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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부타령’의 독보적인 음악가 전태용과 그의 딸 전숙희명창
(최종민 교수의 국악컬럼에서)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 1685~1759)은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와 같은 해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20대 후반부터 영국에 살면서 유명한 ‘수상음악’(1717년)을 비롯하여 많은 오페라를 작곡하면서 활동했다.
그의 생활과 노력은 온통 오페라에 집중되다시피 많은 작품을 쓰고 공연하고 하면서 고생하다가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지만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헨델의 오페라 작품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헨델의 오페라 보다는 그의 나이 50대 후반에 작곡한 오라토리오 ‘메시아’(1742년 더불린, 1743년 런던)를 통해서 그를 기억하고 ‘할렐루야’ 합창을 부르며 헨델이 위대한 작곡가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금년 102세로 한국음악사를 집필하다 완성하지 못하고 1월 30일 작고하신 나의 스승 이혜구(1909~2010)선생님은 서양음악사를 강의 하실 때 헨델의 그러한 사실을 언급하시면서 “헨델 자신도 자기의 오라토리오가 후세에 그렇게 널리 알려지리라는 것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전태용(1922~1990)이라는 음악가를 떠올릴 때 문득 헨델의 예가 생각난 것은 전태용도 일생동안 활동하고 직업으로 삼았던 것은 기악(해금,대금,피리)이었지만 그가 전국의 애호가에게 크게 감동을 주었던 것은 ‘뱃노래’나 ‘창부타령’ 같은 노래였기 때문이다.
내가 KBS FM의 <흥겨운 한마당>을 진행할 때 전태용이 부른 ‘뱃노래’를 방송했는데 며칠이 가지 않아 신청곡이 쇄도하는 것이었다.
늘 여자 명창들이 부르는 ‘뱃노래’를 많이 들어왔던 애청자들이 소리의 도사가 노래하는 듯 허허하고 구성지고 그냥 그 사람을 느끼게 하는 그런 전태용의 소리를 들으니까 그토록 감동을 받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전태용의 ‘창부타령’을 방송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국악계와 애청자들 모두 “전태용 전태용” 할 정도로 전태용의 ‘창부타령’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노래가 되었고 전태용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전태용의 ‘창부타령’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독창적인 노래라 할 수 있다.
발성도 곰삭은 성음이어서 속기가 없는 소리지만 가사 붙임새가 판소리처럼 다양하고 고음으로 들고 나가기도 하고 느닷없이 저음으로 숙여내기도 하며 변화무쌍하게 부르기 때문에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전태용이 그런 노래를 무대에서 부른 적은 없다.
국악인들끼리 모여서 술 한 잔 먹고 놀 때 흥에 겨우면 가끔 그런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그것도 누군가 전태용에게 자꾸 하라고 권해야 겨우 할 정도로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그의 노래를 들은 것도 남원에 공개방송 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전태용은 KBS 방송국의 악사로 활동했기 때문에 여러 국악인들과 함께 남원을 가게 되었다.
이해식이 프로듀서였고 안비취·서공철·한승호·전태용·장덕화·박천택·강정숙·김성녀 등 여러 사람이 갔었는데 저녁 먹으면서 안비취명창이 나에게 전태용씨의 노래를 들어봤냐고 물었다.
그래서 들어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더니 그러면 오늘 저녁에 맥주파티를 하면서 전태용씨의 노래를 좀 들어보자고 했다.
저녁 먹은 후 조금 쉬었다가 맥주파티가 벌어졌고 모두 술이 거나해졌을 때 안비취선생이 먼저 ‘노랫가락’을 하면서 전태용에게 노래 좀 해보라고 권했다.
전태용도 술기가 있어서인지 ‘창부타령’을 하는데 정말 깜짝 놀랄 만큼 멋진 ‘창부타령’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 민요로도 저렇게 멋지고 개성 있는 노래를 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서울에 온 다음 방송국에서 녹음을 하도록 하였다.
전태용은 인천의 영종도에서 대대로 예능에 종사해 온 집안에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해서 무슨 일을 하라고 하면 일 보다는 나무에 올라가 노래 부르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음악가 집안 출신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전태용도 10대에 악기를 배우게 되었고 여기 저기서 벌어지는 도당 굿 같은 굿판에 잽이로 다니며 활동하게 되었다.
도당 굿을 하게 되면 마을을 행진하며 돌아다니는 돌돌이 할 때에는 삼현육각이 ‘길군악’ ‘길타령’ 같은 곡을 연주하고 무녀가 춤을 출 때에는 ‘시나위’나 ‘염불’ ‘타령’ ‘굿거리’ 같은 곡을 연주해야 한다.
전태용은 피리나 대금 해금을 다 배웠기 때문에 이 악기 저 악기 닥치는 대로 연주하곤 했다.
한 때는 여성국극단 악사로도 활동했고 방송국의 악사로 오래 활동했다.
70년대 말 ’80년대 초에 김숙자(경기도살풀이의 인간문화재)가 경기도살풀이를 재현할 때 진짜 경기삼현육각으로 반주하려 애썼는데 그 때 이용우(대금)·이충선(피리)·임선문(해금)·정일동(장구)·전태용(징)이 주로 출연하여 반주를 하곤 했었다.
이들이 가지고 있던 그 기악은 우리 음악유산 중 아주 귀중한 것인데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관계자들 불찰로 그 예능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되었다.
그런 음악을 할 수 있었던 음악가들은 위의사람 외에 지갑성·김광식·조한춘·이영수 등이 있었는데 조한춘이 인간문화재가 되고 이영수가 인천의 지방문화재 보유자가 되었을 뿐 나머지 분들은 다 그냥 고인이 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전태용이 ‘창부타령’을 경기명창들과 다르게 부를 수 있는 것도 경기도 한강이남 지역의 굿 음악이 남도악의 영향을 받아 시나위나 육자백이토리를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태용은 경기·서울지역의 음악도 잘 하지만 남도 식 음악까지 몸에 배도록 익혔기 때문에 그런 ‘창부타령’을 부를 수 있었다.
전숙희(1946년생)는 전태용의 맏딸로 인천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안덕영에게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2년쯤 단가와 춘향가 흥보가를 배웠는데 소리선생이 다른 곳으로 가버려서 배울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최정식의 제자인 조백운에게 한 2년 동안 경·서도소리를 배웠다.
그런데 판소리를 한 후라 처음 경기소리를 배워보니 무척 어려웠다.
목이 잘 안 되고 시김새도 전혀 다르고 여러 가지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경·서도소리를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고 19세 때 서울로 올라와 이창배선생님 문하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창배선생이 운영하던 청구고전성악학원에는 오늘날 경기소리의 중견으로 활동하는 여러 사람들이 드나들며 공부했었다.
전숙희는 그 곳에서 놀량·앞산타령·뒷산타령·자진산타령 같은 입창과 12잡가와 경·서도 민요 등을 배웠다.
그리고는 지화자 등과 방송에도 출연하고 공연도 하면서 국악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경기소리의 여류명창으로는 안비취·묵계월·이은주·김옥심 등 많은 분들이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 중 안비취·묵계월·이은주 세분이 경기소리로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되자 함께 공부했던 또래들이 그 인간문화재의 전수생이 되곤 했다.
전숙희는 안비취명창의 전수생이 되고 싶었다.
허지만 전에 판소리를 한 경력이 있다 하여 처음에는 받아주지 않았다.
전숙희는 몇 년이 지난 다음 1984년 안비취를 찾아가 전수자로 받아달라고 청을 했다.
안선생님이 소리를 해 보라 하여 소리를 했더니 듣고 제자로 받아 주었다.
전숙희는 안비취에게 배우게 된 것이 기뻤다.
그리고 큰 배경이라도 생긴 것 같은 든든한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그 해에 시작된 제1회 전국민요경창대회에 나가 유산가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안비취선생은 얼마가지 않아 전숙희에게 “야 내 대신 네가 찾아오는 사람들 좀 가르쳐라.”하여 그 때부터 안비취학원에서 민요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87년 이수를 한 다음에는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개인발표회를 했고 많은 무대와 방송에 출연하면서 크게 활동했다.
전숙희는 그 때 이후 계속 안비취선생의 학원이 있던 중구남산동2가 퍼시픽호텔 뒤에 학원을 내고 지금까지 경기소리를 가르치고 있다.
내가 찾아간 날도 오후3시였는데 그 시간에 수업이 끝났다고 하면서 10여명의 제자들이 발표회 준비를 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전숙희명창은 용모도 단정하고 목소리도 구성이 있는데다 어려서부터 좋은 스승들로부터 잘 배워서 실력 있는 명창으로 통한다.
서울국악예고나 교원연수원 같은데 나가 민요강사로 활동하기도 하고 국립극장 문화학교 등 문화교실에도 나가 민요를 가르쳤다.
공연도 자주하고 방송도 많이 했었다.
헌데 요즘은 방송이나 공연을 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언젠가 이천에서 야외공연을 하다가 쓰러졌는데 그 때 응급처치하느라 목 앞쪽에 흉터가 생기게 했기 때문에 그것이 보기 흉하다고 생각하여 무대에 서지 않으려는 것이다.
본인은 가르치는 것이 사명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1주에 5일을 수업하는데 월·수·목·금·일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가르친다.
초보자들은 주로 오전에 와서 공부하고 오래 된 제자들은 오후에 모인다.
일요일은 특별히 학생들을 주로 지도한다.
그 동안 전숙희에게 배워 민요를 전공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졌다.
어린이들은 국악중학교나 국악고등학교 한국전통예술학교 같은데로 진학하고 중·고등학생들은 중앙대학교나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으로 진학했다.
내가 알기로도 전병훈의 경우 7세에 12잡가를 완창발표할 정도로 전숙희는 지도를 잘 했는데 그 어린이가 지금은 국악고등학교에 다닌다고 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전문단체에 들어가 활동하는 제자들도 많다.
최수정·함영희·조미정·심현경 등 내가 아는 얼굴들도 여러 명 있다.
그렇게 늘 제자를 가르치는 전숙희이기 때문에 그의 생활은 늘 제자들과 함께 하는 생활이고 지금 지도받는 제자만 해도 60여명이 될 정도이다.
요즘은 한 달에 두 번 월요일에 부천에 있는 이춘희의 경기민요전수관에 나가 전수생들을 지도하고 매주 화요일 11시~12시에는 국악방송에 나가 경기민요를 가르친다.
그 동안 음반도 여러 장 냈지만 아버지 전태용과 함께 낸 음반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얼마 전에 음반을 기획하는 분이 전태용의 노래와 전숙희의 노래를 함께 수록한 음반을 내어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전태용이 마음 좋은 음악가로 욕심 없이 사는 것 같더니 전숙희 역시 마음을 비우고 누구와도 적대관계를 만들지 않고 서로 협조하고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2월 24일에는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김혜란 등이 하는 한국민요연구회의 발표회가 있다고 한다.
임정란·김혜란·전숙희·최장규가 주축이 되어 제자들과 함께 공연을 하는 발표회라고 한다.
그 발표를 위해 지금 나오는 오래된 제자들이 ‘달타령’·‘노랫가락’·‘액맥이타령’을 연습하고 있다고 했다.
전숙희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고려대학을 졸업하고 회계사시험에 합격했고 현재 대학원에 재학중이라고 한다.
전숙희명창은 인품이나 경기소리의 실력이나 생활태도 등이 칭찬 받을 만한 경기명창인데 더욱 건강하고 복 받는 미래가 펼쳐졌으면 좋겠다. 전숙희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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