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선교의 아버지 에드워드 아담스 선교사
안녕하십니까 ?
재미있고 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시간입니다.
오늘은 대구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에드워드 아담스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통해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부산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던 베어드 선교사님이 전국을 다니시면서 , 전도를 하시던 중 , 대구를 방문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대구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는데, 특별히 베어드 선교사님의 처남인 , 에드워드 아담스 선교사가 대구땅에 오면서 본격적인 대구지역과 그 부근의 선교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에드워드 아담스 선교사님은 1895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부산선교부에서 2년간 한국어와 지방풍습을 공부하고 1897년 대구 선교부로 파송됩니다.
그는 1898년 자신의 집에서 교회를 시작하는데 , 이것이 대구 제일교회의 시작이 된것입니다. 또한 대구선교부의 책임자로 많은 동역 선교사가 필요하게 되었고, 의사인 죤슨 선교사와 함께 제중원을 설립하여 복음화를 이루게 되는데 , 이 병원이 지금의 동산병원이 된것입니다. 지금의 대구 제일교회 땅과 동산병원 땅과 계명대학 구 켐퍼스 땅은 모두 에드워드 아담스 선교사님의 선교사역 가운데 , 얻은 땅들입니다.
선교사님들이 그 땅을 얻을 수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소개합니다.
선교사님들이 대구 성내에서 사역하는데, 가장 힘들어했던 3가지 S 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Smell 입니다. 선교사님들은 하수처리가 되어있지 않은 환경가운데 살면서 , 냄새로 인해 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또 하나는 Smoke 입니다. 쌩나무를 태워서 밥을 짓고 , 난방을 위해 불을 피우기 때문에 , 그 연기로 인해 많은 고통을 느꼈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Sound 입니다. 서양인만 보면 짖어대는 개소리와 밤마다 무당 굿 소리에 곤혹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님들은 4대문 성안에 사는 것 보다 밖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지금의 동산병원자리와 계명대 켐퍼스 자리는 , 가난한 사람들이 장례를 치루지 못해 몰래 시신을 묻었던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당시 고관들에게도 그 땅이 골치 아픈 땅이었기 때문에 , 선교사님들은 , 쉽게 그 땅을 구입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땅이 대구지역 복음화의 요람으로 남아있습니다.
아담스 선교사님은 26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에 와서, 사역을 감당하던 중, 부인 닐 딕의 죽음으로 큰 아픔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아담스 선교사님은 그 고통가운데에서도 조선 사랑을 이어갑니다.
제일교회내에 남자 소학교를 세워 , 교육선교를 지속하면서, 계성중학교를 세우고, 후에 계명대학이 아담스 선교사님에 의해 세워지게 되는것입니다.
그는 전 재산을 복음전도기금으로 내어놓고, 1923년 대구선교부를 은퇴하기까지 , 근 40년 동안 한국선교를 위해 온 생애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는 4 남 1 녀의 자녀를 두었고 , 그 아들들도 아버지의 조선 사랑을 위해서 한국에서 우리 민족과 아픔을 같이하며 일생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님들은 십자가의 복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많은 것들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대구의 "" 사과 미인 "" 이라는 말도 선교사님들이 사과를 대구에 심음으로 생겨난 말입니다. 그들은 교회와 병원 학교를 세우고 우리 민족을 위해 한 평생을 헌신의 삶을 살고 가신 분들입니다.
동산병원 선교관 앞에 자리 잡은 선교사님들의 무덤은 우리 민족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민족이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증표가 되어있습니다.
기회가 있으면, 서울의 양화진의 선교사님의 무덤과
대구의 선교사님의 무덤을 꼭 방문하여,
그들이 어떻게 ? 무엇 때문에 ? 우리민족을 위해 희생의 삶을 살고 가셨는지를 알아보는, 의미있는 비전트립을 가졌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