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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판소리 동호회 소리랑 원문보기 글쓴이: myunggo
우리 고법반 교수이신 최광수 선생님이 쓰신 글이네요.고법반 사람들은 특히 참고가 되겠네요.
Ⅰ. 김명환 선생님의 생애와 음악활동
김명환 (金命煥, 호: 一山) 은 1913년 5월 2일 전러남도 곡성군 옥과
면 무창리 809번지에서 부친 김용현과 모친 명사현의 5남 8녀중 막내
로 태어났다.
1978년 2월 2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9화판소리 고법(현재는 제5호 판소
리로 통합)기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가 1989년 4월 5일 타계하셨다.
김명환의 호는 一山으로 많은 山가운데 우뚝 선 산을 뜻한다.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명창 임방울과 함께 판소리를 했는데
이때 얻은 아호라고 한다.
김명환 선생자신은 이 아호에 대해 좀 튀며 강하다고 했다.
그러나 참으로 그분의 성품과 잘 어울리는 아호라고 그를 잘 아는 사
람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민족은 기쁨이 극치에 이르고 신이 복받치면 북을 친다. 억양된
심정을 조율하는 데나 고양시키는데는 식상인 것이 북이요, 그래서 북
과 친근한가 보다.
옛날 영고라는 축제의 이름이 보이듯이 북은 역사적으로도 한민족과
친근하다.
또한 북은 용도에 따라 모양과 종류가 다양하다.
우리 나라의 성악곡 가운데는 북을 사용하는 대표적 음악으로 판소리
가 있다.
판소리 역시 세 가지 음악적 요소인 성음ㆍ음계ㆍ장단(리듬)의 틀 안
에서 이루어지는데 포괄적인 예술이기에 재미있게 전해오는 말들도 많
이 있다. 특히 북을 치는 고수의 이야기로 전하는 "소년 명창은 있어
도 소년 명고는 없다", "보비우" 서양음악에서 애기하는 지휘자등 고
수의 다양하고 중요한 역할들을 애기하고 있는 바, 명고수란 모두 기
교가 아닌 폭넓은 예술적 체험과 철학적 바탕을 통해서 얻어지는 판소
리 고법의 최고의 경지를 일컫는 말이다.
이 모든 예술세계를 겸비한 명인이 곧 김명환선생님 이시다.
김명환은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고집스런 성격으로 16시간이나 북
을 친 적도 있듯이 끈기있는 노력형에다 타고난 음악성, 탁월한 기억
력의 소유자이다.
김명환은 갑부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좋은 환경으로 인해 그 당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사례비를 내고 북 학습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기에
장판개ㆍ박판석ㆍ주봉현ㆍ공창식ㆍ김정문ㆍ김봉학ㆍ박중근ㆍ신창문
등 많은 명인들에게서 북을 치는 자세, 수법, 이론 등을 사사하게 되
었다.
이때부터 익힌 북 학습으로 훗날 판소리 고법이라는 명칭은 물론 개
념, 고수의 중요한 역할까지 알리는 계기로 66세에 최초로 중요무형문
화재 제59호 '판소리 고법보유자로 지정 받게 된다.
명고수 김명환은 명인 명창들과도 북을 치며 교류를 하였는바 송만갑
ㆍ 이동백ㆍ 정응민ㆍ임방울ㆍ 박봉술ㆍ 정권진ㆍ 김소희ㆍ 한애순ㆍ
성우향ㆍ 성창순ㆍ조상현ㆍ최승희, 대금의 명인 박종기ㆍ한주환ㆍ오태
석ㆍ한승호, 가야금의 명인 강태홍ㆍ정광수ㆍ함동정월 등 돌아가신 당
대의 명인 명창과 현재 생존해 계신 명인 명창들과의 교류에서 얻은
판소리 이론과 산조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논리 또한 학문적으로도 인
정받고 또 조명 받고 있다.
젊은 시절 장사라고 할만큼 체격에 커다란 손바닥에서 울리는 김명환
특유의 북가락 변주 방법, 소란스럽지 않고 적시적소에 넣는 간결하
고 위엄 있는 독특한 추임새 등은 실로 독보적이라 하겠다.
말년의 김명환 선생님은 자신의 고법을 계승한 제자들과 그의 북소리
에 가야금 산조를 닦은 제자들의 모임인 일산회(1981년 조직) 모임을
아주 반기셨다.
선생님 댁이나 제자들의 집에서 한 달에 한번 모이는 여러 제자들과
의 실기와 이론의 토론장에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내 북에 앵길 소리가 없다" 는 자조 섞인 말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슬퍼하고 또한 명고가 나올 수 없음을 한탄하셨다.
두 번에 걸린 담석증 수술 뒤에도 이겨내시던 김명환 선생님은 끝내
황달ㆍ합병증으로 1989년 77세의 일기로 식목일에 별세하여 선산에 묻
혔다.
김명환 선생님이 남긴 고법은 물론이려니와 그의 예술정신은 앞으로
후학들에게 영원이 빛날 것이며 계속 이어갈 것이다.
Ⅱ. 일산 김명환의 판소리 鼓法
1. 고법의 기본자세
일산선생은 북 놓은 법과 북채 쥐는 법이 다른 고수들(당대에 같이
활동했던 김득수, 김동준 등)과 다른 점이 있다.
먼저 북을 놓는 위치가 다르다.
일반적인 방법은 왼쪽 발꿈치를 오른쪽 무릎 밑에 넣고, 오른쪽 발뒤
꿈치를 왼쪽 정강이에서 5∼6㎝ 앞 지면에 놓는 다음, 북을 왼쪽 무
릎 앞에 붙여 놓고 오른쪽 발가락으로 북의 오른편 밑 모서리를 고이
는 것이다.
그런데 일산 선생님은 오른쪽 발을 왼쪽 무릎 밑에 넣고 왼쪽 발은 오
른쪽 무릎 5∼6㎝ 앞 지면에 놓은 자세에서 북을 왼쪽 무릎 좌편에 붙
여 놓고 오른쪽 발가락으로 북 오른편 밑 모서리를 고이는 자세를 취
한다.
이 자세는 북을 왼팔로 감싸고 있는 형세여서 품새가 커 보이고 점잔
은 느낌을 준다.
다음으론 매화점을 칠 때의 북채 쥐는 법이 다르다. 보통은 채편을 칠
때의 북채 쥐는 법에서(북채의 앞에서 3/4쯤 되는 뒷부분을 주먹을 쥐
는 요령으로 가볍게 말아 쥐고 손등이 지면과 수직이 되도록 한다. 장
지 무명지 소지는 붙이고 식지는 약간 떼어놓은 상태에서 엄지를 식지
와 장지 사이에 놓는 것이 치기에 자연스럽다.) 손목을 왼쪽으로 70∼
80。정도 틀고 북채는 북 모서리와 30。정도 비껴서 치는 수법을 흔
히 쓰는데, 일산선생님은 북채의 중간을 주먹을 쥐는 요령과 똑같이
쥐고 손등이 하늘로 향하도록 한 상태에서 팔을 뻗어 북채와 매화점
북 모서리다 수직이 되도록 친다. 그러나 일산이 꼭 이렇게만 치는 것
은 아니고, 다른 고수들도 간혹 이런 수법으로 칠때도 있다.
일산선생님이 강조했던 북채 운용의 기본은 우측으로는 오른쪽 어깨에
서 30㎝ 이상 벗어나지 말고, 위로는 고수의 눈 높이를 벗어나지 말
며, 좌측으로는 북의 왼편 모서리를 벗어나지 말고, 아래로는 고수의
무릎 밑으로 내려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산이 기본자세에서 강조한 것은 너울가지(폼)였다.
각 타점에서의 자세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채편 칠 때는 기본자세에서 칠 경우 북채를 쥔 오른손이 오른쪽 어깨
에서 우측으로 30㎝ 이상 벗어나지 않도록 하고 북채를 채편의 북면
그리고 지면 (地面)과 수평을 유지한 상태로 채궁자리(채편중앙)보다
약간 높은 곳에서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친다.
온 각을 칠 때는 북채를 지면과 수평이 되도록 하고 북과는 30。쯤 비
낀 상태에서 고수의 눈 높이 정도로 들어 올렸다가 힘있게 내려친다.
이때 손목만을 움직여서 치면 안 되고 손목과 팔꿈치와 어깨를 수평
을 유지하며 같이 들어 올렸다가 역시 수평을 유지하며 내려쳐야 절도
가 있어 보인다.
북채 끝을 하늘로 치켜세우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다.
온 각에서 합 장단으로 옮겨 칠 때는 북채 끝을 위아래로 치켜세우거
나 숙이지 말고 지면과 수평을 유지한 상태에서 반달(半月) 그리듯 반
원을 그리며 부드럽게 내려친다. 이렇듯 절도 있는 동작을 취해야 하
는데 좌우 팔의 움직임이 춤동작과 같이 점잖고 여유가 있어야 한다
고 강조하였다. 고수의 시선은 허리를 곧게 편 상태로 항상 창자의 입
을 주시해야 한다 하였다.
장단 명칭에서 일산선생님은 '머리'를 고집하였는데 일산 선생님께
서 '머리'를 고집하신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참고로 박헌봉의 증언을 소개한다({창악대강}장단조)
"영남의 명 고수 신고주는 근세(近世) 가왕(歌王)의 칭호를 받던 박기
홍의 고수로서 5년간을 수반(隨伴) 하였다. 그의 실담에 의허면 박기
홍이 말하기를 어떤 장단이든지 독립된 장단은 '머리'라 하고 이 '머
리'장단을 빨리 몰면 '모리'라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합리적 소론이
라 생각한다. 여기 '머리'라 함은 독립된 장단을 말하고 '모리'라 함
은 하나의 독립된 장단에서 파생된 것이다."('머리'에 관한 설명은 나
중에 다시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고법은 아니지만 일산이 북 제작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어서
소개한다.
북 가죽은 소 목덜미 가죽이 좋은데 흠집이 없어야 하고 기름은 적당
히 빼내야 한다고 하였다. 기름을 많이 빼내면 소리가 퍽퍽하고, 적
게 빼내면 멍멍하고 땡글땡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통에 가죽을 쒸울 때는 피깍질한 백지(딱지라고 하는 거친
닥나무 종이)를 먼저 바르고 그 위에 마포나 헝겊을 된풀을 먹여 바
른 후 다시 그 위에 창호지를 두 겹쯤 바르고는 잘 말려서 가죽을 입
혀 놓으면, 북통을 쳤을 때 쇳소리가 안 나며 퍽퍽하지도 않고 짝짝
달라붙는 느낌을 주는 찰진 소리가 난다고 했다.
북채의 재료는 보통 탱자나무를 쓰는데 일산 선생님도 탱자나무가 좋
다 하셨다. 박달나무는 재질이 너무 단단해서 북통을 쳤을 때 소리가
건조하고 딱딱한데 비해 탱자나무는 재질의 강도가 적당하면서도 탄력
이 있어서 부드럽고도 깊이 있는 소리가 나며. 박달나무는 갈라지거
나 부러지기 쉬운데 비해 탱자나무는 금처럼 닳을지언정 부러지거나
갈라지는 일이 없어 좋다는 것이다. 길이는 손으로 북채를 말아 쥐었
을 때 계속 3회를 말아 쥐고도 3∼4㎝ 정도 더 남아있는 길이가 알맞
다고 하셨다.
지금 우리가 쓰고있는 북채도 모두 탱자나무를 쓰는데, 요즘은 귀한
나무가 되어서 에로사항이 좀 많이 있다.(경험해본 카페 회원님들은
잘 알 것이다.
2.일산 김명환 선생님께서 강조한 고법
(1)장단 내두름
"명창일수록 첫 머리 빡얼 확실히 구별할 수 있게 척 내주고... 성음
은 반갑게 내고 끝낼 때는 섭섭하게 지우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산의 증언은 소리 내두름의 미학을 언급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정렬도 "소리는 반갑게 내고 아쉽게 끊어라"고 하였다(김여란 증언)
는 것으로 보아 이런 내두름의 미학은 보편성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
다.
이는 판소리가 장시간을 지속해야 하는 음악이기에 생긴 미학이라고
생각된다. 즉 장시간 관람하는 청중의 지루함을 덜기 위해 소리 처음
을 반갑게 냄으로써 주의를 환기시키고 소리끝은 아쉽게 마침으로써
다음 장면에 대한 호기심을 야기시키는 효과를 노린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미학은 느린 장단인 진양과 중머리(자진중머리는 제외)에서만
적용된다. 진양과 중머리의 첫 내두름은 한배를 약간 빠르게 내고 정
상적인 한배대로 약간 몰아서 쳐줘야 한다.
그런데 요즘 일부고수의 경우 소리꾼이 첫 내두름을 반갑게 (한배를
약간 빠르게)냈는데도 북을 소리꾼의 첫 내두름 한배대로 쳐주지 않
고 고수가 임의대로 창자의 다음 장단 한배를 미리 예상해서 느리게
치는데,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소리꾼이 어떤 한배를 잡을 줄
알고 고수가 미리 한배를 잡는단 말인가.
고수는 창자가 반갑게 첫 내두름을 내면 북도 반갑게 쳐주고 둘째나
셋째 장단에서 정확한 창자의 호흡을 파악해서 한배를 잡아야 하는 것
이다. 절대로 고수가 미리 한배를 잡아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소리꾼은 소리 앞부분에선 가급적 붙임을 피하고 대마디 대
장단으로 짜서 고수가 한배를 편하게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등배 가려 치기와 진양 24박
"등배란 것은 '강약'을 말허고, 한국말로는 '음양', 서양말로는 '강
약'....
'약'이 나왔으면 '강'으로 가야 할거지만 또 '약'으로 나온 디가 있어
요. 그것이 예술이여.... 그 음양을 알고 북얼 쳐야 헙니다.
박녹주가 '음양'을 알고 북얼 치는 분네는 김명환 하나 뿐이라'고....
고법은 소리의 등배에 따라 치는 것이다. 소리에는 등배가 있고 생사
맥이 있다.
풀어지는 것은 음, 강하게 미는 것을 양이라 한다.
북은 세게 때릴 때가 있고 가만히 때릴 때가 있는데 이것을 생사맥이
라 한다."
일산선생님의 언급대로 등배란 사람의 등과 배, 즉 안과 밖, 음(陰)
과 양(陽),생(生)과 사(死)를 말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소리는 등과 배의 조화 다시 말하면 음과 양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
으므로 북도 소리의 음양 조화를 잘 헤아려서 그에 상응하게 쳐줘야
한다는 이론이다.
소리가 강하게 나올 때는 북도 강하게, 소리가 슬플 때는 북도 슬프
게, 소리가 신명낼 때는 북도 신명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리가 강하게 나올 때 북소리를 오히려 죽임으로써 소리의 강
함을 돋보이게 하는 경우도 있고, 소리가 약하게 잦아들 때 오히려 북
을 세게 때림으로서 소리의 음적인 정서를 극대화시킬 수도 있는 것이
니 소리의 생사맥을 헤아리는 일이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이 등배를 제대로 가려 칠 줄 알아야 명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
다.
"진양조에서 십팔박으로 쳐야 할 땐디 십이박 소리가 나오면 십이박으
로 쳐줘야제....소리를 푼데 가서는 북도 풀어야 허고 미는 데 가서
는 북도 같이 밀어야 헙니다."
일산선생님은 진양 24박을 인정하지 않았다.
소리의 짜임새에 북이 따라야 한다는 그의 고법의 원칙을 엿보게 하
는 대목이다. 그러나 김명환 선생님도 60년대 말까지는 24박으로 쳤는
데,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온 후로 이 이론을 수정하였다 한다.
(3) 각 내기
소리의 앞부분에서는 소리꾼이 장단의 한배를 잡아 나가지만 소리가
몇 장단 이상 진행되면 여러 가지 다양한 변화를 갖는 부침새를 쓰기
때문에 소리꾼이 장단의 한배나 박을 놓칠 염려가 있다.
이럴 때 소리꾼은 북장단을 듣고 한배를 잡아야 하는 경우가 종종 생
긴다..
그러므로 고수는 소리꾼이 한배를 가늠하게끔 '장단 눈'을 정확하게
내주어야 한다. 이것을 '각을 내준다'고 한다.
제9박이 각은 모든 장단에서 합장단인 경우가 많다. 중머리나 중중머
리의 경우엔 인 경우가 많으나 그 외의 박도 각일 수 있다.
특히 자진머리에서 달고나갈 때 첫박을 궁손으로 분명히 각을 내줘
야 소리꾼이 한배를 가늠하면서 안심하고 소리를 짜나갈 수 있다.
(4)거두기와 늘이기
북은 장단의 모든 박을 정확한 한배로 쳐야하는 것이나 진양조 같이
느린 장단에서는 제5·6박에 사설이 붙지 않을 경우 정상적인 한배대
로 박을 짚으면 지루하여 소리가 맥이 풀리므로 제5·6박을 약간 빠르
게 말아 치는 수가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 '장단을 살짝 거둔다'고 한
다.
이는 중머리에도 해당되는데(주로 느진 중머리) 제5·6박고 제11·12
박에 말이 붙지 않는 경우 장단을 살짝 거두어 줘야 소리의 긴장감이
풀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자진머리와 같이 빠른 장단에서는 소리꾼이 제 흥에 겨워 한배
가 빨라질 염려가 있으므로 장단의 끝 부분을 약간 느리게 치는데 이
것을 가리켜 '장단을 살짝 느린다'고 한다.
또한 빠른 장단에선 고수도 자신의 북 가락에 스스로 취해서 한배가
빨라지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유념해야 한다.
이렇게 고수는 소리가 늘어지면 살짝 거두어주고 소리가 급해지면 고
삐를 당겨서 늘여줄 줄을 알아야 한다.
(5) 따라치기
소리꾼이 특이한 리듬으로 소리할 때 북도 소리 리듬에 따라서 북가락
을 쳐주는 것을 말한다.
일산선생님의 북 가락 수는 다른 고수에 비해 많다고 할 수 없는데,
이 '따라치기'가 능한 점이 돋보인다.
정형화된 북 가락은 일종의 공식으로 일정한 소리 패턴에 대입만 시키
면 되기 때문에 누구나 연습을 통해 어느 정도 연주가 가능하지만 '따
라치기'는 그렇지 않다.
소리 짜임새의 다양한 리듬을 꿰뚫고 있어야함은 물론이려니와 소리
전개의 흐름을 예측할 수 있는 능력도 있어야 가능하다.
일산선생님이 화려한 북가락을 구사한 고수가 아닌데도 북이 풍성하
게 들리는 이유는 이'따라치기'를 잘 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다음의 증언을 보면 일산의 '따라치기'는 배운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가 연구해서 터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나는 북 공부럴 누구보담도 영광의 김종길씨한테 하고 장판개씨한테
잘 배와 갖고 나중에 최고 북얼 갖고 재주럴 부리고 기양 연등얼 하
고 기양 조화하고 소리 멜로디하고 똑같이 맹근 것 그것은 보성 가서
정응민선생님 소리 가르친 것얼 보면서 연구했어. 정선생님 그 소리하
신 거 뭐 당신 북얼 가리개 있게나 치시간디?
아무렇게다 쳐도, 아 거 가서 뭣이 다 있단 말아여, 거 가서. 멜로디
하고 북하고 잘맞아 나간단 말이세. 정선생 허신대로 내가 히봐. 그흐
름에. 그리 갖고 그 조화럴 내가 다 거기서 터득히 갖고는 북 가락얼
연구했네. 그러니 나는 북으러 서리럴 히나가라우."
3. 일산 김명환 북의 특징
(1) 국이 크다.
일산선생님은 자신에 대한 북 평가를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송만갑선생 북은 서울 관훈동 성악회서 쳤지요. 이동백씨 북은 광주
오실 때마담 쳤고. 정정렬이는 구례에서 무대에서 처음 쳤어요, 스물
한살 때. 모도들 조선서 최고 국고 되겄다고 그랬어요. 북이 그럭이
크다고. 범위가 쫌상헌 것이 아니라 박력 있고 선이 굵다고."
일산선생님이 북치는 것을 보면 그의 지축을 울리는 합궁소리. 심장
을 고동치게 하는 궁편소리, 벼락같은 맺는 소리, 북통이 부서질 것
같은 북가락, 무겁고 박력있는 추임새, 바위덩이 같은 자세, 매섭게
소리꾼을 응시하는 날카로운 눈초리 등등에서 거인의 풍모를 느끼게
된다.
일산선생님의 이런 국이 큰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는 일산의 예
술에 대한 치열함과 당대 기라성 같은 명창들과의 교류, 그리고 그의
당당한 체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명고는 명창 없이 출현할 수 없다. 초등학생 소리북을 치면 초등학
생 북이되고, 대학원생 소리북을 치면 대학원생 북이 된다는 말이 이
를 두고 한 말이다.
이런 변에서 일산선생님은 행운아 셨다. 넉넉한 재산덕분에 평생 명창
과 명고들을 찾아다니며 공부하고 견문을 넓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교류했던 명창들은 송만갑·이동백·장판개·김정문 등 국이 큰
소리를 했던 대명창들이었다. 이런 대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판소리 음
악의 본질을 꿰뚫게 되었고 그러한 경지에 이르려면 피나는 수련을 거
쳐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된 그는 북통이 여러개 부서지고 발꿈치가 진
부를 정도로 수련에 몰두한 끝에 마침내 비개비로서 이런 큰북을 완성
한 것이다.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의 당당한 체구다.
젊어선 씨름판에서 황소도 여러 마리 탔다고 하는데 빈말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은 그의 당당한 체구 때문이다.
그의 손도 거대한데 정권진은 일산의 궁편 소리를 두고 "일산 선생 궁
소리는 우리네 채편 소리보다 크다" 고 좀 과장된 말을 할 정도다.
일산선생님의 당당한 체구와 큰손에서 나오는 북 성음은 보통 고수들
과는 성량면에서 차이가 났던 것이다.
일산선생님의 또드락 성음도 여느 고수들과 다르게 들리는데 이것은
북채 쥐는 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매화점 자리에서의 또드락은 대개
장구채 놀리듯이 북채를 손바닥에서 궁굴려 내는 것이 일반적인 수법
인데 일산은 북채를 꽉 쥔 상태에서 손목과 팔 전체로 하기 때문에 장
판방에 콩 튀듯이 또드락 소리 하나하나가 땡글땡글하고 야무지게 들
린다.
일산선생님의 자세 또한 국이 크다.
당당한 체구의 일산이 소리판에서 북을 옆에 탁 차고앉으면 바위덩이
가 놓여 있는 듯하다. 잡스런 움직임 없이 장중하고 진지한 자세로 박
력 있고 절도 있게 북을 치는 모습에 청중은 압도 당한고 만다.
추임새도 무게와 절도가 있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일산선생님은
고수도 반드시 소리를 배워야 한다고 강조 하셨는데 이는 소리 속을
알아야 북을 잘 칠 수 있다는 의미도 있지만 고수의 추임새 성음을 강
조한 점도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소리 수련을 해야 만이 무겁고 박력 있는 성음을 낼 수 있기 때문이
다.
일산의 소리 성음을 들으면 소리 수련도 상당히 한 것으로 보인다.
(2) 싸움 북 이다.
최동현은 고수를 크게 두 가지의 스타일로 나누었는데. 적극적으로 자
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경향과, 될 수 있는 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소리꾼을 충실하게 도와서 소리 자체를 빛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자 하는 경향으로 나누면서 후자를 보비위북 이라 명명하였다.
이 분류를 따른다면 일산선생님은 전자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다.
소리꾼의 비위를 맞추면서 아질 자질하게 쳐나가는 북이 아니라, 소리
꾼과 밀고 땡기면서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싸움북이다.
일산의 북에 임하는 자세는 다음의 언급에서 잘 드러난다.
"고수는 판에 딱 앉으면 소리꾼을 무릅 아래에 꽉 잡아넣고서 북을
쳐야돼."
"무대에서 죽어서 나올지 살아서 나올지 생각한다."
"적이 어디서 나타나도 막을 수 있는 태세로 소리하는 사람을 보면
서 쳐라."
일산선생님은 전쟁에 임하는 군인 정신으로 북을 쳤다.
그래서 김명곤은 일산의 북 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북을 치고 앉은 그의 모습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몸처럼 팽팽
하게 긴장되어 있고, 소리꾼을 쏘아보는 그의 눈초리는 독수리 눈처
럼 매서웁다. 그는 여간해서 북 치는 동안 웃는 법이 없다. 관객을 돌
아보며 애교를 부리지도 않는다. 마치 소리꾼하고 자기하고 둘만 있다
는 듯이, 둘이서 생사를 건 싸움을 한판 벌려 보자는 듯이 맹렬한 기
세로 북을 친다. 그처럼 서슬이 시퍼런 북 앞에서는 아무나 소리를 하
지 못한다.
그래서 그와 죽이 맞는 소리꾼은 한정되어 있다. 그 역시 자기가 좋아
하는 소리꾼의 북만 치려고 한다."
생사를 건 싸움판에 임하는 마음가짐으로 치열하게 북을 친 일산 선생
님.
그의 북엔 서슬이 있다. 일산은 늘 '소리엔 서슬이 있어야 한다' 고
강조했는데, 이는 북에도 적용되는 미학이다.
이런 스타일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필자는 그의 판소리 관과 성격에서 온 것이라 생각한다.
다음의 언급은 그의 판소리 관의 일면을 보여준 것이다.
그렇게 까지 세상이 푸대접얼 험서 어쩌고 이거시 발전이 될것이여.
나는 인자 이 진짜 판소리허고 북허고 이것은 없어지지 않은가 허요.
가야금은 그대로 있어요. 안 변허고.
근대 인자 판소리 잘허기가 어려와요. 잘"그나저나 소리 혀서 밥은 먹
게 되야제.
판소리는 곧 없어집니다.
배워봤자 딴 거 허는 것만 못헌디 뭘라고 배울 것이여.
옛날에도 인자 명창이 되어야 좋았지 명창 되기 까장은 큰 곤란이지.
아 그러게 다 토굴 파 놓고 삼년얼 들어가서 하고 나온다, 오년얼 헌
다 글 않소.
팔년얼 헌 사람도 있고...... 그란디 나 욕심참 많은 사램이여.
나 욕심말고 남 욕심도 있단 말시, 넘 잘허기럴 바라는 욕심.
아까 짜증나서 이 사람, 저 사람 탈했진만, 다 이걸 하다가 배고파서
쉬어서 그래.
허기져서 넘어지드라도 소리 잘러다가 꼬꾸라 져라 그것이 나 욕심이
여.
송만갑이는 구례 천은사에서 공부허는디 어찌 방에서 악얼 써 쌓고 듣
기 싫든지 어디 인자 바람 쐬러 나간 새 중놈들이 쇠시랑꺼내 갖고
걍 방바닥얼 다 파 부렀어.
듣기 싫응께.
그렇게 공력얼 많이 쌓야 하는 것인디.
잘허면 좋고."
일산은 이렇듯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공을 들여서 득음한 대가들고 교
류한 사람이다.
송만갑·이동백·장판개·김정문·등등이 그들이다.
이런 명창들 북은 일산처럼 치열하게 치지 않으면 어울릴 수가 없었
을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판소리예술에의 치열성이 몸에
뱃을 것이다.
이런 판소리 예술에의 싸움북을 만들었을 것으로 본다.
다른 한편으론 그의 성격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일산은 부드럽고 은근한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오기와 자존심이 남달리 강했던 성격이다.
타협과 순응과는 거리가 먼 이런 성격이 다른 한 배경이 아닐까 한다.
(3) 전체적으로 잔가락을 적게 쓴다.
"장판개 북에는 별 가락이 없단 말세. 그런디 친것얼 보면,"궁"소리
한번 울린 데 가서 소리럴 죽이고 살리는 크은 거시기가 있단 말여.
근게 내가 눈에가 환하고 귀에가 환한디 그리매로 북얼 갖고 저정거리
고 갖고 놀 수가 없어...... 그이는 북 칠 때 독특한 가락이 있는 것
이 아니고, 가락도 아니고 꿍 꿍 울리고, 또 가락하고 배합이 맞어 갖
고 때릴 때만 한번씩 때리는디 기가 막히게 멋있어요. 단가 한번 한
다 치면 때리는 디가 두서너번 백에 없어 요..... '궁' 때리는 것 그
것은 그때 이수증 받았어. 근디 "따드락" 은 못씬다 그것이여.
정응민 선생도 그럽디다. 장선생은 북얼 때리는 것도 의식적으로 허
는 것이 아니여.
그냥 묻어 떨어져. 꽃이 되아갖고 둥실 혀. "딱" 붙여주고 요리 간디
그렇게 멋질 수가 없어. 그전 선생님들이 멋이 있어요. 멋얼 의식적으
로 부릴라는 게 아니라 자연히 몸에서 핑겨.
그것이 인자 진짜 멋입니다. 장판개 선생 소리는 심거운 것 같지마는
진짜 예술가가 들을 때는 어려운 소리여."
일산선생님은 장판개의 이런 절제되고 무게 있는 북의 미학을 전승했
기 때문에 잔가락을 되도록 적게 쓰고, 중머리나 중중머리에서 거의
달아 나가질 않고 합장단을 자주 쳐서 담백하고 고졸한 맛을 준다.
잔가락(특히 또드락 가락)은 소리 감정의 흐름을 깰 뿐만 아니라 사
설 전달에도 방해가 된다. 그래서 고법에 선 이 잔가락을 자주 쓰는
것을 천격(賤格)으로 친다.
그 대신 일산은 북의 조화는 왼손에 달렸다며 궁편의 활용을 강조했
다.
(4) 전반적으로 북을 거두어 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송만갑·이동백·장판개·김정문·유성준·이선유 등 거뜬거뜬하
게 소리를 짜나가는 동편 제 명창들과의 교류에서 생긴 듯 하다.
일산선생님의 성격과도 연관이 있음은 물론이다.
한배란 측면에서도 볼 때 싸움북이란 일산처럼 거두어 치는 북이라고
할 수 있다.
고수는 사설이 붙지 않은 박에서 한배를 거두고 소리꾼은 소리하는 부
분에서 자기한배를 고집하고 하는 밀고 땡기는 과정에서 긴장감이 청
중들에게는 마치 소리꾼과 고수가 마치 싸우는 것 같이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때는 소리꾼의 호흡이 가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모
는 때도 있다.
말년에는 이 녹음보다 한배가 많이 차분해졌음을 느낄 수 있다.
(5) 따라치기를 잘한다.
앞에서도 소개했듯이 일산은 따라 치기를 정응민 에게서 영향받아 완
성한 것 같다.
사실 일산선생님의 정형화된 북가락은 화려하고 다양하다고 할 순 없
다.
그런데 그는 소리 리듬을 잘 분석해서 그에 맞는 북 가락을 연구 개발
함으로써 전체적으로는 풍성한 가락을 펼쳐 보이고 있다.
정형화된 북 가락보다 따라 치기를 잘해야 한 차원 높은 소리와 북의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된다.
Ⅲ. 一山김명환 선생님의 교습철학
1. 정신적 자세와 태도가 중요하다.
1). 북 치는 것을 좋아해야 한다. 북에 미쳐 보라.
2). 고수는 청자와 대등하게 생각해야 한다.
3). 북은 정신노동이다. 적이 어디서 나타나도 막을 수 있는 태세로
소리하는 사람 을 보면서 쳐라. 소리하는 사람을 무릎에 꽉 잡아
넣어라.
4). 고수는 어떤 청중, 어떤 창자 앞에서도 배짱이 있어야 한다. 무대
에서 죽어서 나 올지 살아서 나올지 생각한다.
2. 천재적 예술성과 재주가 있어야 한다.
1). 음악의 흐름을 인식하고 소리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까 미리 내
다볼 수 있어 야 한다.
*소리 속을 알아야 한다.
*북으로 소리를 싸고 나가라.
*등배를 가려 쳐라.
*혈을 찾아서 침주듯이 소리에 맞게 북을 쳐라.
2). 창자의 호흡을 빨리 파악해야 한다.
*장단을 호흡으로 맞춰준다.
3). 창의력을 발휘해라.
4). 북이 갖고 있는 음악성을 최대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북은 간단한 악기여서 더욱 어렵다.
*북은 강약이 중요하며 박력있게 쳐라.
*깨끗하게 쳐라.
*소리를 죽이고 살리는 것은 뒷손에 있다.
5). 멋을 알아야 한다.
*춤과 같이 멋이게 쳐라.
*손의 수법이 좋아야 한다.
6). 실기와 이론을 빨리 터득하는 능력과 재주를 가려라.(김명환선생
님은 18세에 이 미 천재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21세에 최고의
국고가 되겠다고 다짐했으며, 그릇이 크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고 한다.)
3. 북실력은 경험과 연륜 그리고 노력이다.
1). 소년 명창은 있어도 소년 명고는 없다.
2). 북을 제일 적게 친 날은 8시간, 많이 친 날은 16시간이다.
3). 북채가 수백개 끊어져야 한다.
4). 북을 많이 쳐서 한 배가 몸에 팍 쩔어 버려야 한다.
5). 서방질을 많이 해야 한다.
6). 북에서 쩍쩍 소리가 나야 한다.(성음이 좋아져야 한다)
7). 소리광대는 꽃이고 고수는 나비이다.(여러창자의 북을 쳐야한다
는 뜻)
8). 명창의 북을 많이 쳐야 한다. 여러 좋은 선생을 상대해서 실기,
이론을 고부해야 한다. (김명환 선생님은 송만갑·장판개·장응
민 등 홀륭한 분들에게서 공부했 다.)
9). 북을 많이 치면 좋은 가락이 나온다.
10). 공부하는 시간은 하늘이 준 시간이다.
11). 질문을 많이 해라.
12). 소리를 꼭 배워라.
13). 북 가락을 평소에 많이 연습해 두어라.
14). 소리가 귀에 들어오면 어느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15). 잘 때도 명창의 소리가 들려와 가슴에 손을 얹고 장단을 친다.
4. 신체적 조건도 중요하다.
1). 체격이 좋고 자세가 좋아야 한다.
2). 체격이 적어 북에 치여 앵기면 북을 쳐서는 안 된다.
3). 추임새에도 성음이 있다. 가볍지 않게 위엄 있게 통짜로 해라.
5. 마지막으로 제자들이 잘 했을 때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 [제주있소](끝)
이렇게 글을 올리다 보니 우리의 일산바디 고법이 얼마나 어렵고 얼마
나 오묘한 음악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한가지 느끼는 점은 우리 일산바디가 최고의 고법바디라는 거!!!
그리고 좀더 뛰어넘어서 송원제가 된 고법.
그리고 해암제가 된 고법.
우리 박근영 선생님 제자들은 위의 김명환 선생님 자료에 있는 말들
을 수도 없이 많이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을 실천하기란 왠만한 열성과 인내가 아니면 쉽지가 않
다.
난 항상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고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를 바탕으
로 소리반주를 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렵고 힘들다.
연륜과 경험의 축적이 없다면 그 경지를 절대로 오를 수 없을 것이다.
연습은 우리가 밥을 먹듯이 꾸준히 해야겠다.
그 속에서 연륜과 경험이 축적이 되어야만 진정한 고수, 훌륭한 고수
가 될 것이다.
또 절대로 오만과 자만심은 금물이라 생각된다.
예술인의 최고 큰 병은 오만, 자만심, 나태함... 등
이런 부류는 예술이란 커다란 명칭에 붙일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우리 음악(국악, 한국음악, 전통음악) 을 하는 사람들의 최고 큰 단점
이 이점인 듯 싶다.
이 글을 읽은 우리 악부천명 회원님들은 모두 알 것이다.
판소리고법을 잘 하려면 그냥 어설프게 공부해서는 될 수가 없다는 것
을(다른 음악도 마찬가지지만......^^*)!!!
열심히, 최선을 다 하노라면 음악은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고 건강하
게 해줄 겁니다.
그 날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기로 합니다.
여기까지만 글을 쓰고 마지막으로 그냥 읊어 보았습니다.^^*
~하하하~
하기는 하여야 하는데 무엇을 하리!
하늘 하늘 거리며 할일을 찾는데!
할일이 내 주위에서 자꾸 멀어져가네!
내 할일을 하지않고 네버려두면 두면!
그 할일 떠나 다시오지 안으리!!!
하늘 하늘 거리며 할일을 찾아보세!!!
~하느리~
~하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