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세무회계사 마케팅부, 그들의 만남>
그를 처음 본 건 한국세무회계사 마케팅부 신입사원 교육 때였다.
1차로 여섯 명의 마케팅요원을 채용하여 약 4개월간 마케팅부를 운영하면서 성공적 결과를 확신한 신현민 사장은 서둘러 열두 명의 신입사원을 추가로 채용했다. 여섯 명은 본사의 기존 마케팅부에서 근무하게 될 서울 팀원이고 세 명은 신설 대구팀, 나머지 세 명은 신설 부산 팀에서 근무하게 된다.
6일간의 교육 일정이 빡빡하게 짜여진 교육 커리큘럼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세무, 회계, 상품 실무교육을 임재영 부장이 담당했다. 열두 명의 피교육생 중 대구 팀원의 한 사람으로 윤정하가 포함되어 있었다.
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한국표준협회 연수원에 입소하기 위해 봉고차와 승용차 두 대에 입소 일행이 나눠 타고 가는 중에 그와 동승하게 되었다. 봉고차 조수석에 앉은 재영은 짙은 곤색의 정장차림이었는데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다고 생각되었다.
교육장에 입소하기 전부터 재영에 관한 프로필은 현민에게서 들은 바가 있었다. 현민의 손아래 처남이자 마케팅부장을 맡고 있는 재영도 강사로서 함께 입소할 거란 말과 교육 후 그가 직속상사가 될 거란 말을 덧붙였다. 우리 둘의 관계를 눈치 채지 못하도록 신경 써서 행동하라는 뜻이었다.
대구지부에서 3년 째 근무하던 정하가 본사 소속의 마케팅부에 입사하게 된 건 순전히 신현민 사장의 뜻이었다.
대구지부라는 곳은 출판사업체인 한국세무회계사의 소속지점이나 지부가 아닌 전문서적 유통점으로 별도의 독립사업체였다. 단지 한국세무회계사의 출판물들을 가장 많이 취급했고, 유통 규모도 한국세무회계사의 에이전트 중 가장 컸기 때문에 한국세무회계사에서는 자사의 소속지부처럼 대외적으로 표방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구지부의 대표자인 이정호 사장은 다리 한쪽을 절면서도 대구·경북지역의 유통 상권을 장악한 입지전적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세법이나 회계분야의 서적뿐 아니라 경제 및 경영계통의 폭넓은 전문서적을 유통하여 이미 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신 사장과의 친분도 두터웠다. 사업관계상 서로의 이해타산이 부합하여 탄탄한 교류를 유지하고 있었다.
신 사장이 이정호 사장에게 다소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이 사장의 다혈질적 성격이었다. 원리원칙에 어긋나면 불같이 성질부터 내고 보는 이 사장의 스타일에 신 사장이 거부감을 갖는 것은 전적으로 윤정하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윤정하와 신현민 사장, 두 사람이 연인관계로 발전한 이후부터 신 사장은 다혈질의 이 사장 밑에서 근무하는 정하를 안타깝게 생각했다. 겸사겸사 신 사장은 대구에 마케팅부를 설립하기로 하면서 정하를 대구지부에서 빼낼 명분을 조성했다.
3년여의 기간동안 거의 하자 없이 업무를 처리해온 정하가 빠지면 서적의 입출고 뿐 아니라 매출처 관리에도 상당한 곤란을 겪을 것이 뻔한 이정호 사장이 길길이 뛰며 반대했다. 더구나 자신의 유통권역인 대구에 마케팅부를 설립한다는 신 사장의 발상이 도무지 마뜩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하고자 하는 일을 해야 하는 신 사장의 의지 관철력과 이해타산을 따지며 반대하는 이 사장의 원칙간 경합은 신 사장의 판정승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 사장이 무지막지할 정도의 불같은 성격을 무기로 삼고 있다면 신 사장에겐 능란한 화술이 최대무기로 작용했다. 신 사장은 입을 통해 상대를 설득하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그의 말을 듣노라면 되지 않을 일이 없었다. 소문난 대로 달변가다웠다.
하나를 내주는 대신 둘 이상을 보장해 준다는데 계산에 능한 이정호 사장이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하는 그렇게 한국세무회계사 마케팅부에서 근무하기로 하고 교육원에 입소하였다. 일종의 스카우트라고 할 수 있었다.
신현민 사장, 마케팅부 임재영 부장, 편집부 전경수 부장과 마케팅부 서희경 대리 그리고 교육진행을 보조하기 위한 두 명의 직원과 신입사원 열두 명이 모두 준비해온 하늘색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한국표준협회 연수원의 주변은 그다지 높지 않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었다. 초록의 대자연 속에 초현대식 건물이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침 5시 40분에 기상해서 운동장 다섯 바퀴를 구보하며 시작하는 하루의 일과는 저녁 6시까지 자체적으로 준비한 교육으로 일관했고, 저녁 식사 후 9시 30분까지 분임토의 및 레크리에이션 등으로 이어졌다. 처음 이틀간은 생소한 교육 커리큘럼으로 인해 다소 딱딱한 분위기에 지루함도 없지 않았으나 3일차 교육 때부터는 교육담당자와 피교육생 간에도 거리감이 좁혀져 상당히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임재영 부장은 워크숍을 주관하는 사회자처럼 토론과 질문 및 응답을 병행해가면서 교육을 진행했다. 딱딱하게 흐를 수 있는 전문지식분야를 주제별로 설정해 일상생활 속 실제 현실과 비교해가면서 이해를 시키려했다. 그는 한정된 짧은 시간에 주입식 강의로는 교육효과를 얻기 힘들다고 했다.
다른 피교육생과 달리 이 분야의 업무에 경험이 많은 정하로선 크게 수긍이 갔다. 정하는 어렵고 복잡한 내용들을 쉽게 이해시키려고 애쓰는 재영의 노력 덕분에 그의 시간은 오히려 여유로웠다.
“수백 가지가 넘는 우리나라의 법률 중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법률이 세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계학 또한 그 깊이가 엄청난 학문분야입니다. 개인이나 기업이나 이 분야의 학문은 돈과 직결되기 때문에 그 내용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는 절약과 낭비의 차이와 비유할 수 있을 겁니다.”
재영은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역설적으로 과세당국인 국세청과 납세자인 기업의 중간에서 적절하게 납세의 권리와 의무를 모두 충족시키는데 한국세무회계사가 큰 역할을 담당한다고 했다.
“우리 한국세무회계사에서 수십 종이 넘는 이 분야의 책들을 발행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정확한 세금 계산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거지요. 모르면 갈취당할 수도 있고 알면 덜 낼 수 있는 게 세금이거든요. 매개체라 할 수 있는 그 지식 전달을 우리 회사에서 한다고 볼 수 있으니 나는 국세청 예산 중 일부는 우리 한국세무회계사에서 써야하는 게 타당하다고 보는데 국세청장 생각은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재영은 다분히 농담성 멘트로 3일차 마지막 시간을 마쳤지만 몇몇 웃는 사람을 제외하고 다수의 신입사원은 그의 말뜻이 도대체 무얼 의미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재영은 화이트보드를 지우고는 “질문 받겠습니다.”라며 정면을 둘러보았다.
맨 앞줄에 앉아 꼼꼼히 메모하던 대구의 손주희가 손을 들었다. “부장님! 저희들 역시 세법과 회계지식이 없이는 일해내기가 무척 힘들 거란 생각이 드네예. 서울 팀은 부장님이 지속적으로 교육시키고 관리하실 테니까 큰 어려움이 없다고 보거든예. 대구 팀과 부산 팀은 앞으로 어떻게 운영되는 건지 억수로 궁금합니데이.”
손주희가 사투리를 섞어가며 질문하자 서울에서 입사한 신입사원들이 키득거렸다.
대구에서는 윤정하, 손주희, 엄민숙의 세 명이 있었고 부산에서는 김경해, 심혜숙, 이현미 세 명이 교육받고 있었다. 여섯 명의 지방 팀 신입사원들은 손주희의 질문이 사실상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건 정하도 마찬가지였다. 신현민 사장에게도 아직 뚜렷한 복안이 서있지 않았다. 신입사원 채용과 지방 팀 창설을 서두른 탓에 확실한 운영방안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집합교육이 실시된 것이다. 그 때문에 임재영 부장은 지방 팀 설립을 강하게 반대했다고 들었다. 대구지부와 부산지부가 활발하게 영업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중복해서 지방 마케팅부를 설립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신 사장도 임 부장의 반대의견에 심정적으로는 동조했지만 정하가 속하게 될 대구 팀 설립에 가속을 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덤으로 부산 팀까지 균형을 맞추느라 서둘러 급조하게 된 것이다.
정하는 재영의 답변이 어떠할 지에 귀를 쫑긋했다. 지방 팀 설립에 유일하게 반대했다는 그였기에 더욱 관심이 갔다.
“손주희씨는 교육 수료하기 전까지 사투리를 얼마나 고치는지 내가 관심 같고 지켜보겠어요.”
그가 주희의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사투리를 지적하자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대다수 전화로 마케팅을 해야 하는 업무의 특성상 표준어 구사는 당연히 기본이었다. 지방에서 온 신입사원들은 연수 교육 중에 사투리를 상당히 고치고 있는 중이었다.
재영은 천정에 잠시 눈길을 머물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방에서 온 여섯 명은 더더욱 노력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제가 알기로 별도의 관리자를 파견근무 시키지는 못할 겁니다. 서울 마케팅부와 지방 팀간에 부단한 협조체제를 통해 부족하고 열악한 환경을 보완시키겠지만 스스로 자생력을 키워야 하는 게 현실입니다. 일단 서희경 대리가 자주 출장을 가면서 여러분을 지원할 겁니다. 구체적인 계획은 나중에 사장님한테 듣기로 합시다. 또 다른 질문?”
정하는 재영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시원스럽게 답변할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기존 팀원들인 여섯 명도 저희들처럼 문외한인 상태에서 일을 시작했나요?”
교육 중에 졸다가 지적당했던 임정숙이 손을 들면서 동시에 질문을 던졌다.
“그렇습니다. 기존 팀원들은 이렇게 좋은 연수원에 입소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업무와 교육을 병행했지요.”
“4개월 밖에 안됐는데 그렇게 일을 잘한다면서요? 저희도 가능성이 있는 거죠?”
“임정숙씨 맞죠? 임정숙씨처럼 교육 중에 졸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신입사원들이 까르르 웃어젖혔다.
웃음이 멎을 즈음 누군가 “부장님!”하고 불렀다.
“사적인 질문도 괜찮을까요?”
“사적인 질문?…해봐요.”
“부장님은 어떤 분이세요? 회계와 세무분야의 실력자라는 사실 외엔 별로 들은 게 없어서요.”
다시 한 차례 왁자지껄 여자들 특유의 웃음과 박수소리가 터졌다.
재영이 얼른 피교육생의 프로필을 들여다보았다.
“이름이…정유현씨, 맞나요?”
“네!”
정유현이 예쁘장한 얼굴을 반듯하게 들면서 눈을 반짝였다. 신입사원들 중 언니뻘임에도 앳된 얼굴형과 표정은 실제 나이보다 서너 살쯤 아래로 보였다. 화장기가 전혀 없어도 예쁜 얼굴이라는 생각을 하며 재영이 “솔직히 말해야 됩니까?”하고 선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럼요. 앞으로 모시게 될 상사분인데 정확히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또박또박 거침없는 유현의 되물음에 재영이 슬그머니 웃음을 거두고 대답했다.
“한마디로 아주 못된 사람입니다. 성질 사납고, 속 좁고, 아둔한 사람의 전형이죠. 여러분들은 교육을 마치는 대로 그런 사람과 근무하게 되는 겁니다. 조금 피곤할 겁니다.”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아요. 첫날부터 부장님 인상이 너무 좋았거든요. 저희 동기들 모두 같은 생각이에요.”
유현이 재영의 말을 받자 모두들 박수치며 “맞아요. 부장님!”하고 소리를 질렀다.
재영의 얼굴에 엷은 홍조가 생겼다.
딱딱한 세무교육을 조리 있게 강의할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 재영의 색다른 분위기를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신입사원들이 쳐다보았다.
“첫인상으로 사람을 평가한다는 게 얼마나 오판인지도 여러분은 깨닫게 될 겁니다. 더 이상 질문 없으면 오늘 교육은 이 정도에서 마치겠습니다. 수고들 많았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신입사원들의 표정이 많이 부드러워졌다. 교육에도 흥미가 붙는 것 같았고 교육 후 근무에도 점차 자신감이 생기는 듯 했다.
정하는 처음 부담스럽게만 여겨졌던 재영에게서 친근감이 드는 걸 느꼈다. 조심스럽기만 한 감정은 어느새 사라졌고 그의 진지한 열의와 순박하게 보이는 웃음, 가끔씩 표현하는 재치와 유머에 친숙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세 명씩 한 조가 되어 배정받은 룸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일행은 8시가 되어 레크리에이션 실에 모였다. 피교육생인 신입사원뿐 아니라 입소한 정규 직원 모두가 참석했다.
빙 둘러 디귿자(ㄷ字) 형태로 배열한 탁자에는 소주, 맥주와 와인 등이 놓여 있었고 각종 음료수와 연수원 외부에서 사온 듯한 안주와 다과들이 잔뜩 펼쳐져 있었다.
“엿새간의 교육일정 중 딱 절반이 지났습니다. 여러분들의 교육자세도 나무랄 데 없이 진지해서 좋았습니다. 오늘 저녁타임은 보다 편하게 서로를 잘 알 수 있는 시간을 갖고자 조촐하게나마 회식준비를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집 떠나서 많이 지쳤을 줄로 압니다. 피로도 풀고 교육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잠시 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선출한 진행자가 지금부터 마이크를 이어받고 약 두 시간 동안 사회를 맡겠습니다.”
신현민 사장의 인사말이 끝나자 신입사원들이 떠나갈 듯 환호했다. 마치 수학여행 온 여고생들처럼 수선스러웠다.
“야아! 소주도 있다. 그동안 얼마나 그리웠는지… 호호호!”
최경주가 호들갑을 떨자 모두들 박수치며 깔깔댔다.
가장 외향적인 모습을 보인 정성희가 다른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마이크를 잡았다. 세련된 마스크에 뒤떨어짐이 없이 진행도 매끄럽고 세련되었다.
현민이 돌아가면서 모든 참석자에게 원하는 술을 한 잔씩 채워주었다. 정하에게 술을 따라주며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대구지부에서 나오길 잘했지? 교육받기는 힘들지 않아? 아픈 데는 없고?
현민의 눈빛이 그렇게 말한다고 정하는 생각했다.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이곳에 함께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함께 교육을 받는 동기들도 모남이 없어 좋았고 재영에 대한 선입견도 지워져 더욱 편안할 수 있었다.
적당한 술이 들어가면서 참석자들은 각자의 장기를 서슴없이 선보였다. 교육을 받기만 할 때는 전혀 알 수 없는 개개인의 특성과 장기를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대구의 엄민숙이 뚱뚱한 몸을 유연하게 흔들어대며 디스코를 출 때는 신입사원 모두가 나와서 흥겹게 춤을 추었다. 최경주와 임정숙은 교육 받을 때 조용하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내내 분위기를 주도하며 흥을 돋웠다.
유현은 미모 못지않게 대단한 노래솜씨를 선보였다. 세 번씩이나 앙코르를 받을 만큼 뛰어난 가창력을 지녔고 목소리 또한 섹시함이 느껴질 정도의 미성이었다.
몇몇 사람의 장기자랑이 계속 이어졌고, 소주와 맥주의 빈 병이 늘어났다.
“다음 모실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성질은 사납고, 속은 좁고… 그리고 아둔하시기까지 한 우리 임재영 부장님입니다.”
진행자인 성희의 멘트가 끝나자 왁자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열두 명의 신입사원들이 소리를 질러대며 박수를 쳤지만, 교육 중 자리에 없던 다른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악의 소개를 받은 재영이 그래도 환하게 웃으며 일어서더니 마이크 앞에서 다소 수줍은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 *
‘법인세법 해설’ 교육 세미나 사흘째,
수강자들이 주최 측인 한국세무회계사에서 준비한 음료수를 마시고 모두 강의장으로 들어간 후 유현은 강의실 밖 접수 테이블에서 수강자들의 명단을 체크했다.
예상 목표인원에는 몇 명 부족했지만 그런대로 85명의 수강자들이 강의실을 적당히 채우고 있었다.
“언니! 부장님이 강의장에 통 나타나시지 않네. 아까도 사장님이 찾으시던데.”
수민이 접수대를 정리하고 의문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오늘 정유현은 안수민과 함께 수강자 접수를 담당하는 날이었다. 수민이 커피 두 잔을 뽑아와 한 잔을 유현에게 건넸다.
“언니! 우리 부장님은 좀처럼 캐릭터가 잡히지 않아. 유순한 듯 하면서도 강해 보이고 어렵게 느껴지는가 싶으면 또 편하기도 하고…언니는 안 그래?”
유현이 입을 오므려 커피 잔을 후욱, 불면서 지그시 수민을 바라보았다.
“수민아! 우리 신입사원 교육 때 부장님이 부른 노래 생각나니? 성희한테 최악의 소개를 받고 나와서 부른 노래 말이야.”
“응, 생각나. 팽이놀이 어쩌구 하는 가사였지? 첨 듣는 노래인데도 참 듣기 좋았어.”
“그 노래를 배워서 한 번 불러봐. 그럼 부장님 캐릭터가 선명하게 잡힐 거야.”
유현이 알듯 말듯 묘한 미소를 지으며 수민의 팔을 톡톡 두드리고는 접수 테이블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직 다 마시지 않은 커피 잔을 들고 현관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덥더니 어느새 가을이 오려나 보다.
담장 너머 단풍잎이 금세라도 붉게 물들 것처럼 보였다. 마케팅부 신입사원 교육을 받은 게 불과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년 가까이 지나고 있다.
H 산업개발주식회사 비서실 근무를 그만두고 석 달여 대학로의 라이브 카페 ‘칼립소’에서 아르바이트 삼아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불렀었다. 그러다가 마케팅을 배워볼 겸 입사한 곳이 한국세무회계사였다. 전문서적 마케팅이라 원하는 분야와 다소 동떨어져 처음엔 망설였으나 일단 입사하고 보자는 맘으로 가볍게 들어왔었다. 적당히 근무하다가 독립해서 의류 디자인 사무실이라도 내볼까 생각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접착력 강한 끈 하나에 매어진 자신을 발견했다.
채 물들지 않은 단풍잎에 시선을 던지고 유현은 그날 임재영 부장이 부른 노래를 흥얼거려 보았다.
“추운 줄도 잊어버리고 팽이 놀이하는/ 동네에 골목에서 노니는 아이들 소리/ 채찍 맞으며 아픔을 참으며 눈물도 흘리지 않고/ 그냥 빙빙 말없이 돌아가는 동그란 팽이/ 돌고 돌아가는 세상 우리 모두 함께 모여/ 팽이놀이 해볼까…”
가사는 모두 외웠지만 아무리 불러 봐도 이 노래는 그때 임 부장만큼 감정이 실리지 않는다.
하늘색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지그시 눈을 감고 부르던 그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눈에 선했다. 몇 잔의 취기에 소년 같은 수줍음이 어우러진 그의 모습에서 아주 잠깐 야릇한 느낌을 받았었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추억 속의 친구 같은 느낌이랄까.
접수 테이블에 놓인 ‘법인세법 해설’의 머리말을 유현은 다시 읽어보았다. 임재영이란 이름은 어디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유현은 2,000 페이지가 훨씬 넘는 ‘법인세법 해설’의 작은 활자들을 꼼꼼히 훑어보다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보름 전, ‘법인세법 해설’개정 3판이 새로 발간되고 세미나 강좌 일정이 잡히자 재영은 팀원들에게 ‘법인세법 해설’에 대한 테마교육을 시켰었다.
“내국세와 지방세를 통틀어서 법인세법이 가장 광범위하고 난해한 세목(稅目)이라는 건 여러분도 잘 알겁니다. 이 책은 처음 1조부터 마지막 74조까지 법조문의 순서대로 해설한 책입니다. 그래서 처음엔 축조해설(逐條解說)이란 부제(副題)가 붙었었죠. 법인이 연간 벌어들인 소득에 대해 부과하는 법인세는 기업의 회계연도 말 결산을 바탕으로 계산하게 되지요. 회계처리기준과 법인세법이 그 제정목적의 차이로 인해 내용도 다르기 때문에 세무조정을 통해 정확한 소득금액과 세액을 계산하게 되는 겁니다. 이 책은 궁극적으로 고난도의 실무분야에 해당하는 세무조정 실무를 익혀 법인세액을 정확하게 산출해내는데 도움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열세 명의 마케팅부 전원이 회의실에 둘러앉아 재영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화이트보드에 회계실무의 순환과정을 순서대로 적어놓고 실무처리 내용을 개략적으로 설명하던 재영이 두꺼운 양장본의 책을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쭉 설명한 일련의 과정을 기업에서는 매년 반복해서 처리하게 되는데 최종적으로 법인세액을 신고 납부함으로써 해당 연도의 회계처리가 종결된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규모나 업종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그 처리내용이 상당한 전문성을 요할 만큼 복잡난해하고 광범위한 실무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런 내용을 담은 이 책이 이렇게 두꺼울 수밖에 없는 거죠.”
한국세무회계사의 정기적 사업 아이템인 ‘법인세법 해설’ 세미나 강좌가 금년엔 28일간 총 156시간에 걸쳐 기획되어 있었다. 1인당 수강료만도 180만원에 달하는 이벤트성 강좌 프로그램을 기획한 것이다.
재영이 팀원들에게 프로그램의 전반적 내용을 공지하면서 수강생 모집을 위해 해당 책과 강좌의 내용을 브리핑하고 있었다.
재영이 테이블에 양손을 짚고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질문 있으면 하세요.’라는 재영의 제스처를 알아채고 이승화가 손을 들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짧게 물었다.
“마켓 셰어를 어떻게 잡아야 하나요?”
수강 대상자의 범위를 구체화시켜달라는 뜻이었다.
“대기업체일수록 즉, 기업규모가 클수록 회계부서의 업무시스템이 폭넓게 분장되어 있는 게 보통입니다. 고참급 실무자 특히 대리나 과장급 이상의 중간 관리자가 해당업무를 관장하겠지만 컨택은 회계부서장과 하는 것이 수월하지 않을까 판단됩니다. 이 프로그램의 수강기간이 길고 수강료도 고액이기 때문에 결제권한을 가진 책임자와 직접 통하는 것이 효율적일 거란 생각이 듭니다.”
“수강자 유치를 위한 마케팅 포인트를 알려주세요.”
조수연이 바쁘게 메모를 하다가 손을 번쩍 치켜들고 말했다.
“한마디로 집약한다면 세무회계 처리능력의 배양입니다. 법인세액을 정확히 계산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세무조정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결국 회계처리를 효율적으로 해내는 결산수행 능력이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재영이 팀원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이젠 용어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전체 맥락을 놓치는 팀원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다소 못미더운 두세 명의 표정을 은근히 살펴보았다. 재영이 안도한 듯 미소를 머금고 설명을 이었다. 이제 세법전문 출판사의 마케팅 요원들답게 기본기는 다듬어져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기업 활동을 하면서 지출되는 경비가 세법상으로는 그대로 비용 처리되지 않는 항목이 허다하죠. 예컨대 광고선전비나 접대비로 지출한 비용이 법인세법에서는 무조건 경비로 인정하지 않는데, 회계담당자가 이런 내용을 잘 알고 처리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는 굉장한 경제적 차이를 일으킬 수 있게 됩니다. 왜 그런 차이가 생길까요. 조수연씨가 말 해봐요.”
수연이 일어서서 조리 있게 말을 이었다.
“세법 규정을 모르고 비용 처리한 항목이 세법상 손금(損金)으로 부인(否認)되면 과소신고 또는 세금 미납부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따라서 가산세를 물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최고의 실적을 올리는 조수연다운 답변이었다.
어지간한 세법상의 전문용어를 쉽게 구사할 만큼 출중한 노력을 보인 수연을 재영은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모든 세금이 그렇지만 특히 법인세는 모르면 손해, 알면 본전, 아주 잘 알면 절세(節稅)로 이득을 보게 되는 세목입니다. 그런 단적인 예만 보더라도 효율적 회계처리와 적법한 세무조정은 기업에 낭비성 경비를 줄이게끔 하고 결과적으로 절세에도 기여하게 되는 거지요. 정리하면, 다소 비싼 수강료를 지불하더라도 그 이상의 실무지식을 익힘으로써 회사 이익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 이 강좌의 컨셉이자 마케팅 포인트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이해됩니까?”
몇몇 팀원들이 크게 답했고 또 다른 팀원 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이 물 컵을 들고 입으로 가져가며 팀원들을 둘러보려는데 정유현이 손을 들었다. 물을 마신 재영이 유현에게 눈길을 보냈다.
“법인세법 해설이 우리 회사의 대표적 단행본이라고 들었거든요. 가격도 제일 세구요. 외람된 질문일지 모르지만 부장님이 객관적으로 보셨을 때 내용면에서 그만한 가치가 있는 책인가요?”
유현의 질문이 직선적이고 명료하다는 생각이 들어 재영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재영이 물 컵을 내려놓고는 되물었다.
“정유현씨는 나한테 이 책의 내용을 평가할만한 실력이 있다고 봐요?”
“네! 충분히 그럴만한 실력을 갖추셨다고 봅니다.”
유현이 또렷하게 잘라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내가 이 두꺼운 걸 읽어보기나 했겠어요? 그런 어려운 질문엔 꼬리를 내리겠습니다.”
재영이 머쓱해하자 유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부장님께서 객관적 평가를 내려주셔야 저희도 기준을 잡고 마케팅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워낙 고가(高價)의 책이고 비싼 수강료를 지불해야 하는 고객의 입장을 배려해야 한다고 보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노처녀라 그런지 유난히 집요한 면이 있군.”
재영이 다소 무겁고 딱딱하게 이끌어온 브리핑 분위기를 가라앉히려고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농담을 던지자 팀원들이 깔깔대고 웃었다.
“어머! 부장님! 요즘 20 대는 노처녀가 아녜요.”
유현이 깔끔하게 받아 넘기며 따라 웃었다.
“그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정유현씨를 누가 노처녀로 보겠나. 외모는 정신연령만큼이나 어려 보이는데.”
“칭찬인지 욕인지 아리까리하네요.”
“내가 남이 쓴 책에 대해 평할 만큼의 수준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정유현씨 질문에 명쾌히 답하긴 어렵지만…이렇게는 말할 수 있습니다.”
재영이 보드용 수성펜으로 머리를 한 번 긁적였다.
“이 책은 다른 해설서들과는 차별화시킬 수 있는 특성이 있습니다. 책 두께에서 보듯이 우선 법인세법을 최대한 깊이 있고 폭넓게 다루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조문별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체계화시켜서 분류했기 때문에 실무자들이 쉽게 참조할 수 있도록 편집 구성했다는 것이 특색 중 하나입니다. 즉, 법인세 관련 실무를 하면서 사전 기능과 매뉴얼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획해서 집필했기 때문에 초보자부터 전문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 독자층이 될 수 있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이 되겠어요?”
재영이 유현에게 묻자 유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평할 수준이 안 된다고 하시더니 마치 직접 집필하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렇게 들렸다면…내 표현이 지나치게 과장된 겁니다.”
금세 재영의 귓불이 붉게 달아올랐다. 유현이 대담 토론을 하는 양 추가 질문을 날렸다.
“이 책의 초판 발행이 4년 전이면 저자이신 주정현 회계사님의 연세가 50대 후반을 넘어서고 계신 건데, 그 연세에도 이렇게 두꺼운 책을 쓸 수 있나요?”
유현을 빤히 쳐다보는 재영의 표정이 잠시 굳어지더니 다시 미소를 담고 물었다.
“정유현씨! 질문의 핵심이 뭐죠?”
“저자이자 강사이신 주 회계사님의 프로필과 실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싶은 거죠. 그래야 고객에게 정확한 홍보를 하지 않을까요?”
평소답지 않게 유현의 질문 내용이 오버하고 있다고 생각한 팀원들이 수군거렸다. 재영의 얼굴도 다소 상기되었다.
“나이 칠순이 넘어서도 이희승 박사님은 국어사전을 펴냈어요. 주 회계사님의 프로필은 책에 나와 있으니 읽어보세요. 더 질문 없으면 마칩시다. 스크립트(script)는 별도로 만들어서 배부하겠습니다.”
장시간의 브리핑을 마치고 재영이 먼저 회의실을 나서자 팀원들이 잇따라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유현이 자리로 돌아와 힐끔 재영을 쳐다보았다. 유현은 자신이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했는지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기분이 상했을 거란 생각까지 미치자 죄스런 마음이 일었다.
지난 달 친구인 혜진이를 만나 임재영 부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다. 내가 한국세무회계사 마케팅부에서 일한다고 하자 혜진이는 신 사장님을 비롯해 자신이 알고 지냈던 여러 사람들의 근황을 물었다. 자연스럽게 임재영 부장이 두 사람의 화제에 올랐다. 재영이 편집부 책임자로 근무할 때 오혜진은 편집부에서 디자인을 담당했었다. 혜진은 재영에 관한 한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만삭이 되어 배가 산만큼 부푼 혜진은 그와 근무하면서 있었던 몇 가지 에피소드를 수다스러우리만치 풀어놓았다. 그러다가 ‘법인세법 해설’에 관한 얘기도 툭 삐져나왔다. 혜진이 정색을 했다.
당시 신현민 사장과 주정현 회계사의 끈질긴 설득 끝에 재영은 약 1년간에 걸쳐 ‘법인세법 해설’을 썼다. 저자인 주정현 회계사는 책을 내자는 최초 제안만 한 것이 고작이었고 집필과 교정까지 모두 재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의 손과 머리에서 나온 작품이었음을 당시 편집부에 근무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며 혜진은 흥분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출판기념회에 조차 그는 초대받지 못했다. 편집부 직원들 간에도 이런 저런 말들이 많았다. 주 회계사와 신 사장에게 순박한 재영이 뒤통수를 맞았을 거란 것과 집필의 대가로 엄청난 금액을 받았을 거란 소문이 그 것이었다. 어쨌든 그는 그 때 어렵게 사업을 꾸려가고 있었는데 출판기념회를 할 때까지도 자신이 쓴 책이 발간된 걸 모르고 있었다.
“벌써 3년이나 지났네. 그 후로는 편집부 퇴직자 모임에도 잘 안 나오시더라고. 몸 풀고 나면 한 번 같이 보자. 얘! 옛 직장 상사 중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그 분뿐이야.”
혜진이한테 들었던 말들이 때맞춰 떠오르면서 유현은 특유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이렇게 방대한 책을 우리 부장님이?
재영을 힐끗 다시 쳐다보았을 때 그는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경주야! 오늘 동동주 한 잔 어때?”
퇴근 무렵 정유현이 옆자리의 최경주에게 눈을 찡긋했다.
“동동주? 우리 둘이서?”
경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외라는 듯 유현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갑자기 동동주 생각이 난다. 약수골 가자. 어때?”
유현과 경주가 다른 사람들보다 퇴근을 서둘러 약수동 로터리 외환은행 뒤편에 있는 ‘약수골’로 들어섰다.
신발을 벗고 마루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옆자리에도 막 자리를 잡은 듯 보이는 30대 초반의 남자 두 명이 앉아있었다.
“언니가 어쩐 일로 나를 다 술친구로 삼는 거야?”
경주가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대충 걸고는 털벅 앉으면서 아직도 의아함이 남은 양 물었다. 어지간해서는 팀원들과도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유현의 스타일을 경주는 잘 알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너한테 저녁 한 끼 사고 싶었어. 근데 오늘 동동주 생각이 나잖아. 그래서…너! 술값이 밥값보다 더 많이 나와. 호호!”
유현이 살포시 웃더니 옆자리 손님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준수한 외모의 두 남자가 편안한 표정으로 간간이 웃어가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런데 언니! 아까 부장님 브리핑 때 무슨 질문이 그렇게 많았어? 부장님도 기분이 약간 상하신 거 같지 않았어?”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응. 갑자기 표정이 상기되시는 거 같더라고. 언니 말을 곡해해서 들으신 건가? 하긴 여야 국회의원이 맞토론하는 분위기이긴 했어.”
“나도 그래서 맘에 걸렸어. 내 질문이 어처구니없기는 했지.”
“에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야. 우리 부장님 그렇게 속 좁은 분이 아니잖아.”
유현이 짐짓 걱정스런 표정을 짓자 경주가 위안을 했다.
옆자리 손님들에게 동동주와 굴전처럼 보이는 안주가 나왔다.
“저희는 동동주하고 김치전을 주세요.”
유현의 주문을 받은 키다리 종업원 사내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10여 분쯤 지나자 옆자리의 남자들이 현관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현관에서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재영이었다.
“어머! 부장님이잖아. 부장님 친구 분들 이셨나봐.”
경주가 호들갑을 떨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재영이 친구들과 환한 웃음으로 악수를 나누고는 자리에 앉으려다 유현과 경주를 보았다.
“서둘러 퇴근하더니 겨우 여기들 오셨네.”
재영이 두 사람에게 다가와서 빙그레 웃으며 빈정대듯 말했다.
“어머! 부장님! 반가워요. 이런데서 다 만나다니…호호호!”
유현이 입을 가리고 능청스럽게 웃었다.
“친구들이야. 여기 동동주 맛이 괜찮았었대. 그런데 이 넓은데서 왜 이렇게 가까이 앉게 된 거야? 나야 괜찮지만 두 사람은 좀 불편할 것 같은데….”
재영이 머리를 긁적였다.
“저희한테 자리를 옮기라고요? 그럴 순 없어요.”
경주가 가늘게 눈웃음을 쳤다. 그녀의 입술 왼쪽으로 길게 주름이 쏠렸다.
“당연히 그러시면 안 되죠. 저희가 이쪽으로 오면 어떻겠습니까? 저희들은 임 부장과 가까운 친구들입니다.”
김병규가 상황을 눈치 채고 얼른 다가오더니 순발력을 발동했다.
“저희는 괜찮지만…오늘 부장님하고 친구 분들하고 나눌 말씀도 있으실 텐데….”
유현이 수줍은 표정을 애써 만들어 가며 더듬거렸다.
“저희들은 할 얘기 없습니다. 그저 동동주 생각나서 여기까지 온 것뿐입니다. 너도 우리한테 할 말 없지? 그럼 앉자고.”
병규가 재영의 등을 툭툭 치더니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병규가 북치고 장구쳐가면서 어색할 뻔한 분위기를 제 뜻대로 버무려 버렸다. 옆에서 윤태선이 미소를 머금고 병규의 하는 짓을 쳐다보다가 슬며시 방석을 옮겨놓았다. 졸지에 다섯 명이 일행처럼 한 자리에 합석하게 되었다.
“언니! 술값은 자동적으로 굳었다고 봐야겠지?”
경주가 키득거리자 재영이 손을 저었다.
“무슨 소리야? 너희들이 훨씬 더 많이 먹을 텐데.”
“어머! 부장님! 친구 분들 계시다고 이렇게 달라지실 수 있는 거예요? 사람 수로 보나 체격으로 보나 저희들이 계산하는 건 경제논리에 안 맞죠. 호호!”
경주가 특유의 외향성을 드러냈다.
“사람 수가 문젠가? 주량이 문제지…좋아, 그 대신 적당히 마셔야 된다!”
“친구 분들이 흉보겠어요. 저희를 술꾼처럼 보시겠어요.”
유현이 병규와 태선의 눈치를 살폈다.
“신경 쓰시지 말고 맘껏 편하게 드십시오. 저희도 미인들과 합석하게 되서 기분 좋습니다. 하하!”
병규가 쪽바가지에 술을 떠서 각각의 잔에 채웠다.
가벼운 대화들을 나누면서 서너 순배 잔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사이에 약간의 껄끄러움마저 사라졌다.
“부장님! 아까 브리핑하실 때 엉뚱한 질문 드려서 기분 상하셨죠? 죄송합니다.”
재영에게 잔을 권하면서 유현이 뜬금없는 말을 꺼내는 바람에 잠시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별소릴, 내가 조금 예민해 있었어. 정유현씨 때문에 기분 상한 거 전혀 없어.”
재영이 손을 펴서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무슨 다른 일이라도 있으셨던 거예요?”
희주가 궁금한 듯 끼어들었다.
“아무 일도 없어. 그저 갑자기 나쁜 놈들 생각이 떠올랐었어. 왜 영화 보다가 나쁜 놈들이 잘 풀리면 괜히 심통 나는 거 있잖아. 하하하!”
-나쁜 놈들?
혜진이한테 들은 대로라면 누군지 짐작할 것도 같았다. 유현이 재영의 눈치를 흘깃 살피더니 한 잔을 날름 비웠다.
사실 경주를 데리고 이 곳으로 온 건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려서 계획한 거였다.
퇴근 무렵 재영의 통화 내용을 들어보니 7시에 ‘약수골’에서 만나기로 약속하는 것 같았고 통화의 상대자는 친구인 듯 했다. 호기심도 발동했고 잘하면 합석해서 그의 사적인 부분도 접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생각대로 되고 말았다.
금상첨화로 H철강주식회사 회계부 자금과장이라는 김병규에게서 세미나 수강 오더까지 약속받았다.
“부장님 친구 분들도 우리 부장님하고 분위기가 많이 비슷하신 거 같아요.”
유현이 병규에게 술을 따르며 말하자 재영이 병규와 태선을 향해 한마디 툭 던졌다.
“유현이가 지금 너희들을 욕하는 거야.”
“칭찬하시는 거 같은데?”
태선이 유현을 쳐다보면서 웃었다.
“맞아요. 우리 부장님, 친구 분들한테도 저렇게 비틀어서 말씀하시나요?”
“말도 마십쇼. 언어수준이 거의 폭력적이거든요. 저 친구하고 같이 일하시느라 고생들 많겠습니다.”
병규가 혀를 내둘러가며 이죽거렸다.
“고생 정도가 아녜요. 이기적이고, 강압적이고, 성질 사납고… 언니! 또 뭐있지?”
경주가 끼어들어 장단을 맞추었다.
유현이 눈을 올려 뜨고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속 좁고, 아둔하고….”라고 말하며 깔깔거렸다.
“너희들 벌써 취했구나. 취중진담이라고 하더니 이렇게 솔직한 걸 보니 꽤나 취한 게 틀림없어.”
재영이 투덜거리자 모두가 소리 내어 웃었다.
“우리 팀원들은 하나같이 부장님을 친오빠 이상으로 따르거든요. 능력 있고, 포용력 있고 정의로우세요. 유부남인데도 여직원들한테 인기 캡이에요.”
경주가 엄지손가락을 곧추세워 말하자 재영이 경주를 보면서 “넌 술이 바로 깼네.”하고 반쯤 환한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그럴 겁니다. 이 친구는 우리 친구들 간에도 으뜸이거든요. 아마 함께 일하시면서 좋은 느낌 많이 갖게 될 겁니다. 실력과 인간미를 겸비한 친구니까요.”
재영이 화장실에 간다고 자리를 비우자 병규와 태선이 말을 이어가면서 재영을 추켜세웠다. 재영은 탁월한 지능에 다재다능한 재주를 갖추었고 따뜻한 인간미를 지녔음에도 좀처럼 운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의 친구들은 재영을 칭찬할 때 환한 표정을 짓더니 그가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말을 하면서는 거의 비통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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