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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람 개 비
종순(林鐘順)은 거실의 소파에 앉아 유치원에 갈 다섯 살 된 딸 수련(秀蓮)의 머리를 빗겨 주고 있었다. 같은 시각 정원으로 나갔던 남편 승모(白承模)는 스트레칭 후에 가벼운 아침운동을 했다. 그런 다음 대문 앞에 떨어져 있던 조간신문을 집어 들고, 안으로 들어오면서 딸에게 말했다.
“아이고 우리 공주님, 벌써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까지 곱게 빗고 계시네.”
그는 딸 수련의 볼에다 뽀뽀를 한 다음 소파 위로 몸을 실으며 신문을 펼쳐 들었다. 여기까지는 오늘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는 개미쳇바퀴 돌아가듯 정해져 있는 일상(日常)의 반복이었다. 일면기사를 읽은 다음 페이지를 넘기던 백승모의 시선이 사회면의 한 기사에서 고정되면서 그의 동공(瞳孔)이 확대된 것이 여느 날과 다른 전조(前兆)였다.
“여보, 여기 이 기사 좀 봐. 영화실업(榮華實業) 경리과 김향배(金香陪)씨 투신자살, 영화실업 경리과라면 바로 당신이 다니는 곳 아니오?”
"뭐, 뭐라고요? 김행배씨가 자살을 했다고요!"
“15층 아파트 베렌다에서 뛰어내렸다는데…….”
“세상에…….”
종순은 둔기로 후두부(後頭部)를 강타당한 듯 한 세찬 충격을 느꼈다. 이어 마치 몸이 회오리바람의 돌풍에 휩싸인 것 같은 환각에 빠져 들었다. 그녀는 소파의 팔걸이를 붙들고 안간힘을 썼지만 몸뚱이가 붕 떠오르는 것을 제어(制御)할 수가 없었다. 이내 땅바닥 위로 내던져지는 것 같은 통증이 엄습해 왔다. 종순의 얼굴색은 핏기가 싹 가신 것처럼 창백해졌다. 어금니를 깨무는 그녀를 지켜보던 남편이 지나가는 말처럼 던졌다.
“당신이 잘 아는 사람이오?”
그러나 그 말에는 환부를 도려내는데 사용하는 메스의 날카로움을 숨겨두고 있었다.
“잘 아다마다요.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한 동료인데요.”
동료라지만 마음을 털어놓고 흉금 없이 지내다보면 특별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단순한 동료 이상은 아니란 말이지?”
“무슨 뜻이에요?”
“그 사람이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당신이 너무 충격을 받는 것 같아서 말이야. 동료도 동료 나름 아닐까. 그저 서로 알고 지내는 정도일 수도 있고, 속마음을 털어놓고 지낼 만큼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되는데…….?”
“아는 사람이 죽었다는데 놀라는 게 당연하지 놀라지 않는 게 당연하단 말이에요?"
“정도가 좀 지나친 것 같았어.”
“우리 수련이도 옆에서 듣고 있어요. 이런 식의 대화는 교육상 좋지 않아요.”
종순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아빠와 엄마를 번갈아 바라보며 호기심을 표명하고 있는 딸을 데리고 사라졌다. 쌩하는 찬바람이 인 것으로 볼 때 아내는 단단히 화를 낸 것이었다. 승모는 자신이 아내를 모욕했을지도 모른다는 자책(自責)을 했다. 어느 모로 보나 정숙한 아내에게 남편의 눈을 속이면서 외간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배포가 있다고는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내가 다른 남자를 필요로 할만큼 자신들의 부부관계가 부실 투성이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해보니 예상치를 웃돌았던 아내의 반응에는 확실히 묵과(黙過)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오해를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여 백승모 임종순 부부에게 엉뚱한 오해의 단초를 제공했던 김향배 자살 사건은 종순뿐만 아니라 회사 사람들 모두에게 깊은 충격을 안겨 주었다. 김향배는 회사 공금을 횡령한 것으로 밝혀져서 그 동안 경찰의 조사를 받아오던 중이었다. 그러나 동료들은 김향배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데 대해 의견을 같이 했다.
일손을 놓고 주인 잃은 빈 테이블을 심란하게 바라보던 종순이 말했다.
“생전 거짓말도 하지 않고 누구를 속일 것 같지도 않은 사람인데 어쩌다 공금을 횡령하고 자살까지 한 거래요?"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속은 모른다잖아."
그러자 김향배의 옆자리를 사용하고 있는 미스 김(金蕙林)이 더 이상 모른 척 하고 있을 수 없다고 여긴 것 같았다.
“김향배씨 부인이 난소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 중이었어요. 한 번 수술을 했었는데 재발해서 다시 수술을 해야 한다고 들었어요. 그 비용이 만만찮아서 무척 고민을 해 왔었어요. 작년에 돌아가신 김향배씨 부친도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잖아요."
"그려. 우환(憂患)이 도둑놈이라니까. 쥐꼬리만 한 월급 받아 가지고는 먹고 살면서 아이들 가르치는 것도 벅찬데, 거기다가 여러 사람 병원비까지 책임져야 했으니 사채를 쓸 수밖에 없었을 거야."
"빚 독촉에 시달리다 못해서 공금에다 손을 댄 거라는 얘긴데……."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는 방법을 택해서 값을 치룰 건 뭐야."
"사람이 고지식했잖아.”
이때 사장실에 불려갔던 안병욱(安炳炳) 부장이 나타나면서 낭패라는 듯 미간을 찌푸린 후에 입을 열었다.
“그 동안 김향배씨가 공금 횡령 혐의로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었던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설마 했는데 김향배씨가 공금을 횡령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그 책임을 느껴 스스로 목숨을 버렸습니다. 우리 사무실에서 이런 불상사(不祥事)가 생겨 유감천만입니다.”
안 부장은 이미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꺼내서 서론으로 삼은 다음 본론으로 옮겨 갔다.
“그런데 문제는 말입니다. 경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회사 자체 내에서 얼마든지 수습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경찰이 개입하고 김향배씨가 자살을 하게 됨으로써 사건은 덮어버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신문과 방송에서 마구 떠들어대니 회사의 명예가 여지없이 실추되고 말았습니다.”
안 부장의 입에서 이어질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불안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서 회사 내부의 일을 경찰이 알고 수사에 착수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종순이 안 부장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들 중에 누가 경찰에 밀고(密告)를 했기 때문에 경찰이 개입하게 된 거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경찰이 회사 내부 사정을 알았겠습니까?”
미스 김이 끼어들었다.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요?”
안 부장이 단정을 내렸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밀고자는 우리들 중에 있습니다. 사장님께서 그 밀고자를 반드시 찾아내라고 말씀하셨어요. 누구죠? 누가 그런 짓을 했습니까.”
안 부장은 일제히 입을 다문 부하 직원들을 하나하나 살펴 나갔고, 그의 시선이 스쳐갈 때 마다 사람들은 자라목처럼 움츠려 들었다. 밀고자의 색출은 며칠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진척이 없었다. 급기야 동료들 간에는 서로를 의심하는 불신 풍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종순은 어디를 가나 등 뒤에 자신에게 따라붙는 시선이 있는 것 같은 따가움을 느꼈다. 마침내 그녀는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십년 근속(勤續)을 하는 동안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어서 장부 정리에 관한 한 컴퓨터라는 말을 듣던 종순이 안 부장으로부터 오류를 지적받는 일이 생겼고, 화장실을 다니는 속도가 빈번해지기에 이르렀다. 며칠사이 그녀의 얼굴은 몰라 볼 정도로 수척해 졌다.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오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사표를 내던지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김향배의 자살 사건은 시간이 경과할 수록 그녀를 극도의 불안과 초조로움 속으로 몰아갔다. 중압감(重壓感)을 견디기 힘든 때문이리라. 오후가 되면 그녀의 어깨는 엿가락처럼 축 늘어진다. 금요일에 퇴근을 하다가 종순은 선글라스를 낀 사내가 버스 정류장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녀가 버스를 탈 때 그도 함께 버스에 올랐다. 그녀가 내리는 정류장에서 그도 함께 내렸다. 그녀는 선글라스의 사내가 자신을 미행한다고 여겼다. 애써 태연한 척 걸아가고 있었지만 구멍이 일시에 열린 듯 온 몸에서 땀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부리나케 그녀의 집이 있는 골목을 향해 달려갔다. 거기까지 따라왔던 사내는 그녀를 지나쳐서 멀어져 갔다. 대문 안으로 뛰어든 종순의 옷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벗자마자 샤워도 하지 않고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잠에 의해 깊이 침잠(沈潛)되었던 그녀의 의식은 바람개비 꿈과 더불어 되살아났다.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안 부장의 아파트 거실에 고여 있던 적요(寂寥)를 깼다. 이복희(李福姬) 여사는 침실에서 나오며 벽에 걸려 있는 괘종시계를 쳐다보았다. 시침(時針)은 10시를, 분침(分針)은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0시 40분이면 남편이 술자리가 길어져서 늦을 것 같다는 말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걸 시간이었다. 그래서 이복희 여사는 무심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가 기습을 당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이쪽의 신분을 확인했음에도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말했다.
“안병욱 부장님은 지금 김혜림이라는 부하 직원과 함께 강남호텔 나이트클럽에 있는데, 부장님은 그 호텔의 1234호를 예약해 놓은 상태입니다. 술자리가 끝나면 안 부장님과 김혜림씨는 1234호실로 가서 2시간 쯤 같이 시간을 보낼 거예요.”
자연 이복희 여사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튄다.
“당신 누구에요? 누군데 이 따위 전회를 하는 거죠?”
“믿을 수 없다는 말투신데, 분명한 것은 제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이 사실을 밝히지 않고 은폐한다면 여러 사람을 기만(欺瞞)하는 것이 된다는 판단이 들어 그 동안 고민하다가 알려 드리는 쪽으로 마음을 바꾼 것인데 …….제 말을 믿던 믿지 않던 그것은 전적으로 사모님의 자유에요. 알려드리는 것으로써 더 이상 배덕행위를 방조(傍助) 내지 은폐하고 있다는 죄책감에서 제가 해방되면 그만이니까요.”
최근 몇 달 동안 남편은 동창을 만났다, 회사 동료 중에 누가 이사를 가 집들이를 하는데 갔었다는 따위의 이유를 들이 대면서 일찍 귀가하지 않았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도 거의 매주 돌ㆍ회갑ㆍ결혼ㆍ장례식 따위가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그러니 부부가 합궁(合宮)한 것이 언제인지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다. 잠지리가 소원(疎遠)해 질 나이가 되었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다른 이유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이복희 여사는 익명의 제보자가 있지도 않은 허위 사실을 떠벌려 남편을 모함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외출복을 챙겨 입는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평상복(平常服) 차림 그대로 아파트를 나서는 그녀의 눈에서는 파란 불꽃이 튀었다.
밀고 전화의 주인공은 안 부장의 동향(動向)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 시간에 분명 안 부장은 미스 김과 강남호텔 나이트클럽에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양주병은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두 사람이 취기가 도도해 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안 부장이 혀 꼬부라진 소리를 냈다.
“미스 김 생각엔 경찰에 김향배의 비위사실을 밀고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
“우리 사무실에 그럴 만한 사람이 누가 있어요.”
미스 김의 목소리에는 비음(鼻音)이 많이 섞여 있었다.
“그래도 분명히 우리 사무실에 있는 사람 중에 누가 그랬어.”
“최소한 부장님과 저만은 밀고자가 아닌 게 분명하잖아요.”
“나야 아니지만 미스 김은 알 수 없지.”
“어머머 저도 분명히 아니에요. 부장님은 어떤지 몰라도.”
“아니 지금 우리가 서로를 불신하고 있는 건가?”
“그러니까 그런 골치 아픈 문제는 그냥 덮어 두잔 말이에요.”
“알았어요. 우리도 춤이나 한번 출까, 미스 김?”
“좋죠.”
플로어로 나온 두 사람은 함께 어울려 스텝을 밟아 갔다. 안 부장이 미스 김의 얼굴을 은근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마주 보던 미스 김이 시선을 빗기면서 안 부장의 품으로 깊숙이 얼굴을 묻었다. 미스 김을 감싸 안고 턴을 하기 위해 돌아서다가 아내의 하얗게 질린 얼굴과 딱 마주친 안 부장은 황급히 미스 김을 잡았던 팔을 풀며 말했다.
“아니 여보, 언제 왔어?”
미스 김도 소스라칠 듯 놀랐다. 이복희 여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소리 지르지도 않았다. 주먹을 불끈 쥐자 혈관을 타고 분류(噴流)가 솟구치며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그녀는 애써 태연하게 보이도록 신경을 집중 시켰다. 그녀는 바람개비처럼 빙그르 돌아섰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인파에 뒤섞여 지향 없이 걸어가다가 택시를 집어탔다.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남산으로 가달라는 주문을 했다.
어째서 갑자기 남산엘 오고 싶었던 것일까. 남산에서 내려다 본 서울의 야경은 현란했다. 그러나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현란함은 그녀에게 소외감을 강요하고 있었다. 지금의 남산은 그녀에게 소외감을 강요하고 있지만 남산은 남편과의 사랑이 시작되었던 잊지 못할 추억의 장소였다.
그게 언제였던가. 대학을 졸업하기 몇 달 전이었으니까 4학년 마지막 학기의 어느 가을날의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낙조(落照)가 붉게 물든 단풍 위로 떨어지던 때 충무로 쪽에서 남산으로 걸어 올라왔던 두 사람은 네온이 밀려오는 어둠을 몰아내며 명멸(明滅)하기 시작할 때까지 그곳에 함께 머물러 있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復學)한 남자는 눈에 들어오는 한곳을 가리키며 말했었다.
“우리도 저기 어디쯤에다 우리들만의 보금자리를 만듭시다.”
두 사람은 다 같이 시골에서 대학을 다니기 위해 서울로 유학을 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공부를 마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뿌리를 내리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같았다. 안병욱은 그녀에게 우직하지만 미련하지 않고 나름대로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그녀는 남산을 내려오기 전에 그가 원하는 대로 그에게 입술을 허락했었다. 그것은 함께 만들 탑의 주춧돌을 놓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그녀는 그 장구한 세월동안 하나하나 돌을 다듬어 탑을 쌓았다고 생각했었다. 두 사람이 힘을 합해 바람이 불어도 절대 무너지지 않을 웅장한 탑을 쌓았다고 여겼었는데, 이제 보니 탑의 기단(基壇)이 해체된 것도 모르고 있었던 셈이었다. 주춧돌이 빠졌는데 탑신(塔身)이 온전하게 서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진지한 자세로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용서할 수 있을까? 용서한다면 부도덕을 묵인하는 격이 될 것이다. 그녀는 도리질을 했다. 가정을 이룬 이래 단 한 번도 남편을 속여 본 일이 없는 그녀의 양심은 배신을 용납하는 타협안을 수용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혼자되는 것이 두렵다고 하여 배덕(背德) 행위를 용납하는 것은 비겁한 인생 패배주의자들이나 취할 행동 같았다. 그녀는 남편과 헤어지기로 결정한 다음 남산을 내려왔다.
이복희 여사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거실의 다탁 위에 놓여있는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집에서 담배를 피워도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 수 있도록 받들어 모시며 기를 살려 주려했었는데, 그 모두가 다 도루아미타불이었다
안 부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과 내가 처음 만나 교제를 시작해서 결혼을 한 것이 이십 년이 넘었지?”
“많은 날을 같이 지내다 보니까 권태로워졌다는 건가요?”
“그런 뜻이 아니야. 그 정도면 우린 서로를 너무 잘 아는 친구가 될 수 있어. 그래. 부부보다 친구의 입장에서 내 얘기를 들어 줘요.”
“편리하군요. 아내로서는 못하겠지만 친구로서는 이해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뜻인가요?”
“이해 못해 줄 것도 없어. 미스 김과 나는 당신이 생각하듯 그런 사이는 아냐.”
“변명하면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어림없어요.”
“진실이야. 미스 김이 나를 따랐고 나도 미스 김을 상사로서 아껴요.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에서 잠시 어울렸던 것뿐이오.”
“요컨대 서로 사랑하지만 그렇게 마음으로 사랑한 것뿐이란 말씀이죠?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만 사랑했다고 해도 문제가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에요.”
“오해의 여지는 있지만 이 정도는 흔히 있는 일이야.”
“무조건 잡이 떼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럼 강남호텔 1234호실은 뭣 하러 예약해 두었던 거죠?”
“안 되겠군. 우리 당분간 냉각기를 가집시다. 마음이 가라앉은 다음에 차분히 얘기하기로 해요.”
“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당신 곁을 떠나 드릴 테니까 부실 애정은 정리하기로 해요.”
“여보!”
“날 밝으면 짐 정리해 가지고 갈 테니 그리 아세요. 이혼 서류 만들어서 연락주면 도장은 찍어 드릴 게요.”
“말도 안 돼. 그러지 말고 그거나 알려 주구려. 누구요? 누가 당신에게 나와 미스 김이 함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소?”
“지금 그런 게 문제에요?”
“우리 사무실 사람 중에 누가 밀고를 한 거지? 그 사람을 알아내야 하는 건 중요한 문제야.”
그러나 그 전화의 주인공에 대해서 실상 이복희 여사도 정확히 아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안 부장에게는 익명의 전화 제보자가 징죄해야 할 대상일지라도 자신에게는 몰랐던 것을 알려준 고마운 진실의 전달자일 뿐이었다. 이복희 여사는 남편이 듣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하여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천명했던 대로 이튿날 친정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영화실업의 이성규(李尙奎) 사장이 안 부장을 그의 집무실로 부른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경과했을 때였다. 안 부장이 사장실로 들어갔을 때 이상규 사장은 뒷짐을 지고 창가에 서 있었다. 돌아서면서 그가 말했다.
“안 부장, 나는 이렇게 생각하오.”
차분한 목소리였다.
“지금 보다 더 나은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가장 기본이 되는 요건이 약속이라고.”
사장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안 부장은 침을 꼴깍 삼켰다.
“남편이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가정은 파괴됩니다.”
“무슨 뜻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안 부장은 무언중에 부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것을 회사와 약속했어요. 그것을 믿고 회사는 안 부장에서 월급을 준 것입니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그걸 지금 나한테 묻고 있는 겁니까?”
집무용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서 의자에 앉은 다음 이상규 사장의 말은 계속됐다.
“자신이 생각해 보면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소?”
“저로서는……?”
“이것 보세요! 그렇잖아도 안 부장의 부하 직원 중 한 사람이 공금을 횡령하고 무책임하게 목숨을 내던져서 사회적인 물의를 빚었는데 부장으로서 자숙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이게 무슨 경거망동(輕擧妄動)이요. 딸처럼 어린 미스 김과 나이트클럽에 같이 갔었다면서요? 사람들이 이런 부적절한 관계를 뭐라고 부르는지 압니까?”
“……”
“당사자들은 로맨스라고 해두고 싶겠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불륜(不倫)이라고 합니다.”
그 문제가 이런 식으로까지 비화(飛火)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기습을 당한 안 부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걷혔다.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曰可曰否)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문제로 부인과 별거를 하게 됐다고요?”
변명할 말이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약속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 못지않게 내가 중요시 하는 게 책임입니다.”
결국 안 부장은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습니다.”
“처음엔 사표를 받을까도 했지만 안 부장이 그 동안 회사에 기여한 공로를 감안해서 대기 발령의 조처를 취할까 합니다.”
“……”
“그렇지만 회사를 위해 한 일이 별로 없는 미스 김까지 감싸줄 수는 없어요. 사무실로 돌아가는 즉시 미스 김은 안 부장 손으로 직접 사표를 받으세요. 맹랑한 것 같으니라고!”
“모든 걸 달게 감수하겠습니다. 다만 어떤 경위로 그 사실을 사장님께서 알게 되셨는지 그 점만은 저도 알고 싶군요. 자살한 김향배씨의 비위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던 자와 동일인의 소행인가요?”
“나도 밀고자(密告者)가 되란 말이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그것으로 얘기는 끝났다.
안 부장은 돌아섰고,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막 도어의 핸들을 돌리려는데 이상규 사장의 말이 등 뒤에서 날아왔다.
“실은 나도 모르고 있어요. 익명의 전화만 받았을 뿐이니까.”
어떤 소설이었던가?
제목도 작가도 안 부장의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안 부장의 뇌리에 그 소설의 어느 한 대목만은 판화(版畵)처럼 박혀 있는 것이 있었다.
배경이 6ㆍ25 때였고, 서울이 인공 치하에 있을 당시였다. 공산주의자들의 사무실인 내무서가 폭파당한다. 그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는 내무서원 앞에 한 사내가 찾아왔다.
- 선생들이 찾고 있는 범인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 그것이 참말이오. 동무?
- 그렇습니다.
- 그 자가 누군지 날래 말하기요, 동무?
- 말씀드리지요.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저의 집 식구가 모두 여덟인데 벌써 삼 일째 굶고 있습니다. 쌀 한 가마니만 아니 보리쌀이라도 좋습니다. 한 가마니만 주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 좋소.
결국 사내는 보리쌀 한 가마니를 받고 내무서원을 인도했다. 골목의 어귀에 다다른 사내가 그 골목 안으로 등을 보이며 사라져가고 있는 사람을 향해 손가락을 내민다.
- 바로 저 사람입니다.
내무서원은 사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범인을 잡아다 총살시킨다. 손가락질 하나로 사람을 죽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던 대목이었다. 소설에서 밀고자는 보리쌀 한 가마니를 위해 손가락질을 했었다. 참혹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연민을 느끼게 했던 대목이었다.
반드시 목적이 있기 때문에 밀고를 한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김향배씨가 죽음으로써 결원(缺員)된 자리는 아직까지 보충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밀고자는 김향배씨가 자살까지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고, 파면되는 정도에서 그칠 것이라고 예상했었을 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가 유고(有故)되는 것으로 반사적인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생기면 그를 밀고자로 의심해 볼 수 있을 텐데 현재까지는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 진실은 오리무중(五里霧中)에 빠져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안 부장이 대기발령을 받은 것과 관련해서도 이렇다 할 심증(心證)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후임자(後任者)는 삼 년 전부터 뉴욕의 지사에서 근무를 해오고 있는 사람으로 내정(內定) 됐는데, 아직까지 귀국도 하지 않고 있는 그가, 해외에 머물면서 일련의 행각(行脚)을 연출했으리라고 여길 수는 없었다. .
김향배씨의 비위 사실을 경찰에 밀고했던 사건을 편의상 제1의 사건이라 칭하고 안 부장의 스캔들에 관하여 그의 부인에게 밀고한 것을 제2의 사건, 사장에게 알린 것은 제3의 사건이라고 칭해 보기로 하자. 그 제1의 사건과 제2, 제3의 사건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 것 같아 그 부분에 대해 면밀하게 검토를 해보았지만 끝내 확증을 잡지는 못했다. 범인이 영화실업 안에 있고 그것도 자신의 주변인물 중 누구라는 심증은 가지만 그게 누군지 알아낼 수는 없었다. 동일 인물의 소행이라는 결정적인 단서도 없었다.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여 범인을 색출하는 방법을 쓸 수도 없었다. 안 부장은 진상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울분을 삭히려고 애쓰다가 귀국한 후임자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해 줄 수밖에 없었다.
바람개비는 밀폐된 진공의 공간에 놓여있는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종순이 손을 내밀어 그것을 주어 든 다음 팔을 휘두르자 바람개비는 처음 빙그르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서서히 돌아가는 속도가 빨라지고, 그에 따라 그녀의 심장도 덩달아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마침내 바람개비는 헬리콥터의 프로펠러와도 같이 무서운 굉음을 내며 돌아가게 되고 그럴 때쯤이면 종순의 가슴은 거의 파열하기 직전에 이른다.
종순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온몸에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어 있었다. 그녀는 목이 타는 갈증 때문에 땀을 닦는 것보다 침대 머리맡에 놓아 둔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마시는 일이 더 급했다. 식도를 통해 차가운 물이 몸 안으로 주입돼도 발동기처럼 뛰던 가슴의 쿵쿵 소리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왜 이런 바람개비 꿈을 반복해서 꾸는 것일까.
정작 그녀가 더 견딜 수 없어지는 것은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을 때였다. 의지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어떤 충동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자살이라면 그녀는 멈추지 못하고 결행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자살보다 더 무서운 충동이기에 그녀는 전율한다.
오늘도 바람개비 꿈을 꾼 다음 제어할 수는 없는 문제의 충동 속으로 빠져 들려는 중인데, 남편의 베개는 주인을 잃은 채 혼자 버려져 있었다. 자정을 넘어 새벽을 향해 가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남편이 귀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오늘이 그 달의 마지막 주 토요일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남편은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포우커를 치는데, 빨라야 새벽이고 어떨 때는 밤을 꼬박새우고 아침이 되어야 나타난다. 그것은 그녀가 허락해준 일이기도 했다.
남편 백승모에게는 죽고 못 살 만큼 가까이 지내는 네 명의 친구가 있다. 변호사 안종환씨, 대학교수 김호영씨. 그리고 정신분석의인 정재훈씨. 이들 네 사람은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그리고 이들은 그 고등학교 때부터 ‘네잎 클로우버’라는 이름의 모임을 가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들에게 수입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매달 일정액의 기금을 적립해 나갔고 언젠가는 그 돈을 통하여 ‘네잎 클로우버’ 장학금을 결성하겠다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 네 사람은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에 만난다. 그리고 회비를 내고, 술을 마시며, 그런 다음에는 회원 중의 어느 사람 집에서 포커를 치는 것이다. 노름의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한 달에 한 번 만나면 이내 헤어지기가 아쉬워 그런 식으로 밤을 보내며 얘기를 나누고 우의를 다져가는, 말하자면 불건전할 것이 없는 친목 도모와 같은 것이었다.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클로우버 부인들 쪽에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양해가 이루어져 있다. 결국 네 명 중 한 사람 집에 남편들이 모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달에는 ‘네잎 클로우버’들을 위해서 종순이가 술안주를 장만해 주었었고, 이번 달엔 변호사 안종환씨 집에서 모인다는 것도 알고 있는 일이다.
그 안종환씨 댁에 두 명의 파출소 순경들이 찾아온 것은 새벽 두 시의 일이었다.
“아니 지금이 어느 땐데 노름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네잎 클로우버’들로서는 당황하기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건 노름이 아니고 건전한 친목 도모 같은 겁니다.”
“판돈이 적잖군요. 이런 식으로 지폐가 오가면서 건전하다는 말을 하시다니 그게 말이 돼요. 파출소까지 같이 가셔야 하겠습니다.”
‘네잎 클로우버’들을 파출소로 연행해 온 순경들은 우선 백승모에게 물었다.
“직업이 뭐요?”
“조그마한 출판사를 하나 경영하고 있습니다.”
백승모에 이어서 안종환에게 물었다.
“선생의 직업은?”
“변호사올씨다.”
조서를 꾸미던 순경이 고개를 들었다.
“그걸 왜 진작 말씀 안 해주셨습니까?”
“신분을 이용해서 사태를 모면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노름을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112로 신고 전화가 들어 왔기 때문에 출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신분석의 정재훈씨가 물었다.
“신고 전화라구요?”
“그렇습니다.”
대학교수 김호영이 물었다.
“신고자가 누굽니까?”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떤 여자 분인데, 거액의 노름판이 벌어졌다고…… 혹시 사모님들 중에 누구 아닐까요?”
미상불 새벽 두 시에 ‘네잎 클로우버’가 안종환씨 집에 모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클로우버의 부인들뿐일 것이다. 그러나 그 부인들 중에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고 더군다나 거액의 노름판을 벌이고 있다는 식의 모함을 하는 허위 신고를 할 사람은 없다는 것이 클로우버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여기서 그들은 혼란을 느꼈다.
“여자라……”
“정말 알 수 없는 미스터리군.”
다분히 모함의 성격이 있는 신고 전화였지 노름판을 벌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파악한 파출소 쪽에서 ‘네잎 클로우버’들의 사회적 지명도를 고려하여 훈방 형식의 조처를 취했고, 파출소를 나온 그들은 근처의 해장국집으로 들어갔다.
“처음부터 누가 누구의 돈을 따자는 것도 아닌데 앞으론 이런 식의 방법 말고 다른 방법으로 시간을 보내야 되겠어.”
“다음 달엔 밤낚시를 가기로 하는 게 어떻겠어?”
“좋지.”
“그나저나 누굴까? 우리를 모함할 만한 여자가 없잖아……”
다시 그 얘기로 돌아온다.
“당장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만한 사람이 없으니까 그 문제는 덮어두기로 하지.”
“그래.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지도 모르니까.”
결국 그들은 궁금증을 풀지 못한 채 해장국을 먹은 다음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백승모가 집으로 들어왔을 때 종순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내의 잠든 모습을 관찰해 보기는 처음 있는 일이다. 원래 살집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자세히 보니 얼굴이 수척하고 전체적으로 야위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되도록 무심했다는 사실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감을 느끼며 아내의 이마에 젖은 입술을 갖다 대본다.
종순이 눈을 뜨며 말했다.
“어머 언제 오셨어요?”
“방금.”
“깨우시지 않구요.”
“달게 자는 걸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
“재미있게 노셨어요?”
“재미있기는커녕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지 뭐야. 지금 파출소에서 오는 길이라구.”
“네? 아니 왜요?"
“누가 112 신고를 했어. 우리가 노름판을 벌였다고.”
“누가 그랬을까요?”
“신고자가 여자라는 것밖에 아는 것이 없어. 설마 당신은 아니겠지?”
“말도 안 돼요. 제가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잖아요.”
“그건 그래. 아무튼 미스터리긴 한데 당장은 알 수 없는 일이야. 그 문제는 덮어 두고 한숨 잡시다. 한숨 자고 일어나는 대로 오늘은 모처럼 우리 수련이 데리고 고궁이라도 같이 갈까?”
“출근해야 되는데 어쩌죠?”
“일요일이잖아?”
“말도 마세요. 우리 안부장님이 대기 발령 조처를 당하고 새로운 부장님이 오셨어요. 브리이핑 관계로 준비할 일이 많아요.”
“안부장이 왜?”
“처음엔 사표를 내라고까지 할 정도였는데 대기 발령 조처로 완화시켰다던데요 뭐.”
“글쎄 왜?”
“부하직원인 미스 김과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누군가 사장에게 밀고를 한 거예요.”
“가만! 당신 동료였던 김향배씨 말야. 그 사람이 어떤 비위를 저지르고 있었는데 누군가 그 사실을 경찰에 밀고했고 그래서 수사를 받던 중에 자살을 했었다고 했지?”
“네.”
바로 이 순간이었다. 백승모의 뇌리에 아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의 그런 밀고 사건과 ‘네잎 클로우버’ 사건 신고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섬광처럼 떠오른 것은.
그 신고자가 여자라는데 대해 다시 생각이 미쳤다. 여자며 클로우버들의 동향을 알 수 있는 사람이면 그가 클로우버들의 부인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된다. 그리고 클로우버들의 부인 중에 영화실업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회사에 근무하는 아내 종순밖에 더 있겠는가.
그러나 백승모는 아내를 믿고 싶었다. 믿고 싶은데도 자꾸만 그 범인이 아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편의상 클로우버 사건은 제3의 사건이라 칭해 두기로 하자.
백승모가 제1의 사건, 제2의 사건, 제3의 사건, 이 세 사건의 진상을 밝혀 보기로 한 것은 그러니까 아내를 믿고 싶은 마음과 그 믿음을 방해하는 의혹 사이에서 갈등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단순한 오해라면 오해라는 사실을 해소함으로써만이 변함없는 신뢰감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시경 소속의 경제 사범 전담 형사인 김형사, 그가 거액의 공금을 유용했던 김향배씨의 비위 사실을 수사했던 형사였다.
백승모는 어렵지 않게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김향배씨가 자살해 버리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됐죠. 죽은 사람을 입건시켜 처벌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자살과 더불어 수사는 종결됐습니다.”
큰 사건을 맡았다가 맥이 탁 빠져 버렸다는 아쉬움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한 말투였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처음에 어떻게 알고 그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했느냐하는 점입니다.”
“신고를 받았습니다.”
“그 신고자의 신원을 알 수 있을까요?”
“익명의 전화 제보였기 때문에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모릅니다.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땐 김 향배씨를 모함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죠. 반신반의하며 일단 그를 만나 수사를 진행해 보니 괜한 모함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습니다. 그것이 막 밝혀지는 단계에서 자살을……”
“제가 알고 싶은 것은 그 신고자에 관한 부분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 신분을 밝히지 않았었다니까요.”
“최소한 남잔지 여잔지는 알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야 물론이죠. 여자분이었습니다.”
그 신고자가 여자였다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김형사와 헤어진 백승모는 그 길로 아내가 다니는 영화실업의 이상규 사장을 찾아갔다.
이상규 사장을 만나 알아낸 것도 안부장의 스캔들에 관하여 제보를 해준 전화 목소리의 주인공이 여자였다는 사실이었다. 여자라는 외에 더 이상 아는 것은 없다는 것도 동일했다.
최소한 세 사건이 모두 여자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건 확인됐지만 그 확인이 아내에 대한 의혹을 더욱 짙게 만들 뿐이었다.
만약 그 의혹이 사실이라면……하고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아내는 그런 짓을 했었던 것일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3의 사건이 있은 지 일주일이 경과한 일요일 아침에 백승모는 아내와 거실의 응접세트에 마주 앉아 있었다.
“여보, 당신도 알고 있는 일이지만 당신과 내 주변에서 일련의 이해할 수 없는 밀고 사건들이 있었어. 그 동안 그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려 했으나 그것이 여자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더군.”
일단 말을 끊고 종순의 표정을 살폈다. 아내의 얼굴에는 비밀을 들킨데 대한 낭패감 같은 것이 나타나 있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난 그것이 당신에 의해 저질러진 것들일 것이라는 의혹을 가지게 됐어. 당신이 당신 입으로 말해줄 수 없겠어? 그렇지 않다, 아니면 맞다 라고. 만약 당신이 그랬다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한 건지……”
그러나 종순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당장 펄쩍뛰며 부정을 하지 않는다는 게 곧 긍정을 의미하는 것만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무겁게 내려 앉았다. 그것을 깬 것은 현관에서 들려온 초인종소리였다.
문을 열자 한 사내가 신분증 수첩을 열어 보였다. 그것을 들여다본 후 백승모가 물었다.
“형사분께서 무슨 일로 오셨죠?”
“여기가 임종순씨 댁 맞습니까?”
“저기 있는 제 아내가 찾으시는 사람입니다만……”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들어오시죠.”
세 사람이 응접세트에 함께 앉았다.
심형사가 말했다.
“육 개월 전에 이 근처에서 한 어린이가 교통사고를 당한 일이 있는데 기억하십니까?”
“아 예. 동네에서 났던 사건이니까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고를 낸 범인이 뺑소니를 쳤다고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동안 백방으로 수사를 했지만 범인을 아직 못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뺑소니 차량의 주인이 임종순씨라는 신고 전화가 들어왔습니다.”
“네에!”
“어떤 여자분으로부터 그런 전화를 받고 모함을 하기 위해 그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신원을 밝히지 않았거든요. 그러나 일단 신고가 들어 온 이상 찾아뵙지 않을 수 없어서……”
“신고 전화를 한 사람이 여자였단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부인께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런 사실이 없습니까?”
종순이 대답했다.
“오늘 같은 날이 올 줄 알았어요. 허위 신고가 아니에요.”
경악하여 눈을 크게 뜨는 백승모에게 종순이 말했다.
“그 동안 얼마나 불안했는지 몰라요. 제가 그랬어요. 이렇게 되니 차라리 홀가분하군요. 달게 받겠어요. 당신과 수련이에겐 정말 미안해요.”
아내가 경찰에 연행되어 가자 뒤늦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몸이 부쩍 야윈 것이라든가 잠을 자다가 가끔 악몽을 꾸던 모습 등. 그 동안 말도 못하고 혼자 속으로 애태웠을 정경이 그를 안타깝게 한다.
모든 걸 자신에게 솔직히 털어놨다면 하는 유감의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됐을 때 남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었겠지.
아내가 밀고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공연한 오해를 했었던 점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금할 길이 없었다.
종순이 구속되자 클로우버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백승모가 한숨을 쉬었다.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네. 아내가 그런 곤경에 처해 있었는 줄은.”
변호사 안종환이 말했다.
“진작 모든 걸 솔직히 얘기했으면 내가 도움이 돼 드렸을 텐데.”
대학교수 김호영이 말했다.
“지금 이 상태에서도 자네 도움이 필요해.”
백승모가 말했다.
“차에 다친 어린아이 말야. 바람개비를 가지고 놀고 있었던 모양이야. 바람개비를 가지고 노는데 정신이 팔려 차가 오는 줄도 모르고 횡단보도로 뛰어들었던 거지. 아내가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변호사 안종환이 다시 말했다.
“그 동안 내가 경찰에 들려서 알아보니까 그 사고 어린이가 가지고 놀았던 바람개비, 그걸 아주머니가 주어다가 장롱 속에 감추어 두었다더군.”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정신분석의 정재훈이 말했다.
“가만. 승모 네 와이프가 사고를 내고 달아날 때 바람개비를 가지고 갔었다고?”
“그랬다는군.그 결정적인 순간에 하필이면 바람개비 따위를 주어다 장롱 속에 감추어 두었었는 게 이해가 안 돼.”
확실히 이상한 점이 있다. 라고 정신분석의 정재훈은 생각했다.
대화는 신원을 밝히지 않은 밀고자에 관한 것으로 옮겨갔다. 누가 무엇 때문에 일련의 밀고 행위를 저지르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점을 두고 여러 각도에서검토해 봤지만 의문만이 쌓일 뿐이었다. 그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그 대화에 끼어 들지 않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정신분석의정재훈이 말했다.
“확실히 이상해.”
“아니 뭐가?”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바람개비를 주어다 감추어 두었었다는 게 말이야. 그건 승모 네 와이프에게 있어 바람개비가 다른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얘긴데……”
모두 정재훈을 주목했다.
“주엇인가가 있어.”
안종환에게 말했다.
“내가 승모 와이프를 면담해 보고 싶은데 네가 자리 좀 만들어 줘야겠다.”
변호사 안종환의 주선으로 정신분석의 정재훈은 종순과 마주 앉을 수가 있었다.
유난히 큰 종순의 눈은 움푹 꺼져 있었고, 전체적으로 초췌하고 야윈 중에서도 그 움푹 꺼진 눈만은 파란 광채를 발했다. 그 눈을 보면서 정재훈은 어떤 확신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재훈이 나직이 말했다.
“아주머니, 저를 의사로 생각하지 마시고 남편의 친구로 생각하세요. 자 우리 허심탄회하게 말씀 좀 나눌까요?”
종순이 고개를 푹 숙인다.
“우선 바람개비에 대해서 묻고 싶습니다. 아주머니께선 왜 어린애가 가지고 놀던 바람개비를 주웠던 거죠?”
“사고를 낸 것은 바람개비 때문이에요. 그 아이가 제 차로 달려들었을 때 아이는 안 보이고 바람개비만이 눈에 들어 왔었어요.”
“바람개비는 아주머니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져주는 무엇입니다.”
“네, 그래요.”
“그게 뭐죠?”
종순은 주춤했다. 그리고 이내 무슨 생각엔가 골똘히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한 말은 정재훈을 실망시키는 것이었다.
“모르겠어요.”
“좋습니다. 그럼 그 얘긴 덮어 두고 꿈에 대하여 얘기 나누어 볼까요?”
종순이 다시 흠칫하고 놀랐다.
“어떻게 제 꿈에 대해서 알고 계시죠?”
정신분석의가 환자를 면담할 때 꿈에 대하여 물어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절차였고 그래서 물은 것인데, 그것에 대한 종순의 반응이 정재훈의 흥미를 바짝 돋우었다.
“지금 아주머니께선 제 꿈에 대해 어떻게 아셨느냐고 했죠? 그건 아주머니께서 제 꿈이라고 칭할 만큼 같은 종류의 꿈을 여러 번 반복해서 꾸고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종순은 문득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누구에겐가 그 꿈에 대한 얘기를 한번쯤은 털어놓고 싶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 상대가 정신분석의라는데 어떤 안도감 같은 것이 왔다.
“네, 그래요.전 언제나 바람개비 꿈을 반복해서 꿉니다. 어째서 전 그런 꿈을 반복해서 꾸는 걸까요?”
역시 바람개비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바람개비는 우선 어린이들 장난감이죠. 그 꿈은 아주머님의 유아 시절의 어떤 사건과 관계가 있을 겁니다. 기억을 한번 잘 더듬어 보십시오.”
이때 종순의 뇌리에 바람개비 하나가 극단적인 슬로우모우션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종순이 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어린 종순에게 그녀의 어머니가 바람개비를 주면서 밖에 가지고 나가 놀도록 종용했었다. 그러나 그 바람개비는 웬일인지 돌아가지를 않았다.
밖에 나갔던 종순이 집으로 들어오면 말했었다.
“엄마 이거 고장 났나 봐.”
그러나 종순은 이내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 방에서 어머니와 어떤 사내가 함께 웃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어린 종순이로서도 그 웃음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눈에 전화기가 들어 왔다. 직장에 있는 아버지에게 알려야 한다, 알려야 한다, 하는 내면의 외침 소리가 일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 직장의 전화번호를 몰랐다. 그로부터 얼마 후 종순의 어머니는 웃음소리의 사내와 어디론가로 사라졌고, 그 충격으로 알콜 중독자가 된 아버지 밑에서 커야 했다.
그 아버지도 삼 년 만에 세상을 떴다.
“그러니까 아주머니께선 아주머니의 아버지께 그 사실을 알렸었더라면 극단적인 파멸을 막았을 것이라는 자책감을 느꼈던 겁니다.”
“네, 그랬던 것 같아요.”
“세월이 흐르면서 어린 시절의 일은 잊게 됩니다. 그러나 잠재의식 어느 구석엔가 그것은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으로써 미리스터리의 진상은 밝혀진 것이었다. 모든 밀고자의 주인공은 바로 종순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배신당한 상처, 그때 받은 충격과 노여움이 잠재의식 속에 잠을 자고 있다가 그것이 바람개비 꿈을 꾸는 날이면 살아나, 현재에 와서 남을 속이고 있거나 배덕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주변사람들을 고발하도록 충동질했던 것이다.
정신분석의 정재훈의 말에 백승모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좋아. 회사에서 일어났던 밀고소동 그런 거 다 내 아내의 소행이었다고 하세.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자신이 고발했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자네 와이프는 바람개비 꿈을 꾸고 나면 말이야. 부정한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무서운 충동에 사로잡히게 되는 거야. 그건 자기 자신까지라도 고발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그런 것일세.”
일단 말을 끊었다가 정재훈은 변호사 안종환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깊은 상처 정도가 아니라 이건 정신이 무척 아픈 심각한 상태의 병일세.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네.”
안종환이 말했다.
“병보석을 받으려면 자네의 진단서가 필요해.”
첫댓글 장장 몇 달 동안 연재하셨던 제도에 비하면 짧은 글이지만 단편이라도 마치 예리한 단도처럼 제 가슴에 와서 박히네요. 마음이 병든 여자의 심리를 바람개비에 대비시켜 묘사하신 솜씨가 과연 프로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어머니된 사람의 무책임한 바람을 이처럼 아프게 묘사해 낼 수도 있는 것이군요. 평생 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에 비하면 가정 파탄은 약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의식의 안쪽에 갈라앉아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조명한 수준이 이 정도면 제 생각에는 문학상감입니다.
스님의 글에 점점 재미를 붙여가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누구에게나 어린시절의 깊은 상처는 내면에 잠재되어있는거 같습니다..그런걸 생각하면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마음의 상처가 되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될것같습니다...저를 뒤돌아보건데 무척이나 엄하셨던 아버지께서 어머니께 큰소리치시는 것만 보아도 가슴이 오그라들었던 기억이 나니까요...종순의 어린시절의 상처가 저토록 깊은 병에 들게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