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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소설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다간 흔적이 무엇일까?
아마 이야기가 아닐까한다. 누구나 다 크고 작고 간 이야기를 남긴다. 남긴 이야기는 시간이 흐르며 잊혀질만한 것은 잊혀지고, 남을 만한 것은 남는다. 그리고 남을만한 것들 중 일부가 소설이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고소설은 선인들이 살고 간 흔적이요, 남을만한 것들 중 일부라 해도 좋다.
독자제위께서는 우리의 고소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혹 ‘옛날의(古)’라는 관형사가 붙었다는 이유만으로 멸시하거나 폄하하지는 않는지?
프랑스의 철학자·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대중과 대중문화, 미디어와 소비사회 이론으로 유명하다. 그는 사물을 물리적 실체로 보지 않고 기호로 파악한다. 그러니 내가 오늘 산 옷은 몸을 싸서 가리거나 보호하기 위한 피륙이 아닌, 이름 없는 중저가 브랜드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 없는 중저가 브랜드, 즉 내가 입은 옷은 그렇게 시장표 기호이기에 당연히 ‘○○○○○○’ 따위의 명품 브랜드(기호)를 착용한 이와는 차이(差異‘ difference)가 아닌 차별(差別,discrimination)을 생산한다. ‘차이’는 서로 같지 않고 다르다이고, ‘차별(差別)’은 둘 이상의 대상을 각각 등급이나 수준 따위를 두어서 구별하는 것을 말한다. 티코와 그랜저를 더 이상 교통가치가 아닌 빈부의 격차로 보는 것처럼, 혹 ‘이 글을 보는 독자들도 고소설과 현대소설을 차이가 아닌 차별로 보는 것은 아닌지?’하는 우문을 던지며,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다간 흔적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고소설古小說(Ancient Korean Novels)'의 재래적인 명칭은 소설小說․패설․패관․고설․신화․연의소설․전기(傳奇)․패관소설․패사․통속소설․언패(諺稗) 또는 이야기(얘기, 이약이)책이다. 특히 언패는 언문諺文으로 된 소설이라는 뜻으로서, 국문소설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또 고대소설․고전소설․구소설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현재는 고소설로 정착 되었다.
고소설은 학술상의 명칭으로는 ‘소설’이라고만 하면 된다. 하지만 갑오개혁(1894) 이후의 소설과 구별하기 위해서 주로 ‘고소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고소설이 실상 20세기 초까지 창작된 것으로 미루어 어느 한 시점을 못 박아 기준으로 할 수는 없을 듯하다.
우리의 소설 개념은 한자 문화권인 중국과 유사하다. 그렇기에 우리의 소설을 논함에 중국의 소설비평사를 먼저 참조할 필요가 있다.
현재 중국에서 최초로 ‘소설’이라는 이름이 보이는 것은 장주莊周(B.C. 약 369 ~289)의 장자莊子니 물경勿驚! 2000년도 훨씬 전이다. 장자에 보이는 소설이란 말은 임나라 공자公子가 큰 낚시로 커다란 고기를 잡아 어포魚脯를 만들었다는 이야기 다음에 나온다.
“이윽고 후세의 작은 재주로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서로 놀라워하며 그 이야기를 하였다. 무릇 가는 줄을 맨 낚싯대를 들고, 작은 도랑에 가서 붕어 같은 작은 고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이처럼 큰 고기를 잡기는 어렵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설을 꾸며서 높은 명예나 칭찬을 구하는 사람은 큰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임나라 공자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함께 세상을 경륜하기에는 역시 크게 부족하다(已而後世輇才諷說之徒 皆驚而相告也 夫揭竿累 趨灌瀆 守鯢鮒 其於得大魚難矣 飾小說以干縣令 其於大達亦遠矣 是以未嘗聞任氏之風俗 其不可與經於世亦遠矣).”
여기서 소설이란 ‘작은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지껄이는 이른바 큰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작은 이야기’ 정도로 볼 수 있다.
큰 깨달음이란, 논어論語의 「자장子張」 편에 나오는 소도小道와 상대되는 대도大道이다. 본래 ‘작은 도리小道’라는 것은 농사꾼이나 무당들의 도리를 말한다. 즉, 군자들이 말하는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 및 자연이나 사회 발전의 법칙으로서 도리와 상대되는 개념’ 쯤으로 이해해 봄직하다.
환담桓譚(B.C. 약 23 ~A.D. 50)은 또 소설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소설가의 부류는 자잘한 이야깃거리를 모으고, 가까운 곳에서 비유적인 이야기들을 취하여 짧은 책을 지은 것이다(若其小說家 合叢殘小語 近取譬論 以作短書).”
유언비어流言蜚語라고나 할까. ‘자질구레한 이야기’ 혹은 ‘작은 이야기’로 앝추보는 소설 개념이다. 소설의 태생은 이렇듯 영 ‘잡것 출신’이었다. 하지만 첨언添言컨대, 여기서 잡것 출신이란 어디까지나 겸사謙辭이다. 소설의 설명이 이렇다하는 것일 뿐, 오히려 소설은 ‘소설小說과 대설大說의 회통(會通:언뜻 보기에 서로 어긋나는 뜻이나 주장을 해석하여 조화롭게 함)’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중국 소설의 개념은 우리 고소설과 표리表裏관계이다. 그렇다고 직수입이란 소리는 아니다. 중국소설의 후광을 과도하게 들이댈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김부식金富軾(1075∼1151)의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26,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제10 ‘보장왕 하寶藏王 下’에 처음 보이니 “유공권의 ‘소설’에 말하기를(柳公權小說曰)”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공권柳公權(778∼865)은 중국 당나라 유명한 서예가이니 문헌에 소설이라는 용례가 보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고려 공민왕 때 고승高僧 경한景閑(1299~1375)의 법어 편명法語 篇名인 흥성사입원소설興聖寺入院小說이란 문헌에서 ‘소설’이란 용어가 보인다.
흔히들 이규보李奎報(1168 ~1241)의 백운소설白雲小說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소설이라는 명칭을 찾는다. 그러나 백운소설이 홍만종洪萬宗(1643 ~1725)의 시화총림詩話叢林이란 책에 실려 있는 점에 유의한다면, 최초의 소설이란 명칭은 이규보와 어울릴 수 없다.
이후 ‘소설’이란 명칭은 조선으로 들어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양성지梁誠之(1414 ~1482)의 글 등에서 보이니, 15세기이다.
세종실록 27년, 1445년의 기록을 보면, “옛 역사의 기록들을 골고루 모으고 소설의 글들까지 곁들여 뽑아서, …(徧掇舊史之錄 旁採小說之文, …)”라고 되어 있다.
이 글은 정인지 등이 세종에게 올린 글의 일부인데, 여기서 언급한 소설이란 용어가 우리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최초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한 소설이 어떠한 책을 말하는 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전후사를 통하여 추정하건대 여러 가지 잡다한 사실을 적은 ‘잡서류雜書類’정도일 것이다.
비교적 정확한 소설의 개념이 보이는 것은 서거정徐居正(1420 ~1488)이 1482년 간행한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에다 양성지梁誠之(1414 ~1482)가 쓴 「동국골계전서東國滑稽傳序」에서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경전과 사서는 본디 성군과 현명한 재상이 치국평천하한 도인 것이다. 패관소설의 경우도 또한 유자들이 문장으로 희롱한 것으로서 혹은 이것으로 견문을 넓히기도 하고 혹은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으니 모두 없앨 수 없는 것들이다. 옛 사서에 골계전이 있고 송 태종이 이방에게 명하여 태평광기를 지어 올리게 하였던 것도 그러한 뜻이었다. … 이제 골계전의 문장은 익제의 역옹패설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만세토록 유전하지 않겠는가(曰經曰史 固聖君賢相 所以治國平天下之道也 至於稗官小說 亦儒者 以文章爲劇 或資博聞 或因破閑 皆不可無者也 前史有滑稽傳 宋太宗命李昉撰太平廣記 卽此意也 … 今傳文 豈不與益齋稗說 永流傳於海東萬世也哉).”
여기서 ‘소설’이라 함은 태평광기太平廣記, 역옹패설櫟翁稗說, 그리고 이 글이 실린 태평한화골계전을 말한다. 비록 관습적慣習的인 용어로 쓴 것이지만, ‘유자들이 문장을 희롱’하여 지은 것으로 박문博聞을 돕고 혹은 파한破閑의 자료라는 소설의 거죽이 보인다.
우리 소설의 장적帳籍을 정리한 이는 18세기 학자인 통원通園 유만주兪晩柱(1755~1788)이다. 통원의 일기인 흠영欽英을 보면 그는 중국 문학사에 상당히 해박한 지식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점잔빼는 문집을 만들지 않고 그 속에 자신의 삶과 소설에 관한 비평적 견해를 담았다.
흠영이란 일기에는 소설에 대한 인식이 정확히 드러나 있다. 그는 우리 소설의 ‘출생증명서’를 이렇게 적바림해 놓았다.
“패관이라는 것은 자잘한 이야기를 잡다하게 기록하고 저속한 말을 은밀히 쓴 것이다. 혹 여러 전기(傳記:내용으로 미루어 傳奇일 듯) 가운데에서 신괴하고 황탄한 이상한 일을 취하여 진실을 바탕으로 허구를 꾸미고 많은 곡절을 만들어서 인정물태를 극진하게 표현하였으나 오직 그 마음과 입을 마음대로 놀리어 거리낌이 없다(夫稗官者 雜記小說 備錄俚言 或取諸傳記中 神荒不常之事 依眞鑿空 千曲萬折 以極乎人情物態 而惟其心口方行無忌).”
유만주의 소설 개념을 정리하자면, ‘여러 전기류傳奇類 가운데서 취하여서는 비속한 말로 진실에 바탕둔 허구를 꾸미되 세상 물정(人情物態)을 극진하게 표현하면서도 뜻이 거리낌이 없는 이야기’이다.
전기류에 대하여 ‘전기(傳奇)’는 중국 당대(唐代) 중기(7 ~9세기)에 발생한 소설의 명칭이다. 전기라는 말은 기(奇)를 전(傳)한다는 뜻이다. 육조시대(六朝時代)의 소설이 귀신(鬼神)․괴이(怪異)의 세계를 묘사하여 ‘지괴(志怪)'라고 일컬어진 데 대하여, 당나라 소설을 부른 명칭이다. 본래는 배형(裴銒)이 지은 전기(傳奇)라는 이름의 소설집이 있었는데, 이것이 그대로 장르 명으로 굳어진 것이다.
그리고 ‘진실을 바탕으로 허구를 꾸몄다(依眞鑿空)’는 것은 당대에도 이미 허구화된 이야기를 소설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을 말한다. 물론 이것은 현재까지도 소설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다.
그런데 유만주의 이 소설비평에서 예각화할 점은 ‘곡절을 만들어서 인정물태를 극진하게 표현(千曲萬折 以極乎人情物態)’했다는 발언이다. 소설이 허구적 창작물虛構的 創作物이라는 기본 인식과 함께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점을 주목하였기 때문이다.
이 말은 결코 예사로 넘길 일이 아니다. 이 인정물태란, 소설의 대상이란 측면에서 ‘일상생활의 묘사’나 ‘현실반영現實反映의 산물로서 소설’을 짐작케 하는 것으로 소설의 표본실標本室에 안치할 용어이기 때문이다.
슬몃 이야기를 돌려보자.
이렇게 본다면 유만주의 소설의 정의는 서양의 소위 노블(novel)이라는 개념과도 부분적으로나마 유사하지 않은가?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고소설에 서구 개념의 ‘소설’이라는 척도尺度를 대는 것은 우리 소설의 세계화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우리 소설 작품의 정당하지 못한 평가를 초래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서양 소설에 대한 경도傾倒는 ‘석새짚신에 구슬감기’처럼 격에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다. 현재의 소설비평 이론이 서양이론에 치우친 것이 사실이기에 하는 말이다.
따라서 나는 소설이라는 개념을 일차적으로 우리의 문헌에 근거하되, 서양의 소설 또한 간과하지 않는 생산적인 개념을 정립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 소설 연구의 기틀을 세운 김태준金台俊(1905 ~1947)도 “나는 예전 사람들의 율律하든 소설의 정의로서 예전 소설을 고찰하고 소설이 발달하여 온 행로行路를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소설이라는 명칭이 시대를 따라 개념槪念에 차差가 있다는 것이다.”라고 고민을 토로하였다.
김태준이 누구인가. 우리 고소설 연구의 첫 걸음을 뗀 이 아니던가. 필자 또한 선학자의 견해를 단초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통원 유만주의 소설 개념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소설의 정의를 정리한다.
‘소설이란 민간에 떠돌고 있는 신이(神異)한 이야기를 취하여 허구적(虛構的) 구성으로 인정물태(人情物態)를 총체적으로 드러낸 서사체(敍事體)이다.’
현실과 가상이란 길항拮抗(서로 버티어 대항함)의 접경지대이며, 소설은 그곳에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구체적 작품으로는 「온달전溫達傳」을 시원으로 하여 소설화 경향을 보이는 전傳․전기傳奇․한문단편漢文短篇․패설稗說․가전仮傳․필사본筆寫本 및 방각본坊刻本 소설 등과 같은 허구적 서사물을 지칭한다.
(2) 소설사 4대 사건
① 제1차 소설논쟁(유양잡조 사건:성종)
괴탄하고 불경스런 책이옵니다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공적인 기록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소설의 원론비평原論批評으로 조선전기에서 후기까지의 소설 이해의 자장이다. 우리의 소설사는 기본적으로 중국과 궤를 같이 하였다. 국경을 넘나드는 무역품으로서 소설은 공적인 절차를 거쳐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조는 유학이라는 견고한 패러다임이 문학에까지 강요와 굴종을 요구하였고 소설은 그 틈바구니를 비켜나야 하였다. 따라서 소설과 유교는 항상 긴장과 갈등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Political language is designed to make lies sound truthful and murder respectable, and to give an appearance of solidity to pure wind.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라는 필명으로 알려진 <동물농장>과 <1984>의 작가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 1903 ~ 1950)가 <정치와 영어 (Politics and English Language)>라는 글에서 한 말이다. 마치 작금의 한국정치판 언어 상황을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거짓을 참으로, 잘못을 훌륭한 일처럼 날조하고 있음을 현실처럼.
늘 정치계는 뒤숭숭하다.
그래 세간에는 언제나 ‘떡 해 먹을 세상’이라고들 수군덕거리는 소리뿐이다. 대통령 재임 중 탄핵을 당했던 노(盧)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임기를 마친지 불과 1년을 갓 넘어서는 끝내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대통령 재임 중, 탄핵은 그래도 양반이었던 셈이다. 탄핵을 당하였을 때, 대통령을 그만두었으면, 이 비극적인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제1차 소설논쟁에는 이 ‘정치’와 ‘탄핵’이 나온다. 오늘날 탄핵이야, 서구에서 유래된 탄핵(impeachment)의 번역어이지만, 우리의 선조정치인들에게도 ‘탄액’은 그리 먼 용어는 아니었다.
조선시대 전제왕권의 시대이니 저 시절 ‘탄핵(彈劾)’이란,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관원들이 그 당시의 정치나 행정에 관한 잘못과 관리의 비위를 들어 논박하던 일이었다.
이를 대론(臺論)·대탄(臺彈)이라고도 하는데, 곧잘 이 탄핵은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하였다.
우리 소설사의 제1차 소설논쟁은 바로 이 탄핵과 관련이 있다. 실상 『조선왕조실록』에는 탄핵이 수없이 많이 보인다. 대부분의 명분은 도덕적 해이를 질타하는 것이라 하지만, 소설과 관련된 것도 여러 차례 보이니 꼭 그러한 것만은 아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정치를 한다는 치들도 끊임없이 정치의 적을 시비, 배척하고 딴죽걸기를 일삼았다는 증거인 셈이다.
우리 소설사의 제1차 소설논쟁, 이것은 ‘괴탄불경지서’ 논쟁이다.
‘괴탄불경지서’는 정치의 파열음에서 비롯되었지만, 실상 조선조 내내 문인들이 그린 소설의 몽타주(montage)였다. 그래 “괴탄하고 불경스런 책이다(怪誕不經之書)”는 마치 전가보도처럼 조선조 내내 고소설을 박대하고 오라를 지우려 하던 비평어로 제법 의기가 드높았다. 조선시대 소설의 장에서는 늘 자그마한 전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소설을 공격하는 최전선에는 늘 ‘괴탄불경’이라는 비평어가 수식어처럼 따라붙었다.
이제 ‘괴탄불경怪誕不經’이란 말 줄기부터 걷어 올려보자.
본래 괴탄불경이란 용어는 『서전書傳』, 「우공禹貢」 주注에서 동혈同穴을 설명하는데 용례가 보인다. “새와 쥐가 함께 암놈과 수놈이 되어서 한 구멍에 처한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허탄하고 괴이하니 믿을 것이 못 된다(鳥鼠共爲雌雄 同穴而處 其說怪誕不經 不足信也).”는 말이 그것이다.
우리의 실록에서 처음으로 괴탄불경한 책으로 지목된 작품은 『신비집神秘集』이었다.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사관 김상직에게 명하여 충주서고의 서적을 가져다 바치게 하였는데 … 『신비집』․『책부원귀』 등의 책이었다. 또 명하였다. ‘『신비집』은 펴 보지 말고 따로 봉하여 올리라.’ 임금이 그 책을 보고 말하기를, ‘이 책에 실린 것은 모두 괴탄(怪誕)하고 불경(不經)한 말들이다.’ 하고 승지인 유사눌에게 명하여 이를 불사르게 하고, 그 나머지는 춘추관에 내려 간수하게 하였다.” 태종 12년 8월 7일(기미)
『신비집』이 괴탄하고 불경하다하며 불사르라고 하는 데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 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태종 17년(1417)의 기록을 보면 『신승전』이 ‘여러 괴탄한 중의 요망한 말과 궤이한 행적을 모은 책’임을 알 수 있다. “『신승전』이란 한나라 이래로 여러 괴탄한 중의 요망한 말과 궤이한 행적을 모은 것이요, …”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비집』 또한 『신승전神僧傳』과 유사한 소설류일 듯하다. 『신승전』은 신이한 중 208인의 전기를 기록한 책으로 명나라 태종이 몸소 만든 것인데, 한나라 마등摩騰에서부터 원나라 담파膽巴까지 승려들의 기이한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괴탄불경지서로 지칭한 『신비집』은 불사르라고 하였으나 괴탄한 중의 요망한 말과 괴이한 행적을 기록한 『신승전』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다. 오히려 세종 1년(1419)의 『실록』에는 『신승전』을 잘 간수하여 더럽히거나 훼손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신승전』이 분명히 괴탄한 중의 요망한 말과 궤이한 행적을 모은 것임에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으로 미루어 소설류에 대한 별다른 반응을 세종 때까지 보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괴탄불경지서’가 소설 논쟁으로 비화한 것은 성종(成宗, 1457~1494) 24년인 계축년 섣달 스무여드레 날이었다. 이것은 당시 집권층의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비롯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놈의 드잡이질하는 정치인들은 상대방을 뉘기 위하여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한 듯하다. 결말은 좀 싱겁지만, 우리 소설사에서는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니 자세히 짚어보자.
그것은 김심金諶(1445 ~1502)이 1493년 12월 28일 임금에게 올린 간단한 상소문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이극돈李克墩(1435 ~1503)과 이종준李宗準(? ~1499)이 『유양잡조酉陽雜俎』․『당송시화唐宋詩話』․『파한집破閑集』․『보한집補閑集』․『태평통재太平通載』 등을 인쇄하여 책을 펴내 임금에게 바쳤다. 그러자 성종이 이를 대궐 안에 간수토록 하고 김심 등에게 『당송시화』․『파한집』․『보한집』 등의 역대의 연호와 인물의 출처를 대략 알기 쉽게 풀이하여 바치라고 하였다.
피혐에 대하여 헌사(憲司)에서 논핵하는 사건에 관련된 벼슬아치가 벼슬에 나가는 것을 피하던 일. 혐의가 풀릴 때까지 벼슬에 나가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니 이번에는 모독을 당했다고 생각한 이극돈이 자기를 꺼리고 미워한다며 피혐避嫌하기를 청한다. 그런데 여기서 논쟁이 된 『당송시화』는 당나라와 송나라의 시에 관한 비평과 해설, 고증과 시인의 일화 따위를 단편적으로 기록한 책이니 소설과는 무관하다.
다만 『유양잡조』는 약간의 소설적인 내용을 지닌 책이었다.
『유양잡조』는 중국 당나라 때 단성식段成式(?~863)이 지은 책인데 이상한 사건,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도서圖書․의식衣食․풍습風習․인사人事 등 온갖 사항에 관한 것을 탁월한 문장으로 흥미있게 기술하였다. 당나라 때의 사회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되며, 또한 고증적인 내용은 문학이나 역사연구에서 중요한 자료이다.
그런데 이 책을 두고 김심 등이 주해하기를 거부한 이유는 이렇다.
“신 등은 제왕의 학문은 마땅히 경사에 마음을 두어 수신제가하고 치국평천하하는 요점과 치란과 득실의 가치를 강구할 뿐이고 이 밖의 것은 모두 치도에 무익하고 유학에 방해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극돈 등이 어찌 『유양잡조(酉陽雜俎)』와 『당송시화(唐宋詩話)』 등이 괴탄하고 불경한 말과 부화하고 극적인 말로 되었음을 알지 못하고 반드시 진상하는 것입니까? … 이와 같은 괴탄하고 희극적인 책은 전하께서 음란하고 방탕한 소리나 미색과 같이 멀리 해야 되고 내부에 비장하여 밤늦게 읽는 자료로 삼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청컨대 위의 여러 책을 외부의 장서로 넘겨주어 성상께서 심성을 기르는 공력에 보탬이 되게 하시고, 인신들이 아첨하는 길을 막으소서.” 성종 24년 12월 28일(무자)
음란하고 방탕한 소리(淫聲)나 미색美色. 소설을 배척하는 메카니즘(mechanism)으로서 꽤 힘깨나 썼던 용어들 아닌가. 이는 병리학적 징후를 들이대며 소설류를 질병으로 몰아붙이는 것에 다름 아니다.
몇 가지 문제점을 짚어보겠다.
첫째로 여기서 김심 등은 『유양잡조』 등이 ‘치도治道에 무익하고 성학聖學에 방해’가 된다라고 하여 그 한계를 분명하게 하였다. 즉 임금에게만 방해가 된다는 것이지 모두에게 그러하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게 무익하고 폐해가 크다면 모든 책을 수거하여 폐기하지 왜 ‘책을 외방에 내어 보내’ 시속을 흐리게 하려는 것인가?
둘째로 이러한 책을 간행하여 바치는 것이 ‘인신들이 아첨하는 길’인가?
셋째로 이 글에 대하여 성종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좀 길지만 이해를 위해 살펴보겠다.
“전교하기를, ‘그대들이 말한 바와 같이 『유양잡조』 등의 책이 괴탄하고 불경하다면 『국풍(國風)』과 『좌전(左傳)』에 실린 것들은 모두 순정한 것인가? 근래에 인쇄하여 반포한 『사문유취(事文類聚)』 또한 이와 같은 일들이 실려 있지 아니한가? 만약 임금이 이러한 책들을 보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고 말한다면, 단지 경서만 읽어야 마땅하다는 것인가?
이극돈은 이치를 아는 대신인데, 어떻게 불가함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였겠는가? 지난번에 유지가 경상감사로 있을 때, 「십점소(十漸疎: 위징(魏徵)이 당태종(唐太宗)에게 올린 10가지 경계의 글」를 병풍에 써서 바치니 의논하는 자들이 아첨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지금 말하는 것이 또 이와 같다. 내가 전일에 그대들에게 이 책들을 대강 주해하도록 명하였는데 그대들은 필시 주해하는 것을 꺼려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다. 이미 불가함을 알았다면 애초에 어찌 말하지 아니 하였는가?’ 하였다.” 성종 24년 12월 28일(무자)
왕배덕배 시비를 가리려드는 이 글을 보면 김심 등의 상소가 단지 소설 배척을 위해서만이 아니라는 요량이 분명하다.
위의 내용으로 보면 김심 등은 『유양잡조』가 괴탄불경의 서이기에 이극돈을 탄핵하였다고 강변하였다. 그러나 성종의 대답은 『사문유취事文類聚』 또한 괴탄불경의 서인데, 왜 『사문유취』를 인쇄 반포 할 때는 침묵을 지키다가 이제 『유양잡조』를 인쇄하여 책을 펴내니 이극돈을 탄핵하는 것이냐고 한다.
성종은 김심 등을 영 미심쩍다는 듯이 쳐다본다.
김심 등이 이극돈을 탄핵하는 저의를 분명히 의심하는 발언이다. 더구나 당시 널리 퍼져 있던 대표적인 괴탄불경의 서인 『태평광기』에 대해서는 왜 아무런 언급이 없느냐고 추궁까지 한다.
여기서 성종이 언급한 『사문유취』는 사전류로 성종의 발언처럼 『태평광기』와 같은 유로 볼 수는 없다. 『태평광기』는 송나라 태평흥국 2년에 이방李昉 등 12명이 왕명을 받고 만든 전기소설집으로 약 2000 여 편의 설화 · 패설 등이 수록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윤포묘지尹誧墓誌」에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12세기에 이미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윤포묘지」는 고려 의종 때의 인물인 황문통黃文通이 1154년에 지었다. 이 글에 윤포(1063 ~1154)가 금나라의 1146년에 「태평황기촬요시太平廣記撮要詩」를 지었다는 기록이 「윤포묘지」 (『조선금석총람』, 조선총독부, 1919, 370 ~371쪽.)에 보인다. 하지만 『유양잡저』와 『태평광기』는 내용상 별로 다른 것이 아니다.
더욱이 『태평광기』에 대해서는 세조는 물론 서거정․양성지․이윤보․성임 등의 학자들까지도 애독하였음이 실록에 그대로 보인다.
결국 김심 등이 이극돈을 탄핵한 것은, 당시의 정치 문제를 소설류로 빌미잡아 해결하려 하였다는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당시 이극돈은 훈구파勳舊派였고 김심 등은 이와 대립되는 사림파士林派였다. 사림파는 성종 9년 이후 홍문관弘文館이 새롭게 정비되며 왕성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성종 20년경부터 홍문관의 언관諺官기능의 강화와 함께 훈구파에 대한 견제를 본격화하게 되었다. 조사를 해보니 성종 21년에서 25년 사이의 연평균 언론 횟수는 409회이며, 이중 탄핵이 42.2%였다.
성종 20년(1489)경부터 연산군 무오사화(1498) 직전까지 약 10여 년 간 활동한 사림계 인물은 김심․권오복․김일손․유호인․최부․양희지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김종직을 위시로 한 김굉필․정여창․조위․유호인․표연말․이종준 등과 함께 성종 때 관계에 대거 진출하였으며, 도학적道學的인 유교정치를 실현하려는 이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극돈을 비롯한 훈구파와 반목이 심하였다.
특히 이 사건이 정치적 대립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있으니, 김종직의 문인으로 후일 무오사화戊午士禍/戊午史禍 때 사형 당한 사림의 이종준은, 이극돈과 달리 탄핵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이다. 성종에게 『유양잡조』 등의 책을 인간하여 올린 것은 이종준과 이극돈이 함께 한 일 아니던가. 무오사화는 조선 연산군 4년(1498)에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가 김종직 중심의 사림파에 대해서 일으킨 사화로, 『성종실록』에 실린 사초 「조의제문」을 트집 잡아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목을 베고, 김일손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을 죽이고 귀양 보냈다. 이 사건으로 이종준은 사형을 당하였다.
마지막으로 피혐避嫌하기를 청하는 이극돈의 말 가운데서도 이미 『유양잡조』는 보는 사람들이 널리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볼썽사나운 모습이지만, 이왕 꺼낸 문제니 조금만 더 살펴보자.
“이극돈이 와서 아뢰기를 “『태평통재(太平通載)』․『보한집(補閑集)』 등의 책은 전에 감사로 있을 때 이미 인간(印刊)하였고 유향의 『설원(說苑)』․『신서(新序)』는 문예에 관계되는 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제왕의 치도(治道)에도 관계되며 『유양잡조』가 비록 불경한 말이 섞여 있다고 하더라도 또한 널리 읽는 사람은 마땅히 섭렵해야 되는 것이므로 신에게 간행토록 한 것입니다. … 그러나 홍문관은 다수의 의견으로 의결하기를 요구하는 곳으로서 신이 아첨을 한다고 배척하니, 부끄러운 얼굴로 직무에 관계되는 일에 있는 것이 마음에 진실로 죄송합니다. 피혐하기를 청합니다.” 성종 24년 12월 29일(기축)
이 글로 미루어 보면 유향의 『설원』과 『신서』는 문예에 관계된다고 까지 하였고, 『유양잡조』는 당시에 널리 읽혀졌던 책이며, 『태평통재』는 이미 인간까지 하였음도 알 수 있다. 따라서 당시에 소설류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팽배하였다면 『태평통재』를 편찬할 수도 없었으며 작자에 대한 견해도 부정적이었을 것 아닌가.
그러나 어찌된 켯속인지, 『태평통재』를 편찬한 성임에 대해서는 같은 『성종실록』에서도 다루고 있으나 별다른 논평을 하고 있지 않다.
이 상소에 대해서 성종은 “경은 걱정 말고 더욱 그 직분에 힘쓰도록 하라” 한다.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는 뜻이다.
차자에 대하여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던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중국으로부터 소설류는 수입 제한 품목표인 네거티브리스트(negative list:수입을 규제하는 상품의 품목표)에 단골로 올라가게 되었고 정조 임금 때에는 이를 가혹하게 엄금하였다.
어찌되었건 이 용어는 이후 유교적 모랄의 강화와 함께 가장 소설을 배척하는 비평어로 많이 사용되었다. ‘기괴하고 헛된 소리’라는 이 ‘괴탄—’류의 비평어 속에서 당시 소설의 속성인 ‘허구성’의 함의를 읽을 수 있다.
② 제2차 소설논쟁(<설공찬전> 사건:중종)
채수의 죄를 교수형으로 단죄하소서
“채수의 죄를 교수형으로 단죄하소서(蔡壽之罪 斷律以絞)”
단순히 계도 차원의 문장이 아니다. 글자만을 따르자면 채수의 죄가 여간 아닌 듯하다. 그러나 조금만 살피자면 영 엉터리 소리임을 알 수 있다.
정치판은 지금이나 예나 드잡이판이었다. 저들은 중력의 법칙이라도 되는 양, 부도덕적이고 부조리하며, 거짓말과 위선을 일삼고, 패거리를 지으며 다니는 모사를 꾸미는 것을 당연시한다.
나는 감명 깊게(?) 읽은 책을 말하라면, 부러 『인간시장』이란 책을 곧잘 든다. 가금씩은 정말 ‘부도덕’, ‘부조리’, ‘거짓말’, ‘위선’, ‘패거리’, ‘모사’ 따위의 사전에서 추방해야할 단어들을 끔찍이 싫어하는 그 소설의 주인공 장총찬처럼 장총을 꼬나들고 사회의 악인들에게 한 방씩 먹이고 싶다.
“채수의 죄를 교수형으로 단죄하소서(蔡壽之罪 斷律以絞).”
정치판에서 나온 것으로 표독하기가 이를 데 없다. 소설을 지었다고 교수형을 처하자는 말이니 퉁바리 치고는 독기가 서려있으며 생뚱하기조차 하다.
여하한 이 글은 소설비평의 진보란 측면에서 대단한 성장통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사정을 알고 보면 그렇고 그런 정치판 코미디요, 난장亂場에 다름 아니다.
이때는 고소설사 관전법을 달리해야 한다.
유교의 강화와 불교의 탄압이 점점 그 심도를 더해 가고 그 와중에 당파까지 복잡하게 얽혔던 연산군과 중종 조에 드디어 『실록』에 보이는 두 번째의 소설 논란이 불거졌다. 김심의 상소 논쟁이 있은 지 18년 뒤인 중종 6년(1511년) 9월의 일이었다.
채수蔡壽(1449 ~1515)가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저작하였다고 사헌부에서 댓바람에 교수형을 주창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16세기 문인들의 소설에 대한 지식을 총동원하도 소설을 지었다고 교수형에 처하자는 것은 광기어린 발언이라는 점이다.
채수의 <설공찬전>은 근래에 한글 번역본이 발견되어 실상을 개략적이나마 알 수 있다. 정말 그러해야 했는지 살펴보자.
<설공찬전>의 개요는 청계 설공찬이 이야기다.
순창에 사는 설충란의 딸과 아들 공찬이 죽었다. 어느 날 설충란의 동생인 설충수의 아들 공침이 뒷간에 갔다 오다가 미쳤다. 김석산이란 사람이 와서 보니 여자 귀신(공찬의 누이)이 청계에 대하여 사람에게 씌워서 몹시 앓게 한다는 못된 귀신.
얼마 전 공전의 히트를 쳤던, 제리 주커(Jerry zuker) 감독의 「사랑과 영혼」이나 다키타 요지로의 「비밀」 따위와 유사하다. <설공찬전>은 공수, 혹은 빙의憑依를 소재원으로 다룬 전기소설傳奇小說에 지나지 않는다. 결코 중세를 흥분과 광기로 몰아넣을 만한 소설이 아니다.
공수는 ‘무당이 신들린 상태에서 신의 말을 하는 것’이요, 빙의란 일반적으로 귀신들림, 귀신에 씌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산사람에게 다른 영靈이 들어온 귀신들린 것을 말한다.
이러한 귀신이 내린 소재원은 당시에는 흔한 스토리였다. 차이가 있을지언정 전술한 『전등신화』나 『금오신화』․『태평광기언해』 등과 소재면素材面에서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들 작품들에서도 귀신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 전기는 ‘귀신의 시대’라 할 만큼 귀신이 제대로 대접을 받았다. 제사를 재정비한 조처를 설명하고 이해하기 위해 귀신에 대한 논의가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김시습(金時習,1435 ~1493)의 「신귀설」․성현(成俔,1439 ~1504)의 「신당퇴우설」과 『부휴자담론』에 보이는 귀신설․남효온(南孝溫,1454 ~1492)의 「귀신론」․서경덕(徐敬德,1489 ~1546)의 「귀신사생론」, 그리고 이이(李珥,1536 ~1584)의 「사생귀신책」 등이 그것이다. 훈구파인 성현은 『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에서 인귀人鬼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 다양한 귀신의 예를 들기까지 하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귀신의 문제는 조선 전기의 일반적인 문화현상의 하나였다. 『대동야승』(민족문화추진회, 1985, 275쪽.)을 보면 문종文宗도 “정이 없는 것을 음양이라 이르고 정이 있는 것을 귀신이라 이른다. … 귀신은 사람을 살리는 일도 있지만은 때로는 사람을 해치기도 한다.” 하였다.
비슷한 시기 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나 『기재기이企齋記異』 등 여러 패설의 작품들에서도 귀신은 쉽게 찾아 볼 수 있으며 더욱이 귀신의 문제를 논하였다고 탄핵彈劾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사헌부에서 <설공찬전>을 칭탈하여 중종 6년 9월 2일 채수를 탄핵한 것이다. 대간이 올린 상소를 보자.
“채수가 지은 <설공찬전>은 그 내용이 윤회화복이 요망합니다. 조정과 민간에서 현혹되어 한자로 옮기거나 한글로 번역하여 백성들을 미혹시킵니다(蔡壽作 薛公瓚傳 其事皆輪廻禍福之說 甚爲妖妄 中外惑信 或飜以文字 或譯以諺語 傳播惑衆).” 중종 6년 9월 2일(기유)
그로부터 사흘 뒤인 9월 5일에는 “<설공찬전>을 불살랐다. 숨기고 내어놓지 않는 자는 요서은장률로 치죄할 것을 명했다(命燒薛公瓚傳 其隱匿不出者 依妖書隱葬之律 治罪).”『중종실록』 6년 9월 5일의 기록이다.
말인즉, 사회 윤리 기강을 채수의 <설공찬전>이 해치기에 분서하고 숨긴 자는 ‘요서은장률妖書隱葬律’로 치죄한다는 것이다. 요서은장률이란 요망한 내용을 담은 책을 숨겼기에 죄를 다스린다는 것이니, <설공찬전>이 적잖이 사회에 퍼진 듯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특히 현재 발견된 것이 한글본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부르주아문학(bourgeois)문학의 대두에 대한 철저한 배척이라고도 볼 수 있다. 유럽 봉건사회에서는 일부 상류 특권계급의 소유물이었던 문학이 18세기 말 이후, 부르주아지(중산계급)의 발흥과 함께 점차 민중의 손에 맡겨지게 되어 궁정(宮廷)에서 가정으로 옮겨졌다. 이것이 ‘부르주아문학’이다.
하지만 <설공찬전>이 ‘낙양의 지가’를 올릴 만큼은 아니었을 터이니 지나친 비약인 듯하다.
그렇다면 사헌부에서는 왜 이런 하찮은 문제를 언턱거리로 삼아 채수의 주리를 틀려는 것일까? 더구나 교수형에 처하려는 지나친 상소를? 의문부를 찍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채수는 이 문제 이 외에도 여러차례 탄핵을 받았다. 그것은 연산군 1년 채수가 부친상 중에 분묘를 버린 행동에서 비롯된다. 이 사건 이후 채수는 수 차례에 걸쳐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이면에 훈구파와 사림파라는 정치적 대립이 채수의 교수형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성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그 실마리를 찾아보겠다.
채수는 기본적으로 훈구파勳舊派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훈구파에 대하여 조선 건국 또는 조선 초기의 각종 정변(政變)에서 공을 세워 높은 벼슬을 해 오던 관료층.
채수는 사림파의 거두인 김종직金宗直(1431 ~1492)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러나 채수는 김종직을 비방하고(연산군 4년 7월 17일) 그로부터 이틀 후인 7월 19일 석방된다. 채수가 김종직에게서 배웠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것을 보면 채수의 노선은 사림이 될 수 없는 것 같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채수의 문제를 다루는 같은 해 9월의 기록을 귀담아 들어 볼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의 목숨을 두고 벌이는 일 아닌가.
“조강에 나갔다. 대사헌 남곤․헌납 정충량이 전의 일을 아뢰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사 김수동이 아뢰기를, ‘들으니, 채수의 죄를 교수(絞首)로써 단죄하였다 하는데 정도(正道)를 붙들고 사설(邪說)을 막아야 하는 대간의 뜻으로는 이와 같이 함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채수가 만약 스스로 요망한 말을 만들어 인심을 선동시켰다면 사형으로 단죄함이 가하지만 다만 기양(技癢)의 시킨 바가 되어 보고들은 대로 망령되이 지었으니, 이는 마땅히 해서는 안 될 것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형벌과 상은 중(中)을 얻도록 힘써야 합니다. 만약 이 사람이 죽어야 된다면, 『태평광기』․『전등신화』 같은 유를 지은 자도 모조리 베어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씀하시기를 ‘<설공찬전>은 윤희화복(輪廻禍福)의 설(說)을 만들어 어리석은 백성을 미혹케 하였으니, 채수에게 죄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수함은 과하므로 참작해서 파직한 것이다.’ 하자, 남곤이 아뢰기를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은, 법을 집행하는 관리라면 진실로 이와 같이 단죄함이 마땅합니다.’ 김수동이 아뢰기를 ‘채수의 죄가 과연 이 율에 합당하다면, 만약 스스로 요망한 말을 지어내는 자는 어떤 율로 단죄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엔 실정과 법이 어긋난 듯합니다.’하자 검토관인 황여헌(黃汝獻)이 아뢰었다. ‘채수의 <설공찬전>은 지극한 잘못입니다. 설공찬은 채수의 일가 사람이니, 채수가 반드시 믿어 혹하여 저술하였을 것입니다. 이는 세교(世敎)에 관계되고 치도(治道)에 해로우니, 지금 파직한 것은 실로 너그러운 법이요 과중한 것이 아닙니다.’하니, 임금이 말씀하셨다. ‘채수가 진실로 죄는 있으나, 벌이 너무 지나치다’”.『중종실록』 6년 9월 20일(정묘)
이 글에서는 채수의 <설공찬전> 문제로 김수동金壽童(1457 ~1512)과 남곤南袞(1471 ~1527)․정충량鄭忠樑(1480~1523)․황여헌黃汝獻(1486~?)의 다툼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리고 왜각대각 요란스러운 가운데 은연 중 남곤․정충량․황여헌 간의 공모의 눈짓을 읽을 수 있다. 여기서 김수동은 훈구이고 정충량․황여헌․김정 등은 사림파였으니 그 묵시적 합의를 추론한다면 당연한 것이다. 물론 남곤이라는 훈구대신이 있으나, 그 역시 성종 조에 진출한 사림으로 뒷날 훈구로 기울어진 당시 사간원의 우두머리였기에 채수를 변론할 수는 없었을 듯하다. 대신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는다.
김수동은 같은 훈구파인 채수를 우리 소설창작론의 논리적 비평용어인 기양론技癢論을 들어 비호하였다. 이 기양은 인간에게는 긁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가려움증과 같이 표현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기술 내지 재주가 있는 바, 이 쓰지 않고 견딜 수 없는 표현 욕구이다.
다급해진 김수동이 하릴없이 손사래를 치며 이 기양을 들고 나선다. 소설 저작의 당위성을 주장하여 채수의 죄를 무마하려는 꿍꿍이다. 그러나 김수동이 아무리 소설가의 비기秘技인 기양技癢으로 당위성을 역설한다 하지만, 내용이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라면 결코 유야무야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어찌 교수형에 해당하는 죄를 기양이라는 말로 엉너리를 떨어 얼버무릴 수 있나?
오히려 우리는 김수동의 ‘기양 운운’에서 느긋하게 눙치는 태도를 볼 수 있다.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 ~1939)의 말을 빌릴작시면 실착행동失錯行動 정도로 엉거주춤 넘어가려는 실착행동에 대하여 Freudianslip:무의식적인 욕구나 관념이 불러일으키는 말이나 글 따위에서의 실수.
<설공찬전>은 어숙권(魚叔權)이 중종 말엽 선집한 『대동야승(大東野乘)』에는 「설공찬환혼전(薛公瓚還魂傳)」이라 칭하였고 ‘극히 괴이’ 하다고 지칭하였다.
그런데 어숙권은 당 시대에 있었던 이 사건에 대해 사실적인 말 외에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또 연산군 12년의 기록을 보더라도 당시에 소설류에 대한 탄압은 없었다. 오히려 “『전등신화剪燈新話』․『전등여화剪燈餘話』․『효빈집效顰集』․『교홍기嬌紅記』․『서상기西廂記』 등을 사은사로 하여금 사 오게 하라.”라는 기록이 보인다.
연산군 12년(1506)년은 우리의 소설사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공간이다. 즉, 명나라 구우(瞿佑,1347 ~1433)가 지은 전기소설집인 『전등신화剪燈新話』와 『전등신화』의 속찬으로 명나라 이정(李禎,1376 ~1452)이 엮은 전기집인 『전등여화煎燈餘話』, (『전등여화』가 우리 문헌에 처음 보이는 것은 『龍飛御天歌』 제100장, 卷10이다.) 그리고 이 『실록』에서 처음 보이는 명나라 조필趙弼이 1428년에 엮은 전기소설집인 『효빈집效顰集』(『전등신화』를 모방하여 지은 것이다.), 그리고 원나라 송매동宋梅洞이 지은 『굥홍기嬌紅記』를 유동생劉東生이 사곡詞曲화한 『신편금동옥녀교홍기新編金童玉女嬌紅記』상․하권과 원나라 왕실보가 당나라 원진元稹의 전기인 「앵앵전鶯鶯傳」을 개작한 『서상기西廂記』 등의 소설류가 집중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광폭하고 무례한 조선의 두 임금 중 한 사람, 중종반정으로 강화도로 쫓겨나 역질을 앓다가 31세로 이승과 작별한 연산군, 그래서 죽어서도 임금이 아닌 ‘군’으로 남은 연산군이 우리 소설사에서는 저러한 고운 모습을 보인다. 그래 논외지만 그의 시 한 편을 붙여 우리 고소설사에서 그의 역할에 고마움을 표한다.
人生如草露 사람살이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아
會合不多時 만날 때가 많지는 않은 것이라네.
선뜻 폭군 연산군의 시라고는 이해되지 않을 만큼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짠하게 하는 시이다.
다시 원 줄거리로 돌아가자.
이런 정황을 생각하며 정치로 다시 눈을 옮겨보자.
언급한 바, 무오사화 때 채수는 김종직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같은 날 사림인 김일손金馹孫(1464 ~1498)의 주장을 보면 채수는 김종직의 제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스승인 김종직의 처단을 주장하였으니 채수의 행동을 사림들이 곱게 볼 까닭이 없을 것이다.
채수가 졸한 뒤의 기록을 보아도 채수는 결코 사림들과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중종 10년 11월 8일(경인)의 기록에는 채수가 졸한 뒤의 기록을 “인천군 채수가 졸하였다. 채수는 사람됨이 영리하며 글을 널리 보고 기억을 잘하여 젊어서부터 문예로 이름을 드러냈고, 성종조에서는 폐비의 과실을 극진히 간하여 간쟁하는 신하의 기풍이 있었다. 그러나 성품이 경박하고 조급하며 허망하여 하는 일이 거칠고 경솔하였으며, 늘 시와 술과 음률을 가지고 스스로 즐겼다. 일찍이 <설공찬전>을 지었는데, 떳떳하지 않은 말이 많기 때문에 士林이 부족하게 여겼다.”라고 사림과의 반목을 기록하고 있다. 채수와 사림의 이러한 관계로 추정해 보건대, 채수는 결국 훈구 쪽에 설 수밖에는 없다.
채수는 연산군 4년 7월 19일(계축), 윤필상尹弼商(1427 ~1504)이 극력 변호하는 상소에 의해서 이틀 뒤에 석방되는데 윤필상 또한 무오사화의 핵심인 훈구 세력이었다.
종내 채수의 <설공찬전> 문제는 해프닝으로 끝난다. 채수는 인천군이라는 직위가 파직되었다가, 급전직하 5개월 뒤에는 복직되었다. 교수형 운운으로는 너무나 경미한 처리다.
같은 해 12월의 기록을 보자.
채수의 아들이 아버지의 무고함을 상소하자 박팽수 등이 “채수가 <설공찬전>을 지은 것은 진실로 잘못이나, 옛날에도 또한 『전등신화』․『태평한화』가 있었는데, 이는 실없는 장난 거리로 만든 것뿐으로 이 지방의 일과는 다릅니다. 이미 정한 죄이지만 이제 상께서 조심하고 반성하시는 때를 맞아 감히 아룁니다.”라고 논한 것에서 <설공찬전>이 『전등신화』나 『태평한화』 등의 책들과 다를 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또 채수가 <설공찬전>을 지은 것은 당시의 관료 문인들이 즐겨 한 저작 현황을 보면 이해의 일단을 접할 수 있다. 그리고 채수는 이 작품 이외에도 일문된 『촌중비어村中鄙語』라는 작품이 있었다. 『촌중비어』라는 이 작품은 『촌담해이』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가 수록되었으며 상당한 가필과 윤색을 가미한 창의적 기록자로서의 의식이 있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를 문제 삼는 발언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의 사림세력과 훈구세력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설공찬전>이라는 소설을 적절하게 꼼수로 이용하였다는 것이 더욱 납득하기 쉬울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채수는 여러 번에 걸쳐 탄핵을 당하고 있는데 대부분 채수를 탄핵한 사람들은 사림의 무리였다. 그를 탄핵한 정광필鄭光弼(1462 ~1538), 이주李冑(? ~1504), 방유령方有寧(1460 ~1529), 홍숙洪淑(1464 ~1538) 등은 모두 사림이었으니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이러한 탄핵은 연산군 때 집중되고 연산군 재위 10여 년 간 채수는 정계에서 벗어나 있다.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한 바 당시에 유사한 소설류가 수없이 많았다. 이러한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괴탄불경지서’와 채수의 <설공찬전> 사건의 배경에는 정치적 갈등이 개재되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정치적 조명으로 인한 소설비평의 변환. 하라는 정치는 하지 않고 자잘한 일로 싸우는 꼴이 참으로 못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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