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의 磁器
우 관 호(홍익대학교 도예과 조교수)
서 론
유럽의 도자기 발달사는 우리나라나 중국 그리고 일본과는 별개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자기의 경우에는 심층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분야이다. 18세기 초 최초의 자기가 만들어진 이래 현재 세계 식기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으며 명품으로 인정받고 있는 대부분의 유럽제품들은 자기의 종주국인 중국의 것보다 월등한 양질의 제품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여기에는 유럽문화의 특수성과 경제성 그리고 시장성 등과 같은 이유를 들 수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300년이 채 안되는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기술적 예술적 노하우를 꾸준히 축적하여 왔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반면 중국의 경우는 10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같은 발전은 하지 못하였다. 지금도 칭더전(景德鎭) 등지에서 자기가 생산되고 있으나 세계적인 수준의 것으로는 보기 어려우며 단지 전통적 예술성에만 치우쳐 있는 실정이다. 이와같은 현상은 우리나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도자사를 되짚어 볼 때 현재의 상황은 과거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청자와 백자는 유물이 되어버렸고 단지 전승공예품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또한 근대기 이후의 소수의 산업체에서 만들어 왔던 제품들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현재 국내외 시장에서 소비되고 있긴 하지만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이 그렇게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국내에서 소비되는 식기들이 거의 도자기제품으로 대체되는 실정이며 소비자들의 수준도 좋고나쁨을 분별하는데서 벗어나 자신의 취향과 식문화에 적합한 식기들을 선택하기에 이르렀으며 문화산업 또는 문화상품에 대한 인식도 상당히 높아졌기 때문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유럽의 자기를 학술적인 견지에서 고찰하는 것은 물론 당시 유럽도예계의 노력과 결과를 산업기술적인 시각에서 검증하여 새로운 도자문화의 수용가능성을 제시하는데 있다.
그러나 단기간의 연구로는 만족할만한 결과를 도출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우선 유럽자기의 발생에 관한 역사적 사실과 현존하는 유럽산업자기 회사들의 전신 및 장인들의 궤적 그리고 특기할 양식을 중심으로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당시 유럽자기의 발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일본 아리타(有田)자기와의 관계와 18세기 자기발생 이전 및 현재의 상황 등을 병합하여 수정 보충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1. 유럽자기의 태동
1. 중세유럽과 중국자기
유럽에서 자기(磁器, Porcelain)라고 하는 고급의 도자기가 만들어진 것은 18세기의 첫무렵이었다. 그 전의 도자기들은 대부분 도기질 또는 그 이하의 수준의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들은 매우 희귀한 물건이었다.
중세시대에 중국의 전통적 수입품은 중동의 상인들에 의한 비단이 주를 이루었으며 중국자기가 유입된 것은 드물었고 공식사절에 의한 증정품이나 십자군 원정에 따른 전리품에 조금씩 포함되었을 따름이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유럽의 여러나라들은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대륙과 접촉하려는 노력을 거듭하였고 13세기에 이르러 더욱 강화하였으며 최초의 시도는 교회에 의해 이루어졌다.
교황 이노센트 4세(InnocentⅣ)는 리용에서 몽골로 2번의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프란시스코회의 수도승 로렌티우스(Laurentius)가 인솔했던 일행은 시리아를 건너 페르시아만 인근의 몽골을 향해 출발하였으며 다른 하나 프란시스코 수사 지오반니 디 피아노 카르피니(Giovanni di Piano Carpini)가 인솔했던 쪽은 당시 카라코럼의 서쪽에 있던 구역 칸(Guyuk Khan)의 본거지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다시 다른 팀이 1249년에 몽골의 동부지역을 향해 출발하였다. 프랑스의 루이9세(Louis Ⅸ)가 파견한 이 팀은 롱쥬모(Longjumeau)의 앙드레아(Andreas)가 인솔하였으나 칸의 미망인 오글 카이미시(Oghul Qaimish)와의 교섭에 실패한 후 1251년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또한 1253년 프랑스왕에 의해 몽골인과의 외교관계수립을 위해 파견되었던 프란시스코회수도승 윌리암 루브룩(William Rubruk)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아시아와의 접촉을 시도한 공식적인 노력이 이와같이 결과가 좋지 않았지만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중국을 향해 출발했던 시대의 유럽은 종교적 또는 정치적 목적보다 상업적인 소득을 얻는 것을 더욱 중요시하였다.
마르코 폴로는 아버지 니고로, 숙부 마테오와 함께 1271년말(혹은 1272년 초)에 베네치아를 출발하여 1295년(또는 1296년)에 처음 귀국하였다. 마르코 폴로는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얻어왔지만 가장 큰 성과의 하나는 1298년에 쓴 『東方見文錄』이다. 동방견문록은 극히 작은 단편밖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내용으로 유럽전역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지금도 140부 이상의 사본과 초판본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동방견문록 제22권77장에는 중국의 자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최초의 실제적인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강의 주류를 따라 북으로 가서 팅그이(Tingui)의 마을에 도착하였다. 마을에서는 자기발과 접시가 만들어졌으며 현지인들은 갱(坑)에서 특수한 점토를 채취하여 산처럼 쌓아놓고 30년이나 40년 손대지 않은 채 바람과 비, 그리고 햇빛에 노출시킨다. 이 사이에 흙은 상당히 미세하게 되며 그것을 사용하여 발을 만들고 원하는 색을 칠한 후 가마에 넣고 굽는다. 마을에는 큰 시장이 있어서 자기그릇이 팔린다.
이 기록은 자기의 제작기술에 대하여 유럽의 문헌에서 사용된 최초의 예로써 중국의 자기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였다.
2. 동인도 회사의 설립과 늘어난 자기수입
중세의 중국과의 무역은 교통편이 없어서 극히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마르코폴로의 책이 출판된 200년 후에 간신히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에의 해상항로를 발견하고 동양의 부를 개발하게 되었으며 유럽의 해운국들은 이와같은 새로운 영역에서의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게 되었다.
스페인은 포르투갈이 무역에 의해 부를 축적하게 되자 1580년 포루투갈을 정복하여 동인도와의 관계를 빼앗았으며 네덜란드와 영국도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아시아와의 무역은 상당한 이익이 있었으므로 향료나 비단, 고가의 목재이외에 자기도 상당량을 차지하였으며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자기의 독특한 품질을 평가하여 판매하는 회사도 생겼다. 그것은 자기를 판별하는 안목이 발달한 것에도 기인하지만 유럽의 마요리카(Mai0lica)나 파이앙스(Faience)가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하기 때문이라고 보아진다.
1562년 초에 뉴른베르그에서 출판된 『山上說敎集』(Bergpostill)가운데 마테시우스(Mathesius)는 자기는 귀중하고 고가이기 때문에 최상류사회 외에는 사지 못한다. 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이미 유럽에는 만약 자기그릇의 음식물에 독이 들어있다면 그 그릇은 산산히 깨지고 만다는 미신이 횡행하였을 정도였다.
이와같이 자기는 유럽사회의 수입품 가운데서도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상업적으로도 많은 이윤을 내는 무역품이었다. 17세기에 네덜란드와 영국의 상인들은 자국의 우수한 선박건조기술과 항해술 덕분에 동인도회사(영국-1600년, 네덜란드-1602년)와 같은 무역회사를 설립하고 아시아와의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1612년에는 한 척의 배가 38,641점의 자기를 난징(南京)에서 암스텔담으로 운반하였고 2년 후에는 두배로 늘어난 69,057점을 실어 날랐으며 1604년에서 1656년까지 300만점이상의 자기를 수입하였던 견적이 있다.
1698년에는 프랑스도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였고 1728년 덴마크, 1731년 스웨덴, 1775년 오스트리아 및 기타 유럽 여러나라가 계속하여 아시아와의 무역을 개시하였다.
17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자기가 소개됨으로써 유럽에 수입된 수량은 한층 증가하였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자기들은 80,000개의 커피잔과 300,000개의 찻잔, 2,000개의 과일그릇, 1,658개의 장미향수병 등으로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스웨덴만 해도 1750년에서 1775년 사이에 1100만점의 자기를 수입하였다.
더욱이 30년 전쟁 후 정치적인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던 시대에 자기의 사용은 유복한 시민계급의 사이에서 확산되었다. 그러나 가격이 지나치게 비싸 가장 부유한 가정이나 귀족 그리고 왕들에게만 한정되었으며 자기를 살 수 없는 사람들은 마요리카나 파이앙스로 만족하였다. 델프트(Delft)도기는 이와같은 그릇 중에서 가장 유명하였으며 같은 양식의 파이앙스는 독일, 프랑스, 영국에서도 만들어졌고 델프트 도자기로도 불리었다.
3. 자기수집의 유행
17세기의 말부터 왕가나 귀족계급들은 수집한 자기를 전시하기 위해 특별한 방을 준비하였다. 이른바 자기진열실(磁器陳列室)은 르네상스 이래로 크고 작은 궁정에서 인기가 있었으며 다른 예술품이나 골동품의 진열실을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18세기에 저택을 설계하였던 건축가들은 반드시 자기진열실을 포함시켰으며 특별히 디스플레이를 위한 판화도 출판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것은 17세기 끝 무렵에 나온 건축가 블론델(F. Blondel)의 『건축학강의(Cours d'architecture)』에 소개되어있다. 일반적으로 자기진열실의 디스플레이는 17세기말의 은기(銀器)의 것과 같이 선반을 만들어 올려놓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18세기에는 하나하나의 아름다움보다 자기에서 넘쳐나는 방 전체의 인상을 더욱 중요시함으로써 진열실의 벽을 따라서 거울이 붙여지고 자기를 놓는 긴 선반이 천장까지의 벽을 차지하게 되었다.
드레스덴의 일본궁(Japanisches Palace)을 위한 디자인에서 알 수 있듯이 전시되는 자기의 예술적인 질보다도 양에 의해 감명을 받는 것이 의도되었다. 쟉센의 선제후(選帝侯, Elector of Saxony) 아우구스투스 (Augustus the Strong)는 가장 열광적인 자기수집가 중의 1인이었으며 궁전의 모든 방이 자기로 가득차는 것을 원하였다. 따라서 일본궁의 디스플레이는 순수하게 장식만을 목적으로 계획되어 1719년에 작업이 시작되었으나 완성되지는 못하였다.
가장 많은 자기진열실이 만들어진 곳은 독일로써 1700년경 뱀버르그(Bamberg)와 뮌헨에서 최초로 시작되었으며 1705년 샬로텐베르그(Charlottenburg), 1710년 이후 폼메르스펠덴(Pommersfelden), 1730년경 안스바하(Ansbach) 그리고 베를린의 몬비주(Monbijou)궁전에도 이어졌다. 또한 오스트리아 브르노(Brno)의 덥스키(Dubsky 1725~35)궁전과 이탈리아 나폴리의 포르티시(Portici 1770)궁전 그리고 스페인의 마드리드의 왕궁(1770)과 아랑페스(Aranjuez)의 궁전에도 진열실이 있었으며 동양의 자기뿐 아니라 그 지역의 제품도 상당량 소장되었다.
예를 들어 브르노의 덥스키궁전의 자기실은 빈공방에서 만들어진 제품으로 장식되었으며 포르티시궁전에는 카포디몬테(Capodimonte)공방의 제품이, 마드리드와 아랑페즈의 궁전에는 부엔 레티로(Buen Retiro)공방의 제품이 진열되었다. 덥스키 궁전의 진열실에는 그림과 거울의 액자는 물론 문과 의자, 테이블 장식에도 자기가 사용되었다. 포르티시 궁전은 벽면 전체가 자기로 된 로코코풍의 저부조와 덩쿨장식, 중국풍의 남녀상, 새, 원숭이등으로 장식되었으며 바닥과 천정은 물론 거대한 샹데리아도 자기로 만들었다. 왕 페르디난드 4세(Ferdinand Ⅳ)는 프랑스의 침략을 피해 1799년에 팔레르모(Palermo)로 탈출할 때 자기제의 테이블을 가지고 갔으며 남아 있던 자기들은 1865년 카포디몬테궁전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와같은 자기진열실과 소장품들은 근대적인 의미의 컬렉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나의 자기진열실을 꾸미는데는 상당한 액수의 경비가 들어가지만 동양의 것이든 유럽의 것이든 자기컬렉션은 왕가와 귀족들의 위신의 문제였으며 궁정을 꾸미는 일종의 사치와 같은 것이었다. 처음부터 예술적인 질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유럽의 컬렉터들은 동양의 자기가 가진 섬세함과 독특한 아름다움을 정확히 평가하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일본의 이마리(伊万里)도자기를 좋아하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이마리도자기는 순전히 유럽수출용으로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자기지만 도자기를 주문하였던 유럽인의 요구에 의한 것으로써 바로크스타일과 유사하지만 오히려 조잡하게 장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주석이나 은기(銀器), 파이앙스 도자기나 그 외의 그릇이 자기제품의 견본으로 중국에 보내지고 따라서 유럽시장에 나왔던 중국자기 중에는 순수하게 유럽적인 형태의 것도 있었다.
또한 동양의 자기에 그려졌던 장식에서도 특이한 점이 있었다. 판화와 소묘가 견본으로 사용되었으며 때때로 유럽의 고객이 자기 가문의 문장을 그린 그릇을 주문하였다. 유럽에서 직접 주문 받은 것이나 국내시장을 위해 만든 것에도 기독교적인 모티브가 그려진 것이 나타났다. 중국의 예수회의 선교사들은 쟝 데니스 아티레(Jean Denis Attiret)와 카스틸리오네(Castilione)등의 수사와 함께 자기그림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와같은 양식의 그릇은 현재 예수자기(Jesuit Porcelain)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8세기초에 그리스도교도에의 박해가 시작되면서 기독교적인 양식의 그릇들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으며 이후부터는 순수하게 수출용으로만 만들어졌고 이러한 경우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기의 수입에서 얻어지는 막대한 이익은 말할 것도 없이 동양의 자기로 인한 강한 자극으로 유럽전역에서 제작법의 비밀을 발견하고자하는 노력이 시작되었으나 그 결실은 장시간에 걸친 철저한 실험과 많은 실패의 끝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2. 유럽자기의 발생
1. 메디치자기
이탈리아가 자기제조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시도한 최초의 나라 중 하나인 것은 이미 양질의 도기와 유리를 만든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또한 근동(近東)과의 무역에 의해 자기를 접했기 때문에 제조법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강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기제조에 대한 최초의 실험은 2가지계열로 나누어지며 그 중 하나는 자기풍의(alla porcellana) 푸른색 장식을 가진 마요리카의 기술을 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요리카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자기라고는 볼 수 없으며 유리질과 같은 자기의 재료적 특성을 파악함으로써 유리 제조기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또 하나는 1470년경 베네치아의 안토니오 디 산 시메오네(Antonio di San Simeone)라는 사람이 볼로냐의 점토로 자기와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나 그가 제작한 것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서 사용했던 재료의 조성은 알 수 없다.
따라서 15세기 이탈리아에서의 자기 제조에 대한 기술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나 16세기초에 이르러 또 한번의 실험이 베네치아에서 이루어졌다. 뉴덴베르그에서 온 유리기술자 레오나르도 페링지(Leonardo Peringe)가 유리기법을 바탕으로 자기제조를 시도하였다. 점토와 유약에 산화석(酸化錫)을 첨가해서 하얀색의 도자기를 만들기는 하였으나 자기라고는 보기에는 미흡한 수준의 것으로서 토리노의 시립미술관과 런던의 영국박물관에 몇 점 보관되어 있다. 또한 르네상스기에 자연과학적인 최초의 실험이 몇 명의 이탈리아 귀족과 연금술사들에 의해 사보이(Savoy)와 우르비노(Urbino)의 마을에서 이루어졌다고 전해지나 실증적인 제품들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 1560년에 페라라 공작(Duke of Ferrara)이 자기와 마요리카를 위한 공방을 설립하고 까미요(Camillo)와 바티스타(Battista)의 우르비노(da Urbino)형제와 계약을 맺었으나 이 역시 만들어진 제품이 하나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15세기부터 약 100여 년간에 걸친 이와같은 실험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들이 대부분 현존하지 않아서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여러가지 정황들을 근거로 추측해 보아도 진정한 의미의 자기는 만들어지지 않았으나 메디치자기에 의해 작은 진전을 보게 되었다.
유럽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원자기(原磁器, Proto Porcelain)라 할 수 있는 메디치자기는 피렌체의 대공(大公) 프란체스코 마리오 디 메디치(Francesco Mario de Medici)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자신이 열광적인 연금술연구가였던 메디치대공은 공방을 설립하고 마요리카제작자 플라미니오 폰타나(Flaminio Fontana)와 베르나도 본탈렌티(Bernardo Buontalenti)등으로 하여금 자기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메디치자기는 1576년에 이후 보블리 가든(Boboli Garden)과 카지노 디 산마르코(Casino di San Marco)의 가마에서 조직적인 생산을 하기 시작하였으나 어떤 종류의 것들이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며 1578년 1년간 플라미니오 폰타나가 25~30점을 구워서 팔았다는 기록만 있다.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메디치자기의 생산량이 많았던 것은 아니며 메디치대공 또한 가마의 운영으로 이윤을 보겠다는 것보다 자기의 생산으로 자신의 지위와 궁정에 영광을 더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메디치자기 외에도 니콜로 시스토(Nicolo Sisto)라는 사람이 1592년 피렌체와 1619년에서 1620년까지 피사에서 자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의 시대적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니콜로 시스토와 메디치자기와는 어떤 연관이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구체적인 증빙자료가 없기 때문에 분명한 사실을 알 수는 없다. 다만 1613년 피렌체 피티궁의 파티에서 손님들이 메디치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도자기를 받았다는 역사적 기록으로 이 시기까지 메디치자기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약 50년에 가까운 기간을 생각하면 메디치자기는 상당량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남아있는 것이 소수임을 감안하면 결코 정설은 아닐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18세기말까지 자기라는 용어가 상당히 넓은 의미에서 사용된 것을 생각하면 메디치자기는 당시에 만들어진 여러 부류의 도자기 가운데서 가장 자기와 유사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비센차(Vicenza)에서 채취한 白점토에 흰색모래를 혼합하고 가루를 낸 수정(Quartz)과 주석(錫) 그리고 납성분의 매용제를 첨가하였으며 소성 후의 색은 황색을 띤 백색이나 회색으로써 스톤웨어와 비슷하였고 여기에 산화석이 함유된 흰색유약을 칠하였다. 청색과 붉은색의 안료로 장식을 하거나 납을 함유한 저온유를 시유하기도 하였으나 유약 역시 그 성질이 조금씩 달라서 불투명한 것에서부터 광택이 있는 것 그리고 작은 균열이 생기는 것 등 여러가지가 사용되었다.
이와같은 내용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메디치자기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는 아니라고 볼 수 있으며 다만 마요리카나 기타 도기질의 것보다 좀더 자기질에 가까운 즉, 스톤웨어라고 생각된다.
2. 유럽각국의 자기제작
17세기의 유럽에서 자기를 제조하려는 시도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루이14세의 치세가 자기 제조를 위한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었으며 네덜란드에서 온 도공이 자기를 만들려는 최초의 시도를 하였다고 전해지지만 그의 작품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프랑스에서 자기제조의 특권을 받은 것은 1664년의 클라우드 레벤드(Claude Revend)로 알려져 있으나 델프트나 로테르담의 장인들을 데려다 쓴 것을 보면 델프트 형의 파이앙스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프랑스의 연질자기즉 프리트자기를 만든 최초의 인물은 루엉(Rouen)의 포테라(Poterat)라고 할 수 있다. 1673년 에드머 포테라(Edme Poterat)는 아들 루이(Louis), 미쉘(Michel)과 함께 프랑스에서 클라우드 레벤드의 뒤를 이어 두번째의 자기제조를 위한 허가를 받았으나 1694년 포테라형제가 허가의 연장을 위해 제출한 문서로 보아서 처음에 만든 것은 대부분 파이앙스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694년 이후 1696년 에드머 포테라가 사망하기까지의 기간동안 자기에 가까운 연질자기가 만들어짐으로써 프랑스 프리트자기의 절정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프랑스의 노력과 함께 이탈리아, 영국, 독일도 자기 제조의 경쟁에 가세하였다.
1680년 프랑크프루트에서 출판된 요한 요하임 베커(Johan Joachim Becker)의 『愚者의 知慧, 賢者의 愚行』(Narrische Weisheit oder weise Narrheit)에 이탈리아의 실험에 대해 보고된 바가 있다. 그는 밀라노의 대성당 참사회원(參事會員) 만프레도 세탈라(Manfredo Settala)가 자기를 만드는 것이 가능함이라고 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로 세탈라가 무엇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독일의 학자인 에른프라이드 발터 폰 슈린하우스(Ehrenfried Walther von Tschrinhaus)도 1676년 세탈라를 방문하였으나 어떤 방법으로 자기를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아낸 바가 없었다.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화가이자 조각가인 프란시스 플레이스(Francis Place 1647~1728)는 요크주의 마너 하우스(Manor House)에 있는 공방에서 그곳의 흙으로 자기를 만들려고 노력하였으며 런던의 빅토리아 알버트 미술관에 소장되어 흑갈색의 커피잔에서 알 수 있듯이 회색조의 스톤웨어를 만드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플레이스는 진짜 자기를 만들지 못하고 재정적인 곤경에 빠짐으로써 1714년에 실험을 그만두게 되었다. 플레이스의 뒤를 이어 존 드와이트(John Dwight)가 펄햄(Fulham)에 공방을 열고 1671년 차이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비춰 보이는 도기를 만드는 특허권을 얻고 1684년에 갱신함으로써 영국제의 자기를 만들려는 시도가 계속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존(John)과 데이빗 엘라스(David Ellas)형제가 스태포드셔(Staffordshire)에서 공방을 열고 중국의 이싱(宣興) 도자기와 비슷한 붉은색의 스톤웨어를 만들었다. 그러나 드와이트(Dwight)와 엘라스(Elers)형제가 만든 것은 결코 자기는 아니었다.
독일에서는 쟉센의 선제후(選帝侯) 아우구스트스에 의해 자기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아우구스트스는 쟉센의 학자 슈린하우스에게 의뢰하여 쟉센의 천연자원을 조사하게 하였다. 슈린하우스는 유리제조와 보석의 연마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으며 자기제조에도 관심을 가진 학자였다. 슈린하우스는 거울을 사용한 용융과정에서 여러가지 흙이나 금속의 반응을 관찰하였으며 키슬링스발트(Kieslingswalde)의 자택에서 이루어진 실험으로 왁스자기(Wachsporzellan)라 불리는 새로운 재료를 발견하기에 이르렀으며 1701년 쟉센의 선제후에게 자기공방 설립계획과 제조 공정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의 뒤에도 성과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왁스자기는 구체적이지 못한 실험의 결과로 보아진다.
다시 18세기가 되어 자기제조공정의 비밀은 계속하여 탐구되었다. 특히 프랑스의 프리트 자기가 중국의 것과 비슷한 것임이 알려진 뒤에는 유럽 각국에서 실험이 계속되었다. 그 가운데 괄목할 만한 것은 1716년 파리의 『學者新聞』(Journal des Savants)에 발표된 예수회 선교사 페레 덴트레콜레(Pere Dentrecolles)신부의 글이다. 덴트레콜레신부는 중국의 칭더전(景德鎭)자기에 대해 기술함으로써 프랑스 프리트자기의 가능성을 확인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실험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물리학자 겸 동물학자인 왕립아카데미 회원 르네 앙트완느 페샬트 드 레오뮤르(Rene Antoine Ferchalt de Reaumur)였다. 레오뮤르는 1739년 『새로운 종류의 자기를 만드는 기술에 대한 각서』(Memoires sur art de faire une nouvelle espece de porcelaine)를 발표하였다. 레오뮤르가 만든 것은 유리를 장시간 천천히 용융처리한 것으로서 진짜자기와 비슷한 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레오뮤르의 제자이며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쟝 에티엔 게타드(Jean Etienne Guettard)는 1755년 알랑송(Alencon) 근교의 카올린 점토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 점토광의 발견에 따라 로라게 블랑카스(Lauraguais Brancas) 백작 루이 레옹(Louis Leon)은 1763~8년에 라세(Lassay)의 자신의 장원에 있는 실험실에서 자기 제조 실험을 하였다. 그러나 레옹이 만든 것이 알렝송의 점토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중국 카올린의 견본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고 회색의 불순물이 섞인 몇 점의 도자기만 남아 있을 따름이다.
이와같이 17~18세기에 걸쳐 유럽 각국에서 행해진 자기 제조 실험은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상당한 진전을 하였다고는 할 수 있으나 실험의 결과들이 남아있지 않고 기록으로만 전해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자기의 정체만 어렴풋이 파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은 마침내 유럽에서의 자기 제조가 멀지 않았다는 확신을 주었으며 그 결과가 쟉센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3. 마이센자기의 성공
17세기와 18세기의 전환기에서도 자기 제조의 비밀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프랑스의 프리트자기도 진짜라고 인정되지는 않았다. 이와같은 현상은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자기는 신비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비밀은 쟉센의 세사람에 의해서 풀리기 시작하였다.
유럽에서 진짜자기의 비밀은 앞서 말한 슈린하우스와 선제후 아우구스트스 그리고 연금술사 요한 프리드리히 베트가(Johann Friedrich Bottger)에 의해서 밝혀지게 되었다. 선제후는 자기제조에 확신을 가지지 않았으면서도 기꺼이 자금을 출자함으로써 명성을 얻게 되었으나 그 이면에는 피치 못할 사정도 있었다. 당시 쟉센의 경제 사정은 지극히 열악하였고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공장을 설립하여 자급하는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가로 거래되던 자기 제조공장의 설립은 당연한 사업으로써 선제후는 슈린하우스와 베트가의 자기제조 실험을 지원하게 되었다.
베트가는 1682년 2월 5일 슐라이츠(Shleiz)에서 세례를 받고 막드브르그(Magdeburg)에서 성장하여 1698년부터 베를린의 약종상(藥種商)에 도제로 일하면서 연금술사로서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연금술사로서 베트가의 명성은 상당히 알려져 독일학자 고트프라이드 라이브니츠(Gottfried Leibnitz)의 주의를 끄는 것은 물론 프러시아의 왕 프리드리히 1세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베트가는 금을 만들기 위해 그를 필요로 하였던 프리드리히 1세를 피해 1701년 쟉센의 비텐베르그(Wittenberg)로 도망하여 의과대학생으로 등록하였으나 쟉센의 선제후에게 체포되어 드레스덴으로 호송되었다. 1703년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체포되어 쾨닉스타인(Konigstein)의 성에 단기간 감금되고 다시 드레스덴으로 호송된 후 1704년 5월 25일부터 슈린하우스와 광산감독관 팝스트 폰 오하인(Pabst von Ohain)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여러가지 실험을 하다가 1706년 마이센의 알브레흐브르그(Albrechburg)의 성으로 옮기면서부터 본격적인 자기 제조 실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5일 실험은 중단되고 베트가는 다시 쾨닉스타인의 성으로 옮겼다.
1년후 베트가는 드레스덴에서 슈린하우스의 도움으로 융페르바스타이(Jungferbastei)시 동부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 가운데의 방에 새로운 실험실을 만들고 1707년 11월에 최초의 결과를 얻었으나 진짜 자기는 아니었다. 베트가는야스피스자기(Jaspis porzellan)라 불리우는 붉은색 스톤웨어를 만드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베트가의 실험에 대해 조그만 격려는 되었지만 델프트의 아리 드 밀데(Ary de Milde 1677~8)와 영국의 드와이트 그리고 엘라스형제가 이미 이루어 놓은 것과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베트가의 스톤웨어는 새로 설립된 구 드레스덴 델프트 도자기제작소(Delfter Rundund Stein Backerey zu Altendreβden)에서 생산되었으며 그것을 위해 네덜란드와 베를린에서 많은 장인들이 오게 되었다. 이러한 장인들과 함께 베트가는 많은 실험을 거쳤으며 1708년 1월 가마에서 꺼낸 7가지의 시편 가운데서 3점이 빛을 통과하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3점은 베드가의 실험에 대한 청신호인 동시에 유럽 경질자기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자기의 지속적인 생산 단계에 이르기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산적해 있었다. 다시 1년이 경과한 1709년 3월 28일 베트가는 선제후에게 양질의 백색자기를 만들었다는 편지를 내게 되었으며 그 결과 그것의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조사하기 위한 사람들이 파견되었고 1710년 1월 23일 드레스덴에 자기공방을 설립한다는 포고가 내려졌다. 그러나 베트가는 같은해 6월 6일 알브레흐브르그로 옮겨졌으며 공방의 책임자로 임명된 것은 선제후의 궁정관리인 미카엘 니미츠(Michael Nehmitz)였다.
이와같은 베트가의 성공은 당연히 그 자신의 공적이지만 그와 함께 유럽자기의 발견자로 알려진 슈린하우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베트가의 업적이 너무나 위대하여 슈린하우스는 가려졌을 수도 있으나 그 또한 왁스자기의 제조에 성공하였고 베트가와 함께 일을 하였던 것이다. 오히려 슈린하우스의 왁스자기는 베트가의 연구에 기초적인 자료로 사용되었으며 실험을 정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4. 유럽각지에 퍼진 마이센의 비법
마이센자기의 생산공정은 엄중하게 지켜진 비밀이었으며 그것을 위해 최신의 수단이 동원되었다. 베트가 역시 바깥의 세계에서 격리되었으며 공방 내에서 이루어진 하나하나의 생산단계에서도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마이센의 비법은 태토 제작을 맡은 사무엘 켐페(Samuel Kempe)에 의해 바깥 세상에 유출되었다. 1713년 켐페는 하벨(Plaue an der Havel)의 프러시아 대신 프리드리히 폰 괴른(Frhiedrich von Gorne)의 영지로 도망하여 마이센의 것과 거의 같은 붉은색 스톤웨어를 생산하는 공방을 열고 2년 후인 1715년 라이프치히 박람회에 출품하기에 이르렀다.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중국의 국정이 불안정하여 자기의 수입이 급격히 감소하자 시장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중국 청화자기의 그림들이 많이 모사되었다. 켐페의 도망뿐만 아니라 마이센공방의 비능률적인 관리는 자기제조의 비밀을 조금씩 밖으로 유출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베트가는 공식적으로 관리관이었으나 실질적인 영향력은 없었으며 만년에는 알콜중독으로 자기 제조의 비법이 노려지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였으며 1717년, 1718년의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1717년 오스트리아 제실(帝室)의 근위관 클라우디우스 이노센티우스 듀 파기에(Claudius Innocentius Du Paquier)는 마이센의 성공에 자극을 받아 빈에 자기공방을 설립할 것을 결정하고 마이센에서 에나멜 도장공(塗裝工) 크리스토프 콘라드 헝거(Christoph Conrad Hunger)와 피터 하인리히 제더(Peter Heinrich Zerder), 마틴 베커(Martin Becker)를 데려와 황제의 세습영토 전체에 걸친 자기의 독점생산과 판매의 특권을 주고 1718년 5월 27일 칼6세( Charles Ⅵ)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빈근교 로자우(Rossau)에 개설한 새 공방에는 매사가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헝거가 정확한 비법의 전체를 알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성과 태토 제작의 전문가로써 1705년이래 베트가의 조수로 일하였던 사무엘 스텔젤이 마이센에서 가져온 비법으로 사태는 호전되었다. 스텔젤에 이어 베트가의 의형제가 베트가의 동료이며 친구인 J. G. 멜호른이 만들었던 자기가마의 종이모형을 가지고 빈에 도착하였다. 이와같은 정황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스텔젤이 마이센을 떠나기 전에 파기에가 집, 마차 그리고 고액의 봉급과 쟉센의 카오린이 빈까지 보급될 수 있도록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마이센에서 보다 월등한 조건에 현혹된 스텔젤은 바로 빈으로 갔으며 그 결과 1719년 4월에 빈의 가마에서 최초의 자기가 생산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마이센 비법의 유출과정에서 여러가지 상황과 크고 작게 관계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베트가가 전혀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파기에는 예상했던 것처럼 이윤을 내지 못함으로써 헝거와 스텔젤과의 약속을 이행하기 어려웠다.
1720년 헝거는 빈에서 모습을 감추고 베네치아로 가서 베지(Vezzi)형제에 의한 이탈리아 최초의 경질자기공방의 설립을 도왔다. 한편 스텔젤은 마이센으로 돌아가면서 마이센공방 관리자에게 자신의 무고를 입증해 보이기 위해서 훗날 마이센에서 가장 유명한 화공이 된 젊은화가 요한 그레고르 헤럴드(Johann Gregor Horoldt)를 데리고 갔다.
헝거와 스텔젤이 가고 난 후 파기에는 다시 생산을 재개하고 새로운 제품을 시장에 내놓았으며 빈을 중심으로 자기 제조의 비밀이 조금씩 유럽에 퍼져나가게 되었다. 이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빈의 교사의 아들 요제프 야곱 링글러(Joseph Jacob Ringler)였다. 1730년 빈 출생으로 15세에 빈의 자기공방에 고용된 후 소성의 명인이 된 링글러는 공방 소장의 딸을 사귀는 단순한 방법으로 비법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1750년 링글러는 헤히스터(Hochst)로 불리어 갔다. 거기에는 요한 크리스토프 괴르츠(Johann Christoph Goltz)와 요한 페리시앙 클라루스(Johann Felician Clarus)라는 두 명의 프랑크푸르트 상인이 화공 아담 프리드리히 폰 뢰벤픽(Adam Friedrich von Lowenfinck)의 도움으로 1746년부터 자기제작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뢰벤픽은 비법에 대하여는 불완전한 지식밖에 가지지 못하였고 그가 만든 것은 파이앙스 도자기로서 파이앙스자기(Fayenceporzellan)로 불렸다. 그러나 괴르츠와 클라루스는 뢰벤픽의 작업결과에 만족하고 1750년 빈의 요한 벵크그라프(Johann Benckgraff)와 링글러를 불렀고 5개월간의 짧은 기간에 최초의 헤히스트자기 생산에 성공하였다.
다시 링글러는 1751년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로 가서 1745년부터 자신의 힘으로 비밀을 찾기 위해 노력하던 파울 안톤 한농(Paul Anton Hannong)에게 자기제조의 기초를 가르쳤다. 한농의 파이앙스 도자기는 1721년 아버지 칼 프란츠 한농이 창설했던 것으로써 링글러의 도착과 함께 프랑스 최초의 대규모 자기생산이 이루어지는 듯하였으나 방센느(Vincennes)의 공방에 허가된 독점권이 한농의 작업을 방해하였으며 1754년에 이르러서는 강제로 생산을 정지 당했다. 그러나 한농은 선제후 칼 데오도르(Karl Theodor)의 후원을 얻어 1755년 독일의 프랑켄탈(Frankenthal)로 자기제조소를 옮겼다.
이사이 링글러는 1753년 다시 이동하여 뮌헨 가까운 노이덱(Neudeck)에서 선제후 막스 요세프 3세(Max Joseph Ⅲ)가 후원하는 프란츠 이그나스 니더마이어(Franz Ignaz Niedermayr)의 자기제조를 도왔다. 니더마이어의 공방에는 빈에서 온 마무리장인 요한 데오필 슈라이버(Johann Theophil Schreiber)와 가마장인 리핏쉬(Lippisch), 화공 야곱 헬히스(Jacob Helchis)등 3인의 전문가가 있었으며 링글러가 도착한 1753년 가을부터 다음 봄 사이에 경질의 자기가 완성될 것으로 보여졌다. 링글러는 쉴틈 없이 3년을 보낸 후 뷔르템베르그(Wurttemberg)의 우츠메밍겐(Utzmemmingen)으로 가서 아놀드 프리드리히 프랄(Arnold Freidrich Prahl)을 위해 자기생산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프랄은 그해 사망하고 미망인은 공방을 엘방겐(Ellwangen)에 옮겼으나 운영이 원활하지 못하여 존폐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링글러는 프랄의 공방을 그만두고 1760년 칼 유겐(Karl Eugen)공이 1758년 창설한 루드비히츠브르그의 자기공방의 지배인이 되어 1802년 은퇴할 때까지 일하였고 2년 후인 6월 5일 사망하였다.
링글러의 공적은 독일의 중심지와 프랑스의 자기생산을 발달시킨 것 뿐 아니라 그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자기제조의 비법이 빠른 시간에 다른 공방에로 확산되게 된데 있다.
링글러의 뒤를 이은 자기 제조 장인으로는 니콜라스 파울(Nicholas Paul)과 요한 벵크그라프가 있다. 그들은 1752년에 헤히스트공방의 소유자 요한 크리스토퍼 괴르츠와 맞서기 위해 베를린의 빌헤름 캐스퍼 베글리(Wilhelm Casper Wegely)에 접근하였다. 베글리는 원래 직물공장의 주인이었으나 프리드리히 2세의 원조에 의해 베를린에 자기공장을 세울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1751년 왕은 50년간의 독점권을 인가하고 새로운 공방을 세우는 땅도 하사하였다. 1752년 가을 베글리는 베를린에서 벵크그라프와 만나 가마의 모형을 받는 것은 물론 점토의 제작법까지 얻어내었다.
그러나 이 순간 벵크그라프의 친구 폰 몰크(von Molck)는 퓨르스텐베르그의 자기공방을 위해 유능한 기술자를 찾아내는 어려운 일을 맡았다. 몰크는 빈에서 온 벵크그라프를 생각하고 일반적인 특전 외에 광산관(鑛山官)의 칭호와 12,000길드의 연봉으로 계약하였다. 이와같은 조건에 의해 벵크그라프는 1753년 5월부터 퓨르스텐베르그에 있게 되었으나 1개월 후인 6월 7일 사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퓨레스덴베르그 공방에서의 생산은 개시되어 1753년 11월 3일 최초의 자기 시편(試片)이 구워졌다.
니콜라스 파울은 헤히스트의 공방에서 링글러의 비법을 배웠던 유일한 장인으로써 1753년에 베글리의 요청에 의해 벵크그라프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베를린으로 옮겼다. 베를린에서 만든 제품들은 1755년에는 이르러 소비시장을 거의 점유하고 있었으나 태토와 유약 모두 우수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울은 1757년까지 베를린에서 일한 다음 퓨르스텐베르그로 가서 3년간 지냈으며 그후 판 그론스벨트 디펜브로익(Van Gronsveldt Diepenbroik) 백작을 위해 일하게 되었다. 백작은 1759년에 자기를 만들기 위해 암스텔담 가까운 베스프(Weesp)에 있는 공방을 구입하였고 1762년 새로운 가마가 설계되었으며 파소(Passau)에서 카올린이 운반되어 생산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2년 후 니콜라스 파울은 독일로 돌아가 펄다(Fulda)의 시장 요한 필립 쉭(Johann Philipp Schick)을 위해 생산을 개시하여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카셀(Cassel)로 옮겨 1766년 4월 28일부터 프리드리히 폰 헤센(Friedrich von Hessen) 백작에게 고용되어 1766년 7월 중순 처음으로 카셀의 자기를 구워냈다.
스트라스브르의 한농일가도 링글러의 비법을 자신들만의 비밀로 감추지는 않았다. 앞서 본 것과 같이 파울 안톤 한농은 공방을 프랑켄탈로 옮겼으며 아들 피터 안톤(Peter Anton)은 아버지의 죽음 뒤에도 스트라스브르에서 파이앙스 제조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761년 자기 제조의 비밀을 세브르(Sevres)공방에 팔아 넘김으로써 동업자들에 의해 경영자의 지위에서 쫓겨났다. 1769년 피터 안톤 한농은 파리에 있었으며 1771년에 상 드니(St. Denis)교외에 자기공방을 개설하는데 조력하였고 1776년에는 중개인 지오반니 비토리오 브로델(Giovanni Vittorio Brodel)과 함께 이탈리아의 비노보(Vinovo)에 또하나의 공방을 열었다. 1785년에는 프랑스에 남아 샤르트르(Chartres)공을 위해 새로운 방센느공방을 설치하였으며 1794년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이렇게 해서 엄중한 대책을 강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이센이 염려했던 경질자기 제조의 비법은 유럽전역에 알려졌다. 그렇지만 유럽경질자기의 시작이 베트가의 발견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잘 알려진 것처럼 프랑스 아카데미의 학자나 도공들과 같은 많은 사람들이 중국의 자기와 같은 것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튜링겐의 자기가 마이센 또는 빈의 것과는 태토에서부터 조성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튜링겐의 자기는 신학자 겸 화학자인 메크라이트(G. H. Mecheleid)와 그라이너(Grenier)일가의 발견에서 시작된 것으로써 18세기의 중반이후에 튜링겐 자기산업의 번창에 일익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러시아의 경우에는 드미트리히 이바노비치 비노그라도프(Dimitry Ivanovich Vinogradov)가 베트가와는 무관하게 페트로그라드(Petrograd)에서 실험을 하였으며 1747년 초에 최초의 경질자기를 생산하였다.
3. 18세기 유럽의 자기공방과 제작자
18세기의 유럽의 자기는 태토의 조성과 사용된 생산기술에 의해 2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마이센 스타일의 경질자기로써 주로 독일, 중부유럽, 러시아, 이탈리아 등지에 생산공방이 있다. 또 하나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일부, 스페인, 그리고 영국의 공방 등에서 만들어지는 프랑스 스타일의 연질자기를 들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본차이나로 알려진 특수한 연질자기가 영국에서 생산되었다.
1.경질자기
1) 마이센공방
유럽에서 예술적인 경질자기생산의 지도적 역할을 한 것은 마이센공방이다. 스텔젤이 빈으로 도망한 것을 경영자의 입장에서 보면 불쾌한 일이지만 예술적 결과에서는 결코 손실이라 할 수 없다. 빈에 있는 동안 스텔젤은 화가 요한 그레고리 헤럴드를 설득해서 마이센으로 돌아올 때 동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헤럴드는 이에나(Jena)에서 태어나 화가로서 스트라스브르에서 일하였고 빈에서 자기와 벽지의 화공이 되었다. 1720년 4월 마이센에 도착한 헤럴드는 5월 14일까지 특별위원회에 제출하는 그림의 견본을 준비하였다. 위원회는 그림을 높이 평가하여 프리랜서 화공으로 공방에 그려준 만큼 보수를 받는 것으로 하였고 3단계로 나누어진 난이도에 따라 계산되었다. 결과적으로 헤럴드는 유리한 조건으로 일하게 되었고 마이센은 미래의 명성의 기초를 닦는 화공을 손에 넣게 되었다. 헤럴드의 그림은 마이센자기가 나타난 초기의 수십 년간의 양식과 성격을 결정하고 유럽자기 장식의 전통을 창출한 것으로 평가된다.
헤럴드의 그림은 배경, 장식, 형태 그리고 구성이 하나가 되어 통일된 전체를 형성하였다. 작품이나 색조 등에서 헤럴드의 작품에는 동양풍의 교본에 따라서 중국풍장식(Chinoiseries)이나 인도화문양(印度花文樣)을 사용하였으며 한편으로 항구의 광경, 풍경화, 수렵장면, 유럽풍의 꽃문양 등을 묘사하기도 하였다.
헤럴드는 처음 마이센의 외곽에서 시작하다가 시내로 들어와 넓은 작업장을 열었다. 작업은 엄격하게 조직화되었으며 각 화공은 특정종류의 일을 전문으로 하되 서명을 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청화(靑華, Blaumalerei)가 작업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처음에는 고온에서 굽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있었으나 가마장인 데이빗 쾰러(David Kolher)가 새로운 제작법을 개발하여 1720년 3월 5일 청화로 장식한 최초의 작품이 선제후 아우구스트스에게 보여졌다. 그러나 쾰러는 청화안료에 대한 비밀을 자기만 간직한 채 1725년 사망함으로써 헤럴드는 완전한 제작법을 알 수 없었으며 그것을 해결하는 데는 약 7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헤럴드는 오랜 기간의 실험 속에서 쾰러의 비밀을 밝히는 것은 물론 안료의 색조범위를 상당히 넓히는데 성공하였다. 이와같은 헤럴드의 성공에 대해 빈에서 함께 작업하였던 헝거와 스텔젤은 각각 다른 감정으로 평가하였다. 헝거는 자신의 편지 가운데 스텔젤과 헤럴드가 빈에서 마이센으로 출발할 때 그의 안료를 훔쳤다고 기록하였으며 한편 스텔젤은 헤럴드가 자기그림에 대해 어떤 것도 알지 못하며 그의 지식은 전부 자기가 가르쳤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럴드의 그림을 보고 감탄할 수 있는 것은 장식의 기술적 측면보다 그가 도달한 높은 예술적 수준 때문이었다.
헤럴드의 작업장에는 많은 화공들이 있었다. 자신의 작품에 가끔 서명을 한 요한 에른프라이드 스태들러(Johann Ehrenfried Stadler)와 해럴드 자신의 최고의 협력자로 생각했던 요한 게오르그 힌츠(Johann Georg Hintz), 요한 데이빗 크레츠머(Johann David Kretschmar), 아담 프리드리히 폰 뢰벤픽(Adam Friedrich von Lowenfinck) 그밖에 많은 걸출한 장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나중에 헤럴드와 헤어져 유럽각지의 다른 공방에서 마이센자기의 그림의 명성을 넓히게 되었다. 마이센공방에서 생산의 제1시기 즉 그림장식의 시기는 선제후가 죽은 1733년까지 계속되었다. 제2의 중요시기는 자기제의 피겨린(Figurine)의 생산비중이 보다 증가한 것에서 피겨린의 시기라고 불리고 있으나 이시기는 요한 요하임 켄들러(Johann Joachim Kaendler)의 이름과 결부되어있다.
1706년 쟉센의 피시바하(Fischbach)에서 태어난 켄들러는 15세에 드레스덴의 궁정조각사였던 벤자민 토마(Benjamin Thoma)의 제자였다. 1730년 궁정조각사가 되었으며 다음에는 마이센공방의 피겨린 장인, 1733년에는 주임에 임명되었다.
켄들러가 일하기 전에 마이센에는 두 사람의 피겨린 장인이 있었다. 그중 한사람 요한 크리스찬 루드비히 뤼케(Johann Christian Ludwig Lucke)는 1728년부터 2년간 일한 후 빈으로 갔으며 요한 고트리에브 키르히너(Johann Gottlieb Kirchner)는 1727, 28년 마이센공방의 주임 피겨린 장인으로 일하였으며 선제후 궁정의 일본궁을 위해 만든 커다란 자기제동물상이 대평판을 받은 1730년에는 다시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이 궁전의 장식은 선제후 아우구스트스를 흡족하게 하였으나 그것이 지나쳐 기술적으로 제작 불가능한 것도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켄들러는 다시 물레장인, 피겨린장인, 조각사. 마무리장인 등으로 구성된 백색군단(Weiss Corps)의 우두머리에 임명되어 선제후가 위탁한 일을 맡게 되었다. 그는 펠리칸, 원숭이, 산양 등의 동물상을 만든 키르히너와 함께 일본궁의 예배당용의 사도와 같은 거대한 상들의 원형을 만들었으며 1733년 키르히너가 가고 난 후에는 혼자서 작업을 계속하였다. 켄들러는 어떤 묘책도 없이 대형의 피겨린을 만들 때는 필요한 수만큼 작은 부분으로 나누어 만든 뒤 다시 조립하면 된다고 믿었으며 1755년에는 왕 아우구스트스 3세의 기마상을 위해 높이 10m의 석고형을 준비하였으나 자기로 완성시키지는 못하였다.
1730년대에는 자기의 장식에서 로코코양식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자기피겨린은 좀더 작아졌으나 예술적 중요성은 변하지 않았다. 켄들러는 1736년부터 작은 입상의 피겨린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쟉센궁정에서의 생활에서 작품의 주제를 얻었다. 이탈리아의 즉흥가면희극의 피겨린도 만들었으며 1744년경에는 피에로, 스카라무슈등도 만들었으나 궁정풍의 주제는 점차 줄어들었고 대신 민중풍이 늘어났으며 장인, 광부, 농민, 걸인 등의 시리즈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1750년까지 15개 정도의 그린린군상을 제작하였다.
이외에도 새로운 모양의 식기, 화병, 발 그리고 기타의 그릇들도 디자인하였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설코브스키백작과 그의 부인을 위해 디자인한 설코브스키家의 식기(Sulkowski Service)로써 마이센의 대규모 식기세트로서는 처음의 것으로 1735년부터 1737년까지 소성하였다. 깊거나 얕은 접시장식의 주요 모티브는 설코브스키家와 슈타인(Stein)家의 결혼을 나타내는 문장(紋章)의 그림이었으며 가장자리는설코브스키 오치에릴리프로 알려진 양각으로 장식하였다.
또한 켄들러는 1737~42년에 쟉센궁정의 하인리히 폰 브륄(Heinrich von Bruhl)백작을 위해 백조세트(Schwanen Service)라 불리우는 또 하나의 식기세트를 만들었다. 백조세트는 에베라인(J. F. Eberlein)과 에데르(J. G. Ehder) 등의 조수와 함께 디자인하여 약 2,200점 정도 만들었으며 인도화문양과 정교하게 채색한 인물상을 배경으로 브륄家와 콜로브라트(Kolowrat)家의 문장이 묘사되었으며 금으로 전을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소재는 역시 양각된 백조이며 물가의 꽃이나 생물 또는 물과 관계되는 그리이스 신화의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유럽자기의 정신적 아버지로 볼 수 있는 켄들러에 의해 마이센의 피겨린은 유럽의 다른공방에 중요한 기초가 되었으며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으나 그 이후에는 점차 쇠퇴하여 두 번 다시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것은 1756~63년의 7년 전쟁에도 원인이 있었으나 프랑스나 영국에서 일어난 변화도 한 요인이 되었다. 1763년 이후에는 새로운 양식, 즉 신고전주의가 유럽각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전유럽에 걸쳐 지배적인 양식이 된 신고전주의에 대해 적응하기가 어려워진 켄들러는 1764년 마이센의 피겨린에 프랑스풍의 매력을 불어넣기 위해 프랑스의 조각사 미쉘 빅토르 아시에(Michel Victor Acier)를 초빙하였다. 아시에는 켄들러와 같은 권위를 가지고 신화적인 내용이나 시민들의 생활광경, 어린이 등을 소재로 한 피겨린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적인 양식은 도자기의 그림에서도 나타났으며 프랑스 화가풍의 어린이나 천사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마이센은 완전히 프랑스의 영향에 굴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이센이 프랑스 양식에 젖어버린 데는 앞서 말한 켄들러의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좀더 현실적인데 원인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자기제작의 초기단계에서 독보적이었던 마이센은 점차 프랑스식의 자기를 만들고 있는 세브르나 베를린 그 외의 유럽의 공방과 경쟁관계로 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18세기말 까미요 마르꼴리니(Camillo Marcolini 1774~1814)백작이 소장에 임명되었을 때 마이센공방의 제작기술은 이미 완성된 수준이었기 때문에 예술적인 면에서 경쟁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고대 대리석조각상을 본 딴 무유백색자기 피겨린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고 왕의 청색(Royal Blue)과 같은 인기 있는 프랑스의 안료가 도입됨으로써 바로크와 로코코의 양식은 과거의 것이 되고 말았으며 마이센은 새로운 시기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켄들러가 1775년 5월 18일에 사망하고 아시에가 1781년 은퇴하면서 마이센자기의 위대한 시대는 끝이 나게 되었다. 그들의 후계자들, 칼 쉔하이트(Carl Schonheit 1745~94년), 크리스챤 고드프리드 유히처(Christian Gottfried Juchtzer 1769~1812년), 고트리에브 마타이(Gottlieb Matthai 1773~95년)에 의해서도, 쉐나우(Schenau)라 불리었던 화공부의 책임자 요한 엘리아쳐 자이지히(Johann Eleazar Zeissig 1773~96)의 노력에도 마이센공방은 두 번 다시 예술적 세계에서 이전과 같은 명성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2) 빈공방
베트가의 경질자기를 생산한 두 번째의 오랜 공방은 빈이었다. 빈공방은 1718년 클라우디우스 이노겐티우스 듀 파기에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쟉센궁정 주재의 오스트리아대사를 통해 마이센의 크리스토프 콘라드 헝거와 계약하고 오스트리아에서 자기제조의 특권을 얻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헝거와 스텔젤은 빈공방을 떠나버렸고 10여명의 종업원밖에 남지 않았으며 바로 인원을 보충하였음에도 여의치 않아 1744년 정부로 넘어가 버렸다. 이래서 빈에서 자기생산의 1기는 끝이 났으며 이시기에 만들어진 것에는 아무런 서명이 없어서 無銘期의 빈(Wien vor der Marke)이라고 불리었다.
마이센의 제품과 같이 가장 오랜 빈의 자기도 동양풍의 양식을 묘사하는데서 출발하였으며 중부유럽 바로크의 장식이 넓게 사용된 것은 1730년 이후의 일이다. 최초의 색은 주로 검은색과 검은보라, 적철, 금이었고 나중에 보라색, 녹색, 황색, 밝은 청색이 더해졌다. 빈의 자기공방이 받았던 최초의 큰 주문은 덥스키(Dubsky)백작궁의 자기진열실을 위한 것이었다. 이 진열실은 1725년부터 1730년에 걸쳐 1,458장의 장식용 자기판(磁器板)을 붙여 꾸몄던 것으로 유명하다. 자기판의 장식은 주로 동양적인 꽃을 소재로 하였으나 부분적으로 유럽풍의 꽃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백작궁의 자기진열실을 위한 작업에서도 알 수 있듯이 1718년부터 1744년까지 빈자기의 명성을 높인 것은 그림이었다. 슬로바키아 출신의 요한 칼 벤들린 안라이트 폰 치른펠드(Johann Karl Wendelin Anreiter von Zirnfeld)를 창시자로 하는 화공들은 19세기 중엽 빈공방이 완전히 폐쇄될 때까지 성실히 일함으로써 빈자기의 자부심을 지켰던 것이다. 그 밖의 빈자기의 화공으로는 인물의 묘사에 능통한 요제프 필립 단회프(Joseph Phillipp Dannhofer)와 풍경과 꽃을 모티브로 하면서 흑청화(黑靑華, Schwarzlotmalerei)를 주로 사용하였던 야고브 헬리스(Jacob Helchis) 등이 있다.
정부에 넘어간 이후 공방의 역사는 제2기에 접어들었다. 이시기의 특징은 메이어 호프 그린뷔헬(Mayerhof von Grunbuhel, 1747~57년), 퀵스 폰 보덴탈(Quiex von Bodental 1757~64년), 볼프 폰 로젠펠트(Wolf von Rosenfeld, 1764~84년) 등의 역대소장의 성격에 의해 이루어졌다. 또한 1747년부터 1784년까지 피겨린 원형제작의 책임자였던 요한 요제프 니더마이어(Johann Joseph Niedermayer)등의 제품에 의해 빈공방의 특성을 알 수 있다. 빈공방은 1740년대 중반부터 단독이나 군상 등의 피겨린을 만들었으며 착상이나 생명감, 색채에서 다른 유럽자기보다 두드러졌으며 품질면에서는 마이센을 능가하지는 못하였으나 명확한 예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니더마이어가 만들었던 1755년 이후 빈공방의 피겨린은 빈 로코코의 전형이 되었다.
빈의 피겨린제작자들은 커다란 우화풍의 장면, 서있는 남자, 그린린을 두른 귀부인 등과 수 없는 종류의 천사, 작은 큐피드 그리고 농부나 길거리의 악사, 군인 같은 피겨린들을 만들었다. 또한 마이센에서 만들어졌던 Cris de Paris시리즈를 본뜬 Cris de Vienne시리즈가 만들어졌다.
이시기의 끝은 1778년 이후 빈에서 일했던 안톤 그라시(Anton Grassi 1755~1807년)라는 인물에 의해서 프랑스 신고전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로카이유문양(Rcailles)이 지나치게 사용되었고 형태 또한 덩굴손이나 작은 가지 모양의 손잡이가 부착되는 등 안정되지 못하였다. 로코코풍의 그림이 우세해졌으며 유럽풍의 꽃문양이 다발로 묘사되었다. 유럽식의 구애의 장면이 중국의 것을 대신하였으며 프랑소와 부셰(Francois Boucher) 등의 판화를 바탕으로 한 수렵과 전투장면이 단색화의 기법으로 묘사되었다.
로코코기 동안 빈은 마이센으로부터 온 예술가들을 맞이하였다. 크리스티엉 다니엘 부쉬(Christian Daniel Busch), 샤무엘 히츠히(Samuel Hitzig) 그리고 1744~45년의 제2 실리지아 전쟁의 여파로 마이센을 떠난 요한 고드프리드 클링거(Johann Gottfried Klinger)와 필립 에른스트 쉰들러(Phillipp Ernst Schindler) 등이 빈공방으로 갔다. 1770년대 후반부터는 세브르의 영향이 빈에 더욱 강해졌으며 공방은 경쟁상대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였다. 마이센과 같이 빈공방의 화공들도 프랑스 연질자기의 밝은 색채를 표현하는 문제에 부딪혔으며 자신들의 경질자기에는 같은 효과가 나지 않는 것을 알고 보다 우수한 태토의 개발을 위해 박차를 가하였다. 결국 화학자이자 화가인 라이트너(Leithner)가 새로운 종류의 안료를 개량하는데 성공하였으며 경질자기의 생산도 계속되었다.
1784년에 이르러 심각한 재정난에 빠지게 되어 정부에서는 공방을 경매에 부쳤으나 적임자가 없어서 린츠(Linz)에서 옷감공장을 경영하였던 콘라드 폰 소르젠탈(Konrad von Sorgenthal)에게 맡기게 되었다. 소르젠탈의 관리하에 들어갔던 1784년부터 1805년까지 빈공방은 전성기를 누렸으며 이윽고 마이센을 능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브르의 신고전주의양식은 포름이나 색채에서 거의 절대적이었다. 색조는 밝고 경쾌해졌으며 18세기 끝무렵에는 금속성의 광택과 게오르그 펄(Georg Perl 1771~1801년)류의 금상감에 의한 장식이 유행함으로써 빈공방의 제품에도 강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이시기에 이름을 떨친 사람은 화공 요제프 라이트너가 있었으며 1784년 니더마이어의 죽음으로 안톤 그라시가 무유백색자기 피겨린을 전문으로 하는 원형제작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소르젠탈의 시대는 19세기초까지 계속되었으며 특히 이 시기의 특징은 빈공방의 화공들의 명성이 높아져 유럽의 다른 공방등이 모방하기도 하였다.
3) 독일 경질자기 공방
가. 님펜브르그공방
베트가의 비법은 빈에서 사실상 전독일영토의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갔다. 19세기의 유럽자기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독일공방 중 빈에 가장 가까운 님펜브르그(Nymphenburg)를 주목하여야 한다.
링글러는 한농이 스트라스브르에서 자기를 생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1753년 바바리아로 갔다. 그러나 이미 1729년에 쟉센의 유리제조업자 바터(E. Vater)가 자기의 제작을 시도하였으며 바바리아의 귀족들도 선제후가 자기공방을 설립하는데 대해 의견이 일치되었다. 그럼에도 공방을 설립하려는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막스 3세 요제프(MaxⅢ Joseph)가 선제후가 되면서였다.
1747년 선제후는 오우(Aue)에 가까운 노이덱 (Neudeck)의 장원을 프란츠 이그나스 니드마일이라는 도공이 자유롭게 사용하게 하였으며 니드마일은 큐르퓨레스 자기공방(Churfurstliche Porcelaine-Fabrique)이란 이름을 붙이고 자기를 만들려고 하였으나 결국 실패함으로써 바바리아 정부가 공방을 인수하고 1753년 링글러를 지배인에 임명하였다. 1년 후 최초의 자기가 구워졌으며 1761년에는 공방을 뮌헨 가까운 님펜브르그 궁전의 부지로 옮기면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처음 노이덱에서의 시작에서부터 피겨린은 공방의 중요한 생산품목 중 하나였다. 빈 출신의 폰하우저(J. Ponhauser)는 선제후로부터 식탁 위에 놓는 높이 1m의 장식대(Tafelaufsatz)를 주문 받고 원형을 만들었으며 1754년 프란츠 안톤 버스텔리(Franz Anton Bustelli)에 의해 완성되었다.
버스텔리는 님펜브르그공방에서 마이센의 켄들러와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귀부인과 서있는 남자, 이탈리아 즉흥가면희극의 등장인물, 중국인 등의 피겨린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피겨린은 생명감이 넘쳤으며 짧은 님펜브르그시대에 만든 100여개의 작품은 지금까지 만든 자기 피겨린의 최고걸작에 속하고 있다.
버스텔리의 후계자는 체코인 조각가 도미니크 아우리체크(Dominick Auliczek)로서리드미슐(Litomysl)의 조각가 파착 (F. Pacak)의 제자였으며 빈, 파리, 로마, 런던 등지에서 수학하고 1759년에는 로마에서 聖 루가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그러나 아우리체크의 예술에 최대의 영향을 준 것은 조각가 캬베리(G. Chiaveri)로써 고전이론의 기초지식을 가르쳤으며 1763년 이후 아우리체크가 만든 님펜브르그 피겨린의 우아함의 근원이 되기도 하였다. 아우리체크는 자기공방의 피겨린 제작자뿐만 아니라 궁정조각사이기도하며 장원의 정원장식도 하였다. 1772년 아우구스브르그예술月報(Augsburgisches monatliches kunstblatt)에 의하면 수렵하는 군상들과 동물의 피겨린 25종과 아폴로, 다이아나, 마르스, 파라스, 쥬피터, 쥬노등과 같은 신화적 인물상 등을 제작하였으며 유명한 님펜브르그의 벨세트와 같은 식기디자인도 하였다. 1797년에 아우리체크가 은퇴한 후 그 뒤를 계승한 사람은 요한 피터 메르히올(Johann Peter Melchior 1742~1825)이었다.
초기 님펜부르그의 제품을 볼 때 형태는 마이센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그림에 있어서는 몇 점의 주목되는 수렵장면과 신화적 모티브, 풍속화를 탄생시켰다.
나. 베를린공방
독일의 또 하나 중요한 자기공방은 베를린에 있었으며 이 공방의 역사는 소유자에 의해 3기로 나누어진다.
자기를 만들려는 시도는 1740년대부터 계속되었으나 공방의 설립은 1751년으로써 직물공장주 빌헤름 캐스퍼 베글리가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의 원조를 받아서 이루어졌다. 앞서 본 것처럼 베글리는 벵크그라프의 계약불이행으로 난처한 입장에 처했으나 마이센에서 온 장인들의 도움을 받아 생산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베글리가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자기제품은 거의 없었으며 에른스트 하인리히 라이하르트(Ernst Heinrich Reichard)에 의한 피겨린이나 식기류가 제작되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써 제품의 일부는 흰색 그대로였으며 큰 작품의 경우에는 라카로 그리는 등 기술적인 문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1757년 마이센에서 화공 이작 쟈크 클라우스(Isaac Jacques Clauce)가 오면서 사태는 개선되었으나 공방의 운영은 이미 손쓸 틈도 없이 피폐하여 같은 해 재정상의 이유로 폐쇄되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공방을 단념하지 못하고 베를린에 자기제작소를 세우기 위해 상인 요한 에른스트 고츠코브스키(Johann Ernst Gotzkowsky)의 공방재개를 지원하였다. 고츠코브스키는 공방과 설비의 일부를 사는 것은 물론 베글리의 원형제작자 라이하르트로부터 비법을 입수하였다. 화공 클라우스도 협력을 약속하였으며 원형제작자 프리드리히 엘리아스 마이어(Friedrich Elias Meyer) 화공 칼 빌헬름 뵘(Karl Wilhelm Bohme), 칼 클리플(Karl. J .C Klipfel), 요한 보어만(Johann B. Borrman)등이 마이센에서 왔다.
이와같은 경험이 풍부한 장인들을 데리고 고츠코브스키는 베를린공방을 재편하였으며 2년후 프러시아 왕에게 팔아 넘길 때까지 그곳에서 일한 장인들은 146명에 이르렀다. 베를린공방의 소유자는 비록 바뀌었으나 공방의 생산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므로 양자간의 작품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사실은 베를린공방의 안정적인 생산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새로운 양식의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기도 하다.
베를린공방의 식기들은 로코코시대의 독일에서 우수한 제품으로 인정받았다. 처음 장식은 마이센의 양식을 계승하여 오치에, 브란덴슈타인, 신 오치에, 신 브란덴슈타인의 디자인을 사용하였다. 1741년 고츠코브스키는 마이센의 에벨라인에 의뢰해서 테이블세트용의 양각문양을 디자인하였다. 이것은 그후 고츠고브스키의 꽃양각(Gotzkowsky erhabene Blumen)으로 알려졌으며 베를린에서는 플로랄마스터라는 이름으로 복제되었다.
물론 베를린의 기술자들도 독자적인 양식을 디자인하였다. 1764년 프리드리히. E. 마이어에 의해 디자인된 양각세트는 양각장식(Reliefzierat)의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나중에는 격자문양각(Reliefzierat mit Spalier)이라는 변종도 나타났다. 1760년대 또 하나의 인기있는 장식으로 고전장식(古典裝飾, Antikzierat)이 있었으며 초기의 양각장식은 다시 1780년대의 신식장식(新式裝飾, Neuzierat)의 기본이 되었으며 이것은 1784년의 淡靑色의 세트와 같이 영국풍의 장식에 많이 사용되었다.
베를린의 피겨린은 1761년 마이센의 원형제작자 마이어가 만들어왔음에도 마이센제품에 필적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1751년부터 1764년까지 베를린공방에서 일한 에른스트 하인리히 라이하르트의 피겨린 역시 거친 느낌의 것으로 마이센의 것과는 뒤떨어지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이어는 몇가지의 독창성과 발명으로 베를린제품의 수준을 높였다. 베를린공방의 명성의 기반이 된 것은 모든면에서 마이센의 것에 필적할 만한 꽃문양과 마이센에서는 볼 수 없는 심홍색(深紅色, Crimson)안료의 발명이었다. 또한 베를린공방의 자기 중에는 프랑스의 화가 앙트완느 와토((Antoine Watteau)의 판화에서 영감을 얻은 풍속화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18세기 끝 무렵에는 프러시아궁정의 기호에 맞춰진 완전히 신고전주의의 양식도 있었다.
다. 헤히스트공방
헤히스트공방은 1746년 마이센 출신의 화가 아담 프리드리히 폰 뢰벤픽과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상인 요한 크리스토퍼 괴르츠와 요한 페리시앙 클라루스의 3인의 공동사업으로 설립되었으나 자기를 만들려는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실질적인 제작자였던 뢰벤픽의 파이앙스 자기는 단지 우수한 품질의 스톤웨어에 불과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750년에 벵크그라프를 공방의 지배인에 임명하고부터 사태는 호전되었다. 벵크그라프는 빈에서 가마전문가인 링글러를 데리고 와서 파이앙스와 자기를 생산하였으나 1751년에 한농의 파이앙스공방을 도와 자기를 만들기 위해 스트라스부르로 옮기고 2년 후에는 벵크그라프도 헤히스트 공방을 떠나 퓨르스텐베르그로 옮겼다. 두 사람이 떠나고 난 후 헤히스트공방은 1765년에 유한회사로 바뀌었으나 다시 재정난에 부딪혔으며 마인츠의 마지막 선제후인 에미리히 프라이헤르 폰 브라이드바하(Emmerich Freiherr von Breidbach)남작과 프리드리히 프라이헤르 폰 에르탈(Freidrich K. J Freiherr von Erthal)남작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1796년 폐쇄되었다.
헤히스트공방의 중요한 예술적 업적은 1767~79년 사이의 메르히올에 의해 만들어진 자기질의 피겨린이다. 이것들은 당시의 분위기를 민감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메르히올이 파리를 방문하던 중에 느꼈던 감정을 정교하게 표현한 것으로써 루소풍의 자연에의 사랑이나 감상적 전원풍경, 신화적인 테마, 초상과 양각된 메달 등이 있다.
헤히스트공방이 폐쇄되었을 때 메르히올의 원형은 담(Damm)공방이 샀으며 1840년 이후 이것을 이용한 300개 이상의 피겨린과 8개의 군상이 스톤웨어로 제작되었다.
라. 퓨르스텐베르그공방
퓨르스텐베르그에 있는 또 하나의 독일공방에 대한 기록은 17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브룬스빅 볼펜뷔텔의 칼공작(Duke Karl of Brunswick Wolfenbuttel)은 자신의 궁정을 위한 독자적인 공방을 만들기 위해 자칭 전문가 요한 크리스토퍼 글래서(Johann Christoph Glaser)를 고용하여 자기의 견본만이라도 만들려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벵크그라프가 헤이스트에서 퓨르스텐베르그에 온 이후 모든 일이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앞서 본 것과 같이 벵크그라프는 퓨르스텐베르그로 오기 전에 베를린에서 베글리와 계약하였으나 헤이스트공방의 괴르츠의 농간으로 무산되었으며 괴르츠는 다시 약속을 깨고 그를 체포하였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칼공작이 개입하여 벵크그라프는 자유의 몸이 되어 1753년 5월 6일 원형제작자 시몬 파일너(Simon Feilner)와 3인의 화공 체싱거(J. Zeschinger), 치슬러(P. Zisler), 가이슬러(G. F. Geisler)를 데리고 퓨르스텐베르그에 도착한 후 1753년 11월 3일 최초의 자기를 구워냈다.
시몬 파일너는 이탈리아 즉흥가면극의 인물상과 14종류의 광부상을 만들었고 1768년까지 작업하였다. 파일너외에도 퓨르스텐베르그공방에는 요한 크리스토프 롬브리히(Johann Christoph Rombrich 1758~94년), 안톤 칼 루플라우(Anton Karl Luplau 1759~76년) 그리고 데소히스(Desoches1769~74년) 등이 있었다.
그러나 퓨르스텐베르그의 자기의 명성은 주로 밝은 색채의 다색화(Buntmalerei)에 의한 그림을 그린 제품에 의해 1770년부터 20년간 번성기를 누렸으며 1774년에 브룬스빅(Brunswick)으로 옮겨 182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39명의 화공의 이름이 알려져 있으며 그 가운데 요한 에른스트 콜(Johann Ernst Kohl 1769~90)이 가장 유명하였다.
마. 프랑켄탈공방
프랑켄탈의 자기공방은 독일의 많은 공방과 같이 피겨린에 의해 유명하여졌다. 공방의 존속기간동안 만들어진 피겨린은 800여종 이상으로써 창설자 파울 안톤 한농은 이미 스트라스부르에서 링글러의 도움을 받아 파이앙스공방에서 경질자기를 제작하고 있었다.
프랑스전역의 독점권을 가진 세브르공방 때문에 스트라스브르의 생산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되었던 한농은 프랑켄탈로 공방을 옮긴 후 선제후 칼 데오돌의 원조를 얻어 1755년 3월 26일에 자기제조판매의 독점권을 인가받았다. 처음에는 한농의 아들 칼 프란츠 파울 한농이 공방을 운영하였고 그 사후에는 형제인 요제프 아담 한농이 계승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1761년 선제후에게 팔렸다.
선제후가 인수한 공방의 기술적 관리자는 아담 베르돌(Adam Bergdol)이었으며 1775년 은퇴한 후 시몬 파일너가 뒤를 이었으나 1794~95년의 프랑스의 점령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
1795년 봄 프랑스는 공방을 피터 판 레큠(Peter van Recum)에게 빌려주었고 그는 다시 베르돌을 책임자로 앉혔으나 1795년 가을부터 1797년에 걸친 단기간 선제후 칼 데오돌이 다시 장악한 후 칸보폴미오의 화평조건에 따라 1797년 12월에 요한 네포먹 판 레큠(Johann Nepomuck van Recum)에게 매각당했다. 레큠은 공방을 인수한 직후 재정적 이유를 들어 1799년 여름 가마를 폐쇄하고 그룬슈타트에 스톤웨어 공방을 설립한 후 프랑켄탈의 원형을 다량 옮겼으며 프랑켄탈공방의 법적인 폐쇄는 1800년 5월 27일 선제후 막스 4세 요제프의 서명에 의해 이루어졌다.
프랑켄탈 최초의 자기는 1755년 11월에 만들어졌으며 처음에는 스트라스부르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한농은 스트라스부르의 장인들을 데려올 것을 고려하였으며 스트라스부르의 원형을 사용하여 일상적인 인물상, 상인, 농부, 귀부인과 서있는 남자, 사계나 대륙 등을 묘사한 피겨린을 만들었다. 초기 피겨린의 받침대는 스트라스부르의 파이앙스도자기의 것과 비슷하였으나 나중에는 로코코식의 받침대가 사용되었으며 보라색이나 금색을 칠하였다. 최초의 원형제작자는 요한 빌헬름 란츠(Johann Wilhelm Lanz 1755~61)였으며 나중에 요제프 아담 한농에 의해 프랑켄탈의 원형제작자 가운데 가장 유명해진 요한 프리드리히 뤽(Johann Friedrich Luck 1758~64)과 칼 고트리에브 뤽(Karl Gottlieb Luck 1758-75)형제가 함께 활약하였다.
또한 사계절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피겨린의 원형을 만들었던 궁정조각사 프란츠 콘라드 링크(Franz Konrad Linck 1762~80)의 작품도 뛰어난 것이었다. 링크의 것은 1779년 헤히스트공방에서 온 메르히올의 작품과 함께 프랑켄탈의 자기의 초기 신고전주의라 할 수 있다. 그는 특히 흰대리석을 닮은 무유자기, 또는 흰유약을 칠한 풍속군상을 좋아하였다. 공방이 폐쇄되기까지 프랑켄탈에서 일하였던 또 한사람의 원형제작자로서 아담 클레어( Adam Clair)가 있었으며 그는 1799년 메르히올을 따라 님펜부르그로 옮겼다.
프랑켄탈의 식기에는 그림과 양각장식 모두가 쓰여졌으며 요한 베른하트 마그너스(Johann Bernhard Magnus)를 포함한 여러 사람의 화공들에 의해 장식이 이루어졌다. 프랑켄탈의 화공들은 그림 그 자체뿐 아니라 바탕색도 프랑스의 4색법(a quartre couleurs)을 따라 다양하게 구사하였으며 금의 농담도 여러가지로 조절하는 등 다채로운 표현기법을 사용하였다.
바. 루드비히스부르그의 공방
1758년 4월 5일 베르덴베르그 공작 칼 오이겐에 의해 설립된 루드비히스부르그의 공방은 헤히스트, 스트라스부르, 님펜브르그 등지의 공방에서 자기생산에 성공한 링글러가 1760년에 지배인에 임명되어 1767년까지 절정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1770년대에 이르러서는 생산량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창설자 칼 오이겐이 1793년 사망하고 난 후에는 루드비히스브르그 제품의 예술적 가치도 저하되었으며 1824년 베르덴베르그왕 빌헤름 1세가 공방을 폐쇄하였다.
루드비히스브르그 공방 역시 여러가지 제품을 생산하였으나 그중 피겨린이 가장 특징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옛 기록이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장인들이 제품에 서명을 남기지 않아 작자를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려워서 1762년 이전에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피겨린에 대해서는 민중상의 명인, 아폴로촛대의 명인, 댄스군상의 명인과 같이 명인(Meister)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루드비히스브르그 피겨린은 로코코풍의 자기에서 초기신고전주의에의 이행을 확실히 보여주었으며 그 영향을 독일에서 최초로 보인 공방으로써 조각사 요한 크리스찬 빌헬름 바이어(Johann Christian Wilhelm Beyer)와 관련이 있다.
바이어는 님펜브르그의 아우리체크와 같이 1751년부터 1759년까지 이탈리아에서 지내는 동안 고전예술의 완전한 조화에 대한 빈켈만(Winckelmann)의 이론을 접하고 고전예술에 심취하고 귀국한 후 궁정조각사로 고용되었으나 한편으로 자기공방의 마무리작업을 점검하기도 하였다. 결국 바이어는 자기 피겨린 제작자라기 보다는 다재다능한 예술가로 볼 수 있으며 그의 작품 중 가장 독특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獨奏曲(Musiksoli)시리즈는 로코코예술의 쾌활함을 신고전주의보다 잘 마무리하여 승화시킨 예라고 할 수 있다. 1767년 빈으로 건너가 1770년에 궁정조각사겸 화공에 임명되었다.
바이어와 함께 루드비히스브르그에서 일하였던 다른 원형제작자중에는 많은 신화적인 테마의 피겨린을 만든 도메니코 페레티(Domenico Ferretti 1764~67)와 칼 오이겐공작에 의해 임명되어 1768~78년간 활약했던 피에르 프랑소와 르저느(Pierre Francois Lejeune) 등을 들 수 있으며 주로 동물 피겨린을 만든 쟝 쟈크 루이(Jean Jacques Louis)도 있다.
루드비히스브르그의 식기류는 피겨린 만큼의 중요성은 없으나 그림이 특징적이며 그 가운데 로코코양식을 가장 잘 표현한 좋은 예는 주임화공 고트리에브 프리드리히 리델(Gottlieb Friedrich Riedel 1759~79)의 작품이다. 또 한사람의 유명한 화공은 요제프 필립 단회프(Joseph Phillipp Dannhofer)로서 바이로이터(Bayreuth), 아스트베싱겐 (Abstbessingen), 헤히스트 등 독일의 여러 파이앙스 도자기와 자기공방에서 일한 후 1762년부터 1790년 사망할 때까지 루드비히스브르그에서 일하였다.
사. 튜링겐공방
18세기 중엽, 유럽자기의 역사가운데 새로운 장이 튜링겐의 숲에서 시작되었다. 연료도 풍부하고 강의 유속도 빨라 점토를 만드는 기계의 동력도 충분하였다. 자기제조법의 이론적 근거는 신학생이자 실험의 명인 게오르그 하인리히 마헤라이트(George Heinrich Macheleid)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일부는 그라이너형제와 그들로부터 배운 덤러(J. G Dummler)였다. 그들이 사용한 점토는 마이센이나 빈의 것과는 달랐으며 튜링겐자기라는 새로운 용어를 낳게 만들었다. 튜링겐자기는 독일의 여러 지역의 독립된 공방과는 달리 많은 공방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하며 결과적으로는 튜링겐의 산업제품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튜링겐자기공방은 1760년 프리드리히 빌헤름 오이겐 폰 힐드부르그하우젠(Friedrich Wilhelm Eugen von Hildburghausen)대공이 설립한 클로스터 바일스도르프(Kloster Veilsdorf)의 공방을 제외하고는 모두 상업을 목적으로 도공, 유리장인 그리고 상인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들의 목적은 대공의 궁정의 영광을 번창시키는 것보다 지방 중산계급시민이나 부유한 농민들에 의한 넓은 시장의 수요를 만족시키는데 있었다. 그 때문에 자기피겨린 보다 식기세트나 가정용품의 수요가 훨씬 많았다. 이와같은 실용적인 목적과 상업적인 경영이 조화를 이루어 귀족계급들에 의한 경제적 압력에도 잘 견디었던 것이다.
힐드부르그하우젠 대공의 공방 외에도 1760년 마헤라이트가 지첸도르프(Sitzendorf)에서 자기생산의 독점권을 인가받고 공방을 설립한 후 1762년 폴크스테트(Volkstedt)로 이전하였으며 크라이너형제는 1762년 발렌도르프(Wallendorf)에 공방을 창설하고 튜링겐자기 생산의 기초를 쌓았다. 이어서 1772년 림바흐(Limbach), 1777년 일메나우( Ilmenau), 그로스브라이텐바하(Grossbreitenbach), 1779년 게라(Gera), 1783년 로엔스타인(Rauenstein), 1790년 블랑켄하인(Blankenhain), 1796년 아이젠베르그(Eisenberg), 1799년 푀스넥(Possnek) 등의 공방이 개설되었다.
튜링겐 자기의 품질은 여러가지로써 18세기 중에 만들어진 것 중의 일부는 공방들의 상업적 이해가 우선된 느낌을 남기고 있으며 장식은 브란덴슈타인의 양각이나 코발트색의 새, 영구화가 핀 언덕 등과 같은 마이센의 양식을 주로 차용했다.
튜링겐의 자기산업은 112개의 공방이 존재했던 19세기가 되면서 정점에 달했으며 칼로비 배리(Karlovy Vary), 칼스바드(Karlsbad)주변의 보헤미아 북서부의 산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18세기 중반 튜링겐에 카올린이 퇴적된 것이 알려지고 부터는 독일 뿐 아니라 주변의 국가들까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오스트리아는 빈의 자기공방의 번영을 위해 튜링겐에서의 카올린 수입을 촉진하였으며 라벤스그륀(Rabensgrun)에 체코의 자기공방을 설립하는 최초의 시도도 같은 맥락에서 시작되었다.
4) 체코 경질자기 공방
체코의 경질자기 공방은 1789년 프라니섹 안토닌 하버티츨(Franisek Antonin Habertitzl)에 의해 최초로 설립되었다. 하버티츨은 튜링겐의 그로스브라이덴바르공방의 요한 고트리에브 존탁(Johann Gottlieb Sornntag)을 고용하고 1793년부터 자기생산허가를 출원하였으나 거부당하여 회사는 해체되고 최초의 체코제 자기는 실현되지 않았다. 3년 후인 1792년 얀 이리 파우르스(Jan Jiri Paulus)와 얀 페슐(Jan Poschl)이 튜링겐의 요한 게오르그 로만(Johann Georg Reumann)의 도움을 얻어 슬라브코(Slavkov)에 제2의 체코자기공방을 설립하였으나 특허신청이 또 거부되어 1800년 게라의 자기공방경영자의 미망인 루이자 그라이너(Louisa Greiner)에 팔아넘겼다.
19세기가 되어 체코자기공방에 대한 당국의 정책이 변화하여 슬라브코프(Slavkov)의 공방은 번창하게 되었다. 18세기 중반에 창설된 제3의 체코공방은 클라체렉(Klasterec)에 있는 프란티젝 요제프 둔(Frantisek Josef Thun)백작이 뢰벤스그륀공방의 존탁과 함께 일하였던 요한 니콜라스 베버(Johann Nicolaus Weber)를 지원함으로써 1794년 9월15일 최초의 가마에 불이 당겨졌다. 그러나 클라체렉공방이 번영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이고 현재도 체코의 중요한 자기제조소의 하나이다.
5) 이탈리아 경질자기 공방
베트가의 경질자기는 물론 다른 유럽 여러나라에도 들어갔다. 앞서 말한대로 1720년 크리스토프 콘라드 헝거는 파기에가 금전적인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빈을 떠나 베네치아로 옮긴 후 베씨형제의 출자로 쟉센산의 카올린을 수입하여 경질자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1727년 헝거가 마이센으로 돌아간 후 카올린의 수입이 끊어져 프리드리히 헤벨케(Friedrich Hewelcke)가 베네치아근교의 트레토(Tretto)에서 카올린을 채취하여 1758년부터 6년간 자기제조를 시작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헤벨케는 은행가 제르미니아노 코지(Germiniano Cozzi)의 원조를 받았으나 1763년에 자기제조허가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코지는 자기제조계획을 그만두지 않았으며 1765년 20년간의 특허권을 받고 1812년까지 지속하였으나 1769년에는 경제적 이유에서 마요리카를 만들었고 1781년부터는 영국식 스톤웨어를 생산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최초의 경질자기공방은 헤벨케와 코지의 계획이전에 이미 피렌체 근교의 도키아(Doccia)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유럽에서 3번째로 오랜 공방으로써 1735년 카르도 지노리(Cardo Ginori)후작이 빈의 요한 칼 벤데린 안라이트 폰 치른펠트의 도움을 얻어 설립하였으나 자기제조의 성공은 1740년대의 후반이 되면서 부터이다. 가스파르(Gaspar)와 쥐세페 브루스키(Giuseppe Bruschi)를 포함한 여러 명의 유능한 이탈리아 장인이 일하였으며 큰항아리와 피겨린에 의해 유명해졌다.
또 하나의 유명한 자기공방은 토리노근교의 피노포에 있었으며 빈에서 온 장인의 도움으로 중매인 지오반니 빗토리오 브로델이 설립하였다. 1776년에 세브르에 자기비법을 판 피터 안톤 한농의 협력을 얻게 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1778년 공방을 폐쇄하였다. 공방은 다시 1780년 비토리오 아마데오 지오네티(Vittorio Amadeo Gioanetti)박사에 의해 재개되어 이전보다는 성공하였으며 1796년 프랑스군의 점령으로 폐쇄되기까지 운영되었다. 1815년 또 한번의 공방재개가 시도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1820년 완전히 사라졌다.
6) 러시아 경질자기공방
1744년 황제의 자기공방이 세인트 페테스브르그(St. Petersburg)에서 시작되었으나 초빙되어온 헝거를 포함한 외국의 장인들은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그 이후 러시아의 광산기사 드리드리히 이바노비치 비노크라토프가 계속하여 1747년 최초의 실험적 자기를 만들었으나 태토의 색은 회색이었고 유약도 조악하였다. 그러나 1749년에 이르러서는 유약 위에 에나멜로 장식한 비교적 양질의 제품이 만들어졌으며 1750년대에는 시장의 수요를 만족시킬 만큼 성장하였고 주로 그림을 그린 담배함이나 금색과 보라색으로 장식한 양각의 문양이 있는 식기세트가 만들어졌다.
1779년 앙트완느 라세트(Antoine J. D. Rachette)가 피겨린 제작부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코펜하겐과 파리에서 공부하였으며 다양한 제품을 개발하고 제작함으로써 페테스브르그공방의 명성을 높였다. 페테스브르그공방에서 만들어진 제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러시아街頭상인과 장인시리즈와 1776년 게오르그(I. I Georg)의 民族誌學的스케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러시아의 나라들시리즈이다. 식기세트 중 유명한 것은 아라베스크 장식이 있는 배모양의 세트와 유스포프대공(Prince Yusupov)을 위해 만든 세트가 있다. 18세기 러시아의 경질자기를 대표하는 페테스부르그공방에는 모두 200인의 장인들이 일할 정도로 번창하였다.
7) 네덜란드, 덴마크의 경질자기 공방
북서유럽에서 최초의 성공을 거둔 공방은 1757년 암스텔담의 상인 파이(Pye)와 크뤽상(Cruikshank)에 의해 암스텔담 근교의 베스프에 만들어졌다. 자기와 도기를 만들기 위해 설립되었으나 1759년까지는 파이앙스 도자기 외에는 만들지 못하였으며 공방이 판 그로스벨트 디 펜브로익에게 팔린 후 독일인 니콜라스 파울에 의해 경질자기 생산을 개시하여 1762년에는 유리와 같은 백색제품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공방을 세브르에 매각하려는 교섭이 시작됨으로서 1771년 생산이 중단되었고 드 몰(J. de Mol)이 오우드 루스드레흐트(Oude Loosdrecht)의 자신의 공방용으로 설비의 일부를 인수하였다.
코펜하겐에서는 1731년부터 자기생산이 시도되었다고 전해지지만 헝거를 포함한 마이센의 요한 뤽(Johann C. F Luck)도 실패하였다. 본호름(Bornholm)에서 적당한 점토광이 발견되었던 1756년에 공방이 설립되었으나 최초의 자기생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759년에 방센느와 샨티이(Chantilly)에서 일한 적 있는 루이 프루니에(Louis Fournier)가 프리트자기를 생산하였으며 그의 후계자 뮐러(F. H Muller)와 리히터(Richter)가 리모쥬(Limoges)에서 수입한 점토로 코펜하겐 최초의 경질자기를 만든 것이 1773년이었다. 이어서 1775년에는 1756년의 것보다 양질의 카올린이 본호름에서 발견됨으로써 코펜하겐의 자기산업은 번성하게 되며 공방은 1779년 왕실소유가 된 후 1780년대에 예술적 평가를 얻었다. 그러나 왕립자기공장(Kongelige Porcelainsfabrik)으로 알려져 있는 이 공방은 주로 독일의 장인들을 고용하였으므로 괄목할 만한 독자성은 없었다. 다만 1790년에서 1802년 사이에 요한 크리스토프 바이어(Johann Christoph Bayer)의 그림에 의한 유명한 덴마크식물세트(Flora Danics Service)가 창출되었다. 처음 공방은 주로 식기류를 생산하였으며 나중에도 피겨린의 생산에는 큰 관심을 보내지 않았다.
2. 연질자기
1) 세브르
프랑스는 다른 방법으로 자기를 만들려고 한 이탈리아의 노력을 받아서 베트가의 발견 이전에 루이 포드라에 의해 프리트자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은 피에르 시카노(Pierre Chicaneau)에 의해 개발된 중국이나 인도의 것과 거의 같은 수준의 완전한자기를 들 수 있으며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공정이 개량되어 1683년에 이르러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제품이 되었다. 상 클루(St. Cloud)공방의 자기는 시카노의 사후에도 계속 만들어졌지만 미망인의 재혼으로 공방은 트루(Trou)일족의 손에 넘어갔고 특히 방센느와의 경쟁이 격렬해졌을 때의 소유자 앙리 프랑소아 트루(Henri Francois Trou)는 공방을 폐쇄하게 되었다.
한편 1700년 이후 쟉센에서의 성공을 주시하였던 프랑스의 장인들은 진짜 자기의 개발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으므로 1711년 바르텔레미 도르(Barthelemy Dorez)와 조카 피에르 펠리시에(Pierre Pelissier)가 파이앙스도자기 생산에 자기를 추가했을 때 릴(Lille)시가 지원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제품에 사용한 점토는 시카노의 상 클루공방의 것과 거의 흡사하였기 때문이다. 도르와 펠리시에는 1730년경까지 계속 생산하였으나 그 이후에는 파이앙스도자기 밖에 만들지 않았다.
샨티이에서의 연질자기 생산은 프랑스 최상류사회가 기획했던 사업중의 하나였다. 콩테大公 루이 앙리 드 부르봉은 1725년 자신의 궁정이 있는 샨티이에 공방을 설립하고 산세르 시르(Sincaire Cirou)에게 관리를 맡겼다. 시르는 1720년부터 대공이 죽은 1751년까지 일하였으며 공방은 역대 지배인들에 의해 1800년까지 계속되었고 최후의 지배인 영국인 크리스토퍼 포터(Christopher Potter)가 파산을 선언하였다. 기록에는 시르가 프리트자기의 제조법을 발견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며 공방의 기술적인 특징은 역시 파이앙스였다.
프랑스에서 프리트자기 생산에 대한 지식을 전파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독일의 링글러와 같은 인물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다소의 역할을 한 사람은 로베르와 질 듀보와(Robert & Gilles Dubois)형제로 파리근교 방센느의 사람이 살지 않는 왕가의 성에서 자기를 만들었으며 오리 드 퓰비(Orry de Fulvy)후작에게 고용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3년간 일한 후 면직되었다. 1750년에 그들은 뚜르네(Tournai)로 갔으며 로베르가 새로운 자기공방의 지배인에 임명되었다. 듀보와 형제가 가고 난 후의 방센느에서는 조수였던 프랑소아 그라방(Francois Gravant)이 실험을 계속하여 1745년 자기제조에 적당한 연질태토를 배합하는데 성공하였다. 같은 해 아담(C. Adam)에 의한 유한회사가 설립되었으며 이것이 나중에 세브르라는 이름의 시초가 되어 쟉센의 마이센과 같이 유명한 공방이 되었다.
그러나 양자의 방법은 차이가 있다. 마이센은 걸출한 기술자, 화공, 조각사를 고용하여 공방의 제품에 여러가지 개성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마이센의 자기를 고찰하려면 각 장인들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세브르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독특한 프랑스풍의 스타일을 만들려면 공방기술자들은 그것에 따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세브르제품에 개인적 특징을 표현한 장인은 단지 조각사 에띠엔느 모리스 팔코네(Etienne Maurice Falconet)와 화가 프랑소아 부셰(Francois Boucher)뿐이다.
이 회사는 쟉센류의 자기, 즉 그림을 그리고 금을 덧칠하는 등 여러가지 장식을 한 자기의 독점생산권에 대한 칙허를 받았다. 다른 공방은 같은 제품을 만드는 것을 허가받지 못하였고 장인들도 함부로 이동할 수 없었다. 1747년에 특허를 연장하였고 장인들에 대한 더욱 엄한 규제가 세워졌다. 이시기의 기술관리자는 쟝 엘로(Jean Hellot), 지배인은 보와로(Boileau), 기술감독은 헐스트(Hulst)였으며 1751년 쟝 자크 바슈리에(Jean Jacques Bachelier)가 뒤를 이었다. 1752년에는 회사를 새롭게 개편하였고 왕이 주식의 1/3을 소유하였다. 새로운 특허에는 왕립자기공방이란 직함과 왕의 문자L을 공식마크로 지정하였고 금을 사용한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 백색자기나 채색자기, 평면이거나 양각된 것, 심지어 피겨린이나 꽃디자인을 포함한 모든 자기의 독점제작권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 기간 또한 1752년 10월부터 12년 3개월간 유효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광범위한 독점권은 프랑스 다른 지방의 산업발달을 저해하였다. 상 클루와 샨티이도 피해를 입었으며 앞서 말한 것처럼 한농은 공방을 독일의 프랑켄탈로 옮겨 버렸던 것이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세브르에로의 이전이 검토되었으며 1756년 방센느공방의 적극적인 후원자였던 퐁파두르(Pompadour)부인의 제안에 따라 이전이 실행되었고 1759년에는 왕의 소유가 되어 프랑스 혁명까지 운영되었다.
1800년 5월 14일 화학자겸 지질학자 브로냐르(A. Brongiart)가 세브르공방의 감독이 되었으며 1805년에 황제개인재산으로서의 특권적 지위를 복권하였다. 왕에 의해 방센느에 창설되었었던 세브르공방의 특별한 위치는 제품의 기술적, 예술적 업적에 투영되어 있다.
화학자로서 아카데미 프랑세스의 회원 엘로는 퐁파두르의 장미색, 방센느의 청색, 하늘색등의 새로운 색을 발명하였으며 이 색채들의 반짝이는 반투명함이 프리트자기의 태토와 유약의 우수성을 더하였다. 색이 칠해지고 남은 백색의 바탕에 가키에몽(柿右衛門)양식과 유럽의 꽃과 과일 또는 앙트완느 와토나 프랑소와 부셰의 그림에서 취한 장면이 묘사되었다.
세브르공방의 이름을 높인 특산품은 생화와 흡사한 형태에 채색한 자기제의 꽃으로서 램프, 시계 그 외의 장식에 사용하거나 꽃다발로 만들어졌다. 공방의 예술적 수준은 세브르에 이전하여서도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새로운 바탕색들이 개발되었고 대리석의 문양과 같은 여러가지 자연스러운 느낌의 새로운 문양이 디자인되었으며 세브르공방의 최고의 위업은 여황제 에카테리나 2세가 주문한 744점으로 완성된 식기세트를 들 수 잇다.
1780년대의 세브르는 마이센에 대신해서 유럽자기예술의 지도적 세력이 되었다. 부드러운 프리트자기는 특히 피겨린 제작에는 안성마춤이었다.
최초의 피겨린 제작자는 왕실조각사 파르코네로써 1764년의 앙네트와 류반군상을 만들었으며 제자 듀루(Duru)는 1765년경 빅마리온군상을 만들었고 1771~72년에는 르 리히(J. F. Le Riche)가 신화를 제재로 한 군상을 제작하였다.
세브르공방의 예술성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소수의 예술가들의 공헌이다. 피겨린은 물론이고 그림의 경우에도 세브르공방의 제품에는 로코코시대의 화가 프랑소아 푸세를 들 수 있다. 부셰 자신이 직접 피겨린의 원형을 만들지는 않았으나 일생을 통해 세브르를 위한 피겨린을 디자인하였고 피리 레슨과 같은 작품은 19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여러 자기공방들에 의해 모방되었다.
또한 세브르공방이 이룩한 기술적 업적은 1751년 방센느공방에서 바슈리에에 의해 도입되어 신고전주의기의 사이 프리트뿐 아니라 경질자기에도 자주 사용된 무유자기이다.
1772년 리모쥬근교의 상 이리에(St. Yrieix)에서 카올린 퇴적광이 발견된 후 세브르에서도 경질자기가 만들어졌으나 연질프리트자기의 생산은 1804년까지 계속되었다.
2)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식의 자기는 18세기 유럽 여러지역의 공방 특히 이탈리아에서 유행되었다. 1741년부터 부르봉가의 샤를르 2세(CharlesⅡof Bourbon)는 카포디몬테에서의 자기생산실험을 장려하였으며 1743년 화학자 리비오 오타비오 스케페레스(Livio Ottavio Schepers)가 프리트 태토의 합성에 성공함으로써 공방은 생산을 개시하였고 주생산품인 식기류는 18세기 유럽의 명품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모양은 1757년경까지 마이센과 빈의 바로크풍의 그릇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매우 섬세한 그림이 채색되었으며 원형제작자 쥐세페 그리치(Giuseppe Gricci)가 만든 여러가지 대형 피겨린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것들이었다. 1759년 부르봉가의 카를로스가 스페인의 왕으로 등극하면서 카포디몬테공방은 바로 스페인으로 옮겨져 마드리드근교 펜 레티로의 여름 별장지에 재건하였다. 장인과 기술자, 설비 모두를 스페인으로 옮겨 1760년에는 스페인 최초의 자기가 만들어졌으나 양식들은 이탈리아의 전통을 따랐다.
프리트자기는 다시 1771년 이후 나폴리에서 만들어졌다. 왕 페르디난도 4세가 나폴리에 새로운 공방을 설립하고 1834년까지 조업하였으며 프랑스와 독일에 필적할 만한 제품을 만들었다.
펜 레티로에서는 고전주의시대에 이르러 겨우 확실한 스타일이 정해졌으며 공방특유의 제품은 1780년 이후의 것에 속한다. 1804년 세브르의 비비앙(Vibien)이 초빙되어 연질자기의 제조가 시작되었으나 나폴레옹(1808~1812)전쟁 중에 파괴되고 말았다. 프랑스인 피에르 클루스터만(Pierre Cloosterman)은 1786년 프랑소아 알리(Francois Haly)와 크리스찬 크니퍼(Christian Knipffer)가 실패한 것을 받아서 알코라(Alcora)의 파이앙스공방에서 경질자기를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클루스터만의 것으로는 황색조를 띤 태토로 만든 작은 향수병이나 코담배상자가 유명하다. 장식적인 면에서는 파리의 양식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청색 바탕에 금색의 로코코풍의 소용돌이 문양을 배치한 것과 신고전주의적 디자인이 인기를 누렸다. 공방은 1858년 폐쇄되었으나 자기제작은 이미 그전에 정지되었다.
3) 영국
영국에서는 오랜 기간 자기를 만들려는 시도가 계속되었으며 1743년 첼시(Chelsea)에 설립된 최초의 공방은 프랑스의 연질태토를 사용하였다. 죤 드와이트와 엘라스형제, 프란시스 프레스 등은 스톤웨어를 만드는데 성공하였으나 드와이트는 회색자기라고 불렀다.
마이센에서의 성공의 결과 영국에서도 흥미 있는 실험이 이루어졌다. 독자의 자기태토를 개발한 소수의 나라가운데 하나인 프랑스형의 프리트자기가 첼시, 더비(Derby) 및 롱턴 홀(Longton Hall)에서 만들어졌다.
본차이나는 영국의 발명품으로써 토머스 프라이(Thomas Frye)가 1744년과 1748년에 특허를 받고 신광동(新廣東, New Kanton)이라 불리운 바우(Bow)공방을 설립하였다. 본차이나는 18세기말 워스터(Worcester)의 바(Barr)와 스톡 온 트렌트(Stoke on Trent)의 스포드(Spode)가 개량하여 영국의 표준적인 자기태토가 되었고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또 하나 영국의 발명은 태토에 소프스톤(Soapstone)을 혼합한 것으로써 제법은 1748년에 브리스톨(Bristol)에서 사용되었으며 화학자 윌리엄 쿡워시(William Cookworthy)가 고안한 것으로 보인다. 소프스톤자기는 워스터(1751년창설), 코흘리(Caughly 1772년창설) 및 리버풀(Riverpool 1756년창설)에서도 만들어졌다.
경질자기의 제조 역시 콘월의 세인트 오스텔(St. Austell)에서 카올린 점토광을 발견한 화학자 쿡워시와 관계가 있다. 1768년 특허를 인정받은 그는 몇 사람의 파트너와 함께 플리머스(Plymouth)에 공방을 만들었다. 쿡워시의 제법을 사용한 경질자기는 브리스톨(Bristol 1770년창설)과 뉴 홀(New Hall 1782년창설)에서도 만들어졌으나 뉴 홀은 1810년에 본차이나로 바뀌었다.
첼시의 공방은 1743년 프랑스인 토마스 브리앙(Thomas Briand)이 개발한 점토를 바탕으로 설립되었으며 다시 두 사람의 프랑스인이 브리앙의 발견을 이용하였다. 보석세공사 샤를르 그윈(Charles Gouyn)과 은세공사 니콜라 스프리몽(Nicholas Sprimont)이 운영하였으나 1769년 제임스 칵스(James Cox)에게 넘어갔고 다시 다음해 더비(Derby)상회의 공동경영자인 윌리엄 듀스버리(William Duesbury)에게 팔렸다.
첼시공방은 1784년까지 생산을 하였으며 각시기에 사용된 서명에 의해 구별된다. 1749년까지는 삼각, 1750~3년까지는 닻문양 , 1753~8년간은 붉은닻문양 그리고 1758~69년까지는 금색닻문양의 서명이 있다. 첼시가 더비공방과 합병했던 시기는 첼시더비기로 알려져 있으며 각 시기는 확실히 다른 여러가지로 스타일로 이루어져 있다. 최초의 삼각시기의 형은 은기를 충실하게 복제한 것이었으나 두 번째의 시기에는 동양의 자기와 마이센양식이 일부 모방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마이센제품의 영향을 받은 피겨린이 도입됨으로써 영국의 자기도 마이센의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으나 방센느에서의 보고서에는 1745년경 영국에서 만들어진 자기가 쟉센의 것보다 훨씬 상품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금색닻의 시기는 세브르의 영향이 첼시에 우세하여 단순히 채색법 뿐 아니라 1770년 이후의 무유자기에서도 흔적이 보인다.
바우공방은 1748년부터 토마스 프라이의 특허에 의한 본차이나를 만들었으며 예술적으로는 첼시 만큼 중요하지 않지만 피겨린 몇 점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피겨린 제작의 대부분은 프랑스인 티보(Thibaud)와 조각사겸 원형제작자 존 베이컨(John Bacon)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바우의 식기류는 아리타도자기와 중국백자의 양식을 본보기로 하였다.
공방이 창설된 2년 후인 1750년 토마스 프라이는 공방을 공동경영자 크라우서(Crowther)와 웨더비(Weatherby)에게 맡기고 자신은 기술감독으로 남았으나 1759년에는 그림쪽으로 돌아갔다. 1762년에 웨더비가 죽고 난 후 재정난에 부딪혀 1763년 크라우서는 회사의 파산을 선고하고 생산량을 감축하였다. 1776년 윌리엄 듀스버리가 회사를 인수하면서 바우를 폐쇄하고 설비의 일부를 더비공방으로 옮겼다.
토머스 브리앙은 첼시공방의 설립에 관계하였으나 1745년 더비에서 자기제작을 시도하였다. 그가 그곳에서 제임스 머천드(James Marchand)와 함께 만든 공방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단지 단기간밖에 일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1756년 윌리엄 듀스버리는 회사를 만들고 첼시의 프리트 자기와 같은 성분의 자기를 만들기 위해 더비에 공방을 열었다. 은행가 존 히스(John Heath)가 자금을 제공하였고 프랑스의 장인 앙드레 쁘랑슈(Andre Planche)를 초빙하였다. 회사는 급속히 확장하여 1760년에는 롱턴 홀공방을 1769년에는 첼시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1776년에 바우공방을 인수하여 더비는 18세기 유럽의 가장 중요한 자기공방의 하나가 되었다.
더비제품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 것은 마이센의 강한 영향을 받은 피겨린으로써 듀스버리 스스로가 이것들을 최상의 드레스덴을 모델로 만들었다.라고 기술하였으며 더비의 또 다른 이름을 제2의 드레스덴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여기에는 원형제작자와 화공들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원형제작자로는 바우공방에서 온 존 베이컨과 취리히의 쟝 자크 스펭글러(Jean Jacques Spengler)가 있었으며 화공중에는 첼시의 쟈카리아 보어만(Zachariah Boreman)과 윌리엄 빙슬리(William Billingsley)를 들 수 있다. 이 장인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드레스덴 즉 마이센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함을 알 수 있다. 첼시더비기에는(1770~84년) 세브르를 모델로 한 신고전주의가 더비의 자기를 더욱 번성하게 하였다.
워스터는 소프스톤이 함유된 태토를 사용하는 공방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이다. 워스트공방의 직접적 전신은 1748년에 벤자민 룬드(Benjamin Lund)와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에 의해 설립된 브리스톨의 작은 공방이었다. 룬드는 쿡워시로부터 자기제조에 있어서 소프스톤의 이점을 배웠으며 1748년 3월 7일에 규 게어(Gew Gare)에서 소프스톤을 채석하는 인가를 받고 식기와 피겨린을 생산하였다.
1751년 윌리엄 데이비스(William Davis)가 경영자가 되었으며 화학자이자 의사인 존 월(John Wall)박사가 지도적 역할을 하면서 워스터자기회사가 설립되었다. 1752년 브리스톨공방을 인수하고 생산을 워스터로 옮겼다. 윌리엄 데이비스는 1783년 죽을 때까지 회사를 운영하였으나 1772년에 이미 토머스 버논(Thomas Vernon)에게 팔렸다. 1783년 플라이트(Flight)일가가 소유자가 되었으며 1791년에 다시 바(Barr)일가에게 넘어갔다.
로버트 포드모어(Robert Podmore)와 존 리(John Lyes)에 의해 만들어진 소프스톤 태토는 상당히 얇게 처리하는 것이 가능하여 식기용으로 적합하였으며 워스트공방의 주요상품이 되었다. 피겨린이 만들어진 것이 확실히 입중 된 것은 디보가 워스트에 온 1769년 이후의 일이다. 이것은 바우에서 성공을 확인한 로버트 행콕(Robert Hancock)이 1757년 도입하였다. 워스터자기는 시장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었으며 18세기에는 코울리와 같은 다른 공방에서도 모방되었다.
플리머스(Plymouth)는 쿡워시가 1758년 세인트 오스텔에서 카올린광을 발견하고 1768년에 특허를 받은 후 경질자기를 만들기 시작하여 18세기 영국에서 만들어진 자기에 또 하나의 타입을 첨가하였다. 쿡워시의 특허는 브리스톨공방(1770~82년)과 본차이나로 생산을 바꾸기 이전의 뉴홀(1782~1810년)에도 사용되었다. 쿡워시는 플리머스에서 식기와 피겨린등을 만들었으나 아주 뛰어나지는 않았으므로 원형제작자 디보가 바우에서 원형을 가지고 왔다. 또한 세브르에서 온 사키(Saqui)는 훌륭한 화공으로써 특히 밝은 색의 풍경화가 전문이었다. 플리머스제품의 조형적 특징으로는 간결한 아름다움에 있으나 중국풍의 청화보다는 장식이 덧붙여졌다.
4.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유럽자기
유럽에서의 19세기는 단순히 정치, 경제에서 뿐 아니라 문화에서도 혁명적인 시대였다. 18세기만 하더라도 자기는 소수의 상류계급의 특권이었으나 19세기에는 그것을 소유하는 사람들의 범위가 점점 넓어졌으며 이와같은 변화가 하룻밤사이에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1812년 유럽의 봉쇄가 무너진 후 주로 웨지우드제품으로 대표되는 영국의 스톤웨어가 적당한 가격으로 시장에 쏟아져서 실질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부담 없이 사게 되었다. 이것은 유럽의 자기공방에서 보면 위험한 경쟁이었다. 특히 그 당시에는 영국제를 모방한 스톤웨어를 생산하는 공방이 유럽전역에서 무수히 나타났으며 한편으로 고급자기공방 고객들의 구매력은 나폴레옹 전쟁에 의해 철저한 영향을 받았다.
가장 합리적인 자기공방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귀족궁정의 자랑거리이던 시대는 영원히 가버렸다. 궁정조각사는 무명의 디자이너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18세기 중반에 영국에서 전사장식이 발명된 후 화공도 쓸모 없는 존재가 되었다. 엄중히 통제되었던 순수한 상업적 기반 위에 새로운 공방이 생겨났다. 카올린의 새로운 퇴적광이 발견되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질 좋고 매장량이 많은 하나가 보헤미아의 카를로비 바리 근교에 있었다.
19세기 중반 유럽자기는 값싼 스톤웨어와 상업적으로 경쟁하였으나 곧 시장을 빼앗겼으며 19세기 후반에는 좀더 산업적인 자기제조에 들어가게 되었다. 주로 바바리아와 독일의 쟉센과 튜링겐, 영국의 스테포드셔, 보헤미아의 카를로비 바리 그리고 프랑스의 리모쥬 주변에 분포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보헤미아에서만도 19세기말에는 38개의 자기공방이 있었고 6,739명이 고용되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의 처음에 유럽예술에서 지배적인 양식은 일반적으로 제정풍(帝政風)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이 시대는 신고전주의의 최후의 단계에 해당하며 의식적인 테마나 양식을 고전, 고대에서 구하는 유행을 창출한 것은 프랑스였다. 제정풍의 양식은 1820년대가 끝날 때 까지 계속되었으며 나폴레옹시대의 프랑스 공식예술양식이었다. 18세기의 중엽에서 고전적인 형식이나 주제는 예술가들의 영감의 원천이었으나 19세기에는 의무적인 강령이 되었으며 장식은 고전시대의 그리이스나 로마예술의 충실한 재생을 기반으로 하게되었던 것이다. 제정풍 도자기의 표준형이라 할 수 있는 주전자나 컵, 설탕기는 단순한 원주형이 많았고 접시류는 상당히 깊고 전이 똑바로 서있다. 이와같은 모양은 화공에게 넓은 여백을 주어 신화적인 장면 외에도 세부적인 정확함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인 거리풍경이나 목가적인 전원의 정경을 담은 풍속화가 묘사되었다. 또한 이 시대의 기풍과 일치하였던 풍자나 상징적인 디자인도 나타났다. 자기제품은 우정과 사랑 등의 갖가지 감정을 표현하였으므로 사람들 사이에 주고받는 좋은 선물이 되었다. 꽃이나 꽃말도 인기 있는 테마였다. 화공들도 판화, 책의 삽화, 또는 정평 있는 디자인책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1820년경 제정풍 자기의 고전적인 형은 후기 제정기의 분위기에 보조를 맞춰 보다 수선스러운 형태로 바뀌었다. 술잔이나 반술잔형 그리고 상단이 부드럽게 구부러진 종형의 컵이 애호되었다. 표면은 매끄러운 것보다 양각된 문양이나 물방울 모양의 점 그리고 조개모양과 표면을 복제한 듯한 질감으로 처리되었다. 컵에는 사자의 다리에서 원형의 대까지 여러가지형상의 다리를 달았으며 장식은 고대의 용기, 특히 항아리를 모방하는 경향이 뚜렷하였다.
유행을 만들어낸 것은 역시 세브르공방이었다. 1800년 5월 알렉산더 브로냘이 세브르의 지배인이 되어 1847년 사망할 때까지 운영하였다. 브로냘은 경질자기를 도입함으로써 1804년부터는 연질자기의 생산을 중단시켰으며 새로운 안료를 개발하여 1815년부터 1850년까지 유명한 회화를 복제하는데 사용하게 하였다. 프랑스제국의 무드는 당연히 자기의 장식에 반영되었다. 나폴레옹 1세와 추종자들의 초상 그리고 승리한 군대의 진군이 그려졌으며 정복된 땅에서 가져온 예술적 명품은 유럽자기에 영향을 끼쳤으며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다.
1815년 황제의 실각 후 나폴레옹을 위한 주제는 모습을 감추었으나 그리이스의 세계의 식기세트에서도 보여진 것처럼 고전, 고대에 대한 찬미는 쇠퇴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에 대신해서 이번에는 루이 18세나 샤를르 10세의 초상이 자기에 등장하였고 과일이나 꽃도 한층 더 유행하였으며 세브르공방의 제품은 유럽전역의 자기제조자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러나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니더마이어의 뒤를 이은 주임원형제작자 그라시가 있던 빈공방이라고 보인다. 그라시는 고전예술의 심취자로써 자신의 자기장식에 폼페이의 프레스코화에서 얻은 장면을 넣었으며 피라네시(Piranesi)의 판화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세기초에 가장 인기를 얻은 것은 빈의 정경, 풍경, 초상등을 그린 것이었다. 이시기에 빈공방에서 만들어진 그림이 있는 자기는 지금까지 유럽에서 만들어진 것 가운데 가장 걸작중의 하나에 들어간다. 당시 공방에서 일한 화공은 고트가서(A. Kothgasser), 벨(G. Bell), 라이트너(J. Leithner) 등이 있다. 18세기 끝 무렵에는 빈의 피겨린에 있어서도 세브르의 것이 본보기가 되었다. 대리석과 같은 흰색 무유자기로 고대의 피겨린을 복사한 것이 일반적인 타입이었으며 그라시와 그의 제자 및 조수 샬러(J. Schaller)와 휘터(E. Hutter)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세인트 페테스브르그의 러시아 자기공방도 이 시대에는 상당한 수준까지 올라갔다. 조각사 피메노프(S. Pimenov)에 의해 디자인된 1809~17년의 그리에프(Guriyev)식기세트가 당시의 러시아 자기공방의 수준을 가늠케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 론
1708년 베트가의 경질자기제조법의 발견이래 유럽의 자기문화는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태토의 조성은 물론 유약과 장식기법에 이르기까지 유럽 각국은 자국의 오리지날리티를 구축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피겨린이나 타일 위생도기 및 가장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도구인 식기에 대해서도 각 산업체들은 총력을 기울여 경쟁하고 있다. 보다 좋은 재질의 보다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세계의 시장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식기제조업체에서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좀더 고급의 디자인을 위해 패션디자이너나 도예가들 나아가 화가들의 작품까지 도입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1879년에 창립한 독일의 로젠탈(Rosenthal)과 같은 회사들은 미국 도예가 도로시헤프너의 작품을 대량생산화하여 성공한데 이어 최근에는 지아니 베르사체의 화려한 디자인을 식기에 응용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이와같은 일들은 이제 식기도 단순히 먹는데 필요한 도구가 아니라 패션화되어 가고 있으며 고가의 디자인으로 경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300여 년전 최고급 상류사회에서만 허용되었던 자기는 이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이 되었고 어디서나 살 수 있는 상품이 되었지만 다시 새로운 양상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19세기초의 현상과 같이 자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양질의 스톤웨어가 시장을 석권하는 시대는 끝이 났다는 사실이다.
대량생산과 소비의 구조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가운데서 특별한 것을 요구하는 소비자의 기호에 맞는 제품들이 색다른 주제와 내용으로 생산되고 있다. 도예가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소위 작품을 능가하는 제품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마이센에서 시작한 유럽 경질자기는 다만 역사적인 사실일 뿐 현재에도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유럽 전지역에서 생산되는 각양각색의 자기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18세기와 같이 소수의 장인들에 의해 공방이 움직이는 것도 왕과 귀족에 의해 통제되는 것도 모두 과거의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현재의 유럽자기들은 자신들의 명성을 지키는 것은 물론 산업사회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과거의 역사에 안주하고 있지 않다. 다만 선조들의 노력을 거울로 삼아 보다 한 차원 높은 세계를 향해 매진하고 있을 따름이다.
유럽의 자기가 세계의 명품이 된 것은 바로 이와같은 노력의 결과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참고문헌
『ヨ-ロッパの磁器』, ヤン ディヴィシコ著 濱野節朗, 萩野美穗譯 岩崎出版社, 1988, 東京
『西洋陶磁史』, 由水常雄著, ブレ-ン出版, 1978, 東京
『柿右衛門展』, 朝日新聞社, 1993, 福岡
『海を渡った古伊万里展』, 株式會社有田ヴィ․オ-․シ-, 1993, 佐賀縣
『長崎の陶磁』, 九州陶磁文化館, 1988, 佐賀縣
『Early Meissen Porcelain in Dresden』, Ingelore Menzhausen, Thames and Hudson, 1988, London
『Porcelain for Palaces』, John Ayers, Oliver Impey, J. V. G. Mallet, Oriental Ceramic Society, 1990, U. K
『British Porcelain』, John & Margaret Cushion, Antique Collector's Club, 1994, U. K
『세계미술용어사전』, 계간미술편, 중앙일보사, 1992, 서울
*이 논문은 1995년 홍익대학교 학술연구 조성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