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서편하늘에 먹구름이 끼는가 싶더니 바람이 쌩하고 세차게 불어 고수부지 벼랑에 선 나무가지의 팔꿈치를 비틀어 댄다.
쳇! 또 비님이 다녀가시려나?
요즘 비는 시작하기만 하면 이삼일이다.
이젠 아예 우산장사 편에 서기로 작정을 했나보다.
노을 지는 다리 아래 강변엔 오십대 남자가 물끄러미 강물을 쳐다보고 있다. 문득 지난해 가을 칠십대 노인이 강물에 뛰어들어 서서히 물속으로 잠겨 숨져가는 것을 바라다 본 적이 있었다. 그 때 우리 가족이라면 당연히 달려들어 있는 힘을 다하여 구조해 낼 수 있었으리라는 확신이 들어서 다리를 건너 다닐 때마다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었다. 그땐 처음부터 경찰관이 있었었고, 늦게나마 소방관이 출동했었지만 상황판단을 면밀히 하는 것 같았다. 예전에 두번인가 물에 뛰어든 사람을 구조(만류?)한 적이 있었지만 솔직히 삶의 정의를 모르는 나 자신이 그 사람의 삶에 끼어든 것에 대한 어색함도 없지는 않았었다. 아무튼 물속으로 사라져 가는 노인의 모습을 바라다 보았던 그 시간은 너무나도 길게 느껴지는 기다림이었었다.
기다린다는 것.
흔히들 기다림은 그리움이고, 기다림엔 설렘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기다림이 남아있는 사람은 행복하다지만, 그 기다림은 어떻게 정의를 내릴 것인가?
초여름 푸른 잎새 사이를 비집고 올라 온 빨간 튜립 꽃핀 장독대 옆에 앉아 흘러가는 먹구름을 쳐다보는 등굽은 노파의 쇠약한 기다림, 고추잠자리 맴도는 뒷산 언덕에서 부지런히 풀 뜯는 소떼들 사이로 산 끝자락 너머의 지평선을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는 소년의 가름 없는 기다림은 과연 의미있는 기다림일까?
한편으로 기다림은 춥고 외롭다.
때론 불확실하고, 절망적이며 허무하다.
기다림의 대상은 영영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고, 또한 기다림은 전쟁고아의 눈물 같이 서럽고 기약없어 보인다.
60년만에야 핀다는 대나무 꽃, 3,000년에 피어난다는 전설의 꽃 우담바라, 그리고 혹독한 추위를 겪어며 고산에서 피어나는 백두산의 기생 꽃이나 알프스를 노래하게 하는 에델바이스 꽃의 그 길고 혹독한 기다림의 의미는 또한 무엇을 뜻함일까?
사람들의 기다림의 고도는 무엇일까?
돈, 건강, 행복, 그보다 우선 한 출세?
저마다 기다림이 다를 수 있을 진대, 어줍은 기다림은 오히려 허무함과 야속함으로 변하여 달겨들지도 모른다.
사고가 다르다고 비난하거나, 원하는 방향의 정치를 않는다고 분개해 할 일이 아니다. 속성마다 나름의 기다림에 대한 의미를 품고 있으리라 생각해 버리면 그만이다.
누군가는 죽음의 마지막 단계를 수용이라고 했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이라는 피를 토하고 싶은 어려운 과정을 거쳐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체념하고 수용하며 막연히도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기다림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숙명적이란 생각이 든다.
산악인에게 있어서 기다림은 우엇일까?
속인의 그러한 기다림.
부의 축적, 노후의 해외등반, 풍요로운 전원생황...
그러나 결토 그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겠지만 그 것에 한정 지우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도 진정으로 산을 좋아한다면 그들의 고도는 염원의 산이라고 강조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고도(산)에 대한 기다림.
그 것에 대한 기다림은 없애 버려야 옳은 것이다. 그들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림은 너무나 가슴 조이고 숨가뿌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산을 향한 기다림. 산악인은 그 기다림의 고리를 끊고 망설임 없이 나아가야 한다.
그들의 고도 그 염원의 산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 「고도를 기다리며」는 아일랜드의 작가 사무엘 베게트의 희곡작품 제목으로 고도는 그 무엇이라고도 정의 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