감(熊川縣監)
때 남해안 일대의 왜구를 격파하고, 12년 갑산부사로 야인을 토벌하고, 이듬해 경도병마절도사로 특진, 여연(閭延) 무창(茂昌)에 들어와 정착하려는 야인을 몰아냈다.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재차 야인의 침입을 물리치고, 33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36년 병조판서가 되고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묘소는 진주시 문산면 어수리 뒷산 어버지 조숙기의 묘소 바로 아래 있다.
조 광원 曺 光遠1492(성종 23)∼1573(선조 6)
조선 중기의 문신.자는 회보(晦甫). 우찬성 계상(繼商)의 아들이다.
1522년(중종 17)생원시에 합격한 뒤 152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 등을 역임하고,
개성부도사에 재직하던 중 왕을 영접하지 않았다 하여 파직되었다.
1538년 장령으로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의를 지내고, 1541년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으며, 그뒤 판결사 병조참의 공조참의 등을 지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