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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한국과 일본만큼 민족감정의 장벽이 높은 사이도 없을 것이다. 경제교류는 과거부터 활발했고 체육·문화교류도 활발하지만, 과거사 문제나 영토 문제 등으로 인해 아직도 많은 한국인은 일본과 일본적인 것을 거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꺼운 장벽을 ‘이단(異端)과 ‘사이비’로 몰렸던 소수파 종교가 무너뜨리고 있다. 한국의 통일교(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와 일본의 창가학회(SGI)가 바로 그것이다. 기독교 주력 세력과 마찰을 빚었던 통일교의 일본 진출은 눈부시기 그지없다. 어느새 통일교는 국교 정상화 이후 일본에 건너간 한국인 중 세력이 가장 큰 집단이 되었다. 통일교의 교리를 받아들인 일본 여성이 한국 농촌 총각과 결혼하기 위해 한국에 건너오고 있다. 창가학회는 ‘일본판 통일교’라고 할 정도로 일본에서는 비난과 공격을 받아온 종교단체이다. 한국에서도 왜색 불교란 비판이 높았는데 어느 틈엔가 한국에서 놀랄 만큼 많은 수의 회원을 확보했다. ‘남묘호렌게쿄’라고 하는 불교가 바로 창가학회인데, 자의식이 강한 한국인은 왜 일본풍 불교를 수용한 것일까. 두 종교의 일본과 한국 진출에선 공통점이 발견된다. 두 종교는 모두 “어느 종교가 인류를 구원하고 진정으로 세계를 평화롭게 하는지 경쟁해보자”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의지 덕분에 민족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상대국 국민에게 다가갈 수 있었으며 세계 190여개 국에 진출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 대학 종교학과 교수는 “ 두 종교는 현대 사회에서 발생한 문제만 해결하는 신약(新藥)일 수 있다. 이 문제가 가라앉으면 신약의 필요성은 줄어들 수도 있다”는 말로 성급한 판단을 경계했다. 한국과 일본에서 생겨난 신흥 종교가 아주 짧은 시간에 국경선을 넘은 비결을 추적해보았다.]
일본의 통일교 - ‘하와’ 일본, ‘아담’ 한국과 天倫을 엮는다
전북 김제시에서 농업을 하는 엄모(72) 씨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 색시들은 정말 잘혀. 중국에서 온 조선족 색시나 베트남에서 온 색시들은 농촌 총각과 살다가 열이면 열 다 도망을 가는데, 일본 색시들은 절대 그러질 않아. 야리야리해 보이지만 야무지게 살림 잘혀고 시부모도 아주 깍듯이 모셔. 일본 색시들 때문에 농촌에서는 통일교를 다시 보게 됐다니까.” 요즘 농촌 사회에서 회자되는 화제 중의 하나는 한국 농촌 총각에게 시집온 통일교를 믿는 일본인 며느리이다. 이들은 지방 각지 여러 단체에서 수여하는 효부상(孝婦賞)을 휩쓸고 있다. 충북의 한 농촌에 살고 있는 일본 여성 A씨는 5년 전 적십자사로부터 효부상을 받았다. 도쿄 북쪽에 있는 야마나시에서 태어난 그는 10년 전 합동결혼으로 한국 농촌에 살고 있는 남자와 결혼했다. 현재 남편과 두 자녀 그리고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그의 말이다. “이장님 추천 덕분에 효부상을 받은 것 같다. 물론 이곳은 일본 농촌보다는 못하지만 지낼 만하다. 한국에 오기 전에 선배로부터 충분히 이야기를 들었고 종교적 신심을 지키겠다는 각오를 하고 왔다.”
일본 여성 B씨는 대도시인 요코하마에서 자라 1995년 충북에 살고 있는 시각장애인 남편과 결혼해 두 자녀를 낳았다. 군청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은 그가 웃음으로 전한 한국 농촌 생활 이야기다. “물론 한국의 시골 생활은 일본보다 불편하다. 그러나 나는 결혼 생활에 만족한다. 나는 역사적으로 얽혀 있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있다.” KBS 전국노래자랑 프로에 이따금 나와 한국 가요를 부르는 농촌의 일본여성이나, 광복절을 즈음해 방송이나 신문을 통해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해 사과하는 일본인 며느리들은 대개 한국으로 시집와 ‘시집을 더 사랑하게’ 된 통일교인이다.
한국으로 시집온 5000여 일본 여성
통일교가 합동결혼을 통해 교인들을 국제결혼(교차결혼) 시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은 합동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시집왔는데, 남편이 될 한국 남성을 사진으로만 보고 결혼했다고 한다. 고리타분한 조선시대의 중매혼 같은 과정을 거쳐 1인당 국민소득이 일본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한국 땅으로 시집 온 것인데 대체로좋은 평판을 받고 있다. 통일교 측에 따르면 지금까지 한국 남성에게 시집온 일본의 통일교 여성 신자는 5천여 명이라고 한다. 일본으로 시집간 한국의 통일교 여성 신자는 3천여 명이다. 지난 1월 말 일본에서 만난 전남 출신의 박모씨는 일본으로 시집간 통일교 신자다. 그 역시 사진 한 장만 받아보고 합동결혼식에서 지금의 일본인 남편과 결혼해 아들 하나를 낳고 10년째 살고 있다고 했다(그의 시집 식구들도 역시 통일교 신자이다).
“처음 일본에 와 보니까 시어머니가 쓰는 부엌과 며느리가 써야 할 부엌이 따로 있었다. 전자산업이 발전한 나라답게 방마다 TV가 있어 각자 자기 방에서 TV를 봤다. 한 가족인데 각자 생활하고 있어,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어머니가 쓰시던 주방을 없애고 내 주방에 있는 TV도 없앴다. 비로소 온 가족이 모여 식사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한국 가정에서는 욕조 물을 혼자 쓰면서 목욕하지만, 일본 가정에서는 욕조 물 한 통으로 온 가족이 다 씻는다. 일본 사람들은 욕조 물에는 몸만 담그고 씻는 것은 나와서 한다. 시아버지-시어머니-남편-며느리 순으로 목욕한다. 그러나 나는 죽었다 다시 깨어나도 시아버지께서 들어갔다 나온 욕조엔 들어갈 수 없었다. 시아버지께서는 양국의 문화 차이를 이해하고 특별히 나만 혼자 욕조 물을 다 쓰도록 해주셨다(웃음).
일본 사람들은 자전거를 주로 타고 다니기 때문에 가정에는 여러 대의 자전거가 있다. 그런데 외국인이 많이 사는 곳에서는 자전거 도난 사건이 자주 일어난다. 시아버지께서는 무심코 ‘한국과 중국 사람들 때문에 자꾸 자전거가 없어진다’고 말씀 하시다가 내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그 후로는 절대 한국 사람이 자전거를 훔쳐간다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2002년 월드컵 때는 한국이 아주 잘한다고 칭찬하셨다.…”
결혼 10년차 주부이면 살림살이에 찌들어 처녀 때의 포부가 희미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박씨는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온몸을 던진 선교사임을 자임했다. “내가 일본으로 시집온 것은 세계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다. 일본과 우리 사이의 갈등을 풀려면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내가 일본인과 결혼해서 아이 낳고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야만 그들도 진심으로 우리를 사랑한다. 천륜(天倫)을 엮으면서 사랑하는 것이 갈등을 해소하는 지름길이다.”
뉴커머의 한 축으로 성장
1945년 일본이 패전한 이래 재일교포를 대표한 조직은 민단과 총련(조총련)이다. 민단과 총련에 속해 있는 재일교포의 수는 60만명가량인데, 이 수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교포가 일본으로 귀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 북한은 총련계를 위해 적극적으로 학교 건설을 지원했다. 비록 일본 문부과학성으로부터 정식 학교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이 학교가 있어 총련계 젊은이들은 한국어를 익힐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이러한 지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따라서 민단 사람들은 자녀를 일본 유치원이나 일본 소학교(초등학교)에 보냈는데, 아이가 (민족) 차별을 받을 것을 염려해 유치원이나 소학교 명부에 ‘통명(通名)’이라고 하는 일본식 이름을 올렸다. 유치원이나 소학교 1학년 때 학적부에 올린 이름이 대학을 거쳐 평생 불리는 이름이 된다. 또 일본 학교에서 일본어로 일본의 역사와 정신을 배우므로 민단계 3,4세는 대부분 한국말과 한국의 정신을 잃어버렸다.
뒤늦게 한국 정부는 도쿄를 비롯한 일본 주요 도시에 한국 학교를 세웠다. 대표적인 학교가 도쿄의 한국 학교인데, 수년 전부터 이 학교는 매년 4~5명씩 게이오(慶應)와 와세다(早稻田) 대학 합격자를 배출하는 명문으로 떠올랐다. 이렇게 좋은 학교이건만 민단계 학생들은 한국어가 서툴러 웬만해선 이 학교에 들어갈 수 없다.
도쿄 한국 학교를 채우는 학생은 재일 한국인 사회에서 ‘뉴커머(New Comer)’로 불리는 주재원 자녀이거나 통일교 활동을 위해 일본에 간 사람들의 자녀가 대부분. 어느 틈엔가 통일교는 일본 뉴커머의 한 축을 이룰 정도로 재일 한국인 사회를 장악한 것이다. 뉴커머인 통일교는 민단이 하지 못하는 일본 내 한국 지키기를 주도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은 불교와 신도(神道)의 세력이 강하고 기독교 세력은 약한 나라이다. 더구나 한국에 대해서는 문화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어 한국 기독교가 복음을 전파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통일교를 믿는 일본인 수가 40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일본인 통일교 신자들의 헌금이 한국 통일교 활동에 도움이 될 정도라고 하니 그 위세를 과소 평가할 수 없다.
일본에서 뿌리내린 통일교의 위상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는 일본 후쿠오카에서 한 달에 두세 차례씩 열리는 ‘평화통일 한국지도자 세미나’. 이 행사는 통일교측이 비통일교인으로부터 실비 조로 10만원을 받고 모셔가 세계평화와 남북통일 방안 그리고 통일교의 원리를 설명하는 자리다. 통일교 가입을 전제하지 않는데다 비용 부담이 작아서인지 매번 수백명이 참여하는데, 이 행사 비용을 일본 내 통일교인들이 부담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통일교인들은 민단과 총련계의 화합을 위해 두 단체 소속원 수백명을 동시에 한국으로 데려가 임진각 등을 구경시키며 화합을 강조한다.
또 ‘지도자 세미나’라는 이름으로 순수 일본인 수백명을 한국으로 데려가 한국 문화를 알리고 통일교의 원리를 설명하는 행사를 갖고 있다. 이 행사에 들어가는 비용도 대부분 일본 통일교인들의 헌금으로 해결한다고 한다. 통일교는 도대체 어떤 철학과 교리를 갖고 있기에 일본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일까. 통일교측 설명에 따르면 불퇴전의 용기와 정교한 원리 강의가 그 바탕을 이룬다고 한다. 이를 이해하려면 통일교 창시자인 문선명(文鮮明, 86) 총재와 이 조직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선명씨는 평북 정주 태생인데 15세가 되던 해 그의 가족은 기독교로 개종했다.
‘천사가 하와를 타락시켰다’
일제강점기 말기 청년 문선명은 일본 와세다대학 부설 고등공업학교 전기과를 마치고 고향인 북한 지역에 와 있다가 광복을 맞았다. 문씨는 목사 자격을 딴 적이 없다. 그러나 그때 이미 성경을 독특하게 해석하는 관(觀)을 갖게 됐는데, 이것이 훗날 통일교의 원리가 되었다. 그는 북한 땅에서 자신의 생각을 전파하다 1944년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소련군이 북한에 들어와 공산체제를 건설했다. 이때 평양으로 옮겨간 문씨는 개척교회를 만들어 활동하다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북한 사법 당국에 검거돼 ‘사회질서 문란죄’ 등으로 두 번 옥살이를 했다. 흥남감옥에서 그의 인생에서는 세 번째이고, 북한 체제에서는 두 번째인 옥살이를 하던 중 6·25전쟁이 일어났다. 1950년 10월14일 유엔군이 흥남에 들어오면서 그는 흥남감옥을 나오게 되었다. 얼마 후 그는 퇴각(1·4 후퇴)하는 유엔군을 따라 부산으로 내려갔다.
참혹한 전쟁이 펼쳐지는 와중에 부산에 자리잡은 그는 통일교 철학의 근본을 이루는 원리원본을 집필했다. 이 원리원본이 시대 흐름에 따라 보완되면서 통일교의 근본 철학이 된다.
그는 최초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타락함으로써 사람은 선(善)을 지향하는 본심과 악(惡)을 지향하는 사심이 충돌 대립해 평화를 상실하게 됐다고 보았다. 그가 말하는 타락이란 성적(性的)인 타락인데 이 타락은 뱀으로 묘사된 ‘하나님의 종’이 유도했다. 하나님의 종은 글자 그대로 ‘천사(天使)’인데, 천사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심부름꾼인지라 하나님이 자녀인 아담과 하와에게 하는 말을 듣고 전하는 능력이 있다.
천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는 하와를 유혹해 성적 타락을 하게 했으므로, 하와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하와는 본래 상대가 되어야 할 아담을 꾀어 관계를 가짐으로써 최초의 인류는 악의 원천인 사심을 갖게 됐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법도 있는 집안의 처녀 총각이 결혼식은커녕 부모로부터 결혼 허락도 받지 않고 육체관계를 가져 부모 대하기가 부끄러워 가출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자녀가 부모 대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 돼 돌아오려면 이들이 지은 죄를 사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자녀들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부모는 참사랑으로 자녀를 이끌어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통일교는 자녀된 자는 자기 임의로 배우자를 골라 관계를 맺지 말고 정결한 몸으로 있다가 부모가 선택해준 이성과 결혼하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보통의 부모는 하나님처럼 밝은 눈이 없어 자녀의 짝을 제대로 찾아줄 수 없으므로 깨달음을 얻은 문 총재가 짝을 찾아주고 문 총재가 부모로서 이들의 결혼을 축복해주는 합동결혼식을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결혼하기 전까진 절대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며 혼전 순결을 강조한다.
혼전 순결과 가정 강조
통일교가 화목한 가정을 이루라고 주장하는 것은 유학 경전인 ‘대학’에서 말하는 ‘제가(齊家)’와 흡사한 면이 있다. 대학은 사물의 이치를 제대로 아는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올바른 마음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성의정심(誠意正心)’, 그리고 자신을 ‘수신(修身)’ 해야만 비로소 ‘제가(齊家)’할 수 있고, 제가한 자만이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 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혼전 순결은 성의정심이나 수신에 해당하니,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필요조건이다. 2003년 통일교는 순결한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루는 것이 사회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며, 가정당(家庭黨)을 창당했다. 그러나 가정당은 국회는 물론이고 광역 및 기초단체 의회에도 의원을 진출시키지 못 하고 있다.
문 총재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독특한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전쟁을 아담의 자식인 카인과 아벨의 갈등에 비유했다. 성경은 ‘하나님은 카인과 아벨이 제물을 올렸을 때 아벨이 올린 것만 받았다. 그러자 마음이 상한 카인이 돌로 아벨을 쳐죽였다’고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편애가 살인을 부른 것이다. 하나님은 왜 카인의 제물을 거부했을까. 통일교는 ‘카인은 하와가 천사와 영적인 간음(姦淫)해서 낳은 자식을 상징하고, 아벨은 아담과 하와의 결실체를 상징하므로,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아들였다’라고 해석한다. 이 주장을 따르더라도 ‘카인은 간음의 결과로 태어난 것일 뿐 그가 간음(악행)을 한 주체가 아니다. 그런데도 따돌림을 당해 그 결과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이런 점에선 ‘카인도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통일교는 이를 죄에 대한 업보로 해석한다. 업보는 죄를 지은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후손에게도 전달된다는 것이다. 간음이 왕따를 거쳐 살인으로 이어지듯 한번 업보를 지은 사람은 누대에 걸쳐 나쁜 업을 짓게 되고 급기야는 선한 사람을 해친다고 보았다. 문제는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은 함께 살아야 하는데, 악한 사람이 업보로 선한 사람을 괴롭힘으로써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통일교는 이 갈등을 봉합하고 하나님이 축복하는 사회를 건설하려면, 죽은 것으로 상징된 아벨이 부활해 형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명한다. 즉 살인한 자는 그것이 부끄러워 화해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니, 살인을 당한 자가 일어나 살인한 자를 끌어안아야 평화가 생겨난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도 내밀어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과 맥이 통하는 것이라고 통일교는 설명한다.
전쟁은 카인과 아벨의 갈등
통일교는 북한이 공산주의라는 사상을 도입해 전쟁을 일으켰으니, 공산주의가 곧 ‘하와를 꼬여낸 천사’라고 본다. 따라서 공산주의와는 끝없는 투쟁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 꼬임에 넘어가 한국을 공격한 북한 사람은 아담(한국)과 짝이 되어야 할 대상이니 한없는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문 총재가 작성한 원리원본에 들어있는 대략적인 철학이다. 원리원본을 완성한 문 총재는 1954년 3월 서울에 올라와 그해 5월1일 성동구 북학동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했다. 통일교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주요 신도의 집을 원리강의소로 삼아 그가 깨친 사상을 전파했는데, 이때 이화여대 학생들이 그의 독특한 성경 해석에 매료돼 학교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당시는 전쟁 직후인지라 도탄에 빠진 한국을 구해준 미국에 대한 ‘사회적 존경’이 대단했다.
현재 통일교 일본회장을 맡고 있는 오야마다 히데오(小山田秀生, 65)씨도 이 무렵 통일교에 가담했다. 그가 통일교 신자가 된 경위도 드라마틱하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교토(京都)에서 정토진종(淨土眞宗) 계열의 절을 가진 스님이었고 어머니는 예수회 신자였다. 그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성경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강해 도호쿠(東北)대 시절엔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의 학생운동에는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당시는 지금과 같은 한류(韓流)가 없었다. 일본인들은 한국에 대해 문화적 우월감을 갖고 있었는데 오야마다 회장은 어떤 이유로 식민지에서 일어난 기독교(통일교)를 받아들인 것일까.
“식민지에서 나왔다고 해서 그 사상이 본토에서 나온 것보다 못 하라는 법은 없지 않으냐. 최봉춘 선교사는 일본 사람보다도 일본을 더 사랑한 분인데, 어찌 그런 분을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어릴 적부터 일본 사회를 싫어했다. 우리 어머니 집안은 400여 년 전 규슈(九州)의 오이타(大分)현에서 예수교를 받아들였는데, 예수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 때문에 외가는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을 떠돌았다고 한다. 외가는 일본에 대해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았는데 배타적인 사고와 군국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일본은 외가를 박해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러한 일본 사회에 복수하기 위해 큰 종교인이 되고 싶었다. 그러다 만난 분이 최 선교사였고 이어 한국과 국교가 열린 1965년 일본에 오신 문 총재를 만나 이 사상만이 일본을 구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오야마다 회장은 통일교 사상에 완전 동조해 문 총재가 맺어준 일본 여성과 결혼해 가정을 이뤘다. 일본 통일교인들은 섭리상 한국은 아담을 상징하고, 일본은 하와를 상징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들은 그 이유를 지질학에서 찾는다. 지질학 연구에 따르면 규슈와 남부 일본은 한반도에서 떨어져 나온 곳이라고 한다. 하와의 책무는 남편인 아담을 도와 하나님의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어머니 국가가 돼 아버지 국가인 한국을 도와 세계 평화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 일본 통일교인들이 말하는 섭리이다. 그러나 한일간에는 화합보다는 갈등의 역사가 반복돼 왔다. 통일교인들은 아담이 아니라 하와가 일으킨 갈등이 많았다고 본다. 이들은 한반도에서 선진 문화를 갖고 건너온 ‘도래인(渡來人)’ 덕분에 일본 열도의 문물과 문명이 발달했다고 보고 있다. 일본에 문명을 전달해준 한반도 사람들은 일본을 침략하지 않았다.
물론 백제가 멸망한 후 나당연합군이 백제 세력이 옮겨간 규슈의 다자이후(大宰府) 지역을 공격하려 했고, 고려 말에는 여몽연합군 일부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규슈의 하카타(博多) 지역에 상륙했다가 ‘가미카제(神風)’라고 하는 태풍이 불어 후속 지원부대가 몰살하는 바람에 퇴각한 사례가 있지만, 한반도 세력이 일본을 본격적으로 침략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일본은 임진왜란 7년 전쟁과 일제 36년간 한반도를 침략하고 지배했다. 이러한 역사를 통일교인들은 아담과 하와의 갈등으로 본다. 아담으로부터 생겨난 하와가 아담을 돕기는커녕 괴롭혔으니 그 업을 갚아야 한다는 것이 일본 통일교인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아담이면서 아벨이기도 한 한국은 카인(북한의 공산주의)의 공격을 받아 피를 흘리며 둘로 쪼개졌다. 그러니 하와는 카인을 포용할 수 있도록 아담(아벨)을 경제적으로 부흥시키고, 그 아담을 앞에 내세워 세계 평화를 이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천륜으로 두 나라 엮는다
이러한 섭리론을 갖고 있기에 일본의 통일교인들은 한국을 돕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일본 땅에서 일어난 분단’인 민단과 총련이 화합하도록 유도하는 일에도 앞장선 것이다. 아담과 하와를 제대로 결합시키기 위해 일본 여성들이 한국으로 시집을 오고 반대로 한국 여성들이 일본으로 시집가는 ‘천륜(天倫)’을 엮고 있다.
통일교는 천륜을 가장 강력한 인연으로 보고 있다. 부모 자식 관계나 형제 관계 같은 천륜은, 피치 못할 사건으로 등을 졌더라도 결국은 다시 맺어지는 관계로 보고 있다. 6·25전쟁 때 버렸거나 배신을 하는 등 갖가지 사연으로 등졌던 가족도, 수십년이 지나면 과거사를 잊어버리고 서로를 찾게 되는데, 바로 천륜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을 화해시키려면 양국 교인끼리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천륜을 맺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통일교는 사업을 통해서도 한국과 일본을 맺으려고 한다. 규슈 서쪽에 있는 사가(佐賀)현 가쓰라(唐津)시에는 ‘나고야(名護屋)’라고 하는 작은 해안 마을이 있다. 이곳은 전국시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가 조선 침략을 위해 병사를 출병시킨 곳으로 유명하다. 도요토미는 일본 본토에 있는 나고야(名古屋) 출신인데, 조선 침략을 위해 이곳에 와 있을 때, 고향과 한자는 다르나 발음이 같은 .‘나고야’로 정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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