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특성ㆍ상품화 과정을 9개월간 교육
인근 포도밭을 찾아가거나 샤토를 방문하는 등 현장 학습도 병행해
한국인 학생 7명이 최근 소믈리에 자격증 따내자 더욱 관심 높아져
▲ 보르도시의 소믈리에 양성학교 '카파 포르마시옹'강의실 모습. ▲ 보르도의 포도밭과 샤토.
요리, 특히 프랑스 요리에는 궁합이 맞는 와인이 필수다. 프랑스의 고급 레스토랑들은 백과사전처럼 두꺼운 와인 리스트를 떡 하니 내놓는 경우가 종종 있다. 캬브(cave·지하의 와인 저장 창고)에 얼마나 좋은 와인을 갖추고 있는가가 그 레스토랑의 명성과 권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프랑스 요리를 고르는 것도 골치 아픈데 그보다 더 복잡한 와인 메뉴를 받아들 때의 당혹스러움이란…. 와인을 제법 아는 사람도 “오늘 식사에 어울리는 와인 좀 골라 달라”고 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다. 그 순간, 음식과 ‘결혼’시킬 파트너 와인을 간택해 손님에게 추천해주고 서빙하는 레스토랑의 와인 담당 웨이터를 소믈리에(sommelier)라고 부른다.
붉은 표지의 ‘기드 미슐랭(guide Michelin)’은 프랑스의 레스토랑 평가서로 유명하다. 매년 뛰어난 레스토랑을 선정해 별 하나, 둘, 셋을 매긴다. 기드 미슐랭에서도 와인 리스트가 매력적인 레스토랑은 특별히 포도송이 표시를 붙여준다. 그만큼 프랑스 레스토랑들은 와인을 중시한다. 와인 담당 소믈리에의 중요함도 두 말할 나위없다.
국내 와인시장이 급성장하면서 ‘토종 소믈리에’ 시대를 지나 ‘프랑스 공인 소믈리에’까지 등장하는 시대다.
세계적 와인 산지인 프랑스 남서부의 보르도 지역. 중심 도시인 보르도시(市)의 가론 강변에는 ‘카파 포르마시옹(CAFA Formations)’이라는 사설 와인학교가 있다. 규모가 크지는 않다. 소믈리에 과정의 최대 인원은 25명. 1년에 한 반만 운영하고 5명의 강사진이 이들을 전담한다.
이곳이 한국에서 유명해진 이유가 있다. 이곳 소믈리에 과정을 거친 한국인 졸업생이 재작년에 2명, 작년에 1명 프랑스 국가공인 M.C 소믈리에 시험에 합격했고, 올 6월 시험에는 무려 7명이 지원해 100% 합격했다. 그 바람에 “프랑스 소믈리에 자격증을 따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는 입소문이 났다.
와인의 종주국 프랑스는 체계적인 공교육을 통해 전문인력을 길러낸다. 프랑스 와인산업에 종사하는 인력들은 상당수가 대학에서 양조학을 전공한 이력을 갖고 있다. 또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서빙하는 소믈리에는 리세 오틀리에(Lycee hotelier) 같은 직업학교에서 길러낸다.
프랑스소믈리에협회(UDSF)가 추천하는 소믈리에 양성 교육기관은 40여곳. 대부분은 리세 오틀리에 같은 공립학교인데 사설 교육기관인 카파도 명단에 포함돼 있다. 프랑스에서는 이들 교육기관의 소믈리에 과정을 이수한 인력이 매년 500~600명씩 쏟아진다.
하지만 소믈리에 과정을 이수한다고 곧바로 소믈리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격증을 차례로 따고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프랑스 정부가 공인하는 소믈리에는 크게 두 가지. ‘B.P 소믈리에’와 ‘M.C 소믈리에’다. 우선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CAP’ ‘BEP’ ‘BAC프로’ 같은 자격증을 먼저 따야 한다. 이 자격증을 소지한 후 1년이 지나면 M.C 소믈리에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자격증이 있고 실무 경험을 2년 이상 쌓으면 한 단계 더 높은 B.P 소믈리에에 응시할 기회가 생긴다. 이런 교육 체계로 소믈리에를 양성하기 때문에 프랑스 전역에 소믈리에는 많지만 막상 외국인들이 뛰어들기는 쉽지가 않다.
1986년 설립된 카파 포르마시옹은 호텔 및 레스토랑의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재교육하거나 와인 컨설팅을 해주는 기관이다. 사업부문의 하나로 소믈리에 과정을 운영한다. 카파를 방문했을 때는 하루 종일 강의실에서 수업이 진행되는 날이었다. 여느 강의실과 다를 바 없지만 이곳저곳 와인병이 잔뜩 놓여 있어 와인학교 분위기가 물씬 났다. 학생들 책상 위에도 노트와 필기도구 외에 와인잔과 물병도 줄지어 있었다.
이날 오전에는 여성 소믈리에 출신의 크리스틴 다르뮈제씨가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 루시용과 프로방스 와인에 대해 강의했다. 이론 강의가 끝나고 이 지역에서 생산된 와인을 시음하는 시간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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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독 지방의 사토(양조장이 딸린 포도밭)를 방문해 현장 수업을 하는 모습. |
학생들은 와인잔을 이리저리 기울여 보면서 색깔을 보고, 향을 맡으며 와인의 특성을 종이에 적었다. 한 모금 입에 머금고 있다가 뱉어낸 뒤 맛의 특성도 적었다. 이론과 시음으로 구성된 이 날 수업은 오전 9시에 시작해 12시30분쯤 끝났다.
오후 1시30분. 1시간의 짧은 점심을 마치고 다시 수업이 시작됐다. 프랑크 쇼세 교장이 부르고뉴 와인과 보르도 와인을 비교 설명했다. 이어 화이트 와인 3종을 시음하는 순서. 똑같이 샤르도네 품종으로 만든 2004년산 화이트 와인인데 샤블리, 생 로맹, 생 베랑 등 각각 다른 동네에서 생산되는 바람에 토양의 특성에 따라 와인 색깔도, 냄새도, 맛도 다 달랐다.
수업은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를 지나서까지 빡빡하게 진행된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수업이다. 물론 강의실 수업만 있는 건 아니다. 인근 포도밭을 찾아가 포도나무가 자라는 것을 관찰하기도 하고, 샤토(양조장이 딸린 포도밭)에서 와인이 숙성되는 걸 지켜보며 시음도 한다. 카파의 소믈리에 과정은 매년 9월에 시작해 다음해 5월에 끝난다. 총 9개월 과정의 수업료는 2006년 기준으로 4490유로(약 540만원).
그렇다고 수업이 9개월 내내 계속 되는 건 아니다. 9~12월까지는 한 달에 1주일씩, 이듬해 1~4월에는 한 달에 2주일씩 수업하다가 마지막 5월에는 다시 1주일간 수업한다.
수업 내용은 와인에 관한 이론과 실무를 두루 익히도록 채워져 있다.
▲포도 재배 관찰(35시간) ▲양조학과 와인 지식(117시간) ▲와인 법규(20시간) ▲와인 서비스(60시간) ▲와인의 상품화(35시간) ▲샤토 및 레스토랑 방문(30시간) ▲시음(60시간) ▲와인 저장창고 관리법(40시간) 등으로 구성된다.
수업이 없는 기간에도 와인 공부는 계속 된다. 레스토랑에서 실습하며 현장 경험을 쌓는 사람도 있고, 삼삼오오 팀을 이뤄 샤토를 찾아가기도 한다.
지난 9월 소믈리에 과정에 입학한 김은경(29)씨는 “수업이 없는 시간에 실습 나갈 파리의 레스토랑을 정해놓았다”고 말했다. 지난 5월 소믈리에 과정을 마치고 M.C 소믈리에 시험까지 합격한 류미진(29)씨는 “수업이 없을 때는 여러 명이 팀을 짜서 보르도는 물론 부르고뉴, 샹파뉴, 알자스 등 프랑스 전역의 와인 산지를 방문하면서 생생한 와인 공부를 한 것이니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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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믈리에 과정은 9월에 시작해이듬해 5월에 끝난다. |
강의는 프랑스어로 진행된다. 와인과 관련된 용어는 프랑스어로 된 게 특히 많다. 그러니 한국에서 미리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오든지 프랑스에 와서 어학연수부터 해야 한다.
카파의 소믈리에 과정에 지원하는 한국 학생은 소믈리에 시험을 목표로 하는 사람도 있고, 프랑스 와인에 눈떠 외식산업에서 새로운 분야를 일궈보겠다는 기대로 지망하는 사람도 있다.
롯데호텔에서 3년을 넘게 근무하다가 올 초 프랑스로 와인 유학을 온 이미경(25)씨는 내년 6월에 있을 소믈리에 시험을 준비 중이다. 이씨는 “프랑스 소믈리에 자격증을 딴 뒤에도 호텔 경영과 와인을 좀더 깊이있게 공부해서 전문성을 쌓아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부모님이 부산에서 한식당을 운영한다는 김지수(29)씨는 가업을 새롭게 발전시켜 보고 싶어 프랑스로 요리 유학을 왔다고 했다. 김씨는 “리옹에서 요리 과정을 마치고 나니 요리와 와인을 함께 공부해야겠다는 필요성이 느껴져 이곳 소믈리에 과정에 입학하게 됐다”고 말했다.
카파의 소믈리에 과정을 마치고 프랑스 정부가 실시하는 M.C 소믈리에 시험에 응시하려면 일정한 자격이 필요하다. 레스토랑에서의 현장 경험이 3년 이상 있어야 한다. 물론 한국에서 일한 경력도 인정이 된다.
"보르도 지방의 샤토 247곳이 우리의 스폰서. 와인 생산부터 유통까지 현장 학습이 가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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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크 쇼세 교장 |
프랑크 쇼세 교장은 프랑스 와인의 중심지 보르도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을 카파의 최대 경쟁력으로 꼽았다.
“보르도의 메독 지방에 있는 크뤼 부르주아(Cru Bourgeois)급 샤토 247개가 우리의 스폰서입니다. 이들 샤토를 방문해 현장 학습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매력 포인트지요. 게다가 프랑스에서 가장 와인산업이 발달한 보르도에서 와인 생산부터 유통에 이르는 산업 전체를 조망할 수 있으니 이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이점입니다.”
쇼세씨는 보르도 2대학에서 양조학을 전공하고, 보르도에서 10년, 부르고뉴에서 5년 넘게 와인산업에 종사했다. 이 전문성을 토대로 카파 포르마시옹을 설립했다.
“프랑스에서도 소믈리에의 역할이 보다 다양해지고 있어요. 예전에 소믈리에는 무조건 레스토랑에서만 일했지만, 요즘은 프랑스에서 배출되는 소믈리에 인력의 절반 정도만 레스토랑에서 일합니다. 나머지는 와인 전문숍이나 인터넷 와인 사이트 등 와인과 관련한 새 직종에 종사하지요.”
지난 10월 4일 카파를 방문했을 때 총 22명의 소믈리에 과정 수강생 중 절반인 11명이 한국인이었다. 중국인 3명, 일본인 2명을 포함해 아시아 출신이 16명. 나머지 6명 중에 1명은 콜롬비아에서 왔고 5명만 프랑스인이었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 일본도, 중국도 아닌 유독 한국 사람이 소믈리에를 많이 지망하는 이유는 뭘까? 쇼세 교장은 “한국 와인시장의 특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은 이미 와인시장이 성숙 단계에 접어들어 소믈리에 같은 와인 전문인력이 넘쳐납니다. 정반대로 중국은 아직 와인 붐이 일지 않았지요. 한국은 막 와인시장이 커가는 ‘와인 신흥국’이어서 와인 인력에 대한 수요가 높지요.”
설립 당시만 해도 카파는 프랑스 사람들을 겨냥해 소믈리에 과정을 개설했다. 하지만 프랑스 와인 소비가 줄고, 이에 따라 소믈리에에 대한 수요도 주춤해지면서 10년 전부터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프랑스에서 소믈리에 교육을 받고 싶어도 공교육 중심의 인력 양성 시스템 때문에 외국인이 쉽사리 접근하기 힘든 틈새를 겨냥, 해외 수요를 개척한 것이다.
현재 한국의 와인나라아카데미와 자매학교 결연을 한 것을 비롯해 러시아, 멕시코의 와인 관련 기관과도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또 중국의 상하이ㆍ홍콩, 싱가포르 등과도 자매결연을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