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에서 1 (인사동 일기)
하늘빛이 다소 어두웠다. 이른 아침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앞에 마주한 하늘은 조금 찌푸린 빛이었다. 다들 잠든 시간. 기지개를 켜고 치카치카 양치하고 푸르륵 세면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길을 나섰다. 지난밤 기상통보관의 예견이 신통하게도 적절했나보다. 기온이 제법 포근한 아침이다. 조금 어둑한 하늘이지만 그래도 더 신나게 힘차게 걸어갈 수 있는 포근한 토요일 아침이었다.
이월의 셋째주쯤 이맘 때의 인사동은 모든 생물의 봄맞이처럼 제법 다양한 행사에 분주하다. 홀로전(개인전), 무리전(그룹전), 맨날전(상설전), 사팔전(사고팔기 판매전), 푸거전(푸닥거리 즉 기획전), 왕년전(무슨무슨 미술제 당선자전) 등 전시도 제법 많다. 토요일인데다가 새로 오픈한 상품점이며 길거리에 하나둘 자리를 채워가는 노점들, 삼삼오오 찾아드는 관광객들, 약속 장소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신사와 여인들, 작품을 들고 가는 젊은 화가, 트럭에 작품을 싣고 있는 운전기사와 화랑 주인과 표구사 주인들, 군것질거리를 하나씩 들고 하얀 이를 크게 드러내며 재잘대는 즐거운 청춘들 등으로 인사동은 벌써 봄이다.
첫번째로 사루비아(02-733-0440)를 들렀다. 이곳에 오면 '와 우리나라 만만세'다. 이렇게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는 그림마당이 있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재미가 느껴진다. '오늘은 좀더 써얼렁~한걸.' 계단을 내려가면서 맞은편 시멘트벽에는 80호쯤 되는 크기의 캔버스천에 풍경(산수)이 그려져 있고, 오른쪽 구석으로 열 몇개쯤 되는 얼굴들이 캔버스에 그려져 빨래처럼 널려져 있다. 한장한장 헤집고 보니 왼쪽 위에 임오생 갑출씨 을미생 용학씨 등으로 이름이 부제로 달려있다. 평범한 마을 사람들의 일생을 보여주지는 못하더라도 진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지방에 있는 후배에게 보내줄 요량으로 맞이꼭지(데스크)에서 자료를 챙겼다. 그때 두 남자가 데스크 구석진 어둑한 곳에서 얘기를 나눈다. '딸년이 문제야. 아들놈은 잘 알아서 하는데 기집애가 머리에 거품만 잔뜩 들었어. 뭘 시켜도 말을 들어먹지도 않고 에잉.' 누구지? 얘길 듣고 있는 젊은 남자는 몇 차례 만나서 알고 있다. 전시담담자이다. 그런데 나이가 조금 들어뵈는 저남자는 작가인가? 암튼 그가 작가라면 저 산수며 저 얼굴들이 새롭게 보이는데.....나는 포장을 잘 해놓지는 않았지만 투박한 그대로 투박한 삶들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작가의 느낌이 이곳에 있다는 생각을 계단 하나하나에 두며 문을 나섰다.
삼정아트스페이스는 사람들이 손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에 위치해있다는 장점은 있는데 이상하게 전시의 색깔이나 갤러리만의 독특한 캐릭터는 그다지 높이 평가할 수 없는 것 같다고 생각된다. 물론 좋은 전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삼정과 관훈 사이에는 항상 삼정을 알리는 플랭카드가 걸려있다. 대번에 무슨 전시인지 알게 된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오늘은 이여명이라는 여성작가의 전시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주머니 세분이 앉아서 대화 중이다. 한사람이 일어나 맞이꼭지에 앉는다. 두 사람은 계속 얘기한다. '최작가 있잖아. 이번에 평창동에 있는 그 선생님 작업실 한켠을 얻어서 들어간대. 거기 굉장히 넓고 좋잖아 왜-. 아마 꽤 비싸게 치르고 들어간 모양인데 그 선생님이 꽤 적극적으로 권유하셨대. 하긴 최작가는 좋겠어. 이제 날개를 단 꼴이잖아.' 얘기하는 여인은 자신이 못들어가서 아쉽고 부럽다는 투로 속삭인다....그림은 울긋불긋 현란한 채색으로 가득하다. 색칠을 이만큼 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이 들어갔겠다. 더군다나 천을 조각조각 찢어서 캔버스에 이리저리 꼴라쥬하고 그 위에 색을 칠하고 있어서 과정은 더 번거로울 수 있다. 그런데 난 그림들에서 홍정희라는 작가의 그림을 떠올렸다. 1985년인가 만나서 개인전에도 초대받고 가보았는데 그 이후 행사에서는 멀찌감치 몇차례 보았지만 개인적으로 만난 일이 없는 그 작가의 그림은 매우 강렬한 원색의 채색면을 고운 모래와 섞어 나이프로 입혀나간 것이었다. 그 방면에 꽤 성공한 사람이다. 어떤 작가의 작품을 다른 어떤 작가의 작품으로 대체하여 본다는 것은 그리 좋은 습관이 아니다. 이 작가의 땀과 느낌들을 그 자체로 보는 것이 가장 좋다. 그렇지만 나는 비판이 먼저 들었다. 그것은 아마 개인적인 욕심 탓이지 싶다. 좀더 새롭고 튼실하게 익은 그런 작품 어디 없나. 나오는데 방명을 청한다. 사양할까하다 이름 석자 끄적이고 주는 자료 짐부담스러웠지만(내 짐이 꽤 무거운 상태였다) 받아나왔다. 그래도 그의 얼굴이 평온해보이는 것은 참 다행스럽다.
골목 안으로 몇걸음 들어가면 대림갤러리가 있다. 커다란 화분이 여러개 문앞을 치장하고 있었다. '초 안승오 스님 불화전'이라고 써있는데 해인사라는 문구가 옆에 함께 있다. 자못 기대가 되었다. 들어서니 일단 불경이 나올줄 알았던 확성기에서는 기묘하게도 '땡스기빙'이 나오고 있었다. '저 음악은 조지 윈스턴의 부활절에 걸맞는 피아노 음악이잖아.' 뭐 그럴수도 있지. 그림이 제법 많았다. 가득 찬 실내가 좁게 느껴졌다. 그림을 그리는 기술은 괜찮은 수준으로 보였다. 좌불상, 보살, 경상도 등 모두 수려한 선묘를 잘 드러내었다. 옆에서는 불교방송국에서 승과의 인터뷰를 시도하고 있다. 아나운서 '일반 그림과 불화는 무엇이 다른가요?' '글쎄 뭐 다른게 있을까. 나는 다른게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젊은 남자승 두사람이 들어선다. '스님 저희가 할일은 없을까요?' '뭐 지금으로선 없는데.' 대처승인가. 옆에 아리따운 여인이 준비를 함께하고 있다. 내 색안경이 좀 비뚫어져 있나보다. 그렇지만 그 때의 분위기는 그래보였다. 아닌게 아니라 그리 느껴지니 종교에 대한 분위기, 신앙심 같은 가치들이 좋은 솜씨에 못미치는 그런 느낌마저 든다.
맞은편에 있는 관훈엘 들어섰다. 신관에서는 시계를 주제로 전시를 하고 있다. 시계와 시간을 모두 실루엣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단 하나 영상매체에는 애니메이션이 느린 화면으로 작동되었고, 나머지는 다 죽은 시간들이다. 이것은 서양에서나 동양에서나 예술의 오랜 숙원이지 영원한 죽은 시간. 맞이꼭지에서 젊은 여성이 방명을 부탁하며 설문지를 내민다. 알고보니 무리전인데 특별한 주제를 찾아서 정기전을 한댄다. 이번에는 시계였고 다음에는 사람들이 많이 동그라미 해준 물건을 주제로 한댄다. 재밌다.
경인미술관엘 갔다. 포스터를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는 자연전이었고 하나는 무슨 스님의 천마도를 그린 전시였다. 자연전은 그저 그런 사람들이 모여 그저그렇게 가끔 발표나 하는 전시 같은 느낌이 먼저 든다. 이상하게도 치열한 무언가 열정이 없다. 판화 홀로전을 홍익대 누구누구가 한다. 딱하나는 맘에 들던걸. 실뭉치와 실타래에 연결된 어떤 공간을 거대하게 찍어놓은 작품. 그외에는 '관계'라는 작품의 주제에 비해 누군가를 모방하다 살짝 피해간 그런 느낌들이 든다. 나도 중증이다.
천마도를 보러갔다. 역시 여기도 거대한 화분이 여러 개 치장하고 있다. 돈을 있는데로 갔다 처발랐나보다 캐털로그는 뭐 저리 화려한거지. 와 안을 들어서니 좁디좁은 전시 실내에 엄청난 물건들이 한가득이다. 여기서는 그래도 제법 불경소리가 들린다. 오후에 열전(전시오픈)을 앞두고 한창 준비중이다. 무슨무슨 교수의 강연도 있댄다. 거대한 지팡이가 한 구석에 세워져 있고 많은 방석이 다른 구석이 가지런히 쌓아져있고, 음식과 그림들, 그보다 더많은 화분(대개는 난초)들이 가득하다. 이많은 돈을 이렇게 낭비하다니. 이상하게 그런 느낌이 든다. 내가 너무 많은 기대를 하나보다. 그저 들어와서 느낌 하나쯤 깊게 가지고 가고 싶은데 이건 너무 정신없는걸.
갤러리 인사의 삼층전시장에서는 참 재밌는 조각전이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안가는 곳에 위치하여 한산한 실내. 지킴이 여자 한분이 반갑게 맞이한다. 와 규모는 작지만 작품이 튼실하다. 재미있는 작품도 몇점있다. 꽤 팔렸네. 딱지(이곳에서는 빨간 동그라미 스티커 대신 정말 색동 딱지를 붙여놓았다. 지킴이 여자가 그걸 계속 만들고 앉아있다)가 여러 곳에 붙었다. 좋은 일이다. 왠지 기분이 좋았다.
갤러리 다임의 목욕탕엿보기 전시장(홀로전)에 들렀다가 대안공간 풀의 회화-모방전(무리전)을 보러갔다. 여기서는 모방증후군과 회화의 관계를 작품으로 보여준다고 한다. 설계와 조감도에 가까운 여러장의 사진들이 벽에 붙어있고, 한쪽에는 두루마리 펜그림이 천에 그려져 있다. '한마에 5만원'이라는 문구가 재밌다.
인사아트센터에 가면 제일먼저 투명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층에 오른다. 거기에 발코니가 멋지게 만들어져 있고 의자도 있어서 쉼터로 그만이다. 참 좋은 생각을 했다. 오층의 떡과 보자기에 담긴 사연을 조금 맛보고 사층에 오니 전시장이 내부공사중이다. 삼층에서는 '더 쇼'전이 있는데 재밌다. 한국사람 외국사람들이 함께하는 무리전이다. 영상도 많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볼거리가 즐비하다. 이런 곳에서는 또 모두 신기해서 뭐가 더 가치있는지 잘 모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암튼 이주영이 만든 작품이 제일 먼저 관심을 끌었는데 그녀는 화면을 편집하여 가위와 손으로 찢고 자른 옷을 거꾸로 돌려 마치 가위와 손이 찢어진 옷을 다시 붙여가는 그런 느낌을 준다. 영화 박하사탕의 거꾸로 가는 기차가 떠올랐다. 영상편집이 배우고 싶어졌다. 다른 영상들은 구더기와 숨쉬기, 공중에 떠있는 남자, 미니어쳐 박스 밖으로 보이는 일상풍경을 찍은 영상 등과 콜렉션, 그림 등 작은 곳에서 여러 작품이 선보였다. 별실에서는 꽤많은 영상작품이 보여지고 있었는데, 45초부터 10여분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들이 있었다. 단편 영화인 작품도 있어서 구석에 앉아 첨부터 끝까지 다보고 장면마다 사진도 찍었다. 이 곳에 자료를 올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준비가 안되었다. 아쉽다. 이층에서는 사진 작가 일곱명의 무리전이 있었다. 귀에 익은 이름들 - 쉬린 샤네트, 안드레스 세라노, 신디 셔먼 등이 두 세개의 작품을 선뵈고 있었다. 이곳도 꽤 힘있는 전시네. 그걸 입증하듯 관객이 많았다.
갤러리 상엘 갔다. 동아미술제 수상작가전 오픈 준비가 한창이다. 그냥 자유로운 개회이라서 마음 편하게 보았다. 천성명씨의 혼합재료 입체작품이 참 재밌게 맞이하였다. 어쨌든 기량과 실력을 맘껏 뽐내는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한점씩 걸려 있다. 그저 형식적으로 왕년전이니까 작품을 낸 사람도 있고, 공모 당시처럼 사력을 다한 작품도 있다. 그러니까 왕년전은 왕년전이다.
더 많은 전시장 관람이 있었지만 인사동 일기는 이쯤해야겠다. 글이 너무 길면 일기를 엿보는 사람도 지루하다. 앞으로는 정기적으로 움직이는 인사동 일기를 써나갈 계획이다.
이천이년이월십육일토요일 흐림. Van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