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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효안공 신도비 부 묘소(서울 유형문화재 50호) |
▲ 양효공 안맹담 묘역 전경(일명 : 정의공주 묘) |
☞ 이 묘소는 양효공 안맹담 묘라기 보다는 정의공주 묘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연산군 묘를 가기 위해서 는 반드시 이 묘소 앞 정류장에서 내려야 합니다. 정류장 이름 또한, 정의공주 묘 앞입니다. 그 동안 여러 차례 연산군 묘를 가면서도 지나치기만 했다가 어느 날, 묘역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묘역은 좁은 도로 우측에 바로 접해 있으며, 묘역 사방은 철책으로 둘러져 있습니다. 묘역 입구 우측에는 양효공의 신도비가 있습니다. 귀부는 탑골공원 안에 있는 보물 3호인 대원각사비의 귀부와 형태가 거의 같아 보입니다. |
▲ 양효공 묘역 입구 전경 | ▲ 양효공 신도비 | ▲ 귀부의 발가락 부분 |
신도비는 1466년 7월에 건립된 것으로 귀부·비신·이수를 모두 갖추었다. 지대석 위에 놓인 화강암 귀부는 높이 1.2m, 길이 2.8m, 너비 1.7m나 된다. 귀부 위에 세운 대리석 비신은 이수와 한 돌로 되어 있는데, 이수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형상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비문은 안맹담의 사돈 영중추부사 하동군 정인지(鄭麟趾, 1396-1478)가 지었다. "양효안공묘비(良孝安公墓碑)"라 새긴 머리전서[頭篆]와 비문 글씨는 양효공의 넷째 아들인 안빈세가 썼는데, 서풍은 조선 초기에 유행한 송설체(松雪體)이다. 사적기에는 「세조 12년 7월에 산소 앞에 신도비를 세웠다. 하동부원군 정인지가 비문을 지었는데 귀부는 매우 크고 높다. 전하는 말로는 이와 같은 거북돌이 경복궁 안에 한 쌍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왕명으로 가져온 것이라 한다. 그 해에 도성암(道成庵)이 창건되었다. 도성암은 삼각산 동쪽에 있는데 곧 공주의 원찰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
▲ 안종해(安宗海)의 묘 |
▲ 안종해의 묘 뒤편에서 바라 본 묘역 입구 전경 |
☞ 양효공 묘소에 오르기 전, 한 단 아래에 묘가 한 기 있었습니다. 묘비는 최근에 만들어 세운 것 같은데, 묘비에는 '通訓大夫淸州牧使竹山安公宗海之墓'라 쓰여 있어서, 자료를 찾아보니... 안종해(安宗海 : 1681~1754)는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조경(朝卿), 세자익위사 부수 상억의 아들이다. 1715년(숙종 41)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726년(영조 2) 천거로 광릉참봉에 보임된 뒤 여러 직을 거쳐 공산현감으로 나갔다. 이때에 흉년과 질병으로 기민과 폐사가 속출하자 이의 구휼·안집에 진력, 선정을 베풀었다. 그뒤 공조좌랑에 이어 1734년 옥천군수로 있을 적에 불렴의 혐의를 받고 삭직되었다가 사도시첨정 등을 지내고, 면천군수로 복임하여 고을에 행패를 부린 토호의 작태를 근절시켰다. 1741년 승진하여 청주목사로 나아갔으나 헌납 권현의 탄핵을 받은 바 있고, 어사 윤득재가 면천을 지나다가 토호의 말을 듣고 그를 투옥, 용전역에 유배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출처 : 竹山安氏大同譜 |
▲ 양효공 묘소 전경 |
▲ 문인석 |
▲ 양효공 사당(?) |
☞ 양효공 묘역으로 오르면 삼단의 장대석이 길게 놓여 있으며, 좌우로 한 쌍씩의 문인석이 서 있습니다. 쌍 분의 묘소 앞 중앙에는 장명등이 있으며, 봉분 앞에는 각각의 상석과 묘비가 있습니다. 묘역 우측 멀리에 사당 형태의 기와집이 보였으며, 이 주변에 죽산 안씨의 묘들이 많다고 하는데, 아마도 죽산 안씨의 사당 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 양효공 묘갈 |
▲ 정의공주 묘갈 |
☞ 양효공과 정의공주 묘비에는 각각 수록대부연창위양효공안맹담지묘(綏祿大夫延昌尉良孝公安孟聃之墓) 와 정의공주지묘(貞懿公主之墓)라고 새겨져 있으며, 묘비 머릿부분의 묘갈(墓碣)이 참 멋있습니다. 정의 공주 묘비는 중간이 부러져서 붙인 흔적이 있습니다. 양효공의 묘역은 관리가 잘 되어 있었으며, 묘역이 아주 깔끔합니다. 다만, 묘소를 두른 토담이나 용미가 없어서인지 묘역 뒤편이 조금 허전해 보입니다. - 2005.02.09 - |
▲ 양효공(좌)과 정의공주(우) 묘소 |
▲ 묘소 뒤편에서 바라 본 전경 |
조선 세종의 딸 정의공주의 부군인 양효공 안맹담(1415∼1462)의 묘소와 신도비이다. 안맹담은 고려시대 귀족이던 죽산 안씨(竹山安氏)의 후손으로 14살 때인 1428년 세종대왕의 둘째 따님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혼인하여 죽성군에 봉해지고 그 뒤 계속 품계가 올라 세조 3년(1457) 정월에는 수록대부에 올랐으며 그 해 8월 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수명이 길지 않아 세조 8년(1462) 마흔 여덟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정의공주는 안맹담 사후 15년이 지난 성종 8년(1477)에 세상을 떠나 안맹담 옆에 묻혔다. 원래 이 묘소터는 고려왕조의 상장(上將)인 강택(康澤) 부부의 묘지였는데 양효공이 세조 8년 12월 25일에 별세하자 풍수가를 전국에 풀어서 묘자리를 찾게 하였던 바 다음해 1월 15일에 주부 이승욱이 지금 묘소자리인 양주 해동촌 자좌원을 명당 자리로 지목하였다. 이에 공주는 임영대군을 졸라 그 자리를 잡게 해 달라고 세조에게 아뢰니, 왕이 허락하시고 강택의 묘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여 2월 25일에 예장을 치루게 하였다. |
정의공주묘 위치도 |
소재지 :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 63-1
빨간 압정이 있는 곳이 정의공주묘입니다. 지하철 1, 4호선 창동역 동측으로 나와서 10번 마을버스를 타고(20 여분) 정의공주묘 앞에서 하차. 아마도 지금은 마을버스 번호가 바뀌었을 겁니다. 기사분들에게 정의공주 묘로 가는 버스를 물어 보고 타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