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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전홍준
시인마다 선호하는 시적 소재가 있습니다. 저는 정치세태적인 소재에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연원을 거슬려 올라가면 칠십년 대 민중시에 닿습니다. 그때 《창작과 비평》에 실린 시편들은, 여태껏 제가 규정했던 시의 개념을 재고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특히, 열악한 감옥에서 창작된 김남주 선생의 작품들은, 당시의 억압된 정치 상황아래에서 카타르시스를 제공했습니다. 제련공이 퍼올리는 쇳물 같다고나 할까요, 그런 시편들은 사회변혁의 촉매역할도 했습니다. 물론 제 심장도 강타했습니다.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시가 대세인 오늘날, 철지난 민중시를 잡고 있다고 타박할지 몰라도, 뒤틀린 한반도가 고르게 펴지는 날까지는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모순의 총체는 분단입니다. 이 거대한 악을 타파하는데, 문학도 일조해야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통일의 선한 날이 왔을 때, 비록 삼류지만 분단문학의 모서리에서 통합을 고민했던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정치세태적인 소재는 구호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선동적인 구호나 대자보는 문학이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풍자하되, 예술성을 갖춘 시! 솔직히, 공부와 사유가 부족해 아직 경계에서 고민만할 따름입니다.
소설가 백민석은, 대통령이 탄핵되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최순실은 박근혜의 기생충이고, 박근혜는 박정희 신화의 기생충이고, 박정희 신화는 한국사회의 기생충이다.’ 물론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음미해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배우자를 고를 때 상대방 집안을 봅니다. 부모가 살아 계시고, 형제간 사랑이 있고,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으면 좋은 집안이고 배우자라 합니다. 그런 환경에서 원만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나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배우자를 고를 때도 이를진데, 하물며 한 나라의 지도자를 선택하는데,,, 아시다시피 탄핵된 대통령은 부모가 피살되었습니다. 누구나 그 지경이 되면 이성적 판단은 마비되고 분노와 증오로 인해, 괴물이 될 공산이 큽니다. 왜, 총을 맞을 수밖에 없었을까하는 이성적 판단보다, 그녀중심을 차지하는 사고체계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대가가 이런 것인가 하는 원망이 지배적일 것입니다.
유일하게 파면된 대통령은
평가가 분분한 아버지 박정희를
국가와 민족 앞에
한 치 사심 없이 헌신했다고 항변한다.
동의한다.
오직, 그만이 종신 청와대 주인일 때.
-졸시 「진실」 전문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발상, 민주주의의 암인 독재입니다. 이 경전을 신봉했던 지구상의 많은 독재자의 말로는, 총칼에 더러운 피를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물이나 사람에겐 양면성이 있습니다. 평가가 극단적인 박정희도 경제를 부흥한 공과, 민주주의를 말살한 과도 분명 있습니다. 탄핵정국으로 나라가 이 지경이 된 원인은, 아버지신화의 한쪽만 보고, 자격 없는 그 딸을 선택한 청맹과니인 우리들 책임입니다. 기업과 유착한 것도 죄지만, 구성원의 동의없이 미국의 요구에 굴복해 사드를 도입한 것과, 엄연히 생존해 있는 당사자들과 의논도 않고, 위안부문제를 불가역적이라는 해괴망측한 용어를 동원하여 해소한 것과, 민족평화의 어린 싹인 개성공단을 폐쇄한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죄악입니다. 성공한 자들 중에는 사이코패스가 많습니다. 현재 진행되는 재판을 볼 때, 그녀도 사이코패스 같습니다. 사실관계가 드러났는데도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항변합니다. 또한 전혀 죄책감도 느끼지 않습니다. 부하에게 핑계를 되고 호도하는 것을 볼 때, 지켜보는 국민들이 차라리 자괴감이 들 지경입니다. 최순실이 박근혜의 기생충이라 하지만, 원조 거머리는 그녀의 아비, 최태민 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순사로 출발해, 해방 후 이름을 일곱 번이나 바꾸며 살아온 역정을 볼 때, 그는 남한 기득권층의 전형적인 모리배입니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을 위해 동포를 쥐어짜다가, 한국전쟁 후에는 열렬한 반공투사로 변신해, 새로운 외세인 미국에 빌붙어 디룩디룩 배를 채운 모리배들의 표본! 지구상 많은 나라가 식민의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독립 후 부역했던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잡은 나라는, 남한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모리배들에게 미국은, 또 다른 일본이며 생명의 은인입니다. 박근혜의 종아리에 붙어 피를 빨아 한 시대를 풍미한 처세술은, 연구대상이고 훌륭한 문학적 소재라 생각합니다.
이 땅 구성원들의 촛불염원으로 새 정부가 꾸러져, 적폐청산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물론 부도덕한 과거정권이 저지른 적폐를 지칭하지만, 근원적인 적폐는 분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부딪치는 한반도를, 혹자는 나루터에 비유하기도합니다. 물산이 움직이는 나루터는 역동적이지만, 왈패들이 설치는 싸움터이기도 합니다. 식민지를 거쳐 분단과 전쟁을 치른 후 근 칠십년간, 북한과 미국이 벌이는 적대적인 소모전에, 한반도구성원들은 불안이라는 이불을 덮고 삽니다. 그리고 현재 핵을 두고 벌이는 두 나라의 치킨게임에, 이 땅의 긴장 밀도는 비등점에 이르고 있습니다. 주인인 우리가 막을 수 없다는 현실! 통분할 따름입니다. 무기체계로 권위 있는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가 발표한 각 나라 핵탄두 보유량은, 러시아 7000개, 미국 6800개, 프랑스 300개, 중국 270개, 영국 215개, 파키스탄 130-140개, 인도 120-130개, 이스라엘 80개, 북한 10-20개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권위 있는 연구소에서 발표한 것임으로, 수량은 추정치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북한 핵의 존재는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발사하는 순간 공멸하기 때문에, 핵은 방어무기(a defensive weapon)로 분류하지만, 가공할 무기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북한 핵만 위험한 것이 아니고, 아프가니스탄이나 시리아에 수시로 미사일을 쏘아대는 미국 핵도 위험하고, 대립하고 있는 인도와 파키스탄 핵도 위험하며, 팔레스타인을 억압하는 호전적인 이스라엘 핵은 더 위험합니다. 북한은 칠십년 대 이전에는 남한보다 국방비지출이 높았지만, 팔십년 대부터는 역전되었고, 2016년 남한의 국방비는 대략 40조, 북한은 1조 남짓 된다고 합니다. 재래식 무기로는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북한은, 핵개발에 국가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북한에게 핵은, 생존을 보장받는 신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북한은 미사일에다 장착할 수 있는 소형 핵탄두를 완성하기 위하여, 실험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거나, 미사일을 한방 발사하면 미국은 UN에서 북한을 제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상대를 향해 날 선 비난을 합니다. 한국전쟁 후, 쭉 지속되는 적대적인 공생관계입니다. 북한은 한국전쟁 후 맺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고, 국교를 정상화하자’고 미국에게 끊임없이 요구해 왔습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클린턴 대통령 임기 말에, 정상화 단계까지 갔다가 호전적인 부시정권으로 넘어가면서 무산되었습니다. 결렬되고 나서 두 나라 정상회담을 주선했던 김대중 대통령은 “클린턴이 평양에 갔다면 한반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한반도의 운명이 바뀌는 그 순간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맞습니다. 그때 북미 간 평화협정이 맺어졌다면 한반도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상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리지 않습니까? 외세에 의해 갈라져 형제를 증오하는 지지리도 복도 없는 땅! 대북 강경파인, 그레이엄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은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수천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더라도, 단지 한반도에서 희생은 끝날 것입니다, 여기는 희생이 없습니다.”라고 트럼프대통령이 자신에게 말했다고, 미국 N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이 말속에 미국이 한반도를 대하는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미친 트럼프의 의중에는, 한반도구성원들은 모두 투명인간이고 존재자체가 없습니다. 이 땅 소위 보수를 자처하는 자들은, 미국이 북한 핵시설을 선제공격하기를 은근히 부추깁니다. 그리고 수구언론들은 문재인정부의 평화정책을 폄훼합니다. 그들에게 묻습니다. 미국이 공격하면 기다리고 있었다고, 고맙다고, 북한이 고분고분 당해줄까요? 부랄 두 쪽밖에 없는 북한은 버릴 것은 목숨밖에 없지만, 당신들이 누리는 이 풍요는 지켜질 수 있을까요? 혹, 북한의 미사일이 남한의 핵발전소에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가능만 하다면, 매일 종편방송에서 왈왈대는 살벌한 뉴스가 넌더리가 나서, 휴전선북쪽을 잘라 태평양으로 밀어버리든지, 아프리카 쪽으로 보내고 싶은 심정은, 저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전쟁은 남북한의 공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통령이 아무리 반대해도 미국은 군사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와 국방력을 가졌지만, 국가의 주권인 군령권을 외국에 맡긴 나라가 감수해야 할 소름끼치는 현실입니다. 한국은 10년간 미국이 시키는 대로 36조어치의 무기를 수입했습니다. 세계최고라 합니다. 미국의 군산복합체도 북한이 망하는 것은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평화가 오거나 북한이라는 적이 사라지면, 무기시장도 없어질 테니까요. 오직, 남북대치 속에서만 땅 짚고 헤엄치는 무기시장이 있습니다.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만 돈이 있습니다. 한반도 갈등의 애물단지인 사드의 가격이 10조나 된다는데, 철수하지 않으면 결국 한국이 지불하게 될 것입니다. 사드를 생산하는 죽음의 상인인 〈록히드 마틴〉사는, 냉혹하게 계산기를 두드리며 뒤에서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것입니다. 현재와 같은 분단체제가 이익이 되는 무리와 국가가 있습니다. 빨갱이란 전매특허를 휘두르며, 불안을 조성해 입지를 이어가는 남쪽의 반민족세력과, 사회주의라 하면서 2500만 구성원들을 굶주리게 하는 북쪽의 일당 독재세력과, 미국이라는 외세입니다. 이 세력은 고착화되었고 강고하여 물리치기가 난망합니다. 그렇다고 평화체제가 와야 이익이 되는 한반도의 주인인 남북의 구성원들이, 이 지긋지긋한 상태를 언제까지나 참아야하겠습니까? 한반도구성원들의 이익은 남북의 평화이고, 궁극적으로는 통일입니다. 동맹국이라 규정하면서 핵 때문에 위협을 느끼는 남한에다, 가당치도 않는 FTA재협상카드를 꺼내, 도리어 우리를 압박하는 영원한 혈맹 아메리카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국의 기침 한방에 홀딱 벗고 내어주었고, 그리고 나올 것이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장사꾼 트럼프는, 노골적으로 압력을 가합니다. 종전의 미국정권이 예의를 차려 압박했다면, 트럼프는 무지막지하다는 차이밖에 없습니다. 아메리카가 우리의 이익을 지켜주고 생명을 보호해줄까요? 외세에 의존하는 순간 예속이 되고 맙니다.
빈손으로 고향에 내려와 마당을 쓴다.
칠십 평생, 아버지의 외로움과 노여움이
지푸라기 되어 날린다.
당신의 온전한 목숨인 전답!
그 질긴 뿌리를 빚쟁이에게 넘겨주고
부랑하는 자식을 무연히 내려다보시는 아버지
고개 들어 안산을 보면
그는 나를 모른다고 돌아눕고
묘택과 수의까지 장만해 둔
한 점 가벼운 이 봄
마음속에만 있던 고향이
두엄 썩는 냄새로 다가오고
마당가에 돋아나는 잡풀의 마음이
아버지의 평생일까.
- 졸시 「마당을 쓸면서」 전문 (제1시집)
1911년생인 아버지는 결혼하여 분가할 때, 천수답 한마지기와 초가 한 채를 받았습니다. 아무리 궁리해도 살 방도가 없던 열여덟 식민지청년은, 빈처를 데리고 일본으로 들어갔습니다. 객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막노동밖에 없었습니다. 공장에서 자투리 잠을 자가며 6개월 동안 주야로 일했고,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사할린에서 막노동도 했습니다. 그러다 건축오야지의 눈에 들어, 현장의 함바를 맡아하면서 돈을 조금 모았습니다. 그 돈은 할아버지에게 보내져 전답이 되었습니다. 삼십년 대 말, 본격적으로 국제전에 뛰어든 일본도 경기가 어려워지자 아내와 1남2녀의 식솔을 이끌고 귀향했습니다. 고향에 와 농사를 짓던 어느 해, 할아버지와, 아내, 그리고 두 자식을 잃는 참척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당시는 수리시설이 부실하여 논마다 둠벙이 있었는데, 어른들이 모심기할 때 둠벙 옆에서 놀던 외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시름시름 아내가 죽고 젖먹이 어린 것도 죽었습니다. 남은 가족은 열 살 먹은 딸과 아버지였습니다. 일년 동안 술에 절어 방황하던 아버지는 폐인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정신을 차렸습니다. 서른네 살의 홀아비는 열여덟의 처녀를 맞아 또다시 논밭을 갈고 자식을 생산했습니다. 3남2여를 생산했으니 소출은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위로 두 딸을 두고 마흔세 살에 아들인 제가 태어 낳습니다. 지금은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농경사회의 유산인 ‘아들선호사상’으로, 독농가의 장남인 저는 다른 형제들 보다 혜택을 누렸습니다. 농번기에 형제들이 허리 아프게 모를 심을 때 못줄이나 잡고, 맛있는 반찬은 아버지와 겸상하며 독식했으며,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도시로 나와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주방기구를 생산하는 공장을 운영하다 부도를 내, 아버지의 전답을 날렸습니다. 농민에게 토지는 생명의 다른 이름이며, 긍지이자, 역사이고, 살아가는 의미입니다. 아버지의 생애를 날려버린 패륜! 지금 아버지는 잔디이불을 덮고 저를 무연히 내려다보십니다.
서리 내린 들녘으로
월남에서 전사통지서가 날아왔다.
볏단을 묶다 혼절한 매곡 댁에게
눈시울이 붉은 마을의 감나무들이
일제히 이파리를 쏟아 내렸다.
남편은 한국전쟁에, 또 아들까지
겁나게 푸른 가을하늘!
농약을 마신 당숙모의 눈물이
지천에 아롱져 피어있었다.
-졸시 「구절초」 전문 (제2시집)
근 한 달을 자리보전한 매곡 댁은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사주에 액운이 끼어있어 당신이 살아있으면 막내도 죽는다.’고 무당이 말했습니다. 심신이 쇠약한 사람에게 내린 사형선고였습니다. 며칠 후 당숙모는 농약을 마셨습니다. 아낙들이 분개했지만 운명이라는 체념이 동네를 가라앉혔습니다. 더러운 무당 같으니라고! 가을이 쇠락해 가는 야산 둔덕, 당숙모의 혼령이 바람에 흔들립니다.
두 친구가 있었다.
나라가 군홧발에 지근지근 밟힐 때
한 친구는 최루탄 날리는 현장으로 떠나고
도서관 창문에서 밖을 내다보던 친구는 검사가 되었다.
피투성이 고문실에서 조국을 체득한 친구와
회초리로 조국을 호령한 친구,
훗날 둘은 반대의 노정으로 여의도에 입성했다.
미국은 형님, 북한은 타도할 적
북한은 형제, 미국은 극복해야 할 외세
한 치 오차 없는 저 평행선!
-졸시 「상생」 전문 (제3시집)
국회가 개원하면 으레 언론에서 인터뷰를 합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여-야 상생하여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말합니다. 민주화운동을 하다 고문당한 의원도, 반대로 고문에 가담했던 자들도 말입니다. 민족과 외세를 보는 관점이 극과극인 사람들! 사사건건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통일되지 않고는 해소될 수 없는 이 땅의 천형입니다.
안개 깔린 고속도로를 헤치고 딸을
수녀원에 데려다주었다.
아비가 가는 넓은 길을 마다하고
오솔길을 선택한 딸
반대도 하고 설득도 해 보았지만
이 길만이 자기가 행복하다는 말에
결국, 지고 말았다.
내가 뿌리내린 아수라의 세상은
영혼이 탁해도 편안하지만
그곳은 항상 빗질하고 닦아야 하는 곳
생명이란 곳간에서 끊임없이 부글거리는 욕망을
여린 기도가 물리칠 수 있을지...
딸을 보내고 한 주일
방문만 쳐다봐도, 신발장을 열어도
울컥울컥 올라오는 이 슬픔!
신은 참 야속하기도 하다
이십칠 년간이나 내 입에서 녹고 있던
사탕을 빼앗아 가버리다니
송아지를 팔고나면 며칠간 울어대는
어미 소같이
눈발 날리는 하늘을 향해
각혈 같은 울음만 토해낸다.
-졸시 「가슴에 빗금 하나 새긴다.」전문〔제4시집〕
결혼하고 얼마든지 종교생활을 할 수 있다는 우리 부부의 간청도, 이미 각오가 선 딸에게는 잔소리에 불과했습니다. 이년간의 싸움에 결국 지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자석보다 신의 자석이 더 강했나봅니다. 자라면서 한번도 속 썩인 적 없던 딸, 그런 딸이 마지막에 제게 각혈 같은 울음을 안겼습니다. 지금 그 딸은, 팔년 차의 수도자가 되어 서울 하고도 외진 성북동에서, 바람 빠진 축구공 같은 결손가정, 다문화가정의, 마음이 허한 아이들의 버팀목으로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전화선 저쪽 전지영수녀의 노곤하고 행복한 목소리가 들릴 때, 이제는 베란다 꽃들도 벙긋 몸을 엽니다. 아비가 가보지 못했던 미답의 길을 한 치 의심도 없이 뚜벅뚜벅 갑니다.
시마詩魔에 씐, 이십여 년 동안 이백여 편의 시로 네 권의 시집을 상재했습니다. 제 한계를 모르기 때문에, 부끄러움도 없이 세상에 물찌똥을 갈겼습니다. 길가 돌멩이만큼 흔한 시인들, 그중 한명으로 문학의 하향평준화에 기여했습니다. 하나같이 부실한 자식이지만, 그 중에 애착이 가는 네 편을 골라 나름대로 해석해봤습니다. 저는 주로 밤에 시를 씁니다. 시를 쓸 때는 술을 마십니다. 독주를 마시는데, 한 모금씩 마시다 보면 머리가 맑아지는 순간이 옵니다. 낚시찌에 입질이 온다고나 할까요, 그때 머릿속에 저장해 둔 모티브를 풀어냅니다. 초고가 완성될 무렵에는 대개 인사불성으로 취합니다. 아침에 읽어보면 시도 격앙되어 있습니다. 퇴고는 언어를 씹어 먹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신물이 날 때쯤 온전히 내 안에 똬리를 틉니다. 그래서 완성된 시편은 오랫동안 외우기도 합니다. 길을 걷거나 운전하다 음미해 보면, 가끔 찌릿찌릿하기도 합니다. 섹스의 오르가즘은 순간이지만, 시와 합궁하면 여운이 오래 갑니다. 저는 시로 밥벌이를 하지 않습니다. 시가 좋아서 혼자 생산하고 소비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감히 시인이라 생각지도 않습니다. 한 편 만들어지면, 대중이 보는 인터넷카페에 띄웁니다. 거의 잡지에 청탁이 없기도 하지만, 동업자만 보는 문학잡지보다는 대중이 접하는 카페가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를 좋아하는 다양한 독자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간혹, 공감한다는 댓글이 달리면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아직도 세속적인 욕망에 자유롭진 못하지만, 머릿속에는 시를 향한 짝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를 잡고 있는 날까지, 단 한 편이라도 공감 가는 작품을 생산하고 싶습니다. 헛된 욕망이라 비난해도, 그 결기만은 견지하고 싶습니다. 시의 연인이 되어 행복합니다. 제가 만족하고,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이 제 작업을 격려해 줍니다. 사는 날까지 제 속에 발효되고 있는 시를 퍼 낼 작정입니다.
*약력
전홍준, 경남 의령 출생, 2001년 자유문학, 「아비의 호수」외,
첫댓글 부산 작가사회 2017년 겨울호 작가조명의 전홍준의 작가산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