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홍애공 간자 할아버지 양위분 묘소이며 1746년 묘소를 확인하고 묘비를 세웠으며 이 묘소가 안동군에 팔 명당중 하나라고 전하여지고 있으며 배위 삼가 오씨는 합폄입니다.
ㅇ 고려의 시인, 자는 평보(平甫).운부(雲夫), 호는 홍애(洪厓)로 고려 원종(충경왕) 7년 병인(1266년) 문과 급제하시어 관이 도(都) 첨의사인(僉議舍人)과 지제고(知制誥)에 이르름
ㅇ 국정을 바로잡기 위해 바른말을 하여 동래현령(東萊縣令)으로 좌천되어 임지에서 돌아가셨다. 시문에 능하고 시풍이 청려(淸麗)했다. 그의 시는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수록되어 있다.
ㅇ 창암정 : 봉화산 기슭 절벽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건립 연대와 연유 등은 전하여지고 있지 않으나 우리 종중산에 건립되어 있어 이곳 사람들이 풍산 홍씨 정각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암벽에 풍산홍씨 세장지지라고 큰 글씨로 음각되어 있고 2세 홍애공의 음덕을 칭송하는 시문 현판 10여폭이 걸려 있으며 경치 또한 절경이고 중년에 대종회에서 중수하였다.
ㅇ 시문에 능하였고, 시체가 청려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제현(李齊賢)은 《역옹패설 #역10翁稗說》에서 “그가 시 한 편을 지어 낼 때마다 어진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모두 그 시를 좋아하여 서로 전해가며 외웠다.”고 하였다. 그의 시가 뛰어나서 당시에 널리 애호되었음을 알 수 있다.
ㅇ 허균(許筠)도 《성수시화 惺#수04詩話》에서 그의 시가 “아름다우면서도 맑고 곱다.”고 평하였고, 홍만종(洪萬宗)도 《소화시평 小華詩評》에서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허균이 뽑아준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선집을 밤새워 읽고 “이인로(李仁老)와 홍간의 시가 제일 좋다.”고 하였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ㅇ 특히, 당시에는 모두 송나라 시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 시를 배운 것이 높이 평가되는데, 허균은 “〈나부인 懶婦引〉·〈고안행 孤雁行〉 등의 작품이 매우 뛰어난데, 성당의 작품과 같다.”고 하였으며, 홍만종은 “당조(唐調)를 깊이 얻어 송나라 사람의 기습(氣習)을 벗어났다.”고 하였다.
ㅇ 저서에 12대손 홍방(洪滂)이 여러 시선집에 전하는 것을 모아 편찬한 《홍애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